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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중항쟁 주제 단편시리즈<1>/김신운의 '낯선 귀향'(월간예향, 1989. 3)

본문

김신운의 '낯선 귀향'



김신운



  버드실로 가는 버스는 이십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낡은 고물 차였다. 경사가 심한 고갯길에서 힐떡이며 괴로와하더니 마침내 고개 마루에서 기관이 멎어버렸다. 엔진 부분에서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풍기고 가늘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황혼이 어두운 보랏빛 색조로 내리고 있는 싸늘한 초 겨울 날씨였다 겨울 해는 지질찮은 빛으로 먼 산봉우리에 싸라기만큼 남아 떨며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차가운 그 황혼 속에 이따금 생각난 듯 희뜩희뜩 날리는 가는 눈발이 보였다. 버스의 엔진소리마저 멎어버리자 견디기 어려운 추위와 고적감이 스며들었다.
  승객들은 한 겨울 흙처럼 굳은 얼굴로 여기저기 띄엄띄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고장난 버스는 쉬 이 고쳐지지 않을 듯한 눈치였다. 운전수가 엔진 뚜껑을 열어놓고 플래시로 비춰가며 열심히 고장난 곳을 찾고 있었으나 버스는 여전히 고집 센 망아지같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운전수 양반, 당아 멀었수?"
  승객들이 낮게 투덜거리는 속에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참견했다. 버스가 고장난 지 반시간쯤 지났다. 그러자 불평을 닳은 볼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날이 곧 어두워지는디 언제까장 한없이 기다릴라는 거여?"

  "차를 못 고치겄으면 무슨 다른 방도가 있어얄 것 아녀?"

  승객들의 비난이 한꺼번에 운전수의 구부린 잔등 위에 쏟아졌다. 듣고도 못 들은 척 고장난 곳을 찾고 있던 운전수가 한참 후에 느릿느릿 허리를 폈다. 승객들이 한 가닥 기대와 비난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는데,

  "니 미 럴‥‥‥"
  운전수가 내뱉으며 맥없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쌍놈의 차가 어디가 고장인지도 모르겄단 말요."

당기고 있던 고무줄이 끊어지듯, 승객들이 모두 맥풀린 표정이 되었다.

  "허어‥‥‥"

  병수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노인이 탄식했다.

  "사람 잡을 차로구만."

  염소같이 빈약한 인상의 그 노인은 꾀죄죄하게 우그러진 여름 맥고모자를 쓰고 있었다. 계절이 점점 차가 와지고 있는데도 그는 엷은 포플린천의 낡은 여름 한복을 입고 있었다. 반드시 그런 차림새로써만이 아니라, 노인은 오랜 농사일에 찌들어 곰삭은 가난한 인상이었다.

  "사람 잡을 차여."

  노인이 다시 탄식하듯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댕기는 차들은 하나같이 이렇고롬 고물뿐이니…."

  운전수가 신경질 나서 죽겠다는 듯이 엔진 뚜껑을 쾅 소리나게 거칠게 내려놓았다. 버스는 그 순간 부르릉 시동이 걸렸다. 운전수가 자리에 앉으며 황급히 핸들을 잡았다. 밖에 나가 소변을 보던 승객 몇 사람이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다시 헐덕이는 숨소리로 괴로와하며 고갯길을 추어 오르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어디로 가싱가?"

  차창밖 황혼에 잠긴 골짜기를 망연히 내다보고 있는 병수에게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볼수록 빈약한 늙은 염소의 인상이었다. 노인은 회색 빛 도는 성긴 수염이 가을날 시든 옥수숫대 수염같이 볼품없이 늘어져 있는 작고 뾰족한 턱을 병수의 코 앞으로 거의 들이밀 듯 하였다.

  "버드실에 간다고?"

  병수가 목적지를 밝히자 노인이 다시 따지듯 되묻는 것이 었다.

  '버드실에 사싱가?"

  '아뇨"

  "그럼 버드실엔 뭣허로?"

