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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민족문화예술로 부활하는 '오월광주'. 이원규(말, 1991. 5)

본문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민족문화예술로 부활하는 '오월광주'

  80년대가 그랬듯이 90년대의 문화예술운동 역시 '5월 광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광주항쟁 11주년을 맞은 오늘의 오월, 살아남은 자의 치열한 자기싸움으로 문화예술작품에 새겨진 '부활하는 5월 광주'의 모습을 살펴본다.



이원규(시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총무부장)



'5월 광주'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예술

  어느새 열 한번째의 오월이 왔다. '꽃대궁에 검정리본을 매단 진달래만 미친 듯 봄 산천을 불태우던' 1980년 5월이 왔다. '5월 광주'는 완료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자연의 5월은 오고 가지만 역사의 5월은 가지도, 갈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날의 광주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미래에 속할지 모른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그 중요성에 비추어 아직도 상당 부분 은폐 당하거나 왜곡되어 왔으며, 그 전모는 고사하고 도리어 그때의 학살과 다름없는 탄압과 보상금이라는 두개의 가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아직도'5월 광주'가 끝나지 않았다는 반증이며, 한반도 전체로 확산되는 항쟁의 원인을 제공해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토해내는 역사적 기록이나 증언, 그리고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부활하는 '5월 광주'의 정신을 언제, 어디서, 누구나 만날 수 있게 된다.
문화예술 속에 나타난 '5월 광주'는 그 자체가 평가 이전의 가슴 떨리는 현실이며, 예술성만으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민족사의 엄청난 충BT이었기 때문에 그 노래 ·그림 ·사진 ·춤 들 또한 지축을 흔드는 절규이자 포효 바로 그것이다. 어느새 광주항쟁 11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망월동이나 혹은 그 어디선가 두 눈 부릅뜬 채 지금껏 잠 못 드는 숱한 넋들을 위한 진혼가와, 살아 남은 사람들의 피눈물이 어떠했으며 새로운 역사적 살에 자기결단을 다지는 문화예술인들의 뜻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도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문예형식을 요구하며, 또 새로운 내용은 그 자체가 새로운 예술의 창조적 계기요, 욕구이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5월 광주'는 이 땅의 민족문화예술을 그 필연성에 의해 한 단계 높였으며, 새로운 요구에 의한 5월 문화의 한 패턴을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은 민족문화예술이라는 큰 틀 안에서 새로운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계엄군이 삭제한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 ‥‥‥」

