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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소시민적 문학관을 비판한다. 이강은(노동해방문학, 1989. 5)

본문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소시민적 문학관을 비판한다



이강은(문학평론가)



1. 머리말

  홍희담의 「깃발」은 광주민중항쟁(이하 '광민항쟁')을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창작과 비평』 복간호(1988)에 실렸던 이 작품은 발포되자마자 즉각적으로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반응에 나타난 각 계급적 입장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지만, 이 작풍으로 인해 광민 항쟁에 대한 문학적 관심이 상당히 증폭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최근 새로운 작품 「이제금 저달이」 (『사상운동』 창간호, 한마당, 1989)에서 노동현장에서 싸우는 한 노동자가 광민 항쟁의 체험을 오늘의 의미로 되살리는 장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광민 항쟁을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는 소설에서 간접적인 소재로 다루고 있는 소설로의 변화가 보여주는 변화의 폭은 광민 항쟁의 역사적 층위를 암시하는 것 같다. 즉 광민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 위에 또 다른 많은 역사가 쌓여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광민 항쟁을 간접적인 소재로 다룬다는 것이 광민 항쟁의 역사적 의미의 퇴색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광민 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이제금 저 달이」의 주인공 광한이 임금인상투쟁과 해고복직투쟁의 과정에서 광인항쟁 기간에 묻어 두었던 총을 되찾는 장면은 광민 항쟁의 투쟁 성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즉 광민항쟁의 역사적 의미가 현재적으로 구체화되는 장면인 것이다.
  광민 항쟁을 오늘의 시점에서 재해석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민중의 줄기찬 투쟁은 광민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조망할 수 있도록 해준다. 더욱이 86∼88년에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민중진영 와 위대한 정치적 진출은 변혁운동의 과학적 전망을 더욱 구체적으로 열어주고 있다. 이 땅의 노동자계급이 변혁의 주력 군으로서, 민중의 영도자로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젓이다. 이제 남한사회의 모든 착취와 억압을 물리치고 전 민중, 전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역사적 과제가 노동자계급의 어깨에 부과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단련의 장으로 기여하여야 하는 문학운동 역시 이러한 역사적 요청에 부응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광민 항쟁의 문학적 형상화 역시 현실적으로 요구되는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단련에 기여해야 된다는 일차적 목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즉 광민 항쟁은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한 철저한 재해석을 바탕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우리 사회의 변혁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전망을 획득할 때에만이 광민 항쟁의 올바른 문학적 형상화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학은 항상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미래의 전망을 획득하느냐에 따라 문학적 형상화의 수준도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에의 전망, 변혁에의 전망이 추상적이거나 모호하거나 소시민적 한계에 갇혀 있을 때에는 결코 올바른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문학이 창조될 수 없는 것이다.
  광민 항쟁의 문학적 형상화는 이제 광민 항쟁의 참혹성을 전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란 고것을 전달함으로써 민중을 어떻게, 어떤 투쟁의 경로로 서게 하느냐에 핵심이 놓여져야 한다. 광민 항쟁의 가위에 짓눌려 위대한 투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광주근처를 서성이는, 한 시인 의 말대로 "무등산을 한삽씩 떠가려"고만 하는 소시민적 문학관은 이제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해한 관점에서 「깃발」과 「이제금 저 달이」, 「여기 식민의 땅에서」,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등 근래에 발표된 광인항쟁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문학에 대할 소시민적 관점들을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2. 「깃발」에 대한 소시민적 문학관

  앞서 언급하였듯이 「깃발」은 발표되자마자 다양한 문학적 평가를 받았다. 다양한 문학적 평가는 상호 대립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논쟁 속에서 길 계급의 문학관이 아울러 폭로되기도 하였다.
  『오늘의 소설』(현암사, 1988) 권두에 실린 좌담 "민족문학. 주체논쟁"에는 「깃발」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이 드러나 있다. 우선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주창한 바 있는 김명인은「깃발」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광주문제라는 것을 노동자의 시각에서 해석했다는 것"이라고 전제한 후에 노동자의 시각이 「깃발」 전체에 관철되어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파고 설명한다.


