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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월에 쓰는 편지. 임철우(월간중앙, 1990. 5)

본문

80년 광주, 그후 10년 살이

-5월에 쓰는 편지



임 철 우



  아직도 등돌려 않아 있는 그대

  해와 달의 윤곽마저 부옇게 흐려 놓으며 며칠째 줄곧 황사가 하늘을 덮더니, 밖은 지금 비가 내립니다. 물기에 젖어 창유리에 수묵처럼 번지는 밤 높은 시가지의 불빛을 내려다보여, 나는 한반도 남단의 이 불행한 도시가 소리 없이 토해내는 신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고통과 회한에 찬 신음, 그 낮고 둔 중한 신음소리 속에 쇳덩이 파편처럼 무겁게 박힌 수많은 미 도시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가 문득 가슴을 한없이 아리게 합니다.
  아직도 등돌려 앉아 있는 그대여.
  이 땅의 모래알처럼 많은 집들의 지붕아래서 모래알만큼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혼곤한 잠자리에 들어 있는 이 시각에도, 이 도시만은 편히 잠들지 못하고 홀로 뒤척이며 저렇듯 고통스레 신음을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괴로움에 찬 신음을 지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광주사태의 수습을 위해 지금이라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사태 발단의 진실을 정부가 인정을 하고, 겸손한 사죄의 표시를 하여야 할 것이고 군인들에 대한 명령책임자를 엄중히 처단할 것을 약속하셔야 우선 급박한 현 사태의 수습이 가능할 것입니다:..아직도 안심할 수 없고, 오히려 더욱 악화될 수도 있는 사태의 절박함을 내다보면서‥‥읍소하는 이 광주의 한 시민의 탄원을 너그러이 들어주시기를 간 합니다.

  이것은 1980년 봄 당시, 광주 전 시가지가 계엄군 즉 의해 철통같이 포위되어있던 바로 그 무렵인 i월26일에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가 그 자신포위망 안에 갇힌 채, 대통령에게 올린 절박한 탄원서의 끌 대목입니다. 차마 현실이라고 믿기에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반인륜적인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광기와 죄악의 참상을 직접 지켜보았던 한 늙은 성직자는 아마도 터지는 눈물과 비탄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떨리는 손으로 이 글을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십 년이 지나갔습니다.1990년 5월 지금. 그러나 그 삼천 육 백 오십 번의 밤과 낮이 바뀌어진 지금 이 순간까지 그날의 그 탄원서가 아직도 고스란히 유효하다는 기막힌 사실에 나는 새삼스레 전율하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이럴 수도 있는 것입니까.  이래도, 정말 이레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대여.
  이제는 지나간 오욕의 역사 한 페이지에, 결코 다시는 되풀이되어선 안될 시대의 한 자료로 보관되어 있어야 마땅할 그 빛 바랜 탄원서가 자그마치 십 년이 지난 오늘 이 순간까지 아무런 응답도 약속도 받지 못한 채, 이 도시 사람들의 떨리는 손안에 아직도, 십년 전 그날과 똑같이 그대로 쥐어져 있어야만 하는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비극의 현장을 지키며 살고 있는 시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또 한가지의 사실은, 어쩌면 그 탄원서를 이젠 집권자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이웃들 모두의 손에, 아니 누구보다도 아직 5월의 항쟁에 대해 양시론을 들먹이면서,  이 도시 사람들의 망울진 가슴에 맺혀있는 피 어린 진심을 무심히 외면하려 하고 있는,  결코 드물지만은 않은 이웃들의 냉랭하고 의심 많은 손에 한사코 전해주기 위해 발을 굴러야만 하는 슬픈 현실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이간 지나친 과장이기를 바랍니다. 부디 그러하기를, 내 자신의 편협하고 무딘 시야가 이 나라 민중들의 건강한 판단력과 높은 비판의식을 함부로 무책임하게 호도한 것이기를 차라리 빌고 바라는 심정입니다.

