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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주화운동 10년/광주, 발포 명령자는 누구인가. 이해찬(신동아, 1990. 5)

본문

광주발포명령자는 누구인가



특별기획 : 광주민주화 운동 10년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자위권발동을 허락한 것은 80년5월21일 밤이었다. 그러나 첫 발포는 이미 그날 낮에 자행됐다. 발포명령자는 누구인가.

이 해 찬(국회의원·평화민주당)

1980년 5월 21일 오후 전남 도청 앞의 집단발포 명령자는 누구인가? 이것이 광주민중항쟁의 진상규명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자 항쟁 1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장막에 가려져 있는 최대의 의혹이다. 발포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겨레의 가슴에 지을 수 없는 한과 상처를 입힌 학살행위의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지름길이다. 학살에 가담한 쿠데타의 주역들이 5공 시절에 모든 증거자료를 인멸시키는 한편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철저한 위증으로 진실을 감추어버린 것도 이 문제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그 진상을 추적해 보는 것은 80년 5월21일 오후 전남도청 앞에서 일어난 몇 시간 동안 의 유혈참극이 광주민중항쟁의 모든 것을 압축하여 드러냈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쿠데타 군부의 무모한 집권야 욕과 공수부대의 야만행위, 광주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집념과 현지부대 지휘관들의 반발, 군 지휘체계의 이원화와 사실상 학살명령이었던 소위 자위권 발동의 실체까지 한꺼번에 나타난다.
  동포의 맨가슴을 총칼로 난자한 자들의 야만행위를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잊어버려서는 결코 안된다. 명백한 증거에 의해 입증된 몇 가지 사실과 의미있는 정황증거를 통해 도청 앞 발포의 진상을 추적하는 작업은 그날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민주화 의지와 불굴의 용기, 그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더욱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도 발포를 명령하지 않았다 ?

  발포명령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증언을 한 사람은 11공수 여단장 최웅 준장(이하 계급과 직책은 80년 당시의 것이다)과 31사단장 정웅 소장, 전남북계엄분소장이자 전투교육사정관 윤흥정중장, 그리고 [공식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던] 특정사령관 정호용 소장이다. 그들의 증언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예하 대대장들이 그전(도청 앞 발포-필자)부터 벌써 실탄을 달라고 했지만 절대 발포해서는 안된다고 했 다. 21일 아침부터 우리는 윤홍정 장군에게 강력하게 철수를 요구했다. 31사단장과는 접촉이 없었고 당시 전교사 사령관에게 한 단계 높여 가지고, 31사단장을 거쳐서 올라가는 시간적인 어려움보다는 상황이 너무 급히 돌아가고 하니까 부하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어야 하겠고, 불필요한 충돌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병력을 빼야 되겠다, 이런 강한 의지로 한단계 높여서 결심권자에게 요청을 하였다."(1988년 12월 21일 광주특위 제21차 회의 청문회에서의 최웅 증언)

"20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는 이미 31사단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19일 23시에 예하 공수부대에 무혈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20일 오후부터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 21일 발포 시에도 발포명령을 내려 달라는 건의를 받지 못했으며, 발포 이후에도 그러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같은 청문회에서의 정웅 증언)

"공수부대는 철수를 건의할 부대가 아니며 철수를 건의한 적도 없다. 물론 발포 건의도 전혀 받은 일이 없고 발포한 사실에 대해 사후에도 보고를 받은 일이 없다. 그리고 발포를 건의하려면 당연히 31사단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나는 20일 밤 12시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공수부대의 철수를 건의하고 승인을 받았다. 공수부대를 철수시킬 예정인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발포까지 하면서 시위대를 막을 필요가 있었겠는가?"' (1988년 12월8일 광주특위 제17차 회의 청문회에서의 윤흥정 증언)