  「깃발」의 경우는 그것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노동자적 시각을 갖는 것, 노동자적 시각을 전제하는 것이야말로 사실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나간 사건, 지나간 역사, 그리고 현재 진행되는 부분들, 이것들을 노동자 계급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바로 다음의 부분들, 앞으로 오는 미래의 어떤 역사의 전개과정이나, 이런 부분에 있어서 반성할 점, 취할 점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깃발」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했느냐면, 그 당시에 살아있는 사람들of 고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소설을 끌고 나온단 말입니다. 예컨대, 형자라는 노동자가 상당히 각성된 노동자여서 그 당시의 광주사태의 과정 속해서 노동자 주체 문제를 계속 들고 나온다는 걸이죠. 그런데 이것은 제 생각에는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노동자 입장에서 80년대 광주 항쟁의 정황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당시에도 노동자가 주체로 의식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광주항쟁이 노동자가 주체로 서서 이끌고 나가지 못했던 그런 의식화되지 못한 계급 연합적 단계의 투쟁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오히려 더 철저하게 노동자의 시각으로 보는 거란 말이죠(김명인, 35면)

  김명인이 말하는 "노동자적 시각"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위의 글에서 보자면 노동자계급의 시각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실상은 광주항쟁 참여자인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설 때에만 역사적 전당을 획득할 수 있다는 올바른 정의를 내리고서도 「깃발」의 노동자 계급적 시각여부의 판단에 있어서는 광주의 "사실성"(그 때 광주에서는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는 식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곧바로 「깃발」은 엄밀한 의미에서 노동자 시각에서 본 것이 아니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과연 타당한가.
  "노동자계급의 시각"은 한 개별 노동자의 시각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사상에 입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깃발」에서 노동자계급의 시각이 관철되고 있는가의 판단 기준은 노동자계급사상이 어느 정도 구현되고 있는가에 있다. 그것은 주인공 형자가 선진 노동자라거나, 혹은 노동자들이 광민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라든지, 계급 연합적인 단계의 투쟁이 밝혀지고 있다는 이유로 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들은 노동자 계급의 시각을 구성하는 부분적 요소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결정적인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깃발」이 문제가 된다면 바로 노동자계급의 변혁사상이, 변혁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열망이 현실 속에서 얼마만큼 전형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는가가 문제가 되어야 한다. 막연히 노동자의 신변에 일어난 광주항쟁을 그렸다고 해서, 또는 선진노동자의 대대적인 항쟁참여를 그렸다고 해서 노동자계급의 시각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문학이 광민 항쟁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에 일조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사실의 복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적인 재해석에 의해서이다. 문학에 나타난 광주는 얼마든지 "사실"과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좌담의 상대역 중 정과리와 홍정선은 이와는 반대의 의미에서 문학에 대한 소시민적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노동자의 시각이 관철되어 있느냐 안 되느냐) 봐야 될 것이 아니라 작품을 꼼꼼히 읽어 가면서 정말로 노동자의 삶의 체계에 대해서 이 작품이 내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고 싶단 말이죠. 실제로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깃발」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아요. 이미 노동자의 진정성은 절대적인 인정으로서, 명제로서 주어진 상태에서 그것을 도식적으로 확인해 나가는 거죠(정과리, 37면)
  「깃발」에서 도달하는 어떤 각성된 의식이랄까 이런 것들을 실제로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양상으로 우리가 간주한다면 오히려 여러 가지 공포와 두려움과 위기의식, 이런 것들이 구체성에 있어서 더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을까요(38면) ‥‥‥ 한 개인이 느끼게 되는 어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그것에 의한 개인의 파멸을 통해 이 세상의 끔찍함을, 광주에· 있어서의 무자비함을 증언하는 것 역시 의미 있지 않느냐는 거지요.(홍정선, 39면)