  불필요한 것까지 고치꼬치 따져 캐묻고야 마는 시골 사람 특유의 나쁜 버릇이었다. 이 영감경이는 왜 쓸데없는 질문을 늘어놓아 남의 불편한 기억을 들쑤시는가. 병수는 노인의 참견이 싫어 눈을 감고 더러운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피곤한 망막 위에 몇 개의 얼굴이 포개지고, 먼데서 처럼 그 소리가 들려왔다

  "…콜록콜록콜륵‥‥ 기다려라 간다. 기다려라 간다. 콜록콜록콜록·.."

  병수의 귓속에 이명처럼 울리는 그 소리는 천식으로 괴로와하던 아버지의 숨소리였다. 아니, 그것은 지금 가파른 고갯길을 숨차게 오르고 있는 버스의 낡은 기관소리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병수의 귓속에 끊임없이 그런 환청으로 울려오는 것이었다. 해질녘이면 더욱 괴로와하던 아버지의 영문모를 천식의 숨소리처림. 병수의 아버지 달중씨에게 그 병이 시작된 것은 봄부터의 일이었다. 그해 봄, 광주는 그야말로 죽음의 도시였다. 죽음이 도시의 상공에서 도리깨처럼 윙윙 울며 후려칠 것을 찾고 있던 어느 날, 거리로 뛰쳐나갔던 그의 동생 인수의 처참한 죽음이 끔찍하게 확인된 그날 밤부터 달중씨에게 갑자기 그 중세가 시작된 것이었다.
  콜록콜록콜록콜록. 밤새도록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천식의 발작이었다. 달중씨가 영문모를 그 천식에 괴로와하기 시작한 일주일쯤 전에, 방수는 그날 저녁 학생들이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양쪽에서부터 횃불 행진을 시작해 도청 앞에 모이는 것을 보았다. 데모는 평화적이었으며 경찰은 진압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데모대를 보호하려 는 편이었다.
  도청 앞에 삼 만 여명의 대학생들과 일 만 여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만일 정부가 계엄령을 철폐하고 연내에 선거를 실시한다는 그들의 요구에 응답이 없다면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면서 밤 열 시 이후에 해산했다. 그러나 다음날 쿠데타가 일어났다.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많은 사람들이 즉각 체포되었다.
  학생들은 오월 십팔일 아침 전남대학교에 모여들기 시작, 약 오 백 여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계엄령을 철폐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중심가로 나가기 시작했다. 기동경찰이 최루탄으로 데모대의 금남로 진입을 저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학생들은 최루탄 트럭을 전복시켜 불태워버렸다. 기동경찰이 다시 공격했지만 학생들은 길을 가로질러 바리케이드를 쳤다. 경찰은 최루탄등을 계속해서 쏘아댔고, 학생들은 돌을 던져 대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시내 중심가에 그들이 나타났다. 학생들이 대치하자, 그들은 열을 이루어 학생들에게 육박해 오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긴장감이 돌고 사태가 어떻게 발전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학생들 속을 가르며 진압봉으로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체포된 학생들은 옷을 한데 뭉쳐 머리 뒤로 해서 손을 묶도록 강요당했다. 그리고 나서 트럭에 실려갔다. 여기저기서 수많은 학생들이 쫓기고 체포되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 뜻밖의 이 사태에. 대처할 아무런 마련이 없었다. 병수는 그 거리에서 많은 학생들이 체포되어 트럭에 실려가는 것을 보았다.
  어떤 곳에서는 트럭에 실려졌던 학생들이 다시 밖으로 끌려 나와 길 위에 엎드리도록 강요당했다. 그리고 그들을 한쪽으로 굴러가게 했다가 그 다음엔 다른 쪽으로 굴러가게 하는 것이었다. 똑바로 하진 않으면 얻어 채이거나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았다. 구경꾼들은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인지 현실의 일인지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도망가는 학생과 청년들을 끝까지 쫓아다녔다. 우연히 집안에 있다가 끌려 나와 봉변을 당한 청년도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공포의  심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날 오후, 부지사는 사태가 너무 심각하니까 그들은 철수해야 한다고 계엄 당국에 호소했다. 다음날 그들은 거리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도청에 머물러 있었다. 시민들의 일상생활은 거의 정지된 것처럼 보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한 도시가 일상의 리듬을 깨고 모든 사랑들이 거의 한꺼번에 일손을 놓아버린 일은 흔한 일일 수가 없었다. 병수네 일가도 가게문을 닫고 일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병수는 그날 밤 방송국이 불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학교문도 닫히고 상가는 철시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도시 전체가 멈춰버린 것 같았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완전히 리듬이 깨져버렸다.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일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 걱정하고, 얘기치 못한 일들을 낮은 소리로 주고받았다.
  군대는 외곽으로 철수했다. 도시는 이상한 형태의 진공상태가 되었다. 거리에는 버스도 끊기고, 상가는 모두 철시했으며, 사람들은 자전거로 혹은 도보로 통행했다. 날씨는 연일 맑고 화창했다. 금남로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잎이 푸르게 돋아 청신한 계절감을 더하고 있었지만 누군 한 사람 이 계절감을 마음에 두는 사람이 없었다. 병수도 절뚝거리며 이 기간 동안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타작마당의 눈먼 도리깨같이 죽음이 후려칠 것을 찾고 있던 그날, 인순이는 집을 나간 뒤에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밝히고 있던 달중씨가 병수를 불러 말했다. 틀림없이 인수가 죽었을 것이니 시체를 찾으러 가겠다는 것이었다. 이 난리 통에 어디 가서 시체를 찾겠느냐고 반대했지만 달중씨는 막무가내였다.

