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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의 취재수첩/「광주사태」 그날의 5가지 의문점. 김영택(신동아, 1987.

본문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의 취재수첩

「광주사태」그날의 5가지 의문점



김 영 택<동아일보 여성동아부 차장대우>

<금남로거리에서 시작된 비극>

  광주직할시 북구 북동 누문동과 북동을 잇는 횡단보도. 북동거리이지만 금남로의 연장이어서인지 금남로 거리라고도 불리는 광주의 메인 스트리트 위에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횡단보도다.
  지금은 페이트가 거의 벗겨져 보기조차 흉한 곳. 유서 깊은 광주제일고등학교 입구로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10대의 나이 어린 학생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킨지 51년. 이번에는 [광주사태]의 비극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보도 위에 일단의 얼룩무늬 복장을 한 군인들이 3열 횡대로 엄정하게 늘어서 있었다.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가장 잘 훈련된 최정예 특수부대. 방석망을 쓰고 오른 손에는 시위진압용 방망이, 왼손에는 날아오는 돌을 막기 위한 방패를 들고 있었고 등에는 대검이 꽂힌 M16소총이 대각선으로 메어져 있었다.
  이들은 1980년 5월18일 오후 3시30분쯤 유동 3거리에 나타난 후 3열횡대로 천천히 [전진]해 왔다. 지휘관이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소리에 맞춰 저벅저벅 울리는 군화소리. 발걸음 정도의 보폭으로 절도 있게 떼어 옮기는 군화소리는 앞으로 있을 비극을 예고라도 하듯 무겁고 지리하게 들렸다.
  "제자리 섯"
  "정렬"
  지휘관의 구령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리고 하얗게 칠해진 횡단보도 위에서 대열은 대오를 가다듬었다.
  이어 극히 짧은 시간이 흘렀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의 짧은바늘이 4자 위에 서고 긴바늘이 12자 위에 이르렀다. 1980년 5월18일 오후 4시 정각.
  바로 이때였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이 터지며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마침 거리에는 학생들의 시위와 경찰의 진압과정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군인대열과 그 대열로부터 1백m가량 떨어진 경찰의 중간쯤에서 삼삼오오 짝지어 서성이고 있기도 했고, 데모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학생들은 군인들이 다가오자 점차 데모대열로부터 빠져나가고 있었으며 시민들도 이미 한 사람 두사람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귀가권유방송이 나온 지 1분이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그 짧은 순간을 사이에 두고 엄청난 명령이 뒤따라 튀어 나왔다. 시민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딱 한마디. 이 명령 이외에 행동지침 등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었다. 6·25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참담한 비극으로 점철된 [광주사태]의 시작을 알리는 구령이었다.
  서성거리던 시민들은 난 데 없이 [무조건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허겁지겁 몸을 피하기 시작했고 군인들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눈깜짝할 사이에 흩어졌다. 동시에 11대의 군용트럭이 서석병원 앞에서부터 도청 쪽으로 늘어서더니 수백 명의 얼룩무늬들을 내려놓았다. 이들도 방석망을 쓰고 방망이와 방패를 들고 있었고, 등에는 역시 착검한 M16소총을 메고 있었다.
  이미 사전에 지시를 받은 듯, 대열에서 튀어나온 군인들은 다짜고짜 사람들을 방망이로 두들기고 발로 걷어 찼다. 머리고 가슴이고 어깨고 가리지 않았다. [어이쿠]나 [악]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잘다듬어진 방망이만 들려 있지 않았다. 네모진 각목을 든 사람도 있었고, 장작개비를 든 하사관도 있었다. 다행히 그 자리에서 붙들리지 않은 시민들은 우루루 인근 점포와 주택으로 밀려 들어갔다. 아래층의 가게나 2,3층의 사무실, 심지어 북동 쪽의 주택가로 뛰어 달아나는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들.
  [광주사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날 오후 4시 정각이 H아워가 되고 북동 276번지 앞 횡단보도가 비극의 스타트라인이 된 것이다.

<첫 번째 의문점>

  1980년 5월18일 오후 4시 정각 광주시 북동 276번지 앞 횡단보도에서 시작된 [광주사태]는 그로부터 만 7년3개월이 지나 1987년 8월이 된 현재에도 그 전체상이 어둠에 묻혀 있다. 묻혀있을 뿐만 아니라 6·29민주화조치선언 이후 여당이 내보인 [사태해결]제안에도 광주인들은 강한 거부의 몸짓을 보인다. 차라리 묻어두자는 것이다. 묻어 두었다가 전체상을 제대로 밝힐 수 있을 때가 오면 그때 털끝만큼의 숨김도 없이 낱낱이 밝혀보자는 것이다.
  그때 그 비극의 전말을 현장에서 지켜 본 기자로서도 당사들이 입을 다물자는 데는 굳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훗날 그때의 전체상을 밝히는 데 한가닥 도움의 단서가 될 수 있다면, 기자의 낡은 취재 수첩에 적힌 아직도 풀리지 않은 그때의 몇 가지 의문점을 메모형식으로라도 정리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바야흐로 [6·29선언]이후, 짐을 덜어놓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가 아닌가. 우선 다섯 가지 의문점을 나열해보기로 했다.