정당한 복권이 첫번째 소망 

  그러나 바로 엊그제, 이 도시의 충장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전교조 해직교사라는 유호선씨(36)는 지금 꼭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더군요.
  「이전엔 우리 앞에 가로놓인 벽인 정치권력뿐이라고 믿었지요. 진정한 해결책이란 가해 당사자로부터 적선이나 동정으로 얻어질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두 차례의 선거를 치르고 특히 나 삼당 야합을 지켜보고 난 지금, 이 지역 사람들은 차라리 어떤 국민적 고립감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오월광주」는 아직도 전국민의 진정한 아픔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게 솔직한 현실이 아니냐며, 그는 고개를 저어 보였습니다. 어제의 반대자가 하룻밤사이에 동지로 바꿔치기 되는 실로 해괴한 장파요술을 구경하고 있는 지금, 경악과 분노를 넘어 차라리 허탈감에 빠져있는 것이 단지 이 도시사람들의 경우만은 아닐 터이나,5월 항쟁의 퍼해 당사자로서 진정한 명예회복과 정당한 역사적 복권을 첫 번째 소망으로 껴안고 있는 그들로서는 당연히 그 충격과 분노가 남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 도시의 사람들은 십 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고 있는 걸까요. 어째서 자신들의 상처받은 긍지와 명예를 온전히 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까요 아니 명예회복은커녕 희생자들을 함부로 짓밟아 그 영혼들까지 욕되게 하고 있다고, 수 천명의 부상자들과 그 가족들 의 가슴에 또 다시 피와 눈물의 샘을 잔인하게 후벼파고 있노라고 의치고 있는 걸까요.
  대망의 이 천년 대와 선진국 대열의 문턱이 턱 밑까지 다가왔노라고 떠들어대는 오늘날에야 물론 그따위 케케묵은 지역 적 편견 따위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야 물론 없겠지만, 행여 이 지역 사람들만이 유별나게 불평 불만이 많은 별난 사람들 인 까닭이겠습니까.
  기억하기조차 지겹고 끔찍한 일입니다만, 잠시 어쩔 수 없이 십 년의 세월을 거 슬러 올라가 봐야 할 듯싶습니다.
  그해 오월 열을 낮 밤에 일어난 참혹한 기억들을 새삼 일일이 들출 필요는 없겠지요. 그 동안 신문·잡기·사진첩 그리고 텔레비전에서까지 귀가 아프고 눈이 따갑도록 수없이 듣고 보셨을 터이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 열흘 밤낮의 시간, 이 도시 의 팔십 만 시민들은 그 누구도 예 외 없이 포위 당해 있었습니다. 평범하기 만한 시민들이 말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포위되어 있던 그 열흘 동안, 오직 자신들만의 힘으로 자신들의 생명과 도시와 진실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시민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절박했던 구원의 기다림

