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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노동자는 항쟁에 어떻게 참여했나. 이준수(월간 노동자. 1989. 5)

본문

다시 본 광주

노동자는 항쟁에 어떻게 참여했나



글 이준수(월간노동자 기자)

계엄군진주 속에서 열린 노동교육

  80년 5월 14일부터 계속된 대학생들의 시위와 18일 계엄확대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시내중심부인 도청 앞 YWCA강당에는 50여명의 노동자들이 집회를 갖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가톨릭 노동청년회(JOC)회원들로서 일요일을 이용하여 노동조합활동과 자세, 노동의 존엄성 등에 대한 강연을 듣고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같은 시간에 1천8백여명의 조합원을 가진 로켓트 건전지 노동조합은 사레지오고등학교 강당을 빌어 이창복씨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노동조합에서는 79년에 단체협약을 통해 합의본 보너스 4백% 인상조항을 백순기 노조지부장이 회사측의 경영사정을 핑계로 삼아 일방적으로 1백% 인상안에 도장을 찍어버렸다. 3만 3천원의 월급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던 노동자들은 이에 분개하여 위원장 불신임을 결의하고 이정희씨를 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새 집행부에 의해 80년 3월에 임금협상에 들어가 임금80%인상과 보너스4백%인상, 무단해 고자 복직, 노조간부폭행과 병역특례자 해고에 따른 군대징집에 대한 피해보상 등을 내걸고 투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임금인상만 40%선에서 합의되고 다른 요구조항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8시간만을 근무하면서 연장근무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산동공장에서 본촌공장으로 공장이전작업이 진행되고 공장자동화가 추진되면서 해고자가 속출하였지만 모든 조합원이 똘똘 뭉쳐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시위를 계속하고 있던 전남대·조선대생들에게 전조합원들은 자발적으로 중식으로 제공된 카스테라와 20여만원을 모아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정희 노조지부장은 이 사건에 의해 5월항쟁이 끝난 뒤에 '자금출처→김대중 내란음모'라는 죄목으로 연행되어 퇴직을 강요받기도 했었다.

당시의 노동자교육 실태

  80년 5월 이전까지 노동자교육의 양태는 전반적인 공장노동자수의 분포에서 한계지어져 있었다. 79년 당시 제조업의 경우 사업체당 근로자수의 전국평균은 69인인 데 비하여 전남지역은 29인에 불과하고 사업체 당 부가가치 생산액의 전국평균은 290인 데 비하여 전남지역은 195에 그치고 있었다. 임금실태에서 볼 때에도 당시 전국평균임금 7만4천1백21원인 데 비하여 전남지역 평균임금은 3만5천73원으로 전국평균임금의 47.2%에 불과하고 여성의 경우는 그나마 남성평균 임금의 57%에 지나지 않는 2만2천99원의 기아임금에 허덕이고 있었다. 