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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항쟁의 소설화, 미완의 탑. 방민호(언어세계. 1996. 봄)

본문

광주항쟁의 소설화, 미완의 탑



방민호(문학평론가)



  1

  5.18 문학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침묵이 필요하다 오랜 말없음 속에서 슬픔을 가라앉히고, 분노를 삭이고, 사랑을 잠재워야 한다 이 도든, 깊은 감정의 응어리들이 더 단단해지고 그만큼 더 작아지다가 마침내 이성의 빛으로 변화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발언이 섣부른 것이 되지 않기 위해. 결론이 시간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지로 가득찬 논리는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절실히 원했다는 갈망이라도 보여주기 위해 그러나,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긴 침묵도 5.18 문학을 논하기 위한 준비로는 불충분하다. 그 문제에 관한 한 어쩐 숨 고름도 투명하게 빛나는 이성의 빛에 도달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그 소설들에 대해, 그것들이 이룩한 것과 이룩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두려움을 수반하지 않고는 그 처절한 역사와 대면하려 했던 작가들의 고뇌의 산물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렇다. 이 두려움이 있기 전에 먼저 작가들의 두려움이 있었다 역사의 전제 조건인 사람들의 삶이 부정당한 역사 앞에서, 자신의 삶을 부정하면서까지 역사를 만든 사람들 늪에서 그들은 처음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비논리를 설명할 수 있는 방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현대 사회라는 곳에서. 다른 도시들과는 통신 및 교통의 어떤 연락도 차단 당한 채 학살당하고 저항하다가 쓰러져 간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진실이 거의 철저히 은폐되었고, 학살의 주범들이 버젓이 권좌에 앉아 있던 탓에 광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삶을 자신이 원했던 것으로부터 비껴 나가게 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의미했다. 광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문학적 삶을 건 위태로운 비약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악한 상태이서라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나마 그들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을 향해 절규하는 광주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얼었다. 차마 고개 돌려 볼 수 없는 비정한 사실들 앞에 고개 돌려야 한다는 것, 비록 '고개 들린 하나님'이지만 신을 갈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5.18을 소설화한 작가들의 가장 근저에 놓인 문제였다. 임철우가 「봄날」(84년)을 쓰고 윤절모가 「밤길」(85년)을 쓴 것은, 그들이 신의 이름을 빌려 광주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소설들이 광주 문제를 형상화한 거의 처음에 해당하는 작품들일 수밖에 얼었던 이유를 깊이 있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광주는 작가들로 하여금 신을 갈구하는 행위들만을 포구하지 않았다. 비록 시대적 인식의 한계에 갇힌 인간의 이름으로나마 광주는 은폐되고 왜곡된 진실의 규명을 요구했다 광주를 위해서, 그것으로 표상되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정치는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었고, 그리하여 난자당한 진실을 파치치고, 누더기처럼 기워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문학의 몫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석영이 소설이 아니라 기록물의 형식으로라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85년)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김종인이 이미 83년부터 광주를 소설로 쓰고 싶어 했고 그로부터 몇 년이 걸렸지만 마침내 『무등산』(88년)을 쓰고야 만 것도, 홍희담이 「깃발」(88년)을 쓰고 박노해가 「광주무장봉기의 지도자 윤상원 평전」(89년)을 쓴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깨어진 진실을 복원해라 한다는 것, 이것은 광주에 대한 이야기의 또 다른 근원적 동기다.
  시간의 흐름은 광주를 이야기하는 또 다른 두 가지 방식을 가능케 했다. 그 하나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겨진 살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전적으로 새로워진 현실 위에서 광주에 새로운 이념적 지평을 부여하는 것이다 전자의 작업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정도상의「십오방 이야기」(87년), 이순원의 「얼굴」(90년), 공선옥의「목마른 계절」(93년) 등이 있으며, 정찬의「완전한 영혼」이나 박혜강의「미완의 탑」(95)은 그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은 광주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으며 왜 기억되어야 하는지를, 또 광주는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십오방 이야기」「얼굴」「목마른 계절」 등이 「봄날」이나「밤길」이 보여주는 살아남은 자들의 그 이후의 삶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던 「완전한 영혼」이나 「미완의 탑」 등은 「깃발」이나 『무등산』 등이 보여주는 복원 및 재해석 작업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뒤의 두 작품은 90년대 들어 가속화된 이념적 지향점 상실의 위기를 광주로 되돌아감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으로 위치 지워질 수 있을 것이다.