  먼저 90년대에 더욱 본격화되고 있는 '5월 광주'에 대한문학적 해석 및 형상화작업은 어떠한가. 5공 정권이 '5월 광주'를 은폐, 왜곡하던 80년대 초반 시인들은 비극적 현장에서 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래고 잔인한 폭력의 정체를 고발하는 시들을 써냈다.
  이 같은 시들은 수적으로 적은 편 이 고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도 '광주'를 들먹이지 못하던 시절에 역사적 진실치 일단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소설분야에서는 85년에 들어서면서 '5월 광주'를 직접적인 소재로 다룬 중 단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문학에서의 '5월 광주'는 80년 5월 항쟁 직후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 」로부터 시작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 피눈물을 홀리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 광주여 무등산이여 /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의 십자가여 / 세월이 흐르면 흐를 수록 / 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라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토해놓은 이 시는 본디 2백30여행이었으나 3분의 2가 계엄군에 의해 삭제 당한 채 겨우 74행으로 발표되었다. 작자미상의 시들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최초의 5월시로 기록된 이 작품은 발표신문의 폐간 원인 중 하나가 되는 특별한 인연을 가졌으며, '5월 광주'의 포문을 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김준태 이후 곽재구·나해철· 김진경 등 광주를 중심으로 한 '5월시 동인'들이 다투어 '5월 광주'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승화된 시편들은 광주시민들의 한을 위무하고 알리는 문학적 성과를 이룩했다.81년에 나온 동인지 『5월시』와 『시와 경제』가 촉발시킨 시적 형상화 작업은 살아 있는 자들의 죽은 자들에 대한 죄책감과, 살해자들에 대한 분노를 주된 정조로 표출하고 있다. 그 동안 5월을 노래한 주요시인으로는 고 은 ·김남주 · 황지우 · 문병란 · 양성우 · 김준태·박몽구·하종오·김규동·김용택·조태 일·백무산·홍일선· 나종영·박선욱·이승철·고규태 등 다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러한 시인들의 시들은 단순히 떠난 넋을 진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한 자책감을 노래하기도 했으며 "‥‥보아다오 보아다오 / 살해된 처녀의 머리카락 그 하나하나는 / 밧줄이 되어 너희들의 목을 감을 것이며‥‥(김남주의「학살」에서)처럼 광주항쟁의 참상과 학살자의 본질을 고발하는 시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 5월 광주'를 형상화한 시적 공간에서 박몽구의 시집 『십자가의 꿈』과 전남대생들이 공동 창작한 장시 「들불야학」은 짧은 시가 갖는 단편성을 지양하고 총체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적 성과들이 86년에 이르러 시인70명의 시 2백 편을 모은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와, 90년 광주항쟁 10주년 기념으로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가 출간되어 그간 분출되어온 '광주'에 대한 문학적 정열이 정리된 바 있다.
  그러나 '5월 광주'를 다룬 시들은 솟구치는 분노와 증오로 인해 그들의 구체적이고 계속되는 절실한 삶의 변모에 대한 총체적 관찰이 미흡한 것으로 지적되어 오다가, 80년대 후반 들어 점차 다양하고 성숙된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5월 광주'는 넋풀이와 사랑, 그리고 화해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90년대에 들어서는 보다 사회구조적인 시각이나 과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한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윤정모의 「밤길」에서 홍희담의 「깃발」까지

한편 '5월광주'의 소설화는 홍희담 · 윤정모·문순태·홍인표 · 임철우 · 한승원·정도상 · 김중태 · 김남일 · 유양선 · 박호재 등 일군의 작가들이 주도해 왔는데, 시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대조적으로 소설은 그가 갖는 계속 성으로 인해 비교적 그 반응이 늦었다. 시가 즉각적으로 '광주'의 고통을 함께 해온 반면, 소설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 우울하고도 절망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85년 발표된 윤정모의 「밤길」을 시작으로 잇따라 소설 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던 한 신부가 복도로 몰려 곤욕을 치르는 윤정모의 「밤길」, 계엄군의 학살현장을 교도관의 눈을 빌려 증언하고 있는 홍인표의 「부활의 도시」 등은 비극적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5월 광주'를 변혁 운동적 ·계급 투쟁적 성격으로 접근하며 노동자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는 홍희담의 「깃발」이 주목된다. 그밖에 임철우의 「붉은 산 흰 새」 「사산하는 여름」 「불의 나라」,유양선의 「이 사람은 누구인가」 등 많은 작품들이 있으며 르포 집으로는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김건남의 『찢어진 깃폭』이 있다.
  장편소설로는 문순태씨가 『무등굿』을 집필 중에 있고, 송기숙씨가 『녹두장군』이 완성되는 대로 '5월 광주'를 소설화하겠다고 한다. 송기숙씨는 88년 「산자여 따르라」는 제목으로 연작장편을 구상하여 『창작과 비평』에 그 1부를 발표한 바 있으나, 실제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인지 당시의 상황과는 동떨어진 것 같아 더 쓰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쟁소설은 전쟁이 끝난 뒤 10년 정도가 지나야 나온다고 하듯이, 엄청난 충격이었던 '5월 광주'에 대한 인상이 정리되기까지엔 그만한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어쨌든 문학 속의 '5월 광주'는 결국 민족 민중문학을 보다 확대·심화시켜왔으며, 80년대 문학운동의 신 조류를 주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 그러나 아직도 '5월 광주'를 깊은 눈으로 해석하고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명작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있어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민족 · 민중 문학운동은 지금까지 '5월 광주'로부터 갖가지 힘과 슬기를 제강 받아 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는 5월 광주 항쟁에 대한 문학은 즉각적인 반응이 가능한 시 부분이 중심이 되어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씻김굿을 하는 수준이었다고도 보여지지만, 지난 10년은 역사적 사건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여 앞으로 광주항쟁문학은 본격화될 것 같다.