왜 그토록 강경한 진압을?

  첫째 계엄군의 강경진압에 대한 의문이다.
  시위진압은, 시위대의 가슴 아랫부분을 방망이 등으로 때려 신체에 별지장이 없도록 하면서 진압하는 것일 뿐 생명에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가슴 윗부분은 절대로 때리지 않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광주사태에서는 이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다. 머리 가슴 등 오히려 생명에 위험이 따르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난타했을 뿐 아니라 시위대원이나 시위를 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물론 눈에 띄는 사람이면 누구나 무차별 난타함으로써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도록 했다.
  왜 이러한 진압 방법이 동원됐을까?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처럼 아무나 눈에 띄는 대로 마구잡이로 체포하라는 명령은 누가 내리도록 했으며, 집안이나 사무실 안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까지 연행하도록 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현지 지휘관의 판단착오에서 나온 실책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처음부터 어떤 목적의식에서 하달된 것일까?
  강경진압이 없었다면 광주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국민의 민주화 욕구를 차단하는 5·17조치를 결행한 당국은 서슬퍼런 계엄에도 불구하고 젊은 학생들이 다시 시위를 시작하자 강경진압으로 이를 싹부터 뿌리 뽑아버리겠다는 계산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작된 이 같은 강경진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하나는 10·26이라는 역사적 시점의 앞과 뒤라는 [시간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산·마산과 광주라는 [장소의 차이]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10·26 이전 유신체제 동안 일어났던 숱한 시위에 가해진 강경대응은 79년 9월16일에 터진 부마사태의 진압과정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몇 백만 명쯤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말기적 징후를 드러내며 장갑차를 앞세우고 눈에 띄는대로 구타하고 연행함으로써 부마사태는 외형상 일단 진압에 성공했었다. 이 부마사태가 곧이어 10·26으로 이어져 18년 일인독재의 종말을 가져오게 되지만, 80년 5월의 광주사태도 사실은 부마사태에서 잉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월14, 15, 16일 연 3일 동안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광주의 대학생들은 그때 이미 5·17조치와 같은 비상사태를 예견한 듯, 당국에 의해 어떤 조치가 내려져 학교문이 닫힐 경우, 다음날 오전 9시30분 전남대 교문 앞에 자동적으로 모여 시위를 하자고 공개적으로 약속했었다. 당국이 5·17조치에 앞서 군부대 병력을 전남대에 투입시킨 것은 이 같은 학생들의 약속에 대비한 사전조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때 당국이 광주에 투입한 부대가 [특수부대]였다는 데 있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마구 두들겨 패고 무차별 연행하면 부마사태처럼 시위가 진압될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80년 5월은 79년 9월과는 달랐다. 10·26으로 맞은 민주화의 붐이 국민들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장기독재의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와 자유의 신선한 공기를 힘껏 심호흡하고자 했다. 국민들 사이에는 이제 어떠한 형태의 부당한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싹트고 있었다. 시대가 달라져 있었다.
  광주의 시위에 강경대응으로 맞서겠다고 구상한 사람은 10·26전과 후라는 이 역사적 시차를 잊고 있었거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역사적 상황이 부마사태에서 성공(?)한 강경책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부당한 강압에는 이제 그만 순응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어 비극의 광주사태로 번진 것이다.

