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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 고정희(월간중앙, 1988. 5)

본문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

- 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 -

고정희 (시인)

광주 민주여성운동 세력의 성격

5·18 광주민중항쟁의 구체적인 살림을 도맡았으며, 개인 행동이 아닌 완전한 「민주공동체」의 형성, 혹은 10일간의 「광주해방구」 실현에 집단적 代母역할을 용감하게 수행해 낸 광주 민주여성운동 세력은 5월항쟁 이전까지 남성운동권과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일제치하에서부터 항일 독립투쟁에 앞장섰던 수피아여고 출신 등의 민주인사들이 아직 생존해 있고, 광주학생운동의 본거지로서 민족운동에 대한 뚜렷한 자각과 자부심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으며 광주YWCA를 기점으로 한 NCC인권운동과 엠네스티 운동, 기독교 사회운동, 가톨릭 농민운동 등에 여성들은 산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민주화 투쟁에 대한 전국적인 소강상태에 비해 10·26이후 광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다른 지역에서보다 더욱 고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내로서, 가족으로서, 동지로서 여성들의 뒷받침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항쟁 배경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학농민전쟁에서 의병으로, 또한 광주학생반제투쟁 등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의 전통과 맥락이 혈연적으로 가계적으로 실존하고 있었다. 둘째, 4·19이후 민주화 통일운동의 급진적 흐름이 잠적해버린 뒤에 유신독재의 전 기간을 통해 선배에서 후배로 맥락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한편 학생운동권은 민청학련사건과 민주교육지표 사건을 계기로 재삼 다져지고 확충되면서 자연스럽게 현장운동에로 확산되고 있었다. 세째, 광주는 농촌으로 둘러싸인 소비도시로서 외곽에 광범위한 기층 농민들의 생산지와 연결되어 농촌현장의 농민운동 세력과의 연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광주에 사는 모든 학생·시민대중은 거의 모두가 농촌공동체적 경험에 뿌리 박은 농민의 아들·딸이었다. 넷째, 유신독재의 전 기간을 통하여 광주는 지역운동 역량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왔으며 이미 1978년에 이르러 각계의 역량 분담이 능률적으로 수행되고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EYC, 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가톨릭정의평화위 원회, 가톨릭청년회, 기독청년회, 광주 YMCA, 광주YWCA 등의 종교단체와 한국 앰네스티 광주지부, 민주청년협 의회, 현대문화연구소, 녹두서점 등등의 재야 청년·사회단체들이 겉으로는 분립된 채 내부적으로는 한 동네의 사랑방과 같이 연결된 논의구조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이 모든 조직 속에 여성들도 조직의 일원으로 동참하여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었다. 즉 1978년 12월에 독립된 민주 여성단체가 새로 발족되었다. 주로 운동권 남자부인들이 주축이 되어 발족한 송백회가 그것이다. 송백회는 민주화 세력권의 여성들과 새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진 여성들을 섭렵하고 1979년 1년동안 운동단체로서의 조직을 확장하는 한편 1차적으로 민주운동권 인사들의 옥바라지 사업을 표면에 내걸면서 매월 1회 정기모임을 통해 운동역량의 제고를 위한 사회과학 분야와 사회운동, 근대사 및 경제·정치·역사 구조에 대한 소그룹 스터디를 주도해 나갔다. 여기에는 구속자 가족, 교사, 운동가, 근로자 등 다양한 성분의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방향은 「여성 민중해방」이라는 크고 먼 길의 목표가 맥을 잇고 있었다. 그러면서 송백회는 10·26을 맞이하고 3金시대를 거쳐 5월항쟁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여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전남대 학생운동은 민청학련 세대와 교육지표 사건세대로 이어지면서 대략 네 갈래로 나타났다. 학생을 동원하여 학내 투쟁에서 운동의 기점을 삼으려는 쪽과 야학이나 기독교의 사회민중운동단체를 통하여 접합된 노동자 농민의 생산현장 투쟁에 투신하는 쪽, 완전히 지하화한 이념 소조직으로 산발적이고 개별적인 싸움을 벌이는 쪽, 그리고 교육지표 사건의 핵심이었던 문화운동 소조의 선전적인 문화투쟁을 자기 방침으로 정한 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여학생들이 조직을 주도하지는 못하였고 조직의 후비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이다.



폭풍전야, 횃불 대행진과 여성



1980년 5월 14일 오후 1시를 기점으로 광주지방 민주화 대행진의 열기는 불을 뿜기 시작했다. 전남대 정문에서 1만여 남녀 학생이 운집한 가운데 시도된 가두진출은 기동경찰대의 완강한 저지선을 뚫고, 계속되는 최루탄 발사와 곤봉세례에도 불구하고 도청 앞 광장까지 진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들 남녀 학생들은 도청 분수대를 중심으로 광장을 가득 메운 채 민주화 성회 의식을 진행했다. 이 민주화 성회를 위하여 여학생들은 여러가지 유인물과 성명서를 만드는 작업에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거리거리마다 몰려드는 수 천 여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각종 성명서를 낭독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시민들은 성명서가 낭독될 때마다 아낌없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다음날인 5월15일에도 남녀 학생들은 경찰의 별다른 제지없이 도청 앞까지 진출하여 분수대를 중심으로 연좌하여 두 번째 민주화 성회를 열고 [비상계엄해제]를 촉구하며 전남대의 [시국성토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광주교대·조선대민주투쟁위원회의 [선언문], 전남대의 [대학의 소리], 전남대·조선대 학보사의 [결의문], 광주교대의 「시민에게 드리는 글」등이 남녀비례로 낭독되었다.
이와 같은 여러 대학의 연합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그동안 조직되었던 학생운동 역량의 표출이었으며 학생들의 궐기대회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마치 민주화 고지를 눈앞에 두고 행군하는 젊음의 축제 같았다. 여기에는 사실상 남학생도 여학생도 구별이 없었고 젊은이도 어른도 상하가 없었으며 도청 앞 분수대는 이제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제도언론의 허위를 뚫고 솟구쳐 오르는 진실을 외치는 대중 여론장이자 민주화운동의 분출구가 되고 있었다. 또한 대회가 끝난 뒤 50여명의 교수단과 함께 벌인 금남로에서의 귀가행진은 4· 19 교수단 데모 이후 처음있는 감격적인 모습이었다.