  정과리는 주로 형상화의 측면을 문제 삼는다. 「깃발」이 과연 얼마만큼의 감동력을 지니고 있으며 독자에게 노동자의 삶에 대해 얼마만큼의 내용을 전달해주고 있느냐에 판단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는 명제는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실현하는 방법만을 문제삼고 있는 듯이 하여 언급을 회피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의 논리는 노동자의 시각으로 광주항쟁을 본다는 명제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전형적인 소시민적 논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홍정선의 주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그러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시각을 원칙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있으며 가능하면 소시민적 공간 속에서 소설의 감동을 누리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여진 두 입장은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문학과 사회』, 2호)에 대한 평가에서 또다시 반복된다. 「저기 소리 없이‥‥」는 광민 항쟁에서의 폭력성이 인간의 정신 속에 내면화되는 과정을 파편적으로, 정신병리학적으로 나열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태의 본질, 즉 폭력성에 대한 접근을 매우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고 있다. 사물의 명백한 본질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고 하여 본질이 강요하는 압박을 마지 못해. 최소한으로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사태의 본질에 정확하게 다가서지 않아도 별로 손해날 것 없는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한 계급적 토대는 본질에 대한 명백한 인식을 유보하거나 편리한대로 왜곡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또는 본질에 힘차게 다가서는 것을 일정하게 가로막는다. 「저기 소리 없이 ...」는 이처럼 광민 항쟁의 폭력성을 폭력 일반의 문제로, 화해 주의적 시각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과리와 홍정선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 소설을 극찬하고 있다.

  최윤의 소설은 상당히 중층구조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소녀의 독백으로 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소녀가 만나는 인물들의 진술의 구조로 되어 있어요. 마지막으로 하나는 소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서술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 층위가 겹쳐 나가면서, 막막한 장벽처럼 존재해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폭력, 공포, 해악의 관계가 차츰 허물어집니다. (정과리, 41면)