  그렇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한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져버린 야차의 땅에서, 그들은 바로 그대의 용기와 정의와 진실과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음에, 그대가 달려와 내밀어줄 구원의 손들을 바라며 외롭게 필사적인 저항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 엄청난 비극의 실상이 이 조국 땅 어디에나 퍼져나가, 분노한 힘이 활화산의 불덩이로 터져 솟구치기를, 그리하여 그 불덩이가 이 외롭게 포위된 불행한 도시를 마침내 죽음과 광기의 축제로부터 구출해 주기를 이 도시 사람들은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렸었는지 아십니까
  그러나 그대여 , 그 열흘 동안 당신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손길은 끝끝내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여덟 명도 아니고, 팔십 명도 아닌, 팔십만이 넘는 그대의 이웃들이 열흘 낮밤을 몸부림치며 하나같이 목을 놓아 외 쳐 대는 그 피 맺힌 통곡에도, 구원의 기대에도 끝내는 아무도 응답 해주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대여. 그날, 어찌하여 그대는 외면하고 있었습니까. 왜 이 도시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까, 사랑하는 그대여  물론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고, 계엄하에 모든 정보가 철저히 차단되어버린 상황이었으므로 그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혀 까맣게 모르고 있었노라고, 그러므로 그것이. 내 잘못만은 아니잖느냐고 그렇게 말하실지 모릅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그 순간에도 자신들의 절박한 기다림을 저 포위망 바깥쪽의 이웃들이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 수많은 고귀한 목숨들이 이름 없는 꽃무더기를 이루며 쓰러져 가야했던 것입니다.
  그대여, 팔십만 전 시민이 계엄군에 갇혀 있는 바로 그 운명의 시각에 그대는 정작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습니까.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시민들 역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1980년 5월 18일. 이 도시의 시내 중심 가에서 그 비극의 서막이 벌어지고 있는 순간, 텔레비전에선 놀랍게도 고려대학과 롯데의 전국야구대회 결승전이 한참 생중계 되고 있더군요.
  경기장에서 혹은 안방 텔레비전 앞에서 그대가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며 응원에 열광해 있는 바로 그 시각, 그러나 이 외롭게 버림받은 도시의 거리에선 인간의 비명과 신음, 탄식과 통곡이 한 덩어리로 엉 켜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날 밤도 이튿날도, 또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텔레비전 쇼프로에선 화장한 가수들이 허리를 뒤틀고 비꼬아가며 현란한 조명 아래서 사랑타령을 멋들어지게 불러 젖히고, 코미디언은 우스꽝스레 뒤뚱대며 수다를 떨었으며, 연속극의 남녀 주인공들은 카페에서 술을 마시고 카바레에서 충을 추고 경치 좋은 초원을 거닐었으며, 또 광고 모델들은 온갖 물건들을 먹고 마시고 걸쳐 보이며. 선전을 하를 있었으며, 뉴스시간엔 전두환씨가 미국 타임지와의 회견을 하며 「한국엔 한국에 맞는 민주정치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소식뿐, 정작 어디서고「광주」라는 단어는 들먹여지지 조차 않았습니다. 설마 설 마하면서 눈을 까뒤집고 보고 또 보아도, 단 한번만이라도 이 도시의 이름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화 아닌 진실의 몸부림