이미 서울을 비롯한 각 대학의 운동세력들은 일단 시위를 중단하고 정국을 지켜보겠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전남의 학생운동연합지도부는 이튿날인 16일의 민주화대행진을「횃불시위」로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 박정희 군사쿠데타에서 유신독재로 이어지는 저 19년간의 암흑을 민주화의 대중적 횃불로 밝히겠다는 의지가 담긴 단안이었다.
그리하여 전남대·조선대·광주교육대 ·조선대공전·동신실업전문대·송원전문대·성인경상전문대·기독병원간호전문대·서강전문대 등 광주시내 9개 남녀 대학생 3만 여명은 16일 오후 3시부터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하여 시국성토대회를 일사분란하게 진행하였다.
스크럼을 짠 남녀 학생들은 오후 6시30분부터 분수대를 돌며 가두행진에 들어갔다. 시내를 돌아온 시위대는 다시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저녁 8시부터 2개조로 나뉘어 구호를 외치며「야간 횃불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4백 여개의 횃불이 점화되자 어둠에 싸였던 도시는 전체가 민주의 함성으로 불타는 듯 황홀했으며 바라보는 시민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횃불에 반사하는 각종 플래카드와 피켓들이 오색찬연한 빛으로 빛나면서 행진은 절정을 이루었다.
전남대를 선두로 한 1개조는 광주체신청 -산장입구-산수동오거리-동명 파출소-노동청을 거쳐 출발지인 도청 앞으로 다시 돌아왔고 조선대를 선두로 한 1개조는 금남로를 거쳐 출발지로 돌아와 합세한 뒤 유신체제와 5·16 군사쿠데타를 응징하는「5·16화형식」을 가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감동을 받은 시민들도 행렬을 따라 양쪽 보도를 걸으면서 서서히 학생들과 연대감을 맺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내 딸 내 아들을 넘어서서 모두가 한 동지라는 유대감이 싹트고 있었다. 밤 10시 시위대는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일 것을 결정하고 자진 해산했다.



탄압의 序曲



그러나 다음날인 5월17일 사태는 급진전하여 탄압의 서곡이 예상되고 있었다. 이날 호남고속도로에서는 공수부대 병력을 싣고 서울에서 광주지방으로 숨가쁘게 이동하는 군용차량이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목격되었고 17일 오후 광주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는 공수부대 1천 여명이 작전개시 준비를 마치고 상부의 명령이 떨어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이날 오후 전남대 총학생회 사무실에는 서울로부터 한 여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실린 전화가 걸려 왔다. 서울의 각 대학 학생회장단들이 모두 계엄당국에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이었다. 전남대 회장단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일단 무등산장으로 피신했다가 밤 9시쯤 대지호텔로 옮겨 사태에 대한 대처를 모색했다.
그리고 밤 11시 거의 같은 시각에 시내 곳곳에서 민주화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청년 및 재야인사들이 체포, 검거되었다. 계엄군들은 심야에 군화발로 안방을 덮쳐 권총을 들이대고 울부짖는 가족들을 떼어 팽개치며 개 끌듯 끌고 갔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었다. 남편이 끌려가고 동료가 끌려가고 아들이 끌려 간 민주인사 가정의 여성들은 이때부터 서서히 투쟁의 기지개를 켤 수밖에 없었다.
5월17일 밤 11시30분쯤이었다. 녹두서점의 실제적인 주인이요 송백회 총무를 맡고 있던 정현애씨(당시 28세) 집 안방에서는 남편 김상윤씨가 농민회회원과 함께 시국사태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밤 9시부터 이미 녹두서점에 이상한 전화가 쇄도하고 있었다. 그 전화 속에는 서울 대학생 회장단들이 전부 연행됐다는 전갈이 끼여 있었다. 사태를 알기 의해 여기저기 다이얼을 돌렸으나 연결이 안되었고 유일하게 연결이 된 기독교방송은 주위에 누가 지켜서 있는 듯 일체 대답을 안하고 [네, 네]만 되풀이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현애는 즉각 대지호텔에 이동해 있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 등에게 장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를 급하게 걸고 그로부터 20분쯤 뒤인 11시40분에 서점 셔터를 내리는데 누가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권총을 착용한 계엄군이었다. 그들은 남편에게 잠시 물어볼 일이 있으니 동행하자며 끌고 갔다. 김상윤과 결혼한지 1년 반 만이었다. 실지로 위험상황이 목전에 닥쳤다는 절박감이 목젖을 타고 올랐다. 직감적으로 [이들이 학생과 시민들의 복받치는 민주화 열기를 죽이기 위해 또 사건을 조작했구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편은 연행되면서 내복만 하나 준비해 달라면서 조작될 경우가 많으니까 불필요한 서류를 모두 없애라는 귀띔을 남기고 자정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녹두서점의 주위는 내다보는 사람하나 없이 깊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남편의 체포소식을 알리고 그날 저녁 체포된 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했다. 민청학련 선배그룹 11명(그 속에 조선대 약대 4년 유소영이 끼여 있었다)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접수했다. 그리고 아직 체포위험이 있는 운동권 잔여세력에 대해 피신하라는 연락을 빠짐없이 취했다. 그리고 새벽녘까지 집안에 보관되어 있던 유인물, 선언문, 성명서 등을 정리하여 깊숙이 감췄다.



