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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1947년 개원에서 1989년 폐쇄까지 광주 미문화원

본문

1947년 개원에서 1989년 폐쇄까지 광주 미문화원

공훈의(월간예향) 

" 공보사업의 본질적인 방향도 변화를 겪었다.  60년대까지는 대상을 한정하지 않고 모든 계층의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 계몽활동을 벌였었다.  70년대 들어서는 이른바 중점주의 공보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대학교수, 관공서 고급간부, 문화계 및 언론계 인사등 소위 사회계층에 있는 인사들이 광주미국문화원의 초청대상이 되었다.  미국에서 초청인사가 도착하면 오찬은 사회지도계층 인사들과, 만찬은 소장 엘리트들과 함께 하는 패턴을 유지했다."

  광주미국문화원이 이삿짐을 꾸렸다.  지난 5월 23일 아침. 두 대의 2.5t 트럭이 삼엄한 전경들의 대열을 헤치며 문화원 앞뜰로 들어섰다.  회의실과 원장실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회의실에서 쓰던 의자며 탁자, 그리고 원장실에 있던 캐비닛, 서류함등 일부 집기들이 트럭에 실렸다.  두 대의 트럭은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광주천쪽으로 방향을 꺾어 사라졌다.  트럭에 실린 짚더미는 광주미국문화원의 이삿짐이라기에는 너무 썰렁해 보였다.  문화원 양쪽 입구에는 다시 셔터가 내려지고 철문은 굳게 잠겼다.

옛 기생집 '春木庵'건물

  광주직할시 동구 황금동 80번지, 광주미국문화원이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꼭 40년전의 일이다. 
  해방 후 미군정때 광주미국문화원은 그 첫모습을 드러냈다.  1947년 4월에 도청 앞 무덕전(지금의 상무관) 뒷 공터에 세운 콘셋트 건물에 `광주미국공보원`이란 간판을 내건 것이 처음이었다.  미국공보원의 전신은 미군 제24군단 하지사령관 직속으로 있던 OCI(Office of Civil Information:민간정보처)였다.  1947년 2월 OCI 가 미국공보원으로 떨어져 나왔고 그로부터 두달 후 광주미국공보원이 문을 연 것이다.  광주미국공보원 초대원장은 미공군 장교 출신 라바스씨였다.
  이듬해인 1948년 3월 광주 미국 공보원은 지금의 광주 시내 제일 극장 옆에 있던 광주시립도서관 건물로 옮겼다가 해를 바꿔 1949년 6월 25일, 황금동 80번지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대대적인 보수공사 끝에 본격적인 개원식을 가진 것은 3개월 뒤인 9월 23일이었다.
  40년 동안 광주미국문화원으로 쓰여온 그 건물은 일제 때 광주시내에서 제일 가는 기생집 '춘목암(春木菴)' 이었다.  2차대전 말기 일제는 강제 소개령을 내리고 춘목암을 헐값에 매수하였다.  그때 돈으로 13만원에 팔린 춘목암은 그후 순천철도사무국 독신자숙소로 쓰였다.  해방후 적산(敵産)으로 미군이 접수하여 미군정이 관리했다.  미군정은 이곳을 미국장교구락부로 이용하였다.  그 뒤로 이 자리에  광주미국공보원이 들어선 것이다.

라디오 보급으로 '미국의 소리' 시골 안방까지

  광주미국공보원의 최초 임무는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민정이양을 위한 총선을 대비해서 주민들에게 민주적인 투표방법을 계몽하는 일이었다.  계몽대상지역은 전라남 .북도와 제주도에 이르렀다.
  6.25이전까지만 해도 광주미국공보원은 전남도내 만해서 목포. 순천. 강진에 세 곳의 지원을 운영하였다.  거기서 일하는 직원수도 모두 70명이나 되었다.
  미국공보원은 해방직후 문화적 공백상태에 빠져있던 우리 사회에 미국 문화를 전파시키는 첨병 역할을 했다.  그 활동은 매우 폭넓고 효과적인 것이었다.
  먼저 광주미국공보원은 라디오를 보급하였다.  그 라디오는 일본이 전쟁보상물자로 미국에 제공한 것이었다.  1949년 이후 광주 공보원만 해서 8백 50대의 라디오를 관할지역 내의 각 면. 리 단위, 그리고 마을의 유지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두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건전지를 새것으로 갈아주기도 했다.  그 당시 미제 '제니스' 라디오 한 대는 나락 열섬과 바꿀 만큼 고가품이었다.  라디오를 나눠준 뒤 워싱턴에서 보내는 VOA 즉, '미국의 소리'를 듣도록 권했다.  VOA는 워싱턴에 있는 '미국해외 공보처 (USIA)'에서 제작되어 보내지는 것인데, 이 USIA는 세계 모든 지역의 미국공보원을 관장하는 기관이다.  그러니까 미국공보원은 라디오를 무상 보급함으로써 워싱턴의 목소리를 한국의 시골 마을 안방에까지 곧바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미국 공보원은 각종 간행물들을 활발히 펴냈다.  '자유세계' '자유의 벗' ' 새 힘' 등 8종의 정기간행물과 함께 그때그때 필요에 딸라 수많은 책자와 팜플렛, 그리고 화보들을 찍어냈다.  초기에는 국민 학생으로부터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책을 만들어 나눠주었다.  간행물들은 관할구역 내의 각 마을 이장에게까지 고루 보급되었다. 

