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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말·논평·담화·보도를 따라 엮는 5·18 10년(월간예향, 1990. 5)

본문

-말·논평·담화·보도를 따라 엮는 5·18 10년

광주민중항쟁 10주년 특집
'고정간첩·불순분자·깡패'들이 소요 조종' …계엄사
'난동아닌 민주주의란 대의에 움직이고 있다'…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




1990년 5월 18일, 80년 그날로부터 꼭 10년째 되는 날이다. '소요사태' '난동' '깡패' '불량배' '불순분자' '폭도'등으로 그동안 일방적으로 왜곡되었던 것이 지금은 '광주민중항쟁' '광주의거'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광주문제는 아직도 분명 끝나지 않았다 정확한 사망자 숫자나, 발포명령책임자 문제, 미국의 개입 여부가 시원스럽게 밝혀지지 않았고, 또 5·18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문제도 남아있다.
아직도 마무리 되지 않은 10년의 아픔. 이 10여 년의 세월에 광주민중항쟁은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폭도들의 난동'에서 '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 겪은 그 수난과, 그 수난을 따라 난무한 무수한 말들.
10년동안 무수히 쏟아진 말, 담화문, 보도 등을 따라 가면서 그 10년을 다시 되돌아 본다.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현지역 계엄을 전국 비상계엄으로 전환 선포하고, 국가기강과 사회안정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습니다."-최규하대통령 특별성명 (1980. 5. 18)
□"전국적으로 계엄령포고, 여·야당의 유력 정치인 연행이라는 한국정치정세의 급선회는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등 군강경파 주도에 의한 제2차 유신체제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하는 견해가 서울에서는 유력하다."-동경신문(1980. 5. 18)
□"북괴는 한국국민을 분열시키려고 위장평화공세를 증대하고 있으며,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창조적인 민족주의이다."-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 타임지와 회견에서(1980. 5. 18공개)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전술공군기들은 매우 빠른 시간 안에 한국 전선으로 출동할 것이다."-태평양 지구 미공군사령관 제임즈 휴즈중장(1980. 5. 19)
□"한국의 정부당국은 전국적 비상계엄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북한 내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들고 있는 데 대하여 미국은 정면으로 부정했다"-니케이신문(1980. 5. 20)

'깡패등 현실불만 세력의 난동'

□"지난 18일부터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계엄사령부(1980.5. 21)
□"21일 현재 집계한 피해상황을 보면 이 소요에서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고, 군경 30명이 부상했으나 민간인 부상자수는 공식 집계되지 않았다."-계엄사령부(1980. 5. 21)
□"광주지역 소요가 악화돼 극심한 난동현상을 보이고 있는 현상은 전국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서울을 이탈한 학원 소요 주동학생 및 깡패 등 현실 불만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 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린데 기인됐다."-계엄사령부(1980. 5. 21)
□"이들은 대부분 이번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한 불순분자 및 이에 동조하는 깡패 등 불량배들로서…."-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담화문에서(1980. 5. 21)
□"시민여러분, 소요는 고정간첩, 불순분자, 깡패들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대열을 이탈, 집과 직장으로 돌아가십시오."-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광주시민에게 보내는 경고문'중에서(1980. 5)
□"폭도들에게 알린다. 폭도들은 즉시 자수하라. 자수한 자는 생명을 보장한다."-전남북계엄분소 '광주시민에게 알리는 글'중에서(1980. 5)
□"지금 광주지역에서 야기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법을 어기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의 주민 여러분은 애국심을 가진 선량한 국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계엄사령관육군대장 이희성(1980. 5. 21)
□"20일 밤 11시 경, 시위군중이 광주역을 점거하려한 약 20분 동안 무장군대 는 M16을 난사하였다."-서울발 UPI(1980. 5 21)
□"주유소는 시위차량에 무료로 급유해 줬다."-서울, UPI(1980. 5. 21)
□"현지 기자들의 사태 보도 허용하겠다. 최근의 언론 내부실태 잘 알고 있다. 누가 어떻게 노는지 알고 있다. 군은 결심한 이상 물러 설 수 없다. 언론간부, 경영인도 동조 내지 묵인하는 행동을 한다면 일찍이 보지 못했던 조치를 취할 각오가 돼 있다."-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 각 언론기관장과의 간담회에서(1980. 5 22)
□"현재 광주시내는 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의 상태이며,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방화·무기를 탈취해서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정부의 명령 때문에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못하고 반격을 하지 못하여 울화통이 터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박충훈국무총리서리, TV·라디오중계방송에서(1980. 5. 22)
□"지금까지 북한군이 한국의 현상황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이나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토머스로스 미 국방성대변인(1980. 5. 22)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 연합군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토머스로스 미국방성대변인 (1980. 5 .22)
□"한국의 국내정치문제에 관해서도 미행정부로서의 후속적인 조치가 잇따를 것으로 짐작된다."-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한국사태에 대한 정책조정회의에서 (1980. 5. 22)
□"미국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재강조하는 바이다."-이국무성대변인 호딩 카터(1980.5 . 22)