  "눈을 감으면 너 동생이 눈에 밟히니‥‥ 그때마다 무엇이 눈구멍을 후벼파는 듯이·.."

  달중씨는 그러면서 실지 무엇인가 달라붙은 듯이 자꾸만 두 눈을 긁으며 괴로와하던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무시무시한 예감이었다. 인수는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온몸이 상처와 피멍으로 일그러져 도청 한쪽 시체실에 누워 있었다. 관 뚜껑에는 그의 오리엔트 손목시계와 피묻은 동전 몇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인수의 시체를 확인한 것은 허벅지에 남아 있는 어릴 적의 끔찍한 흉터 때문이었다. 국민학교 오학년이던 그 해 겨울, 인수는 빙판길에서 달중씨의 연탄 구루마를 밀다가 미끄러져 큰 부상을 입었다. 무거운 연탄 구루마가 뒤로 미끄러지면서 그의 왼쪽 허벅지를 뼈가 드러나도록 한 뼘이나 찢어 버렸던 것이었다.
  달중씨는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이 짓뭉개진 시체에서 그 흉터를 발견하고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병수는 그때 하나 남은 시체의 눈이 스르르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온몸에 소름이 좍끼쳤다. 자세히 살펴보니 시체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체의 눈에 구더기가 생겨 꿈틀거리면서 안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달중씨의 예감은 소름 끼치는 현실로 눈앞에 드러났다. 구천에 떠도는 인수의 원통한 넋이 구더기로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날 밤부터 달중씨는 숨 넘어가는 천식의 발작으로 괴로와하기 시작했다. 콜록콜록콜록콜록콜록. 창자가 뒤틀리고 허파가 찢어지듯 잠들지 못하고 괴로와하는 천식의 시작이었다.
  영문모를 그 천식의 발작은 달중씨가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만큼이나 병수네 일가를 괴롭혔다. 손바닥만한 연탄가게를 닫아놓고, 그날부터 병원 순례가 시작되었다. 대 학병 원으로 기독병원으로 개인병원으로 여기저기 내과와 이비인후과를 찾아다녔다. 소문을 듣고 족집게 같이 영험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고 박수를 불러 굿을 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달중씨의 저주받은 기침은 멎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괴로운 밤들이 시작되었다. 해질녘이면 발작하듯 기침이 시작되어 창자를 뒤틀리게 하고, 달중씨로 하여금 쥐어짠 빨래같이 벽에 기대 어깨로 가쁜 숨을 몰아쉬게 하는 것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의 고통은 환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병수는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기침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을 뜨면, 지나온 삼십여년의 세월의 어둠 속에 우울한 유령들처럼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배 고프지야?"