녹두서점의 여인들, 그리고 비극의 시작



5월18일의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현애는 무섭고 떨려서 새벽에 한전에 근무하는 여동생에게 전화해서 집으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아침이 되어 학생들이 상황을 알기 위해 녹두서점으로 몰려왔다. 문밖에 몰래 잠복해 있던 계엄군들이 즉각 이들을 연행해 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송백회 회원들이 녹두서점으로 왔다. 운동권 주도세력이 다 잡혀갔거나 피신해 있는 이 마당에서는 우선 송백회 회원들이 나서 연행된 사람들의 거처를 확인하고 대책을 강구하자는 논의가 오고 갔다.
실제로 녹두서점은 현대문화연구소와 함께 70년대 후반기를 거치면서 청년운동권의 논의 구조가 모아지는 장소였고 대부분의 광주 민주여성 세력들이 대거 집결해 있는 장소였다. 특히 녹두서점은 초창기 학생운동가들의 모임인 전남 구속청년협의회의 모임터였으며 각종의 독서그룹을 통하여 학생운동 인자들을 배출시켰고 다른 지역의 다양한 정보통로를 교통정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정현애는 광주민주청년 운동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문지기였다.
또한 현대문화연구소는 사회운동권의 결집을 모색하면서 비교회운동과 현장운동에 대한 접근을 꾀하였고 산하 부서 안에 양서조합, 민주청년협의회, 여성들의 송백회, 그리고 근로여성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들불야학]과 문화패「광대](당시 대표 김정희)를 두고 있었다.
이 두 통로를 통하여 여성들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청년운동권의 학내·학외 운동의 여러 길을 열면서 5월에 이르러 다양한 물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18일 낮 12시쯤 아직 구속되지 않은 운동권 사람들의 부인들이 대거 서점으로 몰려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을 때 전남대 학생 1명이 와 계엄군에게 저지당할 경우 1선, 2선, 3선까지의 전략을 귀띔하고 떠났다. 그때 이미 주요관공서와 거리에는 경찰, 전투경찰, 군인, 공수부대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어 장악하고 있다는 연락이 들어왔고 전남대 정문에서 계엄군과 한 차례 공방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아무도 모르게 연행자들을 죽여 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송백회 회원들은 곧 서광주 경찰서, 보안부대, 상무대 등을 전전하며 남편들의 신원을 확인하려 애썼지만 오리무중이었다.
그리고 계엄군과 1차 공방전에 실패한 학생들은 대오를 정비하여 신역을 거쳐 공용터미널을 돌아 가톨릭센터에 이르는 3km이상의 거리를 별다른 저지없이 단숨에 달려왔다. 오전 11시쯤부터 시작한 농성은 10여 분도 채 못되어 최루탄 세례를 받으면서 농성자들은 살상용 곤봉으로 마구잡이 구타를 당하는가 하면 개처럼 끌려 가고 쫓겨갔다.
그러나 다시 충장로쪽 시위대와 동구쪽 시위대가 길에서 마주치면서 7백∼8백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시외 버스 공용터미널에 들어가 전남의 각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며 알렸다. 공용터미널 안에 최루탄이 쏟아져 들어 왔고 남녀 학생 시위대는 필사적으로 대인시장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오후 3시에 학생들은 학생회관 앞에서 재집결하여 행동을 개시, 광주천을 거쳐 구시청-충장로입구-도교육위원회를 지날 때는 2천 여명으로 불어났고 다시 도청을 향하여 진군하다가 기다리고 있었던 공수대원들과 맞닥뜨렸다.



피의 강, 눈물의 바다



계엄군들은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는 서너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차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밟았으며 얼굴을 위로 들게 해놓고는 안면을 군화발로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곤죽을 만들었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비명을 내지르고 아수라장이 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남녀 시민들은 몸서리를 치며 발을 굴렀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감돌았고 골목마다 비명과 흐느낌이 요란했다.
어떤 시위학생은 북동우체국 옆 골목의 마지막 집으로 뛰어들어 장농 속에 숨었다. 뒤쫓아온 계엄군은 혼자 집을 보는 할머니에게 방금 들어온 학생이 어디 있느냐고 대질렀다. 할머니가 전혀 모른다고 하자 『이 XX년이 거짓말을 해? 맛 좀 봐야겠구만』하면서 할머니를 곤봉으로 내리쳐 실신시키고 군화를 신은 채 안방을 뒤 져 역시 진압봉으로 학생의 안면과 머리를 짓이겨 끌고 갔다.
공주일고 부근에서는 길가던 여학생을 아무 이유없이 붙잡아 머리채를 잡아끌며 구두발로 올려차고 상의와 브래지어를 찢어버리고는 여러 시민들이 보는데서 『이XX년이 데모를 해? 어디 죽어봐라』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할 때까지 주먹과 발길질로 난타했다.
공용터미널 부근에서는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모두 정차시켜 놓고 차안을 검문하면서 남녀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불문곡직하고 끌어내려 난타했고 약간 반항의 기색을 보이는 안내양 역시『네 년은 뭐냐]하며 진압봉으로 후려갈겨 차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했다.
이러한 만행이 저질러진 반시간 뒤에 공수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가자 여태껏 숨을 죽이며 참극을 지켜 본 40, 50대 주민들과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기가 막혀 길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시작했다. 이미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로 변했다. 오후 7시쯤에는 계림동 광주고등학교부근에서 수 백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또다시 공수부대와 충돌했

다.
바로 이날 전남대 정문 앞 사레지오 고등학교 안에 있는 수도원에서는 JOC가 주관하는 노동교육이 호남전기, 삼양제사 등 주로 여성근로자 7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었고 광주YWCA에서는 삼양제사, 일신방직, 전남제사, 전남방직 등 90여명의 여성근로자에게 노동교육이 실시되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이들은 시위대에 가담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날 오후부터 전남대 「대학의 소리」와 문화선전대 [광대]팀에 의해 만들어진 유인물이 오전 중에 일어났던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 그리고 사태에 대한 진상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아 배포되기 시작했다. 유인물을 배포하고 기사를 작성하고 등사하는 일에 여성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마이크를 쥔 격전장의 여성들



