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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문화에 나타난 5·18정신. 문병란 외(금호문화, 1989. 5)

본문

문화에 나타난 5· 18 정신



참석자 : 문병란(조선대 교수 · 사회)
            강연균(서양화가)
            김준래(시인)
            박효선(연 극인 )
            오창규(민중가요운동가)
일  시 : 1989년 4월 3일
장  소 : 금호문화회관 회의실



  사회 ▶ 여기에 계시는 분들이 직접 겪었고 이 고장뿐만 아니라 역사상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록되는 80년 5월. 이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은 무엇이며 80년 5월은 문화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9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자리 매김 해보고, 이 정신을 길이 호남의 정신으로 남기고자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문학을 비롯하여 연극 · 미술 노래 등 각 분야에서 참석하셨는데 각 분야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우선 광주 민주 항쟁의 역사적 성격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죠.
  강연균▶ 광주민중항쟁은 기존질서에 대한, 그리고 응고되었던 우리 분단민족의 현실을 생각하게 한 계기가 아니었나 봅니다.
  김준태 ▶ 광주민중항쟁 정신은 그냥 80년대에 생겨났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5월의 정신을 저 멀리로는 갑오농민정신으로부터 시작해서3 1운동, 1929년도에 있었던 광주 학생운동, 그리고 6 · 10만세운동,4 · 19학생 의거로 이어온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광주민중항쟁은 동학농민운동의 반 외세 반봉건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운동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이 통일이라면 통일의 그날까지는 반 외세, 반봉건의 속성을 끝장내는 정신을 또 한번 80년대에 보여 주었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성격은 반 외세, 반봉건이라는 큰 두 줄기를 이어받았다고 봅니다.
  박효선▶ 광주민주화운동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 군사적 측면과 민중항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성분에 관한 것입니다. 시민 군들의 무장투쟁에 대한논란이 많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서는 시민들의 무장투쟁은 필연적인 것이었고 이것은 민주화운동의 변혁선상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가지 도청을 사수하며 싸웠던 사람들은 대부분 근로대중들이었다는 전 입니다. 그들이 만약 패배주의로 끝났다면 역사적 의의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끝까지 목숨을 걸고 나라의 민주화와 외세 척결,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자는 것이 그들의 뜻이었고 의지였습니다. 이렇듯 5월 항쟁은 기층 민중들의 민주화운동이었고 이것은 또 하나의 출발점을 낳았다고 합니다.
  사회 ▶ 우리들이 5 · 18을 항쟁이라고 하기도하고 봉기, 투쟁으로까지 이야기를 하는데 그 개념의 정립도 필요하리라 봅니다. 그럼 80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그 이후에 크게 달라진 점을 생각해 봅시다.
  박▶ 80년 5월은 지난 20여 년간 지속되어온 운동의 방법을 새롭게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70년 초반. 민청학련 사건을 중심으로 일련의 운동이 기층민 중의 힘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우면서도 상당히 구호 적이고 명분 적인 측면이 강했는데 80년을 기폭제로 해서 민주화운동의 진정한 주체는 역시 민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즉 기층민중으로의 운동 확산, 그것은 기층민 중의 계급적 자각이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창규▶ 저도 그 말씀에 동감합니다. 80년 이전에는 반 독재 민주화 운동 차원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는데 광주항쟁에서 미국의 개입이 하나씩 객관적으로 증명되면서 우리의 민족분단과 군사독재의 가장 근원적인 조정자가 외세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미방 등 일련의 반미운동이 거세 게 일어났습니다. 즉 반 외세 자주화운동이 조직 적으로 펼쳐졌는데 이는 광주민중 항쟁이 곧바로 민족통일운동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 부연하자면 반 핵 운동도 광주항쟁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강▶ 저희들은 6 · 25세대입니다. 6 · 25후에 우리가 가장 부러워했던 사람은 미군부대 P보에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을 우리의 구원자처럼 느꼈고 지금까지도 우방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막연히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느꼈던 미국이 광주를 버렸습니다. 저는 미국의 허구성과 미국은 진정우리의 우방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때야 느끼게 됐어요.
