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주화운동 10년/민중운동으로서의 광주민주화운동. 이종오(신동아, 1990. 5)

본문

광주민주화운동 10년

민중운동으로서의 광주 민주화 운동



이 종 오(계명대 사회대 교수·사회학)

특별기획 : 광주민주화운동 10년
80년대 이후 한국사회운동은 [광주]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는 [광주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광주운동의 계승을 의미한다.

1945년 8·15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민중주도에 의한 몇 번이 민주변혁의 계기를 가졌다. 그 첫 번째는 1960년의 4월 혁명이며 그 다음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이다. 그 다음의 계기는 1987년의 [6·29]를 전취해 낸 6월 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월 혁명도, 광주민중항쟁도 또 6월 항쟁도 아직은 민중이 원했던 우리 사회와 정치의 민주변혁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우리 사회는 8·15 이래 진정한 민족 해방, 시민혁명을 아직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아직도 역사적 성년식을 치루지 못한 미성년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정치와 사회생활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길은 비록 늦었다 하더라도 이제라도 위에서 말한 민족적 민주적 과제를 수행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는 하나 민족문제와 민주화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대만같은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그같은 사회에서의 인간들의 살이라는 것도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왜곡되고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60년대 이후 소위 단군 이래의 가난을 극복하고 사회주의권에서까지 부러워하는 경제발전 혹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의 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실상을 되돌아보자. 사회전역에 퍼져 있는 광란의 투기, 사회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저질의 교통문화, 인간성을 완전히 파괴당하고 난 뒤에야 가능할 성싶은 각종 범죄 등으로 사회 전체가 얼룩져 있다. 물론 흉악범이나 투기는 소위 선진국에도 그에 못지 않게 존재하는 것이니 이를 두고 우리 사회의 낙후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삼을 수는 없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의 크기와 범위, 그 사회적 원천을 생각해본다면 우리 사회에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제반 문제점들은 사람사는 곳에서 으레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수준을 분명히 넘어서고 있다. 나아가서 이런 문제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느냐를 논의해본다면 결국 문제는 일차적으로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에 기반하는 민주정권의 창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60년의 4·19, 80년 5월의 광주, 87년의 6월은 다같이 민중적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민주정권 창출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안타깝게도 이러한 모든 노력과 그 과정에서의 고귀한 희생에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화는 아직도 미완의 과제인 것이다.

민주와 민중에 대한 역습

  금년은 4·19 30주년, 광주민중항쟁 10주년을 맞는 해이다.
  8·15 이후 자주통일독립국가와 근대적 민주사회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남북한의 분단국가수립에 이은 6·25전쟁으로 좌절된 이후 최초로 다시 살아난 민중운동이 4·19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4월 혁명은 이승만 독재의 타도라는 일차적 목표가 성취된 이후에 곧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던 민중의 삶의 문제와 분단상태의 극복을 시대적 과제로 제기하였던 것이다.
  5·16은 바로 이러한 8·15 이후 미완의 과제로 남은 통일민족국가의 수행과 근대적 민주사회의 건설을 주창하는 민중운동의 태동에 대한 역습이며 [예방혁명]이었다. 따라서 5·16에 의하여 좌절된 자주 통일 민주라는 역사적 과제는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속에서 때로는 드러난 형태로 때로는 잠재적 형태로 이어져 왔다. 유신철폐민주화운동도 4월 혁명 이후의 발전형태와 마찬가지로 유신독재의 타도 이후엔 사회 각 영역의 민주개혁과 민족문제의 해결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5·17코치와 이에 촉발된 광주민중항쟁의 무자비한 탄압은 바로 이러한 분단체제 내에서 온존되고 확대재생산 되어온 한국 사회의 계급(민중) 문제와 민족문제가 본격화하는 것을 사전에 저지한 또 하나의 [예방혁명]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5·17은 5·16의 충실한 재판이었다.
  5·17의 주도세력인 「신군부」가 5·16의 「지도자」였던 박정희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었던 것은 5·16과 5·17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10·26 이후의 민주화운동과 5·17 이후의 광주민중항쟁은 4월혁명기의 민중운동과는 구체적 조건과 진행과정에서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4·19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중에 의한 독재정권의 타도라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러나 10·26과 5·17 사이에는 4·19와 같은 결정적 민중승리의 경험이 없었으며 10·26 이후 전개된 민주화과정은 50일도 채 되지 않아 이미 12·12사태로 제동이 걸리고 그 전망이 불투명한 사태에 놓여 있었다. 이는 10·26 박정희 사살사건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70년대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결과물로서의 Y·H노동운동자 부마시민항쟁에 의하여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 전개과정은 민중에 의한 독재타도가 아니라 지배세력 내부에서의 음모적 권력투쟁의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4·19 이후 5·16의 역전이 닥쳐오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에 비해 10·26 이후 민주화의 좌절과 역전이 불라 50일 이후의 12·12, 7개월 이후의 5·17로 나타난 것은 바로 민중에 의한 독재타도라는 운동의 성과물이 부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10·26사건이라는 것은 70년대 반유신운동의 성과물이라는 성격과 아울러 유신체제, 더나아가서 한국 사회 지배구조 전체의 붕괴 내지 재편을 방지하고자 하는 역시 또 하나의 「예방혁명」이라는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10·26으로 인하여 유신체제가 붕괴하였지만 사실 10·26으로 인하여 부마항쟁의 발전으로서의 민중에 의한 유신독재의 최종적 타도가 좌절되었던 것이다.

