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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월 선전(선동)활동 보고서. 전용호(민족현실과 문화운동, 1989. 봄)

본문

5월 선전(선동)활동 보고서



전용호

1. 머리글

  광주민중항쟁은 수많은 애국대중과 엄청난 물자가 동원되고,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충격적인 사건이다. 전개된 과정만 보아도 유혈전투가 벌어졌을 뿐 아니라 행정치안력을 무려 8일간이나 축출시켜 무정부의 투쟁자치체로 운용되었던 혁명적 사건이기도 하다. 광주항쟁을 지배하고 추동해온 상황은 개개 인간들이 역사적 원동력을 변혁적 생명력으로 발현시킨 살아 있는 현대사의 현장으로 보아 틀림없다.
  이 글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기간 중에 전개되었던 선전(선동)활동을 개략적으로 분석한 보고서이다.
  광주민중항쟁에 있어서 선전(선동)활동이란 무엇인가? 선전(선동)활동이란 것이 존재하였던가, 광주민중항쟁에 있어서 선전(선동)활동을 떼어서 논할 수 있는 문제인가 등의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변혁운동적 의의와 민족사적 성격이 아직 규명이 안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올바르게 최고 정리된다면 장대한 항쟁의 진면목을 바르게 밝혀내는데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선전이란 말은 '밖으로 널리 알린다' 라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어쩌면 생명이 위급한 때 즉각 튀어나오는 비명 혹은 구원을 외치는 목소리 그런 것들이 선전의 원천적 의미였을 것이다. 5월에 있어서 선전활동이란 엄밀히 말하면 살인적 폭압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였던 총체적 자위행위를 모두 선전행위라 일컬을 수 있다. 당시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껴서 싸우다가 쫓기고 맞아 터지고 깨지고, 참혹하게 죽어가고 혹은 분노의 피울음마저도 삼킬 겨를이 없이 열심히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고립된 현장의 목소리 모두가 비명의 '선전'이었을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의 선전(선동)활동이란 바로 그러한 의미로의 당시 항쟁주체들이 상황타결을 위해 행했던 각종 활동들을 이야기한다. 구체적으로는 민중언론 「투사회보」와 민중집회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및 가두방송, 대자보, 선전현수막 제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대부분의 활동은 훈련되지 않았던 익명의 대중투사들에 의해 즉석으로 실천되었다.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항쟁의 초기인 19일경부터 보안대의 사복 푸락치들에 의해 검거되던 날까지 가두방송을 하면서 시위대를 지휘하여 전면에서 끌어왔던 한 여성투사의 일화는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선전(선동)활동의 내용은 항쟁이 발발하였던 18일부터 계엄공수대들이 도청에서 철수하던 21일까지의 '투쟁기'와 21일부터 도청함락을 당하던 27일 새벽까지의 '해방기'의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두 시기는 각 시기가 처해 있던 상황이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선전(선동)의 목표와 방법 역시 현저히 다르게 전개되는 특성을 갖는다.
  투쟁 주체도 대체적으로 변화하지만 선전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관철하고 있는 두개의 조직이 있다. 「투사회보」를 발행한 노동야학 '들불'과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치뤄낸 극단 광대가 그것이다. 그들은 10일간의 항쟁을 수많은 민중들과 함께 했고 그러다가 역시 당시 산화해 가신 많은 민중전사들처럼 수명의 동료들을 잃었으며 대부분이 구속 수감되기까지 하늘 비운을 겪었다.
  이 글에서는 대중들이 체득하고 있는 공동체적 문화정서를 엮어 구체적인 실천행위로까지 끌어내는 활동을 선전활동이라고, 다시 규정하면서 언론매체 「투사회보」와 시민집회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2. 선전(선동)활동의 주체