  2

  광주는 두엇보다 공포의 이름이다 달리기의 늦고 빠름이, 남을 것인가 아닌가의 선택이, 그 찰나의 순간이 살과 죽음을 가른 그곳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들은 살아 남았다. 그 죽음이 어디로부터, 무엇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묻는 일은 그러므로 어쩌면 사치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눈 앞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 죽이는 자의 배후에 있는 자를 떠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진정한 적은 눈에 보이지 않고 다만 참혹한 대량 살상극만이, 그 무대 위에선 자신과 다른 사람들만이, 그 곳을 지배하는 공포만이 보일 뿐이다.
  이 공포는, 인간들 하나하나의 개별적 삶은 무한한 우주의 침묵 위에 피어난 꽃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서 온다 이 '흔들리는 존재의 가지 끌에서' 팔랑하고 떨어져 나왔을 때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의 세계인가, 아무도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비논리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유추하고 판단하고 확신할 뿐이다. 그러나 확신조차도 공포의 존재를 완전히 무화시키지는 못한다. 때로는 사랑이때로는 증오가 그것을 극복하게 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우리들 곁에 언제나 존재하며, 바로 그 차원이 신에 대한, 인간의 갈구가 놓여 있다. 신은 세속적으로는 지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공포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광주의 그날들 속에서 사람들이 간장 먼저 직면해야 했던 것은 바로 그 극대화된 공포였다.
  그러나 공포는 신의 영역시 존재하지만 그 공포에 대한 방식은 인간의 것이며, 바로 그 자리에 죄의식과 부끄러움이 놓인다 어떻게 나는 살았으며 그는 죽었는가. 왜 나는 삶을 택했으며 그들은 죽음을 택했는가.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문제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임철우의「봄날」이, 윤정모의「밤길」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죄의식, 부끄러움의 문제다.
  「봄날」의 상주는 광주의 마지막 날 새벽에 죽음을 당한 명부 때문에 괴로워 하다 정신 이상으로 입원한다. 상주는 그날 "명부가 애타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빤히 들었으면서도 자신을 꼼짝 않고 이불 속에 누워 있었노라"(『꽃잎처럼』351쪽)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 말에 따르면 그 날 새벽 누군가 집 대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던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명부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상주의 식구들은 무서워서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고 그때 오히려 상주는 뒷방에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상주는 확실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혼자 괴로워하다 정신 이상에 이르고 만 셈이다 만약 상주가 "독실한 예수쟁이"(364쪽)가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는 임철우의 또 5.18 소설인 「직선과 독가스」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거기서도 소심한 단화가인 주인공은 시국에 풍자하는 만화 몇 편을 그리다 정보기관에 끌려갔다 온 후 정신 이상에 빠져들고 만다. 「봄날」을 그 작품과 구별지어 주는 것은 상주가 독실 근근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며, 이로 말미암아 명부의 죽음을 아벨의 죽음으로 환치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여, 나는 당신을 배신했습니다. 첫 닭이 채 세 번을 울기도 전에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가리우고 입을 쑤셔 닫아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 더러운 살덩이를 떨고 있는 그 시각에 내 집 문전에서는 죄 없는 아벨의 머리가죽이 생채로 벗기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356쪽). 명부는 곧 아벨이며, 그날  새벽 상주의 집 대문을 두드리던 사람은 명부가 아니래도 아벨이다. 그러므로 상주를 미치게끔 한 것은 단순히 명부의 죽음이 아니라 형체 아벨로 표상되는, 명부와 같은 광주 사람들이 저항 끝에 죽음을 당하고 있던 그 날 그 새벽에 뒷방에서 삶을 구걸하고 있었다는, 그 죄의식 때문이다.
  「밤길」에서도 그러한 죄의식은 핵심적인 주제이다. 역시 마지막 날 밤 요섭은 신부와 가깝다는 이유로 세상에 진실을 알려 달라는 동지들의 뜻에 따라 광주를 떠난다. 그러나 요섭은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떳떳한 것으로 치부할 수가 없다. "그들은 죽었어요. 모두가‥‥‥ 그런데 난 비겁자가 되었잖아요. 족보에도 없는 비겁자‥‥."(『꽃잎처럼 347쪽」) 동지들은 도청에서 빌딩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만 그 곳을 빠져 나왔다는 것, 아무리 그것이 동지들의 뜻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삶에 속해 있고 그들은 죽음에 속해 있다는 것, 이것은 요섭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부끄러움 그 자체다. 신부는 요섭의 임무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임을 상기시키며 그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런 그 또한 도청을 빠져 나올 때 자신의 탈출 행위가 과연 "출애굽인가, 정녕 그러한가"(346 쪽)를 스스로에게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에 대한 경개와 신의 음성의 전달을 사명으로 하는 그조차 죄의식의 심연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밤길」은 「봄날」과는 달리 신부의 생각과 음성을 빌어 그 캄캄한 심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탈출, 즉 삶의 선택을 그것으로 끝내지 않는 것이다. "요섭아, 우리도 지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있는게 아니란다. 거기에도 장벽은 있다. 그 장벽을 깨뜨려 달라는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진거야. 우린 그걸 해내야 돼 비록 이 밤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해도 이젠 서둘러야 한다."(347쪽). 살아남은 자의 나머지 삶 전체를 걸어 동지들의, 형제들의 생명을 유린한 자들과 싸우는 것, 이것만이 죄의식으로부터, 부끄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이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죽고 산다는 것은 언제나 인간 윤리의 최고 기준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광주는 지금도 우리 문학에 이러한 문제를 더 깊이, 더 전면적으로 파헤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5.18 문학은 바로 이러한 점들에 천착할 때 위대한 문학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3