'언론, 동조 묵인하면 일찍이 보지 못한 조치 취할 각오돼 있다'…전두환
'군인들은 공산당 반란진압명령 받았다'…AFP
'그들의 사살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도쿄신문

□"극소수의 폭도와 불순분자만이 문제다."-박충훈 국무총리 TV방송에서(1980. 5.22)
□"광주에서는 22일에도 시민·학생 등 약 10만 명의 데모대가 전남 도청 앞에서 반정부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집회는 평온하게 행해져 경찰·공수부대는 집회를 규제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동경신문(1980. 5. 23)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한 20년 전 4·19혁명이래 그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아사히 신문(1980. 5. 23)
□"미국은 5·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글라이스틴 주한이국대사 회견(1980. 5. 23)
□"난동자들이 총격을 가하더라도 발포를 억제하고 전단 등을 활용한 선무활동을 전개해 왔다."-계엄사령부 발표(1980. 5. 23)
□"대모대에게 차와 주먹밥 등을 대접하는 사람도 있었다."-동경신문(1980. 5. 23)
□"사람들은 정부지배하의 언론이 대체로 시민들의 죽음을 의식적으로 묵살하는 처사에 몹시 분노하고 있다."-아시아 월 스트리트 저널(1980. 5. 23)
□"다른 건물에는 5명 이상의 시체가 있다. 직원이 말하길, 그 중의 하나는 군대가 떠날 때 뒤에 처진 시체라고 한다. 그는 총에 맞은 것이 분명 하다."-아시아 월 스트리트 저널(1980. 5. 23)
□"한국의 계엄사령부는 23일 오전 8시, 각 매스컴에 대해서 광주폭동사건의 보도를 일체 금지시키는 조처를 취했다."-아사히신문(1980. 5. 24)