  박▶ 광주항쟁 이전까지는 미국에 대해서 낭만적으로 생각해왔으나 5월을 기점으로 해서 미국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5월 항쟁이 있은6개월 후에 일어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입니다. 저희 극단 「토박이」에서 연극 「부미방」을 기획하고 있는데 광주항쟁을 리얼하게 다루다 보니까 꼭 미국부문이 걸리더군요. 광주항쟁은 이미 반미 항쟁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 을 민족분단의 가장 막중한 책임자를 우리는 미국과 소련으로 봅니다. 더욱 남한측에서 보면 미국이 분단의 가장 큰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광주항쟁도 분단의 역사 속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가령 통일이 됐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통일의 그날이 빨리 오리라 믿습니다.
  사회 ▶ 광주항쟁은 우리 민중의 근원적인 생각을 바꾸었고 반 외세 반 제국 운동을 통하여 민족주의를 성장시켰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제 문학운동과의 관계 속에서 오늘논의의 본론에 조금 접근해가죠. 우선 문화운동의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봅시다.
  박▶ 문화운동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적인 변혁운동이 아닌가 합니다. 정신적 변혁운동이란 사상 투쟁이라 할 수 있죠. 한 시대의 변혁운동의 줄기를 형성하는 곧은 사상, 주된 사상을 계속적으로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운동이라 봅니다.
  사회▶ 갑오경장이라든가 문학상의 질풍노도운동도 반봉건운동이거든요. 그런데 5 · 18이후문화운동은 통일을 지향하고 민중적 사상을 자각케 하는 운동이라 생각합니다. 문학에 나타난 j.18이후의 문화운동에 대해서 김준태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 저는 80년 이후 문화를 전투적 개념으로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화는 우리들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정신, 또는 문화를 밥이나 우리 생활의 자체로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즉 문화는 정치며 밥이고 경제 등등 모든 것입니다. 그러기에 문화는 우리 삶 자체의 흐름, 이것을 전폭적으로 담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강▶ 저는 그림을 그려 오면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보질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일상적으로 그려왔고 그것을 그냥 생활처럼 해왔습니다. 그런데 80년 이후, 민족 주체성 내 지는 자존심, 우리들이 처 한 모습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이 민족 앞에 무슨 보탬이 될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사회 ▶ 광주는 참 여러 가지로 우리들에게 위대한 스승노릇을 한 것 같습니다.
  오▶ 5 · 18 이후 '님을 위한 행진곡'등을 부르면서 광주시민들의 공동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렇듯 5 18이후 역사의 변혁 주체가 민중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노래운동이 펼쳐졌습니다. 민중가요를 통하여 공동의식을 확인하고 하나의 힘으로 집결하는 문화운동이 어느 때보다 확연했다고 봅니다.
  사회 ▶ 80년 이전에도 민중운동이라는 것을 했는데 80년 이후에 보다 더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지역문화운동에까지 확산되었고 이러한 문화운동이 5월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봅니다.
  김 ▶ 5 18에 나타난 문화를 보게 되면 뭐니뭐니해도 공동체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농경사회에서나 볼 수 있었던 시민 공동체 정신을 우리들은 봤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같이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힘이었습니다. 3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언제 어디서든지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공동체 의식이며 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민족의식의 자각을 절 정화 시켰습니다. 남이 우리를 절대 안도 와준다는 자각이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스스로 이 땅을 지켜야 한다고 자각한 것입니다. 또한 외세에 대한 새로운 눈뜸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민중문화에 접촉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미술 · 음악 · 문학 · 굿 등 장르는 다르지만 이 것이 혼연일체 종합예술로 통합되어 나타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봅니다.
