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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8 특집 정세 방담 / 5·18 광주민중항쟁의 의의와 자주정신의 계승. 정동년 외(국민신문, 1988

본문

5·18 특집 정세방담<국민신문 1988년 5월 13일 발행>



5·18광주민중항쟁의 의의와 자주정신의 계승



  피빛 5월이다 ! 8년전 파헤쳐져 있던 금남로가 옳해도 파해쳐져 있음은 역사의 우연인가?
  분단 40년의 현대사에 있어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는 5·18광주민중항쟁 그 정신을 올바로 계승 실천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5·18광주민중항쟁의 현대사적 의의, 발생배경, 희석화시키려는 군사독재의 음모에 대한 우리의 대응과 진상규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5월 자주·민주·통일의 정신을 오늘에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조명해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사회 : 대담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8주년을 맞고 있는 지금 많은 것이 변했으나 광주의 아픔은 밝혀지지 않은 채 지워지려 하고 있읍니다. 때문에 5·18을 명확하게 정립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정동년 : 의의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5·18의 성격규정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의거' '혁명' '민중항쟁'등 호칭이 다양한데 당시 5·18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주체세력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해볼 때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 절대다수가 계급적으로 억압받고 소외당한 기층민중들이었기 때문에 "민중항쟁"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는지….
  서대석 : 5월운동의 제단체들도 그 의견에 크게 이견이 없는 줄로 압니다. 다만 아직 통일적 입장정리가 안된 시점에서 종래의 명칭을 계속 써오고 있습니다만 조만간에 정리될 것이라고 봅니다.
  정동년 : 또한 5·18광주민중항쟁의 성격규정 등 모든 부분은 군사독재정권과 제도언론의 조작 공작된 부분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면면히 나타나는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기충민중계급)과의 투쟁의 연속선상에서 주체적으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상집 : 5·18민중항쟁이라 규정하는 것은 당시 상황을 볼 때도 명확해집니다. 도청이 시민군에 접수되고 난뒤 무기수습을 놓고 투쟁파와 투항파로 나뉘었는데 투쟁파의 대부분 계급적 속성은 노동자·도시빈민등이 절대 다수였고 일부 청년학생이 참가하고 있었다는 점이지요.
  이 강 : 5·18항쟁은 정치사적인 의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즉 역사속에서 주인이면서도 억눌리고 소외당해 온 피지배민중들이 지배권력(미국 및 군사독재)에 대항하여 정치권력을 쟁취하려는 적극적인 항쟁이었기 때문이지요.
  정동년 : 저는 또 인간의 소외 측면에서 말해보고 싶습니다. 아민(AMIN)은 인간이 억압구조속에서 있다가 보면 비인간화되어 투쟁(저항)의지를 잃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태인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로마로 끌려간 뒤 약2천년동안이나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억눌려 지냈지만 5·18항쟁은 역사속에서 무수히 보이는 비인간화의 우려를 깨뜨리고 굳건한 저항으로 일어서서 인간소외에 정면적으로 맞서 싸우고 마침내 승리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의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김원봉 : 저는 5·18항쟁도 분단 40년의 한국현대사속에서 위치가 재조명되어질 때 보다 정확한 의의가 정립되리라 봅니다. 우리 사회는 식민지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는데, 모든 식민지 나라들의 모순해결 형태는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차원으로 전개되었는데 여기에서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의 형태에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봐야겠지요. 4·19는 궁극적인 적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감정적 측면이 강하여 결국에는 큰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었고 그 주역들도 상당히 개량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5·18항쟁은 우리 사회의 궁극적 모순인 민족모순을 인식실천하게 되는 획기적인 대전환을 가져온 계기로 작용합니다. 5·18항쟁을 통해서 보다 과학적이고 명확하게 제국주의 외세로서의 미국의 본질이 드러났고 민중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궁극적인 모순으로 각인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회 : 5·18민중항쟁과 외세인 미국의 관계가 나오는데 좀더 말씀해 주시죠.
  김상집 : 5·18당시 상황에서 반미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정도가 부족했던 것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겠지만, 제국주의로서 미국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고 협소하게 보려는 것도 잘못된 견해라 생각합니다. 5·18 항쟁 당시 미국 순양함이 부산에 도착했는데 그것은 곧 전두환 일당의 잔인한 학살만행을 견제하려는 뜻이다 하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대중들은 기존의 왜곡된 미국에 대한 환상에 매여 지원군으로서의 미군파견으로 인식하고 고무되는 실정이었습니다.