  이는 마치 작은 소유지의 쟁탈전을 통해 서로 불신을 쌓아 가는 소시민의 존재에 대한 도덕주의적 설교를 연상시킨다. 자신들의 사회경제적인 지위에 대한 궁극적인 탐구를 외면하고 주어진 영역에서만 화해를 도모하자는 선전인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폭력, 공포, 해악을 조장하는 근본적이고 주요한 원인에 대한 이해와 폭로, 투쟁을 배제하고 복잡하고 화려한 자기 번민에 인간의 적극적인 창조적 열정을 국한시키려는 소부르주아 계급성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뒷골목의 폭력배에게 매맞은 어떤 두 사람이 폭력배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하거나 보다 본질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실천적인 경로를 찾아 나서지 말고 은밀한 카페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가 맞을 짓을 했지, 우리도 때로 폭력을 사용하잖아. 인간 사회에 유력은 나쁜 거야. 우리 자신부터 자신의 폭력성을 벗어나야 하는 거야. 그래, 맞아' 등등의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폭력배가 존재하기는 해도 이제 집에 돌아가면 적당한 유희와 살림이 존재하며 자신의 작은 소유지가 아직은 그래도 존재하기 때문에 공연히 폭력배에 맞서 싸우다가 그나마라도 잃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을 폭력배에게 가로막혀 있는 계급은 반드시 그 길을 통과하기 위하여 모든 단결된 힘과 가능한 모든 수단, 모든 지혜를 짜내어 그 폭력배에 대항하여 승리를 위한 일전을 치를 수밖에 없다.
  정과리와 홍정선의 소부르주아적 문학관에 맞서 싸워야 할 김명인은 이 들의 논리를 본질적으로 폭로시키지 못한 글. 「저기 소리 없이 」가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지 않고 "실제 그런 상황이 가능하지 않다"라든가  "살아있는 인물, 생동하는 사람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구조가 천박하다는 것이 아니라 디테일이 전혀 리얼하지 못하다" 는 등 피상적 지적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논리의 착종 및 편향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우선 문학에서 "노동자적 시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문학, 또는 예술일반에 관한 오해의 소산이기도 하다.
  문학이념과 문학의 미적 형식이 결합하여 문학작품(형상화)으로 생산되고 그것은 인간의 문학적 체험으로 작용한다. 문학적 체험으로 동기 화된 인간은 현실에 실천적으로 작용하고 다시 그 실로부터 작가는 문학이념을 이끌어낸다. 이 각각의 범주들은 상호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이를테면 "노동자의 눈"이라는 범주는 문학이념에 해당하며 이것은 작품의 미적 형식과 독자의 문학적(형상적)체험, 실천 등과 긴밀한 연 관을 지닌다. 고러나 또한 이것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범주이다. 따라서 미적 형식의 수준에 따라 문학적 이념의 참과 거짓이 가려질 수 있거나 문학적 이념에 따라 형상화의 수준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문학적 이념이 참이냐 거짓이냐에 따라서 독자의 실천의 참과 거짓이 가려지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 각각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판단근거를 가지고 있다. 아울러 문학의 본질적 특수성은 그것이 인간의 미래와 관련되어 있다. 형상적 체험으로 일정하게 현실에 대한 동기부여를 받은 인간의 어떠한 소망과 열정, 확신을 지니고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느냐에 문학의 가장 일차적인 관심이 놓여진다. 문학과 미술은 인간의 정서적 측면(신념. 확신, 정열, 원망 등과 같은 주관적 측면)의 형성에까지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노동자적 시각"의 참과 거짓은 형상(이념과 미적 형식의 결합인)이 표방하는 이념의 참과 거짓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지 미적 형식의 문제(위에서 논의된 바와 같은 사실과의 일치여부 등)가 이념의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깃발」의 형자가 과연 노동자계급사상을 어떤 수준으로 표현하고 있느냐가 바로 노동자의 시각에서 「깃발」이 씌어졌느냐 아니냐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셈이다.
  문학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사회학주의적 이해는 백진기에게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변혁운동과 그 부문운동에 대한 형상화」 (계간 『선비』, 1988년, 여름호)라는 글에서 그는 「깃발」이 "노동자계급 당파성이 지도하는 민중성"과 그 "주도성"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안고 있으며 이 오해로부터 「깃발」의 오류가 파생된다고 한다.

  「깃발」에서 보여준 기층 민중의 변혁주체로서의 계급 성을 전폭적으로 수긍하면서도 작가가 놓치고 있는 당시의 객관적 정세를 부분적으로 지적해 보았지만 전체소설의 구성에서 볼 때 어찌보면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노동자계급 당파성이 지도하는 민중성'과 그 '주도성'이 잘못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의 대부분은 작가가 항쟁의 계급성을 보다 분명히 각인 시키고자 목적 의식적인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인물로 보이는 노동자계급 필자로부터 파생된다. (127면) ‥‥‥ 그녀가 하필이면 내부투쟁을 야기한 또 하나의 객관적인 조건, 즉 타도대상에 대한 고도의 분열공작에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이 오직 계급적 차별성에만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은 또 어찌된 이유인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광주항쟁이라는 객관적 실재의 사실성에 비추어보았을 때 '노동자계급 당파성이 지도하는 민중성'과 그 '주도성'을 형자가 감당하기에는 이 인물의 설정이 너무 작위성이 짙고 그만큼 추상적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지적해 둬야 할 것 같다. (128면)


앞서 지적한 그릇된 문학적 이해가 여기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우선 '노동자계급 당파성이 지도하는 민중성'과 그 '주도 성'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하자면 제국주의와 그 매판세력들은 (신)식민지 민중들에게 모든 모순을 집중적으로 전가하기 때문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직접적 담지 자인 기층민중들은 노동자계급을 지도성과 주도 성으로 하여 변혁의 전과정을 통해 해결해 나갈 궁극적인 주체로서 설정되는 것이다. (밑줄 필자. 129면)

