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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 학술제 / 5월 민중항쟁의 형상화 - 상흔의 치유는 어떻게 이루어지가, 소종민(언어세계, 1996. 봄…

본문

■ 학술제 / 5월 민중항쟁의 형상화

상흔의 치유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폭력과 학살에 맞선 소설가들의 응전



소종민



  지난 반세기 동안 일어났던 이러저러한 역사적 격변은 이 땅 한반도에 사는 대다수 한국민중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1948년 제주도 4.3 항쟁,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19혁명과 곧이은 1961년 군사쿠데타, 1979년 12월 또 한차례의 군부 쿠데타,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항쟁. 권력을 움켜쥐기 위한 군사행동의 전말에는 언제나 대량의 학살이 뒤따랐고, 응당 그 학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이 땅의 민중들이었다.
  지난해 전 16권으로 마무리 지어진 박경리의 『토지』를 보면 그런 역사과정이 진행된 원인의 일말을 캐낼 수 있으며, 역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을 보더라도 역사가 남긴 피어린 상흔들을 곱씹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굵직굵직한 대하소설들만이 역사과정과 민중들의 고통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단편 소설을 통해 각 역사의 부면들을 드러내고 집약적으로 우리 삶의 고통의 근원과 치유방법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작품들이 속속 우리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 가운데 필자는 현기영, 홍희담, 그리고 정찬 이 세 사람의 작가를 주목하게 되었다.
  소설가 현기영은 장편소설과 여러 편의 중단편설을 통해 제주 4.3항쟁의 전말과 진실을 꾸준히 조명하고 있으며, 홍희담은 80년 광주학살의 상흔이 우리의 정신사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가를 끈기있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정찬의 경우, 이러한 역사의 순탄치 못한 악순환을 정면에서 다루며 그 상흔을 안고 뒹구는 인간 개개인의 정신적 공황상태와 그들의 치유라는 해결에 몰두하고 있다. 비록 이들 못지 않은 치열한 작가의식으로 '폭력 일반'의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작가는 많으나 위 세 작가의 경우는 그들에 비하여 좀더 근본적인 천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비교분석은 이 글에서 전개하지는 않으나 그들의 작품 몇 편에 대한 조명 속에서 그들의 작품성이 충분히 드러나리라 믿는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을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 문학이 '참여정신'을 굳건히 지탱하고 있으며, 문학의 본질에 관계된 '사회성'의 문제를 철학적 고뇌의 차원으로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고 짚을 수 있다.

1. 상흔의 치유를 위한 진혼굿

  정찬은 「황금빛 땅」에서 "삶이 죽음을 향해 열리고, 죽음 또한 삶을 향해 열리는 가없는 정신의 유영 속에서 분열되고 찢겨진 인간의 마음을 위무하면서 본래의 모습, 원형의 모습으로 결합시키는 목소리, 침묵을 끌어올려 소리없는 슬픔, 소리없는 통곡, 소리없는 비명,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직조하는 목소리가 바로 샤먼"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타의 통과제의를 통하여 오감(五慕)을 모두 열고 곳곳의 슬픔을 응축하고, 이를 진혼(鎭魂)의 첫걸음으로 삼고' 있다. '샤먼 Shamail'은 인디안 부족들의 주술사, 혹은 우리의 무당과 같은 존재를 일컫는다. 현기영의 「목마른 신들」에서는 한 심방-즉,무당 그리고 샤먼-의 1인칭 서술에 의해 그 통과의례가 제시되어있다.


  살아 있는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더 강한 호소력으로 나에게 밀착해왔다. 아무리 떼어내도 자꾸만 내 몸에 달라붙는 시신들, 나는 종내 그들을 뿌리칠 수 없었다. 거진 한달 가량 방구들에 누워 골이 터져 나갈 듯한 두통에 시달리며 지냈는데 꿈속에 신칼을 든 어머니가 자주 나타났다. 무병을 앓고 있음이 분명했다. 결국 나는 앞으로도 죽은 자들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팔자임을 깨닫고 그토록 싫어했던 심방의 길로 들어섰다.
                                  - 현기영,「목마른 신들」 67면. (『마지막 테우리』창작과 비평사, 1995)

