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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그날에 살아 남은 자의 통과 제의 / 임동확론(이경호 문학평론집, 민음사, 1992. 6)

본문

그날에 살아 남은 자의 통과제의

-임동확론



1 왜, 90년대에도 광주의 그날을 노래해야 하는가

  1980년 5월의 그 처참한 정치적 상황을 체험한 시인들은, 과연 그들이 앞으로 시를 계속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시를 쓰려는 욕망이 그런 처참한 현실로부터 얼마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가, 혹은 시의 간접적인 쓰임새란 그런 현실에 대한 다급한 책임으로부터 얼마나 비켜나 있는가에 대한 착잡한 물음과 더불어 그런 고뇌는 진행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파렴치한 현실과 서정시의 심미적 속성은 얼마나 배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문학의 쓰임새가 현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추하면서도 시인들은 엄청나게 황폐해져 버린 현실 앞에서, 그리하여 긴급한 책임을 일깨우는 현실 앞에서 자신들이 구가해 온 문학의 자율성과 심미적 감수성이 얼마나 무력하고 사치스러운 것인가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긴급한 현실이 강요하는 삶의 박자를 따라가기엔 문학의 리듬은 너무나 완만하고 느슨한 것일 뿐더러, 그런 완만함이 가파른 현실로부터의 도피와 잠적을 합리화할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어느 독일 미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아우슈비츠의 사건 이후처럼, 광주에서의 그날 이후로 서정시는 더 이상 비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1990년대의 벽두에 이른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그날 광주의 현실을 시로 노래해 왔다. 과연 그러한 것들은 시의 이름에 값하는 것이었을까? 이전에는 저급하거나 치기 만만한 속성으로 간주되었던 문학의 소박한 소재주의와 격정에 휘말린 생경한 표현들이 그날의 현장을 생생하게 부각시켜 준다는 이유에서 양산되고 옹호되었다.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1980년대에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거친 호흡으로 마치 현실에 대한 알리바이라도 입증하려는 듯이 그날의 광주를 노래하였던가. 그리고 그렇게 하여 무엇을 얻어내고 확립해 놓았는가. 한 편의 비디오 영화와 몇 장의 충격적인 사진들, 그리고 잡지에 발표된 르포와 체험수기보다 훨씬 선동적인 효과와 현장의 구체성을 재현해 내지 못한 대가로 그들이 이룩해 놓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그들이 이룩해 놓은 것의 대부분은 시의 이름으로 기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끊임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유행가의 사랑을 주제로 한 가사와 멜로디처럼, 상황과 체험의 진실을 상투화시키고 우상화시키는 데 이바지하였을 따름이다. 다른 매체들에 비해 훨씬 대중적 선동성의 ·효과가 미약한 서정시의 양식은, 그 독일 미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새로운 형식 속에 충격적인 현실의 고통과 진실을 담아낼 것을 요청 받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시인들이 1980년도에 일어난 광주의 사건에 대해 시를 쓰기로 한 이상, 문제의 관건은 현실에 대한 자세, 즉 치열한 현장성을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장성 그 자체와 문학성의 교묘한 갈등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너도나도 앵무새처럼 그날의 일차원적인 현장성만을 읊어 내려고 할 때, 오히려 현장성의 핵심사항들은 은폐되어 버리는 역기능이 초래되기 쉬운 것이다. 그 현장성의 핵심사항이란, 이를테면 다른 대중적인 선동매체들이 간과하기 쉬운 문학의 형식적인 특징과 연루된 것이다. 그 형식은 가장 미려한 그릇으로 가장 추악한 내용물을 담아내는 충격을 제공함으로써 현장에 대한 독자들의 시선이 산만해지거나 상투화되는 결과를 방지해 준다. 또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양식에 있어서 객관적인 사실이나 스토리가 전개됨으로써 은폐되기 쉬운 개별적인 경험의 진실을 밝혀내는 미덕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 개별적인 경험의 진실이란, 작은 것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대상과 부딪힐 때 울려 나오는 소리와도 같은 것이다. 적어도 서정시가 독자들의 눈과 귀를 무디게 하지 않으면서 이룩해 낼 수 있는 진실의 내밀한 호소력이란, 이처럼 개체적인 범주에서의 반응을 통해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도에 겪은 광주의 아픔이 치유되고 있지 않는 한, 그리고 그 사회적 체험이 1980년대의 어두운 현실을 이끌어온 환부의 중심이 되고 있는 한, 광주의 상처에 대한 일차원적 진술을 담아낸 시들은 상처를 추상화시키고 상투화시켰다는 점에서 시 자체에 대한 직무 유기일 뿐만 아니라 광주의 현실 자체에 대한 직무유기이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설령, 광주의 상처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완숙한 문학적 형상화의 길에 이를 때까지 그날의 체험에 대한 노래들은 계속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날의 상황이 특정한 집단의 고통이나 상처에 머물지 않고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삶의 상처로, 그리고 더 나아가 상처 이후의 단계로서 삶의 긍정적인 가치관을 배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살아 있음의 죄의식) 과 통과제의의 형식