목판화운동과 광주 시민미술학교 작업

  미술에 있어 서 포 1980년대에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80년 광주민중항쟁의 충격은 현대사에서의 반성적 평가와 더불어 가능성의 지평을 열면서 민중이 주체가 의는 변혁어의 인식을 폭넓게 했다. 이때 삶의 현실들 바로 보고 역사에 눈 뜬 젊은 미술가들의 작업이 우리 시대의 강도 높은 발언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 확산도 발 빠르게 진척되어 84년 6월에 열린 「삶의 미술전」에 1백5명의 미술인 이 참가한 이후 새로운 미술운동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광주항쟁 자체에 대한표현뿐만 아니라 그를 계기로 우리사회 모순의 본질에 대한 폭로와 그것을 있게 한 근 · 현대산적 인식 그치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민중의 삶 등을 풍자적 사실주의 등을 통해 비판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목판화에 대한 관심이다. '목판화운동'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그 업적이나. 확산을 판단하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70년대부터 꾸준히 목판화에 몰두해온 오 윤 등에 의해 부각되어 광주의 홍성담 · 긷경주 · 조진호 등의 작업이 성과로 꼽힌다. 80년대에 급 부상한 목판화운동은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해도 시대를 관통해내는 형식과 목관화가 갖는 특선전문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5월광주'를 표현한 실과들로는 5월시 동인들의 시인 조진호 · 김경주의 판화가 어울려 만든 5월시 판화집-가슴마다 꽃으로 피어 있어라」와 풀빛 판화시집 등 시 ·판화 집의 발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홍성담의 「광주항쟁도」판화, 그리고 그의 시민미술학교 교사로의 참여 활동과 그들의 발표전 등이 돋보인다.
  80년대 후반 인후로는 선명성, 투쟁 성을 보다 강조하는 미술의 사회실천이 본격적으로 신장되었으며, 동시에 대중운동의 성장과 함께 '걸개그림'의 기본 형식이 마련되었다. 특히 오 윤의 목판화형식을 비롯하여 판화운동의 성과를 이어받은 '굵은 선'을 사용하는 걸개그림의 틀이 만들어진다. 걸개그림은 80년대 민족 · 민중미술운동의 실천적 성과의 한 요약 체라 볼 수 있는데, 깃발 · 벽보 · 플래카드 등과 함께 선전, 선동의 목적으로 대중투쟁 속에서 그 현장에 모인 대중들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같은 걸개그림이 최초로 선을 보인 것은 84년 광주문화 큰잔치 등에 사용된「민중의 싸움」이었다.  또한 걸개그림 중에서도 굵은 선을 더욱 간결하게 처리하고 내용을 압축하여 한두 인물을 부각시키는 양식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 작품은 5 18광주항쟁 8주년 기념 5월 제 기간에 전남대학교 도서관에 걸렸던 「오월에서 통일로」였다. 높이11미터, 너비 37미터에 달하는 그 크기부터가 대단했다. 엠보싱 천을 이어 만든 노랑 색 바탕에 유성도료로 그린 이 그림은 아래쪽에는 광주항쟁을 압축해서 그려 넣고, 성조기를 잡아 째는 두 남녀의 등돌린 모습에서 느껴지는 힘찬 표정은 벽화적인 박진감이 넘쳐흘렀다. 그 후로 각 대학의 집회나 행사 때에는 언제나 대형 걸개그림이 걸리게 됐다.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은 역시「민족해방운동사」이다. 이것은 갑오농민전쟁에서부터 통일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 ·현대사를 민중사적 관점에서 형상화한, 세로2.6미터X가로77미터의 대형 걸개그림이다. 이 그림은 전국 민족 민중 미술운동연합 건설준비위원회 에 속해 있는 전국 6개 지역의 미술단체와 학생 미술패 연합산하 30여 개 대학 미술패 동아리가 한께 연대해 제작했다.11폭으로 구성된 이 그림은 각 미술패가 거주하는 지역의역사적 경험을 중심으로 내용을 안배하고 있다.
  이중에서 광주 시각매체연구소에서 제작한 '광주민중항쟁' 부분은 80년 5월의 상황들이 서술적 방식으로 밀도 있게 표현돼 있다. 계엄군의 잔인한 살육만행과 그에 죽어 가는 임산부와 분노하는 시민들, 횃불시위, 시민들의 항거 및 무장 투쟁, 그리고 해방공간의 공동체적 삶과 문화선전활동 최후까지의 저항 등 비교적 안정된 묘사력으로 5·18민중항쟁의 전과정을 극적 효과 없이 균열하게 나열해놓고 있는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사」는 몇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미술운동의 한 획을 긋는 성과로 우리에게 던져 졌다. 또 원작품이 경찰에 의해 소실되고 홍성담을 비롯한 작가들이 구속되는 등 수난을 겪고 있지만, 많은 이야깃거리와 함께 서사적인 내용성과 전망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90년대 이후 창조적 미술운동의 방향타가 되고 있다.  그 외에도 작년 5월 민족미술협의회가 주최한 '광주여 !오월이여 ! ' 전시전에 출품한 주요 작품들로 이성강의「학살, 붉은 꽃잎 지고」, 권용택의 「어머니의 눈물」, 김정헌의 「광주민중항쟁 10주년」, 임옥상의 「그대 영전에」, 오세기의 「오월이여」,홍선웅의 「해방조국」, 이명복의 「오월」, 최민화의 「시민4」,신학철의 「나는 죽었는가」 등과 조소패 '흙'의 「5·18 광주민중항쟁탑」이 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두부처럼 짤리어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너무나 널리 알려진 「5월의 노래」 1절의 노래 말이다. 이 노래는 '5월 광주'의 처절한 싸움과 잔인한 학살과 불굴의 투지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의 부활

