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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80년대의 예술적 성과. 이태호 외(월간예향, 1989. 5)

본문

80년대의 예술적 성과

무엇을 얻고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말씀해 주신분
□이태호<전남대 부교수>
□성은애<광주경상대 전임강사>
□김길수<순천대 조교수>
□사  회 : 김종남<광주일보 월간국 부국장대우>
  정  리 : 이종태 기자
  장  소 : 광주일보 본사 회의실
  일  시 : 1989년 4월 24일 오후 5시



  □사회 : 월간예향은 광주민중항쟁 9주년 특집의 일환으로 '80년대의 예술적 성과'라는 주제를 놓고, 80년대 우리 예술계의 큰 관심거리였던 민중예술인 대체 어느 배경에서 태어나고 어떻게 성장 발전하고 또 어떻게 나갈 것인지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80년대 들어 더욱 가열되고 치열해진 '민중예술'운동은 예술적 시각을 민중쪽으로 돌려 민중의 에너지를 예술로 승화하고, 또 소재의 다양화, 문화의 지역적 활성화, 고식적인 예술의 형식과 구조를 개혁시키는데 큰 성과를 거뒀다고도 하지만 반성해야 할 점도 많을 줄 압니다.
  차차 얘기를 끌어 나가면서 짚어가기로 하고 먼저 '민중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이름을 붙이게 된 개념 정리부터 시작해 보십시다.

80년 분수령으로 '민중'이 전면에 나서

  □성 : 문학분야에서 민중문학을 말하자면 70년대 들어 정립된 민족문학론과 연관시켜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70년대 민족문학론에서의 민족이라는 개념은 형이상학적 실체도 아니고 과거의 역사에 의해서 고정된 불변의 실체도 아니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어디까지나 민족성원 대다수의 삶에 의해 규정되고 그와 더불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 바로 민족입니다. 민족의 주체적 생존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가 문학의 건강한 발전을 좌우한다는 판단 아래 민족문학론이 성립하게 된 겁니다.
  여기에서 민중이 민족개념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주장이 민족문학론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런 과정에서 연결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올바른 민족문학이 곧 민중문학이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구체화된 것인지는 저도 자신할 수 없는 일이에요. 70년대 민족문학론의 중심과제였던 분단극복의 문학, 통일지향의 문학이 민중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는 문학과 따로 노는 개념인 듯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두 가지가 한 문제일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이 80년대의 실천적 과제로 제기되었다고 봅니다. 민중개념의 실체를 밝히려는 논의와 그것을 분단 문제와 연결시켜 해명하려는 노력이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편입니다.
  오늘 좌담의 주제와 연관하여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부각된 민중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각에서는 80년을 분수령으로 민중이 우리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부각되었다고 인식하는 데서 더 나아가 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소시민적 지식인의 운동으로 평가절하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습니다. 특히 문학에 있어서 80년 이전과 이후를 과도하게 단절된 것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사실 민중의 역량은 그 이전에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고 다만 그것이 전면적으로 가시화된 계기가 광주항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광주항쟁이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민중개념에 대한 보다 과학적 인식과 이념적 지향을 요구하게 된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치열한 사회비판, 뜨거운 호응받아