  문학이 인간을 변혁운동으로 동기 부여함으로써 변혁에 기여하게 된다는 당연한 명제를 되새기면서 인용문을 읽어보자. 백 진기는 민중이 향후의 변혁과정 전체에 걸쳐 궁극적인 주체이기 때문에 민중 내에 차별성을 인식시키고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사상적 무장의 강화를 꾀하는 것은 궁극적인 동맹자를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식민지에서의 민중의 실체는 무엇이며 변혁운동에서 어떠한 지위를 부여받는가 등의 문제에 대한 백 진기의 이해는 사회과학적 인식에서의 오류일 수도 있다고 이해하자.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이 지도하는"에서의 '지도'는 과연 어떠한 지도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물론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사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이 민중에게 지도하는 내용으로서의 과학적 사상의 형성과 그 형성을 지향하고 촉구하는 문학이 왜 통일전선을 저해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소부르주아의 주도에 의한 통일전선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통일전선문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통일전선이란 정치적 과제를 둘러싸고 다 계급, 다 계층이 연합하거나 동맹을 맺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원칙적인 사상적 타협이나 절충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의 사상을'유보, 내지는 폐기하여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주도적으로 통일전선을 건설한단 말인가. 일시적인 투쟁과제 때문에? 타 계급을 기만하여 투쟁에 동참케 하기 위해서 ? 결코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통일전선 내에서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독자성은 더욱 강고히 유지되고 강화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통일전선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더욱이 세계관의 반영이자 세계관의 함양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는 문학의 영역에서 통일전선문학이라는 개념을 굳이 사용해야 한다면 정치적 통전의 과제를 곧바로 통전 문학의 과제로 수용하는 속류적 이해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통전적 과제를 가장 올바르게 수행하도록 노동자 계급의 영혼에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보다 깊고 풍부하게 불어넣어 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통일전선문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깃발」의 평가를 둘러싸고 진행된 몇 가지 편향된 견해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정작 「깃발」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우선 이 작품은 광민 항쟁 당시를 작품의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주인공으로 선진노동자를 채택하고 있다. 선진노동자인 형자는 부단히 계급적 차별성을 강조함으로써 노동자의 주체적 자각을 강조하지만 군사독재정권과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적 투쟁성에 있어서 형자가 부단히 강조하는 차별성이 질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아무런 규정도 없다. 또한 민중적 투쟁에 참여하는 노동자계급의 전망이라든지 사상적 맹아가 그토록 차별성을 강조하는 타 계층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형자는 선진 노동자로서 민중적 투쟁의 영웅 상은 될 수 있으나 새로운 역사적 전망을 거머쥐고 현실을 지도해 나가는 노동자계급 당파성이 온전히 구현된 인물은 되지 못한다. 또한 새로운 사상적 세례를 선사하지도 못하면서 동질적인 민중세력과의 차별만을 부각시키려는 형자의 태도는 노동자 우월 주의를 선전할 위험이 많다. 이 작품은 광민 항쟁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그려냄으로써 노동자계급에게 민중적 자부심을 불어넣고 투쟁성의 계승을 촉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시대에서 요구되는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수준에는 현저히 미치지 못하고 있다. 홍희담의 근작.「이제금 저 달이」역시 노동자 광한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으나 광민 항쟁의 투쟁성을 계승하고 있을 뿐 노동자 계급의 사상적 맹아의 배태에 있어서는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의 성과라면, 노동자인 광한의 혈연적 뿌리가 농촌에 닿아 있고 노동자의 현실과 농촌의 현실이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아래 더욱 가혹하게 착취당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이 땅의 민중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투쟁의 대열에 들어서고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즉 민중들의 불퇴전의 투쟁의지와 정서가 고취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들의 투쟁성을 '지도'할 역사적 전망은 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작가는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이 참담한 현실이 단순한 자연발생적인 투쟁에 의해 변혁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사상적 무장과 전국적인 조직적 결속에 의해서만 변혁될 수 있다는 것을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 작품에서 보여지듯이 노동자계급의 시각을 견지하고자 하는 작가의 주관적인 의도가 노동자 소재주의로 전락할 위험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3. 반미문제와 광민항쟁 - 「여기, 식민의 땅에서」