  위는 4.3 원혼굿을 잘하기로 유명해진 한 심방의 독백을 소설화한 「목마른 신들」의 일부이다. 해방 이후 굴절된 정치일정 속에서 치루어 지게 된 남쪽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구성에 대하여 제주도의 운동세력들은 '1948년 2.7 구국투쟁'을 전개, 경찰서와 선거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이에 대한 정치보복은 군사적 행등으로 감행되었고 속속이 바다를 건너 들어온 군인들과 서북청년단들은 무차별한 대량학살을 벌였다. 그 결과 3만여명의 제주도 민중이 학살되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마무리되었다.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를 강점하던 시기를 온전히 매듭 짓고 하나된 통일국가로써 새 시대를 열어가려 했던 이 땅 민중들의 진로는 일제잔존세력과' 국내의 친일세력, 더불어 새로운 점령자를 자임한 미군정에 의해 무력봉쇄되었다.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는 '굿판'이 이 엄청난 비극을 온전히 치유할 순 있겠는가마는 이런 '원혼굿' 또한 학살이후 40여년간 제대로 열려지지 못한 것 또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소설「목마른 신들」후반부에는 '한날 한시에 죽은 원혼을 진혼하려면 온 마을 사람들이, 아니 온 백성들이 한 자손이 되어 한날 한시에 합동으로 공개적으로 큰 굿을 벌여야 옳다'는 심방의 이야기가 있다 '전대미문의 가장 억울한 죽음이기에 가장 영험있는 조 상신으로서 우리를 보우해줄 것이다'고 하는 심방의 간절한 바램은 슬픔을 딛고 새 하늘을 맞이하고 싶은 절박한 영원이 담겨져 있어 큰 울림을 준다.
  이럴진대, 실제 굿판을 준비하고 굿을 행할 수 있는 '심방'들만이 '샤먼'일까. 현기영의 소설과 정찬의 소설을 들여다보게 되면 공통적으로 '예술가'에 대한 의미를 되묻는 대목들이 자주 제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예를 들어본다.

  "그로토프스키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인간임을 보여주면 나는 그대에게 신을 보여주리라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지금 나는 배우입니다. 무대 위에서 배우의 말은 현실 그 자체입니다. 배우의 몸 속에는 세상 만물이 숨어 있으며, 말은 이 세상 만물을 끄집어내는 도구이자 그 자체입니다. 배우의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며,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으며 세계의 고통을 번역합니다. 환상을 현실로 만들며, 현실을 환상으로 조각합니다.
                              - 정찬, 「슬픔의 노래」, 261-262던. (『아늑한 길』, 문학곽지성사, 1995)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를 작곡한 헨릭 구레츠키를 취재하기 위해 찾아온 유기자와, 구레츠키와의 약속을 잡아주고 폴란드 곳곳을 안내하게 되는 김성균 일행의 이야기로 된 소설 「슬픔의 노래」는 학살과 폭력으로 신음하는 세계와 이에 대응하는 예술가의 노력,그리고 예술이 취해야 할 내용에 대하여 깊이있는 진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의 형벌을 가장 민감히 느끼고 이 형벌을 견뎌야만 하는 예술가,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슬픔의 강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예술가,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사람으로서의 예술가를 이야기하는 헨릭 구레츠키를 통해 그 내용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더불어 연극을 수업하는 박운형에 의해 소개되는 그로토프스키 또한 구레츠키와 일맥상통하다. 장식적 요소가 많은 부유한 연극을 거부하는 한편, 그런 가난과 궁핍을 외형적인 것의 버림으로 삼아 진정한 고통을 발견해 나가는 '고백'의 방식을 통해 관객들과 교류하여 '가난한 연극'을 실험했다는 그로토프스키.
  광주학살 당시 진압군으로서 살인을 저질렀던 박운형과 그의 방황, 그리고 그의 모색. 예술을 통해 영혼과 생명을 되찾고 싶어하는 박운형의 행적들과 그 이야기. 소설 속의 모든 일화들은 예의 위에서 이야기한 '샤먼'으로서의 통과의례와 굿 행위들을 연상케 하고 있다. 샤먼으로서의 예술가. 작가 정찬은 그러한 예술가 상을 제시하고 있고, 스스로 많은 중단편 소설을 통해 그 예술가 상을 몸소 구현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4.3과 제주도 민중의 고통을 형상화함으로서 역사적 진실과 슬픔을 드러내고 있는 작가 현기영에게서도 공통의 '예술적 노력'을 발견함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노력이란 곧, 거대한 슬픔과 일치하려 하고, 진정한 슬픔의 회복을 통해  이 땅의 모든 사람과 영적인 교류를 나누고 싶어하는 인간 본연의 몸부림이란 것을 다시 부연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2. 학살, 그리고 그 후