  □김 : 연극에서는 희곡 텍스트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희곡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민중문학의 경향을 따라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80년대 이후의 경향이고 80년대 이전에는 올바로 형상화되지 못한 단계였습니다.
  민중연극무대도 80년 이후에야 서서히 정착을 하기에 이른 것이고…. 물론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봤을 때 재야 연극인 그룹의 공동 창작적인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그것이 사회 비판적인 면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80년 이전까지는 연극에 있어서 민중의 본질적인 아픔, 민중이 역사 흐름의 주제가 된다는 시각이 무대에 있어서만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겉돌고 있지 않았나 합니다. 5·18광주민중항쟁이 커다란 전환점이 된 셈이지요.
  □이 : 민중미술이라고 하면 민중이 직접 참여하는 미술 혹은 민중을 위한 미술로 생각해 봅니다. 근래와서 민중미술이 등장하는 이유는 후자쪽으로, 미술이 역사의 주체인 근로대중에게 삶의 질적 발전을 가져다 주고 그러기 위한 사회변화에 힘과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즉 민중이 주인이 되는 올바른 사회로의 변혁을 위한 민중해방의 입장에서 미술이 어떤 도움 위치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로부터 출발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민중미술의 전통은 우리 역사를 발전시키려는 민중들의 노력속에서, 특히 봉건사회의 해체기 내지 근대사회로의 자주적 변환기에 민중공동체 문화의 활성화와 함께 등장한 선돌, 장승, 솟대, 민화, 무속화 등 그리고 건축이나 공예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민중미술의 자주성과 건강성을 잘 반영해 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정서의 뿌리인 셈이지요.
  더불어 민족미술은 민족해방, 즉 민족자존의 반외세 자주화의 처지에서 제기된 것입니다. 그 방향은 자주문화건설을 위한 식민문화척결과 민족정서의 회복, 올바른 전통의 비판적 계승등으로 정리되겠지요. 그래서 민족미술론은 우리시대 이전에도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진정한 의미의 사회실천과 민중을 기반으로 한 미술로 발전하는데는 미흡했고 한계를 지녔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연구성과로 그 당시의 진보적 미술이나 실천적 미술이 밝혀지게 되어 80년대 이후 발전한 민족·민중미술의 정통성라 올바른 자리매김을 찾는데 일조를 했다고 봅니다.
  사실 미술분야에서는 앞선 진보적 전통을 망각한 채, 그리고 문학의 진보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50년대 이후 70년대까지 민족·민중미술이란 용어를 사용한 일이 없습니다. 80년대 들어서도 전반기까지는 새로운 미술운동이라고 불렀으니까요. '현실과 발언'이나 시대 정신을 표방한 미술운동이 80년대 중반이후 삶의 미술로서 민중미술·민족미술의 방향성이 정립된 것은 무척 빠른 성장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민족미술과 연결해서 민족·민중미술로 정리하게 됩니다. 즉, 젊은 미술인들이 사회변혁의 올바른 민족·민중의 사회과학적 개념을 찾으려는 노력과정에서 그리고 그 변혁운동에 직접 뛰어들면서, 미술이 민중을 위한 예술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고 1985년 민족미술협회의 조직화로 발전됩니다.
  □사회 : 민중문학, 민중연극, 민중미술 즉 민중예술이란 역사흐름의 주체가 되는 민중이 직접 참여하는 예술 또 민중을 위한 예술이란 개념으로 정의되겠군요. 그런 민중예술이 우리나라 예술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김 : 연극에 있어서 민족연극과 민중연극을 획일적으로 구분하기란 어렵고도 어쩌면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연극역사는 70년 밖에 안됩니다. 그것도 최근가지 관념극, 종교극, 신화극 등의 서구지향적 번역극이 판을 쳤습니다. 이 서구적인 의식을 담은 연극들이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회의를 갖게 된 것이 최근의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진정 토속적이고 우리 민족과 동질적인 것은 없을까? 연극기법에서 보아도 서구기법 큰 우리의 놀이극 형태와 거리가 너무 멀지 않은가?
  이러한 차원에서 민족극의 탄생은 절실한 명제였습니다. 진정 우리 민족극이 의미가 있지 않은가 하는 요구였다고 봅니다.
  민중은 바로 삶의 한계성 밖에까지 던져져 있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된다는 필연성 그 자체가 연극이 바라보는 진정한 의미의 민중이라는 얘깁니다.
  □성 : 80년대 들어와 민족문학의 민중성이 보다 구체화되었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민중문학의 주체가 누구냐란 논쟁은 민중문학인 민중의 손으로 직접 쓰여진 문학이냐 아니면 민중적 시각에서 작품자체가 민중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냐란 문제에서부터 촉발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아가 민족문학의 민중성과 예술성의 문제, 당파성의 문제, 현실주의(리얼리즘)의 문제 등으로 진전되었는데 저는 이 논쟁이 가장 경제적이고 생산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주체논쟁의 비약적인 진전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이론에만 너무 매달려 정작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너무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만 여기서 진전된 점인 있다면 민중성이란 것은 전통사회에로의 막연한 회귀, 즉 이것은 서구의 것 저것은 우리의 것으로 구분지어 다시 우리의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향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입니다.