  이처럼 연극에서건 노래에서건 광주항쟁의 모습은 사건에 대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형상화보다는 그 엄청난 죽음에 대한 정서적 충격의 형상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5월 광주'가 항쟁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죽음과 패배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80년대 초 ·중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소위 민중가요들이 70년대와는 달리 음울하고 비장한 단조의 선율, 죽음과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비장감을 공통적으로 지니게 된 것은 80년 광주항쟁과 그 '패배'의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보여주는 좋은 예 이 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80년대 초 서울지역에서 만들어진 연극 ·노래작품의 경우 광주항쟁의 죽음에 대한 가해자 의식이나 방관자로서의 죄책감, 혹은 애도와 통곡 등이 전면에 드러나고 있는 데 비해, 광주에서 만들어진 작품의 경우에는 애도와 통곡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으되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조되었다는 사실이다. 광주에서 만들어진 「무등산가」(작자미상)와 노래 중 「넋풀이」의 마지막 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작시, 김종률 작곡) 은 죽음과 패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광주' 가 단순한 학살이 아니라 '육진장포 일곱매듭 끊었던 그 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등 항쟁으로서 그려지고 있으며,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  일어나" "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등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패배의 극복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금희의 오월」과 「일어서는 사람들」

  한편 광주 놀이 패 '신명'에서 만든 마당극 「호랑이놀이」는 민중들이 군부독재를 상징하는 칼돌이에게 죽임을 당하고 통곡과 같은 「진도아리랑」이 흘러나온 후 팥죽 할멈과 관중들의 "일어나라" 소리에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는 장면으로 마지막 처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85년 광주문화운동협의회에서 만든 노래테이프'광주여 오월이여'에 실린 「광주출정 자」 「혁명광주」, 87년에 만들어진 「진군가」 등은 '광주'를 더 이상 죽음과 패배의 의미에 묶어두지 않고 투쟁하고 진전하며 승리하는 새로운 '광주'의 이 미 지를 만들어 냈다. 특히 학살당한 자가 아닌, 시민군을 조직하고 민주화를 위해 출정했던 항쟁부분에 초점을 맞춰 이를 생생하게 형상화해 낸 「광주 출정가」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고 있다.