[시간]과 [장소]의 차이

  다음은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장소적 차이이다. 부마사태는 경상도에서 일어났고, [광주사태]는 전라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마사태 때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던 사태가 광주사태 때는 일어났다. 단적인 예가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잡으러 왔다}는 루머였다. 이 같은 루머가 뿌리 깊은 지역감정을 부채질하여 경상도 넘버를 단 트럭과 경상도 출신 재벌인 금성사 판매대리점을 습격하는 사태로 나타났다.
  한때 광주에는 호남 푸대접 대책위원회라는 것이 구성된 적이 있었다. 제3공화국 이래 인사행정과 경제적 자원배분이 경상도에 일방적으로 편중되고 전라도는 완전히 소외되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만들어 낸 이른바 [제몫 찾아먹기 운동]의 일환이었다. 당시 그런 소외감은 호남인들만이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충청도 사람들은 푸대접이 아니라 무대접을 받고 있다고 자조하기까지 했었다.
  다만 호남지방이 더 큰 피해의식을 갖게 된 것은 영남지방에 대한 역사적인 라이벌의식에 뿌리를 둔 면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이런 라이벌 의식과 지역감정을 건드리는 무책임한 망언을 영남출신 인사들이 가끔씩 터트리는 것도 문제였다. 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경상도 출신 이모 인사가 선거유세에서 경상도 사람들의 단결을 촉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때에 [새 시대]를 맞아 호남인들의 한을 풀어줄 것이라는 여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김대중씨가 5·17계엄확대조치와 함께 전격 구속되었다. 광주인들은 분노했다. [경상도 정권]이 전라도 사람을 억압한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데모가 시작될 때부터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가 나온 것도 그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래서 광주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된 80년 5월31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광주사태 김대중 배후조종]설은 광주 사람이면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계엄확대조치와 함께 [사전에] 검거되어버린 김대중 정동년 씨 등이 어떻게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것인지, 몸은 감옥에 있고 혼령이라도 튀어나와 조종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국은 김대중씨가 검거되기 전에 이미 막대한 자금을 정동년, 홍남순씨 등을 통해 뿌려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키도록 해 놓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씨 본인은 그후 몇 차례의 회견을 통해 자신의 무관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하수인으로 지목되어있는 정동년씨도 자금을 받기는커녕 김씨를 만난 적도 없다고 술회한 바 있다.
  홍남순씨도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배후 조종설을 일소에 부쳐버리고 있다.
  “내가 5월26일 오후 5시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송정 쪽으로 나가는데 시계에 있는 검문소에서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늙은 사람이 아무 죄도 없고 해서 무심코 내보여줬더니 사복요원이 내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무전인가로 연락을 하는 것 같더니 잠시 후 지프차가 와서 우리 세 사람을 태우고 갑디다. 아내와 아들은 그후 9일만에 풀려 나오고 내게는 김대중씨로부터 자금을 받아 광주사태를 조종했다고 해서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하더군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네들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김대중씨를 만났다고 하는 날짜에 나는 광주에 있던 날이어서 얼마든지 알리바이가 성립돼요”
  어쨌든 광주인들이 [경상도 정권의 연장]이라고 본 5·17 당시의 주체세력들이, 다른 지역이 아닌 바로 광주에서, 부마사태를 진압하듯 광주시위를 진압하려고 구상했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오가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의 차이에다 지역의 차이까지 망각했거나 깨닫지 못한 결과였다.

「그들은 폭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뒤집어서, 강경진압을 구상했던 사람도 처음부터 이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가정한다면, 다분히 위압적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10·26이후]에 [광주]에서 그와 같은 무차별 강경진압을 강행했을까.
  당시 계엄사는 「계엄군이 포고령을 위반한 학생의 [난동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투입」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광주사태의 학생 무장 봉기설이다.
  그러나 계엄군이 전남대에 투입된 것은 계엄확대조치가 내려지기 전이었고, 학생들이 처음으로 무장을 한 것은 20일 밤이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맨주먹으로 시위를 시작했으나 계엄군의 진압이 지나치다 못해 무자비한 데에 이르자 이에 자극 받아 19일 오후부터 시내 철물점에 있는 쇠파이프나 쇠갈퀴 등으로 무장하여 계엄군과 맞서게 된다. 학생들은 마침내 예비군 무기에까지 착안하게 된다. 그들이 제일 먼저 덮친 곳은 나주시 금성파출소 예비군 무기고였다. 그리고 화순탄광의 폭발물과 광주 주변 예비군 무기고를 털어 대량으로 무장하게 되고, 방위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 공장을 덮쳐 장갑차와 트럭을 끌어내게 된다.
  20일 오전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길에서 30여 명의 젊은 남녀가 계엄군에게 붙잡혀, 남자는 팬티, 여자는 브래지어와 팬티바람으로 군인들의 구령에 따라 온갖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이 대목은 뒤에 계엄사가 유언비어로 발표했으나, 유언비어가 아니라 진짜 행해진 기괴한 것이었다.
  이때 가톨릭센터 주교관에서 윤공희 대주교와 조비오 신부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이 된 젊은이들을 다루는 군인들의 행동이 너무나 지나치자 조신부는 {내가 비록 성직자이지만 옆에 총이 있었다면 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뒤에 군법회의 법정에서 진술했었다. 바로 이 심리가 학생들이 무장을 하게 되는 동기가 된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렇다 할 조직이거나 리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21일 오후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다음날인 22일에야 [학생수습대책위원회]라는 이름의 [조직]이 생겨 체계를 잡기 시작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처음부터 조직적인 봉기는 아니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광주시민들은 5·17 전인 14, 15, 16일에 있었던 학생들의 시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학생들은 도청 광장에 모이면 {시민 여러분에게 불편을 드리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는 몇 시까지 시위를 하고 물러가겠습니다}고 사전에 양해 방송을 하고, 그 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해산하면서 버려진 오물 등을 수거해 갔다. 특히 16일 횃불시위를 끝낸 학생들은 다음날 새벽, 시위로 더럽혀진 시가지를 청소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광주시민들은 학생을 [폭도]라고 지칭하는 데 대해 심한 분노를 느낀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방화도 없었고, 7백여 개의 은행창구가 하나도 털리지 않았으며, 부녀자들이 밥과 반찬을 만들어 수습대책위로 찾아온 후 손수 사망자의 시체에 묻은 피를 닦어주곤 했는데 왜 우리가 폭도냐}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의 강경진압과정에 대한 내용의 일부는 그 동안 여러 가지 형태로 공개되었지만, 보다 자세하고 사실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힐 부분들이 더 있을 것이다. 다만 18일 오전 5·17조치가 발표되자마자 학생들이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 시작한 시위를 경찰력으로만 대응했거나, 부득이 군을 투입했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진압방법을 동원했더라면 민족적 비극인 광주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만은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광주사태 발단의 시간을 18일 오전 9시30분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기자는 시위대 강경진압이 시작되는 오후 4시 정각으로 보며, 광주일고 앞 횡단보도를 스타트라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국은 계엄군의 공식투입시간을 오후 4시40분으로 발표해 오고 있으나 기자가 취재한 바로는 오후 4시 정각이었음을 밝혀둔다.
  어쨌든 이 강경진압이 어느 선에서 어떻게 구상되어 하달되었는지, 그것이 광주사태의 진상을 푸는 데 있어 제1의 의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청바지 차림의 의문의 퇴장>