각성된 눈으로 민족의 현실 보는 문학을

  이 논쟁을 계기로 지난날의 역사적 경험을 냉철히 정리해 보고 이데올로기적인 제약 때문에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여러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었다는 점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될 것 같습니다. 70년대에 꾸준히 이루어졌던 제3세계 문학의 소개 및 보급, 그리고 동구권이나 소비에트 문학 및 이론에 대한 연구, 일제시대의 카프, 해방공간에 있어서의 문학 등을 재조명하는 작업과 더불어 '각성된 노동자의 눈'으로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는 민중문학을 지향하는 것이 지금 단계의 과제라 할 것입니다. 이는 민족문학이 기존의 문학에 도전하는 단계를 지닌 진정으로 우리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려는 노력이며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가운데 황석영, 고은씨 등 기존문인들의 끊임없는 문학활동이 돋보이죠. 박노해, 백무삼, 정인화씨 등 80년대 새로 이 등장한 노동자 시민들의 활동도 주목해 볼 만 합니다. 또 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연변, 북한 문학이 해금된 사실도 민족문학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 앞서 좋든 말씀이 미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봅니다. 저는 이제야 우리 미술이 사회와 대중과 함께 하는 올바른 길을 찾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안팎이 인정하듯이 이들 민족·민중미술의 성과로부터 비로소 우리가 세계예술사의 장에 떳떳이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사회 : 얘기하다보니 민족예술은 이제 우리 예술사상 움직일 수 없는 굳은 위치를 전하고 있다는 견해인 것 같습니다. 민족예술의 중심에는 항시 민중이 있고요. 5·18광주민중항쟁이 이러한 민중예술의 탄생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보는 시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노동현장에서 시장바닥까지 소재폭 넓어져

  □김 : 작품외적인 환경이 작품내부로 밀고 들어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5월항쟁이란 외적 변수가 작품의 내용에 어떻게 반영되었고 또 그것이 일반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점이 아니겠어요? 말하자면 소재의 폭이 넓어진다는 의미겠죠. 질펀한 시장바닥의 사람들, 수세 등 세금으로 고초를 겪는 농민들, 오염된 물을 추방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해직 언론기자, 이데올로기의 굳어버린 틀로 인해 고통을 당해온 사람 등 다양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노사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윤락가에서 성 상품으로 전락한 매춘부들에 이르기까지 폭이 엄청나게 확대된 것입니다.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애환 등 끈끈이 배어있는 우리의 삶이 곧 민중성이라 말할 수 있겠죠. 이 모든 소재들이 바로 5월 항쟁을 통해 얻어진 귀중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 결국 5·18 광주민중항쟁이 예술을 민중의 시각으로 눈을 돌리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김 : 맞습니다. 독재정권과 외세에 짓눌려 있던 예술이 80년 들어 제 위치를 찾은 겁니다.
  □이 : 미술의 경우는 5월항쟁의 영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변화의 폭이 다른 분야에 비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5월항쟁이 기폭제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민족 민중운동의 불완전성 때문에 예술 또한 완전한 민족민중예술이 되었다고 하기엔 어렵습니다. 심지어 광주에서조차 미술에서는 5월항쟁을 겪은지 10년도 채 안되어 벌써 그 교훈을 망각해버리는 한심한 경향도 나타납니다.
  80년에 와서야 자리잡게 된 민중미술의 근본문제는 내용에서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것과 함께 리얼리즘이었다고 봅니다. 우리 근현대 미술사에서 리얼리즘은 민중미술을 내세움과 함께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문학 예술운동, 해방공간의 문화운동을 들 수 있겠지만 보다 본격적인 것은 1969년 불발에 그친 '현실동인전'과 1970년대 중반 진보적 비평가에 의해 역사와 현실에서의 미술의 위치가 천명되고, 1979년의 '현실과 발언'에 의해 제기됩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들이 5월항쟁을 겪으면서 민중의 실체와 민족의 위상이 드러나고 그 이전부터의 노력과 그 동안의 역사체험이 집약되어 리얼리즘의 질적 양적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회변혁속에 미술이 뛰어들어