  살인원흉을 환영하는 기막힌 꼴이 되고 말았지만, 당시 지도부와 대중과의 일치된 결합의 중요성을 전제할 때 현실적으로도 반미와 반독재 투쟁과의 엮음은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 그것은 대중적 운동역량이 전반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한계라 봐야 될 것입니다.
  이 강 : 지금까지도 반미 문제나 분단이데올로기를 용공·좌경으로 조작 탄압하는 작태로 남아 있습니다. 분단 이후 독재정권에 의해 조작되어 국민들에 주입된 미국에 대한 환상은 당시 상황에서는 제국주의로서 미국의 정체를 폭로하는데는 엄청난 장애이었거든요. 5·18 이후 일어난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을 봐도 독재정권이 언론조작으로 통해 대중의 미국에 대한 우호적 성향을 최대한 이용하겠지요.
  정동년 : 그러니까 "미국은 군사독재를 지원했다", "미국은 제국주의다"라는 반미의식의 대중적 확산과, 군독재를 사대주의적이라고 반민족적 적대세력으로의 대중적 자각의 출발점이자 계기로서 5·18 항쟁이 커다란 분기점이었다는 점에서 현대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원봉 : 중요한 것은 운동이 얼마만큼 대중화 되어있느냐, 대중의 힘에 의거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상황에서 5·18 항쟁을 주도했던 지도부 몇몇 사람의 선각자적 인식이 있었느냐가 없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수인 대중의 관점 즉, 민중사적 관점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강 : 또하나 중요한 것은 대중인식의 차원이 보다 실천적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분단이데올로기 및 반미의식에 대한 맹종이나 공포를 5·18 항쟁 이후에는 상당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점이죠.
  윤강옥 : 반미문제에 대해서 한마디 더하자면, 4·19나 6·3 세대들도 제국주의에 대한 관점은 있었으나 당시의 사회의 객관적 조건자체가 '반미'라는 부분을 수용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인 표출보다는 우회적 방법으로 나타났는데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 반미주장은 즉각 반공법이나 보안법의 대상이었고 대중이라는 보호벽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우리 역사를 볼 때 일제식민치하로부터 민족해방 투쟁의 과정에서 제국주의 외세에 대한 인식은 매우 깊게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미국이라는 외세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분단을 겪게 되고 이로부터 주체세력은 무수한 탄압으로 침잠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결국에는 다시 5·18은 주체적 의미에서 1차적 승리이고 민족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지요.
  이 강 : 5·18이 민중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실증적으로 등장하게 된 대사건이며 운동으로서 민족자주화와 민주화가 달성되는 그날이 5·18의 종결로 봐야 할 것이라고 볼 때 아직도 5·18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원봉 : 포괄적으로 살펴보면 강화도 조약이후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어 왔는데 해방이후 민족해방운동이 미국에 의해 단절되면서 운동주체 세력은 각개 격파되고 6·3 및 남민전의 형태등 선각자 중심의 운동으로 제기되지만 운동의 본류로서 떠오르지 못하다가 5·18을 매개로 다시금 100여 년의 운동전통이 계승되어 등장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 승리적 관점은 역사적 성과물로서 재조명되어 추모·진혼의 형태를 계승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또한 정치적 측면에 있어서도 반미의식 및 군사독재에 대한 인식의 확산이란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 : 그동안 군사독재 정권과 제도언론은 5·18 민중항쟁을 지역감정등으로 왜곡·매도해 왔습니다. 이제 과연 5·18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필연적 배경등에 대해 정치·경제 사회·문화적인 다각도에서 말씀해주시죠.
  윤강옥 : 통속적·정략적 차원에서의 지역감정 등의 문제가 아닌 역사적, 일반실속에서의 광주·전남의 지역차별, 소외, 경제적 불평등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광주·전남지역은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중심축이 되지 못하는 속에서 소외·차별되어 온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지배집단의 의도 속에서 더욱 심화되어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역사를 올바로 세우기 위한 표출로서 이 지역 민중들의 저항은 유별나게 두드러졌다고 봅니다.
