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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80년대의 민중문화예술운동. 윤재걸(신동아, 1984. 10)

본문

80년대의 민중문화예술운동



윤재걸<동아일보사 신동아부 기자>

  70년대를 비극적으로 마감한 10·26이후, 우리 사회는 여러 부면에서 극심한 변화와 갈등을 경험하였다. 80년대 진입 후 중반기로 접어드는 오늘날 이러한 변화와 갈등들은 점차 하나의 [꼴]을 형성해가면서 뭔가 나름대로 정리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변화와 갈등을 경험한 사회의 여러 부면중 특히 우리 문화·예술계가 겪은 몫은 여타의 어느 부면보다도 의미있는 대목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직 평가할 단계에는 이르지는 못했다손 치더라도, [민중]을 공약수로 한 이러한 문화인식은 확실히 의미있는 수확이요 발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80년대에의 진입과 함께,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이같은 새로운 문화예술운동은 어떤 의미에선 지금까지 전개되어 왔던 지식인문화운동에 대한 하나의 각성이요, 반성의 차원을 띠고 있기도 하다. 70년대부터 이미 개화되기 시작한 민중예술운동의 연장선상에 자리한 이러한 새로운 문화예술운동은 몇 단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구체적인 이념의 도출과 방법론을 터득, 이젠 어느 정도 자체이론의 정립기에 들어선 듯한 감을 주고 있다.
  그 결과, 지금까지의 민중예술운동이 지녀왔던 현실괴리의 관념성을 지양하고, 민중들의 생활현장에의 투신을 통한 보다 구체적인 생활예술운동이 대두되기에 이른 것이다.

민중과 현장이 공약수

  이를테면 문학의 경우, 70년대의 일부 계간지를 중심으로 전개돼 왔던 민족문학·민중문학이라는, 다분히 지식인중심의 문학적 논의를 반성함과 동시에, 민중의 삶(현장)을 주제로 한 실천적인 작품들이 그 주조를 이룸으로써, 문학 역시 삶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미 70년대 중반에 [현장의 역사성]을 인식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그룹들은 [실천문학]이라는 자체 발표 무크지를 통해 {실천적인 문학인의 자제야말로 참된 문학인의 길}임을 역설함으로써 어느 예술부면보다도 앞선 자세를 보여주었다.
  최근 논의가 활발한 미술계에 있어서도 이 같은 민중성 기조의 접근은 예외가 아닌 듯하다. 주로 젊은층이 주역이 된 미술인들이 지금까지 일반화 돼 있던 서구적 발상과 인식을 지양하고 우리의 삶을 바탕으로 한 생활미술을 주창함으로써, 민중문화예술운동에 한 몫을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현실과 발언], [두렁]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와 같은 그룹들과, [삶의 미술전], [실천그룹], [임술년], [토해내기], [젊은 의식], [시대정신] 등의 이름을 내건 전시전을 통해서도 활발하게 나타난 바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또 하나의 부면은 [노래운동]이다. 민중문화예술운동이 결국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을 지향한 데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노래야말로 이 같은 목적 달성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이다.
  즉 노래라는 말은 원래 놀이와 함께 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형으로서, 노는 행위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서 노는 행위 즉 놀이는 일상적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새로운 노동의 준비, 이를테면 노동의 재창조과정으로서의 놀이라는 것.
  결국 노래라는 말 자체가 노동-민중적 삶을 전제로 하며, 동시에 해방과 창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실천문학사 간. 문학과 예술의 실천논리. p.184 참조).
  얼마 전 창립된 [민요연구회](회장-신경림 시인)는 이 같은 노래의 중요성과 함께, 서구적 음악의 압도로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민요의 발굴·보전과 함께 민중적 삶에 기초한 고유의 정서와 감수성, 문화적 생명력이 담긴 [우리 시대의 민요]를 창조하겠다고 포부를 피력한 바 있다.
  지금껏 서구적 문물의 대표적인 본보기로 치부돼오던 영상매체에 있어서도 80년대 이후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다.
  8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서울영화집단]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이 같은 운동 역시 [건강한 민중성의 획득, 공동체성의 획득을 통한 새로운 영화운동의 확산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오늘의 한국영화에는 민중의 울분도 서민의 애환도, 창부나 호스티스의 방황도 존재하지 않고 다만 성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공동체적 삶을 기원

  연극계에도 이 같은 새로운 움직임이 거세게 불어 닥치고 있다. 문학부면과 함께 가장 연륜이 오래된 이 부면의 새로운 운동은 70년대 중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어난 탈춤놀이를 시발점으로 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연희자와 관중들이 함께 얼크러짐으로써 동일체 의식 속에서 이뤄지는 마당극은 공동체적 삶에서만 가능한 자발적 어우러짐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연극계는 마당극의 속성을 바탕으로 무대라는 공간성을 뛰쳐나와 새롭게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전통연희를 앞세우면서 그간의 서구 번역극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민중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을 담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 공동창작과 공동참여로써 공동체적 삶을 확보하려는 마당극은 이제 한국연극계에 새로운 각성을 안겨주면서 나름의 새로운 변환에 직면하고 있다.
  이 밖에 무크지가 범람(?)하고 있는 출판문화부면과 여론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팜플렛언론] 역시 [민중언론]이라는 이름아래 그 판도를 점차 넓혀 가고 있다.
  80년대 진입 이후 출판문화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는 [무크]바람을 들 수 있다. 잡지(magazine) 와 단행본(book)의 합성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들 무크는 단행본이나 신 서류도 아니면서, 동시에 단행본의 장점과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월간·계간잡지의 장점을 아울러 살릴 수 있는 2중매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80년대의 [무크]출판형태는 잡지발간이 어려운 현실적인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이 분야 지식인들의 안간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울러 이같은 무크가 붐을 이룬 배경에는 이 매체가 갖고 있는 강한 현장성과 기동성 유격성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대표적인 무크로는 4호째 나온 [실천문학]과 함께 르뽀시대, 삶의 문학, 한국문학의 현단계, 시대정신, 한국사회연구, 제3세계연구, 민중, 노래 등이 있다.