  이미 앞에서도 지적했듯 정치가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할 때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도구로만 기능할 때, 문학이 정치의 몫마저도 부당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문학은 공식적인 역사가 죽여버린 진실을 부활시켜 내는 숭고한 사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가 모든 것이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대에 청치적 문학은 그 자체로서 비난받을 어떤 이유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문학은 정치에 의해서 온전히 지배되어서는 안된다 정치의 논리가 문학의 논리를 완전히 지배해 버린다면 문학은 더 이상 문학으로서 기능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인가. 그러므로 문학과 정치의 긴장을 추구하면서도 문학편에 서는 것. 정치를 통과하여 문학의 경지에 이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문학이 이루어내야 할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깃발」과「무등산」을 논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전제를 이룬다.
  「깃발」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80년대 후반에 싹트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깃발」이 씌어진 88년 당시에는 사회주의는 아직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 세계를 표상하는 추상적 기호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풍부한 육체를 지니고 있지 못한, 뼈대만을 세운 집에 불과했다. 그 이후에 이루어진 사회주의 세력의 다기한 분화 과정은 이를 증명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진보적 청년들은 자신들이 이 불합리하고 야만스러운 세계를 구원할 수단을 손에 넣었자고 생각했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이었다. 노동자 계급의 시각은 억압과 착취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며 세계를 구원할 수 있게 해 줄 것이었다 당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이렇게 단순화하는 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누를 끼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사실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지.
  「깃발」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작가는 노동자 계급의 시각을 견지함으로써 광주항쟁을 그때까지보다 훨씬 더 전면적으로,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그 기간 동안 패배감에 빠져 도시를 빠져나가 있던 학생운동권 출신 강학 윤강일의 고백 형식을 빌어 단적으로 드러난다. "커다란 획이 그어지고 지나갔어"(「꽃잎처럼」290쪽). 여기서 그 커다란 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 계급이 민중운동의 핵심적 주체로 부상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깨달음의 배경에는 자기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각성한 노동자, 형자의 존재가 놓여 있다. 도청 앞과 분수대 사이에서 형자는 순분에게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 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269쪽)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는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실제로 광주 항쟁의 사망자 가운데 노동자들이나 도시 빈민들이 대다수를 형성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 형자의 존재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이라 할 수만은 없으며, 따라서 그녀를 통해 광주항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는 음미해 볼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깃발」은 그러한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의 시각이라는 문제의식에 치우친 나머지 광주를 또 다른 방향에서 일면화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살 수 있다. 다른 광주 소설들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지역 문제나, 「봄날」「발길」등이 제기한 주의식에 패한 천착을 이 작품은 거의 보여주지 않거나 단순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이 작품이 정치적 담론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판단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문제성은 바로 이 점에 있으며, 이 작품을 둘러싼 이른바 민족문학 주체 논쟁의 주요한 쟁점 역시 이 점에 있다. 노동자 계급의 시각을 취하고자 했던 이 작품의 의도는 매우 신선한 것이었으며, 쟁점 역시 여기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광주의 진실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부합의 문제는 또한 리얼리즘의 개념 문제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80년대 후반 진보적 문학의 창작적, 비평적 실천의 공과를 논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광주항쟁의 소설적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김종인의 『무등산』은 또 다른 문제를 던진다. 프로 작가의 산물이 아니어선 지는 몰라도 작가는 작품 곳곳에서 미숙성을 드러내고 있다. 대사와 대사 사이에는 붙필요한 문장들이 많이 끼워져 있으며, 이야기 전체의 진행이 우연적 요소에 의해 너무 많이 지배되고 있다. 또한 비극미와 숭고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멜로드라마의 요소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부담감을 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5.18이라는 정치적, 역사적 격변을 소설화하는데 있어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특히 항쟁 과정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투쟁하지만 결국은 삶과 죽음의 각각 다른 세계 속에 놓이게 되는 명규와 은애의 사랑,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믿었지만 아들 은호의 죽음을 계기로 적극적인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정동준 교수의 내적 갈등.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깊이 간직한 외과 의사로서 광주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최박사의 존재, 장교로서 광주 진압에 내몰리지만 결국은 민중의 편으로 돌아서 죽음을 맞는 김만수의 결단 등은 이 작품을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감히 말한다면 약간의 개작으로도 이 작품은 정치적·역사적 문제가 어떻게 문학의 문제로 깊이 있게 수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등산』 또한 앞서 말한 여러 단점들로 인해 광주가 요구하고 있는 역사적 진실의 복원에 충분히 접근하고 있는 것이라 보기엔 많이 미흡하다. 5.18이 어떤 근원적 배경들을 지니고 있는지, 그것이 그토록 처절한 비극이 될 수박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하는 등등의 문제들은 여기서도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다. 광주항쟁의 짧은 시간적 순서를 따라 형상화된 탓에 이 작품은 지역문제, 계급문제, 외세문제 등 중요한 문제들을 전면적으로 다를 수 없는 구조상의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결국 5.18의 소설적 복원 혹은 풍부한 재해석이라는 문제는 아직까지 우리 문학의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다. 6,25가 그렇고 일제시대가 그렇듯 광주 또한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만 소설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생명력을 지니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4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시간이 남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다. 잠시, 그들에게도 희망이라는 단어가 실감있게 다가온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들의 것일 수 없었다. 지금도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정부가 학살의 주범들을 재판정에 세우고, 언론은 그들의 죄악을 떠벌리기에 정신이 없지만, 몇몇 진지한 예외들을 제외하면 그것들은 대체로 광주를 진정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루 빨리 그것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것이다. 자신들의 영화를 위해 광주를 제물로 삼는 일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청산 작업에는 민중 역량의 성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 또한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민중 역량이라는 것은 광주를 민주주의와 자유를 상징하는 전국민의 성지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은 못되었다. 오히려 광주는 왜곡된 정치 구조 속에서 호남인들만의, 소수 투철한 민주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만의 성소로 왜소화되고 있다.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광주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광주에 '연루된' 사람들의 자존심을 훼손하고, 죽은 이들의 정신을 헛되이 빛내면서, 세상은 광폭한 자본의 논리 속에 더 단단히 얽혀 들고 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가치 있는 일인가 하는 물음들은 철지난 넋두리들인양 치부되고 있는 세상, 과거에 연연해서 청승 떨지 말라는 세상이다.
  『목마른 계절』은 바로 이러한 상황의 산물이다. 어릴 적 열차사고로 다리를 잃었고,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참전했던 애인마저 죽어버리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미스 조의 모습은 "만화방창호시절, 문민시대의 위대한 신한국"(『꽃잎처럼』 39쪽」의 대두가 광주와 광주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이 뛰어난 단편을 통해 살아남은 이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를 선민하게 보여준다.