  광주사태가 한창 진행되던 5월21일 오전 10시15분쯤, 시위대의 맨 앞에서 격렬하게 데모를 지휘하던 블루진 바지 차림의 한 젊은 여자가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정면충돌의 위험이 고조되자 슬그머니 계엄군 대열을 뚫고 도청광장쪽으로 나와 남도회관 앞으로 빠져나간 사실을 목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를 도청 본관 3층에서 내려다 본 기자는 시위를 지휘한 여성이 신변에 위험을 느꼈다면 시위대열 쪽으로 빠져나갈 것이지 왜 계엄군 쪽으로 빠져나가는가 하며 순간 의아하게 생각했다. 풀리지 않는 두 번째 의문이다. 이 블루진 바지를 입은 여자의 신원은 알 길이 없다.
  광주 출신 유지들의 강경진압 완화 건의가 받아들여져 계엄군의 시위진압이 공세보다는 수세의 입장에 있었던 20일 시민들은 한결 마음에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은 18, 19일의 강경진압과정에서 이유없이 두들겨 맞았던 버스와 택시 기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후가 되면서 무등경기장에 택시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택시기사들은 그날 밤 집단시위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것이 광주사태의 절정이 되고 만다. 광주시민들은 이날, 밤을 새우며 시위를 선동하던 갸냘프면서도 애절한 한 여성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대입니까」
  「경찰관 아저씨들은 우리의 편입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도청광장을 잠시만 비워주면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물러가겠습니다」
  「경찰아저씨, 최루탄을 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맨주먹입니다. 그러나 꼭 이깁니다」
  「끝까지 물러서지 말고 광주를 지킵시다」
  용달차에 매단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젊은 여성의 톤 높은 목소리는 격렬하면서도 호소력을 지녔었다. 시민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 선동 구호에 잠을 설친 사람도 많았고, 집에서 뛰어 나와 거리의 시위대에 합세한 사람도 많았다.
  도청과 교도소를 제외한 온 시가는 시위대의 수중에 떨어져 온통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청 앞 광장에서는 도청 쪽으로 진입하려는 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위대의 차량에 깔려 4명의 경찰관이 희생당한 것도 이날 밤이었다. KBS와 MBC가 불에 탄 것도 이날 밤이었다. {시민들로부터 세금을 받아 국민을 공격하는 군을 양성하는 데 쓰여진다}는 이유로 광주세무서에 불을 지른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사태동안 파출소와 도청 차고를 제외하고는 방화사건은 이 3건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어찌됐건 이날 밤의 시위는 광주사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시위의 선두에 한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이날 밤의 히로인이었다.