사회운동의 정치적 미성숙

  10·26이후 유신체제가 심대히 동요하고 따라서 최규하정부도 유신의 깃발을 공식적으로는 거두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당시의 경우에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하여 유신해제가 청산될 수는 없었다. 우선 10·26사건 자체는 불철저하게 조직된 일회적 사건으로 끝났으며 권력층 내력예서 민주개혁을 추진할 의지와 세력을 가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유신체제의 진정한 청산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송두리째 잃을 것을 염려하는 친위군부 혹은 정치군부의 반격에 대하여 저항할 힘이 당시의 군내부 혹은 정부안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2·2사태로 인하여 권력층 내부에서의 민주화일정이라는 것이 사실상 무산된 다음에도 당시 김대중 김영삼를 위시 한 보수정치권, 재야 학생운동내부에서는 사태의 본질을 두고 상이한 해석과 기대가 존재했다.
  그 하나는 「단계론」 혹은 「대기론」으로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군부주도하의 민주화가능성에 대하여 조금 더 기대해 보자는 태도이다. 다른 하나의 입장은 적극적 투쟁론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으로 당시 군부의 본질에 관하여 더이상 환상을 가지지 말고 10·26사태로 분열과 혼란에 빠진 유신세력의 재편이 완성되기 전에 적극적 대중투쟁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결국 반유신민주화세력의 단일대오형성의 부재를 가져왔다.
  후일에 나타난 결과를 보면 군부에 의한 민주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일루의 희망을 걸었던 것이 결국 얼마나 순진한 태도였는가 알 수 있다. 4·19, 서울의 봄, 6월 항쟁에서 보듯이 운동의 성과를 성공적인 민주변혁으로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이러한 사회운동의 정치적 미성숙에 크게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10·26에서 5·17에 이르는 기간 민주세력은 많은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고 5·17조치가 선포되기 이틀전인 80년 5월15일 서울역에서마저도 10만 군중이 운집한 앞에서 지도부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서울역회군」이라는, 그후에 실책으로 밝혀진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신군부는 12·12에서 80년 5월에 이르는 기간에 자기정비를 끝내고 결국 장식품으로서의 최규하정부를 대체하여 스스로 명실상부한 정권주체로 나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정권, 즉 5공화국은 보다 더 강화된 형태의 재편된 유신체제였다. 이러한 새로운 독재의 출현에 대한 조직적 저항세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남녘의 광주와 광주의 민중만이 이전 사태발전에 불구하고 외로운 저항을 계속하였다.

아직도 풀리지않은 의혹

  80년 5월18일∼27일에 이르는 광주의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를 감동케 한다. 광주에 관하여는 많은 이야기와 글이 있어 왔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의문점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광주사태의 발단은 우연적인 사태로 시작되었는가, 혹은 신군부의 정권장악의 시나리오의 하나로서의 계획된 도발이었는가가 밝혀져야 한다.
  1988년의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는 여태까지의 많은 의문을 대표하는 적나라한 질문들이 행하여졌고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6공화국이 실질적으로 5공화국의 연장으로서 남아 있는 이상 광주에 관한 모든 의문이 해결되거나 더 나아가서 광주민중운동의 잔인한 탄압에 대한 책임자의 처벌을 기대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문제의 해결은 곧 한국 민주화를 뜻하는 것이고 진정한 민주화의 도래 없이는 광주문제의 해결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전두환전대통령의 일방적인 국회 「증언」과 정호용 1인의 의원직을 사퇴케 함으로써 「약식」 5공 청산을 한 후 정권당국자는 이제 부질없는 과거의 논쟁에서 벗어나 힘찬 미래를 향하여 전진할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광주의 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한 광주의 청산이 없이는 그들에 있어서 미래는 결코 힘차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못할 것이다. 또한 광주는 5·17의 책임자들뿐 아니라 살아남은 모두에게 원죄로서 남아 있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발전 즉 우리 사회가 도덕성을 회복하고 도덕성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는 일은 광주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없이는 결단코 가능하지 않다.