세 사람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발포를 건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발포명령을 내린 사람 역시 없다. 일견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아들었다.
"사태가 악화되자 발포 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아와서 나는 지휘 계통 안에 서있지 않았지만 절대 발포불가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월간경향」 89년 5월호에 이태원 기자가 쓴 인터뷰기사 「정호용, 광주사태 책임을 밝히다」에 나온 말이다. 물론 정씨는 청문회에서 이태원 기자와 인터뷰한 사실까지 완전히 부인했다. 그러나 며칠 후 이기자의 강력한 항의를 받자 다시 말을 바꾸어 이를 시인했다.
  정호용 소장은 광주항쟁 기간동안 거의 매일 헬기로 서울과 광주를 오가면서 상황을 살피고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대척을 논의했으며, 휘하 3개 공수여단의 지휘소를 방문하여 실질적으로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그런데 유독 21일만은 광주에 가지 않았노라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서울에 앉아서 이같은 급전을 받고 「발포불가」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정호용씨의 「발포불가」 명령은 사실인가. 발포명령을 내렸건 발포불가명령을 내렸건 이것은 결코 발포명령이 정상적인 보고-명령 계통에 의해 하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육군본부의 교범 『폭동진압작전}에는 군의 발포 요건과 절차를 다음과 같이 매우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발포권(자위권)은 진압작전 책임지휘관인 위수사령관에게 있다. 그리고 발포권한을 가진 지휘관은 발포명령을 하달하기 전에 민간당국과 협의하지만 발포명령에 대한 책임은 전가할 수 없다.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는 다중 폭동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유혈난동으로 변질, 무장폭도로 조직화되고 지휘계통에 의해 체계적인 저항을 감행하여 도시 게릴라 형태로 발전하게 될 때이며, 발포가 부득이한 경우에도 먼저 발포한다는 것을 군중에게 경고하고 실탄사격 전에 반드시 공포사격을 실시한다.
그리고 사격은 지휘자(관)에 의하여 철저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사태수습이 도저히 곤란한 시는 지휘관의 상황판단에 의거, 일제사격을 실시하되 발포에 대한 책임은 지휘관에 있으므로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신군부는 이같은 교리를 잘 알고 있었다. 도청 앞 발포의 주역인 11공수여단은 80년 4월의 [사북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준비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사북의 광산노동자들은 비록 무장하지는 않았지만 동원탄좌 직장예비군 무기고를 점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엄사령부는 작전명령서에서 총포의 사용을 엄격히 규제했다.
"총포의 사용은 여하한 긴박한 상황에서도 군사령관의 사전 승인을 득하고 지역사령관(군수지원사령관-필  자)의 명에 의거 사용하라"(육군본부, [육군 참고자료지], 작전명령 및 지시철)
  그런데 똑같은 11여단이 광주에서는 2군 사령관의 사전승인이나 지역사령관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의 명을 받기는 커녕 발포를 건의하지도 않은 채 집단발포를 자행하여 엄청난 인명을 살상했으며 사후에도 아무런 보고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날의 발포는 31사단장 정웅소장과 전교사령관 윤흥정중장으로 이어지는 공식 지휘계통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불법적인」것이었다. 대한민국 육군의 최정예부대임을 자랑하는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작전지휘권을 가진 현지사령관이 아니라 {지휘계통 안에 서 있지 않은} 특전사령관에게 발포 여부를 묻는 급전을 보냈다. 또 정호용 소장은 『현지 지휘계통에 건의하라』는 합당한 대답 대신 발포불가 명령』을 내렸다. 그가 만약 발포불가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면 그것은 경우에 따라 발포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가 청문회에서 이태원기자와 인터뷰한 사실을 부인한 것은 이런 점을 의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소위 「자위권」의 허구성