'리버티 뉴스' 계몽 영화 등 순회 상영

  미국공보원의 활동 가운데 무엇보다 효과적이었던 것은 영화사업이었다.  '리버티 뉴스'로 대변되는 영화사업은 어떠한 문화정책보다도 효과적인 일이었다.  미국공보원은 경상남도에 '상남(尙南) 영화제작소'를 두고 그곳에서 한국의 국내뉴스와 국제정세에 관한 보도성 영화인 '리버티 뉴스'를 만들어냈다.  일주일에 한편씩 제작되는 '리버티 뉴스'는 16mm 와 35mm의 두 가지 필름으로 만들어졌다.  35mm는 일반극장에 배포되고 16mm는 각지의 미국공보원을 통해 보급되었다.  광주미국공보원에서는 공보원안에 있는 강당에서 '리버티 뉴스'를 상영했다.  동시에 자체 발전시설을 갖춘 영화상영차량으로 시골 벽지마을 가지 찾아다니며 영화를 보여주었다.  장날 장터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시골사람들에게 기막힌 구경거리가 다니기도 했다.  1951년 이후에는 광주에만 모두 5대의 영화상영차량을 보유하였다.  또 85대의 '벨 하우 웰' 영사기를 갖추고 각 시군 산하에 있는 지방 문화원이나 교육기관, 군부대 등에 필름과 함께 대여해주기도 했다.
  이때 상영된 영화는 '리버티 뉴스'외에 서구미국의 정치를 소개하는 내용이나 주민들의 위생관념을 일깨워주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리버티 뉴스'의 말미에 빠짐없이 붙어있었던 미국 스포츠 하이라이트나 미국 연예계 소식 등은 매우 인기가 높았다.  계몽영화로 따로 제작된 영화는 정치. 경지, 사회. 문화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모두가 미국식 라이프 스타일을 소개하는 것들이었다.  식수(食水) 관리라든가, 집파리. 십이지장충의 퇴치 등 위생에 곤한 계몽영화도 많았다.

폐기된 필름조각 밀짚모자에 두르고

  "그 주에는 미국에서의 노동조합 활동에 관한 내용도 있었어요.  노조의 조직, 활동, 또 노사간의 협상과정 등을 담은 내용이었는데, 1950년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겐 도무지 꿈같은 이야기였지요."
  초창기부터 지난해까지 40년 가까이 광주미국문화원에서 일했던 진재술씨 (66)의 회고다.
  미국공보원에서 상영했던 영화필름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폐기되었다.  이 영화는 크게 나누어 상남 영화 제작소에서 만든 것과 미국의 개인 영화사가 만든 필름에 우리말을 더빙한 것이 있었다.  두 가지 모두가 유효기간 또는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제작사 측의 입회 아래 반드시 폐기되었다.
  당시 전라남도 시청각교육연구원에서 일했던 김수갑씨(49)는 광주미국공보원에서 많은 '영화필름을 빌어다 썼다.'고 회고한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기한이 다 된 필름은 현재 광주 지원 국민학교 앞 도랑에서 불에 태워 없앴어요.  그 때마다 얼마나 아까웠던지. 그러다 보면 동네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필름조각들을 줍고, 미처 타지 않은 부분을 거둬갔지요.  그래 가지고 밀짚모자 장수에게 팔았어요.  밀짚모자에 영화필름을 한바퀴 감아놓았던 것 기억나지요?  그것이 '리버티 뉴스'지요."
  김씨는 때때로 미국공보원 직원들에게 통사정을 한 일도 있었다.
  "리버티 뉴스 끝 부분에 재밌는 장면이 많았어요.  한 번은 서독서커스단이 공연하는 장면이 나왔어요.  필름을 폐기하는 자리에서 그 부분을 얻어내느라고 진땀 뺐지요.  그렇게 하나 둘 모은 것을 '필름 시멘트' 란 접착제로 연결하면 근사한 오락영화 한편이 만들어졌지요"

허백련. 오지호 등 도 강당에서 전시회

  광주미국공보원은 미수품 전시 공간의 역할도 했다.  사실상 1950~1960년대에 광주에서 전람회를 열 만한 마땅한 장소라고는 공보원 건물뿐이었다.  허백련 화백을 비롯 오지호, 허건, 천경자 등 이 고장 출신의 대표적 화가들은 물론 웬만한 화가들 치고 광주미국공보원에서 한 두 번 전람회를 열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전시장은 무상으로 대여되었으며 종종 고등학생들의 시화전이 열리기도 했다.
  특히 1953년부터 2년 동안 공주미국공보원장으로 있었던 다나. w. 러셀은 의재 허백련 화백과 무척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의재의 전시회를 주선하고 그의 작품을 모았다.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 60년대 중반 뉴욕에서 그는 그가 소장하고 있는 의재의 작품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의재의 작품세계와 사람됨에 관한 강연회도 함께 가져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70년대 이후 엘리트 대상 공보활동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공보원 (USIS: The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이란 이름은 정보 (Information) 라는 말이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하여 미국문화원 (ACC: The American Cultural Center) 으로 개칭되었다.  서울만 공보원으로 두고 그 산하의 광주. 부산, 대구는 모두 미국문화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70년대 이후 미국문화원의 활동은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무엇보다도 영화사업을 중단하였다.  60년대 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기 시작한 '대한뉴스'가 '리버티 뉴스'를 대신하게 되었다.  미국문화원 입장에서는 한 달에 10만 달러가 넘어드는 '리버티 뉴스'를 계속 제작할 이유가 없었다.  상남 영화제작소를 폐쇄하고 그곳에서 사용하던 시설고 기자재를 국립영화제작소로 넘겨주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많은 기술인력들이 국립영화제작소나 국내방송사로 옮겨갔다.  국립영화제작소가 상남 영화제작소의 영화제작기술을 전수 받은 셈이 되었다.  또한 웬만한 면소재지까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곳이 드물어 발전시설을 갖춘 영화상영차량도 소용이 없어졌다. 시골장터에 종종 나타나 잔뜩 호기심을 끌던 잿빛의 영화상영차량의 모습도 사라졌다.  1976년께 문화원에서는 영화 대신 VTR을 도입했다.
  공보사업의 본질적인 방향도 변호를 겪었다.  60년대까지는 대상을 한정하지 않고 모든 계층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계몽활동을 벌였었다.  70년대 들어선 이른바 '중점주의 공보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교육기관을 상대로 하는 경우 국민학생에서 대학교수에게 이르기까지를 대상으로 하던 것을 차츰 그 수준을 높여 나갔다.  마침내 대학생 이상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공보사업을 펴게 되었다.
  대학교수, 관공서 고급간부, 문화계 및 언론계 인사 등 소위 사회지도계층에 있는 인사들이 광주 미국문화원의 초청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대학생을 포함한 지역사회 곳곳에서 활발히 뛰고 있는 젊은 엘리트들로부터 의견을 청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국에서 초청인사가 도착하면 오찬은 사회지도계층 인사들과, 만찬은 소장 엘리트들과 함께 하는 패턴을 유지했다.