  어머니 뒷실댁은 어쩌다 남의 밭 김을 맨달지, 베를 짜는 품팔이에서 돌아오면 치마폭에서 헝겊으로 싼 밥덩이를 꺼내 병수를 부르곤 하였다.
  "여서 먹어라, 쯧쫏" 그해 봄은 고양이털같이 부드러운 햇빛에다, 하루해가 유난히 길고 나른했었다. 하늘이 노랗도록 기나긴 봄날 오후, 그 나른한 오후의 허기중, 밤중에 눈을 뜨면 머리맡에서 살아갈 일을 근심하고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 버드실에서의 소년시절은 아직 어리던 그의 영혼에 쓰라리고 차디찬 모멸의 기억을 심어놓았다.
  병수가 다니던 버드실 국민학교 오학년 아이들은 그때 왁자지껄 떠들면서 교문앞에 모여 있었다. 신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넘은 그때서야 담임선생이 새로 부임한다는 전갈이 왔던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담임선생이 없어 공부시간에도 대부분 자습으로 빈둥빈둥 놀기나 하던 아이들이었다.
  "온다 ! "
  아이들은 그 소리에 일순 조용해지면서 앞을 내다보려고 다투어 발돋움을 했다. 봉선생이 신작로를 벗어나 성큼성큼 학교로 오고 있었다. 그는 도리우찌를 비스듬히 눌러쓰고, 한 손에는 가죽가방을 들었다.

  "차렷 ! "

  일제시대 면서기 같은 차림이었다. 기대와 호기심에 찬 눈망울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 옆구리를 찌르며 킬킬거리고,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반장의 구형에 따라 나붓이 고개를 숙여 환영인사를 했다. 그러나 봉선생은 답례 대신 아이들에게 싸늘한 일별을 던졌다. 그 눈빛에는 산골 무지렁이들에 대한 경멸의 빛이 가득했다. 

"오학년들이냐?" 그가 던진 첫마디였다.

  " 예." 반장이 대답했다.

  "너희들에게 몇 가지 다짐해 둔다. "

  교실에서 첫 시간에, 봉선생은 일일이 손가락을 꼽아가며 강조했다.
  "공부하지 않고 농땡이 치는 놈, 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놈, 용의가 단정치 못한 놈, 남을 괴롭히는 놈, 걸핏하면 싸우는 놈, 남의 물건을 훔치는 놈, 결석을 하거나 수업 시간에 빠지는 놈‥‥ 은 매로 다스린다. "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알았느냐?"  아이들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 예."

  봉선생은 근골질의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네모져서 억세게 보이는 턱에다가 약간 붉은 빛이 도는 고수머리였다. 껑충 큰 키에 비해 한쪽 어깨가 무겁게 처져내려 불균형하게 발달된 체격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는 고릴라를 닮은 그 모습이 그만큼 더 위협적인 것이었다.
  봉선생은 일제시대 때 지은 학교 관사에서 살았는데, 송아지 만한 개를 길렀다. 마을에 그 개가 나타나면 다른 개들은 꼬리를 활에 꽉 끼고 흘끔흘끔 도망치기에 바빴다. 도망치는 그 개들처럼, 아이들도 봉선생만 나타나면 먼 빛으로도 벌써 슬슬 피해 달아났다. 마을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그가 풍기는 인상 때문인지 누구도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날, 아이들은 한 명씩 불려 나가 봉선생에게 다짐을 받았다. 밀린 월사금을 며칠까지 내겠다는 약속을 해야하는 것이었다. 물론 병수도 그 아이들 틈에 끼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의 어린 가슴은 두려움과 수치심에 짓눌려 싸느랗게 식어 있었다. 머슴으로 식구들 입에 풀칠을 해주는 아버지가 약속기한까지 월사금을 마련해 줄 리가 만무였다.
  아이들은 복도에 모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려간 아이 하나가 드르륵 교실문을 열고 나오면서 혀를 날름 내밀었다. 여느 때 같으면 웃고 떠들고 아우성이었을 것이지만 그런 장난기도 복도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들의 잔뜩 주눅든 표정에 부딪혀 금방 머쓱해져 버렸다. 병수는 자기 차례가 되자 불려가기도 전에 벌써 오금이 저렸다.

  "말해봐."

  뜻밖에도 나직한 소리였으나 인간적인 것이 제거된 목소리였다. 병수는 봉선생을 차마 정시할 수가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광물질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숙인 이마 위에 떨어졌다.

  "언제까지 낼 거냐?"

