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와 미국, 45년 9월과 80년

본문

광주와 미국, 45년 9월과 80년

이재의(말)

80년 5월 해방광주는 미국의 '배후조종'에 의해 함락됐다.
그러나 44년 전 미국은 배후조종이 아닌 직접공격으로 광주를 점령했다.
광주를 두 번이나 배신한 미국, 그들은 어떻게 광주시민의 자치에
'해방의 죽음'을 선사했는가.

'역사를 살아온' 어느 할머니의 자각

  80년 5월 21일 오후. 도청을 중심으로 한 금남로에 에서는 공수부대가 쏜 총탄에 맞아 시민들이 풀썩풀썩 쓰러지고 있었다. M16과 기관총의 사격소리에 시민들의 카빈소총이 불꽃을 튀기면서 교차되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 나왔다. 바로 이 시각, 도청으로부터 광주 천변쪽으로 불과 2∼3백여 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광주 미문화원 문을 밀치고 급히 들어서는 할머니가 있었다. 황급히 철수를 준비하고 있던 미문화원 직원 몇 명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는 그중 한 사람의 멱살을 다짜고짜 움켜쥐면서 발악하듯 말을 내뱉는다.
  "이 죽일 놈들아! 왜 죄 없는 우리 광주시민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죽이느냐! 이것이 카터의 도덕정치더란 말이냐!"
이 할머니는 조아라여사(77)였다.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조여사는 해방된 해에는 광주에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부인회에 참가했고, 광주 YWCA를 이끌어온 광주의 산 증인 가운데 한 사람.
'한국군 통수권이 한미연합사령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조여사로서는 계엄군의 광주 투입은 말할 것도 없고 '무고한 시민을 향한 발포'는 미국의 명령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됐기에 미문화원을 찾아간 것이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계엄군을 물리친 '해방광주'는 시민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었다. "광주에서의 봉기는 통상적으로 통제를 벗어나면 나타나는 집합적인 폭력사태가 아니라 대중 참여가 최고조에 이른, 예사의 도시 폭동(riot)과는 다른, 수준 높은 것이었다" (당시 연구차 광주에 왔다가 우연히 5.18항쟁을 목격한 린다 루이스(미국) 교수의 논문 한 대목이다.)
부상자에게 헌혈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병원마다 줄을 이었다. 수천 정의 총기류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음에도 은행 한 곳 털리지 않았다. 수돗물·전기·전화도 안 끊겼다.  4백∼5백여명에 달한 도청안 시민군들에게 한끼도 거르지 낳고 식사가 제공될 만큼 시민들의 성원이 대단했다. 산화해가 시민군들의 관 사는데 보태라고 몇 백만 원씩의 성금이 걷혔다. 시신을 염하고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 입관시키는 궂은 일을 자진해서 도맡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계엄군을 몰아내기까지는 광주KBS, MBC, 세무서가 불탔으나 '해방'기간의 광주에서는 방화한 건 없었다.
정부당국은 광주시가 '치안부재 속에서 약탈이 횡행하고 있다'고 악선전을 했지만 광주 시민들은 오히려 기존의 국가권력 아래서 보다 훨씬 더 긍지와 주체성을 가지고 질서를 유지해 나갔다.
시민들의 능동적 움직임은 '자치권력의 형성'을 위한 노력에서 절정에 달했다. 도청앞 분수대에서는 연일 수십만이 참가한 가운데 궐기대회가 진행됐다. 궐기대회를 통해 분출되는 시민들의 반응은 초기에는 계엄군의 잔학성에 대한 폭로에 머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주적인 민주정부수립'이라는 투쟁의 본질적 내용에 접근해 갔다.
시민들의 생활은 정상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기 위한 각종 행정조직에 해당하는 이러 저런 위원회도 임시적으로 형성돼갔다. 치안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동타격대도 조직됐다. 그 동안 문을 닫았던 상점들도 문을 열기 시작했고 모든 것이 차분한 분위기에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80년 5월 27일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싸웠던 항쟁지도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양현씨(39)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도 질서가 엄격히 유지되었고 시민들의 희생정신은 투철했습니다.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 도망가지 않았고 시민군이 필요로 하는 물자는 자발적으로 내주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사회, 해방의 사회가 바로 광주에서의 며칠 간이었죠."