토론회 통해 미국 정책설명 여론청취

  이와 같은 소위 '중 저주의 공보사업'의 형식은 지금까지 계속되면서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1987년 6월부터 2년 임기의 광주미국문화원장을 맡고 있는 제럴드 맥크럭클린씨(37)는 ▲ 미국정책에 관한 설명회 및 강연회 개최 ▲도 서관을 통한 정보자료 제공 ▲ 각계 인사의 국무부초청 미국방문 주선 ▲ 언론 기관에 대한 미국관계 보도자료 제공 등을 미문화원의 주요사업으로 꼽았다.
  미국문화원을 관장하는 워싱턴의 미국해외 공보처 (USIA) 는 전세계 1백 24개국에 2백 2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 USIA의 목적은 각국에서의 홍보활동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 실현을 돕는 데 있다. 또 정책에 관한 여러 국가의 의견을 수집하여 대통령 및 기타 정부기관에 보고 하는 업무도 관장한다.  이러한 USIA의 목적에 비추어 현지기관으로서 미국문화원의 사업내용은 꼭 어울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대외정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 때 미문화원은 그 정책방향을 설명하기 위한 홍보활동에 나선다.  서울의 미국공보원에서 제작되는 '시사논평(時事 論評)' 이란 타블로이드판 저널을 비롯 각종 팜플렛을 이용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유명대학 교수나 저널리스트, 또는 국무부의 동북아시아 관계자 등이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각지의 문화원에서 토론회를 개최하는 방법이 많이 쓰인다.  최근의 토론회는 한미통상문제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 미국은 무역수지에 적자가 나는 나라다. 한국은 흑자 국이다.  미국은 경제가 위기에 놓였으니 한국은 농산물이며 담배. 쇠고기, 그리고 보험시장, 영화시장 등을 개방해야 한다.'
  강연의 내용은 대부분 그런 식이다.  미국정책에 관한 토론회는 두 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하나는 강연을 통해 그 지역 인사들에게 미국의 입장을 설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토론과정을 통해 현지의 여론을 청취하는 것이다.  이들의 한국 방문결과는 미국에 돌아간 뒤 견문록의 형태로 국무부 당국에 보고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공위성 이용한 정책설명호도 열어

  이러한 정책설명회의 형식은 날이 갈수록 고도화되어 최근에는 ED(Electronic Dialogue)라는 방식이 쓰이기도 한다.  쉽게 말해 국제전화를 이용한 토론이랄 수 있다.  앞으로는 더 나아가 TED(Televised Electronic Dialogue)방식을 쓸 예정이다.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에서 보내는 화상을 이곳 문화원에서 TV화면으로 바라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최근 광주미국문화원에서는 ED와 TED의 중간형태쯤 되는 방식으로 토론회를 진행한 바 있다.
  작년 9월 15일의 일이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빅스 닌스교수와  미국통상정책에 관해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미리 미국에서 빅스 닌스교수의 강연모습을 VTR로 녹화해 그 테이프를 공수해왔다.  그리고 시간을 정해 워싱턴의 USIA의 중계로 광주미국문화원과 빅스 닌스교수의 자택이 인공위성을 통해 연결되었다.  광주미문화원강당에는 7~8명의 토론 참여자가 자리를 잡았고 두 사람의 여성통역사가 대기하였다.  VTR로 강연을 듣고 난 후 인공위성을 통한 질의 응답이 시작이었다.  빅스닌스교수의 목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곳 토론자들은 탁상에 마련된 4~5개의 마이크를 통해 목소리를 미국으로 날려보냈다.  두 지역간의 시차 때문에 이쪽에서 '굿 모닝'하는 인사에 빅스 닌스교수는 '굿 이브닝'이라고 답했다.
  광주미문화원은 언론기관의 인터뷰를 위해서 ED의 채널을 제공하기도 했다.  올해 3월 17일 광주미문화원 주선으로 광주일보의 김용옥경제부장은 미국 상원의 루가의원과 ED를 통한 대담을 나눴다.  역시 한미간의 무역마찰에 관한 문제였다.
  미문화원 쪽에서 ED방식은 미국의 저명인사를 직접 한국에 데려오지 않고도 정책홍보가 가능하며, 동시에 현지여론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청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각광받고 있다.