  들불야학
  1978년 8월 광주 공업단지가 있는 광천동 성당 교리 실에서 배움에 목말라 하는 노동청소년들과 교사로 참여한 대학생들이 조촐하게 입학식을 갖는다. 야학 '들불'이 창립된 것이다.
  들불야학이 창립된 70년도 후반은 유신독재정권이 말기적 증상으로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여 대학의 강당 안까지 정보경찰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며 상주하던 때이다. 학생운동은 70년대 초반 평화시장노동자 '전태일 분신' 투쟁 이후 추상적인 민주화운동의 양상을 벗어나 현장(노동·농촌)론의 뿌리를 내리려는 새로운 모색의 시기였다.
  들불야학에서는 교사를 강학이라고 불렀다. 가르칠 강(講) 배울 학(學)이라고 하여 노동자들에게 학문은 가르치지만 역사의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인 그들에게 다시 배워야 한다고 규정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것은 교육학의 기본교재로 채택한 제3세계의 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피억압자의 교육학)}의 내용을 정리한 개념이다. 그 책에서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모두 비인간화된 상태로 피억압자의 '의식화'교육을 통한 인간 해방만이 억압자의 비인간화 상태- 억압행위 - 까지도 해방시킬 수 있다고 기술한다. 변증법적 철학 원리를 기초로 계급혁명과 이를 위한 민중교육의 필요성을 쉽게 정리하고 있어 당시 들불야학의 주요 지침이 되었다.
  들불야학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광주시 광천동에 소재한 광주공단에 취업을 하고 전남권 실향농민과 저소득층들이 모여 형성된 광천동 빈민지역에 대부분 거주하였다. 60년대 이후 정부에서 주도한 수출주도형의 고도성장 정책의 희생자로서 그들은 극히 영세한 중소기업단지인 광주공단에서 근근히 살아나가던 빈민충의 자녀였던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농업권에 둘러싸인 광주에도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공업단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때가 1969년부터, 즉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광주공단은 입지적 취약성, 자본의 영세성, 시장의 협소, 그리고 강력한 지원책의 부재로 당초 의도하였던 유휴노동의 흡수, 지역간 산업의 균등발전을 통한 소득증대 등의 파급효과는 미미한 실정으로 낙후된 광주 지방경제를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광주공단실태 보고서(79년 12월)」

  들불야학은 '노동야학'이었다. 흔히 야학하면 진학을 위한 검정고시야학이 대부분이며 검정고시야학은 당시나 현재에도 사회봉사기구나 관립단체 등에서 시행하고 있다. 노동야학은, 검정고시야학과는 애초에 목표가 다르다. 가령 검정고시야학이 검정고시 합격을 목표로 한다면 노동야학은 사회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한 노동운동가의 배출이 목표인 것이다. 기존의 검정고시야학이 체제를 수호하는 편이라면 노동야학은 체제를 깨부시자고 하는 변혁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난 때문에 진학하지 못한 노동청소년들이 찾아오는 야학에서는 검정고시를 목표로 수업을 한다고 해도 합격률은 매우 낮으며 결국 합격해도 경제적 빈곤 때문에 진학을 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검정고시 야학의 한계로부터 노동야학은 출발한다. 노동자인 야학학생들의 가난과 고통의 근본 원인이 교육을 못 받아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모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해방자로서의 삶의 주체임을 일깨워준다는 노동야학의 입장을 들불야학은 처음부터 갖고 출발하였다.
  들불야학은 창설된 후 광주항쟁을 맞기까지 3기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또한 졸업후의 '소모임'이라고 하여 구체적인 노동운동을 위한 과정도, 준비하고 있었다. 강학도 20여명이 배출되었고 당시의 사회활동가였던 김영철과 윤상원 등의 지도를 받으며 광주지역의 중요한 변혁역량으로 발전하였다.