  그렇습니다. 그대여. 팔십만이 넘는 그대의 동족이 가난한 땅 한구석에서 생사의 아수라장에 갇힌 채 죽어가고 있는 바로 그 시각에도 세상은 아무런 변화도기척도 흔적도 없이 언제나 처럼 평온하고 무사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어찌된 셈입니까 그대여. 행여 그건 참으로 희한하고도 기막힌 마술이었거나 아니면 해괴 망측하기 짝없는 악몽이었습니까. 그도 아니면 밑도 끝도 없이 엉망진창뒤죽박죽이 되어버린 한판 난센스 코미디였습니까, 그대여.
  그날 텔레비전 혹은 라디오를 껴안은 채 울지도 웃지도 못하여 미친 사람처럼 숨만 헉헉거리다간 끝내는 그것들을 내동댕이치며 터뜨려 버린 이 도시 사람들의 통곡을, 그대여 이해하시겠습니까.  이윽고는 그나마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까지 모조리 끊어져버리고, 시외전화까지 불통되어 외부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되어버리고 말았을 때, 그 야만과 광기의 덫에 걸린 채 오직 그를 홀로 맨 몽뚱이로 주어내야 했던 그 어마어마한 공포와 전율, 절망과 슬픔을 정말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여.
  이 좁고도 작은 조국의 땅덩어리 안에서, 오로지 자신들과 자신들의 고향, 자신들의 도시만 홀로 버림받았다는 그 까마득한 절망감을 그리고 그 머리털을 쥐어뜯는 배신감을, 그 엄청난 고립감을, 그대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 동강난 조국 땅에서 그대가 태어난 고향이 어디이건, 그대의 직업이 무엇이건, 그대와 내가 쓰는 사투리가 다르건 비슷하거나 간에 말입니다, 그대여.  그 어떤 이기적인 정치』 욕망이나 이데올로기의 선둥이나 조종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인간성f: 대한 순수한 애정과 인간 삶에 대한 정직하고 의로운 신뢰 그것만을 무기로 삼아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그들 스스로의 등기와 자부심, 그리고 그 아름답고 처절한 몸부림들이 결코 신화가 아닌 진실임을, 그대여, 진정으로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대여. 그것이 바로 그해 오월. 이 도시 사람들의 일기장에 새겨져 있는 슬픔과 긍지와 자존심의 족보요 깊은 뿌리입니다.  이 조국 땅에서 그대의 고향이 어디이건 재산이 얼마이건 직업이 무엇이건 간에 그대여. 부디 편견과 이기심을 벗어 내던지고 진정으로 그대 이웃의 아픈 상처를, 그 슬픔과 한과 분노까지를 껴안아 줄 수 있습니까, 그대여, 해박하고 현란한 그대의 논리보다도 먼저 그대의 날카롭고 냉정한 판단력보다도 먼저, 그대의 순수한 맨 가슴으로, 맑고 투명한 인간애로, 욕심 없는 눈으로 그대의 이웃을, 동포를 껴안을 수 있습니까 그대여. 아직도 의심하며 외면하려 하는 그대여. 등돌려 앉아 있는 사랑하는 그대여.
  그리고는 그 열흘째 되건 날, 5월27일 새벽 3시 반. 기어코 저 청사에 길이 길 이 낚을 운명의 진압작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칠흑의 어둠이 뒤덮인 그 신 새벽에 이·도시의 하늘과 땅을 통째로 뒤흔들며 터 져 나오던 그 운명의 새벽녘 총소리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가 아마 포근한 그대의 안방 이불 속에서 곤하고도 평화로운 수면에 취해 있었을 바로 그 시각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신 새벽 내내, 이 도시 사람들 중 잠 들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만은 아무도 나누어 갖지 못 하는,아무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그들만의 통곡, 그들만의 분노, 그들만의 한의 덩어리였습니다,

10년 후에도 여전한 슬픔

  그런데도 그대여. 그날로부터 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통곡과 분노와 슬픔과 한은 여전히 그들의 손에 남아 있어야만 합니까. 그들의 통곡과 슬픔을 이렇듯 들으면서도 그대여, 아직도 그대는 그 날처럼 여전히 멀리에 있어야만 합니까.
  신문 방송마다 한결같이 그 열흘간의 시간을 「폭동」이요, 「난동」이라고 떠들어대었고, 그때부터 이 도시의 시민들은 모조리 「폭도」 ·-불순분자」가 되었습니다. 진압작전이 끝난 직후, 한동안 사진과 증언을 토대로 그간 시위에 참가한 주동자라고 색출되어 연행되기도 했고, 시민들은 부쩍 늘어난 반상회에서, 예비군 훈련장에서 정신교육을 받아가며 울분들 짓씹어야 했습니다.
  5공화국 시절 오랫동안 「광주의 열흘」이 다만 국민들의 입과 귀 사이를 은밀히 떠도는 「유언비어」로 남아 있어야 했을 때, 이 도시 사람들이 내내 어쩔 수없이 시달려야 했던 그 한없이 막막한 단절감과 고립감을, 고 울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당사자들에겐 피눈물나는 진실이 여전히 다른 수많은 이웃들에겐 「유언비어」나 「과장된 엄살」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았을 때 그들은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는지 아십니까.
  그건 말로 형언키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오욕과 분노의 슬픔과 한으로 점철된 처참한 삶 바로 그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87년 7월1일. 여당은 그 동안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금기  시 해왔던 광주사태에 대해 그 수습방안이란 걸 스스로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건 위령탑 건립,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보훈연금 수해, 정부의 유감 표명, 광주사태를 의거로 격상하는 문제, 특별 법 제정을 통한 적절한 보상 등이라는 거였습니다.
  결국 이 같은 선상에서 소위 민주화합 추진위원회라는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후 88년 4월1일에는 「광주사태치유방안」이란 것을 정부에서 정식으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그 엄청난 비극을 책임져야 할 가해 당사자들의 입으로부터 겨우 그 정도의 미미한 웅담과 변명을 얻어내기까지에는 무려 칠 년 반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잘 아시다시피 그 같은 움직임이나마 저들 스스로의 최소한의 책임감이나 반성의 결과 였다기 보다는,6월 민주화운동을 정정으로 하는 전국민적인 민주화의 요구에 쫓겨 막바지에 몰린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끌어낸 자구책이었음은 말한 나위도 없습니다만.