  미스 조의 목소리. 나는 확실하게 미스 조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느꼈다. 그녀의 딱딱한 플라스틱 다리가  내 등을 툭특 차고 있는 것을 죄가 있다면 살아 있다는 것을. 살아남음이 죄라구. 싸늘한 추위가 내 등 뒤를 흟고 지나갔다 (38쪽)

  그러나 살아가야 한다. 견뎌내야 한다. 세상은 아직 한 번도 진실의 투명한 승리를 보여주지 않았지만 긴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긴 기만의 시절이 지나가면 좋은 세상이 오리라 믿어야 한다. 작가가 나로 하여금 미스 조의 죽음을 알게 하고도 몇 장을 더 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미스 조는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짊어질 힘을 갖지 못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영구임대 아파트의 둘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이 강렬한 메시지는 이 작품을 단순히 광주 소설이라는 범주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 훌륭한 단편으로 만든다. 삶의 처절한 고통만이 선사할 수 있는 생명에 대한 외경에 이  작품은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광주의 피해자들에게만 남겨진 것이 아니다. 가해자들에게도 시간은 펼쳐져 있고 그들 또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도대체 누가 진정한 가해자인가 하는 것이다. 이순원의 단편「얼굴」은 이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7공수 출신의 김주호는 밤마다 광주를 다룬 기록물들을 보며, 거기에 자신의 얼굴이 나와 있는지를 확인한다. "보던 볼 수록 그 속 어딘가에 금방이라도 총을 겨냥하고 있거나 곤봉을 휘두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튀어나올 것만 같"(「꽃잎처럼」 108쪽)다. 이 광주의 기억으로 인해 그에게는 사랑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방식으로나마 광주가 조금식 복권됨에 따라, 사람들이 이제는 신군부가 틀렸고 광주인들이 옳았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감에 따라 그의 두려움은 자꾸만 증가된다. 작가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를 통해 그와 같은 이들 또한 물리적 가해자였을망정 정신적으로는 피해자였다고 말하고자 한다.

  광주에 갔었어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때 우리는, 나는 그랬었는가. 그리고 이런 사진들을 보면서도 우리가 또 다른 정신적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언젠가 그들은 '폭도'의 누명을 벗고 복권되어도 우리는 영원히 그러하지 못할 것이다. 어둠과 광기, 누가 우리에게 그러한 살육이 우리의 유일한 임무인 것처럼 허락하고 강요하였던가. 그리고 그때 우리는 그들을'꼭 죽여야 할 어떤 절실한 이유가 있었던가 턱없이 끓어 올랐던 적의와 적개심, 내가 선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인가. 그들을 부른 조국과 날 그 자리로 끌어내 부른 조국은 어떤 조국들인가.(135쪽)