  발포 경위와 명령자를 밝히지 않기 위해 당시의 군지휘관들은 소위 자위권 발동이라는 논리를 동원했다. 그들은 학살의 책임을 도청 현장에 있던 익명의 공수부대 장병들에게 떠넘겨버렸다. 아무도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위수령과 군인복무규율에 의거하여 장병들이 각자 「알아서」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군인은 무가를 사용하지 않으면 임무수행이 불가능한 때에는 각자가 알아서 사용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자위권의 행사는 폭행을 받아 자위상 부득이 할 때, 다중의 난동시 병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진압이 어려울 때, 신체·생명, 또는 토지 기타 물건을 방어할 시 다른 수단이 없을 때 자위권을 사용할 수 있다는 위수령 15조와 신체·생명, 또는 재산 보호에 상황이 급박하여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보호할 방법이 없을 때, 폭행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서 그 상황이 급박하여 자위상 부득이 할 때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군인복무규율 123조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 말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는가? 그들이 필요할 때마다 들먹인 위수령과 군인복무규율 그 자체가 이 의문에 대답한다.
  위수령 제1조(목적)에는 『육군부대가 영구히 한 지구에 주둔해서 그 지구의 경비, 육군의 질서 및 군기의 감시와 육군에 속하는 건축물 기타 시설물의 보호에 임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광주에 영구히 주둔하는 위수부대가 아니며 도청 역시 육군에 속하는 건축물이 아니다. 만약 전교사나 31사단이 상무대를 방어하기 위해 자위권을 발동했다면 모를까, 위수령 제15조는 원천적으로 공수부대에 적용될 수 없는 성질의 법률조항인 것이다.
  또 군인복무규율 제123조는 보초(초병의 무기사용에 관한 규정이다. 공수부대가 보초를 서기 위해서 광주에 내려간 것도 아니고 도청 앞의 집단발포 역시 초병으로서의 권한 행사는 결코 아니었다. 더욱이 발포대상이 교전 중인 적이나 후방에 침투한 공비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아도 군인복무규율을 들어 집단발포를 합리화하는 것은 하나의 넌센스에 불과한 것이다.

누가 먼저 총을 쏘았나

  80년 당시 신군부와 공수부대 지휘관들, 그리고 전두환정권은 자위권 발동이라는 이름 아래 당시의 상황을 왜곡조작했다. 마치 광주 시민들이 공수부대에 먼저 총을 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 인용문은 1980년 6월 계엄사령부가 발표한「광주사태」의 일부인데 진실과 허구를 완전히 바꿔치기 하여 날조한 유언비어로서 역사에 기록될만한 가치가 있다.
{21일에는 세무소를 방화, 전소케 하면서 평소의 원념을 발산하여 난동으로 CBS방송국과 차량을 탈취·방화하였고, 방위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공장을 습격, 군에 납품할 장갑차를 비롯한 군용 차량과 민수용 차량 200여대를 탈취하여 나주, 화순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TNT 폭약, 총기를 닥치는 대로 약탈, 완전히 무장 폭도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군은 무장 폭도들과 충돌로 무고한 시민의 생명과 재산에 손상을 입히는 불행한 결과를 회피하기 위해 21일 밤 외곽지대로 철수, 시내와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봉쇄하는 한편, 여타 지역에서의 난동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계엄군에 일체 발포치 않도록 엄중히 시달, 최소한의 자위권 발동마저도 자제하였던 것이다.
  광주사태가 무법천지화한 단계에서도 군은 끝까지 무익한 출혈과 무고한 시민의 피해를 염려하여 최소한의 자위권 발동마저도 자제하였으며, 비록 군인이 폭도에 잡혀 무참히 난자, 학살되는 것을 보면서도 총 한 방 쏘지 않고 사태의 악화 방지에 주력하였다.}
  6월 민주항쟁과 4·26총선에서의 국민적 승리가 있은 후, 그들은 청문회에서 보다 그럴듯해 보이고 세련된 모범답안을 새로 만들어 제시했다. 11여단장 최웅준장과 61대대장 안부웅중령, 그리고 35대대장 김일옥중령 등 공수부대 지휘관들의 증언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21일 오후 1시가 조금 못돼 장갑차의 돌진과 함께 시위대가 사격을 가하는 총성을 들었다. 도청 앞 분수대까지 몰린 병력들은 수십만 시민들과 차량 공격에 위기감을 느꼈다. 4개 대대장이 즉각 모여서 논의한 결과 상부에 발포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절대로 발포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때 31사단 경계병력을 철수시키기 위해 헬기 한대가 도청 앞 광장에 내려 앉아 31사단 병력을 싣고 이륙하였다.
  그 직후 누가 31사단 철수 병력들로부터 얻어왔다며 약 1600발의 실탄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이 실탄을 장교들에게만 10발씩 분배하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돌진하였다. 그때  갑자기 먼저 실탄을 받은 장교가 이 버스에 가격을 가해 버스의 돌진을 저지했다. 그런데 이어서 또 다른 차량들이 본격적으로 돌진하여 발포를 하였다. 이러한 발포는 본능적이고 조건반사적인 정당방위 차원의 발포였다. 그 때 시위진압 시에는 실탄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으며, 쏘고 싶어도 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31사단 경계병력들이 철수하면서 넘기고 간 실탄 덕택에 다행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모범답안의 요지는 ①시위대가 먼저 발포를 시작했기 때문에 ② 31사단 병력에게서 인계받은 실탄으로 자위를 위해 발포를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①은 발포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고 ②는 발포 책임의 일부를 31사단장 정웅소장에게 전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주장이 과연 진실인가를 따져보기로 하자.