1987년에 『매장시편』이라는 시집을 펴냄으로써 문단과 인연을 맺은 임동확의 작업은 이와 같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시집 전체의 내용을 광주의 상황과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가벼운 주목거리가 되거니와, 무엇보다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의 주제와 내용을 상투화시키지 않을 수 있는 형식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 형식이 주로 문체와 관계된 특징으로 논의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장시편』이 드러내고 있는 세 가지 문체상의 특징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그의 시들 속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문체상의 특징은 고답적이고 유장한 어조가 미려한 비유체계와 어울려 있는 점이다. 그것은 때로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을 닮은 문체로,

사람의 아들이여, 그대의 부정한 손발을 씻고 네거리
광장의 증언대에 서라‥‥‥ 칡뿌리 산 머루로 술 빚는 것을 멈추어라.
                                                -「언덕의 노래」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이국적인 서경의 원근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능금 꽃 피는 계절에 부는 남서풍은 너무나도 거칠었다.
부끄럼을 다시 잃은 여인들이 사내들을 유혹하고
시련을 모르는 그 아이들이 자라 미래를 떠맡는 동안
탱자나무 울타리가 무너지고, 망루처럼 우뚝 솟은 감시 탑이
쓰러지고, 여기저기서 스스로를 태우는 화염이 치솟았다
벌과 꽃향기, 젖과 꿀이 휩쓸려간 언덕은
야만과 살륙, 살과 피의 훈 향이 공존했다
              -「최초에 일어난 일이 최후에도 일어났다」

  이러한 문체의 특징은 우리에게 낯익은 시공간적인 사건의 모습과 의미를 낮선 시공간으로 이동시켜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이룩해내기도 하고, 보다 근원적으로는 특수한 시공간적인 사건의 의미를 보편적인 역사의 시공간으로 잠입시켜 놓는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효과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낯선 시공간의 의미에 대한 호기심으로 우리의 상황에 대한 조급한 분노와 슬픔을 차단시켜 준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차단에 그치지 않고 삶의 역사적 보편성이 환기되면서 엄숙함과 진지함이 마련된다. 엄숙함과 진지함이야말로 이런 소재를 담은 우리의 시들이 결여하기 쉬운 속성이라고 말해 볼 수가 있다. 고답적이고 유장한 어조와 미려한 비유들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으로 말미암아, 임동확의 『매장시편』에 수록된 많은 시들이 엄숙함과 진지함을 요구하는 명상의 공간을 만들어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체의 특징이 조급한 분노나 슬픔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명상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반면에 현재로 생생하게 이어져야 하는 과거의 구체적인 현장성을 희석시킬 약점을 노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 시인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상투적인 진술과 반응을 회피하면서도, 생생한 현장의 모습과 의미를 되살릴 수 있는 방편으로 감정을 실어 나르지 않고 차분한 시선으로 사실만을 기록하는 문체의 특징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때, 차분한 사실적인 문체는 다음의 시에서처럼 돌연한 의미의 비약이나 반전과 같은 파격을 형성함으로써, 현장의 구체적인 모습과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부각시켜 等는 효과를 이룩해 내기도 한다.