  극단 「광대」
  극단 광대는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문화운동단체이다. 주 구성원은 전남대학교 탈춤반과 연극반 그리고 국악반 출신으로 이루어졌다.
  전남대학교 탈춤반은 1978년 4월 「민속문화 연구회」로 창립을 하였다가 그해 6월 '민주교육지표선언 시위'를 주도하며 탄압을 받고 폐쇄되었던 조직이다. 이후 1979년에 「전통극 연구회」로 개칭, 재건되었으며 이후 대학문화운동의 주요 구심체 역할을 한다.
  극단 광대가 창립되던 70년대 후반은 농촌지역에 일찌기 뿌리를 내린 농민운동이 대중적 확산을 꾀하고 있었고 70년대 초반부터 배출되었던 청년활동가들도 점차 활동토대를 굳혀가기 시작하면서 문화운동의 요구가 점증됐던 시기이다. 더우기 10·26 박정희 피살사건 이후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대중획득을 위한 문화운동의 공개적 틀이 요구되던 상황에서 극단 '광대'가 출범한 것이다.
  극단 광대 창립의 모체는 농민현장극 '함평 고구마' 공연이다. '함평 고구마'는 1978년 농민집회 시에 공연된 마당극으로 1977년 함평에서부터 시작하여 78년 50여명의 끈질긴 단식농성 끝에 승리를 쟁취한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투쟁'을 극화한 것이다. 공연은 수많은 농민들의 호응 속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함평 고구마'는 현장마당극의 한 전형으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다. 극단 광대는 그러한 현장과의 연대활동으로부터 출발할 최초의 사회문화운동 단체인 셈이다.
  극단 광대는 80년 창립하여 민속문화의 조사연구 및 기능수렴, 그리고 시민과 기층현장을 대상으로 한 연희예술을 통해 의식교육활동을 하겠다는 취지를 밝힌다. 이어 79년 겨울부터 당시 농민문제로 대두된 '돼지값 폭락사태'를 극화한 마당극 '돼지풀이' 공연을 준비한다. 이윽고 80년 3월 광주에서 성공리에 공연을 끝마친 후 4월부터 5월 3일까지 농촌현장에서 공연을 했다. 물론 농민운동권과 철저한 연대 속에 계획하고 준비하여 진행시킨 것이다.
돼지풀이는 3, 4회의 현장공연에서 본래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민중적 표출', '민중적 감수성' 등외 용어에 얽매인 지식인 집단의 공연패들이 부딪히는 알듯 모를 듯한 문제들이 뚫릴 곳은 그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 중략 - 현장공연을 경험했던 집단은 모두가 느끼고 있겠지만 공연 당시 무안·강진지역 농민들의 열띤 분위기, 공연 후의 뒤풀이 때 느꼈던 농민들의 신명내던 그 흥청거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잊을 수 없음을 막연히 감동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그렇게 집단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보아야 하겠다.
                              - 당시의 공연일기 중에서 -

  극단 광대가 초기 관념적인 지식인 의식을 떨쳐버리게 된 과정은 이 글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무안 공연이 5월 3일 이루어졌고 그 15일 후 광주항쟁이 발발하였다. 이들이 광주항쟁에 열렬히 동참하였음은 물론, 선전활동의 주체가 되었음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3. 선전(선동)활동

투쟁 기간(5·18∼21)