"그 그 그‥‥"  병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아, 아, 아부지가·.."
  "아버지가 어쩠다고?"
  "도, 도, 돈을·.."
  "병신같은 놈 ! "
  봉선생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가 ! "

  눈물이 핑 돌아 어쩔 줄을 모르고 멈칫거리고 있는 병수의 귀에 봉선생이 내뱉는 한마디가 후려치듯이 뚫고 지나갔다.
  "월사금도 못 내는 가난뱅이가 학교엔 왜 보내. "


  그날,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려와 발뿌리를 덮기 시작하던 어스름 황혼 무렵이었다. 병수는 관사 대문 앞 탱자나무 울타리 그늘에 서서 봉선생이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냇가에서 주워 온 주먹만한 돌멩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기다렸다가 봉선생이 밖으로 나오면 돌멩이로 그의 얼굴을 후려칠 심산이었다.
  아니었다. 숨어서 기다렸다가 얼굴을 한 번 후려치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돌멩이로 얼굴을 후려치고 또 후려쳐서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짓뭉개고 실은 심정이었었다. 병수는 봉선생에 대하여 그처럼 말할 수 없는 증오감, 먼 훗날까지도 심장 속에 남아 싸늘한 느낌으로 내출혈을 느끼게 하던 모멸의 감정을 이렇게 어린 마음에 다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시 후에 관사 유리창에 불이 켜지고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병수는 유리창을 향하여 손에 쥐고 있던 돌팔매를 날렸다. 이어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황혼의 적막을 깨뜨렸다. 병수는 모난 돌맹이에 뒤통수를 맞고 쓰러진 봉선생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하나의 환청이었을 따름이었다.
  "누구냣! "
  다음 순간 봉선생의 위협적인 고함소리에 이어·신발 끌리는 소리가 울타리를 넘었다.
  "어떤 놈이냐,! "
  병수는 탱자나무 울타리 그늘 속으로 잽싸게 몸을 숨기려 하였으나 눈앞에는 이미 봉선생네 송아지만한 개가 가로막고 있었다. 개는 이빨을 드러내고 뱃속에서 울리는 음험한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달아나지 않으면 봉선생에게 붙들려 혼쭐이나고, 틀림없이 퇴학을 당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마비된 공포를 느끼고 병수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병수가 정신을 차려보니 퉁퉁 부은 오른쪽 다리가 피묻은 헝겊으로 처매져 있었고, 이마가 불같이 뜨거웠다. 몸을 움직이자 헝겊으로 처맨 오른쪽 다리로부터 무시무시 한 통증, 한순간 입이 딱 벌어지며 심장이 정지하는 듯한 아픔이 왔다. 봉선생네 송아지만한 개는 결국 그의 다리뼈를 날카로운 송곳니를 부숴 뜨려 절뚝발이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다음날 그 소동이 일어났다. 달중씨가 봉선생을 죽인다고 학교 관사로 달려간 것이었다. 실지로 그의 손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조선 낫이 들려 있었다. 울부짖으며 병수 어머니가 달려가고, 소동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관사로 모여들었다. 관사 쪽에서 한참동안이나 달중씨와 봉선생이 주고받는 고함소리, 어린것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미친 듯이 개가 날뛰며 짖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봉선생이 죽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마을사람들이 관사로 몰려가자 달중씨는 피묻은 낫을 들고 미친 사람처럼 날뛰고 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낫으로 그는 하마터면 봉선생을 죽일 뻔했다. 다행히 팔뚝에 상처를 입힌 상해사건으로 끝났다. 그러나 엄연히 살인미수였다. 달중씨는 체포되고 기소되어, 이년 육개월을 복역하고 나왔다.
  "…가자"
  복역을 마치고 돌아온 달중씨가 그날밤 식구들에게 하던 말이었다.
  "… 이놈의 땅을 떠나야제 원통해서 더 못 살겠다. 칠성판을 젊어지고 사는 우리같은 놈이 어디 가든 못살겠느냐."