두 차례 선거에선 정치적 담보물로

  그러나 87년 대통령선거의 악몽이 닥쳐왔고, 이 땅은 어쩌면 다시는 찾아오기 힘든 민주화의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는 좌절감에 빠져들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정치지도자들의 야심이 빛은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집권당의 교묘한 분열작전에 이 땅의 지식인들과 재야까지 갈팡질팡 삐걱거렸고, 국민들 역시 덩달아 판단력을 잃고 허둥거렸던 산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두 차례의 선거에서 광주문제는 진정으로 민족이 한께 부둥켜안고 해결 치유해야 할 숙제로서가 아니라, 정당과 정치인들의 손에서 정치적 담보물로 변질되고 맡았습니다. 그리하여 광주의 비극은 어느 틈에 한 직역당의 선전 무기 내지는 담보물인양 보도되고 조장되었고, 그 현란한 정치 놀음판에서 정작 피해자인 이 도시의 시민들은 또 한번 가슴에 피멍울을 뒤집어써야만 했던 것입니다. 5·18의 진실규명과 그 비극의 치유를 호소하는 그들의 피맺힌 소망과 요구조차도 어느 틈엔가 「지역감정」이라느니「적대감」이라는 따위의 억지누명으로 둔갑되어 버렸고, 바로 그 무렵 사랑하는 그대 역시 더더욱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던 게 솔직한 사실이 아닙니까. 
  두 차례의 선거를 거치면서 국가운명의 중요 쟁점으로 돌출된 지역감정문제는 지금껏 귀가 아프게 들어왔고 도 일부 의식 있는 지식인층 사이에는 조차 그 말 자체가 자칫 이 나라 민중의 자존심과 성숙한 의식에 행여 무슨 불경스러운 흠집이라도 내는 것이기도 하는 양 쉬쉬하며 들먹이기를 꺼려하는 눈치이기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그것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오늘날 이 나라에 분명한 실체로 존재하고 있는 건 부인한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도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지역감정이란 말 자체에서부터 억울한 상처를 받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양대 선거를 치르면서 부각된 그 달갑지 들은 결과의 혐의를 타 지역 민들로부터 상당부분 거의 일방적으로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데에 대해 당혹 감과 허탈감 심지어는 어떤 배신감조차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80년 5월의 비극을 아직도 아물지 않은 커다란 생채기로 껴안은 채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로서는 그들의 진실과 아픔과 설움과 그 절절한 소망의 외침마저도「지역감정」이란 말로 너무도 쉽사리 매도해 버리려는 일부 이웃들의 몰이해와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또 한 번 가슴을 앓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지역감정이란 단어는 과학적인 용어가 아닐 것입니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는 한 지역이 다른 지역에비해서 과연 차별대접을 받고, 있는가의 여부일 것이고, 그 결과 여하에 따라 주민들의 의식 자체를 정직하게 검토해보는 일일 것이라고 나는 여깁니다.