  백진기는 앞의 글에서 광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광주항쟁이 지닌 변혁운동상의 정통성은 1946년 '10월 항쟁', 제주도 4. 3항쟁, 여 ·순 항쟁, 1948∼50 기간의 남한 내전이라는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변혁운동의 현재적 관철형태라는 점에 있다. 피로 얼룩진 우리의 현대사에 있어서 변혁 대상과 변혁주체의 입장에서 변하지 않고 있는 이러한 합법칙성은 광주항쟁을 분기점으로 반 외세·반 독재의 80연대적 지평의 난제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125면)

  백진기는 광민 항쟁이 민중적 투쟁의 역사적 정통성을 잇고 있으며 민중적 투쟁의 전람은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변혁대상과 변혁주체는 민중ol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마지 역사적으로 변하지 않고 있는 합법칙성이라고 단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광인항쟁은 '변하진 않고 있는 합법칙성'에 따라 '노동자계급 당파성이 지도하는 민중성'과 그 '주도 성'에 입각하여 형상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민중 내의 차별성을 밝히는 것은 민중의 결속력을 저해하는 것이고 민중의 투쟁 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가능한 한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주체화를 내세우기보다는 민중의 연합 전선적 이념에 따라 문학적 형상과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을 있어서 반미주의 소설의 풍미는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비과학적인 민중 관으로부터 파생된,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의 불철저성과 그것의 반영인 반미주의 문학들은 자칫 급진 민족주의적 편향, 또는 소재 주의 적 경향으로 경도 되고 만다. 진정한 반제투쟁의 의미에서 반미의 문제가 고려되지 않고 그 계급적 내용 성을 상실하게 늘 띨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선전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광민 항쟁을 반미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반미투쟁에 주체로 설 수 있는 범주로서 민중을 상정한다는 논리 역시 이런 의미에서 일면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미의 문제는 반제의 내용 성을 분명히 획득할 때 올바른 형상화가 가능하다. 즉 그 내용성은우리의 변혁운동에 있어서 노동자 계급의 주체화와 깊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정도상의 「여기, 식민의 땅에서」는 광민 항쟁과 미국의 문제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이해하도록 구조화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본질이 제국 주의적 본질로까지 심도 있게 형상화되기보다는 미군 면세품을 빼돌리는 조상사의 후견인으로, 조상사의 상납을 받아 먹는 착취자라는 수준에서 고치고 있다. 작품의 결말에서 조상사의 대리인인 전 병장과 조 상사에 대한 투쟁보다 그들을 틀어쥐고 있는 맥도널드에게만 투쟁의 총구를 돌리려는 고병장의 논리는 매우 작위적인 셈이 된다.

  싸움의 대상이 분명해진 셈이야. 맥도널드가 나를 다신 에스-파이브로 보내겠다고 하는 게 이상했어. 그리고 원대복귀를 끄집어냈거든. 우리가 전재환이 하고 노태욱이를 이기기 위해선 맥도널드를 작살내야 돼. 그렇지 않고 전 ·노 병장하고만 싸운다면 뒤에서 맥도널드 그 늙은 여우가 계속 비호할 거란 말이지 또 한 가지는 그 두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징집 당한 사병일 뿐이야. 그 행위가 밉기는 하지만서두. (녹두들 1, 369면)