지역감정에 근거한 현상적 파악

  80년대 전반에 걸친, 그리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한국사회운동은 광주로부터 또한 광주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며 광주의 해결을 그 목표로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80년대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은 「광주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랐으며」, 광주운동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운동을 바라볼 때 운동의 측면에서 밝혀내야 할 점은 어째서 광주는 그 당시 고립무원의 싸움을 했어야만 했느냐는 점이다. 5·17의 탄압이 몰아쳐오자 여타의 모든 지역과 부문에서는 운동이 자취를 감추었다. 광주민중항쟁이 목포 무안 화순 등 광주에 인접한 전남권에서만 확산을 가져왔고 광주의 민중이 외로운 싸움속에서 피 홀리고 있을 때 여타의 지역에서는 운동의 불길이 옮아붙지를 못하였다.
  광주의 의로운 그러나 외로운 투쟁과 여타 지역의 침묵에 관하여서 이를 이 지역의 독특한 지역성과 특히 김대중씨와의 연관하에서 설명하는 방식이 있다. 물론 정권을 잡을 기회가 사라져간다고 판단한 김대중씨의 「외곽을 치는 절묘한 수법」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 광주사태라는 반역사적 논리는 언급할 가치도 없으므로 여기에서 논외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철저한 지역감정에 근거한 광주항쟁의 설명, 즉 광주항쟁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호남 대 비호남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것이 대중적 수준에서 의의로 널리 퍼져 있음은 주목할 만하고 우려할 일이다. 1979년 김영삼씨에 대한 의원직 박탈에 이어 부마항쟁이 발생했고 1980년 김대중씨의 체포에 이어 광주항쟁이 발생했다고 하여 이를 자기 지역 출신 정치지도자의 박해에 대한 지역대중의 즉자적 봉기로만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기계적인 논리로서 피해야 할 설명방식이다.
  물론 광주에 대한 당시 정치군부의 가혹한 탄압과 광주민중의 투쟁의지의 상대적 강고성은 이 지역이 60년대 이래로 가져왔던 정치 및 사회경제적 구조와 분명히 관련을 가지고 있다.
  즉 60년대 이래의 공업화과정에서 동남해안지대(경북 부산 경남)가 상대적으로 공업화되고 전반적인 농촌경제의 상대적 낙후성 속에서 전통적인 농업지역인 호남지역이 타지역에 비해 낙후됨은 공인된 사실이다. 또한 5·16군사쿠데타 이래 군부출신 정치가와 군의 정치적 인맥이 대구 경북(금일의 [T·K마피아]의 원조)출신 인사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호남출신 인사의 상대적 배제가 이루어졌음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엘리트의 충원과정에서의 지역성의 반영과 사회경제개발에 있어서의 호남지역의 낙후성은 그간의 한국정치구조의 비민주성과 낙후성,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모순이 지역차별이라는 형태로 드러난 것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문제를 보는데 있어서 호남 대 비호남 혹은 호남 대 영남이라는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는 바로 한국사회구조가 내포하는 민주 대 반민주, 민중 대 반민중의 기본적 대립모순관계가 은폐되거나 부차화될 수 있는 위험성까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운동은 바로 그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민중성, 민주화 운동으로서의 성격에 주목하여야지 이를 현상적으로 나타난 광주민중 대 경상도군인의 대립으로서 설정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지역감정과 정치·사회의식