언론 통제 때 검열 안 거친 기사 제공

  광주미국문화원의 도서관에는 6천 여종의 서적이 비치돼있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최신 정기간행물도 볼 수 있다.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즈, 볼티모어선 등 유명 일간지는 물론 뉴스위크, 타임 외에 일반인으로서 개인적으로 구독하기에는 부담스러운 포린 어페어즈, 콜럼비아 저널리즘 리뷰,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등 미국의 권위 있는 저널들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미국 내 수많은 이간신문에 실린 한국관계 기사를 그때그때 복사해서 도서관에 갖춰두었다.  미국의 사사문제를 비롯 현재 미국내의 과학. 음악. 미술 등의 동향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VTR시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도서관 정보자료는 광주미문화원이 문을 닫으면서 일반인에게 가장 아쉬움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80년대 초 국내언론통제가 극심했을 때 미문화원의 도서는 그 진가를 발휘했다.  시중에 배포되는 타임이나 뉴스위크 등 잡지는 모조리 검열을 거친 것들이었다.  한국에 비판적인 기사가 실렸으면 그 페이지를 아예 뜯어버리거나 그 대목을 칼로 도려내거나 아니면 검은 먹칠로 덮어버린 것들이었다.  심지어는 속표지의 목차에 쓰인 몇 마디도 낌새가 미심쩍다 싶으면 그것마저 먹칠을 해버렸을 정도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배달되는 타임이나 뉴스위크가 헐거우면 헐거울수록 미국에서 한국을 비판하는 여론이 높은 것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문화원 도서관에서는 전혀 검열을 거치지 않은 저널을 볼 수 있었다.  미국대사관의 외교행낭을 타고 온 타임이며 뉴스위크는 본래의 모습 그대로 미문화원 도서관으로 전달되었다.  철저한 언론통제 아래서 우리 나라의 정황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미국문화원 도서관으로 가야 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자료복사도 구속사유

그 와중에 이광우 교수(전남대 행정대학원장)는 미문화원에서 얻어온 자료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0.26 직후 이 교수는 그 사건의 진상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광주미문화원을 찾아갔다.  당시 원장은 데이빗 밀러씨로 광주항쟁을 겪은 이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10.26에 관한 기사를 보여주도록 요청했다.
"뉴스위크와 타임이었어요.  과연 사건의 전모가 비교적 소상히 적혀있었어요.  그런데 미처 다 읽기도 전에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됐다고 하대요.  그래서 그 부분을 복사해 달라고 했지요.  악명 높은 용산대 공분실 지하 고문실 이며 고문장치 사진까지 실려있었어요.  학교로 돌아와서 그 복사물을 다른 교수들에게 돌려보도록 했지요.  그것이 당국이 나를 잡아넣은 아홉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였어요."
  그때 이교수에게 관련기사를 복사해주었던 광주미문화원의 통역사 박준로씨도 체포될 뻔했다.  불온문서유포죄로 체포되기 직전에 미국으로 빠져나가 아예 그곳에 머물러 버렸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미문화원에 자주 들락거렸던 것이 죄라면 죄'라고 말하면서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는 조선대의 어떤 교수는 광주미문화원에 있는 VTR도 훌륭한 교재 구실을 했다고 말한다.  미국의 현대미술동향을 알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직에서는 무용에 대한 인식이 무척 낮아 무용가들이 미국에서까지 유학을 갈 여건이 못되다보니 미문화원의 무용관계 VTR자료는 매우 중요한 교과서가 되었다고 한다.  70년대 만해도 광주미문화원에서 VTR 시설과 테이프를 빌려다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60년대 초 영사기를 대여 받아 시청각교육을 시도했던 형편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기간행물이나 VTR에 비해 단행본 도서들은 별반 볼 것이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경제. 국제관계. 예술. 참고도서 등으로 분류돼있던 도서류는 대부분 미국소개책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들로 평가되었다.  책의 표제에 'US' 란 말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드물었다.

'사회지도급' 미국방문 주선

  무엇보다도 광주미문화원이 지역사회의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미국의 이미지를 심을 수 있는 프로그램은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방문을 주선하는 것이었다.  광주미문화원의 주선으로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인사들은 웬만한 대학교수는 물론 사회단체지도자, 정치인, 예술인, 언론기관 간부 등 지역사회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들이 전부이다.  이들은 광주미문화원이 정기행사로 개최하는 미국 독립기념일 경축리셉션이나 미국 고위당국자가 방문했을 때 초청대상이 되는 약 1백 50명의 인사들 명단에 고루 포함돼 있다.
  광주미국문화원에서는 일찍이 지역사회 요소 요소의 지도자급 이사들을 망라해 광주 개발 협력회 (회장김제권)를 결성해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다고 하다.  진재술씨에 따르면 광주 개발 협력 회가 생긴 지도 벌써 3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이처럼 광주미문화원은 지도자급 인사에 대한 관심의 끝을 항상 늦추지 않고 있다.