각종 유인물과 팜플렛이 제도권 밖에서 새로운 언론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도 주목된다. 혹자는 이를 일컬어 지하언론 또는 민중언론이라 이름하기도 하지만 그 명칭이야 어찌 됐건, 이 역시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제약 여건이 만들어낸 일종의 일탈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들 유인물과 팜플렛이 담고 있는 현장의 소리를 기존의 언론기관이 취재·보도할 수만 있다면 구태여 이러한 지하언론이 존재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유신시대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서 나온 [인권소식](주간) [뉴스레터](월간) 등은 지식인 그룹과 반체제인사들이 즐겨 찾는 정보매체였으며, 이밖에 기독교사회문제 연구원이 내는 일련의 자료들과, 기독교 민중교육연구소가 내는 민중문화,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의 [공해연구],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기획·발간하는 [민주화의 길], 최근에 발족된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 [민중문화]등은 대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과 친숙한 이름들이다.
  어느 전직기자는 {민중언론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고민의 축소판}이라면서, {민중이 주체가 되는 사회를 위해 민중 언론은 인권운동의 기초작업을 다지고, 그 실천역량을 고양시키는 광장}이라고 그 성격을 풀이했다.
  아무튼 70년대 유신체제 이후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각종 유인물형태의 [지하언론]매체들은 80년대 이후 급증하는 [수요]에 따라 [공급]의 폭도 함께 확장시켜 나가는 추세에 있다.

제 3 세계적 문화인식에 기초

  문학·미술·연극·영화·노래 등 각종 문화예술계 부면에 걸친 이 새로운 운동은 원천적으로 민중이라는 당대의 삶의 주체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민중에의 자각은 문화예술에 있어서 어느 부면이나 마찬가지로 민중 스스로가 객체가 아닌 주체자 여야만 한다는 공통된 논리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예술활동은 일과 놀이라는 공동체적 삶의 연속과정과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문화예술이란 특정기능을 보유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함께 일하고 함께 어우러져 피로를 푸는 민중들의 공동생활을 그 자체로 봐야 한다는 것. 그래서 문학이 됐건, 미술이 됐건, 또는 연희가 됐건, 민중 스스로가 창조과정에 함께 이입됨으로써만 완전한 민중예술이 꽃피어날 수 있다고 운동의 전위들은 주장한다. 이들이 굳이 삶의 예술이라는 주장하는 소이도 바로 거기에 있는 듯이 보인다.
  한편 80년대의 새로운 예술운동을 언급함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점은 이 운동이 가지고 있는 제 3세계문화운동과의 연대감이다. 그들은 지난 81년 11월 일본동경의 외곽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화회의(약칭 AALA)에서 논의된 제3세계의 문화운동을 눈여겨 본다.
  이 회의 참석자들의 기본적인 시각은, [독점자본주의의 성립과 함께 제3세계의 대중문화는 거대 자본가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서구상업주의적 문화로 전락했고, 그에 따라 전통적 민중문화 또는 기층문화는 의사신화적인 축제형태나 박물로 변했으며, 이른바 선진제국의 문화적 위기가 신식민주의의 경제지배도구로서 침투, 제3세계의 문화적 위기를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3세계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민중적인 연대감 아래 전통적인 공동체를 회생시키는 한편, 빈사상태의 기층문화를 활성화시켜 가야만 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자국내의 갈등과 문화적 위기가 결국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신식민주의 침략에 기인한다는 데도 아울러 동의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새로운 문화예술운동은 이러한 민중·민족문화예술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 결과, 이 문화예술운동은 구호문화에 대한 실천문화로서,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문화로서 기성문화에 대한 진보문화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실천하는 문학>

  70년대의 마감과 함께 한국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어왔던 계간지 [창비]와 [문지]가 폐간된 이후, 이땅의 문학활동은 오히려 보다 참여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그 영역 역시 훨씬 확장되는 계기를 맞았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창비]를 통해서 70년대 내내 논의돼 오던 리얼리즘문학과 민족문학은 이 잡지가 폐간되는 비운을 맞으면서 오히려 제 3세계문학에로의 진입을 보았으며, 그 결과 [문학의 실천]이라는 대명제를 보듬어 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1966년 겨울호로 첫선을 보인 한국최초의 문학계간지인 [창작과 비평]은 통권56호째인 1980년 여름호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백락청, 염무웅, 김윤수 등이 주도해 온 이 계간지는 문학의 현실참여쪽의 후견인 노릇을 자청, 한국문학에 있어서 리얼리즘의 본격적인 진전을 낳았으며 이러한 참여적 체질은 자연히 70년도가 안고 있던 비인권, 반정의적인 사회현실에까지 개입, 마침내 민주화를 향한 문인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태생

  유신체제하에서 문인들이 사회정의를 겨냥, 최초의 집단행동을 보여준 것은 1974년 1월 7일 고은, 이호철, 백락청, 박태순 등이 주도한 문인 61명의 개헌 서명운동이었다. 그 뒤 1974년 11월 18일 고은, 백낙청, 이호철, 신경림, 박태순, 구중서, 천승세, 한승헌 등의 문인들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고 대표간사에 고은씨를 선출하였다. 이들이 발표한 [101인 선언]에 따르면 ①사회부조리는 정치가의 독단이 아닌, 전국민적인 지혜와 용기에 의해 극복돼야 한다. ②자유민주주의 정신과 절차에 따른 새로운 헌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등의 결의문을 채택한 후, 세종로에서 데모에 돌입, 그 자리에서 고은 이문구 이시영 송기원 등 7명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발족 이후 [165인 선언], [민족문학의 밤] [구속문인을 위한 문학의 밤] 등 이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인민주화운동의 한 몫을 담당해오면서, 80년대 진입 이후엔 회원들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실천문학을 무크형태로 창간, {역사에 던지는 목소리}(80년 3월) {이 땅에 살기 위하여}(81년 11월) {말이여 솟아오르는 내일이여}(82년 11월) {삶과 노동과 문학}(83년 12월) 등을 발간해 오고 있다.
  -실천은 문학 자체의 실천적 형상화뿐만 아니라 문학과 동시에 실재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실천적 양심의 전형화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의 문학에서 실천이란 명제는 문학이 정치사회 또는 예술의 전영역을 비롯하여 사회구원의 종교, 민중철학, 모든 인간화의 사상, 철학에 대해서도 문학의 모든 힘을 전천후적으로 기울여야 쟁취할 수 있는 창조의 명제이다. 실로 오랜 동안의 고행과 시험 그리고 싸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문학을 참다운 문학으로 전환하는 데 반대하는 모든 악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실로 적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하나의 개념을 이룩한 것이다. 그것이 설천이다.
  이상은 실천문학그룹의 실질적 리더나 다름없는 시인 고은이 천명한 약간 난해한 [실천]의 개념풀이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문학이 생동하는 전인격적 삶의 올바른 자세까지도 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문학이 다만 손 끝에 머문 문재에 그치지 않고 사회정의와 인류적인 양심에 기여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양식과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실천문학그릅의 본거지는 마포구 공덕동 로타리 부근에 소재한 [실천문학]편집실. 실천문학그룹은 이 무크지를 얼마전 대표였던 박병단씨부터 인수받은 뒤, 운영체제를 재정비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실천문학사 대표에 작가 이문구씨를, 주간에는 작가 송기원씨를 각각 선임하였으며, 경영전반에 관해 자문역을 맡고 있는 7인 운영위원회를 조직, 보다 활성화된 전도를 기약하고 있다. 7인 운영위원의 면면을 보면, 작고 이호철, 김주영, 시인 이시영, 조태일, 극작가 안종관, 오종우 그리고 당연직으로서 대표인 이문구씨 등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실천문학]을 비롯한 단행본류의 편집기획에 참여, 바람직한 편집방향과 내용을 제시하는 편집위원회가 구성돼 있는데, 시인 고은, 김정환, 작가 박태순 그리고 대표로서 당연직인 이문구 씨등을 포함한 4인이 그 주인공들이다.