이 시기는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가 경찰의 차단과 공수대의 살상 행위로 이어지자 청년, 근로자 및 부녀자, 어린애들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공분(公憤)이 합세, 무장투쟁으로 발전하게 되기까지의 시기이다. 죽음의 터널에서 생존을 지키기 위해 계엄공수군과 일진일퇴의 접전을 계속, 21일 저녁 도청을 시민들이 점령하기까지 약 4일간의 기간을 말한다.
직접 몸과 몸으로 부딪치며 진행되었던 이 시기에 효과적인 싸움을 위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은 가두에 나선 대중의 조직화와 유격적인 형태의 시위 및 계엄공수군에 대응하여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무장투쟁이었다. 살상무기를 동원하여 공격하는 계엄공수군에 대해 비조직적인 가두 대중을 규합, 가능한 한 최대의 효율적인 싸움방식이 필요한 것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의 문화항쟁은 매우 급박하고 유격적인 것이었다.
  이 시기의 선전작업은 지하전단작업과 대중연설의 열정적 선동작업으로 대표된다. 가두 무장투쟁 등의 전투에의 직접 참여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상황에 비해 그러한 문화적 작업이 적극적 투쟁은 아니었지만 전체 싸움의 열기와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이었으며, 투쟁방침·투쟁방향 등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을 효과적으로 전달시킴으로써 싸움을 유지시키고 통일시키는 몫을 담당하였다.
  유인물·대자보 등의 지하전단작업은 극단광대와 「들불야학」의 노동자, 그리고 2,3명 단위의 청년학생들이 담당하였다. 그들이 맡은 바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중심지역을 벗어난 외곽에 근거지를 두면서 중심지 상황을 주변 주거지역으로 홍보하는 역할 및 싸움의 전체적 진행, 피해상황 등을 알리면서 싸움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투사회보
  [투사회보]는 16절지 양면으로 신문이 없었던 당시, 유일한 언론매체의 역할을 하였다. 내용은 주로 시민들이 알아야 할 홍보사항과 지켜야 할 행동강령 대중집회 홍보, 주장 등으로 궐기대회장에서의 교육용 자료 역할을 하게 되고, 회를 거듭하면서 간략한 상황 분석과 [민주시], [개사곡]까지 싣게 된다. 이 회보의 제작에 투입된 인원은 20여명이며, 하룻밤에 2만 여장을 제작하였다. 비록 규모는 작아도 그것은 항쟁기간 전체를 통해 시민의 활동 지침으로 중대한 기여를 하기에 충분했다.
  5월 26일 제9호를 제작한 후 27일 배포할 회보를 제작하던 제작팀들은 그날 새벽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한다는 비상 방송에 전원이 카빈소총을 지급받고 제작본부 건물인 YWCA(현재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당시 건물은 없어졌음)의 각방에 배치되었다. 계엄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부는 죽고 일부는 체포되었다. 이 가운데 인쇄담당자인 박용준"은 전사하였다.
  또한 대자보와 현수막·벽보 등이 궐기대회 주변 장소나 건물벽에 시민들의 주장, 요구 그리고 살상당한 시민들의 사진과 함께 설치되어 여론수렴의 창구역할을 하였다. 당시 대중의 심금을 올린 대표적인 유인뭍을 하나 소개해 본다.

민주수호 전남도민 총궐기문

4백만 전남도민이여 총궐기하라 !
전남 애국청년들이여 총궐기하라 !
전남 애국근로자들이여 총궐기하라 !
전남 애국농민들이여 총궐기하라 !
삼천만 민주시민들이여 총궐기하라 !
하늘이여 ! 이 원통하고 피맺힌 민주시민의 분노를 아는가? 삼천만 애국 동포여 ! 이 억울한 죽음의 소리가 들리는가?
처절한 공포의 광주 ! 피빛 물든 아스팔트 위에 무참히 죽어가는 시체더미 위에 우리는 죽음으로써 함께 모였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무엇을 무서워하랴.
일어서라 ! 일어서라 ! 일어서라 ! 우리에겐 분노와 원한과 구국민주 일념뿐이다. 애국시민이여 ! 손에는 돌, 몽둥이면 몽둥이를 들고 일어서라 !
애국근로자여 ! 손에는 닥치는대로 공구를 들고 일어서라 !
애국농민이여 ! 손에는 삽과 괭이를 들고 일어서라 !
삼천만 애국동포여 ! 모두 일어나라. 그리하여 이 땅 위에 이제는 포기할 수 없는, 이제는 다시 빼앗길 수 없는, 찬란한 민족의 꽃을 피우자 !
  승리의 그날까지 전 도민은 무기를 들고 매일 정오를 기하여 전남 도청 앞 광장, 공원, 금남로, 광주신역으로 모이자.
1980. 5. 21
민주청년 민주구국 학생연맹
  18일부터 19일경까지 3∼4종의 전단이 나타났고, 20∼21일에는 10종이상(명의가 모두 다름)의 수동형 등사기로 제작된 유인물이 시내에 광범위하게 살포되었다.