미묘한 문제에는 '모른다' '증거가 없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언론의 기능과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언론은 미국문화원이 가장 신경을 쓰는 부문으로 떠올랐다.  수시로 미국에 대한 국내언론의 보도태도를 모니터 함은 물론 미국의 현안문제에 대한 보도자료를 수시로 배포한다.  종종 언론인만을 초청한 가운데 간담회나 리셉션을 갖기도 한다  미문화원측이 언론을 상대로 하는 매너는 세련되고도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어서 많은 경우 그들의 발표문안 가운데 행간을 읽어야 진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광주미문화원의 경우도 원장이 언론인을 만날 때는 '오프 더 레코드'인가 아닌가를 반드시 확인하며 언론기관에 대한 창구는 원장 한 사람으로 철저히 한정돼 있다. 조금이라도 미묘한 문제에 이르면 그들은 '모른다'거나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일축하기 일쑤이다. 오죽했으면 그러한 폐쇄성 때문에 광주미문화원이 이 지역의 언론기관을 한바퀴 순방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밖에 광주국미문화원의 역할이라면 이 지역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의 미국 유학을 돕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학금을 준다거나 하는 것은 일체 없다. 도서관에 미국내 여러 대학의 '불리틴(소개책자)'를 비치해 둔다거나 출국시 비자수속을 위해 약간의 편리를 봐주는 정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의 길을 뚫기 위해 미문화원에 취직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또한 영어공부를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문화원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이 뺨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을 정도로 자존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한심한 대학생들도 있었다 한다.

광주 여자와 결혼한 원장

  역대 광주미국문화원장들은 심심찮게 한 토막씩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광주미문화원에 오랫동안 군무한 한국인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미국인 원장들도 출신에 따라 여러 가지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국무부 외교관 출신이냐 명문대학 출신이냐 아니면 평화봉사단 출신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원장들이 일종의 일등 의식을 갖고 잇는 듯 했어요. 우리 미국이 아니었다면…하는 식의 사고방식이었죠. 그 가운데 그래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딱 한 사람, 러셀원장이지요. 그는 한국인도 한국인 나름의 철학이 잇다는 사실을 인정했어요. 5년 전쯤 미국에서 사망했다고 들었는데 무척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지요."
광주미문화원 재직기간 중 20명이 넘는 미국인 원장을 겪었던 진재술씨의 회고다.
러셀씨는 1953년부터 2년 임기 동안 광주미문화원장으로 있었으며, 허백련화백과의 친분에 관해서 앞 부분에서 적은 바 있다. 그는 한국인의 불우한 처지를 보고 눈물을 흘릴 줄도 알고 미문화원 건물 안에 있었던 숙소에서 곧잘 한국인 직원들과 어울려 게임을 즐기고 술잔을 나누는 등 인간미가 있었다 한다. 그 당시에는 별도의 원장숙소가 없었고 문화원 건물내부에 옛 '춘목암'시절 1등실이었던 방 한 칸에서 거기 하였다고 한다.
광주미문화원에 재임하는 동안에 광주처녀와 혼인을 맺은 미국인 원장도 있었다. 1971년부터 74년까지 원장으로 있었던 케네스 A 예이츠시가 그 주인공, 예이츠씨는 독신으로 동명동의 원장숙소에 살고 있었다. 당시 광주여고를 나온 한 여학생이 대학에 합격하였으나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했다는 딱한 사정을 듣고 예이츠씨는 그녀를 원장공관의 '하우스키퍼'로 채용했다. 그것이 인연이 돼 예이츠씨는 하우스키퍼 박영내씨를 아내로 맞아들여 광주피정센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 예이츠씨는 워싱턴 VOA에서 일하고 있으며 오는 8월 북경에 있는 중국문화원 부원장으로 부임할 예정이라 한다.

돼지머리 앞에 놓고 넙죽 절한 여성원장

여성으로 광주미국문화원장을 맡았던 경우도 있었다. 1981년부터 2년간 광주에 재임했던 발래리 스틴슨여사는 82년 한미 수교 1백주년 기념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녀는 명문 스탠포드대 출신으로 '발래리'란 퍼스트 네임을 '방애리(方愛利)'라는 한국 이름으로 바꿔 가지고 다녔다. 81년 광주미문화원 건물을 개축했을 당시에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돼지머리가 놓인 고사상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올리기도 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직원의 말에 따르면 스틴슨여사의 외모가 검은머리에 눈동자도 검은 동양적 모습이어서 한복 차림이 꽤 어울렸다고 한다. 지금은 홍콩의 미국공보원에서 일하고 있으며 오는 8월에는 미국 국무부 극동아시아 담당관으로 옮길 것으로 전해진다.
스틴슨여사가 광주미문화원장으로 있으면서 82년 5월과 6월 사이에 주최한 한미수교 1백주념 기념행사로는 ▲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대학 합창단 연주회 ▲ 그레그스미드 싱거즈 악단 특별공연 ▲ 한미수교 1백년 사진 및 한국에 관한 미국의 도서 전시회 ▲ 미국 우정의 사절단 초청, 그밖에 몇 차례의 강연회가 있었다.
스틴슨 여사 후임으로 또 여성원장 메리 칼린씨가 부임해 왔다. 82년 하반기부터 2년 간 광주미문화원장으로 일한 칼린씨는 미혼이어서 '미스 칼린'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녀의 재임기간 동안에는 워커 주한미대사와 미하원의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솔라즈위원장이 광주를 방문했다. 미스 칼린은 이 지역의 여성 인사들과 두터운 친교를 맺었다. 워커대사나 솔라즈의원이 내외가 광주를 찾아오자 미스 칼린은. 평소 가까웠던 목포대학의 한모교수(여)를 불러 부인들의 통역을 맡기기도 하였다. 한교수에 따르면 워커나 솔라즈의 부인은 모두 담양죽물 박물관을 구경했으며, 특히 솔라즈 부인은 통역하는 자신이 무색할 정도로 무척 검소 했다고 한다.
미스 칼린은 필리핀대사관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함께 일하는 대사관직원과 결혼했다. 최근 광주 미문화원이 잠정폐쇄되기 직전 광주를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스튼슨여사와 미스 칼린이 원장으로 잇는 동안 유독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을 많이 쏟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이 특별히 선구적인 일은 아니었다는 평가가 많다. 광주 YWCA의 김경천총무는 '특별히 앞세우는 것은 아니었고 모든 행사에 여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정도'라고 평한다.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 목포대의 한 여자 교수는 '여성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정도'였다고 말한다.