  40여년 전 제주도에서 있었던 무참한 학살의 기억을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형상화하는 데 주력해 온 작가, 현기영. 그에게서 역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 있는 것일까. 그의 전 작품의 한 귀퉁이 혹은 전체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는 4.3의 기억은 그의 작가적 생애를 송두리째 움켜쥐고 일절 놓지 않고 있다. 그가 1975년「아버지」라는 단편소설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 것은 그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그 처녀작은 김원일의 말처럼 '지나치게 조탁된 언어로 풍경과 사물묘사, 또 심리묘사에 골몰해' 있긴 하지만 작중 소년의 환각 속에는 '손에 쥔 피묻은 죽창으로 앞물을 두들겨 갈래갈래 찢'으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아버지가 있고, 실제 마을이 불탄 그 이튿날 학교 운동장에서 확인하는 공비 시체 한 구가 있다.
  현기영 소설의 전 작품에 걸쳐 4.3의 기억들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분명하고 예리하게 현재의 것으로 부각되며, 그의 문체도 분기에 휩싸여 놀랍도록 생생하며 뜨겁다. 처녀작 「아버지」에서는 물을 헤치며 걸어 나오는 죽창 든 아버지가 불길에 휩싸여 송두리째 타 사라지고, 이제 하얀 뼈들만이 황토에 뒹굴고 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던져져 하얗게 말라버린 뼈들의 뚫린 구멍 속으로 바람소리가 통곡처럼 들린다.
  '형식적 실험과 치열한 현실대응으로써 팽팽한 긴장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한 단편 「쇠의 살」이서도 이 주검이 묘사되고 있다.

잠들 수 없는 주검들
  ‥‥쓰러진 채 화염에 휩싸인 그 떼주검 중에는 돌연 몇 구의 시체가 벌떡벌떡 일어나 앉는 길인데, 그렇게 꼿꼿이 앉은 채 불타는 모습은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것은 학살에 대한 강력한 항의, 이렇게 무참히 죽을 수는 없다고 절규하는 것 같았다.
                                                      - 현기영, 「쇠와 살」, 「마지막 테우리」, 139쪽.

  주검들이 벌떡벌떡 일어서는 묘사에선 숨이 멈출 듯하다. 물론 바로 드러누운 시체들에 휘발유를 부어 불을 당기게 되면 배가 오그라들어 자연히 시체는 일어나 앉게 마련이라는 해설이 뒤따르고 있으나 그런 설명으로만 이 '시체들의 기립'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의 언급처럼 이들은 '잠들 수 없는 주검'들인 것이다. '학살과 폭력'의 의미를 되짚고 있는 정찬의「새」에서는 이 '주검들'이 말하는 바가 무어라 이야기되고 있는지 들어보자.

  피가 사방에서 튀었다. 칼끝이 부르르 떠는 듯한 감각과 함께 작은 생명이 손바닥 속으로 녹아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영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영혼은 몸 어디에선가 흘러내리면서 대검 속에 고이고 있었다. 그것은 생생하면서 구체적인 느낌이었다. 영혼의 또렷한 숨소리가 귓불을 핥고 있었고, 그는 황홀감에 몸을 떨었다. 그 황홀감은 해방감에서 오고 있었다. 돌연하고도 강렬한 해방감, 갇힌 영혼이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희열, 영혼을 위협하고, 짓누르고, 할퀴고, 찢었던 어떤 존재로부터의 자유였다.
                                                                  - 정찬,「새」,「 아늑한 길」, 131쪽