따라서 전남지역의 노동자들은 그 존재형태 자체의 불안정성과 영세중소기업 중심으로의 취업 등으로 인해 열악한 임금수준에도 불구하고 정치의식이나 조직화의 정도가 타지역에 비해 미약했고 활발하게 돌출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의 영향으로 노동자교육과 조직실태도 매우 미약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계속 소외당한 데 대한 욕구불만은 대단하였다.
  당시 광주지역에서 노동자에 대한 교육활동은 카톨릭노동청년회 등 종교단체를 통한 모임과 들불야학, 백제야학 등 각종 야학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는 모든 영세사업장과 각급 노동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노동교육을 통하여 많은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시아자동차 해고노동자에 대한 교육과 로켓트전기, 전남제사, 삼양제사, 남해어망, 일신방직, 매일유업, 삼화잠사, 이양탄좌 등의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을 꾸준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1주에 1∼2번의 교육은 부서별, 나이별로 혹은 간부급 노동자에 대한 노조활동교육 등으로 이뤄졌다. 여기에 가입한 노동자들은 각사업장에서 소모임의 교육활동을 통해 초보적인 노동교양강좌를 확산시켜가고 있었다.
  또 하나 관심을 둬야 될 노동자교육프로그램으로서 크리스찬아카데미의 노조간부급교육이 있었다. 1주일 동안 노조활동에 대한 집중적인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노동운동가로서의 역량을 키워내고 있었으나, 탄압에 의해 79년부터는 활동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투사회보」제작팀으로 잘 알려진 들불야학은 78년 7월에 광천동 천주교회에서 50여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1기 입학식을 가졌다. 항쟁기간동안 투사회보를 열심히 제작했던 나명관씨는 공단 벽에 붙어있는 벽보를 보고 공부하고 싶은 욕심으로 직장동료와 함께 열성껏 참여하게 되었다. 6개월 동안은 성당에 있는 교실에서 공부하고 그 이후 1년 동안은 윤상원씨 등의 강사들이 마련한 조그만 아파트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즉 18개월 동안 강사들과 함께 부대끼며 초보적이나마 노동자로서의 인식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검정고시 야학으로 출발한 당시의 야학은 노동자들의 드높은 향학열과 함께 점점 사회인식으로까지 발전했다. 5·18이 있기까지 4기가 모집되고 총 1백여명에 이르는 야학학생을 확보하게 되었다.
  당시의 열악한 노동자 실태 때문에 이러한 몇 종류의 노동자교육모임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항쟁과정에서는 조직적이진 못했지만 상당히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여하였다.