가공할 만한 하룻밤을 지샌 광주 시가지는 5월19일 죽음보다 무서운 긴장감인 감돌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되자마자 4천명에 달하는 군중이 금남로에 모여 들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이 군중 틈에는 이미 학생들은 별로 없었고 주부와 여자들, 소상인들, 가게 종업원들, 주변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경찰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지나서 군용트럭 30여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금남로 사거리에 진출, 진압봉과 총 개머리판과 대검으로 때리고 찌르는 처참한 만행극이 재현되었다.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곤봉으로 난타질하고 군화발로 짓이겼으며 조금이라도 항의하면 가차없이 허벅지나 옆구리에 대검을 찔러 자신들의 군복마저 벌겋게 물들였다.
특히 여성들이 몇명 붙들려 오면 여럿이서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북북 찢어 발기고 아랫배나 유방을 구두발로 차고 짓뭉개고 또는 머리채를 휘어잡아 머리를 담벽에 다 쿵쿵 소리가 나도록 짓찧었다. 손에 피가 묻으면 피해자의 몸에다 쓱 문질러 닦으며 웃었다. 그것은 이 지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지옥 풍경이었다.
이렇게 19일 오전이 지나갔다. 시위 중심세력이 학생에서 남녀 시민으로 옮겨가는 가운데, 공수특전단의 만행을 똑똑히 보고 겪었던 시민들은 이제 공포는 사라졌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저 살인마를 광주에서 몰아내고 내 자식 내 딸을 지켜야한다는 치열한 연대감과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리하여 오후 1시부터 오전보다 한층 조직적이고 과감해진 시위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2차 격전에 들어갔고 청년들이 전투의 전위와 후위에 서고 아주머니와 수많은 여성들이 중간쯤과 후미에 끼여 보도블록을 깨는 일과 나르는 작업으로 역할이 분담되었다.
가톨릭센터를 점거했던 학생들 수십 명이 불시에 밀어닥친 공수부대에 의해 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공원 오르막길에서는 사태를 보러 나온 주부들이 무차별 구타당했으며 양동시장 입구 부근에서는 노점상을 하던 아주머니들이 집단으로 휘두르는 곤봉아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오후 4시쯤 시내 남녀 고등학생들(중앙여고·전남고·대동고 등)이 수업을 거부하고 20∼30명씩 짝을 지어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광주항쟁 동안 눈부신 활동을 편 한 여성이 공용터미널 위쪽사거리에서 마이크를 쥐고 외치고 있었다. 가두방송원 전옥주(당시 32세)였다.
『광주시민 여러분 ! 우리의 아들 딸들이 죽어가고 있읍니다. 아무 죄없이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이 죽어 가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읍니다. 우리 모두 나서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지킵시다]
전옥주의 호소력있고 낭랑한 목소리는 수많은 시민들의 가슴을 움직였고 이 방송에 따라 수 천명의 군중이 시시각각으로 불어나기 시작하여 노도처럼 기세를 높였다.



싸우는 여성들의 아름다움



전옥주는 평범한 미혼여성이었다. 그는 5월19일 오전에 무궁화보급운동으로 서울에 갔다가 광주에 도착하여 이 참상을 목격하고 분노가 치민 나머지 순간적으로 가두방송을 결심했다. 즉석(복개상가)에서 가두방송을 위 한 앰프준비 모금운동을 벌였더니 45만원이 금방 걷혔다. 그러나 이 돈으로 마련한 앰프와 마이크는 10분도 안되어 최루탄에 맞아 박살이 났다.
이때 전옥주는 인근 동사무소로 들어갔다. 7만원을 내놓으면서 마이크를 빌겠다고 했더니 동사무소 직원은 단호히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학생을 시켜 7만원을 주면서 마이크를 강제로 떼어 오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학생 이 앰프를 들고 전옥주는 마이크를 쥐고 수없는 만행이 자행되고 있는 격전장으로, 격전장으로 두려움 하나 없이 뛰어다니며 외치기 시작했고 많은 남녀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해 내고 있었다.
한편 이날 낮부터 광주 기독병원과 적십자병원, 대학병원 등에는 중환자가 줄을 잇기 시작했고 영안실에는 죽어서 실려온 시체로 노적을 쌓고 있었다. 학생·청년·부녀자·중학생들, 심지어는 국민학생 시체도 끼여 있었다.
이 때 광주지역 간호원들의 활약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비번에 끼여 있던 간호원들까지 모두 병원으로 달려와 죽어 가는 환자들을 살려내는 데 주야를 가릴 틈이 없었다. 급증하는 환자 때문에 피가 모자란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병원 문전에는 헌혈하는 여성과 시민들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거리에는 『광주시민들이 죽어 가고 있읍니다. 다같이 헌혈에 동참합시다』하는 피킷을 든 여성들(홍희윤 등)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또한 이날 오후부터 녹두서점에서는 정현애와 윤상원(5월항쟁 기간중 피격 사망)등의 주도하에 화염병이 대량 제작되었고 다른 주택가 곳곳에서도 같은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광천동 들불야학팀(서대석·노영란·조순임·오경민·박영숙 등)이 주도해서 만든 [투사회보]가 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항쟁 3일째로 접어들면서 여성들의 활동은 서서히 조직화되고 있었다. 길가에서는 아들 딸을 잃은 어머니의 통곡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오전 10시부터 운집하기 시작한 시위대열에는 가정주부·고등학생·노년층을 비롯하여 할머니·술집 접대부·점원·회사원·남녀 근로자·정비공·넝마주이 등 전계층의 시민이 합세하여 독재의 아성을 향한 함성을 뿜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 아무 것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광주 전역에 걸쳐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조직 아닌 조직활동에 들어갔다. 도로주변 상점이나 주택가 여성들은 커다란 물통이나 세수대야 등에 물을 가득 채워서 밖으로 내놓았고 리어카와 자전거 또는 함지로 지하상가와 공사장 주변에서 돌과 자갈을 실어 날랐으며 다른 편의 주부들과 요식업소 여종업원들은 손에 손마다 물수건과 치약을 준비하여 시위대 사이로 뛰어다니면서 최루탄에 눈물 흘리는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했다. 또한 시내 전역에서 시위대를 위한 음료수가 공급되고 빵과 주먹 밥 등 요기거리가 날라지기 시작했다.