해방기간(5.22∼27)

  이 시기는 도청이 시민군에 의해 장악된 후 수습위가 구성되었던 22일부터의 시민자치단계이다: 이 기간은 앞의 전투적인 투쟁기간 중에 선전활동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음에 비해 공개적이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진행되었다.
  그 주된 활동은 [투사회보]와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그리고 기타 모금활동 및 가두방송 등 지원활동이다.
  이 시기는 투쟁기간의 활동이 전투력의 조직과 방향을 재빨리 알려주는 긴급하고 유격적인 모습인데 비해 직접적인 전투가 외곽변방으로 이동하고 시내가 평온을 회복한 상황에서 광범위한 시민대중의 정서와 의식을 일치시켜내는데 그 활동 목표가 있었으므로 그 표현 양식이나 매체가 매우 다양해진다.
  이제는 시민, 청년, 학생들의 조직, 그 기반 아래서 선도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부를 형성하여 장기화할 싸움에 대비하고 궁극적 승리를 위한 전투체제의 강화를 위한 대중선전·교육·조직이라는 심화된 단계에 이른 것이다.
  선전선동활동도 전(前)단계에서 보였던 소극적 투쟁방식, 즉 지식인으로서 전투에 직접 참여치 않음으로써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대중과의 접촉을 더욱 넓혀 활동내용과 투쟁방향을 보다 선명히 드러내고 또 유지하여 항쟁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질적·양적인 심화와 증폭을 꾀하게 되었다.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18일부터 시작된 항쟁이 격화되면서 초기 선도집단이었던 대학생들로부터 항쟁 주체가 기층 민중들로 변화되었다. 특히 19일의 전투에서 대거 등장한 조직, 비조직 단위의 노동자들이 보여준 투쟁력은 놀라웠다. 이들에 의해 계엄공수군이 퇴각하면서 시민 주체의 시내일원 장악이 가능했다. 22일 이후 해방기를 맞이하여 제일 시급한 과제는 지도부의 형성이었다. 그것은 비조직적인 무장 시민군을 조직적으로 재편, 통제해야 하는 일뿐만 아니라 전체 시민의 항쟁역량을 한 곳으로 모아 장기적인 싸움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항쟁기간 중에 주체세력이 대부분 지도부에 서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계엄군의 사주를 받은 어용 수습위원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러한 「수습위원회」의 패배주의적 입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 대중에 지지기반을 지닌 투쟁 지도부의 조직이 요구되었으며 또 하나는 그동안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생존권수호투쟁' 차원을 '민중해방투쟁'이라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이 강구되어야 했다.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는 민중의 투쟁의지를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 효과적으로 수렴해 낼 유일한 통로로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계엄군이 후퇴한 5월 22일 오후 5시,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 자연스럽게 운집한 20만 시민들의 모임은 그들의 진정한 주장과 요구가 표현되었으며, 공동체적 정서가 확인된 현장이었다. 비록 짜임새 있는 형식을 갖추진 않았으나 26일까지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이 집회에서 시민들의 분노와 절규가 토로되었고 장기적 싸움을 준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양하게 실천된 선전형태

  민주시 합창
5월 24일 2차대회에서 낭독되었던 「민주화여!] 와 [계엄군과 광주시민]은 매우 힘차고 당당한 목소리의 여성이 낭독하여 운집한 시민이 열렬한 지지아래 두 번째는 합창으로 낭송되었다.

민주화여 !