  80년 5월 당시 광주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군인들 중 한 사람이었던 김장수는, 아내가 장롱을 정리하다 발견한 주민등록증에 의해 군복을 벗은 지 7년만에 '피의 기억'을 상기하게 된다. 주민등록증의 주인 박영일을 찾아가 신분을 속여 재차 박영일을 살해하고 돌아온 김장수의 행적이 이야기의 굵은 축을 이루고 있다. 용서받지 못할 행위에 의해 김장수의 영혼은 파탄으로 귀결되고 있다.
  김장수가 처음 80년 5월 광주에서 사람들을 대검으로 찌를 때의 기억은 (위의 인용에서 처럼) '해방감', '황흘감', '희열', '존재로부터의 자유'였다. 절대적인 악이 존재하지 않듯이 김장수 또한 절대적인 악인이 아니었다. 가해자 편에서의 김장수가 '생명'을 인식한 것은 '폭력'을 통해서 였으며, 피해자 편에서의 박영일이 '생명'을 인식한 것은 '폭력'을 통해서였다. 김장수로부터 뇌를 맞아 온갖 정신질환을 앓던 박영일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고통을 견디리라고 맹세한 이후 '으깨어진 고향 사람들의 몸'에서 '찰랑이는 물소리'를 듣게 된다. '흥건한 핏물 속에서' 발견한 '어린 생명의 향기'. 생명의 진실된 의미를 선취한 박영일에게 다시 대검을 들이대는 김장수의 행위를 보면서 우리는 운명에 자유롭지 못한 영혼의 궤적을 확인한다.
  슬픔을 견디지 못한 개인에게 어떠한 파멸이 예비되어 있는가를 소설「새」는 극명히 드러내어 준다. 김장수의 파탄과 더불어 「슬픔의 노래」의 박운형이 '슬픔을 견디는 행위'를 잘 견주어 본다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히 간취된다. 한 사건이 생기게 되면 일반대다수 사람은 그 피해자들이 받는 고통을 헤아리게 된다.
  그런데 은폐된 폭력의 질서에 갇혀 조종을 받고 불가피하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급기야 살인을 피할 수 없는 가해자의 고통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실례로 전쟁은 외교의 연장구단이요, 또 적대적인 국가 간의 불가피한 무력충돌이며, 한 국가 내 국민 전체의 이해에 조응하는 불가피한 무력행위라 하더라도 문제는 그 전쟁에 가담하는 대다수 정사들 개인의 실존은 누가 용납할 것인가 더욱이 권력자의 집권야욕에서 비롯된 무차별 대량학살에 가담한 병사들 개인의 실존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학살자의 편에서 더 큰 폭력 앞에 굴종하여 마찬가지의 폭력을 행사하게 된 개인의 실존은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영영 고립된 개인의 '견딤'으로 해결될 문제인가.
  「슬픔의 노래」에서 작가 정찬은 박운형에게서 그 길을 내보이고 있지만 사실 여전히 수동적인 제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이렇게라도 엄정히 문제의 본질에 다가서려 하고 그럼으로써 문제를 극명하게 제기하고 있다는 점, 어쩌면 작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몫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제껏 '폭력 문제'를 다룬 다수의 작품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가해자들의 정신적 파탄'을 문제화함으로써 '폭력'의 문제를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성격의 것으로, 그리고 구조적 필연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렇게 지금의 현실은 '문제제기자'로서의 작가, 그 이름의 선취를 요구하고 있다. 아래 글처럼 마치 공동(空洞)과 같은 학살의 기억과 폭력의 현존은 우리의 온몸,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초췌하고 황량한 모습으로 인하는 광주에서 그렇게 사라져갔다. 처음에는 단기간의 부재일 뿐 별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공동(空洞)으로 자리잡았다. 영빈은 5.18 이후 죽거나 사라진 사람들이 내뿜은 괴이한 힘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인하의 부재로 인해 확고하고 단순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없음을 느낄 때 그것은 있었다. 형체도 무게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현재의 날카로운 울림들, 이를테면 일상의 잡다한 소리들과 또다른 보이지 않는 조용한 소리들을 들으며 영빈은 살아왔다.
                                  - 홍희담,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창작과 비평」, (95년 여름), 281쪽

3. 희망, 그리고 운명의 직시(直視)