피로 맺어진 공동체의 밥



이날밤 7시쯤 광주항쟁의 결정적인 비약이 이루어진 운수노동자들의 강력하고 일체화된 차량시위가 무서운 힘으로 전 시가지를 누볐으며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시위대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도청과 노동청 사이는 완전히 격전장이었으며 시민들의 무수한 희생과 시체를 넘어가는 이 죽음의 행진에 입을 봉하고 있는 MBC와 노동청이 불기둥에 휩싸였다.
전옥주는 시민들이 마련해 준 지프를 타고 먹지도 자지도 않는 심야방송을 목이 터져라 계속했고 정현애 ·윤상원 등은 스태프진이 철수한 KBS로 달려가 시민방송을 시도해 봤으나 기재고장으로 불가능했다. 이제 시위대 최후의 탈환지는 계엄군의 본거지인 도청이었다.
심야전투가 끝나고 21일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 송백회 회원인 임영희·이행자·정유아·홍희윤 등이 녹두서점으로 달려와 또다시 여성들의 체계화된 조직행동을 논의할 무렵 전옥주는 유동에서 신역 부근으로 가두방송을 나갔다가 신역 전투에서 전사한 시체 두 구를 발견했다. 그는 리어카에 이 시체를 싣고 태극기를 덮어 방송차 뒤에 연결하여 도청앞까지 행진하면서 가두방송을 계속했다.
『보십시오. 우리의 형제가 이렇게 죽었읍니다. 지금까지 계엄군은 우리 형제 자매의 시체를 탈취해 가고 단 한사람도 죽지 않았다고 보도하지만 여러분, 똑똑히 보십시오. 여기 우리 형제가 죽어 있읍니다』
이 방송을 들으며 시민들은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다. 오전 9시에 이미 금남로는 10만이 넘는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손자를 끌고 시위장에 나온 할머니, 어린 꼬마를 데리고 나온 가정주부, 근무를 포기하고 나온 여성근로자들이 대거 시위대에 참여했으며 이날 아침부터 시내 어느 동네를 가든지 시위군중과 청년들을 위해 여성들이 마련한 음식들이 길가에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시민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면 어디든지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길목을 지키다가 지나는 시위차량을 멈추게하고는 김밥과 주먹밥을 한 함지씩 실어 주는 것이었다.
광주시민이면 아무나 찾아와 요기를 할 수 있었고 어느 곳에나 푸짐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시장 아주머니들이 가장 열성이었다. 그들은 지난 며칠 동안의 참상을 똑똑히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양동시장·대인시장·학동시장·산수시장·서방시장 등에서는 조직적으로 밥과 반찬이 공급되고 있었다.
전투가 치열했던 금남로에는 동별로 나온 수백명의 가정주부들이 김밥을 함지에 담아 도로에 펼쳐 놓고 시위대에게 나눠 주었으며 주먹밥·달걀·김치·음료수·빵 등 각양각색의 음식이 형제자매들의 손에 아낌없이 나뉘어졌다. 손매듭이 굵고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이 여성들은 이들 시위대 모두를 식구처럼 여기고 그들에게 요기를 시켜주는 일이 곧 자기 혈육을 먹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시위대들은 그 음식들이 차량 위로 실려질 때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면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정의감에 불탔다.
이 주먹밥이야말로 광주 공동체의 피로 맺어진 약속의 밥이었다. 밥을 먹는 시민들은 자신이 광주 공동체가 뽑아서 민주화 전선으로 내보낸 전사임을 새롭게 자각했고 밥을 해준 주부들은 비인간적인 공포로부터 벗어나 그것들을 몰아내는 데 자신이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에 신바람이 나서 밥을 나누어 주지 않고는 못배기는 모습이었다. 이와 같은 식사의 연대는 금남로의 시위 군중을 새로운 전의에 불타도록 만들었고 뜨거운 시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낮의 발포



이런 결속 가운데 오전 9시50분 도청앞 광장은 계엄군과 시위대가 팽팽히 맞선 가운데 전옥주와 김범태(당시 19세 조선대 법대 1학년)가 시위대의 대표로 뽑혀 장형태 전남도지사와 협상을 벌이러 도청으로 들어갔고 시위군중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지사는 [시민들을 자중시켜주면 5분 후에 나오겠다』하였으나 나타나지 않았고 구용상 광주시장이 나와『나는 광주시장입니다]를 세번 복창하는데 장갑차가 밀고 들어왔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이는 바로 시민들의 무장투쟁을 예고해 주는 조짐으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문화선전팀 「광대」의 김정희 등이 미술전공 실력을 발휘하여 홍보물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페인트로 쓴 각종 구호나 선전문구가 차량에 걸렸고 갖가지 벽보, 현수막이 거리에 나붙기 시작했다. 어제의 참상을 알리는 갖가지 격문이 적힌 다섯 종류의 유인물도 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그리고 보다 조직적인 행동개시를 위해서 전남대는 공용터미널, 조선대는 계림파출소, 전문대와 간호대는 문화방송, 남녀고등학생은 산수동 오거리, 시민들은 각 동 별로 모여서 도청으로 집결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오전 11시30분에 이르러 도청앞 광장은 30만의 시민들이 계엄군과 몸싸움을 계속하는 가운데 드디어 백주의 발포가 자행되었다.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시위 선두에 섰던 몇 사람이 쓰러진 것을 기점으로 무섭고 끔찍하고 처참한 무차별 발포작전이 장시간 계속되었다. 수십만의 인파로 들끓는 금남로는 아비규환과 호곡소리가 하늘을 찢었고 온 시내의 병원이란 병원에는 피흘리며 절규하는 환자와 처절한 주검으로 발붙일 곳이 없었다. 병원 복도에 비닐을 깔고 부상자들을 뉘어도 밀려드는 부상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이때 광주시의 의사와 간호원들이 보여준 봉사정신 역시 광주의 시민공동체를 보여주는 한 본보기였으며 환자들 역시 모두가 중환자인데도 서로서로 뒤에 온 사람이 더 급한 것 같다며 순서를 미룰 때 간호원들은 환자를