1945년 8월-해방광주-1980년 5월

1945년8월15일 해방직후의 광주 분위기도 그랬다
해방직후 건설된 '광주시건국준비위원회'에서 노동부장을 지냈던 이기홍(78. 항일독립운동가)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던 광주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선언을 우리 모두를 바쁘게 했제. 우린 사방에다 격문을 써 붙이기 시작했네. '경축, 조선독립'이라고, 식산은행이랑 징병을 주도한 병무청 앞에랑 마구 써 붙였어."
이때 도청 회의실 밖에 운집했던 군중들은 만세를 외치며 금남로 쪽으로 빠져나갔다. 도청회의실 밖에 가설해 놓았던 옥외방송을 통해 해방이 됐다는 것을 알고 기쁨에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충장로와 구 역전통 등 광주 중심가는 만세를 부르며 감격에 들뜬 군중들로 가득했다."
8.15해방은 이 땅의 민중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민족의 자주적인 삶을 압살해 왔던 일제의 식민지적 잔재를 하루 빨리 청산하고 '단절과 비약'의 역사를 끄려나갈 새로운 자주국가를 수립해야 된다는 과제로 나타났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광주사람들의 자각적이 움직임은 중앙의 정치지도자들 못지 않게 발빠른 것이었다.
최초의 움직임은 8월 15일 오후 1시 도청에서 김창선을 중심으로 한 직원 3백여명에 의해 '전남도청 조선인 청년단'이 탄생하는 데서 비롯됐다. 이들의 활동목적은 미군이 들어올 때까지 도청을 지키고 서류·집기 일체를 일인들이 빼돌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었다.
해방직후, 이 땅의 권력은 해방의 감격과 환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인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오후 5시 광주 서중 졸업생 1백명을 중심으로 '화랑단'이 조직됐다. 이들은 조직되자마자 시민들과 함께 시가행진을 하면서 광주공원에 있었던 신사를 때려 부수기도 했다. 이 지역의 민중들은 해방의 감격을 만끽하면서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하여 권력의 공백기에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방지하려 하였고 민중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공공재산과 일본인 소유재산의 반출을 감시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분산적이고 비조직적인 노력들을 지역적으로 통합시키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다. 8월 17일에 결성된 전남거국준비위원회는 그러한 노력이 만들어낸 최초의 결과물이었다. 8월17일 오전 11시. 수백 명의 군중이 모인 광주극장은 해방의 열기로 달아올랐다. 민중의 자치권력인 '조선건국준비 전라남도위원회'가 결성되는 자리였다. 위원장 최홍종, 부위원장 김시중, 강해석, 총무부장 국기열, 산업부장 한길상, 학무부장 김범수가 뽑혔다. 최초의 지도부는 3.1운동에 가담했던 민족주의자로부터 전공사주의자, 언론인, 변호사, 그리고 대주주까지 포함하는 '천일 세력을 제외한' 모든 지도적 인사들의 참여하에 이뤄졌다.
8월 18일 오전 10시. 광주극장에서는 김석(金晳)을 총단장으로, 주봉식(朱奉植)을 부단장으로 하는 '광주청년단'이 조직돼 건준의 치안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후 '광주시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됐고98월30일), 금동교회에서는 조아라여사 등이 참여한 '건준광주부인회'가 결성됐다.
이러한 행정을 담당하는 민중력체계가 속속 건설됨과 아울러 공장에서는 공장관리 자치위원회와 치안대가 신속히 조직됐다.