  김원봉 : 그것도 중요하겠으나 더욱 관심을 집중시켜야 될 것은 지역감정이 제국주의 본국의 식민지 통치의 중요한 수단 이란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식민지 민중의 단결의 구심을 분산시키기 위한 이간책동의 주요수단이라는 점이지요. 그리고 그것의 가시화된 형태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측면에서의 소외 내지는 차별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김상집 : 그런 객관적인 배경은 주체적으로 힘을 배양할 수 있는 기반조성에 일조를 했다고도 볼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틀이 잡힌 상태는 아니지만 각계 각층의 광범하고도 헌신적인 대중투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따라서 공수부대의 잔인한 살상에 우발적이고 반사적으로 대응한 것이라는 시각은 수정되어야 하며 총칼 앞에 맨몸으로 싸운 민중들의 주체적 역할이 조금이라도 삭감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강 : 도식적일 수 있으나 유신독재 18년 동안 전남지역에서는 사회분화(계급분화)가 광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산업화의 취약으로 착취의 주된 대상은 농민일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서 농민들은 정경유착 및 미국의 본질에 대해 타부분운동보다 빨리 인식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현실 정치권에 대한 회의 및 소외로부터 재야권이 상대적으로 발전되었고 문화적으로는 민족문화 수호에 대한 애착이 저항성을 기초로 하여 나타났고, 사회적인 면에서는 계급분화로 인해 저농산물 가격등으로 인한 이농의 급증은 저임노동력의 공급원이 되었으며 타도시로 진출하지 못한 잉여노동력은 산업화가 취약한 이 지역에서는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열악한 생존환경에 처해있는 노동자들의 의식에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호남 전기 노동운동이나 들불야학 등)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상당히 좌절되고 꺾이기도 하였으나 갑오농민전쟁이후 광주 학생독립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운동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져 마침내 민주권력 수립이라는 의지의 표출로 폭발한 것이 5·18 민중항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사회 : 객관적 배경 외에 특수하게 직접적 동기가 존재한다면 말 해 주시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김원봉 : 이 지역은 기층민중운동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속에서 상대적으로 재야권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특수하게 대중적 분위기가(특정계급을 지칭하지 않는) 강하게 존재하는 것은, 생존권등의 차별과 억압이 산업화의 파행적 전개하에서 노동자, 농민 등의 계급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전반에 걸쳐 자행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기에 이 지역의 특수성인 대중정치력이 높게 특정계급에 치우치지 않고 나타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김상집 : 역사적 소외 형태 등의 객관적 측면도 중요하나, 주체운동역량의 대중적 기반이 타지역보다 튼튼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회 : 대통령선거이후 각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과 노태우정권의 민화위등은 광주문제를 광범위하게 거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및 진상규명은 어떠해야 할까요?
  윤강옥 : 대선 이후 현재까지 5·18 치유방안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왔으나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손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느냐 아니면 남의 손에 의해서 하느냐로서 매우 큰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의 해결을 얼마만큼의 시간에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힘을 결집시켜(5월 그때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점입니다. 그럴때 현실정치권도 우리 힘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에요.
  김원봉 : 군사독재가 내놓은 치유책은 5·18을 희석화하려는 미봉책·민중 기만책에 불과합니다. 5·18은 식민지 사회라는 모순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민주사회, 민중사회, 자주통일사회를 염원하며 투쟁한 항쟁입니다. 따라서 궁극적 목표를 달성해냈을 때 정확한 진상규명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고 독재정권에 의해 혁명탑이 건립될지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평민당이 얘기하듯이 자기당의 정치적 국면 속에서의 제기나, 한 측면으로서의 대중의 의지를 무시한 채 5월 진상규명 문제, 5공화국 부정비리 척결문제를 올림픽이후로 넘기겠다는 태도를 그냥 묵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강 : 군사독재하에서의 해결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입을 수 없는 문제이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는데 그것은 이런 회유책을 씀으로서 운동대열을 분열시키려는 의도입니다. 따라서 해결의 주체는 우리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개량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쟁취가능한 모든 부분을 위해 투쟁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자기들도 민주화운동의 일환이라 인정하는 마당에 헌법에의 명시나 역사교과 과정에 삽입시킬 수 있도록 하는 대안 등이 그것으로서 분열을 지양한 통일단결된 힘으로 적극적인 투쟁이 시급히 요청되어집니다.
  김상집 : 궁극적 해결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조국의 건설과 민중해방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먼저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을 하고(재판을 다시 하여) 그에 따른 부수적 조치로서 보상 등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해결의 주체인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궁극적 목적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이라 할 것입니다.