  첫째 날, 동명로에서 한 일곱 살쯤 먹은 아이가 울고 있었다. 학생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나이 먹은 경찰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연행 학생과의 교환을 협상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 바로 전 그 꼬마 애와의 대화를 잊을 수 없다. 「꼬마야, 왜 울고 있니 ?」 「아저씨 그 돌멩이를 버리세요, 아빠가‥‥ 경찰관이란 말이에요」(방점은 필자가 표기한 것임)
                                  -「이제 그들은 무엇이 되어」

  문체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특징은 (나)라는 화자의 생각과 정서, 혹은 의지를 직접 드러내거나 교술 화하고 있는 점이다. 곧 펴내게 될 그의 두 번째 시집에서 보다 강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세 번째 문체의 특징을 시집의 전체적인 흐름과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 점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선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매장시편』의 「자서」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나 (내가 나일 때 나는 너이다)란 명제를 실감할 수 있었던 지난 팔 년의 실존적 고뇌들을 이제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고 싶다는 개인적 소망이 이런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한 것 같다. 또한 그날 이후 모두에게 형벌처럼 각인 된 (살아 있음의 죄의식)이 온통 나의 시와 삶도 지배해 온 것이나 아닌가 하는 때늦은 자각과 함께 결국은 그 모든 싸움과 행위가 살아 있는 모든 현재의 (나)의 문제였다는 나름대로의 판단 속에서 그 동안 일기 대신 꾸준히 시로 메모한 것들의 일부를 정리하여 발표함을 밝혀 두고 싶다.

  (내가 나일 때 나는 너이다)와 (살아 있음의 죄의식)이라는 명제를 통해서 그의 지금까지의 시 작업이 긴급했던 상황에 동참하치 못한 데서 생겨난 자책감을 집단의 이데올로기 속에서가 아니라, 한 개체로서의 의식적인 체험 속에서 극복해 내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고, 따라서 그런 죄의식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식이 자기진술의 문체적인 특징을 나타내리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자기 진술이라는 문체상의 특징은 그의 죄의식이 반영된 것이고, 교술적인 문체는 그런 죄의식을 극복하려는 자기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그런데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죄의식을 극복하려는 교술적인 문체보다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문체의 특징들이 보다 자연스럽게 시의 성취도를 높이면서 통과제의의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통과제의의 과정 속에서 그의 시들은 또 다른 시의 특징을 발굴해 내게 된다. 이를테면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될 또 하나의 「자서」에서 임동확은 자신의 통과제의의 작업이 취하게 되는 또 다른 시 형식의 특징을 밝히고 있다.

오월은 화두다
또는 거대한 벽이다
그래서 나의 모든 시는
그곳에 새겨진 음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난
풍자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월의 몸짓을 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막힌 물이 지하로 스며들 듯
그 (속 사실)이 남긴 흔적을 추적하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의 방법은 (음화)를 새기는 일이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장의 사실을 추적하는 법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드러난 현상보다는 (속사실)의 의미를 추적해야 하기에, 그의 작업은 현장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초월의 몸짓을 내 보이지도 않)으면서, 혹은 쉽게 변화되지 않는 현실을 (풍자)하지도 않으면서 현실의 속 깊은 의미를 파헤칠 수 있는 구도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 구도에 대한 관심이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만든다.

  최초에 일어난 일이 최후에도 일어났다
  (중략)
  그때 에덴의 동쪽은 오월 달이었다
  무차별한 무지의 만행이 그곳에서 벌어졌다
  (중략)
  그곳은 이제 새로울 게 없는 검푸른 강물만 차 올랐다
  그 안에 숨겨진 흰 뼈의 화석 몇 개가
  그때부터 잃어버린 동산의 순찰을 강화해 나갔다
  (어두운 시대의 시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상징이다. 소수인의 독점물일지라도 일정한 긴장과 자기통제 아래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문학은 암울한 시대상황과 싸우는 유일한 부드러움이다. )
                -「최초에 일어난 일이 최후에도 일어났다」