  맥도널드로 대변되는 제국주의적 요소가 충실하게 폭로되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조급성은 단순히 형상화의 능력부족에서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제국주의가 운U 사회 속에 어떻게 침투하여 종속성을 심화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깊이 있는 현실이해와 현실접근의 부족이 보다 큰 이유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전 ·노 병장의 제국주의에의 종속성을 인간적인 동포애로 감싸안아야 한다는 이 느닷없는 도덕주의는 무엇인가. 물론 변혁운동은 특정한 개인의 파멸을 목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개인의 도덕적 완성을 의도한다.  제국주의에 기생하여 독점적 이익을 폭력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군사독재정권과 독점재벌의 구성원들의 진정한 인간적 해방은 바로 그들의 토대를 무너뜨려 주는 것이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여기, 식민의 땅에서」는 군사독재정권과 독점재벌에 대한 투쟁을 동포애적 견지에서 포기하고 오직 반미직투를 선전하는 듯한 알레고리는 작품이 근거하고 있는 현실이해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멀리 따로이 존재하는 외국군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로 채화되는, 신 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채화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인하여 광민 항쟁의 형상화에 있어서 편향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소설로는 김종인의 『무등산』 (열사람, 1988)이 있다. 이 작품은 광민 항쟁에 참여하는 학생대중과 하층 도시민, 소부르주아들의 투쟁현장을 배경으로 광민 항쟁파 미국의 관련을 추적하며 미국의 본질을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미국이 제국주의적 본성에 대한 현재적 관점이 명료하게 제시되기보다는 미국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환상이 개져 나가는 수준에서 형상화되고 있다. 『무등산』이 도달하고 있는 사상적 수준은 광민 항쟁의 민중적 투쟁성에 대한 찬사, 미국에 대한 자유주의적 환상의 깨어짐 등에 머물고 있다. 이는 남한사회 변혁운동이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 목적을 가능하게 할 실천적 경로에 대한 천착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4. 광민 항쟁과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형상화

  광민 항쟁을 소재로 취하고 있는 몇 편의 소설과 평가들을 노동자계급 당파성 문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을 문학에 담으려 할 때 우선 대상(객체), 즉 소재에 대한 주체의 태도(당파성)가 가장 주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대상이 지니는 고유한 성격에만 관심을 고착시키는 것은 자연주의적 태도이다. 물론 대상이 지니는 고유한 성격이 이념적 규정력을 지니는 측면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규정력에 대한 선택에 있어서 조차 주체의 태도가 배제되어 있기 마련이다. 대상의 규정력에 대한 충분한 고려, 그리고 대상과 주체가 맺는 ,객관적인 관계의 반영이 바로 문학적 형상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객관성에 대한 그릇된 이해방식은 광민항쟁을 형상화한 작품을 평가할 때 여실히 드러나기도 한다.

  ‥‥‥ 이 소설 (「깃발」)의 중심축은 타 계급에 대한 모든 기층 민중의 강구한 계급적 차별성을 정면에 묶어 세우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광주항쟁에 대한 모든 평가보고서와 그대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항쟁에 대한 객관적 실재의 사실성을 제대로 반영해 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충주 항쟁을 다룬 대부분의 소설과는 큰 낙차가 있는, 이른바 '하향적 수직이동'을 이룬 작품임이 분명하다. (백진기, 앞의 책 126면)

  위의 글의 필자는 '객관적 실재의 사실성'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객체의 성격을 객관으로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해에 기초하여 '광주는 그 당시 실록이나 평가보고서가 보여주듯이 이러이러했다'는 것을 역설하고 어떤 작품이 그러한 '객관적인'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역사에 대한 부르주아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이러한 논리가 창조적 인식행위인 문학에 적용될 수는 없다. 문학은 결코 과거 사실을 기록하거나 폭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객체가 지니는 성격에 의탁하여 이념을 드러내려는, 즉 창조적 이념의 선전보다 객체의 이념규정성에 의존하는 작품 (극단적으로 보고문학 형태)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조차도 대상의 선택에 있어 주체의 이념성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성은 반드시 일정한 계급적 토대를 지니고 있다. 문학이 부수적으로 역사적 기록이나 폭로의 역할을 수행할 수는 있으되 본질은 항상 창조에 맞닿아 있음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창조 역시 노동자계급 당파성에 입각한 올바른 형상적 창조일 때만이 가장 올바르게 인간을 변혁의 동력으로 추동시킬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문학운동이 변혁운동에 기여하는 가장 올바른 경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