  암흑의 시대를 다루는 정찬의 소설 가운데, 비교적 최근의 사실에 근거한 「아늑한 길」에서는 '94년의 시점과' 79년의 시점이 상호교차하며 시대의 어둠과 아직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길을 이야기한다. '나'는 79년이 저물어가는 무렵, 강의실에서의 일화를 다시금 기억하고 있다. 교수에게서 샤갈에 대한 어느 미학자의 산문을 강의받다가 강독을 지목받아 일어나 "사,사,샤,가,가,갈의… 데,데,데‥‥소,소,속에는…"하고 지독하게 더듬거리던 김인철에 대한 기억 .
  알 수 없는 정적이 흐르는 길거리에서 다시 김인철을 만나고 그와 여관에서 술을 마시며 밤을 보냈던 기억들 그리고 그때 김인철은 '아람어' 이야기를 한다. 예수가 매일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가르친 말,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외친 말인 '아람어'는 유대민중의 말이었다는 설명을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의 날개‥‥ 구름 속에 떠있는 여인... 흰 새... 야곱의 숨소리... 그것은 아람어였습니다. "
  소설 속에 등장하는 김인철의 아람어에 대한 해설은 어떤 유토피아적 세계상의 재현을 꿈꾸는 행위처럼 읽힌다. 깊은 밤에도 그리고 한낮에도 오직 어둠뿐인 단색의 시대에 김인철이 꿈꾸는 샤갈의 그림같은 세상. 이상향의 현실적 재현이 불가능한 지점에서 인간이 이러한 초현실적 상상의 세계로 몰입하는 것은 응당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상과 이상의 대립 또는 현실과 현실의 대립, 그리고 연이은 싸움에서 한편이 승리를 거두고, 한편이 패배하는 경우는 인간 삶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거나 윤리적 판단의 영역에서 보다 숭고한 가치를 지닌 편이 패배로 귀결될 경우, 추리는 그것을 비극이라고 부른다. 김인철의 꿈과 나의 현실은 패배했으며, 예의 작품은 그 비극미를 예리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 현기영의 근작 단편인 「마지막 테우리」의 마지막에 눈보라의 급류를 헤쳐 나가는 고순만 노인의, 목숨을 건 투쟁은 비장하다. 기억도 먼 40여년 전, 토벌대에 이끌려 우연히 찔러준 구덩이에서 발곁된 노부부와 그 손주들은 그날 무참히 학살되었고, 이 소테우리 노인은 마음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경우는 물론 다른 것이나, 정찬의 소설 「새」에서 김장수가 받는 고통과 흡사하진 않은가. 김장수는 되려 박영일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갔다. 그러나 고순만 노인은 꿋꿋이 견뎌내고 있다.

  바람에 밀려 발을 자꾸 헛디뎠고 얼굴을 후려치는 눈보라에 숨쉬기도 어려웠다. 얼마 못 가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매와 불과 얼음의 시련이 남겨놓은 옛 상처들을 추위가 매섭게 침범하고 있었다. 동상, 화상 입었던 자리들이 마비되고 개머리판이 찍힌 살 속 뼈에 닿은 상처들에도 격렬한 통증이 왔다. 혈관이 경직되어 오금이 저리고 머리가죽이 바싹 오그라들었다 불과 십 분 거리인데도 눈보라 속에 희끄무레하게 서 있는 솔숲은 파안의 세계인 듯 아늑하게 보였다. 소 고삐 타래가 어깨를 천근 무게로 짓눌러댔다. 광란의 들판에서 노인은 풀들과 함께 몹시 흔들렸다. 천지가 온통 흰 눈인데, 그 가운데에서 오직 노인의 흙빛 얼굴만이 유일한 색이었다. 아직 눈으로 덮이지 않은 한 줌의 흙, 그러나 노인은 온몸으로 버팅기며 눈보라 속을 꿋꿋이 헤쳐나갔다.
                                                  - 천기영, 「마지막 테우리」, 『마지막 테우리』. 23쪽

  더불어 「아늑한 길」의 김인철과 '내'가 간직한 꿈들에 비해 고순만 노인에겐 꿈이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어찌 이 노인에게 꿈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노인에게는 이미 소 한 마리 한 마리, 그리고 제주의 자연 한 폭 한 폭이 꿈이며, 곧 현실이다. 아픈 현실을 견디어 나가면서 그는 몸으로 꿈을 구현하는 사람인 것이다. 학살과 폭력의 고통을 무마할 수 있는 것은 실상 아무 것도 없다. 죽은 자는 그저 죽었을 뿐이다. 그러나 산 자에겐 책임이 따른다.사랑하는 이들이 무참히 죽은 고통을 스스로 견뎌야 하는 의무와, 산 자들을 폭력에서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폭력과 학살을 뿌리 뽑을 것인가.