  그래서 80년대에 등장한 미술운동의 작업을 살펴보면 사회현실을 비판·고발하고 정치현실을 풍자하면 한편으로는 소외된 계층들의 삶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으려는 노력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형식면에서도 사회 현실과 역사를 외면한 채 70년대까지 화단을 풍미해온 모더니즘과 보수화단의 심미주의·형식주의와는 딴판으로 바뀌어 갔어요. 역사와 사회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형식, 리얼리즘 형식을 추구하게 되지요. 즉 기존의 미술활동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추구하고 사회 변혁운동의 전진 속에 미술이 뛰어든 겁니다.
  다음으로 5월항쟁 기간동안 선전활동의 체험입니다. 항쟁기간 중 시민군의 활동이나 주민들의 자발적 지원역량이 크게 돋보이는 것처럼 문화선전 때의 조직적 활동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뚜렷한 미술활동이 드러난 사례는 극히 적습니다만 구호 쓰기와 벽보·대자보 활동의 체험은 차후 선전미술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며 이를 계승한 미술인들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봅니다.
  그 발전적 예로 사회운동의 선전매체 활용과 특히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걸린 대형 걸개그림, 노동자·농민·학생들의 시위현장에 등장한 걸게나 깃발그림, 선전포스터, 만화 등이 그것입니다.
  □성 : 광주항쟁이 계기가 되어 나온 문학에서의 활동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우선 항쟁기간 중의 문학 활동은 손으로 제작한 유인물, 격문 등으로 나타납니다. 활동자체가 지극히 단순하고 순간적이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나게 큰 것이라 평가할 수 있죠. 내용이 대부분 날카롭고 투박한 것이긴 했지만 독재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민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데는 더할 나위없이 알맞은 형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계기로 기존의 장르인 시·소설 등이 아닌 수기·벽보·삐라들의 양식이 지니는 힘에 대하여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장르확산의 문제나 공동창작의 문제로 활발히 논의되기도 했습니다.
  5월항쟁을 겪고 난 후의 문학활동을 보면 그 초점이 5월의 체험을 문학에서 어떻게 수용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가로 집약됩니다. 물론 민주화에 대한 요구나 군부독재 청산, 외세배격 등은 5월 당시에나 지금에나 변함없는 민족적 과제임에는 틀린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5월의 체험을 제대로 형상화하느냐가 중요해요.
  5월항쟁을 계기로 나온 문학작품이 분단문학, 노동문학 같은 명칭처럼, 5월문학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상당량 축적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문학활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시로 광주·전남지역의 '오월시' 동인의 활동은 주목할 만 합니다. 시장르의 특수성 때문에 광주항쟁정신을 급박하고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어서죠.
  산문에 있어서는 장르상의 특수성 때문에 곧바로 대응하지는 못하다가 84, 85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광주문제를 조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분노만 토로하다가는 소시민적 문학전락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작전명령-화려한 외출', '찢어진 깃폭'등은 광주항쟁을 르포나 수기형식으로 쓴 것입니다. 그밖에 윤정모의 '밤길',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 서면',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 홍희담의 '깃발'등도 광주항쟁을 형상화한 작품들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하죠.
  87년에 나온 오월시 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을 지으랴'와 오월소설전집 '일어서는 땅'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광주항쟁 정신을 심층적으로 구현하고 있는지는 차후의 문제예요.
  그렇지만 5월 민중항쟁을 그린 5월 문학들이 성숙하면  할수록 구태여 소재를 5월에만 국한·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학살 진상규명이 아직 미흡한 단계에서 현장의 참상을 차근차근 고발하는 것도 여전히 진한 감동을 주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피해자나 운동권 학생들의 입장께서 분노를 토로하고 일에만 매달릴 때는 번민을 해소해버리는 소시민적 문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80년대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김남주씨처럼 민족·민중적인 일관된 시각이 필요합니다.
  □사회 : 미리 질문이 나가기도 전에 앞서서 민중예술의 특성과 고유정신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제 구체적 사실로 들어가 민중을 위한다는 민중예술이 어떻게 발전하여 민중과 현실에 어떠한 기여를 했을까 검토해 봤으면 합니다.
  □이 : 미술이 문학분야의 성과에 못미치는게 사실이 아닙니까? 예술의 순수성과 개인주의적 창작을 내세워 사회현실과 무관하게 진행되어온 미술이 늦게야 반성하고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세를 확립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죠.
  거기다가 미술활동은 미술이 갖는 특수성 탓에 뒤늦게 출발했음에도 어느 분야보다 시각적 충격이 크다는 이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5월을 내용으로 한 작품의 사례를 들어보면. 80년초 5월 충격을 형상화한 강연균씨의 그림, 홍성담씨 개인전의 '아버지의 땅', 이근표씨 개인전의 '자화상 시리즈'가 광주항쟁의 내용을 담아 내려는 의도를 보인 작품들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5월 체험의 형상화는 80년대 중반 홍성담씨의 판화작업으로 본격적인 선을 보였고 그 이후 개별적이나마 몇몇 민중작가들의 판화작업등을 통해 폭넓게 5월 미술로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미 형상화한 대형 걸게그림들 등장