  그의 작업은 일차적으로는 다급하고 처참한 현장에 부재하였던 (나) 의 죄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상징의 구도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처참한 현장의 생생한 재현작업으로는 그의 죄의식과 절망을 끝없이 반추하기만 해야 할 뿐, 극복할 수 없기에 그는 살아 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확인하게 해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게 해주는 보편적인 상징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찾아내는 상징의 구도는 역사의 순환, 혹은 반복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 구도는 그로 하여금 그날 광주에서의 시공간적인 상황이 특수하고 일회적인 것이라기보다, 인류의 역사 가 성립한 이래로 수없이 거듭해 일어난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한 다. 그의 시에서 광주의 상황이 구약성서에 기록된 사건들이나 역사적 인 사건들과 겹쳐져 묘사되고 있는 점이 바로 그런 의미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런 상황은 태초에 (에덴의 동쪽)에서 카인에 의해, 혹은 그들의 후예에 의하여 아우슈비츠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되풀이되었다 는 깨달음을 그의 시는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시의 화자는 역사에 서 되풀이되어 온 상황의 (안에 숨겨진 흰 뼈의 화석), 즉 인간이 저 지른 야만스러움의 증표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동산), 즉 이상적인 현실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순찰을 강화해 나가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그 야만스러움의 증표가 태초부터 존재하여 인간의 역사에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깨달음이, 그에게 삶의 개체적인 부끄러움보다는 삶의 보편적인 속성을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바라보게 만 들어줄 수가 있다. 그러한 깨달음은 그의 개체적인 실존 속에 간직된 부끄러움을 경감시켜 주는 효과를 갖기보다는, 오히려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야만성과 그로 인한 희생의 기억을 통해 그의 개인적인 부끄러움을 보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형태의 부끄러움으로 변형시켜 놓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하여 그가 간직하고 있는 동시대의 사건에 대한 절망과 부끄러움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쉽사리 위안을 얻어내지 못한다. 그것들은 오히려 과거의 역사로부터 현재의 상황에 대한 또 다른 반성의 계기를 부여받게 된다.

눈을 뜨라
제발 눈을 떠다오
그리고 완성해 다오
아, 다시 천만 번 용서하며
척추를 내리찍는 박달나무 몽둥이
개머리판에 딸기처럼 으깨어진 얼굴을 씻고
단 한 번만이라도 우리와 함에 서다오
                                                  -「라자로」

오, 가련한 운명의 오이디푸스여
그 사내가 제 아비일 줄이야
그 여인이 설마 제 어미일 줄이야
그러나 알지 못하고 행한 일마저
한마디 변명조차 하지 못한 채
어린 딸의 손에 끌려
너의 왕국을 떠나는구나
제 눈을 바늘로 후비고
마침내 두 눈을 파내어 속죄하는구나
그런데도 성한 눈을 뜬 채
제 형제의 살육을 목격하고
제 뱃속의 아이마저 빼앗긴 부당한 시대를
잊으라, 잊으라 강요하는 세월이여
                          -「눈밭을 걸어가는 오이디푸스왕」

과거의 역사가 그에게 주는 반성의 계기는 (라자로)의 죽음이 극복될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이 예비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며, (오이디푸스왕)은 자기가 모르고 지은 죄조차 참회하는 자세를 보였건만, 알고도 지은 죄를 참회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과거의 역사적 상황은 그에게 (잊으라, 잊으라 강요하는) 현실의 타락상을 일깨운다. 그러므로 그가 현실로부터 위안을 받으려고 할 때 그는 과거의 역사로부터 단절되지만, 현실에 대한 개체의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려고 할 때 과거의 역사는 그 부끄러움의 근원을 밝혀주면서 그의 현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때 과거의 역사는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을 엄숙하게 유지시켜 주면서 부끄러움 속에서 나아가야 할 바를 일깨워주기도 한다. 결국 그의 나아감은 살아 남은 자들이 삶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하여 치러야만 하는 통과제의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매장시편』이라는 시집의 의미를 머리 글에서, (그러나 여기서의 매장시편은 오히려 현재 살아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비어진 시편들이다)라고 밝힌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통과제의의 형식은 죽은 자들에 대한 경의와 살아 남은 자들의 다짐을 요구한다. 따라서 임동확의 시들이 표현해 내고 있는 세 가지 문체의 특징은 이처럼 죽은 자들에 대한 경의로부터 살아 남은 자들의 다짐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표현해 내려는 욕망과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에서 통과제의의 형식은 두 가지의 갈림길을 보여준다. 첫 번째 방향은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부끄러움 속에서 현실에 대한 성급한 분노와 미래의 방향에 대한 들뜬 의지를 가라앉히고 과거의 현실에 대한 성찰로, 즉 야만스러움의 원인을 찾아내고 반성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관광호텔 11층 찻집
몽블랑에서 내려다보니
차량들이 물방게 만하다
통행인들이 개미떼처럼 오가고 있다