항쟁의 변화과정과 참여계층

  광주항쟁의 변화과정을 기층민중들의 참여정도와 주도계층의 변화에 따라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주도계층변화와 국면의 변화는 명확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각 시기마다 각 계층의 역학관계는 질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자연발생적인 대중들의 시위가 전면적인 민중봉기로 발전하면서 계엄군의 퇴각이 이뤄지는 5월 18일부터 21일 오후까지가 제1시기라고 한다면 민중의 자치에 의해 해방광주를 이뤘던 22일부터 26일까지를 2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해방공동체로서의 2기를 지내면서 결국 투쟁지도부가 조직되고 결사항전을 이뤘던 26일부터 27일 새벽까지를 3기라고 할 수 있다.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주요정치인들과 사회운동가, 학생운동의 지도부가 예비 검속에 걸려들었다. 14일부터 계속된 대학생들의 가두시위는 급기야 16일,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참가한 가운데 횃불시위로 이어졌고 17일 저녁에는 학생운동 지도분가 이미 각자 피신해 있던 상태였다. 며칠간의 대단위 학생시위는 모든 시민에게 깊은 공감대와 동참의식을 촉발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시내분위기는 결국 18일 계엄군의 무차별한 시위대 탄압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면서 도청 앞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때 YWCA 강당에서 열리고 있는 노동자교육 참가자들이 계엄군의 폭력적 진압을 목격하고 시위대에 동참하게 된다. 사레지오고등학교강당에 모였던 로켓트전기노동자들도 부분적으로 시위대에 참여하게 된다.
  18, 19양일간의 무차별한 시위대연행을 목격한 택시기사들은 당시만 해도 시외곽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으나 20일에는 5시쯤 무등 경기장에 집결하여 유동 쪽을 거쳐 도청 쪽으로 향했다. 버스와 트럭을 앞세운 200여대의 차량행렬은 광주시민 20만의 시민참여를 촉발시켰다.
  21일에는 도청 앞에서 공식발포로 수많은 시민이 사살되고 시위대는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전날 차량시위의  주동이었던 택시는 각 업주들이 거의 회수해가고 시내에는 움직일 수 있는 차가 별로 없었다. 시위대는 아시아 자동차로 밀고들어가 버스, 군용트럭, 짚차, 장갑차 등을 몰고 나왔다. 인근의 화순, 목포, 해남, 영암 등지로 나아가 광주의 실상을 폭로하고 각 파출소에 있는 무기를 획득하였다. 화순지역에서는 500여 광부들이 시위대에게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주었다. 무기가 획득되자 시내 곳곳에서 자발적인 전투지도부가 형성되어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남대 의대 옥상에 LMG를 설치하여 도청을 포격함으로써 마침내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접수하였다.
  해방광주를 획득하자 민중들의 능동성과 자발성이 발휘되었다. 윤상원씨를 중심으로 한 들불야학팀과 전남대 '대학의 소리' 및 극단 '광대'팀은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 배포하고 시청 앞 민중집회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22일 '5·18사태 수습위원회'와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계엄당국과의 협상을 맡는 한편 총기회수, 차량통제, 질서회복 등 투쟁을 조직화해내지 못하고 사태 수습에만 급급했다. 투쟁을 불사했던 기층민중과 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고 계속 계엄당국에 굴복하는 자세를 취하고 학생수습위의 투항파와 연계하여 절반가량의 총기를 회수하고 반납하게 된다.
  이에 투쟁적이고 지속적인 항전을 주장하던 기층민중과 투쟁파 학생들은 [민중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통한 대중의 여론에 의해 지도부를 갈아치운다.
  25일밤 드디어 학생수습위의 투쟁파와 청년운동권 그리고 기층민중들로 구성되는 실질적인 항쟁지도부가 구성된다. 70년대 말부터 꾸준히 노동자교육과 야학운동을 주도해왔던 윤상원, 이양현, 김영철씨 등과 학생운동 지도부가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기동타격대도 1개조에 5-6명씩 8개조로 편성을 마치고 25일에 도청 2층에서 결단식을 가졌다. 이는 학동, 학운동, 사동 등 외곽 8-9군데의 예비군 조직에 바탕을 둔 동단위 자위대나 일반 자위대, 그동안 체계화되어 있지 못했던 시민군에 대한 조직화의 모습이었다. 야학의 강학과 극단 광대패들은 도청 앞의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대중의 열기를 불러일으키고 투쟁적 분위기를 고양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항쟁지도부의 결성, 기동타격대 조직, 투사회보→민주시민회보, 대자보, 대중집회를 통한 선전선동활동에도 불구하고 27일 새벽에 계엄군의 무차별한 진압에 의해 10일간의 항쟁은 무참히 좌절되었다.
  10일간 광주항쟁의 변화과정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기층민중들의 폭발적인 투쟁에의 참여와 점진적인 지도체계, 투쟁조직으로의 유입이었다.