부둥켜 안고 울어버렸다. 수술이 진행될 때마다 의사와 간호원들의 눈물이 상처 위로 쉴새없이 떨어져내렸다.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다시 병원 앞에는 시위 대열에 적극 가담하지 못한 가정주부, 어머니, 젊은 여성들이 헌혈을 하러 몰려들었고 적십자병원 앞에는 황금동 술집 접대부들이 단체로 몰려와 헌혈 순서를 기다렸다.
오후 2시쯤에는 나주 방면으로 나간 7대의 버스에 방직공장 여성근로자들이 가득 편승하여 시위대에 합류했다.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모든 여성들은 신원을 묻지 않고 각자 처한 처소에서 자신들이 할 일을 찾아 활약했다. 거리거리엔 수십 구의 시체가 뒹굴었고 오후 5시쯤에는 수백 대의 차량과 무기가 [시민군]의 손에 들어 갔다. 광주공원에 재집결된 수천명의 시민군은 이제 대부분이 20∼30대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준열한 결사대였다. 시민특공대 11명이 LMG기관총 2정을 메고 도청이 사정거리 안에 포착되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으로 올라가고, 그로부터 3시간 후 드디어 광주의 전역에서 시민군은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승리의 함성과 함께 핏물에 뒤덮인 시가지는 끓어오르는 오열을 어둠 속에 고요히 묻고 있었다.



광주 여성들의 통곡의 행진



「해방구」가 된 광주의 첫 밤이 밝았다. 서로 얼싸안고 이웃과 이웃간의 사랑으로 가득찬 시민들은 힘께 앉아 있음의 기쁨과 형제애를 뼛속 깊이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이날도 한편에서는 여전히 이름없는 여성들의 주먹밥 및 음료수 공급이 속속 진행 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과 딸, 남편의 시체를 찾아나서는 여성들의 통곡의 행진이 거리와 시체를 넘어 병원과 병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새벽부터 광주공원 앞 광장에서는 시민군의 재편성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아침 일찍 시민군은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배정했다. 그들은 대부분은 기층민중이었고 소수의 학생이 끼여 있었다.
다수의 여성근로자와 여고생이 이때 도청에 들어가 조직편성에 가담했다. 여고생들은 시민들로부터 들어오는 사망자 명단을 작성하고 신원을 파악하여 시민들에게 방송하는 일을 전담하였고 또 다수의 여성근로자들은 취사와 여러가지 사무적인 잡무들을 기민하게 도왔다. 신원이 확인된 시체만 관에 입관시켜 분수대 앞으로 운반했다. 관이 도착될 때마다 어머니의 눈물과 통곡이 산천을 떨게 했다. 오후부터 시작된 궐기대회에서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 가정주부, 교사, 농민, 학생들이 분수대에 뛰어올라 엄청난 민중의식을 표출하였다.
바로 이 무렵 항쟁기간 동안 선전조의 선두였던 전옥주가 ■■■과 함께 가두방송을 하다가 도청앞 시위대 속에 잠깐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군중 속에서 [저 여자 간첩이다』라고 외쳤고 신체 건장한 40대 남자 몇 명이 그를 끌고 가버렸다. 전옥주는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며 간첩누명으로 시달리다가 이튿날 통합병원 정신이상자 병동으로 이송되었고 간첩이라는 허위자백을 거부하자 그 다음엔 독침사건 누명을 씌웠으며 그래도 허위 자백에 불응하자 4일째 되던 날은 김대중 씨와의 관련혐의로 바꾸었다. 그래도 불응하자 이제는 방화범으로 바뀌어져 광산경찰서로 압송되어

옷을 발가벗긴 채 고문을 당했으며 이 때 받은 고문으로 그는 여자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그리고 전옥주는 포고령 위반 등으로 15년형을 언도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 81년 4월3일에야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렇게 전옥주가 연행되자 선전조에는 박영순(당시 21세, 송원전문대 2학년)과 박영희(당시 목포공업대 중퇴)가 22일 도청에 들어왔다가 가두방송요원으로 뛰게 되었다.
또한 이날밤 녹두서점에는 광대패 김정희·박효선과 정현애·이행자·정유아·임영희·김영철 등이 모여 내일 있을 제1차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플래카드와 준비물 제작에 바빴고 송백회원들은「궐기문」[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민주시] 등의 유인물 작성에 분주했다. 여기에 드는 자금들도 주로 여자들이 조달했다. 그리고 광대패와 들불야학에서 발행하던 [투사회보]는 22일까지 8호를 내고 9호부터는「민주시민회보]로 개칭하는 한편 광주YWCA로 본부를 옮겨 조직 재편성과 함께 적극적인 민중언론 창구를 열었으며 투사회보팀의 일부 여성근로자들이(오경민 등) 도청지도부로 들어가 식사와 모금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성들의 조직화된 후방지원