  사회 ▶ 싱클레어는 힘의 예술이라고 말하면서 예술은 선동적이고 선전적이며 투쟁적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5 18이후 예술이 투쟁적으로까지 나가지 않았나 생각해 됩니다. 개인적인 예술론에서 사회 적인, 민족적 인 예술로 발전했고10일간 광주의 체험들이 하나의 과장도 없이 예술로 나타남으로써 변혁의 힘을 가져왔다고 봅니다. ,
  박▶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동체 개념, 굿, 놀이 개념은 80년 광주항쟁이 1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합니다. 공동체라는 용어자체가 낭만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민공동체와 시민의 통합된 정신이라 하는 차원을 넘어선 기층민중정신의 새로운 전망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대중에서 민중으로, 민중에서 노동자, 농민으로 기층민중들의 계급적 자각이 5· 18이후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굿」을 하더라도 그냥 모여서 떠드는 게 아니라 우리들이 자각하고 있는 하나의 민족적 목표, 예를 들어 민주화면민주화, 통일이면 통일, 대동사회면 대동사회,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사회로 나가고자 하는 의식운동으로 차원을 높인 운동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오▶ 5 · 18 당시에는 노래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없을 정도로 노래의 빈곤 시대였습니다. 그때는 「애국가」라든가 「우리의 소원」을 많이 불렀고 심지어는 논산 훈련소에서 불렀던 노래를 민중운동에서까지 불릴 정도로 민중의 노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가 어떤 노래였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노래를 빌어다가 힘을 축적시키고,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데 한 수단이 되었다면 넓게 봐서 민중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강▶ 그렇죠. 그래서 마당 굿을 하는 분들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요. 우리시대는 식민지 치하에서 몇 십 년, 군사독재치하에서 몇 십 년 살아오면서 민중문제, 민족문제를 희석시키기 위한 그들의 정책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놀이 마당을 갖지 못해 왔어요. 말하자면 우리들이 도이면 다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를 게 없어요. 그래서
우리들의 공동체 의식을 노래로써 발산시키질 못하고 자연 우리들의 공동체 의식은 그 힘을 잃고 말았죠. 그림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쁜 여인상이라든지, 장미 등 아름다운 그림만 그리는 것을 국전에 입전 시켜 미술의 흐름을 잡고 있었고 민중이라든지 서민 대중의 삶을 그린 그림은거의 낙선이었거든요.
  그래서 놀이마당 하신 분들이 이제는 우리의 이야기를 끌어내어 한마당이 되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노래, 굿의 장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오▶ 그 동안 노래운동에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80년 당시 민중가요의 절대빈곤을 외식한 몇몇 정예집단들이 조직적인 노래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들이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노래운동을 펴다가 81년 겨울에는 광대 패들이 모여 「넋풀이 」라는 카세트 테이프를 제작합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5 · 18이후 노래운동의 가능성을 확인케 해준 전환점이었습니다.
  「광대패 」들이 만든 테이프 중 「영혼 결혼식 」에 담긴 「님을 위한 행진곡」 노래는 82년, 83년에 전국 화되면서 전국의 대 학생, 농민, 노동운동 쪽에 서 노래 창작 활동이 눈에 띄게 활성화되었습니다.
  85년, 광주민중문화연구회가 창립되면서 다른 많은 분야와 함께 카세트 테이프를 통한 노래운동이 본격화 췄고 그중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려는 일환으로 광문협이 제작한 「광주의 5월이 여」라는 노래 극 테이프는 전국으로 보급되어 어떠한 성명서, 대중시위보다 더 큰 효과를 얻어냈습니다. 「광주의 5월이여.」에 수록된 「출전가」「노래 」 「꽃잎처럼 금남로에 」 「오월가」등은 바로 그 다음해인 86년 인천시위 때 불려졌고 대학가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는 민중가요가 아닌가 합니다. 이밖에도 80년 이후 약 5년 동안 불려졌던 민중가요를 모은 「의연한 산하」를 비롯하여 테이프 제작을 통한 노래운동은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고 나아가서는 민족통일운동에까지 이르게 했으며 이러한 노래운동은 85년 이후 본격화됐습니다.