차기원장 에임즈씨 지금 서울에

현재의 광주미국문화원 원장은 제럴드 맥크럭클린씨(37). 그는 지난 1987년 6월 9일 부임해서 오는 7월초면 광주를 떠난다. 그의 다음 근무지는 아프리카 모잠비크 미국공보원, 일단 미국으로 돌아가 6개월쯤 포르투칼어를 배운 뒤 내년 2월말께 모잠비크로 간다. 그는 일찍이 1079년에서 81년 사이에 경상남도 창녕보건소에서 평화봉사단으로 일한 바 있다. 또 그의 부인도 한국교포이다. 부인 송경호여사는 맥크럭클린씨의 고향인 브릿지포트대학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하는 교포학생이었다. 이때 같은 학교에 다니던 맥크럭클린씨가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한국어 교습을 받다가 인연이 닿아 결혼에 이르렀다. 그는 1983년 고향집 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한다.
맥크럭클린씨의 후임으로 광주에 올 미문화원장은 칼톤 에임즈씨. 그는 워싱턴 USIA에서 1년간 교육을 마친 후 현재 서울 미국공보원에서 다시 1년간에 걸쳐 한국어 교육을 받고 있다.

미국문화 전파의 핵… '문화침식' 비판

전남대의 이광우교수는 지금까지 광주미국문화원의 역할을 미국의 문화 이전을 위한 첨병으로서의 역할로 단정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말한 '문화방사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광선처럼 퍼져 나가는 방사력이 강한 문화권은 약한 문화권을 침식해 들어간다.
"해방 후 우리나라는 문화적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어요. 그렇다고 그 상태가 오래 가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미국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곧 바로 공보원을 통한 문화전파 활동을 대대적으로 개시했어요. 문화란 것은 밖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져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미국공보원의 활동은 우리가 미처 문화에 대한 자각을 갖기도 전에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을 갖기도 전에 우리 문화의 자생력을 꺾어버리고 우리 문호를 서구적, 아니 미국적 문화로 변절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로서 영화나 라디오, 그리고 화보와 같은 인쇄물은 한국의 일반대중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를 통해 제공되는 각종 정보는 급속도로 대중속으로 파고들었다. 광주시내 황금동 한 구석지 4백여 평의 땅 위에 자리잡은 광주미문화원은 전파하는 핵심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최초의 방화 구속자가족협 점거 보도 안돼

1980년 12월 9일 밤9시 50분께. 광주미국문화원 지붕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임종우(당시21세). 정순철(당시26세), 김동혁, 박시형, 윤종혁씨 등 5명이 미문화원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걷어내고 석유와 휘발유를 부어 불을 놓았다. 미국문화에 대한 첫 공격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반미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불꽃이었다.
"그때의 '민주봉화'는 우리들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학혁명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반봉건 반외세의 횃불이 5.18광주민중항쟁으로 구체화되었고, 그 연장선에서 자각된 몇몇의 특수 엘리트들만이 아닌 모든 광주시민의 이름으로 민주봉화를 든 것이었습니다."
최초로 광주미국문화원에 방화하였던 임종수씨(30.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간사)의 말이다. 이 방화사건은 일부 신문에 '전기 누전에 의한 화재'정도로 짤막하게 보도되거나 아예 보도되지 않거나 했다.
이듬해인 1981년 5월 21일. '광주 5.18 구속자가족협의회'의 여성회원들이 광주미문화원을 점거했다. 회장이었던 홍남순 변호사의 부인 윤이정여사(69)와 부회장인 전남대 명노근교수의 부인 안성례여사(51)등 15명의 여성들이 광주미문화원으로 들어가 광주항쟁관련 구속자석방을 촉구하고 '미국의 광주학살 책임'을 따졌다. 윤여사는 미국은 한국을 빨아먹는 놈들'이라고 소리치고 안여사는 '미대사한테 카터한테 전두환보고 구속자 석방하라고 명령하라 해라'고 소리쳤다. 이들은 그 날밤 자정께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떤 신문이든 단 한둘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후 광주미문화원에 방화하였던 정순철씨와 임종수씨등 5명의 카톨릭농민회원들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법정에서 '우리는 5.18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거사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광주항쟁에 대한 책임이 첨예한 문제로 떠올랐다.