  이들보다 오히려 뒤쳐진 인상이 짙습니다만 작년에 열린 김산하, 최민화씨 등의 개인전에서 5월의 내용을 담은 작품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5월을 총체적인 역사속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는 금년 4월 '민족해방 투쟁사'라는 공동작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91m 대형 연작 그림으로 광주, 전주, 대구, 인천, 부산 등의 민중미술연합 건준위에 의해 제작된 것이지요.
  그 동안의 성과 가운데 5월 항쟁이 미친 영향으로 주목되는 점은 특히 내용면에서 반미를 형상화해 낸 작업들입니다. 작년 5월제 때 전남대에 걸린 성조기를 찢는 대형의 걸게그림(미술패 마당 작), 그리고 금년도 남대협 출범식 때 등장한 '미제를 처단하자'는 내용의 대형 걸게그림(미술패 매 작), '함께 가자 우리'(미술패 신바람 작)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 각 대학마다 정문 앞에 바닥 그림으로 성조기를 그려 놓아 그것을 밟고 지나도록 한 일 등은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재인식 시켜주는 작업들입니다. 이는 5월 항쟁이 반제투쟁의 계기로 우리사회에서 미국에 대하여 정확히 인식하게 한 출발점이라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지요.
  앞으로 제가 관심을 갖고 지켜볼 단체의 행사가 있습니다. 5월 민주항쟁을 형상화하여 전시회를 할 예정으로 있는 광주·전남 미술인공동체의 5월 창립전입니다.
  □김 : 연주에서도 민중극이 점차 활성화되는 추세입니다. 이 시점에서 기존의 연극풍토를 알아보면 민중극과 좋은 비교가 될 것입니다. 연극인이 자각하기전까지의 대부분의 연극이란 인간내면의 딜레마, 애정극, 일반사회극, 번역극, 역사극 등 서구지향인 농후했습니다.
  그러나 기층민중이 역사 흐름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한 다음, 즉 80년대에 들어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시각이 점차 확대되자 민중극은 마당극으로 나타났습니다. 관객이 단순한 구경꾼의 입장이 아니라 참여자의 위치로 바뀐거죠. 마당극은 이점에서 역사나 사회의 오류에 대한 방관자의 입장을 벗어나도록 유도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입니다. 크게는 참여민주주의의 싹을 발아시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노동문제와 노사분규를 주제로 해 나타난 거리연극패의 등장도 주목의 대상입니다. 그 예로 부산연희단 거리패를 들 수 있습니다.
  연극의 이와 같은 경향은 예술작품이 환상·피안의 세계만을 표현한 게 아니라 심각한 현실을 확인시켜 주기에 이른 겁니다.
  수세문제를 들먹인 '황토바람', 농약피해의 딜레마를 얘기한 '밥', 공해문제와 식수문제를 현장에서 수렴한 '나의 살던 고향'등은 환상·피안의 세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독재질책·외세배격에 앞장선 마당굿

  특히 압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5공화국 시절에 마당굿으로 공연된 '호랑이 놀이·돼지풀이'는 외세를 배격하고 독재를 타도하며 집권층의 모순을 직격탄식으로 까발려 용기있는 연극 예술가들의 위상을 확인시켰다는 데서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극에서는 소재의 다양성과 함께 형식이나 기법이 상당히 바뀌었습니다. 즉 민중성을 많이 가미했다고나 할까요?
  예를 들자면 황지우씨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각색하여 연극화한 것은 하나의 센세이션이었습니다. 파행이자 충격이었지요. 내용은 5월 항쟁 당시 한 목사 아들의 고뇌와 애환 그리고 죽음을 다룬 것인데 연극적 요소에 시와 보고형식을 가미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무대 뒷면을 스크린화하여 5월 항쟁 당시의 그림을 슬라이드로 비춰주기도 했습니다. 이 연극은 그해 동아연극상을 수상했어요.
  '금희의 오월'은 실연도중 실제로 관객에게 전단을 뿌리고 슬라이드를 상영하는 기법을 삽입했었고, '일어서는 사람들'은 못나고 소외당한 사람들이 5·18 광주학살로 죽음을 겪는 과정을 극화한 것인데 여기에서 특이한 기법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힘의 표현을 진도북춤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 외의 다수 연극무대에서도 나름대로 민중성을 추구하여 진솔한 삶의 리얼리티를 표현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연극은 어디까지나 종합예술, 총체예술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발전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회 : 결국 민중예술은 기층 민중을 예술세계로 끌어들여 귀족화·관념화되었던 기존 예술의 구조를 깨면서 예술의 대중화 현실화를 이뤘고, 또 어두운 사회나 정치현실까지 파고들어 소재나 기법을 다양화하는 등 예술적으로 큰 성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군요. 물론 역으로 이런 예술이 민중의 에너지를 결집시키고, 승화시키고, 방향을 제시하여 민주화 운동이나 사회개혁에도 큰 힘을 끼친 것도 무시 못할 성과입니다. 외국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예술운동이 있었을텐데요. 한번 비교해 볼까요?
  □이 : 먼저 가까이에 우리와 비슷한 상태에서 근대사회를 맞이한 중국미술운동이 기억납니다. 중국 변혁운동기인 1930년부터 노신을 중심으로 한 젊은 미술인 사이에는 판화운동이 일었습니다. 사실 판화라는 것이 한정된 작품을 다수가 공유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 아닙니까-. 중국에서 판화바람은 당시 어려웠던 중국의 정치와 사회현실을 풍자 내지 비판해내어 대중의식을 고양시키고 그럼으로써 사회변혁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남미에선 벽화와 만화가 큰 힘 돼