이때부터 YWCA 문화선전팀은 시민회보와 홍보물 제작, 또 궐기대회준비를 전담하였다. 여기에는 15명 남짓한 여성들이 동참하고 있었고 특히 「속보」 정보, 배포, 종이구입 등은 여성들이 도맡다시피 했다. 또한 시민군이 등장하면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 분담은 말없는 가운데 보다 뚜렷해져 갔다. 남자들이 총을 드는 대신 여성들은 후진에서 필요한 모든 사무절차와 물품보급과 자금확보, 취사조 담당, 유인물 제작과 선전조 담당,사망자 및 부상자 신원파악 등을 맡았다. 이 거대한 조직이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데 필요한 자질구레한 일들이 잡음 하나없이 척척 진행되어 나갔다. 또한 자칫 전투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시시때때로 의기소침해지기 쉬운 절망적인 상황이 밀어닥칠 때마다 여성동지들의 말 한마디, 격려 한마디가 전체의 사기를 살리는데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당시 도청기획위원으로 활약했던 윤강옥의 증언에 의하면 시민군이 도청에 본부를 정하면서 취사부와 상황실 등에 고정적으로 1백여명, 많을때는 2백 여명씩(운동권여성, 교회여성, 구속자 부인들, 근로자, 여고생) 상주하여 일했다. 일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신원을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또 중요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도청 여성팀과 YWCA여성팀(광대, 민주회보팀, 들불야학팀, 송백회 등)의 유기적인 관계는 주로 이행자(당시 YWCA간사)·정유아(당시 YWCA간사)·임영희(현대사회문제 연구소 회원)·홍희윤(송백회 총무)등에 의해 신속하게 연결되었고 그밖의 사회운동과 구속자 정보는 정현애 등의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연결되다가 24일부터는 녹두서점 아지트를 YWCA로 합류시켰다. 이때부터 YWCA는 선전조의 본부가 되었다. 도청 주변 담벽에는 선전조의 미술팀이 제작한 각종 플래카드와 현수막이 함성처럼 게시되었고 남도예술회관 벽면과 충장로 방향 YWCA담벽에는 사망자 명단과 함께 잔혹하게 죽은 시체와 부상자들, 그리고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여성들에 의해 무수히 게시되어 오열을 자아냈다.
도청 앞 맞은편 상무관에는 신원이 확인된 시체들이 질서정연하게 태극기와 무명천에 덮여 진열되었고 입구에 분향대가 마련되었는데, 주로 황금동 술집 접대부로 알려진 여성들이 자진해서 이들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을 씻기고 양말을 신기고 염하는 일을 도왔으며 민주영령을 위로하는 분향대를 지켰다(이들 중 2명이 나중에 구속되어 정현애와 감방생활을 함께 했다). 가족의 시체를 확인하려는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의 눈물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항쟁지도부내의 여성들



이 와중에서도 남녀 고등학생들과 시민들에 의해 시내 곳곳이 깨끗하게 청소되었고 시장 주변 길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시장여성들이 길가에 밥솥을 걸고 밥을 지었으며 밤새워 경계근무를 했던 시민군들이 아무곳에 나 찾아가 주저앉아 식사를 하게 했다.
수십 만의 인파 속에서 23일 오전 11시30분에 진행된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는 YWCA 문화선전조의 주도하에 노동자·농민·시민·교사·주부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차례로 나와 민주화 투쟁의 열망을 토로하였고 이 대회에서 보고된 피해상황은 사망자 6백여명, 부상자 3천여명, 그밖에 공수부대에 실려간 시체나 실종자는 파악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여성 피해자는 따로 구분하지 못했다. 이때 여고생들에 의 한 「부상자 돕기 모금」이 즉석에서 이뤄졌다.
한편 23일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한 도청 내의 투항파(김창길 등)와 투쟁파(김종배 등)의 대립은 난전을 거듭하다가 5월25일 최후까지 투쟁하기를 결의한 광주민중항쟁지도부가 밤10시에 YWCA를 중심으로 탄생함으로써 도청 내무국장 부속실에 항쟁지도부가 새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조직개편에서 기획조·홍보조·모금조·취사조가 새로 결성되면서 YWCA를 거점으로 활약하고 있던 5O여 명의 여성들도 다소 자리바꿈이 있었다. 홍보조에 김정희·이현주·임희숙 등이 적극 가담하였고 임영희·이행자·정유아 등은 대자보, 모금활동, 리본제작, 궐기대회 준비 실무를 맡았으며 구속자 가족이며 근로자 출신인 이정(당시 31세)이 3개조로 구성된 취사부 책임자가 되어 11명의 여성팀 (여대생·송백회 회원·근로자·여고생)을 이끌고 도청으로 들어가 25일 밤 11시 도청 식당부를 인수 맡았다.
당시 가톨릭 노동운동권 출신 전청자가 주방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이정은 주방 안에 광주지역 주부들에 의해 마련되어 있는 주먹밥과 김밥, 음료수, 달걀, 각종 음식물의 엄청난 양에 놀라 까무라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구체적 살림살이에 광주여성들의 연합심은 무서운 에너지로 분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24일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준비 역시 김정희·정현애 등이 주도한 문화선전팀에 의해 준비되었고 15만여 군중속에서 이현주의「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 여고생의「민주시」가 처절한 목소리로 낭송되자 모든 시민이 따라 울었다. 또한 제3차,4차,5차에 이르는 민주수호궐기대회와 민원접수, 선전활동, 가두방송, 취사활동들이 여성들의 막강한 힘에 의해 열기를 더하며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5월 26일 오후 3시 민주의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마치면서 계엄군이 내일 새벽 진군해 들어온다는 비보와 함께 최후까지 싸울 전투조가 잔류자 1백5O여 명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중에는 여학생 1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60여명은 고등학생이었다. YWCA대강당에서 전투조 조직개편이 이뤄질 동안 여성부가 준비한 식사가 나왔고 이들은 이를「최후의 만찬]이라 이름하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여학생 10명은 간호대로 편성되었고 나머지는 각 지역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무기를 원하는 여학생도 있었지만 남성들이 만류하였다.