  우리 사회에서 광주와 가장 대조를 이루는 정치적 도시는 대구라고 할 수 있다. 대구는 전통적으로 남한사회에 있어서의 진보운동의 중심지의 하나였고 50년대까지 대표적 야당도시를 이루어 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지역적 전통은 곧 학생운동 지도부의 구성에도 반영된다는 사실이다. 서울지역 대학에 있어서의 4월 혁명기와 6·3한일협정반대운동, 즉 6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의 지도부에는 영남출신이 다수를 차지했다. 또한 5·16군사혁명 재판당시에 최다수의 기소자는 지역적으로는 경남출신이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면 운동권지도부에 광주 등 호남출신의 비중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런 경향은 광주를 겪고 난 80년대에는 더욱 두드러진다.
  전통적 진보, 야당도시로서의 대구의 운동성의 쇠퇴와 광주 등 호남의 진출은 60년대 이전과 이후의 한국사회의 정치 사회적 변모를 일정하게 반영한다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정치적 경제적 지배층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대중의 의식에 가장 침윤된 곳인 대구 경북지역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자본과 정치권력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영향력을 가장 행사하지 못한 곳이 광주를 위시한 호남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70-8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어째서 상대적으로 호남권에서 활발하고 대구 경북지역에서 부진했던 가를 설명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정치의식의 차이는 기독교에 있어서도 호남지역의 교회가 그간 보여주었던 전투성과 영남지역의 교회가 보여주었던 타협성에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광주와 대구로 상징되는 지역의식 혹은 지역감정은 그것이 한국사회의 지배 피지배관계의 와중에서 산출된  것이기 때문에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특히 1987년 대선, 1988년 총선 때에 나타났다고 하여 1990년 민자당의 성립도 이 지역감정에 의한 지역분할을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주장된다. 지역 감정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지역감정이 내포하는 정치적 사회적 성격을 배제하고 문자 그대로 지역과 지역인끼리의 대립으로 이 문제를 보는 것이 바로 망국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대구 경북인도 지역감정을 갖고 있고 광주 호남인도 지역감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구 경북대중의 지역감정이란 단순화시켜서 말한다면 지배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허위의식인데 반해, 광주 호남인의 지역감정은 억눌리고 소외된 계층의 자기각성이라는 차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광주 호남인의 저항운동은 그것이 지역감정에 의하여 촉발되었거나 혹은 강화되었다할지라도 이는 정치적 사회적 해방을 지향하는 진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극히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지역차별과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대구 경북지역의 대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은 지역감정의 포로가 됨으로써 자기해방의 전제로서의 정치적 사회적 전위의식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전체 한국 사회의 진보와 발전의 도상에서의 선도적 위치에서 오히려 장애물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주 호남지역 대중의 지역 감정이 내포하고 있는 진보성을 발견 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위험성은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대중의 저급한 수준에서의 원초적 지역감정과 사회정치적 해방의 의식은 때로 분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족주의와 민족감정이 갖고 있는 양면성 즉 해방의 이데올로기와 또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반동적 측면에러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정칙 사회적 구조에서 연원한 감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각성된 정치 사회적 의식에 의하여 올바르게 지도되지 못할 때에는 저급하고 원시적인 지역감정에 매몰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닌 「우리」의 문제

  오늘날 사회운동의 정치세력화 내지 민중의 정치세력화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의 와중에서 핵심적인 문제의 하나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세력과 평민당과의 관계, 새로운 정치세력과 호남대중의 관계이다. 이런 오늘날의 논의의 맥락에서 보더라도 광주민중항쟁과 지역성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와 광주민중항쟁이 호남대중의 의식에 어떻게 각인되었느냐는 매우 미묘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역사상의 민족해방 혹은 민중해방운동에서 모든 사회계급, 계층이 동시에 운동의 담지자로서 나타난 예란 있을 수 없고 이는 항상 특정한 계급 계층에 의하여 수행 되어왔다. 그러나 어느 계급 계층의 운동이 역사적 진보성을 인정받는 것은 그 계급 계층의 운동이 전체사회 혹은 인간해방의 길로 나아갈 때 즉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 때인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은 그것이 광주의 민중에 의하여 수행된 전체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지향한 운동이었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의 민중항쟁적 성격에 특히 주목하고 이를 부각시켜야 한다. 광주민중항쟁의 민중항쟁적 성격이 사상될 때에 이는 단순지역감정에 의한 지역대중의 즉자적 봉기로 전락될 수 있는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은 그것이 바로 민중항쟁이었을 때에 [그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로 「그때」의 문제가 아닌 「오늘」의 문제로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정치의식에 따른 민중항쟁