그것은 20 여 년 전의 일이었다. 버드실을 떠난온 지 벌써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뿌리 뽑힌 세월은 아 끝나지 않았다. 병수는 자기네 일가가 그토록 오랜 세월 유배된 탕과 그 도시를 암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가 떨어지자마자 어두워지는 산골의 초겨울이었다. 싸기를 물들인 보라빛 색조가 이제 차츰 짙어지는 암회색 어둠에 녹아 들고 있었다. 낙엽을 끝낸 앙상한 가로수들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란 유령들처럼 우쭐우쭐 춤추듯 다가와 뒤로 스름스름 밀려갔다. 버스의 흐릿한 창유리를 통하여 어슴푸레 내다보이던 바깥풍경이 어둠에 가려 사려져 버렸다.
  병수는 피로와 우울이 겹쳐 무거워진 이마를 차창에 댔다. 다음 순간 흐릿한 차창 저쪽에서 자기를 응시고 있는 한 마리 원숭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것은 늙은 원숭이처럼 지치고 우울한 병수 자기 자신 얼굴이었다. 그러자 고갯길에서 헐덕이는 버스의 낡은 기관소리가 또다시 천식에 괴로와하던 그의 아버지의 안타까운 숨소리로 변했다.
  "… 콜록를록콜록‥‥ 기다려라 간다. 기다려라 간다‥‥ 콜록콜록…"  초조감이 천천히 조이는 무게로 심장을 압박해 왔다. 그러나 알 바 없는 버스는 계속 괴롭게 헐덕이며 그를 어둠 속으로 실어가고 있었다. 절망감이 골짜기에 내려 황혼처럼 쌓이는 그 낯선 귀향의 어둠속으로.
  "나는 왜 고향을 찾는가?"
  병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젊은이가 버드실에 간다니께 허는 말이네만‥‥‥"
  옆자리의 노인이 그 순간 다시 병수의 상념을 흔들어 깨웠다. 소리 없이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기에 졸고 있는 줄 알았던 노인이 게슴치레 눈을 뜨고 탐색하듯 바라보며 또다시 이것저것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바깥은 이제 완전히 어둠에 가려 차창 너머로는 아무 것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향을 찾는다고 도회지 사람들이 더러 찾아오데마는‥‥‥" 하고 노인이 말했다.
  "버드실도 이젠 예전의 버드실이 아녀, 허긴 지금 어디나 농촌은 마찬가지지만. 농촌도 이젠 예전의 농촌이 아녀."
  한가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고향을 찾는 사람도 어쩌다 있기는 더러 있을 터였다. '지금 나도 그런 기분으로 버드실에 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병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다음 순간 망상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씁쓰레한 모멸의 웃음이 떠올랐다.
  "병수야, 이리 오니라."
  며칠 전, 초저녁부터 심하게 터져 나오던 기침소리가 잠시 뜸해지더니 열한 시 경에 달중씨가 건넌방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수가 그 방으로 건너가자 텔리비전에서는 그때 한참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가 진행중이었다. 증인석에 앉아 당시의 상황을 잡아떼고 있는 인사의 돌같이 표정 없는 얼굴을 보자 소름이 끼쳤다.
  "죽일 놈들‥‥‥"  달중씨가 내뱉았다
  "이렇게 모두 시퍼렇게 눈 번히 뜨고 살아 있는디‥‥‥"
  그는 저주하듯 낮게 몇 마디 더 웅얼거리다가 텔리비전의 스위치를 눌러 꺼버렸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달중씨는 몇년 사이에 피골이 상접하여 눈을 감으면 송장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 암만해도 내가 이 병으로 죽을랑갑다. "
  병수는 가슴이 무겁게 눌리는 것을 느꼈고, 빈말로나마 무엇인가 위안의 말을 늘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래, 콜록콜록콜록"
  달중씨는 가쁜 숨을 몰아 쉬느라고 목울대가 닭의 모가지처럼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내가 잘 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저승꽃이 피어난 눈자위 속 퀭한 눈에 물기가 어렸다.
  "밤마다 니 동생이 꿈에 보이고‥‥‥"
  "인수 이야긴"
  "죽기 전에 니가 버드실에 한번 댕겨오니라."
  "버드실이라뇨?"
  병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언성을 튕겼다. 어릴적 버드실에서 겪었던 온갖 쓰라린 기억들이 그 순간 생생하게 된 살아났던 때문이었다. 원한과 분노가 뒤얽힌 복잡한 시선으로 과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버드실엔, 왜요?"