  이를 발전시켜 87년도에는 광문협 산하에 노래패 「친구」라는 노래운동집단을 창립하여 대중공연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동안에는 테이프를 통해서 은밀히 보급되었던 노래운동이 도심의 한 가운데서 의례적인 공간을 확보하고 그 공간 속에 불특정 다수를 초대하여 운동가요들을 직접적으로 감상하게 해주는, 그래서 시위공간에만 떠돌아 다니는 시위용 노래가 아니라 시민공간 속에서 감상할 수 있는 노래로 정착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88년까지 4회 공연을 해왔는데 소위 민중가요는 악 쓰면서 부르는 반항적인 노래가 아닌 가곡보다, 다른 어떤 노래보다 더 진한 감동을 안겨주는 노래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전남대, 조선대, 순천대, 목포대 등 대학가에 민중가요 노래패들이 조직되고 있어요. 또한 노동운동 속에서도 일꾼마당이라는 놀이 패를 조직하여 노래와 연희를 본격적으로 해나가고,88년도에는'재1회 전국대학생 통일노래 한마당'을 열어'노래운동은 통일운동'이라는, 즉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민족운동으로서의 중요한 한 몫을 당당히 해내고 있다고 봅니다.
  사회 ▶ 그중 하나 빠진 것이 있는데 오창규씨가 방송매체를 통해서 의식화 노래를 보급하다가 문제가 되어서 방송시간을 뺏겼던 사실도 기억할 만하죠.
  박 ▶ 노래는 확실히 들을 때마다 다른 예술장르보다 아주 짧은 시간에 민중들의 정서를 통합해내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강 ▶ 6 · 25 때 인민들이 내려와서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주는 것이 인민가요입니다. 저는 그때 불렸던 노래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그만큼 노래는 쉽게 대중들의 정서에 투입할 수 있고 가장 운동성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 ▶ 처음에 광문협에 노래패 「친구」가 만들어졌을 때 그 당시는 저 개인적으로는 얼마나 실력이 되겠느냐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하루 이틀 성과들이 쌓여지고, 그 효과가 대단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창력은 둘째치고 자체창작력이 대단하고 지금 대학가에서 불려지는 노래가 대부분 노래패 「친구」들이 제작한 노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될 거예요. 운동가요 는 광주에서 만들어져서 전국으로 보급되고 있는 실정이죠.
  사회 ▶ 앞으로 더 많은 활들을 기대 해봅니다. 5 : 18이후 주도적인 큰 역할을 한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죠. 광주를 중심으로 5월을 소재로 한 문학이 80년 이후 많이 창작되고, 80년 5월은 근원적으로 창작행위에 새로운 변혁을 가져왔는데 5월 이후 문학의 성과에 대해서 김준태씨께서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김 ▶ 80년대 문학의 큰 맥락은 5월 항쟁 문학입니다. 5월 항쟁 문학의 문을 연 것은 시였고,87년 이후부터 소설이 나타납니다. 80년을 기점으로 문학은 운동성을 띠고 삶의 현장으로 뛰어나오는 실천성과 그리고 오늘날 문학이 어떠한 위치에 와있는지를 재조명하는 역사성을 띠고 있다고 봅니다.
  그림 5월 항쟁 문학에서 광주의 경우를 보면 초창기에는 「절은 벗들」 그룹들이 「벽시운동」을 통한 창작 활동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5월시 」동인들의 창작활동은 전국적으로 5월이라는 테마를 환산시켰으며 「목요시 」동인들의 활동, 그리고「원탁시」동인 들의 창작 활동이 괄목할 만 합니다. 그리고 전남대, 조선대, 순천대, 목포대 등 대학가의 문학 팀들이 아주 열심히 썼습니다. 특히 전남대의 「오월문학상」은 전국의 대학가로 5월 문학운동을 펼치는데 기여했습니다.
  이렇게 5월 항쟁문학은 지금까지 쓰여왔고 앞으로도 계속 쓰여질 것입니다.  소설부분에 있어서는 그 동안은 닫혀있는 소설들이 많았는데 5월을 거치고 나서 이데올로기를 격파시키는 문학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5월 항쟁문학은 그 동안 금기시되었던 4 · 3 항쟁의 문을 열어주었고 거창 양민학살을 새롭게 조명하는 소설이 나타나게 했으며, 빨치산 문학을 탄생시켰습니다. 또한 최근에 물밀듯이 북한문학이 출간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었던 이데올로기 문학을 격파시키는데 5월 항쟁 문학은 공헌을 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분단극복문학, 즉 통일 지향적 문학을 탄생시켰으며 교육문학운동, 농촌현장문학, 노동 운동문학, 반 핵 · 반 전 운동문학, 반미문학으로 80년 이후 문학의 큰 흐름을 잡을 수 있습니다.