민중과 함께하는 [행동문학]

  둘째로 한국문학에 있어서 새로운 흐름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양상으로서 일단의 젊은 동인그룹을 들 수 있다. 이들 역시 민중적인 삶을 기저로 한 [행동문학]을 표방함에 있어서는 앞의 실천문학그룹과 별로 다를 바가 없겠으나, 개인단위의 문학행위를 지양하고, 공동체적인 삶의 일환으로서의 문학행위를 주창한다는 점에서 다소간 차이점을 보인다.
  소집단 문화운동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는 이들 주요 동인그룹으로는 [시와 경제] [오월시] [민중시] [반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동인들의 명칭만 보더라도 이들이 표방하고 있는 주의·주장이 쉽게 드러나는 터이지만, 특히 이들이 출범할 당시의 최초의 선언문을 보면 동인체가 안고 있는 문학적 취지가 어디에 있는 가가 보다 극명하게  표출된다.

  [시와 경제]. 이 몰상식한 표제는 [시와 경제] 동인들이 지닌 의식의 지층이 어디에 있는가를 암시한다. 시는 한 시대의 문화를 요약하고 수렴한다. 시작업의 궁극적 목표라면 사람들에게 구원의 언어를 제시하는 일일 것이다. 경세제민이라는 경제 최초의 뜻에 동의한다. [시와 경제] 동인들은 그러므로 그들의 말과 몸이 이 시대에 대한 증언으로서 영원히 현장에 있기를 바라고 있다….
  [시와 경제] 동인들은 이 땅에 대한 책임, 오늘의 80년대 현실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느낀다. 이 시대의 가난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누구나가 벗어나야 할 공통의 질곡이다. [시와 경제] 동인들은 우리의 가난이 민족사의 전개과정에서 빚어낸 분단시대라는 특수성에서 비롯됨에 합의한다….(1981년 12월 간. 시와 경제. 제 1집에서)

  이상의 선언문 일부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시와 경제] 동인들은 자신들이 빚어내는 시가 다만 언어의 조탁에 끝나지 않고 이 시대의 증언인 동시에 가난을 안겨준 분단구조의 치유에 기여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홍일선, 정규화, 황지우, 박승옥, 나종영, 김정환, 김사인 등 7인으로 출범한 이들 동인들은 81년 12월 제 1집에 이어 83년 6월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미래]라는 제목이 붙은 두 번째의 동인지를 발간했는데, 새로운 동인으로 선명한 시인이 합류하였다.

노동자·농민 주체의 [현장문학]

  최근의 한국문학에서 또하나 두드러지는 요소는 삶의 현장 그 자체가 곧바로 문학으로 승화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른바 [현장묵]으로 불리는 이 문학운동은 흔히 자각된 노동자 농민들 스스로의 문학을 가리 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을 주인공으로 한 문학 작품들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소설가라는 지식인에 의해 씌여진 이제까지의 노동자·농민소설들은 진정한 현장소설이 아닌, 소재만으로서의 노동자·농민소설들은 진정한 현장소설이 아닌, 소재만으로서의 노동자·농민소설에 불과했었다고 평론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작품도 당시로선 큰 충격을 안겨준 작품이긴 했으나, 끝내 지식인 시각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최근엔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1970년의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이래, 지난 10여 년간에 걸친 각종 민중교육프로그램과 지식인들의 현장투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자, 농민 스스로의 자각이 현저하게 진행되면서 문학부면에 있어서도 [자각된 민중]으로서의 노동자, 농민들의 살아있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 1976년 11월호 [월간 대화]지를 통해 [어느 여공의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석정남 양의 {인간답게 살고 싶다}(200매)와 [불타는 눈물](330매, 76년 12월호)이 발표된 이후 역시 같은 잡지에 노동자의 체험 수기적 성격을 지닌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광부의 생활체험수기인 이경만의 [광산촌], 평화시장에서 혹사당하는 어느 미싱사의 1일 체험수기인 민종숙의 [인간시장]과 송효순의 [서울로 가는 길]등이 76-77년에 걸쳐 발표되었다.
  최근에 나온 [실천문학] 4권도 [삶과 노동과 문학]이라는 부제가 시사해주듯이 분야에 대한 문학적 관심이 어느 정도 인가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근로자들의 글만 모은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돌베게 刊)라는 단행본이 나왔는가 하면, [삶의 문학] 제6집에선 농촌현장과 농민문학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분야의 이론가로선 젊은 문학평론가인 이재현을 들 수 있다. 그는 [문학의 노동화와 노동의 문학화]([실천문학] 제 4권)라는 글에서, [노동문학]과  [노동자문학]을 구분하고, 전자의 예로서 황석영의 {객지}, 윤흥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문구의 {우리 동네…}등을 드는 한편, 후자의 예로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어느 돌멩이의 외침], [서울로 가는 길], [비바람속에서 피어난 꽃] 등과 같은 노동자 스스로가 쓴 글들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문학운동을 위하여]([문학과 예술의 실천]93쪽)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앞으로의 문학은 철저히 아래부터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 문학은 철저히 아래로부터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 문학은 단지 문단지식인에 의한 민중을 위한 문학에 멈춰서는 아니 되고 민중에 의한 민중의 문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민주의 문학은 결코 추상적인 구호의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아니된다. 문단의 지식인과 문학적 현실에서 파악된 대중의 상호침투에 의해서 민중의 문학은 마련된다. 지식인에 의해 파악된 노동구조는 문학속에서 전형적인 현실로서 반영이 되어야 하고 민중이 몸담은 노동현실은 문학적으로 매개된 부정적 노동구조의 이해에 힙입어 개선되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열린 문학]