혜성처럼 나타난 여성지휘자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의 진행에 어떤 조직적인 체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짜여진 계획에 의해 터진 것이 아니라 강경진압에 대한 반발에서 폭발했기 때문에 시위를 주도할 조직이나 지휘자가 없었다. 그때 가녀린 한 여자가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여성 [지휘자]에게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번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행동이 나타났다. 심지어 계엄군이 완전히 철수한 후인 24일 이 여인은 학생들에 의해 간첩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아 계엄사에 넘겨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풀려 나왔다.
  그날 밤에 알려진 그녀의 이름은 전옥주. 그러나 전옥주는 본명이 아니다. 다른 이름이 있다. 여기서 기자가 그녀의 본명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녀의 신상이 아직도 파악되지 않고 있는 데다 만의 하나 그녀에게 진심이 있었다면 그 진심이 오히려 손상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녀도 그 뒤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나왔다.
  [전옥주]. 그녀의 당시 나이는 32세. 조선대 무용학과를 중퇴하고 마산에서 무용학원을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자신이 밝혔었다. 그런데 {고향인 광주에 있는 동생이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울분과 분노를 참지 못해 시위에 앞장 선 것}이라고 본인은 말했었다.
  그러나 적어도 20일까지는 희생자의 수가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씨 성을 가진 희생자는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나이 32세. 비록 미혼이라고는 했지만 30을 넘은 여자라면 어느 정도 두려움도 알고 이성이 앞서는 나이다. 설사 동생이 희생당했다 해도 30을 넘긴 미혼여성이 그토록, 혼신의 힘을 쏟아 시위를 선동한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었다.
  그녀의 선동실력은 프로급이었고 {세무서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다}는 등 과장이 많았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북에서 보낸 사람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 것이다.
  시위로 20일 밤을 새운 시위대는 다음날인 21일 아침 희생된 1구의 시체를 리어커에 싣고 가톨릭센터 앞길에 나와 또 다시 시위를 시작, 관광호텔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 시민들은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고 있었다. 그들은 장형태 도지사와 사태수습을 위한 담판을 벌이기 위해 대표를 뽑아 도청으로 보냈다. 이때의 연락 대표는 조선대 법과 1년 김범태, 전남대 상대 3년 김상호군 등 4명이었다. 이 대표 중에는 여자는 들어 있지 않았다.
  대표들은 시위대의 맞은 편 도청 쪽에 도열해 있던 계엄군 대열을 옆으로 두고 도청으로 들어갔다. 이때 계엄군지휘관인 두 명의 중령은 학생들과 지사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면 자신들도 계엄분소장에게 건의해서 협의사항이 꼭 성사되도록 하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 지사는 마이크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쉽게 나타나지 못하고, 대신 구용상 광주시장이 시위대 앞에 나타나 육성으로 자제를 호소하고 있었다. 이 시위대의 앞에서 블루진 바지를 입은 여성이 시위를 리드하고 있었던 것.
  시위대와 진압군의 충돌은 12시 이후까지 미뤄졌다. 그러나 10시10분 뒤쪽에 있던 계엄군에게는 실탄이 이미 지급되고 있었다.
  실탄을 지급받은 3개대소의 병력은 곧 맨 앞쪽에 있던 대열과 대치됐다. 그리고 계엄군과 50m쯤 간격을 두고 있던 일부 학생들은 칼 카빈소총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아세아 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장갑차와 차량들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학생들과의 대화가 성사되기 어렵다는 것을 간파한 장지사는 헬기를 타고 {여러분의 요구는 모두 관철하겠습니다. 모두 해산하여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방송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시위대 맨 앞쪽에 있던 블루진 바지의 여성 지휘자가 계엄군 대열 오른쪽, 지금의 [광주일보]쪽으로부터 계엄군 사이를 뚫고 나와 광장을 거쳐 남도회관 앞 쪽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데모대 쪽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진압군 사이를 빠져나갔을까. 또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녀는 누구일까. 아무리 해도 의문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여기서 그 블루진 바지의 여성 지휘자와 전날 밤 시위를 리드했던 [전옥주]가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본인 이외는 아무도 모른다.