민주화여, 영원한 우리 민족의 소망이여 !
피와 땀이 아니곤 거둘 수 없는 거룩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우리는 총칼에 부딪치며 여기 왔노라
우리는 끝까지 싸우노라
우리는 마침내 쟁취하리라
날아라 민중아, 민주의 벌판을
뛰어라 역사여, 희망의 내일을
언론자유 동냥말고 피땀으로 열매맺자
권력안보 동냥말고 총력안보 지지하자
유신잔당 뿌리뽑고 김일성도 격퇴하자
전두환의 사병아닌 삼천만의 국군되자
전두환이 살인마냐 광주시민 폭도냐
대통령이 앵무새냐 시킨대로 잘도 한다
표달라고 아부말고 대변하고 투쟁하라
앞장서면 지도자 뒤로 빼면 비겁자
지맘대로 대통령 지망대로 국무총리
지맘대로 국무위원 지맘대로 사령관
맹견들을 풀어놓고 민주학생 끌어가고
미친개들 풀어놓고 민주시민 물어가네
민주시민 합세하여 미친개를 쫓아내니
고첩깡패 운운하며 똥뀐 놈이 성내더라
미친 개에 지놈 한번 물려보면 요리뛰고 저리뛰며
도망갈 곳 찾느라고 다른 사랑 물린 것도 안중에 없을텐데
우리 민주시민 정신차려 용케도 막았구나
어허, 이게 웬 날벼락인고
표창받을 민주시민 폭도로 몰았구나
지가 앉은 총리대신 혼자 취해 그날부터
만끽하고 하는 말이 걸작이라
무서워서 못 내리고 상공에서 보았더니
질서는 조금 있고

폭도는 많더라
저놈들만 쓰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먹여줄께 항복하라 항복하면 살려주고
자유하면 죽일란다
민주시민들아 미친 개가 포위했다
죽 끓이고 팥죽 끓이고 명분찾고 생색내고
안속는다, 안속아 !
자유당에 속았고 유신에 속았다
그러나 이젠, 이젠 안속는다 ! 안속아 !
안속는다 ! 안속아 !
절대로 안속는다 !

  개사곡
  공동체의식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매체는 노래이다. "모두 함께 목이 터지도록 외쳐대는 노래함성은 광주의 함성이 되어 무등산 넘어 각 지역으로 전파되어 수많은 응원군이 몰려올 것 같았다"고 참여했던 시민은 이야기한다.
  그런데 문제는 각 계층이 혼재한 10만명 이상의 집회장소이므로 아는 노래가 한정되어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애국가] 외에는 같이 부를 마땅한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노래 지도가 가능한 쉬운 곡조에 합창할 수 있는 '개사곡'을 몇 곡 지었다. 매 차례 궐기대회 때마다 노래 지도와 부르기가 반복되었고 25일부터는 「투사회보」에 개사곡을 삽입하여 집회장에서 배포하였다.

  제의형식
  23일 1차집회 때 한 시민의 발의로 「화형식」이 제안되어 24일 2차집회 때 그 의식을 집행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커다란 허수아비를 중앙에 놓고 석유를 끼얹어 불을 붙였다. 화염에 휩싸인 허수아비의 모습에 운집한 시민들은 열광하였다.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평가