  중국은 물론, 지금과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진 필리핀 2월 혁명에서 나타난 미술운동도 괄목할만한 것이었지요.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정치부패상황과 독재타도의 정당성을 포스터로 형상화하여 거리거리에 붙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시민들의 투쟁의지를 북돋아 주는 등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노동자를 중심으로 내세운 걸게그림이나 벽보그림의 형상화는 어떤 면에서 애국청년상을 주로 등장시킨 우리 미술보다 상당히 선진적 내용의 것이었습니다.
  한편 민족자존과 사회 변혁기의 중남미에서는 벽화와 만화가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벽화는 함께 하는 대중과 공유하면서 삶의 공간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자기 역사와 현실의 모습을 담아냄으로서 새 사회 건설의 자부심과 의식의 공감대를 형성시켰다고 봅니다. 또 만화는 대중과 친화력이 강해 이 만화를 통한 선전·선동활동은 상당한 효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민중해방 민주화 민족자주라는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발전한 우리의 모범적 선례입니다. 특히 이들이 지향한 대중성의 철저한 반영은 우리에게도 교훈을 줍니다.
  그밖에 구미사회에서도 미술가들이 창작활동을 하면서 사회변혁 운동에 앞장선 사례들은 많습니다. 붓보다 총을 들 시기가 오면 과감하게 붓을 꺾고 일어서 현실의 중심에 선 것이지요. 그 좋은 사례가 2백주기를 맞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19세기 혁명적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의 발전입니다. 아마 이 시기가 근대시민사회의 형성과 함께 한 세계예술사에서 리얼리즘의 큰 발전의 뿌리일 것입니다. 즉 근대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사회모순을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1871년 파리 꼬뮨때 총을 들고 인민위원으로 참여한 꾸루베나 도미에, 마네등에 대한 일화와 그들의 리얼리즘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것입니다. 물론 서구사회는 제국주의로 치달으면서 리얼리즘의 발전이 저지되고, 인상주의로 변질되면서 반대중 반사회성의 모더니즘으로 치닫게 되지요. 또한 서구유럽의 사례로 중국 목판화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케테 콜비츠의 미술활동도 관심을 끕니다. 철저히 소외된 계층을 위해 사력을 다한 목적의식성은 역시 사회 현실속에서의 미술의 방향과 미술인의 역할을 되뇌이게 합니다.

제국주의 침탈로 리얼리즘 발전에 한계

  우리나라의 경우는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의 침탈로 리얼리즘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한계를 갖고 출발했습니다. 그 이후 민족미술론과 리얼리즘의 발전은 앞서 얘기한 대로입니다. 우리는 리얼리즘의 역사도 짧을 뿐 아니라 표현에서도 아직 미숙한 면이 많습니다. 특히 발전이 늦은 이유는 내부적으로 시민사회로의 발전과 변혁운동의 미성숙한 면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과거 독재정권의 탄압때문에 소재제약도 있었고…. 이런 과정에서 제국주의 문화에 빠져든 미술가들이 현실에 뛰어들기 보다는 예술의 순수성을 내세워 자신의 안일을 위해 민중과 동떨어진 이념없는 작품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이지요.
  □김 : 60년대 독일에서 불붙은 독일 통합운동은 반핵운동·녹색운동과 함께 대표적인 이슈였습니다. 학생들과 어깨를 같이하여 분연히 일어선 사람들이 다름 아닌 예술가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존이 보장되는 국립극단이나 시립극단에서 빠져 나와 과감한 시대비판의 주역이 되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거리에서 혹은 공원 그리고 창고에서 어두운 삶의 측면을 파헤쳐 뜨거운 공감을 얻어낸 적도 있습니다.
  이태리의 경우도 다리오 포라는 민중작가는 없는 자들의 시각에서 독재정부의 행태를 고발하는데 천재성을 발휘한 바 있습니다. 소외된 민중들이 수퍼마켓을 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은 대단한 비극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희비극적 차원에서 민중극의 위상과 기법을 격상시키는데 기폭제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문학분야는 어떤지 몰라도 연극이나 미술분야에 있어서 독재정권에 대항하고 외세침탈을 거부하는 민중예술의 진원은 거의 대학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생경하여 세련되지 못한 작품들이 태반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투쟁꼭지를 북돋는 데는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문학 어떻게 수용하느냐'