  여기서 우린 누가 그 비극의 진정한 가해자였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이 기소한 자들이 그들인가. 기소되지 않았지만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자들까지 인가. 불행히도 "어둠과 광기"의 편에 설 수밖에 없던, 김주호와 같은 자들까지 인가. 혹은 그러한 진압에 박수를 보냈거나, 전두환과 노태우의 집권에 일조를 했거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금도 역사적 진실의.편에 서지 않으려는, 김주호의 어머니 같은 사람들까지인가.
  김주호의 어머니는 광주에 투입된 7공수 출신의 아들을 둔 탓에 지금도 전라도라면 이를 갈고, 5.18을 다룬 프로를 보면서도 결코 데모대 편에 서지 않는다. 그녀를 통해 작가는 지역차별 의식과, 추상적 국가의식, 즉 내재화된 전체주의적 사고가 결합된 정치적 폭력의 모습을 드러낸다 호남 지역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편견은 5.18 내란의 또다른 근원적 동기가 아니었을까.「목마른 계절」에서의 현순씨를 통해 드러나는, 광주인들의 김대중에 대한 절대적 지지는 그러한 차별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불행히도 우리 소설은 우리 사회에서 계급 문제'만큼이나' 갈등과 반목의 증대한 원인이 되고 있는 지역 차별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윤리적 문제 아닌가. 우리 문학은 왜 이런 증대한 문제들에 무관심한지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오직 「얼굴」이나 「목마른 계절」과 같은 몇몇 작품들만이 그것을 단편적으로나마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보아도, 5.18의 가해자라는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심각하고 복잡한 윤리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는 가해자이자 피해잔인, 매우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형의 삶을 보여준다. 최후의 진압 전날 밤 도청과 전일빌딩에 설치된 폭발물과 엘엠지 기관총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받고 투입되었던 만복. 그는 빌딩에서 항쟁에 참가한 동생 만수를 만나지만 소대장은 동생을 쏘아 죽여버린다. 그렇다면 만복은 5.18의 가장 큰 피해자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공수부대 원으로서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5.18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다 무의식 중에 소대장을 닮은 사람을 죽여 감옥에 들어온다. 감옥에서 그는 운동권의 소내 투쟁을 회의적인 눈으로 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원태로 표상되는 운동권의 투쟁에 공감하게 된다.
  이 작품은 광주와 80년대 운동의 연속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이 작품은 만복이라는 인물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만복이라는 인물은 소대장의 살인 행위와 만복 자신의 살인행위가 지닌 의미를 심층적으로 파헤칠 수 있는 상태에 있지 못하다. 무의식 중에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보아 그는 거의 정신질환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 마지막에 보이는 만복의 변화, 즉 운동권의 소내 투쟁에의 그의 동조는 진정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만복은 그런 상태의 인물로 설정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동생의 죽음, 즉 소대장의 학살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훨씬 더 치열하게 성찰하는 인물이어야 했다. 이것이 살아남은 자로서의 그의 삶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87년에 씌어진 것이었고 당시는 5공 정권에 대한 전국인적 항거가 절정에 달했던 때였다. '적'과 '우리'의 구별이 뚜렷해 졌던 시기, 「십오방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해서만 적절히 이해될 순 있다. 공수부대원이었던 만복이 뚜렷한 내적 동기 '없이' 원태의 투쟁에 동조할 수 있도록 그려진 것은 이러한 시대 상황의 산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갖는 한계는 작가가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로서 살아남은 만복의 비극성에 걸맞는 이후의 살을 보여주지 못했음에서 기인한다. 광주를 현재적인 것으로, "현재진행형" (「목마른 계절」)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은 자들의 삶의 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필요한 것이다.

5