  한국사회운동의 주요한 특성의 하나는 학생운동의 선도성에 있다. 그러나 이 학생운동의 선도성으로 인하여 그 배후에 존재하는 진정한 주체로서의 대중이 가리워져서는 안될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을 보는데 있어서 많은 경우에 광주의 재야 지식인자 학생들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들과 아울러 광주민중항쟁에 있어서는 도시 빈민 택시기사 접객업소 종업원 등의 무조직 대중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민중항쟁은 4·19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
  광주민중항쟁은 학생운동이라기보다 민중항쟁이었다. 한국사회의 모순을 가장 고통스러운 형태로 지녀야 했던 이들이 정치적 행위의 선봉으로 나섰을 때 이는 엄청난 파괴력을 수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중의 정치적 활 성화에서 우러나온 엄청난 힘,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도의 도덕성과 인간성에 우리는 아울러 주목해야 한다.
  중산층 이상은 흔히 민중의 활성화와 조직화에 관하여 그것이 정치적이든 비정치적이든 본능에 가까운 공포심을 갖고 있다. 그들의 상상속에는 도시천민의 집단봉기가 가져오는 살인 방화 강간 약탈의 지옥도가 그려져 있 다. 이것은 민중계급에 관하여 갖고 있는 중산층의 선입견에 의한 것인데 이런 선입견은 다분히 지배이데올로기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0년 5월의 광주에 있어서 특히 극히 짧았던 기간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민중자치를 이루었던 5월22일∼27일에 있어서 이런 현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최악의 형태의 인간성에 대한 범죄는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무장력에 의하여 저질러졌다. 80년 5월의 광주에 있어서 군 경찰 등의 공권력이 철수한 상태에서 일종의 민중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광주의 민중이 기본적으로 정치의식에 의하여 지배되었고 따라서 공권력의 부재상태에서도 사회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에서는 여타의 인종폭동이나 종교폭동과 달리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폭력행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광주항쟁은 기본적으로 군부의 무한폭력 행사에 대한 시민적 자위권의 발동이었다. 따라서 이는 기본적으로 자 생적 대중봉기의 형태를 지녔으며 이런 자연발생성, 조직적 지도의 취약성으로 인하여 조직된 군사작전에 장기간 대항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됨으로써 1980년의 민주화의 희망은 사라졌다. 그러나 5·16에 의하여, 유신선포에 의하여 좌절되었던 민족민주운동이 결국은 다시 동토를 헤치고 솟아 오른 것 같이 한국 민중의 민주화에의 열기는 그 어떤 무한폭력으로서도 영원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은 그후 부산에서, 광주에서, 서울에서 또 학원에서, 공장에서, 거리에서 계속 불타올랐으며 이는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을 통하여 전두환정권으로부터 부분적 항복을 전취해냈다.
  그러나 광주의 한은 6·29선언으로 풀어질 수는 없었다. 80년 5월 광주에서 외쳐졌던 민주화에의 바람은 1987년의 대통령선거의 결과로서 다시 한번 좌절된 것이었다. 1988년 이후의 한국 정치와 사회의 흐름은 아직도 광주는 오늘의 과제로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음을 일깨워준다.

민족민주운동의 한계극복 절실

  80년 5월의 비극이 지난 후 사회운동은 심각한 고민과 그간의 운동방식에 대한 반성에 들어갔다. 이러한 고민과 반성은 그후 운동의 과학화 이론화라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80년대의 운동 속에서는 7()년대의 운동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이론적 실천성 대담성을 가지고 한국사치의 문제를 해명하고 또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결국 운동의 주체와 운동의 과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이론적 차원의 문제와 운동의 주체와 운동의 과제를 어떻게 형성하고 달성해 나가느냐는 실천차원의 노력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주체와 과제를 놓고 무한한 토론이 전개되었지만 이 모든 토론 속에서 확인되는 하나의 뚜렷한 경향은 노동자를 주축으로 한 민중주체의 형성과 민족적 민주적 과제의 설정이다. 즉 한국 사회민중운동은 자주 민주 통일을 자기과제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색의 과정에서 자주 민주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으로서 조직화된 세계자력주의와 독점자본이 설정되었으며, 이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기관으로서의 독재정권이 또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였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반미자주화의 열풍이 80년대 중반 이후 이 땅을 휩쓴 것은 80년 5월 광주의 좌절을 가져온 궁극적 요인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모색 끝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외세와 독점자본과 정권의 상호관계와 이러한 삼자에 대항하는 민족민주운동의 대응책에 관하여 지배적인 하나의 입장으로 민족민주운동이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80년 5월의 좌절을 가져온 민주화운동의 전국적 단위의 조직과 지도의 부재는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운동의 한계를 이룬다. 정치세력화를 둘러싼 최근의 논의와 고민은 바로 독재와 외세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만의 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대체권력으로 자기인상을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대중은 패배에 지쳐 있다. 동학농민전쟁에서 광주민중항쟁으로 또 57년의 대통령선거에 이르는 긴 여정에서 대중은 패배에 지쳐 있으며 이제 대중은 승리와 승리에의 전망을 요구하고 있다. 광주항쟁을 역사 속에 묻어버릴 것인가 혹은 민주승리의 역사 속에 부활시킬 건인가는 우리에게 맡겨진 오늘의 과제이다. 이제 열 번째의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살아남은 자들은 영령들에게 과연 무어라 오늘의 현실을 말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