고통나누기에 인색한 현실

  마침 지금 내게는 이년 전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광주시민사회의식조사」라는 제목으로 이 지역 사람들의 일반적 의식을 상당히 구체적이고 성실하게 조사 평가해 놓은 자료가 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중 6i.7%가 지역차별이 현재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며, 직접 간접으로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같은 지역차별의 기원에 대해서는 60.1%가 박정희 정권 당시의 1962년 경제 개발이후부터라고 응답, 전남지역이 경제개발과정에서 소외되었다고 본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근래에 전국적으로 표출된 지역감정이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라는 사실, 즉 계속 이어온 지역간 불평등 및 지역차별의 원인이 정부의 정책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 이 아닙니까.
  그러나 무려 삼 십 여 년에 걸친 그 같은 정치·경제·문화적 소외와 차별의 아픈 경험에 더하여,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80년 5월과 그 날 이후의 점철된 한과 슬픔의 응어리, 그리고 바로 그 같은 자신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고통을 기꺼이 나누어 갖기에는 여전히 인색한 이 땅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서글픔이 더더욱 이 도시사람들을 못 견디게 만들고 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대여.
  5·18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을 앞의 조사는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해결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그들은 5·18을 단순한 지역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즉 정부라고 한 경우가 37.3%이며, 전국민이라고 한 경우는 무려 과반수를 넘는 51.7%입니다. 즉 광주시민들은 이 민족적 비극을 치유하는데 있어서 전 국가적 해결(89% )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또 5·18의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민주 정부 수립(43.4%), 정부의 사과와 관련자 문책(16.9%),정확한 진상규명과 광주 시민의 명예회복(16.9%)을 들었습니다.  광주의 비극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돌아앉아 있는 그대여, 이렇게 그대는 얘기할지도 모릅니다. 이젠 나도 알고 있다고. 그들의 아픔과 소망까지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노라고. 하지만 이젠 더 이상은 그 비극의 상처를 역사 속에 묻어두고 잊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그 정도 했으면 쌓인 한풀이는 충분히 하지 않았느냐고. 더구나 이젠 새 시대 희망찬 90년대에 들어서지 않았느냐고. 십 년이나 지난 해묵은 밀에 더 이상 연연해보았자 우리 모두에게 무슨 이득이 있을 법하냐고 말입니다.
  물론 나도 알고 있습니다. 비극의 현장에 남은 불행한 역사의 흔적은 지겹고 두렵고 불쾌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은 끔찍한 피의 얼룩과도 같아서, 사람들은 누구나 그 꺼림칙한 혈흔을 기억에서조차 깨끗이 지워 버리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래서 아파 징징 우는 이웃의 울음소리를 고통스레 듣고 있진 않아도 되고 종내는 그런 불유쾌한 사건 따윈 애당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까맣게 잊고 지내게 되기를 훨씬 바라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대, 돌아앉은 이웃이여.
  행여라도 그대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그대는 여전히 이 도시 사람들로부터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십 년 전 오월, 그 열흘의 밤과 열흘의 낮에 또한 그러했듯이, 그대는 십 년의 세월이 흐를 오 늘 이 시각에도 바로 그때와 다름없이 이 도시와는 너무도 멀리에 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들의 가슴을 껴안고, 당신의 그 것과 똑같은 그들의 심장박동과 체온과 숨결을 진정으로 함께 느껴줄 수 있을 만큼 아직 그대의 가슴은 따뜻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래도 그간 6공화국은 부족하나마 나름대로 노력을 해오지 않았느냐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전 처음 국회 청문회라는 걸 몇 날 며칠씩 화면으로 생중계도 했고, 광주특위가 구성되어 현장검증과 자료수집도 했으며, 어쨌거나 전직 대통령이란 인기 없는 인물이 국회 답변이랍시고 한 건 산실이고, 또 사망자·행방 불명자·부상자의 추가신고도 받았고, 머잖아 그들에 재한 보상금을 지급하겠노라 는 발표도 있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과연 그럴까요? 