  □성 : 우리의 민족문학이 옹골차게 발전하려면 외국의 선진적인 문학예술을 올바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수적이지요. 이미 외국문학 연구자들 사이에 주체적인 시각에서 연구하자는 풍토가 확산된지 오래고, 70년대에 이어 80년대에는 공산권 국가들의 문학,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민중문학이 통일지향의 문학이라 할 때 북한의 문학을 어떻게 읽어내고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관심사이고, 남북작가 교류문제도 이런 차원에서 제기되었다고 봅니다.
  □이 : 미술 역시 새로운 변화를 풀어낼 틀이 제기되면서 그리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성선생님 말씀대로 진보적인 합당한 이론을 수용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미술에서는 최근 중국의 현대미술의 소개가 충격을 주었고, 그 이후 제3세계 미술운동, 그리고 북한미술이 부분적이나마 알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해방 후 북한미술은 그 동안 닫쳐지고 왜곡돼왔던 북한의 사회문화의 단면을 이해하는데 디딤돌이 되었고, 통일된 우리의 현대미술사를 끌어내야 한다는 소명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지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민족적 형식을 기반으로 발전한 북한미술에서 그들대로의 사회건설에 맞추어진 방향성과 철저한 대중성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사회 : 민중예술은 우리 예술계의 대단한 활력소가 되었고 어느 의미에선 구태의연한 예술계를 혁신하는 새로운 기원으로 높이 평가되기도 했는데요. 공이 많으면 반성해야 할 점도 없을 리 없습니다. 민중예술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민중예술이 지닌 한계와 개선해야 할 점과 아울러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진단해 볼까요?

'미적쾌감 부족, 구호 일변도' 아쉬움

  □김 : 제가 말이 너무 많았는데요.(일동 웃음) 또 제가 먼저 얘기해야겠습니다. 소재가 민중과 아주 가까워지고 형식이나 기법 면에서도 서구지향성이 연극과는 상당히 다른 면을 많이 보이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미적 쾌감이 부족하고 거개가 구호 일변도이며 고발 자체에 머물러 사실성이나 현실성이 결여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조야하고 거친 배우술도 문젭니다. 또 생산자들 대부분이 재야그룹이나 특정 놀이패 위조로 되어 왔기에 수용자, 즉 단순한 감상층과 거리감을 좁히기 힘들다는 거죠. 이러다 보니 기성극단들이 점차 민중극을 외면하게 되고 보편적인 텍스트로 발전하지 못하게 되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당연히 관객도 특수층에만 치우치는 경향이고….일반관객들의 기호와 생산자들의 의도가 서로 연결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일어서는 사람들', '금희의 오월', '한씨 연대기', '변방에 우짖는 새', '칠수와 만수', '시민 K' 등을 어느 정도 일반 고객들의 호응을 받아 내는데 성공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산자들이 '관객을 무시하고는 연극이 있을 수 없다'는 자각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민중극에서 시적요소, 서사극적요소등의 삽입도 중요한 일이지만, 놀이 언어, 육체언어 등 새로운 집단 총체 연극을 위한 배우술의 개발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진도북춤, 슬라이드 삽입등은 훌륭한 착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놀이마당의 이론적 탐색작업

  연극인들도 이 지역 전유의 문제라고만 얘기해온 광주항쟁 문제, 수세문제, 빨치산 문제등을 작품화한 연극이 서울 및 전국 각지의 사람들에게 보여지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제 예술도 특정관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아픔을 전국민에게 고발하고 일깨워주는 것이어야 하며,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비판하여 여론을 수렴시키는 차원까지 극작술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정통 리얼리즘 무대는 기존 재래극의 범주에 속한 것이고 민중연극은 마당굿이나 서사극의 틀거리에 속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면 이제 이 같은 묵은 틀이 하루빨리 깨뜨려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측면에서 '금희의 5월'은 민중적 소재가 사실주의 무대에서 그 미적 효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새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배우술 또는 무대 미학적 요소, 놀이마당의 이론적 탐색작업등이 아직까지 성숙되지 못했음은 부끄러운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시정키 위해 전문 연극학과의 창설이나 시립극단의 부활은 시급한 문제입니다.
  연극의 생산자와 수용자가 심각한 현실을 함께 인식하고 공유하여 능동적인 극복처방이 창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민중연중은 중대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극장-거리굿-현실-사회의 패러다임이 동일선상에서 보다 진지하게 모색될 수 있었다는 점은 민중연극의 성과요,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 싶습니다.
  □성 : 분단문학·노동문학·5월문학 등의 개념은 각분야의 소재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연결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문학·연극·음악·미술등 각 예술분야도 따로따로 놓아서는 안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5월 작품들도 단순히 5월만을 형상화한 특수소재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사실 광주 민중항쟁은 광주시민만의 민주화투쟁이 아니었잖아요. 전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광주에서 특이 폭발적으로 표출된 것이지요.