전국적으로 번진 점거…반미확산

미문화원에 대한 기습, 점거등 반미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82년 3월 18일에 이른바 '부미방(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이 일어나고, 그 여파가 차츰 잠잠해져 갈 무렵, 같은 해 12월20일 밤 광주미문화원 강당옥상에 화염병이 투척되었다. 해가 바뀌어 83년 9월 22일 대구미문화원에 사제 폭발물이 터지고, 85년 5월 23일에는 서울대 등 5개대 학생 73명에 의한 서울미문화원 점거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85년 12월 2일 오전 11시 50분께. 전남대 최향동군(당시 23세)과 전북대 김영숙양(당시 22세)등 남녀대학생 9명이 광주미문화원 원장실을 점거했다. 그들은 원장실 창문에 태극기를 내걸고 '민중생존 위협하는 수입개방 철폐하라'는 등의 벽보를 써 붙였다. 이들은 점거 9시간 20분만인 밤 9시 8분께 문화원 뒤편 비상구를 통해 들어온 20여명의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때 학생들은 화염병 2개에 불을 붙여 막 던지려고 했던 참이었다.
1988년 2월 26일 오던, 방화, 점거, 화염병투척에 이어 이번에는 광주미문화원에서 폭발물이 발견됐다. 도서관 서고 좌측책장 맨 아래쪽에 꽂혀 있는 '역사사전'이란 5권의 책 뒷면에 탁상시계를 이용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한폭발물이 발견된 것이다. 이는 2월 24일 연세대 신학과 4학년이었던 안래상군(당시 24세)이 설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폭발물은 24일 오후 5시 40분께 처지도록 장치해뒀으나 조작 미숙으로 폭발하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 14일. 광주미문화원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오후 1시55분쯤 전남대, 조선대 학생 1백50여명이 화염병 1백 50여 개와 돌멩이들을 던지며 집단적인 시위를 벌였다. '광주학살 배후조정 미국은 물러가라' 구호는 역시 그것이었다. 이날 시위로 광주미문화원 직원소유 승용차와 대기 중이던 경찰버스, 인근 여관에 음료수를 배달하던 미니트럭 등이 불에 타고 문화원 옆 정희슈퍼의 진열장과 음료수상자들이 깨지는 등  피해가 있었다.

잇단 공격에 이전·폐쇄설 거론

1989년1월 18일. 전남대생 50여명이 '전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은 광주청문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며 또 다시 광주미문화원에 화염병 세례를 퍼부었다.
이튿날인 1월 19일. 서울에서 브룩스 주한미대리대사가 광주에 왔다. 그는 최인기 광주직할시장과 송언종 전남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어제 대학생들에게 기습당한 미문화원 건물을 보고 광주미문화원의 존폐문제를 검토해 볼 때가 오지 않았는가 생각한다.'는 의견을 말했다. 그는 '미문화원의 기능에 대한 재고와 문화원 근무자들의 신변안전이 본인의 관심사'라고 덧붙였다.
브룩스 대리대사는 이날 오후에 이광우 전남대교수, 윤공희 천주교광주대교구 대주교, 남재희 신부, 강신석 목사, 문병란 조선대 교수, 김경천 광주YWCA 총무 등 광주지역 교수 및 재야인사들과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이광우 교수는 그 날 참석자들이 모두 매우 톤이 높은 반미발언을 했었다고 전한다.
  "한마디로 미국은 광주학살을 배후조정, 방조, 묵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진정 한국 국민의 동지냐 아니냐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브룩스를 위시해서 미국 측이 전혀 반박을 할 수 없을 만큼 일방적으로 공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브룩스 대리대사는 서울로 돌아가 평민당측에 한미정책간담회를 요청. 1월 24일 63빌딩에서 평민당 소속 국회원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평민당의원들은 '광주민주항쟁에서 미국 측이 행한 역할이 명쾌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의 반미감정의 큰 원인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브룩스 대리대사는 '광주미문화원이 계속 해서 광주시민들의 표적이 될 경우 인명피해가 우려되고 정상업무 수행이 어렵다'고하면서 광주 미문화원을 광주교외로 옮기는 문제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인근 주민들 '못 살겠다' 항의

1월30일 미국공보원 부원장 니콜라스 밀리씨가 광주에 왔다. 그는 평민당 광주 동구지구당에서 임종진 선전부장(36)등 5명의 당원들로부터 의견을 들었다. 임종진씨는 비공개로 있었던 그 날 면담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우리들은 미문화원이 문화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한다면 그런 피습사태는 없을 것이다. 미문화원의 정보활동, 그리고 미국의 독재정권지지, 그런 이유 때문에 미문화원을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지요. 밀리 부원장의 낯빛이 바뀌돼요. 어떻게 정당에서 일하는 공인으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광주미문화원 건물이 목조건물이라 얼마나 위험할  줄 아느냐고 하면서요. 목조인지 어쩐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앞으로도 학생들이 그냥 두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럼 폐쇄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이때 밀리 부원장은 '광주항쟁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광주미문화원을 일시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바로 다음날인 1월 31일 광주미문화원이 또 다시 화염병 피습을 받았다. 이제는 문화원 인근 황금동과 삼성동의 주민들이 들고 나섰다. 광주미문화원이 자주 피습을 당하고 2개중대의 경찰이 주변을 에워싸는 바람에 인근 주민들은 생계에 지장을 받기에 이르렀다. 문화원 정문 옆 골목에 있는 선술집들과 여관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겼다, 골목에 들어차 있는 진압복 차림의 전투경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소주 집을 찾을 사람도 없었거니와 여관에 드는 사람들은 더욱 없었다. 골목에 있는 슈퍼마켓은 전경들을 상대로 한 PX꼴로 전락하고 말았다.
2월 13일 박동운씨(46)등 인근 주민들은 광주미문화원 맥크럭클린원장을 찾아갔다. 박씨가 그때의 얘기를 들려준다.
  "미문화원이 피습을 당하고 경비가 강화된 뒤 7∼8년이 넘도록 많이 참아왔습니다 86년부터 이전한다는 얘기가 들렸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그대로인데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인근에 세를 얻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월세도 안나오니 어찌 하겠습니까? 평소에 깔려있는 전경만 봐도 속에 불이 날 지경인데, 시내에 시위가 있는 날이면 진압경찰까지 골목에 빽빽이 대기시켜놔요, 우리가 어떻게 장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날 맥크럭클린원장은 자신의 임기인 6월말 이전에 미문화원 이전문제가 결정될 것이며, 광주시 외곽 4∼5곳의 장소를 후보지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주화 방해'…계속되는 폐쇄요구