4. 슬픔의 종언을 위하여

  그녀들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뒤쪽에 도시락 가방이 꽁꽁 묵어져 있었다. 그가 힘껏 페달을 밟았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달려갔다. 증기기관차의 김처럼 입김을 씩씩 뿜어내며 힘차게 달려갔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작업복 자락이 펄럭였다. 점점 멀어지면서 새벽 여명 속에 옷자락의 펄럭임만이 보였다. 수없는 펄럭임이었다 그것은 깃발이었다.
                                                    - 홍희담, 「깃발」, 『창작과 비평』 (88년 봄), 220쪽

  대량학살아 자행되던 80년 5월의 광주,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소설 「깃발」의 마지막 한 단락은 위와 같이 맺는다. 여기서 '깃발'은 학살행위의 중단, 정치적 억압의 정지, 억압구조 일반의 철폐 모두를 실현 가능케 할 노동자 투쟁의 상징물이다. 굴절된 역사과정의 꼭 단면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서 미래의 한가닥 희망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대안으로 제시한, 소설「깃발」은 발표 당시 많은 논란을 야기한 바 있다
  과연 우리의 꿈은. 우리의 희망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의해서만 실현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아무튼 논란의 전달과는 독립적으로 작가 홍희담의 이 작품은 많은 문학대중들에게 '광주 문제'라는 단어로 집약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현실과 현대사에 대하여 새로운 생각,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1988년 봄 「깃발」을 발표하고 나서 7년 뒤, 작가 홍희담은 역시 '깃발'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 한편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두번째 깃발은 처음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빨래를 널 때마다 영빈은 긴 장대에 빨랫줄을 늘어뜨릴 수 있는 마당 넓은 집을 그리워하곤 했다. 색색의 옷가지들과 풀 먹인 하얀 홑청이 햇빛에 눈부시게 빛나고 바람에 나부끼는 정경… 햇빛과 바람에 노니는 옷가지와 이불 홑청은 상쾌 울림을 가져다 주는 일상의 작은 깃발이었다.
                                    - 홍희담,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창작과 비평』 (95 여름), p.232

  '실명소설'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는 7년전 광주항쟁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의 현재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영빈에게는 어린 시절부처 단짝이었던 인하와 그녀의 애인이었던 형철 오빠(그러나 그는 고문에 의해 뇌수를 다쳐 16년째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다) 등 피붙이같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
  그런 오늘에는 '햇빛'에 빛나는 '이불호청'의 펄럭임마저도 의미가 된다. 아픔과 슬픔, 더욱이 거대한 집단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빚어진 충돌에서 생겨난 그것은, 고유의 해결지점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해결의 실마리가 멀어져 가는 듯이 보이는 오늘에 작가 홍희담의 작품에 등장하는 '광주사람들'의 소망은 왜소해 보일 정도로 초라하며 작다. '노동자들의 작업복'의 수많은 펄럭인 속에서 내일을 꿈꾸었던 이들이 이제는 '이불호청'의 펄럭임조차 아쉽다. 이 또한 비극적이라 할 것이다. 이를 단초로 오늘의 '광주사람들'이 겪고 있는 슬픔을 직시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슬픔에 짓눌려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깃발」의 작가하면 이를 견뎌내야만 한다는 점을 주문하고 싶다. 이 땅을 사는 우리 모두가 이 슬픔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에 분명한 답은 없다. 다만 이 비극을 넘어서 아직도 우리의 곁에는 수많은 '고순만 노인'이 존재함을 안다. 인간의 운명을 넘어서, 슬픔의 종언을 향하여 꿋꿋이 문제제기하는 작가들이 있고,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 '찰랑이는 물소리'처럼 다가오는 생명의 개안, 그 근원성의 탐구, 예각화된 현실진단의 소설과 삶이라면 우리는 다시 새 장을 열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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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종 민 : 1965년 생.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