시위대는 언제 총을 들었나 ?

  우선 시위대가 선제발포를 하려면 총과 실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군경의 무기고에서 밖에 나을 수 없다. 따라서 시위대의 무장 시점을 정확히 알려주는 증거는 군경 무기고가 시위대의 손에 들어가고 무기가 탈취된 사실을 기록한 군의 자료일 것이다.
  5월20일에 시위대가 무기를 탈취한 기록은 전혀 없다. 「전교사 작전상황일자」에 21일 새벽 2시 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당한 기록이 나오지만 「2군 계엄상황일지」에 {실탄은 31사단에 보관』이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시민들은 단지 [빈 총」을 들고 있었을 뿐이다.
'21일 11시 폭도들이 M16 1정을 휴대하고 광주교도소에 도착'했다는 [2군 계엄상황일지]기록은 전교사 등 일선부대의 자료에 그 무기가 탈취당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윤흥정, 정웅 등 현지부대 지휘관들도 이런 사실이 없었다고 증언한 만큼 신빙성이 없다. 「특전사 전투상보」에는 '21일 07:00∼13:00 폭도, 무기로 계엄군 위협', '야간에 경찰 및 예비군 무기고 공격하여 탈취한 소총과 탄약을 휴대하고 계엄군 위협', '13:00부터 폭도들은 소총사격 가하여 계엄군 공격, 많은 부상자를 냈다'는 대목이 있고 「2군 계엄상황일지」에도 '13 : 30 도청 앞 계엄군 중사, 폭도가 발사한 총맞아 절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21일 오후 1시 이전에 광주 일원의 파출소나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과 탄약을 탈취당한 기록이 없고, 군의 사상자 관련서류에로 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총상을 입은 사람은 전혀 없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위 문서들의 기록은 발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후 조작된 것이거나 착오에 의한 잘못으로 될 수밖에 없다.
  육군본부가 81년도에 각부대의 상황일지를 종합하여 만든 「소요진압과 그 교훈」은 군의 자료 가운데 당시 상황을 가장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자료에 따르던 시위대가 총과 실탄을 함께 탈취한 최초의 사례는 {5월21일 14:30경 나주경찰서 삼포지서, 영광파출소, 금성파출소, 무안파출소 등의 예비군 무기고 피탈}과 {15 : 50경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 등이다. 화순파출소 무기가 13:35에 탈취당했다고 기록한「전교사 상황일지」를 사실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집단발포가 자행된 21일 오후 1시 이전에는 도청 앞 시위 군중은 공수부대에 발포할래야 할 수가 없었던 셈이다.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청문회에서 발포시각을 21일 오후 1시30분경 이후로 늦추어 증언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시민들이 선제발포했다고 강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기독교병원 등에서 응급처지를 받은 환자들의 진료기록부는 1시 10분경부터 이미 수많은 총상 환자들이 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따라서 발포시간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모두 고의적인 위증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공수부대는 시민들의 선제발포에 대한 정당방위로 집단발포 한 것이 절대 아니다. 시민들은 21일 오후 1시에는 실탄이든 총을 보유하지 않았다.