사람이 개미처럼 보이는 거리와
사람이 움직이는 벌레처럼 보이는 높이와
이데올로기와
명령과
충성이 확보된다면
사람이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일까

그때의 시민들이 개미쯤으로 보이니까
저들은 헬리콥터에서 기총소사하고
발포명령을 내렸던 게 아니었을까
                                      - 「개 미처 럼‥‥‥」

  이와는 대조적으로 두 번째 방향은 앞으로의 삶이 맞이해야 할 긍정적인 가치관과 자세를 노래하고 있는 시편들 속에 노정되어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과거의 상황에 대한 그의 성찰과 반성이 대체로 공교로운 문체와 상징적인 구도의 완숙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버무려진 형상을 이룩해 내고 있는 반면에, 앞으로의 삶이 나아갈 관점을 펼쳐 보이고 있는 시편들은 비교적 절제되지 않은 시의 공간 속에서 (나)의 의지와 정서가 추상화되고 상투화되는 조짐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시집에 비해 두 번째 시집의 성취도가 다소 낮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번째 시집에 실려 있는 적지 않은 시편들이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시선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시선이 관념과 정서를 구체화할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의 발판을 마련해 놓지 않아서 공소하다는 느낌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시집에서 풍성하게 동원되었던 유려한 비유들과 장엄한 역사적 사건들의 흔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을 유장한 흐름으로 엮어 보이던 문체의 특징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3 모자이크의 상징적 구도

  1990년대에 들어선 임동확의 시에 대한 자세를 다소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 그의 시에 대한 자세가 공교로운 표현방식에 천착하려 하기보다 주관적인 관념의 토로에 치우치는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경향을 『매장시편』의 4부와 5부에 실린 시들 속에서도 어느 정도 찾아볼 수가 있고, 두 번째 시집에는 그런 경향이 보다 두드러진바, 그 원인은 부끄러움을 극복하려는 의욕이 구체적인 상황으로 표현하려는 마음가짐보다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삶의 부끄러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는 서정시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나)라는 시적 화자의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반성과 깨달음, 그리고 다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과 다짐이 개체적인 속성을 벗어나기 어렵고 서정시라는 양식 자체가 주관성에 수렴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시적 화자는 마땅히 자신의 깨달음과 다짐조차 끊임없이 집단이나 사회 전체의 현실에 의해 변질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럴 경우, 그의 깨달음과 다짐이란 아주 짧은 순간에 조그만 공간에서만 진실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특정한 상황에 대한 경험의 접점으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주관적인 깨달음과 다짐을 내보이기 위해서 매 순간마다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럴 때, 그의 깨달음과 다짐은 한 권의 시집 속에서 모자이크와 같은 형상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모자이크의 형상은 부분적으로는 수 없는 상황에 대응하는 생각과 정서의 특징을 나타내면서,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일관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서정시의 공간에서 이룩될 수 있는 삶의 긍정적인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이 (나)라는 시적 화자가 구체적인 현실과 대응한 접점들의 흔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의 현실을 노래한 많은 시편들도 이런 접점들의 끊임없는 집적 속에서 바람직한 삶의 의미를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임동확에게도, 혹은 광주의 현실을 노래하려는 다른 시인들에게도 그런 작업이 이룩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상황과의 접점들이 구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상징적인 구도야말로 서정시가 온전한 현실의 길을 지향하면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문예중앙 1990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