  또한 광주지방에 많은 출판사가 생겨 광주에서도 이제는 많은 사회과학 책들이 나오고 있으며 80년 이후 문학의 새로운 양상은 르포문학의 등장입니다.
  르포문학의 물꼬를 튼 것은 황석영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남사회운동협의회 간)였으며 그 이후 「5 · 18광주 민중항쟁 증언록」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윤재걸 작) 「오월의 그날」 (박남선 작), 「10일간의 취재수첩 」 등 르포가 문학의 장르로 깊숙이 자리 매김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시들과 소설, 르포들이 앞으로 5 · 18 을 논리화시키고 열어 가는데 큰 역할을 하리라 보며 이는 5 · 18정신을 이 땅의 모든 삶 곳곳에 스며들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5월은 끝나지 않고 통일의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회 ▶ 아주 소상하고 구체적으로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힘전 이랄지 홍성담을 중심으로 미술 해방 사랄지 판화운동 등 미술계에도 많은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데‥‥‥
  강 ▶ 민중문학, 민중굿 하듯이 80년대 이후에 등장한 것이 민중미술입니다. 「현실과 발언』전이 기존의 시각을 다른 시각으로 돌리는 계기가 되어 그후로 광주에 사는 몇몇 작가들이 광주항쟁 때 느꼈던 역사적 체험을 그림 속에 조형화 해보려는 움직임이 80년대 초에 일어났습니다.
운동은 대중성이 있어야 하는데 대중성 그 자체를 회화에서는 굉장히 매도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80년 이후 소위 민중 미술론이 대두되면서 응고되었던 미술계에도 새로운 자각과 민족 문제를 들춰내기 시작했습니다.
  홍성담을 비롯하여 진경우, 김경주, 김산하등 젊은 작가들이 5월의 항쟁을 형상화하기 시작했고 특히 홍성담은 판화를 통하여 5월의 진상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민중회화를 두 가지로 보는데 치열하게 민중 속에서 살면서 그들의 삶을 그린 것이 민중회화냐, 아니면 문틈으로 내다보면서 민중을 테마로 해서 고발적인 것, 민중적인 것을 그린 것이 민중회화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둘 다 민중회화라고 봅니다.
  그러면 민중회화는 운동성만을 내세울 것인가가 문제인데 물론 운동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면서 처절하고 깨진 그림만 그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건강한 모습을 그려가면서 5월 정신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미술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국가에서 큰 미술관을 만들어서 좋은 작품을 사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해야 돼요.
  김 ▶ 5 · 18이후 나타난 걸개그림은 민중회화로서 큰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 반면 강연균씨의 작품들은 80년 이후 고향에 대한 재인식 같은 것을 가져다 주었는데 비롯 그 속에는 낫들고 있는 어머니는 안 나타나지만 어머니가 살았던 고향의 모습을 보여주고 생명의식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사회 ▶ 그럼 연극분야로 화제를 돌려보죠. 민들레 소극장을 중심으로 마당극을 비롯 현장 굿을 많이 펼쳐 왔는데 80년 이후 연극계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으며 5월 정신을 어떻게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까.
  박 ▶ 70년대 초반에 일기 시작한 탈춤 붐 운동부터 실질적인 우리 나라의 문화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것이 70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마당극운동이 나타나는데 광주에서는 1979년12월에 결성된 극단 「광대」에 의해서 마당극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극단 「광대」는 그 당시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었던 돼지파동을 소재로 한 「돼지풀이」 마당극 공연(80년 3월 광주YMCA)을 가져 마당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줬습니다.
  마당극이 80년 초에 극단 「광대」에 의해서 반짝 빛을 발하다가 80년 5월에 민주항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전 「광대」 단원들이 광주항쟁에 직접적으로 참여 하게 됩니다. 저도 그 당시 연극작품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지금 계엄군에게 항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모두가 참여를 했어요. 그래서 항쟁 기간에 시민궐기대회를 주도하고 유인물작업, 가두방송, 시민들을 결집시켜서 정신 교육 혹은 무기사용법들을 연극 패들이 주도적으로 해갔습니다.