'사람들 대검에 찔리고…'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광주발 AFP(1980. 5. 24)
□"18일의 평화적 시위에 대한 공수부대의 야수적 만행 규탄. 수많은 사람들이 대검에 찔리고 구타당했다. 여기의 상황은 한국의 타지역에 알려지지 않고 있음."-광주, UPI·AP·NYT·AFP(1980. 5.25)
□"다같은 동포요, 우리 국민들인 이상 우리가 얘기를 해서 해결할 수 없는 그러한 문제가 나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흥분과 일시적인 감정으로 인해서 잘못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부는 최대의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붙일 것을 말씀드려 두고자 합니다."-최규하대통령 '특별담화'중에서(1980. 5. 25)
□"현재 체포된자 중에서 극렬난동분자를 신속히 가려내고 과감하게 관대한 처리를 하라."-이회성계엄사령관 특별지시(1980. 5. 27)
□"코럴시호가 한국의 안전보장에 대한 미국의 결의를 과시하기 위해 6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27일 한국해역에 당도, 활동하고 있다."-미국방성(1980. 5. 27)
□"작전을 지휘한 육군 대령은 '그들의 사살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측의 손해인 사망자 1명에 대해서도 당연히 그들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동경신문(1980. 5. 27)
□'학생과 시민들은 궁극적 목표가 민주화의 실현이며, 공산당의 사주가 아님을 주장. 사망자 최소 2백90명선. 투입된 군인들은 공산당 반란 진압명령을 받았음. 군인들은 젊은이와 대학생들을 검거하여 등과 배에 X자 표시'-AFP(1980 5. 28)
□'한국의 군사독재는 북한과 다를 바 없음. 한국사태는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으며, 북괴에 대한 경고는 무의미'-시카고 트리뷴지에서(1980. 5. 28)
□"이번 사태로 인한 사망자와 부상자를 정확히 파악, 단 한사람도 실종자가 없도록 하겠다."-김종호 전남지사 기자회견에서(l980. 5. 29)
□"이번 광주사태에서 민간인 1백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1백70명이 사망했다."-계엄사령부(1980. 5. 31)
□"광주사태는 젊은 군인이 격렬한 소란의 와중에서 저지 임무를 수행하게 되니 자연 학생들을 군중의 면전에서 제지, 연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소 과격하게 다루거나 도피하는 학생들을 추적하여 잡는 과정에서 기물을 파손될 수도 있는 상황도 이해하지 못하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려는 불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시민들이 흥분하는데서 크게 확대 됐다."-계엄사령부(1980. 5. 31)
□"광주사태가 무장폭도들에 의해 무법 천지한 단계에서도 군은 끝까지 무익한 자극과 무고한 시민의 피해를 염려하여 최소한의 자위권 발동마저도 자제하였으며, 비록 군인이 폭도에 잡혀 무참히 난자, 학살되는 것을 보면서도 총 한 방 쏘지 않고 사태의 악화방지에 주력하였다."-계엄사령부 발표 중에서(1980.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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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사태가 발생되었는가? 계엄사령 부는 그 이유를 '불량배, 공산주의 및 그 동조의 불순분자'로 돌렸다. 그러나 나는 선동이나 조직 폭력의 기미를 찾을 수 없었다."-타임지통신원 에스 장, 타임지에서(80. 6. 2)
□"진실은 분명 하나뿐이며 날조된 허위는 언젠가는 밝혀지는 것이다. 계엄당국으로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명백히 밝혀 잘못이 있다면 응분의 책임과 조치를 취할 것을 군의 존엄성과 명예를 걸고 천명한다."-계엄사령부발표(1980. 6. 5)
□'광주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민중의 불만은 총으로 억압되지 않으며, 20년 전으로 후퇴시키려는 전두환 일당의 음모는 실패할 것이다.'-뉴스위크지에서(1980. 6. 13)
□"사태의 발단은 군이 교문으로 들어 가려는 전남대학생들을 총으로 대검으로 쫓아내려고 한데 있었다."-뉴스위크지에서(1980. 6)
□"광주에서 계엄군은 작전 명령을 받아 작전한 것이며 따라서 그 누구도 징계할 이유가 없다."-이희성 계엄사령관 외신기자회견에서(1980. 7. 2)
□"급기야는 불순분자들의 배후 조종에 의해 불쌍한 광주사태가 일어났다."-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 위원장, 조찬기도회에서(1980. 8. 6)
□"앞으로 광주사태를 더이상 거론하지 말고 이를 교훈으로 삼아 전라도민의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하고 어느 도에 못지 않는 훌륭한 도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전두환 대통령 취임직후 광주방문에서(1980. 9. 4)
□"광주의 폭동사태가 또 다른 2개 정도의 도시로 확산되었더라면, 북한의 김일성은 10만의 병력을 침투시켰을 것이다."-전두환 대통령, 로버트 노바크(미국, 칼럼니스트)와의 회견에서(1980. 9. 17)
□"여기에 수록된 증언은 최소한 일시적으로나마 광주를 '자유'도시로 만들었던 시민들의 방위력과 아울러 용기와 기강에 관한 증언이다."-북아메리카 한국인권동맹의장 폐기 빌링스 한국사태보고 중에서(1980. 9)
□"이 사건은…살인군부의 짐승만도 못한 야만성을 똑똑히 보여주었다."-독일의 코리아 차이통지에서(1980. 9)
□"형이 확정된 83명에게도 특별 감형 조치 등을 내려 광주사태에 관한 모든 처리는 일단락됐다."-정부대변인 이광표 문공부장관(1981. 4. 3)
□"지난 80년 이후 학원사태와 광주사태 등을 주동하거나 기타 불순범죄 행위를 저지르고 도피중인 주요범법자 윤한봉·장기표 등 9명을 전국에 긴급 공개지명 수배했다."-치안본부(1982. 4. 5)
□"내가 5·17이전에 학원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학생들에게 자제를 당부했고 광주사건은 내가 체포된 후에 일어났다."-김대중, 신동아와 인터뷰에서(1985. 4월호)
□"한국정부당국이 광주에 다시 군대를 투입시키는 과정에서 미국은 보병 20사단의 사용을 승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개입했지만 우리는 끝까지 병력을 조심스럽게 사용하도록 부탁했습니다."-주한미대사 월리엄 글라이스틴 인터뷰중에서(1985. 6)
□"외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은 조직적이고 치밀한 배후조종과 유언비어의 유포를 통한 교묘한 선동을 통하여 광주시민의 지역감정을 촉발, 흥분시킴으로써 사태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것입니다."-윤성민 국방부 장관 '광주사태'보고중에서(1985. 6. 7)
□"이 사태로 인한 사망자는 1백91명이었으며 신분별로는 민간인 1백64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이었다."-윤성민 국방부장관(1985. 6. 7)