<애국가와 함께 시작된 총성>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때를 맞춘 듯 따따따 따따따 요란한 총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 동안 산발적으로 몇 발씩의 총성이 울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처럼 일제히 총성이 터져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애국가가 발포명령이었을까? 이것이 기자가 가졌던 세 번째 의문이다.
  물론 이때의 발포는 사전예고성을 띤 듯 공중을 향해 발사되어 주변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 총성이 광주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임에는 틀림없었다.
  이에 앞서 12시58분, 당시 [전남일보](지금의 [광주일보])앞에서 50m 간격을 두고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군중들이 갑자기 광성관광 버스 2대와 장갑차로 계엄군을 밀어 붙여버렸다.
  대치상태는 순간적으로 무너지고 미처 피하지 못한 2명의 계엄군이 수협 도지부 앞에서 시위대의 장갑차에 깔려 즉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차량에 올라탄 시위대원들은 도청 앞 분수대를 한바퀴 돌고 학동 쪽 길로 빠져나갔다. 이때 버스를 향해 몇 발의 총격이 가해졌다. 그러다가 시위대원의 버스와 장갑차에 밀려 상무관 쪽으로 잠시 물러섰던 계엄군이 다시 도청 광장을 장악하는 순간 애국가가 울려 퍼진 것이다. 이때가 오후 1시 정각. 콩 볶듯한 총성이 쏟아졌다.
  이날 오전 10시45분 공중에서는 장형태도지사가 경찰헬기를 타고 {여러분의 요구를 모두 관철토록 하겠으니 해산하십시오}라는 간절한 호소를 하고 있었고, 군헬기도 {연행자는 모두 석방할 것이니 모두 해산하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시내는 온통 헬기에서 나오는 이 스피커 소리로 덮여 있었다. 학생들도 금남로 4가 중앙교회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 {어떠한 폭력과 방화도 막아야 되겠습니다. 광주시민의 긍지를 살립시다}며 자제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관광호텔 앞에서 50m 거리를 두고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원들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전진, 계엄군이 뒷걸음으로 약간씩 물러서는 데도 간격은 자꾸 좁혀져 얼굴을 맞대고 서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11시45분, 시위대 몇 사람이 [전남일보] 뒤쪽에서 불을 지르려 하자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여 방화기도는 이단 좌절됐다. 그러나 1백여 명은 남도예술회관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다시 12시55분, 학생들은 {[전남일보] 봐 버릴테니 길을 좀 비켜달라}고 계엄군에게 요구하면서 밀어닥쳤다. 어쩔 수 없었는지 길이 열렸다. 학생들은 전남일보사 셔터를 부수기 시작했다.
  사태가 긴박해지자 이 건물에 세를 들어 있던 외환은행 광주지점 직원들이 {이 건물이 불타면 건물주보다 입주자들의 피해가 더 크다}고 호소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은 밉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민간인을 봐서 포기한다}며 물러갔다. 그리고 나서 곧 버스와 장갑차가 대치대열을 밀어붙이게 된다.
  발포가 시작되자 군중들은 다소 동요의 빛을 보이는 듯했으나 1시10분 1천여 명의 시위대가 국민은행 광주지점 앞에 집결했다. 이때부터 계엄군은 장갑차 1대씩을 금남로와 광주여고 쪽으로 돌려놓고 사격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왜 21일에 계엄군이 철수했을까

  국민은행 앞 충장지하상가 4거리 큰 길, 젊은 시위대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쳐댔다. 일제히 사격이 가해졌다. 4, 5명이 쓰러지면 대원들은 사상자를 끌어내고 또 다시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친다. 또 총격이 가해져 몇 사람이 쓰러진다. 같은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장지사는 이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도청 마이크를 통해 자제를 호소하고 귀가를 종용했다. 공중에서는 군 헬기가 해산을 종용하는 전단을 살포하면서 {연행된 학생·시민은 여러분의 요구대로 오후 4시 모두 석방합니다}고 방송했다.
  그러나 이들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태는 이미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 버렸다. 학생들은 {우리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 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기도 없습니다. 다 죽을 때까지 우리의 의사를 관철해 갑시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있습니다}라고 방송하고 있었다.
  오후 2시40분. 국민은행 앞에는 다시 수천 명이 운집했고, 곧이어 계엄군은 도청과 주변 건물이 옥상으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사격을 가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도청을 폭파하기 위해 학생들이 TNT를 장치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오후 5시25분, 장지사를 비롯,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고 있던 간부들이 떠나고, 5분 후 계엄군도 철수하게 된다.
  왜 계엄군이 철수했을까. 그 동안 계엄군은 금남로를 꽉 메운 시위군중을 상대로 1개 소대병력만으로도 막혔던 큰길을 뚫는 [실력]을 보였다. 그리고 계엄군이 철수할 무렵 도청 주변에는 아무도 얼씬거릴 수 없었다. 시내에 투입된 계엄군의 규모는 1천 명에 달한다는 풍문이었고 시의 외곽에는 이미 ○○사단 병력이 배치되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비록 학생들이 무장을 하고 TNT로 도청을 폭파하겠다고 엄포를 높고 있었으나 계엄군은 그런 엄포에 겁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학생들이 기관총을 전남의대 부속병원 옥상에 장치해놓고 도청 쪽을 공격할 자세였으나, 이 기관총으로는 사정거리로 볼 때 도청 안에 주둔한 계엄군에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계엄군은 후퇴했다. 최정예 특수부대로 중앙의 계엄군이 [반란]에 밀려 지방정부의 상징인 도청을 포기한다는 것은 단순한 사태가 아니다. 중앙정부가 그 지방의 통치를 사실상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학생들의 무모한 기관총 사격이 인근 주민들에게 줄 피해를 막기 위해 물러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계엄군과 시위대의 물리력의 차이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만약 이때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면, 27일 새벽의 수습작전에서 발생한 많은 인명피해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끝까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복면부대]의 정체>