  80년대 변혁운동은 근본적으로 광주의 산물이다. 광주로 인해 지식인들과 민중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적 폭력의 실체를 뚜렷이 인식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직접적 행사자들의 배후에 놓여 있는 사회적 불평등의 구조에까지 인식을 심화 시킬 수 있었다 80년대 이전에도 이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사회 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추구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노력은 민중들과는 연락이 차단된 소수 집단의 투쟁에 머물러 있었으며, 집권 독재 세력의 영속적 집권을 위한 훌륭한 사냥감으로 희생되기 일쑤였다. 80년대 변혁 운등은 이들의 정신을 일면 계승하고 있지만, 광주항쟁이하는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적'은 너무나 뚜렸했다. 부모와 형제, 동포를 살륙한 광기와 폭력 앞에서 투쟁은 절대적 명제가 되었다. 그것은 성스러운 것이었고 순결한 것이었다. 군부 독재 세력의 광기와 폭력이 매일같이 신문과 방송에 알몸으로 등장하고 있었기엔 투쟁의 대의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었다. 있을 수 있는 의혹은 오직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이 의혹이 강을 넘어선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던 이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이 남았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념의 필요성은 매우 절실했다. 오직 싸워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루쟁이 심화되면 될수록 광기와 폭력이 대항하는 올바르고 적절한 저항 이념의 필요성은 매우 절실해졌다. 사회주의 각 현실적인 저항 이념으로 확산되었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절대적으로 신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의 다른 이름으로 채택한 사회주의가 현존 사회주의이며, 현존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재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막 자신들의 사회주의 이념을 보다 이론화하고, 조직화하려 했을 때 현존 사회주의의 조종이 들려왔고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한 사회주의 속에 깃든 전체주의적 요소들을 비로소 느꼈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사회주의 자들은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한 번도 본격적으로 실천해 보지 못했기에 무엇을 어떻게 반성해야 하는지도, 무엇이 새로운 진보적 이념의 내용으로 되어야 하는지도 불분명했다. 90년대는 이미 절반이 지나버린 지금도 이 문제는 역시 커다란 난제로 남아있다. 「완전한 영혼」이나 최근에 발표된 「미완의 탑」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저항 이념을 찾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80년대가 근본적으로 광주의 산물이었기에 정찬이나 박혜강의 시도 또한 광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완전한 영혼」에서 작가는 지성수라는 매우 신뢰할 만한 운동권 활동가를 통해 80년대 운동에 대한 반성 및 새로운 이념적 지평의 제시를 시도한다 물론 이야기는 광주항쟁 당시 청각을 잃은 장인하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관심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그것은 지성수의 새로운 변혁 이념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 구실에 만족한다. 지성수는 내게 5.18 당시 자신을 구해준 장인하라는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가치를 말해준다. 그에 의하면 장인하는 "완벽한 무사상적 인간"(『꽃잎처럼』 93쪽), ·'식물적 정신·'(94쪽)의 소유자다. 장인하는 "완벽한 무사상적 인간, 악의 힘을 알지 못하는 인간, 혼돈과 광기와 모순으로 가득찬 세계를 볼 수 없는 인간(93쪽)이자, 악이 가하는 고통에 식물적으로 반응하는, 즉 "모든 고에이 순응하는 식물'「(98쪽)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지성수는 장민하를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그가 지성수로부터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이 세계를 진보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객관적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보완해 줄 요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영혼 위에 신이 없는 예언자는 위험하고 허약하다 그의 열정의 모태는 절대화된 세계와, 그것으로 나아가는 절대화된 자신의 존재이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반성과 겸손이라는 자양분이 끊임없이 공급될 때 피어나는 꽃이라 한다면, 이 절대성이라는 생명은 반성과 겸손을 끊임없이 부정한다. 이념이 만들어내는 사람은 고귀하다. 그러나 그 사랑에는 반성과 겸손이 결핍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험하고 허약한 사랑이다. 이 위험하고 허약한 사랑에 강인한 생명을 불어넣는 일 즉 자신의 불완전함으로 일깨우는 신을 만드는 일.나에게 그 신의 존재는 바로 장인하였다. 놀랍지 않은가. 사상가가 무사상가를 우러른다는 것 세계의 악에 대한 증오로 무장된 실천가의 열정이 증오가 없는 단순한 정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 메마른 강인함이 부드러움과 약함 앞에 머리를 숙인다는 것. 지상과 열쇠를 찾는 이가 천상의 열쇠를 소중히 한다는 것. 이것은 사상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사상 속으로 생명의 힘을 불어 넣는 운등이다. 지상의 열쇠를 더욱 빛나게 하는 운동 ‥‥‥"(102쪽)