「잡으면 찢어죽인다」



또한 이날 밤 YWCA쪽에 홍보·민원·보급지원 업무를 수행하던 여성들과 민중언론·궐기대회 및 가두방송 선전조가 40여명, 송백회 여성 간부 5명, 취사담당 여공 15명, 경비담당 10명으로 총 70명이 남아 있었고 도청 지도부에는 이정을 중심으로 한 11명의 여성들이 대기중이었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지도부는, 여성투사들은 27일 새벽의 마지막 전투에서 제외시키자는 단안을 내리고 26일 밤 11시쯤 적극 피신을 권유했다. 그래서 도청 취사팀 11명을 인솔하여 이정은 담을 타고 넘어 교회와 성당 등으로 피신하였으며 YWCA팀의 이행자·정유아·임영희 등도 27일 새벽 2시 50여명의 다른 동료들을 인솔하여 담을 타고 넘어 인근교회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홍보부의 선전조는 마지막까지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고 27일 새벽 3시까지 가두방송요원 박영순은 그 유명한 새벽 방송을 광주 전역을 돌면서 용감하게 수행했다.
『시민 여러분 !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읍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어서 일어나 도청 앞으로 집결해 주십시오. 최후까지 광주를 사수하고 우리의 형제 자매를 살립시다 !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읍니다‥‥}
이 애절한 여학생의 울부짖음은 새벽 눈을 뜬 전 시민의 심장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부름이요, 명령이었다.
그리고 새벽 5시, 광주는 계엄군에 의해 완전 점령되었다. 이와 함께 광주 전역에 검거선풍이 있었다. 수습대책위원으로 뛰었던 조아라(당시 YWCA회 장), 이애신(당시 YWCA총무)등을 비롯, 가두방송 요원 전옥주·■■■·박영순·박경희, 녹두서점의 정현애 및 그의 여동생, 도청에서 잡혀온 15여명의 여성팀, 황금동 술집 접대부 2명과 여고생 등 40여명이 구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연루자들을 최소한 줄이기 위해 어떠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조직활동이 아닌 자발적인 개인행동으로 끝까지 진술을 되풀이했다. 특히 새벽방송의 주인공 박영순은 수사관들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었으며 전옥주와 ■■■ 사이에는 서로 이간을 붙여 기대하는 것을 캐내려 갖은 모략을 다했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특히 정현애는 녹두서점과 송백회 관계를 비밀에 붙임으로써 검거확대를 막았다.
그리하여 광주항쟁기간 동안 여성들이 벌인 눈부신 활동은 사실상 감추어 졌고 그 결과 혈안이 된 검거망에서 비켜섬으로써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광주항쟁 평가과정에서 자칫 소멸해버릴 여지를 담게 되었다. 그러나 5월항쟁 전 기간을 통한 이름없는 여성들의 눈물어린 활약상은 광주시민들의 가슴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5월항쟁에서 여성민중해방으로



광주항쟁 이후 지난 7년 동안 정부가 광주항쟁을 폭도나 내란음모자들의 반란으로 허위 조작함으로써 광주에서의 만행을 은폐하려는 음모를 계속하게 되자 피해자들의 억울하고 피눈물나는 세월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분연히 맞서 80년대 광주민주항쟁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세력들이 여성들의 힘으로 부상되었다.
수많은 유가족과 7백22명의 부상자, 4백21명의 구속자를 낸 광주항쟁은 [광주항쟁유가족회」[5월항쟁동지회][5월항쟁부상자가족회] [5월항쟁구속자가족회]등의 단체들을 결성하기에 이르며 81년 9월에 접어들면서 유가족회(회장 전계량, 부인 김순희)는 남자들이 기관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선두에서 물러나고 자식을 잃은 아픔으로 똘똘 뭉친 어머니들이 전면 투쟁에 나서게 된다. 이들이 지난 6년 동안 벌여온 처참하고 눈물겨운 투쟁과 경찰로부터 받은 수난은 따로 취급될 수밖에 없으며 구속자 가족으로 주축을 이룬 민가협(회장 안성례)의 투쟁 또한 치열하고 체계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특히 유족회, 민가협 투쟁과 함께 송백회(회장 임영희)는 81년부터 새로 조직을 정비하고 그동안 길러온 민주화 투쟁의 역량을 여성민중해방투쟁으로 연결시키는 작업과 함께 여성의 시각에서 광주항쟁을 재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와 때를 맞춰 민청련광주지부 여성부에서는 여성해방의 언론과 논의를 발전시키는 [여성의 소리] 3호를 내놓았고 88년 2월7일 본격적인 광주지역 여성민중해방운동의 이념을 내세운 「광주전남여성회」(회장 이소라<40>·사무처장 김화자<29>)가 발족됨으로써 광주 여성운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이 모든 여러 단체에 소속된 광주 민주 여성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광주여성은 누구나 5월항쟁을 기점으로 대단한 정치 역량을 축적하게 되었으며 성숙한 민주해방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야 우리는 서서히 지금까지 여성들의 활약들을 여성해방적 시각에서 자체 평가하기 시작했다. 송백회 중심의 옥바라지나 민가협 중심의 석방투쟁, 구속자 중심의 엄청난 권리회복 투쟁은 우리 자신들의 문제를 점검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민주화 투쟁이 국민의 절반인 여성해방, 그보다 앞서 1천만 여성 민중의 해방에서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보조역에서 일보 전진하여 주체적 여성운동을 성취해낼 것이다. 왜냐하면 광주항쟁은 결국 지식인 여성에서 출발하여 기층 여성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인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광주항쟁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