  서대석 : 그에 대해서는 5월 단체들의 의견도 같습니다. 군사독재정권하에서는 현상적·단계론적 해결밖에 안될 것이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고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민주화의 세상에서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지난한 5월정신 계승투쟁이 요구되어지는 거지요.
  윤강옥 : 모두 대단히 좋은 말씀입니다만, 문제는 그런 원칙과 현실이라는 상황의 차이를 얼마만큼 줄여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인가 합니다.
  서대석 : 저들이 민화위등을 거들먹이며 우리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다고 했을 때 한번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진상규명은 군, 관, 민이 보유한 모든 자료를 총동원하여 객관적으로 조사해야 하며, 그에 따라 책임자 처벌도 뒤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진상규명 및 보상은 전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김원봉 : 의회 내에서 해결한다고도 하는 게 지금까지의 의회는 수다스러운 오두막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의회투쟁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광범한 기층 민중의 힘이 중요합니다. 정확한 명예회복도 "원칙적 대안이 없는 현실적 대안은 있을 수 없으며 추상적인 명예회복이 아닌 구체적 규명이 되어진 후에 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원칙을 대중에 선전하고 대중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속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은 의회투쟁은 또 다시 한계를 되밟는 것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윤강옥 : 결국 정확한 진상규명은 민주 정부하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때 현실 속에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도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군사독재정권은 기만적으로 대처할 것이고 야권세력도 큰 차이없이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 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우리자신의 입장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원칙을 광주 5월의 이름으로 천명하고 이에 의회가 수용하도록 하는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때 의회투쟁도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는 것이지 우리 힘이 약해버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 아닙니까.
  김원봉 : 5월 진상규명문제만 분리시켜 볼 것이 아니라, 통일문제 및 자주화의 문제들과 어떻게 적절하게 배합하여 싸울 것인가가 5월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에 있어서 원칙적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라 생각됩니다.
  이 강 : 진상규명=군사독재붕괴의 등식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노정권은 철저히 개량조치로 나올 것입니다. 또한 의회내의 야권도 미국과의 단절·고립을 원치 않기 때문에 몸을 사리는 자세가 속출할 것이므로 끊임없는 대중적 투쟁을 통한 압력이 절실해 지는 것입니다.
  김상집 : 진상규명에 있어서 학살운흉 처단의 문제가 정확하게 전제된 가운데에서 전개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못을 박고 대처를 해야할 것입니다.
  김원봉 : 진상규명은 철저하게 대중집회등의 대중과 함께하는 속에서 통일문제, 자주화투쟁과 함께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주지하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은 어떤 행위도 개략으로 돌아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죠.
  사회 : 그러면 5월항쟁정신 계승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해보고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이 강 : 5월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저들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항할 수 있는 5월항쟁 정신을 민족 민중운동의 이념으로 정착시켜 국민전체의식의 보편화 및 객관화 확산작업이 철저하게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5월 강령 등과 같은)
  김원봉 : 여기에서 현재 애국민중운동권의 내부통일 단결의 원칙적 대안이 나왔다고 봅니다. 무원칙한 단결이 아닌  대중에 헌신 복무한다는 자세로 5월 정신을 계승실천을 위해 힘을 결집시켜 승리를 거머쥐어야 할 것입니다.
  김상집 : 5·18행사는 승리적 관점에서 해방축제의 의미가 부각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위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형태의 행사를 시내 전역에서 벌여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윤강옥 : 또한 5월항쟁은 이제 광주·전남만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지난해 6월 국민대항쟁과 같이 범국민적 항쟁의 차원으로 인식시키는 작업이 진행될 때 보다 완결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사회 : 이제 이야기가 대충 정리된 것 같습니다. 5·18과 그 이후 민족자주통일을 위해 싸워왔던 신영일 동지가 운명했습니다. 우리는 가신 님들의 의지를 더욱 계승 발전시켜 기필코 승리의 그날을 쟁취해야 될 것입니다.
  참석하신 여러 선배 동지들 대단히 감사합니다.

참석자 : 정동년(국민운동 전남본부 공동의장) / 이 강(국민운동전남본부 사무처장) / 윤강옥(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 / 서대석(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사무국장) / 김상집(기청 전남연합회 회장) / 김원봉(전남대 용봉편집실장) /
사  회 : 이기형(국민신문 기자)
기록·정리 : 편집실
장  소 : 전남사회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