  반성과 겸손을 통해 절대적 확신을 보충하는 것. 지성수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한 바를 다시 번역한다면 아마도 알 수 있되 한꺼번에 알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은 '악'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 80년대 운동 이념에 대한 의미 있는 반성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한계 또한 분명하다. 어떤 인식론적 한계가 그러한 사유 방식을 가능케 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천착 없이 반성과 겸손이라는 말로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제제기는 실은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라는 인식론적 문제의 차원에서 소설의 형식보다는 철학의 형식으로 이루어 졌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또한 소설 속에서라면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80년대 진보적 운동을 어떻게 사로잡고 있었는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형상화로 나아갔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 『작가』 창간호를 통해 최근 발표된 박혜강의「미완의 탑」은 광주항쟁 당시 광주 공단 지역의 야학에서 강학으로 있던 한 인물을 통해 광주항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그는「깃발」에서의 윤강일처럼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광주를 떠났었고 그후 오랫동안 "참회의 나날을 보내면서 죽은 나의 영혼이 회생되기를 묵묵히 기다려(『작가』 창간호 236쪽) 왔다. 그런 그가 자신의 영혼의 회생을 의한 매개체로 삼은 것은 운주사 천불천탑이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완의 운주사 천불천탑이 광주항쟁의 미완성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세계사적인 대변화의 물결이 한반도를 휘몰아칠 때 굳건한 대오가 서서히 동요되고 허물어지는 광경들을 힘찬 몸짓으로 내일을 향해 달리던 상당수의 현장 활동가나 조직 운동가들이 대치 전선에서 회군하고 새로운 변신을 일삼을 때 우리의 희망은 와불님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날이 새고 만 꼴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이 도시를 지켰던 수많은 영령들이 통한의 황톳빛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망월동에 또 다른 탑들을 세웠지만 살아 남은 자들은 그 탑을 짓밟고 서서 명예와 권력과 부를 탐하느라 아수라장이었다. 아아, 그 날은 역사 속으로 자꾸만 파묻히고 허무의 깃발만 나부끼는 이 도시.
  그들이 허무주의에 빠져 동요와 변신을 거듭할수록 나는 절망의 늪 속으로 자꾸만 침하했다. 그들은 그나마 버거운 나의 원죄 보따리 위에 태연히 올라앉아서 냉소를 날리곤 했다. 내 영혼의 고목에 어렵사리 피어나던 한 줄기의 싹은 자꾸만 시들어 갔다 그들의 말마따나 우리들이 온 몸으르 싸웠던 지난 세월의 모든 것들이 일종의 시행착오였단 말인가. 안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나는 끝없는 되뇌임을 거듭하다가 우리의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굳건한 대오를 형성한 채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박차 헤치며 내일을 약속하던 우리의 몸부림은 허상은 좇아 헤맨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점이 없었던 것도 아닐 터였다.
  혹시 우리의 운동선상에 비과학적이고 신비적이며 낭만적인 잔재들이 혼재 되어 있지는 않았을까?(238쪽)