  병수가 따지듯 물었다.
  "언짢게 생각허는 니 심정은 내가 잘 안다마는‥‥ 콜록콜록롤록"
  병수의 꼿꼿한 시선을 피하여 허공을 더듬던 달중씨가 눈길이 허물어지면서 또 발작적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마치 몸뚱이 속에 또 하나의 다른 몸뚱이를 개켜 넣으려는 사랄 같았다 달중씨는 허리를 구부리고 뼈만 남은 두 어깨 사이에 머리를 박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으나 기침은 그의 노쇠한 육신을 뒤흔들고 쥐어짰다.
  "니 심정은 안다마는. 헉헉헉‥‥ 그래도 어쩔 것이냐‥‥ 헉 헉 헉 헉 "
  병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의 기침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얼었다. 달중씨는 한참 동안이나 더 그렇게 괴로워 하다가 얼마 후에 기침이 멎었다. 예고없는 천식의 발작을 두려워하면서 그는 쉬엄쉬엄 끊어진 말을 이었다.
  "… 버드실에 가면 바리봉 산비탈에 조그만 옹달샘이 있느니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갈증을 축이던 샘이제. 그런디 요새 날마다 그 샘물이"
달중씨는 한밤중에 혼자 깨어 캄캄한 벽을 향해 기침을 할 패마다 그 샘물이 생각나 갈증으로 미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조그맣게 싼 보자기를 벽장에서 꺼내 왔다.
  "… 니 동샐 유골이다. "
  명수는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았다. 만수는 자기도 몰래 아버지가 화장하여 유골을 극락강에 뿌렸다고 했는데 난데없이 이 유골은 또 무엇인간. 달중씨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전후 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날이 있으면 바리봉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려고‥‥ 헉헉헉‥‥ 우리가 그렇게 쫓겨난 고향이지만‥‥ 내가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병수는 눈을 갚았다. 달중씨는 결국 위로 받을 수 없는 마음, 절망감으로 비틀거리는 심정, 불운을 탄식하며 그토록 오래 처방이 없는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인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형님이나 아버지는, 그래요, 모두 틀렸어요. "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 두들겨 패고 짓밟고 대검으로 난자하던 그날 밤의 일이었단 인수를 끌어안고 달중씨와 병수가 온갖 말로 그를 만류하고 있던 중이었다.
  "틀리다니?"
  달중씨가 인수의 말꼬리를 잡고 언성을 높였다.
  "나가면 죽을 것인디, 나가지 말라는 말이 틀리다니?"
  "그럼 집구석에 처박혀 개죽음을 하잔 말에요?"
  "개죽음이 아니라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지 말라는 말이 아니냐?"
  그리고 달증씨는 그들 형제가 철들기도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말-자기네 일간가 어떻게 버드실에서 쫓겨왔으며, 그것인 또 한대를 이어 오십여년전에 있었던 그의 선대의 일. 그처럼 초래 이 땅에 뿌리를 내려보려 하였으나 여태까지 떠돌며 사는 자의 비애, 그런 원통한 세월 뒤에 이제 아들 하나를 대학생으로 둔 자랑과 보람-등을 길게 이것저것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싸우다가 죽어야지 이대로 죽을 순 없어요 ! "
  인수는 사납게 뿌리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할아버지도 자기 땅에서 쫓겨났고 아버지도 고향에서 쫒겨 왔어요. 형님도 할아버지처럼 개한테 물려 절뚝발이가 되었구요. 그런데 이젠 저놈들이 총칼로 위협하며 우릴 또 쫓아내려 하고 있어요.! "
  인수가 던지고 간 말들이 초라한 몰골로 뒤에 남은 두 사람의 가슴에 못으로 박혔다. 오십여년전, 병수의 할아버지 석등이는 버드실 문참봉네 마당에 피를 철철 홀리며 쓰러져 있었다. 뒤주간에서 쌀을 훔쳐 도망쳐 나오던 그를, 그 집 개가 다리를 물고 흔들어버렸다. 도둑질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그는 문참봉과 그 집 머슴들에게 비잉 둘러싸였다.
  "참봉어른,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한번만 눈감아 주십쇼."
  석등이는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붙들고 괴로와하며 문참봉에게 용서를 빌었다.