  한국문학은 지금 문학인 스스로의 사회과학적 훈련과 그에 따른 인식에 힘입어 점차 [열린 문학]에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느낌이다. 그 좋은 예가 노동자·농민 스스로의 관심어린 창작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익명을 통한 문학작품의 공유화가 점차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학행위가 참 삶을 기구하는 공동체적 소산으로 한 걸음 다가서고 있는 것을 뜻한다.
  시인 박영근씨의 지적을 들으면 이같은 관찰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근로자들의 [삶으로서의 문학]은 지금까지 진행된 개인화된 장인적 성격의 문학을 뛰어 넘으면서 마침내 삶과 문학이 함께 운동화되는 단계를 맞을 것}이라면서, 노동생활문화는 대체로 4가지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첫째, 그것은 바쁘고 고단한 현장생활속에서 부담없이 표현할 수 있는, 혹은 활용할 수 있는 매체를 통하여 행해지며 둘째로 보다 나은 현장생활을 위한 쓰임새로 작용하며, 셋째로 동료 사이의 막힌 인간관계를 소통시키고 또한 그것을 공동의 자리로 재미있고 자연스럽게 옮겨갈 수 있는 이야기성을 지니며, 넷째로 공동의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으로 활용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서의 문학형태는 우선 근로자들의 무의식적인 낙서, 일기, 편지, 수기, 함께 만든 이야기 등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

<삶의 미술>

  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미술계는 일단의 젊은 작가군들에 의해 새롭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깨어났다]는 표현은 그들 스스로의 다짐인 동시에 한국미술의 새로운 출발은 선언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1979년 11월, [현실과 발언] 그룹이 창립된 이래, 지난 4년 여 동안 이들이 앞장선 전시회만도 무려 1백30여회 이상 열렸으며, 연인원 1천여명이 넘는 작가들이 이같은 [새로운 미술운동]에 참여했다.

현장을 담는 [살아있는 미술]

  그렇다면 과연 젊은 작다군들이 벌인 새로운 미술운동의 요체는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깨어났다]고 그들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가. 우선 [현발]([현실과 발언]동인의 약칭. 젊은 미술인들은 흔히 이렇게 부른다)의 선언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또한 밖으로부터의 예술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격리시켜 왔고 심지어는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왔습니다…}(1979. 11).
  그들은 이같이 기존화단을 질타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물음 던짐으로써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암시해주었다.
  첫째, 현실이란 무엇인가?……
  둘째,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
  셋째, 발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넷째, 발언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
  미술평론가 최열은 말한다.
  {지금도 밖에 나가보면 극장간판이나 가게의 쇼윈도우, 차량의 채색……신문하단의 광고란을 매운 서구이미지의 파편들---. 어느덧 우리는 그것에 순응하는 노예의 시각을 갖게 되어서 당연히 미술은 생활과 동떨어진 전문가의 것이며, 다만 우리는 그것을 즐겨보는 수동적 대행적 입장을 지키면 된다는 비창조적 자세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같은 불만과 자기반성을 집약, 젊은 미술인들은 하나 둘 동인그룹을 형성해가면서 나름의 존재양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타 예술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선 [독점된 의식에 갇혀 있는 미술]을 버리고 대중과 함께 하는, [공동참여의 살아 있는 미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요체는 그런 의미에서 제 3세계인식에 기초한 문화예술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즉 서구 독점 자본주의체제에 의한 문화적 독점을 깨고, 예술의 민주화, 문화의 민주화를 꾀해야 할 것이라는 기본적인 발상에 뿌리하고 있는 것이다.

[산 미술]추구하는 [두렁]그룹

  그들은 {민중미술은 민중이 스스로 자기표현과 전달방식으로 미술을 대할 대 가능하며, 현재의 물리적 조건인 비민주성, 하향성, 획일성은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 이들은 민중미술, 살아 있는 미술을 위해선 제도교육을 통해 강제이식된 서구적 소재, 관념적 소재로부터의 해방을 꾀하는 동시에 우리 주변의 삶과 현실을 표현소재로 대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의 현실만이 아닌 과거의 전통적인 민속양식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전통적인 한국화를 재생시켜 보려는 노력이 여러 동인그룹에서는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민중미술]이라는 용어와 함께 [민족미술]이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의 슬로건이 횡행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특히 이들 젊은 미술인들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주장은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학교미술교육의 모순성과 비인간화 현상}이다. 한 마디로 제도교육상의 미술교육은 천재교육이자 아닐, 비인간적인 전문교육에 치우쳐 있다는 것.
  82년 10월에 창립된 [두렁]동인은, {……소수 특정인을 위한 엘리트 위주의 문화주의를 배격하고 소비적 상품문화에 대치될 수 있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미술운동을 지향}할 것이라고 자신들의 창립전에서 다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대중들과 같이 있으며, 생활현장의 사실성(리얼리티)과 문화적 역량을 가장 귀중한 작업기반으로 삼고 그 힘속에서 움직임을 찾겠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두렁]동인들은 대중과 함께 하는 [산 미술]을 전개하기 위해선 과거 문속미술의 전수, 교육이 절실하다고 보고, 그에 대한 프로그램을 다각적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제도미술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자생적인 작업이 선결문제인데, 이를 위해 [열린 공동작업]으로 전통시대의 민속미술, 이를테면 민화 무속화 탱화 풍속화 탈 민속조각 등을 통해 산 미술을 정착시켜 나가겠다는 것이다. 창립동인으로는 장진영(29세)씨를 비롯, 10인이 뜻을 같이 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지난 83년 11월엔 실천문학사를 통해 판화달력을 출간하기도 했다.
  판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최근의 미술계 추세를 보면 [판화의 시대]가 아닌가 할 정도로 커다란 판화가 유행하고 있다.
  특히 1983년 이후에는 여러 형태의 [판화학교]가 생겨나 [민중미술], [삶으로서의 미술]을 지향하는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이 천재의 전유물이 아닌 민중 공동의 예술이며, 참여(제작)자체에서 창조가 이뤄진다는 삶으로서의 예술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홍성담을 주축으로 한 [광주시민미술학교]의 미술교육프로그램은 이 방면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두렁]동인에 의해 이뤄진 [애오개민속미술교실], [십장생] 그룹의 변화그리기 역시 미술에 대한 대중의 친화력을 도모하는데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뜻있는 자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1백5인 참가한 [삶의 미술전]