  87년 6월 민주화항쟁도 광주항쟁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하려는 과정중에 나온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5월의 참뜻을 되새기며, 그에 안주하지 말고 보다 새로운 지평을 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5월에 안주치말고 새 지평을…

  '알맹이는 남고 껍데기는 가라'는 신동엽 시인의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요. 6월 항쟁 이후의 문학을 살펴보면 기성작가의 정진과 신진작가들의 활발한 움직임이 어울려 상당히 밝은 전망을 갖게 합니다.
  □이 : 미술에서도 우선 대중성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대중성은 바로 보다 더 진전된 리얼리즘의 요구라고 봅니다. 그 좋은 사례를 5월 항쟁과 관련하여 들어보면 87년 5월 가톨릭미술관에서 가진 '5월 그날이 다시오면'이란 사진전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80년 5월 당시의 사진들은 예술성이 적음에도 그 동안의 어느 미술보다 그날을 새롭게 각인시켜 주기에 충분하였고 미술관을 꽉메우고도 몇 백미터씩 줄을 선 관중들에게도 그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점은 바로 사진이 갖는 리얼리즘의 강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그 리얼리즘의 강점을 미술분야에서 어떻게 재창조해 낼 것인가는 바로 미술인들에게 주어진 과제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민족·민중미술은 그 나름대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소외된 민중의 삶과 모순된 사회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또 그것을 통해서 현실모순을 인식시키는데는 일정 정도 기여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의 미술운동이 시각적인 소리는 높았는데 그러다보니 관념적으로 흘렀고, 사회변혁에 얼마나 힘이 되었는가 혹은 민중 삶의 질적 발전에 기여하였는가에는 한계성이 있습니다. 보다 사회 발전을 위하고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향한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면서 항시 민족내부에 정확히 기반을 둔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미술이기에는 아직 미흡한 단계라 봅니다.
  우리의 미술인은 5월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을 계승하고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바 즉, 민주화와 민족자주의 조국통일을 정확히 전망해내고 그에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로대중의 현실에 다가가서 민중 모두가 함께 감동할 수 있는 민족정서를 기반으로 한 사실주의 미술의 천착, 올바른 사회를 관통할 수 있는 미학의 정립, 그리고 그것을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미술인 대중조직의 강화 등이 요구된다고 됩니다. 특히 이 발전에는 5월의 문화·선전활동의 체험이 더욱 귀중하게 여겨지는데, 앞서도 얘기했습니다만 현장운동속의 걸게그림 등에 나타난 실천적 미술과 최근 확산된 벽화운동의 발전과 공동창작 활동이 그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역사진보와 민족현실을 정확히 꿰뚫을 수 있는 세계관을 통한 개인적 창작도 소홀히 해서는 아니될 일입니다.

벽화운동·공동창작운동은 바람직한 방향

  이러한 올바른 일들이 순탄하게 진행되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미제와 그에 움직이는 파쇼정권이나 독점자본의 막강한 탄압이 지속되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최근 우리 사회에 번진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전민중의 통일 열망의 한반영이 분명한데 그에 대한 폭압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의 대중적 열망과 사회 변혁의 경험을 통해서 지배권력의 탄압과 역사진보의 문화적 대세를 꺾을 수 없음을 그에 따른 좌절이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 : 장시간 감사합니다. 끝으로 저희 예향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시면…. 오늘의 주제인 민중 예술과 관련된 충고라든지….

민중의 의식 일깨우며 앞서나가야

  □이 : 저도 예향의 내용변화와 활약은 눈부실 정도로 두드러진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불만인 것은 비교적 많은 지면이 미술분야에 할애되는데 저의 입장에서 보면 예향에 실린 그림들이 기성작가들의 이익만을 대변해 오고 있을 뿐 진정한 사회발전이나 민중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주고 있어요. 물론 이번 5월호에 광주민중항쟁 주제의 작품들이 실린 것을 보았지요. 이것만으로도 꽤 진전된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저의 소망이라면 통일의 그날까지 진정한 민중에 복무하는 그림으로만 가득찼으면 합니다.
  그래서 광주미술인들이 각성하도록 말입니다. 5월을 체험하고도, 지난한 우리 현대사를 살면서도 사회현실에 무심한 채 오밤중을 헤매는 미술인이 진정 민족광주의 한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 : 물론 예술이 마음을 순화시키고 아름답게 해주는 것은 좋아요.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지도 하고…. 하지만 그것이 현실상황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퇴행하는 상황아래서는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고 앞서 나가 민중을 주도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향이 진정으로 민중과 호흡할 수 있는 잡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