  "고이얀 ! "
  문참봉의 성난 자가사리수염이 위로 뻗쳐 올라갔다. 참봉이란 칭호는 그의 할아버지가 대원군 시절에 뇌물을 바쳐 산 벼슬이었다. 내력을 아는 사람들은 그래서 개참봉이라 불렀다.
  "먹을 것이 없으면 굶어죽는 게지, 남의 집 담을 넘어?"
  "참봉어른, 굶어서 부황난 새끼들이 불쌍해서 그만‥‥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주십쇼." 석등이가 거듭 애원하였으나,
  "용서라니 ! "  문참봉은 용서하지 않았다.
  "버드실에 자네 겉은 도둑놈은 놔둘 수 없으니께, 가솔을 이끌고 마을을 떠나. 지금 당장 떠나. 떠나지 않으면 주재소 순사를 불러 감옥소에 처넣을 테너께 !"
  병수의 할아버지는 오십여년 전에 그렇게 고향에서 쫓겨났다. 해방이 된 뒤에 그는 버드실에 돌아왔는데, 그이 일가는 한 세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또 다시 고향에서 쫓겨났다. 병수는 삼대에 걸쳐 이어지던 불운을 암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젊은이, 버드실에 다 왔구만."
  옆자리의 노인이 다시 병수의 상념을 흔들어 깨웠다. 정류소에 불빛이 있을 뿐, 죽은 듯인 어둠이 잠긴 시골 면소재지였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은 병수와 두세 명의 아낙네뿐이었다 텅빈 들판이 시야를 가로질러 희뿌연 초저녁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버드실로 가려면 그 들판을 가로질러 건너가야 차는 것이었다. 병수는 동행도 없는 싸늘한 들판과 그 어둠 속으로 혼자 길을 나섰다.
  광주에서는 일부러 오후 늦게 도착하도록 시간을 맞춰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너무 시간이 늦어버렸다 그는 환한 대낮에 버드실에 들어가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이버지의 애원하던 눈길을 차마 뿌리치지 못해 짐을 나섰지만 무거운 마음은 끝내 가시지 않았다. 고향 양지바른 산비탈에 아들의 유골을 묻어주고자 하던 그 안타까운 비원을 그는 이해하고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여름밤 가위에 눌리는 꿈처럼 그것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들판을 건너자 제방이 나타나고, 그 제방이 끝나는 곳에 내가 있었다. 냇물은 어둠에 잠긴 하늘빛을 받아 얇은 셀로판지같이 희미하게 번쩍이며 흐르고 있었다. 그 냇물 위에 버드실로 가는 징검다리가 있을 터였다. 병수는 이십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징검다리를 찾아 냇가를 헤맸다. 냇물의 위 흐름 쪽에 무엇인가 거무튀튀한 물체가 가로질러 솟아 있는 게 보였다. 그곳으로 가보니 징검다리 대신 새로 가설된 콘크리트 다리였다.
  병수는 그 다리를 건너 얕으막한 산비탈을 돌아갔다. 산비탈을 돌아가면 산자락에 푹 싸이듯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버드실 마을이 나타나고, 마을 옆으호 비켜 등두럿한 바리봉이 눈에 보일 것이었다. 병수는 이십여년이나 한번도 찾지 않은 고향이었지만 그 고향 마을의 정경이 그린 듯 눈시울에 어리는 것을 느끼고 놀랐다. 마음의 저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가슴까지 두근거려지는 것이었다.
  병수는 마을이 나타나기 전에 잠시 산비탈에 쭈그리고 앉았다. 흥분한 마음이 가시자 버스 안에서"'느꼈던 추위와 고적감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손으로 인수의 유골이 담긴 가방을 쓰다듬었다. 인수야, 너는 돌아왔구나. 죽음을 통해서만 너는 우리를 내쫓았던 이 땅에 돌아올 수 있었구나. 눈물이 조금 내비쳤는지, 명수는 초겨울 밤바람에 뺨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일어나 불빛이 보이는 마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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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운 : 1939년 해남출생.
            1962년 조지훈 선생 추천으로 등단.
            세종아동문학상, 한국예총 예술인상, 전남도문화상, 남동예술인상 수상
            현 한국문인협회 전남지부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회원.
            시집 "그립다 고향친구"외 4권 동시집"남쪽 섬들"외 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