  이밖에도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그룹은 82년 10월 덕수미술관에서 창립전을 개최, {인간의 소외감과 생활패턴의 변화를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으로 형상화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이보다 앞선 82년 3월에는 [젊은 의식전]이, 83년엔 [인간전] [인간, 그 어디에]전, [에스파]동인의 [끓는 혼], [실천그룹]전 등이 열렸고 84년엔 [토해내기]에 이어, 6월에는 105인이 참가한 [삶의 미술전]이 관훈미술관과 제3미술관, 아랍문화관 등에서 열려 이 새로운 미술운동이 그 절정에 달한 느낌을 주었다.
  미술평론가 유홍*은 이상과 같은 일련의 작업들에 관해 [이미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정착과정에 들어섰다면서 [현발]이후 80년대 젊은 작가들은 역사와 현실에의 개안, 일상적 가치의 회복, 대중성-민중성에의 각성, 새로운 구상에로의 관심의 이행 등 그야말로 리얼리즘의 복권작업을 꾀해왔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유씨는 80년대의 새로운 미술운동이 대체로 신구상형식을 취하면서, 현대의 소외된 인간상, 소비문화의 새로운 상황, 일상적 삶의 진실과 기쁨, 현대 사회에 대한 갖가지 풍자와 야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예감, 오염되지 않은 민중적 감성과 정서의 건강성, 오늘의 상황을 낳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등을 표현해낸 것이라고 요약하면서, 이들의 작업은 이미 실험을 넘어선 한 시대의 문화적 흐름으로 화했다고 규정했다.
  미술평론가 원동석씨는 미술계의 새로운 운동의 배경으로서 이상과 같은 분석외에도 [증가된 대학에서 배출하는 미술인구의 팽창]을 추가하기도 했다. 즉 미술인구가 너무 많이 배출된 나머지 자유 직업인으로서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고등실업자들의 불만의식이 누적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
  젊은 작가군들에 의한 이같은 미술계의 새로운 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만 있는 건 아니다. 상당수의 기성 미술가들은 [요즘 젊은이들의 위험한 발상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라면서, 이들의 운동이 {한때의 들뜬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학에 나가는 어느 화가는 이들의 [운동]이 현행의 미술교육을 저적으로 부정함으로써 학교미술교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전통 민속연희>

  한국 연극계는 언제부턴가 [마당극], 이라는 이단자(?)에 의해 마구 유린당하면서 젊은 층(특히 대학생층)의 관객을 계속 잃어가고 있다. 그와 함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하는 연극인들은 마당굿 형태의 전통연희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주도의 마당놀이패 [수놀음]과 전북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하는 마당놀이패 [백제마당]에 쏠린 관객들의 관심이 그것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백제마당]은 지난 81년 4월, 삶과 놀이의 일체화를 내세우면서 [1876-1894]라는 워크숍을 가진 이래, 계속 관객들의 호응에 값하고 있다. 이들은 출반선언에서 {…이제 우리는 한 시대와 사회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쌓여 가는 공통의 느낌을 우리의 놀이정신을 바탕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연극을 시도하고자 하며, 항상 역사적인 사실을 기본으로 하고 그 사실을 현재화하여 목격하고 증언하는 행동의 연극을 하고자 한다}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일체감 이루는 마당연희

  70년대 초부터 대학가를 휩쓴 탈춤놀이를 시발로 발흥하기 시작한 [마당 연희]는 이제 전환점에 들어섰다고 김성진씨는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첫째, 움직임의 주체가 대학생, 지식인으로부터 일선 생산 담당 층에게로 이전되고 있으며
  둘째, 전문적 성격을 띤 소수의 운동에서 다수의 생활인이 동참하는 운동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셋째, 탈춤에 국한되었던 인식 및 실천활동으로부터 풍물 민요 놀이 굿 그림 이야기 촌극 의식 전파매체 등의 다양한 예술장르와 대중매체, 나아가서는 전반적 문화현실로까지 확산된 인식 및 실천 활동으로서 발전과 함께, 표현매체와 예술장르가 총동원되는 대동놀음 및 구체적 일상생활문화로 확대된 인식 및 실천에로의 이행을 들 수 있다는 것.
  마당극은 민중극 상황극 혹은 광장극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여전히 마당극(굿)이라는 말이 주류를 이루는 건 이 말속에는 상황과 풀이(해방)가 한데 어우러지는 포괄적인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마당]이란 소외된 자들의 생활터전이요 바로 자신이 서 있는 현장 그 자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희완씨(청주사대교수)는 마당극이야말로 연희자와 관중이 분리되지 않고 한데 어울려 일체감을 이루는 데 가장 큰 특색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마당극은 젊은 세대들이 분단의 비극을 자신의 아픔으로 앓으면서부터 더욱 친숙해진 놀이형태가 됐는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마당극 속엔 속성적으로 하나로 뭉치는 힘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에 따르면 마당놀음을 분단된 조국이 하나되게 하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으로 보는 것도 그렇게 무리는 아닌 듯하다. 최근에 거세게 일고 있는 전통연희 역시 외세극복과 함께 분단극복의 실천논리가 배어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연극연출가인 임진택은 {우리의 전통민속연희와 현대적 의미로서의 연극을 하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형식과 내용을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짓는 작업이야말로 당면한 연극계의 과제일 것}이라고 보고, 마당극은 기성연극이 지닌 무대라는 특권적 공간을 거부함으로써 연극의 주제와 내용을 변경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양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임씨는 덧붙여서 {…유념해야 할 점은 진정한 민중문화에 있어서 모든 지침과 가치척도는 민중 자신의 생활체험과 미의식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고 못박고 있다.
  한편 연출가 유선정씨는 기성연극계 일각에서 일고 있는 {마당극은 단순한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 {마당극은 자신의 춤속에 연극과 무용과 편놀이와 제의와 음악과 문학 등 모든 예술양식을 내포하고 있음으로 해서 기존의 서구 연극보다도 오히려 더 넓은 개념을 포괄한다}면서 이들을 반박했다. 유씨는 {놀이가 연극에 아니다}라는 입장은 [놀이]에 대한 무지나 전통적인 민속연극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유씨를 비롯한 마당극 이론가들은 한결같이 {예술과 놀이를 분리시키고, 창조와 형수를 구별하여 연극인이 독점적으로 연극예술을 소유하고 관중은 단지 향수자, 관람자로만 전락시키는 것은 결코 마당극이 취할 바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공연정지 당한 [연우무대]