  그런데 도청 앞 광장 분수대는 또 다른 연극무대였고 그 무대 위에서 살아있는 배우가 생생한 연극을 하게 되었고 연극이 개인의 작업이 아닌 이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작업이라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80년 5월은 연극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충격적 경험으로 다가왔고 그 뒤에 상당 기간동안극단 「광대」들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이83년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마당극이 본격화되면서 5월 정신을 담은 작품이 무수히 쏟아졌습니다.
  82년에는 극단 「신명 」이,83년에는 극단 「토박이」가 창단 되면서 이 두 극단들 중심으로 광주항쟁의 정신을 담은 공연물들을 살펴보면 대략4가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첫째,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것을 알리고, 그리고 민중에게 새로운 세계관과 밝은 미래를 펼쳐 보이는 작품.
  둘째, 반미 자극화 계열의 작품.
  셋째, 반 독재 민주화 투쟁에 중심을 두는 작품.
  넷째, 통일문제에 관한 작품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변혁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는 「안담살이 」(극단 신명 ),「이웃사람」(극단 토박이 ), 「타오르는 현장」(일꾼마당), 「신부」(극단토박이 ) 등이 있으며 반미지열의 작품으로는 「하이파이에 돌아와서」 (호랑이 놀이」 등이 있습니다. 반 독재 민주화운동으로써는 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에서 87년 5월 8일,「어머니」라는 작풍을 공연하였는데, 이 작품은 아주 감동적이었어요. 아들과 딸들을 감옥소에 보낸 어머니들이 모여서 당신들이 직접 배우로서 무대에 등장해 이 어머니들ol 처음에는 단순한 가족주의적 성향에 젖어들어 자식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관점에서 점차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의식화되어 투쟁의 선봉에 나서는 그런 작품이었어요. 이 작품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해준, 그야말로 살아있는 연극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단독강화」, 「그 입술에 파인 그늘」등 5월의 정산을 계승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광주에는 광주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 8개 소집단이 있는데 4개 팀이 연극 패입니다. 극단 「토박이」, 극단 「신명」「황토바람」「일꾼마당」이 그것이죠. 이러한 소집단들이 전국적인 규모에서 놀랄 만한 성과들을 속속들이 발표하고 있고 각자 자기가 맡은 분야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이 하는 작업은 5월정신의 계승이면 서 5월 정신을 결코 정체된 정신으로써가 아니라. 발전되고 새롭게 변증법적으로 변해 가는 작업으로 해내고 있습니다.
  작년 4월에는 전국에서 진보적인 연극 단체가 참여하여 펼쳤던 민족극 한마당에 극단 신명은 「일어서는 사람들」을, 토박이에서는 「금희의 오월」을 가지고 참가하였는데 이 두 작품은 5월 정신을 계승하고 이 5월 정신을 역사 속에 어떻게 자리 매김을 해야 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가지고 전국순회공연을 여러 차례 가지면서 5월의 정신은 전국에 알리는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에도 극단 토박이는 반미문제를 다룬 「부미방」을, 극단 신명에서는 농촌의 수세문제를 다룬 「황토바람」을 가지고 참가합니다.
  이렇게 연극계에서도 광주정신을 계승해내려는 일련의 작업들이 거대한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상업극 지배문화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던 대다수 연극단체들에 대한 새로운 경종의 의미가 있으며 이러한 연극운동을 통해서 꾸준히 연극이 민중과 함께 하고 민중의 정서를 담아 내는 작업으로 성숙, 발전되리라 믿습니다.
  사회 ▶ 오늘 이 좌담회는 5 · 18정신은 문화운동의 차원을 떠나 민족운동, 통일 운동의 근원적인 힘이고 단순한 향유의 문화나 즐기는 문화에서 삶의 문화, 나아가서는 반제 반 외세,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족예술, 통일예술의 근원임을 재확인한 자리였습니다. 앞으로도 모든 예술분야가 연대감을 가지고 민주화와 통일조국을 앞당기는 데 모든 노력을 경주합시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