실탄은 어디에서 나왔나

  공수부대가 발사한 실탄은 31사단 병력에게서 인계받은 것이 아니다. 우선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였던 김영택 씨의 증언을 보자.
  {도청 3층 복도에서 장형태 전남도지사와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오전 10시10분 경 분수대 앞에서 공수부대 병력에게 실탄이 분배되고 있었다. 시위대의 장갑차가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향해 돌진한 시간은 오후 1시가 조금 못된 상황이고, 공수부대가 총격을 가했다는 시위차량이 돌진한 것은 그 바로 뒤인 12시58분 경이었다. 그 직후인 정각 오후 1시에 갑자기 애국가가 흘러나오며 집단발포가 시작되었다}(1988년 1월16일 광주특위 제25차 회의청문회에서의 김영택 증언)
  실탄이 배급된 것은 21일 오전이었다. 장갑차가 돌진한 순간에서 발포가 시작된 시점까지는 불과 5분도 못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시위대의 차량이 돌진하는 상황에서 도청 앞에 헬기가 착륙하여 31사단 병력을 실어갔다는 것도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더욱이 그런 상황에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실탄을 인계받아 분배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정웅소장은 그 시각 도청에는 31사단 병력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곳에 있었던 한 공수부대 하사관의 다음과 같은 고백도 김영택 기자의 증언과 일치한다. 이 고백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11공수여단 소속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1일 저희가 위치했던 선두를 후미가 바꾸고 대신 저희 뒤의 부대원이 와서 위치를 바꾸어 도청 분수대 옆 으로 가니 지휘관이 실탄을 분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실탄은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비상용 실탄을 휴대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지급받은 실탄을 탄창에 삽입하고 언제라도 사격을 할 수 있도록 총에 결합하지 않고 바지 옆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이 때 각 지휘관의 임시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도저히 시위대를 물리칠 수가 없고 이 많은 군중을 헤쳐 나갈 수 없으며 이 많은 병력과 경찰이 엄청난 시위대와 육박전이 전개되었을 때 군과 경찰 절반이 살상 당하기 쉬우니 어떠한 방법으로 물리치느냐가 회의의 목적이었습니다. 여러 하사관 장교 지휘관 등이 참석하였으나 결론을 못내리고 계엄사령부를 호출하여 현 상황을 설명하고 [정식 발포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건의했지만 절대 안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했지만 그때는 야속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20-30분간 실랑이가 계속되었습니다. 결론은 잠시 더 계엄사령부의 지시를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다시 계엄사령부에 [발포 명령을 내려 달라]고 무전으로 종용하였습니다. 그 때 학생들과 몇몇 여자들이(전옥주, 김범태 등의 시민대표로 추정됨-필자) 협상을 하러 왔습니다}([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 윤재걸 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pp. 46∼47)
  실탄의 출처가 중요한 것은 실탄 배급망을 따라 발포명령이 함께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월간조선} 1988년 7월호에 조갑제 기자가 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 이와 관련된 주목할만한 인터뷰가 있었다. 공수부대의 「어느 대대장」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우리 대대는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대장이 갖고 다니는 경계용 실탄조차 조선대학에 두고 나왔었다.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렸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이것을 수령했었다. 오후에 발포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도청 근처 빌딩 위에 공수대원들이 올라가 아래를 향해 사격한 것도 엄호용이었다. 그때 수십만 군중을 향해 본격적으로 쐈다면 그 정도만 죽었겠는가? 21일 오후에 공수부대는 일부 대대에서 경계용 실탄으로 대처한 것이고 본격적으로 전투용 실탄을 공급받은 것은 광주에서 철수한 뒤인 22일이었다}
  「오후 2시쯤」이라는 시간만 빼면 이 증언은 많은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조선대에 있던 경계용 실탄을 헬기로 싣고 온 것, 도청근처 빌딩 옥상에서 시위군중을 저격한 것은 사실과 부합한다. 단, 경계용 실탄과 전투용 실탄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살상용 실탄이지만 분류만 그렇게 되어있을 뿐이고 실탄을 배급받은 시각은 오전 10시경이다.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구태여 31사단 실탄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은 실탄이 배급된 계통을 따라 발포명령이 내려갔을 개연성을 의식, 정웅소장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런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은 장본인이 다름아닌 11공수여단 61대대장 안부응중령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청문회에 나와 증언하던 중 야당의원들의 집요한 추궁에 시달린 나머지 얼떨결에 조갑제 기자와 인터뷰한 어느 대대장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시인해버리고 말았다.