최근 [연우무대]를 비롯, 놀이패 [한두레]광주의 [일과 놀이]등 많은 마당놀이패가 생겨나 전국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연우무대는 지난 78년 3월 첫 작품을 공연한 이래, 최근의 13회 정기공연작품인 [공해풀이 마당굿, 나의 살던 고향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마당극의 이론과 실제에 커다란 공을 세워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나의 살던 고향은…](연우공동구성, 임진택연출)의 공연으로 연우무대는 앞으로 당분간 우리와 만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노골적인 현실비판이 삽입돼 있는 등 심의대본과 공연대본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는 이유로 서울시로부터 6개월간에 걸친 일체의 공연정지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은 날로 심각해져가는 우리 사회의 공해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그 원인에 대한 분석으로서 유한계층의 끊일 줄 모르는 욕망 및 농촌생활의 파괴, 근대화를 빙자한 공해산업의 무분별한 수입 등을 보여주는 등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작품.
  극의 전체구성은 풍물을 중심으로 한 지신밟기 형태로서, [쾌지나 칭칭나네] [액맥이 타령] 등의 민요를 부르며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첫째마당은 [공해귀신마당]으로 공해물질들이 탈을 쓰고 나와 위세를 자랑하며, 둘째 마당인 [봉고유람마당]에선 사장과 유한마담 등이 팔도유람을 떠나는데 가는 곳마다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심각한 공해현상에 부대낀다. 이 부분의 마직막 장면에 문제의 공연정지까지 몰고 온 [아, 대한민국]의 가요가사를 바꿔 삽입한 [아, 공해민국 사양하리라]라는 대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셋째마당은 [농촌마당]으로 피폐해가는 농촌의 모습을, 넷째마당은 [공단마당]으로 공해에 피해를 잆은 공단주민들의 피해상을, 다섯째마당은 [식수마당] 그리고 마지막 뒷풀이는 연기자 전원이 등장, 오염된 물과 땅과 공기의 소생을 기원하면서 풍물과 민요와 춤으로 지신밟기를 함으로써 한바탕의 굿놀음을 끝내게 된다.
  민속학자인 심우성씨(극단 서낭당 대표)는 최근의 이같은 흐름에 대해 {타의에 의하여 쪼개지고, 타의에 의하여 부서진 강토와 혈연과 의지를 하나로 하는 역사적 과업에서 연극이 짊어져야 하는 몫은 다른 어느 분야에 비하여도 적지 않다. 전통연극, 노래, 춤, 놀이, 의식을 찾아 오염 전의 형태로서 이마를 맞대야만 한다. 권력이나 경제적 이해상관관계와 부수된 고질적 병폐의 하나인 개인주의의 극복을 이 문화운동을 통하여 실천해야한다. 민족적이며, 보다 민중적인 통일된 내용과 형식을 갖춘 민족문화의 창출을 서둘러야 한다}면서 마당굿(극)이 지닌 의의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민중의 노래>

  최근에 들어 갑자기 활발해진 [노래운동]은 1970년대 초반 김민기, 양병집 등이 [친구] [아침이슬] [서울하늘] 등을 발표, 팝송과 대결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노래운동]이 오늘날 하나의 독립된 우농양식이 되고 민중의 힘을 결집시키는 막강한 매체로 인식받기까지는 이처럼 상당한 기간이 소요됐던 것.
  젊은 세대들이 노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맞서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노래가 지닌 부정적인 측면이 막강하게 노출되기 시작한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노래]무크의 편집동인인 박윤우는 노래운동이 {기존의 상업적 대중가요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되었다}면서 이와 더불어 [바람직한 노래란 무엇인가] [노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부수적으로 제기되었다고 어느 좌담회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현실을 호도하는 대중가요

  이건용씨(서울대교수·음악)는 노래 운동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문제에 귀착된다고 보고 있다. 첫째, 노래로 대중을 계몽하여 그들을 깨우치고 그들을 위한 진정한 노래를 찾아주는 일. 둘째, 민중에 의하여 만들어진 노래를 부름으로써 그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크고 높게 만드는 일. 셋째, 민중의 아픔과 기쁨과 희망이 담긴 노래를 불러 우리의 민족문화가 민주적인 문화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일 등으로 분류했다.
  첫째로 지적되는 [민중을 위한 노래를 되찾아주자]는 문제는 현재의 대중들이 자신들에게 어떤 노래가 필요한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무지에 싸여 현혹 당하고 있는 대중들을 저질가요로부터 격리시킴과 동시에 그들을 진정으로 달래주고 힘을 불러 일으킬 민중가요를 보급시키는 작업이 바로 이 항목에 속하는 노래운동이라는 것. [대중가요는 대중들에게 시름을 달래주고 무료함으로 잊게 해줄 수는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이 보고 들을(그리고 보고 들어야 할)것에서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시름의 근원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무산시키고 창조적인 시간을 빼앗는 것]이라고 이교수는 최근의 저질가요의 폐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들 노래운동가들은 요즘 한참 인기절정에 있는 [아, 대한민국]과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예로 들고 있다. 전자는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환상적인 가사로 대중들을 현혹, 현실안주와 무기력에 빠뜨리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돌아와요]라는 가사와 함께 마치 일본(인)문화를 환영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풀이다.
  둘째, 민중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를 함께 부름으로써 그들을 대변하고, 그들에게 이 나라의 문화의 주인이 바로 민중이라는 의식을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곧 문학에 있어서 노동자, 농민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가 자신의 애환을 글에 담는 경우와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미술의 경우나 전통연희의 경우를 막론하고 민중 스스로가 창조의 주체가 되어 직접 뛰어드는 최근의 문화예술운동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민중음악으로 각광을 받는 건 민요나 농악류의 민속악이 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셋째의 [민중의 노래를 부르자]는 것은 민중의 희로애락을 아무런 굴절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참 노래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민중이 몸담고 있는 현실이 어떤 형태로든 왜곡되거나 은폐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라고 강조한 점이다. 민중이 몸담고 있는 현실은 곧 민중정서의 [집]이기 때문이다.