그대는 정작 모르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모르겠노라고 목 부러진 꼭두각시들처럼 고개만 흔드는 철면피들과 오리발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너나 없이 다 같은 목격자이자 피해자이자 중인들인 이 도시 사람들의 가슴이 또 한번 얼마나 썩고 병들고 고름 투성이로 녹아 내려야 했는지를 그대는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비정한 정치현실의 논리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내 앞에는 지난 십 년 간 5·18에 대한 이 나라 정부와 사회가 취해 온 대응과정을 스크랩한 자료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 중엔 그 날 이후 지금껏 부상의 후유증, 상처악화, 또는 그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만도 무려 61명이나 된다는 기사도 있고, 암매장 당한 유골들을 여러 구씩 찾아내었다는 기사, 당시 겨우 네 살 짜리로 총을 맞아 불구가 된 휠체어의 소녀가 얼마 전 자살을 기도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는 최소한의 눈가림 식으로 광주문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정호용씨가 끝까지 자신에겐 책임이 없고 떳떳하다고 말했다는 기사, 또 그럴 게 퇴진한 지 불과 몇 달만에 국회의원 선거에, 그것도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출마한 그를 위해 2만 명이 넘는 지역 구민들이 지지집회를 열었다고 하는 기 사, 그리고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민주 화 투쟁의 선봉을 자부하면서 온갖 화려한 구호와 공약들을 외치며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어느 거물야당 정치인이 하루아침에 「신사고」「구국의 결단」을 내세우며 집권당 행랑채로 들어앉았다는 기막힌 기사도 들어 있습니다. 
  그대여. 지금 우리는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요.  앞 뒤 끝도 없고, 중심도 지조도 명예·자존심·판단력조차도 없고 인정도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는 듯한 이 땅 의 정치는 대관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중입니까. 십 년을 곪아온 이 도시 사람들의 생채기는 대체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합당인지 야합인지 모르되 거대여당으로 바뀐 뒤에 정부 여당이 최근 내놓은 광주문제 해결방안 역시 염려했던 그대로였습니다.
  소위 그 귀걸이인지 코걸이인지 모를「양시론」에 입각,「광주」에 대한 성격규정은 역사의 장으로 남겨두고, 우선 치유차원의 「보상」으로 해결하자는 식입니다.
  더더욱 우려를 아연케 하는 건, 명예회복은 거부한 채 다만 물질적 치유에 중점을 두고 「보상」을 규정함으로써, 피해발생 요인을 적법행위로 본다는 이른바 그 기본방향이란 것입니다.
  게다가 바로 지난해 3월22일. 광주시상무대에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하고 부근을 공원화하겠다고 여당 자신들의 입으로 발표했던 내용을 깡그리 뒤집어엎고는, 이젠 기념탑·기념관·기념일 등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보상금의 액수를 놓고도 요란스레 떠들어대는 참입니다만, 정작 광주항쟁희생을 그 명백한 진상규명은 거의없이 금전적 보상만으로 마무리해 치워버리려는 지금 이 당의 정치현실을 지켜보자니, 불현듯 그 비정하고 잔인한 논리에 소름이 돋을 것만 같습니다

이제는 서로 마주 보아야 할 때

그대여. 이 땅은 지금 행여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닙니까. 얼음장보다도 더 비정하고 잔인한 새디즘이 지배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게 아닙니까.
  제 자신만의 이기심과 탐욕과 욕심에만 눈이 뒤집혀, 못 가진 자를 길거리에 내몰고도 행복에 취해 잠자리에 들고, 무고한 이웃이 불구가 되고 미쳐 가는 현실에도 냉랭한 눈길로 내버려둔 채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고런 무섭고 소름끼치는 어둠의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건 혹시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젠 등을 돌려 우리 서로 마주 보아야 할 때가 아닙니까. 그대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대의 고향이 어디이든, 그대의 오해와 편견이 어떤 것이었거나 간에 그대여. 이재는 부디 이 오월의 아픔을 어느 누구의 것이 다닌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부둥켜안고, 진정한 이해와 진정한 신뢰로 그들의 고통을 그만 멎게 해주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십 년. 희생자는 물론 이 도시 사람들에게 채워진 족쇄는 십 년만으로 이젠 정말 족하지 않습니까, 그대여. 이제는 되돌아 높아 마주 봐야 할 사랑하는 그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