발포명령자는 신군부의 핵심 ?

  이제 결론을 말할 때가 왔다. 최웅, 안부웅 등 발포현장의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어디엔가 발포를 허용해달라고 건의를 했다. 그러나 공식지휘계통에 있었던 정웅, 윤흥정 등 현지사령관들은 전혀 그러한 건의를 받지 않았다. 반면 지휘계통 밖에 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엉뚱하게도 발포 여부를 묻는 급전을 받았다. 그는 거의 매일 서울과 광주를 헬기로 오가면서 진압대책을 숙의했다. 그러나 스스로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명령에 따라 진압작전을 수행한 일반 장병들이 이 엄청난 범죄행위의 책임을 나누어 맡아야 한다는 말인가?
  군의 문서에 의하면 5월20일 밤 11시20분 2군사령부는 전교사에 『실탄통제, 발포불가』를 명시한 추가작전지시를 내렸다. 전교사는 이 지시를 예하 31사단에 즉각 전달했다. 그리고 31사단은 배속부대인 3개 공수여단과 전남일원의 예하부대에 똑같은 지시를 전달했다. 그러니까 20일 밤 이후에는 발포를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던 셈이다.
  이 지시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최초의 결정이 내려진 것은 21일 오전의 계엄사 대책회의였다. 이날의 대책회의는 공수부대의 외곽 재배치 등 더욱 강력한 「폭도소탕작전」에 대비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면서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대책회의의 결정사항일 뿐 광주에서 시위진압작전을 벌이던 일선부대에 실제로 하달되지는 않았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군의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21일 오후 7시30분 이전에 자위권 발동 지시가 전교사와 31사단에 하달된 기록은 군의 문서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군의 기록에 의하면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자위권 발동을 허락한 것은 21일 밤 8시30분이며, 공수부대의 뒤를 이어 광주에 투입된 20사단 역시 밤 9시경에야 전교사로부터 자위권 발동지시를 전달받았다. 11,7,3여단 등 공수부대는 공식적으로는 21일 오후 4시까지 31사단에 배속되어 있었고 이후에는 전교사에 배속되었다. 따라서 정상적인 지휘계통에 따를 경우 공수부대가 전교사보다 먼저 이 같은 지시를 받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11여단은 21일 오후 1시에 이미 대규모의 발포를 자행하여 도청 부근에서 최소한 54명의 민간인을 사살하고 수 백 명에게 총상을 입혔다. 또 [특전사 전투상보」에 의하면 7여단이 [방어를 위한 발포 허용』지시를 접수한 것은 전교사보다 2시간30분이나 빠른 오후 6시로 기록되어 있다.
  학살의 주범들은 광주항쟁 이후 발포명령의 결전과 전달경위에 대한 기록을 모두 없애버렸다. 이 글에서 인용한 군의 자료들은 육군본부의 軍史연구실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어렵게 찾아낸 개괄적 자료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의 편린들을 조각조각 맞추어봄으로써 우리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매우 개연성 높은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12·12와 5·17쿠데타를 감행한 신군부의 핵심분자들은 공수부대가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5월21일 오전 시민들에게 발포하기로 결정했다. 안부웅중령 등 공수부대 대대장들의 발포건의는 정웅 31사단장-윤흥정 전교사령관-2군-육군본부의 공식지휘계통이 아니라 11여단장 최웅준장-특전사령관 정호용소장-신군부의 핵심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자위권 발동이라는 공식발포명령이 계엄사령부-2군사령부-전교사-31사단의 공식지휘계통을 따라 내려가기 훨씬 전에 신군부의 핵심-정호용특전사령관-최웅 11여단장을 통해 도청 앞 공수부대에 내려졌다.
  그러나 아직 진상은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쿠데타와 학살의 주범들과 그 상속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 완전한 진상규명은 언제까지나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민주화라는 국민적 과제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로서 겨례의 어깨 위에 짐지워져 있다. 광주민중항쟁 10주년을 맞는 오늘 그 누구도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망월동의 영령들 앞에 나설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