'재조사하면 진통만 커져'

□"광주사태는 그 자체가 국가적 위기였으며, 이 위기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데 군이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국방부 보고(1985. 6. 8)
□"돈을 거둬 위령탑을 건립하거나 장학금을 주는 등의 미봉책보다는 노태우 차기 대통령이 부담을 느끼더라도 비상한 각오로 대수술을 해야한다."-김원만 전 신민당부총재,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이하 민화위)에서(1988. 1. 22)
□"이 문제를 듣다보니 과연 노태우 당선자가 대통령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 노 차기대통령의 향후 5년은 올림픽을 치르고 국민화합을 이뤄야 하는 등 할 일이 많은데 자칫 지난 세월의 멍에로 또 다시 어두운 그늘이 있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가장 큰 멍에는 광주사태라고 생각된다."-김재순 전 공화당원내총무, 민화위에서(1988. 1. 22)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위험성 있는 입장이 되면 안된다. 올림픽 등 할 일이 산더미 같이 많은데 재조사하면 결과는 진통만 더 겪게 될 우려도 없지 않다.  최상의 수습책은 유가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방향이어야 한다."-시인 서정주, 민화위에서(1988. 1.29)
□"광주사태는 당시 국가존립 문제가 위태로울 정도의 최악의 상황하에서 국가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으로써 대단히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전 전두환대통령(1988. 1.29)
□"광주문제는 결코 '사태'가 아니라 광주 '의거'로서 개념이 재정립되어야 한다."-5·18부상자 이광영, 민화위에서(1988. 2. 3)
□"광주사태를 용서와 화해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데 우리가 각본에 의해 움직인다는 발상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천도교 교령 고정훈, 민화위에서(1988. 2. 3)
□"정부측이 발표한 사망자 숫자는 영안실에 안치된 사람만을 계산한 것이며 그마저 통합병원에 있던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5·18부상자 이광영, 민화위에서(1988. 2. 3)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사망자수는 정부 발표가 틀림없다."-당시 전남북계엄분소장 소준열, 민화위에서(1988. 2. 4)
□"광주사태의 직접 원인중의 하나는 계엄군의 과잉 진압이었다."-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 민화위에 보낸 서신에서(1988. 2. 8)

'역사적 지역감정이 원인'