[민요연구회] 창립

  노래운동 주장자들은 오늘날 대중가요가 끼치는 폐해와 매스컴의 막강한 송출력, 대중조작적 문화정책에 반기를 들고, 민중의 정서를 곧고 바르게 전달할 참 노래의 제작과 보급에 주의를 쏟는다. 그 결과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의 산물인 오염되지 않은 민요를 되살려내려는 노래운동도 함께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옛 민요는 대부분이 노동요거나 아니면 집단정서를 읆은 노래로서 노래를 만드는 사람과 부른 사람이 따로 구분돼 있지 않다. 민요형식 자체가 어렵지 않고 간결하기 때문에 누구나 함께 따라부를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즉각적으로 [가사바꿔부르기](최근에 노래운동에서 주요부분을 이루고 있다)를 병행할 수 있어 그 만큼 다양한 변화(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노래와 함께 춤과 놀이를 동시에 수반할 수 있다는 특징도 있다.
  이와 같은 민요의 장점에 일찍부터 주목한 시인 신경림, 연출가 임진택, 채희완 류해정, 시인 정희성 이동순 박영근 김정환 이영진 하종오, 연극인 김경란, 민요연구가 박명희 등 40여 명은 지난 6월 [민요연구회]를 창립하고 매월 [민요의 날]을 제정, 옛 민요의 발굴·보전과 함께 신민요의 제작과 보급에도 힘을 쏟고 있다. 민요연구회의 창립취지문을 보면 오늘의 노래 상황이 어디에 아 있으며 [노래바람]의 세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부를 노래를 갈구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가슴 아프게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노래하고 춤추며, 어깨동무하고 함께 뛰어갈 노래가 없다. … 어머니는 뽕짝을, 아버지는 구식군가를, 할머니는 니나노 가락을, 우리 누나는 예술가곡을 부르고, 나어린 동생은 디스코에 넋이 빠져있다.…그러나 우리에게 참으로 우리의 노래는 없단 말인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매스미디어의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는 우리의 노래가 있다.…즉 구전 가요요, 현장의 노래요, 생활노래요, 삶의 노래이며, 바로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 민요인 것이다

…(84년 6월 14일)
  [민요연구회]는 민요는 민족의 삶과 함께 해온 민중의 노래로서 상황에 따라서 변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이 벌이는 민요부흥운동은 {반민요적인 문화상황을 지양하고, 민족주체성을 확립함으로써, 대중문화의 왜곡된 의사소통체계를 극복, 민족성원들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한 연대의식의 집약과 다름 아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새로운 영화>

  지금까지 닫혀진 예술세계로만 여겨져 왔던 영화예술부면에도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다. 1981년에 결성된 [서울영화집단]이 주도하고 있는 이같은 움직임도 여타 예술부면과 마찬가지로 건강한 민중성의 획득과 공동체성의 획득을 통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계의새 바람은 바람 그 자체만으로 끝날 공산도 없지 않다. 이는 여타 예술부문과 달리 영화계만이 지닌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즉 영화라는 상품자체가 거대한 자본을 전제로 하며, 자본주가 있다손치더라도 제작창구와 배급창구가 따로이 존재함으로써 현실적으로 여간 어려움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한 삶에 기여하는 영화

  따라서 영화운동 관계자들에 따르면 새로운 영상매체운동이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영화매카니즘의 장악이 선결과제로 대두되며,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영화운동에 앞장서는 영화지식인은 우선적으로 건강한 자본확복에 노력해야 하며 자신들의 마직막 소재가 될 삶의 현장을 투시, 통찰할 수 있는 노력을 길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이와 함께 유희적 유흥업소로 전락한 기존의 소비성 극장구조보다는 새롭고 건강한 배급창구를 개척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 이는 바로 건강한 자본 확보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통해야만 비로소 기존의 소비적·유희적인 제작창구를 지양하고 구체적 삶의 현장에로 연결되는 제작창구를 개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영화의 건강성과 민중성은 그 근저에 영황의 공동체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적인 연대감 속에서 건강한 일과 건강한 놀이, 건강한 영화가 나온다고 봅니다. 어느 개인의 자본이 아닌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자본에 의해, 공동체 모두가 함께 호흡하는 영화야말로 곧 건강한 민중성의 토대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은 서울영화집단의 일원인 홍기선의 말이다. 홍씨의 언급 속엔 영화제작의 첫째 요건이 되는 [자본확보]의 고뇌가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어느 개인의 자본이 아닌,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자본 운운의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홍씨 스스로도 그같은 일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어려움이 현실적으로 엄존하는 이상, 이들 영화운동가들은 상업영화로서 제작비용이 대규모로 발생하는 35밀리는 불가능하며 8밀리와 16밀리에 국한된 소영영화운동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대두되는 문제는 건강한 공동체의 확보여부. 이는 바로 새로운 영화의 배급통보를 창출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즉 농촌공동체와 도시  노동자 공동체, 도시빈민공동체, 대학공동체 등 각 공동체의 특성에 맞는  영화들이 각 공동체별로 제작되고 또 배급돼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될 경우, 각 공동체별 애환과 문제점이 나오고 거기서 모든 공동체는 서로간의 이해와 연대감을 갖고 건강한 사회형성을 위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영화운동만으로는 불가능한 노릇이다. 다른 사회문화운동과 민중예술운동이 보조를 맞추어 협조할 때라야만 실현가능성이 확보된다. 따라서 영화지식인들에겐 무엇보다도 먼저 건강한 민중성과 함께 호흡하는 공동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끊임없는 실천적 작업이 요구된다고 홍기선씨는 다짐했다.
  영화지식인의 구체적인 실천작업으로서 대학영화인들의 작업을 손꼽을 수 있다. 82년 [판노리아리랑]의 공동작업을 시발로 출범한 [서울영화집단]도 서울대생을 주축으로 한 [얄라성 영화연구회]가 발전적으로 이룩한 모임. [서울영화집단]은 지난 9월 15일과 16일 신촌역 맞은편에 위치한 [우리마당]에서 회원들이 제작한 [그 여름] [수리제] 등의 소형 영화관람회를 갖고 회원은 물론, 각 공동체별 참석자들의 기탄없는 비판의 기회를 가졌다.