  그리고 6월 항쟁과 7, 8월 노동자 대 투쟁을 거친 뒤 처음으로 치른 제1회 민족극 한마당에는 전국의 민족극 운동단체들이 모두 모였는데, 광주지역의 두 단체는 약속이나 한 듯이 광주항쟁을 다룬 작품으로 참가했다. 극단 '토박이'의 「금희의 오월」(박효선 작·연출), 놀이패 '신명'의「일어서는 사람들」(공동창작 김정희 연출)이 그것이다. 「금희의 오월」은 80년 당시 전남대 학생으로 도청을 사수하다 전사를 이정연 이라는 인물들 중심으로, 광주항쟁의 전과정을 충실히 재구성했다. 특히 이정연의 아버지가 장사를 하고 있는 시장판 아저씨, 아줌마들의 장면은 뛰어났는데, 시장판 아줌마들이 밥을 해 나르고 돈을 모으고 화염병을 만드는 등 신명나게 싸움에 참여하는 장면 등은 학살과 죽음, 고통의 장면에도 불구하고 전망 없는 패배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며 항쟁의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우쳐 준다.  이러한 사실적 묘사에 비해 「일어서는 사람들」은 항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걸러낸 핵심적 정서만을 춤과 풍물 중심으로 깔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필름에 담긴 '광주', 「오, 꿈의 나라」

  대학영화운동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이 모여 만든 16밀리 첫 장편 영화「오. 꿈의 나라」(장산곶매)가 처음으로 '5월 광주'를 영화 필름에 담아냈다. 이 영화는 80년 5월 주인공 종수가 광주를 빠져 나와 동두천으로 피신하는데서 시작되는데,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관객들은 예상할 수 있다. 이 영화는 89년 1월 서울 신촌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상영되었으며, 무수한 탄압을 받았다. 반면 같든 '5월 광주'를 다룬 「부활의 노래」는 공윤의 심사를 통과, '합법적으로' 중앙극장에서 상영되었다.
  87년에 접어들면서 16밀리 단편영화 「그날이 오면」(장동홍) 「노란 깃발」(장동홍) 등이 대학가나 소극장에서 상영되기 시작한다. 현재 비 제도권 영구운동들 이끌어 가는 가시적인 영화 집단으로는 '민족영화연구소' '장산곶매' '서울 영상집단' '영화마당 우리' '한겨례' '새빛' 등이 있는데, 이들 영화집단들은 자본과 외부압력에 좌지우지되는 무리의 영화 현실에 당당히 맞서 싸워 나가고 있다.
  영화 외에도 춤이나 판굿, 판소리 등에서도 '5월 광주'를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임진택의 창작 판소리 「오월, 광주」는 광주항쟁의 자초지종을 소상하게 노래하고 있다. 80년대 초 「똥바다」와 「소리내력」으로 판소리의 민중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한 바 있는 임진택씨는「오월. 광주」로 '오늘, 이 땅의, 우리들의. 살아있는 판소리를 되살리고 있다. 우린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인 광주항쟁의 여정을 가장 전통적인 문화유산의 틀로 그리려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민족민중 예술행위의 귀감으로 간주될 만 하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도 굳이 전문가의 입을 빌릴 필요가 없다.  주최측의 체면을 생각하여 잠시 들렀다가 가려 했으나 소리에 취해 자리를 뜨지 못하고 끝까지 듣게 되었다는 , 이제껏 판소리를 진득하게 들어본 적 없다는 사람의 고백이 가장 정확한 평가가 될 것이다.
  아무튼 80년대 이후 문화예술운동은 앞에서 대강 살펴본 바에서도 나타난 듯이 '5월 광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5월 광주'는 작품 속에 '5월 광주' '5월 광주가 직접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간에, 모든 문화예술의 인식과 정서, 작품 유통의 조건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왔다.
  '5월 광주'는 우리 민족분단사가 지닌 기본 모순으로서의 사회, 정치, 경제체제가 지닌 지배력의 한계를 폭로했으며, 이를 옹호하기 위한 미국의 폭력행사는 그 이전의 수동적인 문화예술 활동을 '문화예술운동'으로 승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