  그는 이 비과학적이고 신비적이며 낭만적인 잔재를 벗겨버리고 싶어한다 "신비적 사고와 허상이 난무하는 내 방에서 벗어나 실상을 찾아" 떠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혹은 그것을 위해 고는 먼저 운주사 천불천탑에 얽힌 설화의 신비적이고 낭만적인 요소를 벗겨 그것을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화로 바꾸어내고자 한다. 그 후 어머니와 동생이 그를 찾아 운주사를 찾아 갔을 때, 그는 한 편의 새로운 설화만을 남긴 채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는 과연 실상, 즉 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운동의 이념을 찾아냈을까. 아마 찾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것을 찾았다면 박혜강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진보적 운동이 처한 오늘의 문제를 매우 극명하게 상징해 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로부터 출발하여, 혁명적 사상에까지 도달했지만 그것은 충분히 합리적이거나 과학적이지 못했고, 그것을 통절히 느끼면서도 새로운 진보적 이념의 창출은 아직 요원한 문제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광주로 인해 쌓아올려지기 시작한 진보적 이념은 지금 '미완의 탑'으로 남아 있다. 작가 또한 그 탑을 완성시킬 내용이 무엇인지를 얘기하지는 못했지만, 광주와 현재를 연결지우면서 새로운 이념 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의미를 지닌다. 지금은 그 누구도 그것을 쉽게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6

  광주항쟁 후 15년이 지난 지금 학살의 주모자들은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었지만 광주의 정신은 오히려 그 빛을 훼손당하는 느낌이다 그들이 권좌에 앉아 있을 때 세상은 캄캄한 칠흑이었지만 그랬기에 광주의 정신은 더 빛을 발했었다. 이제 세상이 밝아졌기 때문일까. 세상이 나아지면 광주의 정신은 달처럼 빛을 잃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광주의 운명인가. 학살자들을 고발했던 김남주도 세상을 떠나고, 광주로 표상되던 순결한 민주주의에의 열망은 신권위주의와 지역 분할 지배 및 지역 할거에 의해 찢기워 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를, 광주 문학을 다시 논한다는 것은 광주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를, 무엇으로 지향해 가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글은 그것을 거의 전혀 말하지 못했다 또한 이 글은 앞에서 언급한 몇몇 소설들말고도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여러 광주 소설들에 대해서도 충실히 언급하지 못했다.
  5.18의 소설적 ,형상화는 아직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앞에서 몇몇 소설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얘기했듯 5.18 문학은 훨씬 더 깊어지고, 훨씬 더 넓어져야 한다. 그것은 그 문학이 정치를 통과하여 문학의 진정한 경지에까지 오른다는 것을 의미하며, 계급문제나 지역문제와 같은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 소급되지 않는, 더 복합적인 배경을 지닌 더 역동적인 역사적 운동으로 광주항쟁을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진보적 문학의 새로운 정체성 확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극히 힘겨운, 끈질긴 인내를 요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누가, 어느 작가가 이것을 이루어 낼 것인가. 그가 누구든, 그는 우리 현대 문학사의 또 하나의 정절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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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민 호(문학평론가) : 충남 예산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 졸업, 박사수료, 강원대학교 출강/ 창작과 비평 제1회 신인 평론상 수상/<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논리) <장정일론><정치적 문학의 두 충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