기층민중들의 주도적인 항쟁참여

  5·18 이전인 14일에 들불야학팀에서는 이제윤상원씨를 중심으로 공단지역에 유인물을 제작 살포하였다. 당시 민주화일정의 불투명함 속에서 신군부의 정권장악기도가 명백해질 즈음 학생들의 시위뿐만 아니라 기층민중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항쟁의 진행과정을 각 체계별, 계층별로 분석해보면 항쟁의 성격은 자명해진다.
  계엄군의 살벌한 진압이 시작될 때 맨 먼저 시위대에 대한 지원을 해준 것이 황금동과 구시청 뒷골목의 소위 접대부아가씨들이었다. 이들은 19일부터 거리에다 큰솥을 걸어 놓고 밥을 해주었고 인근 주민들도 여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동타격대 부대장 역할을 담당했던 이재호씨는 구시청 앞 광산동에서 건물내장공사용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땔감을 대주고 시위대에게 피켓을 만들어 주는 등 열성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는 박찬희 타이틀전을 보느라고 다방에 있다가, 계엄군이 다방에 난입하여 앉아 있던 모든 젊은이들을 무참하게 짓뭉개는 모습을 보고 분개하여 시위대에 참여하게 되고 마침내 기동타격대를 조직하는 데에 주동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초기의 일반시민, 특히 기층민중들의 시위참여는 대체로 무자비한 계엄군의 폭력성에 대한 분개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점점 항쟁이 계속되면서 자발적이고 자연발생적으로 투쟁의 모습이 점점 조직화되어 간다. 이것을 뒷받침해 준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기층여성들의 헌신성에 있다. 양동시장 아줌마들은 필두로 모든 동별로 모금과 식사지원이 이뤄졌다. 대체로 15일까지는 장사가 되었지만 그뒤로는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과, 음료수, 빵 등을 시위대에게 선뜻 내주면서 광주항쟁의 생명력을 뒷받침해 준 것이다.
각 동별로 김밥, 주먹밥을 해내와서 시위대들은 더욱 철저히 항쟁에 가담할 수 있었다.
  피가 필요한 것 같으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판단에 의해서 차를 타고 다니면서 헌혈을 요청했고 모든 민중들이 헌혈에 나섰다. 특히 황금등, 구시청 뒤의 아가씨들이 적극적으로 헌혈을 하였다. 검은 리본달기, 홍보활동, 시위대에게 물을 제공해주는 것 등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이뤄졌다.
  택시기사들의 차량시위 또한 대중적 분노를 배경으로 한 자발적인 시위였다. 몇몇이 버스터미널 등 차량이 많이 오가는 중심지에서 무등경기장으로 차량을 집결시켜 줄 것을 홍보하고 일부는 무등경기장에서 차량을 정리했다고 5·18 민주기사동지회 신봉섭씨는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애초에는 대형트럭 몇 대에 시동을 건 채 바리케이드를 뚫고 나가려 했으나 그럴 만한 트럭이 참여되지 않아서 버스와 택시, 소형 트럭들만이 참여하게 됐다는 것이다.
  운행이 가능한 변두리지역에서 영업을 하다가 계엄군의 잔혹성을 보게 된 운전기사들은 하나같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결정적으로 계엄군을 퇴치시켰던 차량시위를 해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들 속에서 당시 사업주들은 차량을 모두 회수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시작했고 '있는 자'들은 식구들을 태우고 자가용으로 광주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아시아 자동차공장에 돌입하여 차량을 빼올 때도 아시아노동자들이 상당부분 끼어 있어서 쉽게 차량을 입수할 수 있었다. 또한 모든 공장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항쟁에 동참했던 것이다. 특히 노동자모임을 갖고 있던 각종 종교단체의 여성노동자들은 취사활동이나 홍보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
  남해어망 여성노동자들은 항쟁기간 동안 도청 앞으로 출근함으로써 시위에 가담했고 밤이 되면 함께 기숙사와 집으로 퇴근하는 등 초보적 조직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죽음을 무릅쓴 기층민중의 투쟁