맥크럭클린원장과 미문화원 인근주민들 사이의 면담이 있은 지 사흘이 지난 2월 16일. 광주미문화원은 올 들어 세 번째 피습을 다했다. 오전 8시 경비경찰의 교대 시간을 기해 남대협 속 대학생 1백여 명이 화염병 50여 개를 던지고 경비 중인 경찰을 쇠파이프로 구타한 뒤 지원 출동한 경찰들에게도 2백여 개의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인근 삼일부동산(대표·김석중) 점포 내부가 완전히 불에 탔다. 또 경비 중이던 박종락상경(23)등 전투경찰 3ad이 코뼈가 부러지고 화상을 입는 등 부상을 당했다. 이로써 광주미문화원은 1980년 이후 모두 9차례의 방화·점거·폭파위협·화염병 피습을 당했다.
또 2월 1일 오후에는 미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회장·안상례)회원 30여명이 광주미문화원 앞에서 시위를 벌렸다. 이들은 대부분 지난 1981년 5월 21일 광주미문화원을 점거했던 여성들로 '만주화 가로막는 미국은 물러가라'등 구호를 외쳤다.
3월 18일 전남대 5.18광장에서는 광주·전남민족민주운동대표자회의 소속회원과 대학생 등 8백 여명이 모여 '미문화원 철폐특위 출정식'을 가졌다. 이날은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7주년이 되는 날로 '식민통치 정보공작 미문화원 철폐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오후 5시 20분께부터는 금남로4가 큰길에 연좌하여 '미문화원 철폐를 위한 시민토론회'를 가졌다.
마침내 5월 3일 맥크러글린원장은 5월 10일을 기해 광주미문화원을 잠정폐쇄한다고 밝혔다. 이후 새로운 문화원 자리가 결정도리 때까지 모든 대외업무를 중단하며, 외부인사의 문화원 출입도 금지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88년 이후 광주미문화원의 활동은 크게 위축돼 왔다. 도서관마저 폐쇄된 상태에서 문화원에 출입하는 사람은 먼저 사복경찰의 의심스런 눈총을 받아가며 진압복 차림의 전투경찰 사이를 뚫고 곁문으로 들어간다. 문화원 현관에 들어서면 경비원에게 용건을 설명하고 나서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금속탐지장치를 지나고 방탄 유리 뒤에 들어앉아 있는 수위에게 신분증을 맡긴다. 그리고 문화원 직원이 안에서 마중을 나와야 마침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과연 5월 10일. 광주 미문화원에 성조기가 게양되지 않았다. 정문에는 '이전기간 중 휴무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나붙었다. 한국에 있는 미국공관 중 최초로 반미운동에 영향을 받아 문을 닫게 된 것이었다. 미국 국무부에서는 광주미문화원이 화재위험성이 적고 보안이 쉬운 곳으로 옮겨가기 위해 이날부터 잠정폐쇄된다고 공식 발표했다.
"잠정폐쇄든 영구폐쇄든 폐쇄라는 의미는 큰 것입니다. 미국이 결국은 광주시민의 반미의식에 무릎을 꿇은 것이니까요."
1980년 광주미문화원에 최초로 방화했던 임종수씨의 말이다. 운동권에서는 광주민문화원의 잠정폐쇄를 반미운동의 승리라고 보고 있다.
"광주에서는 시민들 사이에 반미운동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광주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없이는 광주 시민들 사이에 미국에 대한 분노가 더욱 또렷해지기만 할 것입니다.

'미국문화의 강요는 이제 불가능한 일'

광주미국문화원의 존폐를 둘러싸고 광주시민들 사이에 찬반의견이 분분하다. 전남대 이광우교수는 이 찬반논의를 이렇게 일축한다. 
"이제는 미국문화원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어요. 우리는 이제 미국문화를 비평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국력입니다. 더 이상 미국은 우리에게 그들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가 없어요. 이미 우리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을 갖추고 있습니다. 미국의 문화침략은 이제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보면 해방이후 미문화원을 통한 미국문화의 일방적인 강요가 우리로 하여금 한시라도 빨리 문화적 각성을 갖도록 했다는 점에서 미문화원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공헌을 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광주미문화원이 새로운 장소로 옮겨 다시 문을 연다면 종전과 같은 피습사태는 없을 것인가. 이점에 대해 최초 방화자 임종수씨는 이렇게 말한다.
"광주문제가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의 공격은 계속될 것입니다. 현재의 잠정폐쇄가 우리의 승리이며 그 승리의 연장선상에서 미문화원은 계속 반미운동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광주미문화원에 대한 공격은 미국의 시각에서는 테러요. 파괴요 살상행위로 보이겠지만, 이것은 두 나라 사이의 대등한 관계의 성립을 요구하는 상징입니다."

어쨌든 광주미문화원은 일시 문을 닫았다. 5월 22일자로 미문화원 측이 지금껏 무상으로 사용해 왔던 황금동 80번지 4백41평의 국유재산이 광주직할시 관할로 들어왔다. 그에 따라 미문화원의 이삿짐 일부가 트럭에 실려 옮겨졌다. 다분히 상징적인 행동이었다는 쑥덕거림도 없지 않았지만 아무튼 광주미문화원이 적어도 광주의 중심지 황금동 80번지에서는 '쫓겨나게'되었다. 이날 짐을 옮긴 트럭 운전기사 김인룡씨(개별화물·전남8아 7602호)는 서울 삼각지 근처에 있는 용산 미군기지 영내에 짐을 부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