  독자들은 광주사태 당시 복면을 한 이른바 [시민군]들이, 탈취한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는 광경을 텔레비젼 화면이나 신문의 사진에서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이 [복면부대]는 18일과 19일의 시위, 특히 21일 시위대가 계엄군의 정면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만 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이 등장한 것은 계엄군이 철수하고 도청이 학생들의 수중에 들어가 이른바 [광주공화국]시대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이 과연 [민주화]를 외치는 순수한 시위대원들이었을까. 이것이 기자가 갖는 네 번째 의문이다.
  학생데모대들은 처음부터 떳떳했다. 수사기관의 카메라에 찍히는 것도, 붙잡혀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4, 15, 16일의 평화적 시위 때는 더더구나 복면을 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20일 운전기사들이 차량을 몰고 나왔을 때나 21일 관광호텔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해 협상을 시도할 때도 복면을 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21일 오후 계엄군이 도청에서 빠져나가고 학생들이 들어간 후부터 시위대원 중에는 복면을 한 사람이 부쩍 많이 눈에 띄었다.
  만약 복면부대가 수사기관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나중에 검거되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경찰이나 정보기관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18일부터 21일까지는 왜 없었을까. 왜 기자의 카메라조차 학생들로부터 의심받아 셔터를 누르기도 어렵던 22일 이후에 복면을 한 사람이 많았을까.
  이들 복면부대는 한결같이 강경한 입장을 취한데다 적극적으로 시위를 선동했다.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과격한 언사를 거침없이 썼다. 이들은 수습대책위원회가 주최하는 도청 앞 광장의 수습회의나 대책회의에는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기자는 24일 오후 2시쯤 당시 도청 2층에 있던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 김종배씨(35)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서 시민군의 무기를 반납하자는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을 때 학생측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위원장대신 부위원장을 만났던 것.
  이대 김씨는 {우리는 총을 반납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찰과 군이 들어와 질서를 회복하면 맨손으로 금남로에 나가 다시 민주화를 외치겠습니다}며 총을 회수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때만 해도 김씨는 온건파였다. 이로부터 수시간 후 그는 조건부 강경파로 선회하게 되지만, 본심은 어떤 조건만 받아들여지면 총을 반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무기 반납 제지한 [복면부대]

  그런데 총을 회수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김씨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납은 안된다는 강경파들이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가로막는 이들 강경파의 거의가 복면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김씨는 이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어쩌지 못하고 다시 2층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복면의 강경파들은 이렇다 할 수습안을 내놓지도 않았다. 무조건 반대였다. 때문에 이들은 사태를 악화시키려는 [불순세력]이나 [배후세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당시 기획위원이었던 이양현씨(37)의 말을 들어보자.
  “잘은 모르지만 뒤에 검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복면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불순세력이 침투해 들어와 복면을 하고 행동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 같은 상황에 대해 우리도 어느정도 대비하기는 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을 가려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광주사태 이후 과격한 정치집회에는 으레 복면부대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5·3인천 시위에서 그러했고,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대회 난동사건에서 그러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복면을 했고, 손에는 각목이나 몽둥이가 들려졌다. 인천시위에서는 민주세력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었고, 민주당 창당대회에서는 열렬한 신민당원으로 자처했다.
  물론 복면부대가 모두 그런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21일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의 광주는 객관적으로 무정부의 상태였다. 이미 정부가 없는 상태, 그것은 엄격하게 [내란]의 상태다.
  더구나 시위대는 무장을 했다. 정부가 있을 때 그 정부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는 것과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내란]에 가담하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복면을 한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차이를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계엄군의 철수 후 사태의 수습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강경하지 않았다. 무기를 반납하고 시의 외곽을 에워싸고 있는 계엄군과 협상할 것을 시도했다. 복면부대는 이 수습노력을 저지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격렬한 선동을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복면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가 만약 [불순세력]으로서 외부에서 들어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복면을 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선량한 시민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과연 몇 명이 희생되었는가>