  광주항쟁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광범위하게 자연발생적으로 가담했던 사람들의 참여 정도뿐만 아니라 항쟁의 중요부분에 어떻게 참여했는가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무장봉기의 지속성과 조직성을 갖추려면 이념적틀, 사상적 무기가 가장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의 결정은 광주항쟁의 가장 근본적인 한계였다. 이러한 한계를 접어두고 각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계층을 분석해보면 우선 항쟁지도부와 투쟁조직으로서의 기동타격대, 선전선동조직으로서의 투사회보, 대자보, 대중집회(시민궐기대회)관장 팀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항쟁지도부는 시민궐기대회의 대중여론에 의해서 투쟁적인 기층민중과 진보적인 학생운동 출신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윤상원, 이양현, 김상원 등은 들불야학과 기타 노동자 교육을 꾸준히 추진해왔던 사람들이었다.
  기동타격대는 치안유지대원의 필요성과 각 동별 자위대에 대한 통일적 지침제시의 필요성 때문에 도청 2층에 본부를 설치하고 시민궐기대회의 홍보를 통해 모집되었다. 기동성과 조직성을 기본으로 삼았고 대원선별은 투쟁력과 민주화열기에 기준을 두었다. 이름도 나이도 전력도 묻지 않고 오직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수 있겠는가의 결의만을 확인하고 고유번호를 부여하기 위해서 별명을 확인하였다. 곰, 호랑이, 똘똘이 등 즉석에서 지어주기도 했고 나이가 하도 어려 보여서 가입만류를 했으나 끝내는 함께 했던 16세의 실업고 2년생도 있었다. 이들은 거의 모두 20세 미만의 꽃다운 청소년들이었고 고등학생과 농민 4∼5명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수공업적 영세기업체의 노동자들이었다.
  타격대는 5∼6명을 1개조로 하여 각 조마다 조장 1명, 대원 4∼5명, 군용 짚차 1대, 무전기 1대, 개인무기로 칼빈 1정, 실탄 1클립을 지급하였다. 처음에는 8개조로 구성되었으나 15∼16개조까지 늘어났다.
  대자보작업 또한 대중적 언론매체의 하나로서 '광대'패 중에서 역할분담을 하였다. 20일, 언론이 부재한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나서야 됨을 인식하교 궐기대회, 유인물, 방송담당 등으로 나눠 작업을 시작하였고 당시 '광대'패 회장 김정희씨는 말한다.
  「투사회보」는 9호까지 이어지다가 「민주시민회보」로 제호를 바꿔 제작하였다. 물론 5·18 이전과 5·18이후에도 여러 종류의 유인물이 발행되었으나 가장 조직적으로 항쟁지도부와 연결되어 발행된 것은 「투사회보」이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직접 무장투쟁에 참가하고자 하는 야학학생들에게 「투사회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윤상원씨였다. 주로 시 외곽에 배포하여 항쟁과정을 부단히 홍보하였다. 어떤 대원은 등사기를 팽개치고 투쟁에 참여했다가 「투사회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시 합류하기도 하였다.

광주항쟁의 의의와 한계

  광주항쟁이 기층민중의 저력을 바탕으로 하여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 농촌지역과 인근 도시의 노동자까지 적극적으로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78년 현재 전남지역이 GNP기준으로 농업38%, 공업19%의 비중을 나타내 전국평균인 농업18%, 공업39%와 비교할 때 역전된 모습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공업생산의 기반이 취약하고 1차 가공이나 단순조립생산의 영세중소기업이 대중을 이뤄 농촌지역으로부터 이탈되어오는 노동력이 임금노동자로 취업할 기회가 제한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광주지역의 대규모 공장노동자(아시아자동차, 일신방직, 전일방직 등)들이 낮은 임금 속에서도 제대로 노동운동을 해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농민들이나 인근 도시의 적극적인 관심과 무기확보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보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다.
  전반적으로 열악한 사회환경 속에서 노동자의식은 무척 낮은 편이었다. '민주수호범국민궐기대회'에서 낭독된 글 중에서 유일하게 노동문제를 제기한 구호는 근로자 대표명의로 된 것 중에서 '노동삼권 보장하라' '어용노조 물러가라'인데 다른 모든 자료에서는 이 문제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기층민중이 광범위하게 투쟁적으로 참여했지만 계급적 의식으로 무장된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 대한 인식도 5월 26일에 '광주시민일동' 명의로 나온 유인물에서 보면 "‥‥각 외신들은 광주시민의거를 사실 그대로 보도하고‥‥ 미 제7 함대 소속 항공모함 2척이 부산에 정박하여 전두환 일파의 더 이상의 무모한 만행을 견제하고‥‥‥"로 나타나고 있어서 항쟁과정 속에서는 미국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항쟁기간 동안 나온 구호는 주로 군부의 책동에 대한 반대투쟁으로 한정되었고 투쟁의 촉발도 폭력적 진압에 대한 분개였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항쟁의 성격은 시민민주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그러나 무장봉기의 주력군은 바로 기층민중이었다. 이러한 한계와 잠재력은 결국 80년 당시 광주지역상황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광주항쟁의 민중봉기적 혁명성을 부정하기에는 근거가 미약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항쟁의 전과정에서 기층민중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주도계충이었다. 이제 올바른 관점에서 기층민중의 저력을 재해석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과제가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