  첫째, 시민들의 민주의지를 결집, 통일하였다.
  각계 각층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수립하기 위한 공개발표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5월 23일 1차 대회에서는 각계의 대표가 시민들에게 드리는 글을 낭독하였다. 차례대로 시민, 노동자, 농민, 학생 그리고 24일 2차 대회에서는 주부 및 변두리 주민의 발언이 있었다.
  둘째, 시민들의 주장을 수렴 그것을 공식견해로 채택하는 역할을 하였다.
  23, 24일의 1, 2차 대회를 통해 발의된 내용들을 체계화하여 이를 광주시민의 견해로 채택, 대내외에 공표하였다.
  세째, 항쟁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체 교육장이었다.
  계엄공수군으로부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시민들에게 단순한 개인적 분노가 아닌 민중 전체의 생존과 해방의 지향점을 통일시켜 나가기 위하여 전체적인 정세와 싸움의 의미 등을 주지시켜야 했다. 즉 시민대회는 감정적 분노와 이성적 판단이 어우러지고 정서적 통합을 기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자체 대중교육의 장소로서 그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냈던 것이다.
  시민대회에서의 내용이 여러 가지로 발전하면서 26일 제4차 대회에는 [한국 정치의 문제점], [한국 경제구조의 모순], [한국의 정치보복사] 등 비교적 세부적인 내용으로까지 심화되기도 했다.
  네째, 대중이 직접 조직화되는 과정이었다.
  항쟁지도부가 강화되면서 모금·의료·홍보·취사 등으로 그 활동영역이 방위 및 치안에 머무르지 않고 확대되었다. 당시 각 동별로 질서있는 집회형태가 점진적으로 발전되었는데 이것이 시민의 기초적인 조직단위가 항성되는 초보적 형태였다. 이 조직을 기초로 계엄군 진압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서 이를 사수할 5백 여명의 시민이 시민군에 자원입대하여 시민군을 전투편제로 편성하였고, 해방기간 중에는 수 십 여명의 여성들이 조직되어 시민군 지도부의 취사를 담당하였고, 대자보·현수막·벽보를 제작할 수 십 명의 홍보인력이 동원되었다.  마침내 눈물어린 목소리로 계엄군이 진입하리란 소식이 전해졌다. 시민들은 약간 술렁거렸다. 한 고등학교 교사가 올라와 끝까지 싸우자고 열변을 토하였다. 끝까지 싸우자는 학생, 시민 5백 여명이 화정동 바리케이드지역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결코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구호였다. 밤이 오고 있었다. 돌아온 시위대 중 나이 어린 학생들은 돌려보내고 5백 명 정도가 남았다. 그 중 2백 여명 정도가 YMCA로 들어가 사격훈련을 받은 뒤 기동타격대로 편성되었다.
                            - 어느 시민의 수기 중에서

4. 맺음말

  5월 광주민중항쟁은 준비나 계획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되다가 수많은 희생자만 남긴 채 실패한 싸움으로 끝났다. 하지만 광주항쟁은 해방과 분단이래 민주주의라는 대의와 민중의 해방을 이루기 위한 연속선상의 투쟁으로 본다면 끝난 싸움이 아니다. 오히려 싸움은 5월 항쟁을 통하여 더욱 값지게 열매 맺을 것임을 믿어 마지 않을 것이다.
  민중이 운동의 주체로 자리함으로써 우리의 해방운동이 승리하리라는 확신, 그것은 조직되지 못하였던 민중들이 상황에 주체적 결단과 함께 뜨거운 생명을 내걸고 참여하여 최후를 지켜냈던 것에서 확인케 하였던 5월이었다 또한 80년대 이후의 민족자주화투쟁과 반독재민주화, 반독점민중해방투쟁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교두보로서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이들은 27일 새벽 장렬히 산화하거나 체포되었다.
  항쟁의 짧은 기간을 통해 시민들은 스스로의 비조직성을 극복해냈고 해방기간 중에는 자율적 집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지도부를 창출해냄으로써 발전된 형태를 보였다.
  이 기간 중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문화패와 시민의 연대로 이루어진 문화항쟁은 광주시민을 공동체적 정서로 이끌어갔으며, 해방의 완결이라는 의식을 지속적이고 유효하게 심어가는데 기여했다. 그것은 싸움의 주체인 민중의 의지를 더욱 고양시켰으며 의식과 정서를 통일시켜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일관되게 유지,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항쟁지도부가 올바른 지도노선을 계속 지켜나가게 하였고, 미온적인 중산층에게도 참여의지를 북돋아갔다.
  5월항쟁은 9일간의 단기간에 이루어졌던 까닭에 선전(선동) 활동도 대단히 단순하고 명쾌해야 했으며, 비조직적 대중에 의해 이루어진 활동과 조직적 선전대에 의한 활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 유격적인 성격을 가졌고 또한 계획이나 준비가 없었던 까닭에 소규모 수공업적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이 보고서는 보다 광범위한 선전활동의 구체적인 조사가 미비할 뿐 아니라 조직적 활동조차도 제한된 기억에 의존해 극히 부분적인 내용임을 밝힌다. 또한 보고서 작성자의 제한된 활동영역이 가져다 주는 한계 때문에 항쟁기 선전(선동)활동에 관한 객관적 의미나 평가는 이 보고서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앞으로 많은 부분이 보충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논의가 뒤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