<민중언론>

  오늘날 [지하언론]또는 [민중언론]이라는 이름아래 여러 통로를 거쳐 흘러나오는 각종 유인물과 팜플렛들은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으로 보아 이념운동매체와 실천운동매체로 대별된다고 한 관계자는 밝혔다.
  이념운동쪽을 보면 전직기자 그룹들이 내는 유인물, 기사연(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이 내는 각종 자료 모음시리즈, 기독교 민중교육연구소에서 내놓고 있는 [연희연구자료]모음, 지난 4월 14일 발족을 본 민중문화 운동협의회가 발행하는 [민중문화](2권이 나왔다). 그리고 지난 6월에 발족한 민요연구회의 [노래는 우리를 하나되게 한다](연구회보 제1집)등이 있다.
  그리고 실천운동쪽에 속한 걸 보면,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실태를 폭로·고발함으로써 의식화운동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각종 보고서, 종교단체 청년·학생들이 내놓고 있는 각종 인권관계성명서(예 서울대 민중생활조사위원회의 [공장활동지침서]),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내는 [공해연구] 및 그 자료집들, 민주화 운동청년연합이 기획·발간하는 [민주화의 길](제3호까지 나왔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기독교 청년협의회 여성평우회 등이 펴내는 여성의 인권신장에 관한 자료들, 민중민주운동협의회가 내는 각종 성명서, 한국노동자 복지협의회의 [민주노동](월간 5호까지 나왔다),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와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대구NCC인권위원회, 민주화운동청년연합등이 공동으로 조사·발간한 [대구택시기사시위사건 진상보고서](84. 6)등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소위 [민중언론]이라는 포괄적·추상적 개념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일련의 인권·여성운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첫째, 학생운동에서 나타나는 성명서를 비롯한 각종 지하유인물과 벽보판의 대자보, 그리고 과거 70년대에 선을 보였던 [자유의 종]과 같은 대학내의 자유언론매체등은 나름대로 독특한 언론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학생들은 평했다.


  둘째, 민중언론의 주요관심분야(상호의존적 관계이긴 하지만)는 뭐니뭐니 해도 노동운동분야이다. 비교적 역사가 오랜 이 분야의 실적으로선 71년 서울대법대 사회벅학회가 펴낸 [부산지구 노동자 실태 보고서]를 들 수 있으며, 그 뒤 사회선교협의회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 등이 내놓은 일련의 노동관계보고서와 성명서, 앞서 언급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의 [민주 노동],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노동청년] 등을 빼놓을 수 없다.
  셋째, 민중언론은 농민문제를 끊임없이 거론, 농민운동과 상호연대를 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가톨릭 농민회가 펴내는 [거둠] [씨앗] [평화] 등과 같은 소책자와 월간으로 펴내는 [농민의 소리], 기독교농민회가 펴내는 [생산] [빚고개]와 같은 소책자 등은 한결같이 농민의 어려움과 농촌현자의 문제를 밝혀냄으로써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농민운동원들에게 중요한 매체가 되고 있다는 것.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지하매체]

  이 밖에 [민중언론]이라 이름하는 각종 지하매체들과 팜플렛들은 도시빈민문제와 광범한 인권문제 여성운동문제를 주요 이슈로 삼고 있으며 주요 독자로 삼고 있음도 사실이다. {핍박받고 소외받는 계층이 있는 이상 민중언론은 자생적으로 존립기반이 형성되기 마련}이라는 민중언론매체 관계자들의 주장은 퍽이나 시사적인 언급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동시에 한 전직기자가 이들 [민중언론매체]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 역시 관계종사자들은 한 번쯤 새겨들어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민중언론이 민중의 참상에 지나치게 마음을 상한 나머지,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민중의 의식이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면 단 한 장의 유인물이나 한권의 복서라도 사실을 정확하게 냉정하게 전함으로써만 장기적으로 그리고 신빙성있게 민중의 가슴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지난 4월 14일, 흥사단 회관 2층 강당에서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 창립총회가 열렸다. 우리 사회에 거세게 일고 있는 새로운 민중문화예술운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집약하고 부문간의 협조를 체계적으로 갖추기 위하여 탈춤을 비롯한 민속문화일반 문학 언론 및 출판 무용 연극 영화 미술 등 각 분야가 모여 구성한 이 협의회는  발기문에서 {오늘날 이 사회에서 횡행하는 문화는 대중을 길들이고 잠재워 자본과 권력의 왜곡된 논리에 복속하는 충실하고 무기력한 신민으로 만들어가는 노예의 문화, 신식민주의의 문화, 관제문화}로서 {이러한 반민중적 문화는 분단극복을 지향하는 참문화가 아니라, 분단고착화에 기여하는 문화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 {이러한 왜곡된 분단고착문화는 결단코 종식되어야 하며 생명의 문화, 민중의 참다운 공동체적 삶의 문화, 분단극복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연대를 이룩하고자 민중문화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날 총회에선 송기숙(작가) 김종철(문학평론가) 황석영(작가) 여익구(민속연구가) 허병섭(목사) 호인수(신부) 원동석씨(미술평론가) 등을 대표위원으로 선임하는 한편, 최민화 채광석 채희완 김학민 등 11인의 실행위원을 뽑았다.
  이 협의회의 사무국장인 박인배(연출가)씨는 {오늘의 새로운 문화예술운동이 일견 반체제운동처럼 보일지 모르나, 모든 문화예술부면에서 이뤄지고 있는 민중적 접근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나아가야 할 영속적인 운동인데다, 오늘의 체제에만 국한된 운동일 수 없기 때문에 반체제운동으로만 치부하는 건 논리적 모순}이라고 이들의 의견을 일축했다.
  박인배씨의 이러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이같은 새로운 문화예술운동이 반체제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오늘의 우리 문화현실이 경직되고 굳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에는 많은 저항이 뒤따르기 마련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에서 오늘의 문화예술운동을 저항문화요, 투쟁문화로 규정하는 일부의 의견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점을 당사자들은 염두에 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