□"광주사태의 원인은 역사적으로 지역적인 감정이 잠재해 있었고 특정 정치인의 사조직이 깊숙이 침투돼 있었으며 학생들의 욕구불만이 많이 노정돼 있었던 것이 작용됐다."-당시 정부합동조사단장 이광로 민화위에서(1988. 2. 8)
□"지금 광주사태를 의거로 하자면 발포 과잉진압의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5공화국을 악으로 규정, 부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이병용 전 대한변협회장, 민화위에서(1988. 2. 9)
□"결론적으로 광주사태는 역사적 맥락에서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되 폭도란 말은 없애야 하지만 의거란 표현은 생각해 볼 문제다."-심종섭 전 학술원회장, 민화위에서(1988. 2. 10)
□"광주사태는 광주시민항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며 '과잉진압하다 일어난 불상사'라고 규정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김문희 한국걸스카웃연맹총재, 민화위에서 (1988. 2. 10)
□"이희성계엄사령관으로선 발포명령이 부득이 했다고 본다. 진압태도가 지나쳤다는 대목을 따지자면 대대장 또는 중대장선인데 그들에게 사과하라고 할 수 있겠나. 법적으로 책임질만한 사람이 없다고 본다."-시인 서정주, 민화위에서(1988. 2. 10)
□"진상규명은 과잉진압을 시인했으므로 결국 된 것이다. 색출은 제2, 제3의 부작용만 남는다."-이충환 전 신민당의원(1988. 2. 10)
□"책임자를 색출해봐야 광주시민에게 일시적 통쾌감만 줄 뿐 4천만이 공감하는 화합책은 아니다."-이병용 전 대한변협회장, 민화위에서(1988. 2. 10)
□"만약 평화적인 시위였다면 과연 군이 발포했을까요. 그때 당시 군의 흥분된 심정을 이해합니다. 군은 지휘계통이 확실하기 때문에 책임자 규명은 그리 어렵지 않지요. 하지만 시민들측에선 교도소 습격 등에 책임있는 사람을 가려내기란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것은 형평에 어긋나지요."-민화위 국민화합분과위장 박병권(1988. 2. 23)
□"광주사태는 당시의 구체적 사태 진전과는 별개로 나라의 정치발전이라는 큰 흐름에서 볼 때 광주학생과 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정한모 문공부장관, 국무회의에서(1988. 4. 1)
□"광주사태에서 많은 국민이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된데 대해 정부는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정한모 문공부장관(1588. 4. 1)
□"광주시민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궐기했던 것이며 이로 인해 수많은 애국자들이 희생된 만큼 민주주의의 실현이야말로 광주의거 문제의 핵심이 된다."-김대중 총재(1988. 4. 5)
□"나보고 원흉 또는 살인마라고 하는데. 그것은 내가 직접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나는 오로지 CAC(전투교육사령부)사령관의 명령에 따라서 들어가고 나가고 이리 가고 저리 가는 등의 일밖에 하지 않았어요."-박준병 당시 20사단장, 신동아 인터뷰에서(1988. 6. 12)
□"광주봉기를 진압하는 것은 당시 그들에게 쿠데타의 한 단계로 받아 들여졌다."-미국 마크 피터슨 교수 논문에서(1989. 3. 16)
□"시위군중들은 계엄군의 과격한 행동에 저항하여 자기방어를 위해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가 그들을 폭도·범법자 심지어는 공산주의자라고 몰아 붙이는 것에 반발, 항쟁을 계속 했었다."-미국 린다루이스 논문 중에서(1989. 3. 16)



그 길을 간 사람들은

김남주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어
80년 5월 항쟁에서
나의 꿈을 가고자 했던
그 길을 간 사람들은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어
80년 5월 투쟁에서
총을 메고
거리에 나섰던 사람들은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어
80년 5월 전투에서
영웅으로 죽어갔던 사람들은

나하고는
나같은 사람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어
나로부터는 나같은 사람으로 부터는

관념적인 사랑에 값싼 동정밖에는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그런 사람들이었어

나의 꿈 소박한 꿈
착취와 압제의 밤을 헤치고
나의 칼 나의 피가 가고자 했던 길

그 길 사람마다 저마다
노동의 하루가 끝나면 찾아들 보금자리였고
노동의 질과 양에 따라
그 과실이 골고루 나눠지고
강에서는 팔팔한 물고기가 뛰놀고
하늘에서는 밤별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그 속에서 맑은 물 맑은 대기속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자유를 행사하고
원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길
그 길을 간 사람들은
손을 털면 빈 주먹밖에 없는 사람들
흔해빠진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했던 사람들
하루 세끼 밥을 위해 잠자리를 위해
가진 자들에게 제 몸뚱아리를
쾌락의 도구로 굴려야 했던 사람들
감옥의 문턱을 제 큰집 드나들 듯 했던 사람들
기계처럼 혹사당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