  마지막으로 광주사태때 숨진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계엄 사령부는 광주사태 수습작전을 끝내고 며칠이 지난 5월31일 [광주사태의 전모]를 발표하면서, 민간인 1백44명, 군인 22명, 경찰관 4명 등 모두 1백70명이 숨졌다고 밝히고, 그 뒤 얼마 있다가 1백89명으로 늘어났다고 추가로 발표했다. 또한 85년 6월 임시국회에서 윤성민 국방부장관은 의원들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통해 2명을 추가, 1백9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 숫자가 공식적인 통계로 지금까지 통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광주에서 사태를 겪은 사람들은 이 숫자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사태기간 동안 조선대 민주 쟁취 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호소문을 통해 학생들은 2천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숫자에는 5월27일 수습작전 과정에서 숨진 사람은 포함되지 않는다. 광주사람들은 아직도 이 2천명을 들먹인다. 정부가 발표한 1백91명과 학생들이 주장하는 2천명은 거리가 멀어도 보통 먼 게 아니다.
  그런데 85년 11월 정기국회에서 당시 신민당의 문정수의원(현 민주당)은 81년 광주시가 발행한 [통계연보]에 나타난 80년 6월의 사망자 신고수를 놓고, 광주사태로 희생된 사람이 2천명이 되는 것이냐면서 학생들이 주장하는 2천명설을 뒷받침하고 나섰다. 매월 평균 사망자 신고수가 2백명선인데 하필이면 사태가 있던 다음달인 80년 6월 인구가 5월 인구보다 2천6백27명이 증가했다는 증감표시를 잘못 적어 넣은 분명한 오식이라고 해명했다. 이 해프닝(?)은 당시 광주사태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면 누구나 귀추를 주지한 하나의 사례였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사태 수습 직후 도청에 설치된 실종자 신고소에 신고된 내용이 그후 확실하게 공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신고소 설치는 5월29일 장형태 도지사 후임으로 부임해온 김종호 지사가 출입기자들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민심수습이 시급하다고 전제, 연행자를 빨리 돌려보내거나 그 명단만이라도 공개하여 자기 자식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한편 실종신고를 받아 사망자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기자들이 건의한데서 비롯되었다.
  김지사는 이날 오후 계엄분소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여 기자들의 요구를 건의함으로써 18, 19일 이후 집에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의 생사 여부를 놓고 전전긍긍하던 가족들에게 우선 소재를 알게 해주었고 이 연행자 명단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에 대한 실종신고를 받기 위해 도청에 실종자 신고소를 설치했었다.
  이날 김지사는 ① 초기 진압과정의 잘못을 시인하는 유감의 뜻을 표시해 줄 것 ② 사상자에 대한 정확한 숫자를 밝혀줄 것 ③ 연행자를 관대히 처분하고 그 명단을 발표해 줄 것 ④ 구호금품은 필요없으나 주려면 발표하지 말고 줄 것 등 4개항을 건의했다고 기자들에게 공개했었다.
  그런데 그때 이 신고소엔 몇 사람이 신고되었는지 신고된 내용이 지금까지 명확하게 발표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해결]의 장애물 사망자수

  계엄사는 5월31일의 발표문에서 수습작전이 실시되기 전에 1천7백40명, 그 후에 5백25명 등 모두 2천2백65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5·27전에 연행된 1천7백30명 중 대부분은 강경진압이 실시된 18, 19일에 연행된 사람들이다. 광주출신 유지들의 건의로 20일부터는 강경진압을 완화했을 뿐 아니라 연행도 거의 하지 않았고, 21일 이후에는 연행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 연행된 사람들은 거의 시위하는 관련이 없는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연행과정에서 무참하게 난타당해 그 중에는 생명이 위급한 상태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시 외곽에 있는 시설에 수용된 후에도 계속 무서운 질타와 기압을 받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또 쓰러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찌되었을까.
  사태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광주에는 많은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다. 이때의 유언비어 중에는 시체들이 트럭에 실려 북쪽으로 가서 벽제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느니, 많은 시체들이 암장되었다느니 하는 유언비어도 있었다. 출처도 불분명하고 확인도 할 수 없는 유언비어들이었다.
  어찌 됐든 1백91명과 2천명의 거리는 너무 멀다. 이것은 정부로서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 85년 8월 정부는 사태 당시의 행불자를 신고하라고 했다. 그러나 신고자는 8명이었고 그나마도 긎중 2명만 이 사태관련자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그에 대해 광주인들은 지금은 신고할 때가 아직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2천명은 뭐고 1백91명은 뭔가. 왜 광주사람들은 계속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는가. 이것이 광주사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임이 분명한 이상 사망자 숫자에 대한 거리를 좁히는 것이야말로 풀어야 할 난제 중의 난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