전남 도인민위원회의 탄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준비위원회로 대표되는 해방직후의 민중자치권력은 그것 자체가 아직 완결된 국가조직은 아니었다.
'국가건설을 준비하는 과도적 조직'에 불과했다. 따라서 건준의 한계를 극복하고 가장 시급한 과제인 반제반봉건의 혁명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보다 일사불란하고 체계적인 국가조직이 필요했다. 이러한 민중적 요구에 의해 등장한 것이 인민공화국이며 그것의 지방적 실천기구가 인민위원회였다.'(「현대사재조명」 광주일보 1989.2.25)
전남건준은 8월17일 조직결성을 마친 후 치안과 행정업무를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초기 전남건준의 조직 구성원은 변혁을 시급히 달성해야 하는 역사발전단계에서 민중의 변혁요구를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위원장 최홍종 중심의 명망가적 성격을 띤 초기 건준의 활동이 과도기적 상황을 일시적으로 담당할 수는 있었으나 지속적인 민중의 변혁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는 곧 건준지도부가 진보적인 민주주의적 인사로 대처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9월 8일 제국관에서 열린 개편 대회에서 최홍종 등 온건보수세력들은 미군 진주가 임박했으므로 '도건준의 간부들을 친미적인 온건인사로 구성해 미군과 상호 유유기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진보적인 인사들은 '그 같은 타협적인 태도는 신생독립국의 자존심에 어긋나는 것' 임을 지적하면서 '미군정의 주둔은 잠정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 세력간의 논쟁은 진보적 인사들의 주장이 전남의 시·군 건준대표로 뽑힌 수백 명의 참석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아 이날 개편된 건준 구성에서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이 상황을 지켜보았던 이기홍옹은 "건준의 개편에서 탈락된 대부분의 인사들은 그 후 미군정의 자문회의에 응하거나 한민당과 관계함으로써 미군정에 매우 타협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말한다.
이때 개편된 도건준 간부로는 위원장에 박준규를 필두로 부위원장에 국기열·강석봉, 조직부장에 장재성등 일제 때부터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거나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이다. 이 조직은 그 후 각 시·군에서 민주적 토론을 거쳐 인민위원회로 개편된 후 그 대표들이 모여, 10월 10일 제 3회 전남인민 대표자대회에서 전남도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박준규를 위원장으로 한 71명의위원으로 구성됐다. 이 인민위원회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계층의 대표자를 포괄한 정부 형태였다. 그러나 '자주광주'를 세우려는 노력은 오래지 않아 한반도에 진주한 미점령군에 의해 처절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고립된 광주는 미국을 믿었다.

80년 5월 해방광주는 육지 안에 떠있는 외로운 섬이 됐다. 새로운 전투적인 항쟁지도부가 결성되고 행정권력 차원의 질서도 잡혀갔지만 한편으로 고립무원의 진공상태에서 주어진 해방공간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불안감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깨져버릴지 모를 해방공간의 질식할 것 같은 자유스러움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때문에 해방의 의미가 일상생활로 자리잡아 가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사람들은 광주를 포위하고 있는 억압과 폭력의 실체를 생각하면서 몸서리치곤 했다. 이러한 광주시민들의 불안감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하는 심정으로 환치되고 있었다. 불안감은 외부에 대한 기대로 변해갔다. 해방공간 5일째를 맞은 80년 5월 26일 광주시내에는 이런 유인물이 뿌려졌다.
  "……미제7연 함대 소속 항공모함 2척이 부산에 정박하여 전두환 일파의 더 이상 무모한 만행에 대해 견제하고 있으며…"라고 이어지는 이 유인물은 마지막까지 '80만 민주시민의 결의'를 통해 '민주정부수립'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때 광주 사람들에게 미국은 유일한 한 가닥 남은 희망일 수도 있었다. 그 날 도청수습대책위 내에서 항쟁지도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던 핵심적 인물중의 한 사람인 윤상원은 온건파에 속한 사람을 설득하여 투쟁에 동참시키기 위해 이런 논리를 제시한다. "우리의 투쟁은 앞으로 1주일 정도만 더 버티면 반드시 승리한다. 미국이 전두환 군사세력을 돕지 않고 우리를 도울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 내에서 군사독재세력의 집권을 반대한다. 그것이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되기 때문이다." (당시 투쟁지도부 민원실장) 이 말을 하고 있을 윤열사 (그는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적군의 총탄에 맞아 산화해갔다.)의 눈빛은 "이글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당시 주한 미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의 증언에 의하면 한미연합사로부터 작전지휘권을 이양 받은 20사단은 몇 시간 앞둔 최후의 광주 진압작전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마크 피터슨「미국과 광주사건」참조) 피터슨 교수에 의하면 미국은 이미 12·12쿠데타 때부터 일관되게 전두환 세력을 지지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의 세력이 한국군부 내에서 실세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미국은 '쿠데타 지도자들과 조용히 협력함으로써 새로운 쿠데타의 피해를 억제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5.18광주사태는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정권을 잡기 위해 불가피하게 거쳐야할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되었다. 때문에 미국은 한국 군부내 실세라고 판단된 전두환세력의 쿠데타가 어서 빨리 안정된 궤도에 오르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한 모든 가능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항쟁당시 광주시민 대부분이 마지막 한 가닥 희망으로 믿고 있었던 미국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미군의 최초 광주점령 45년 9월 10일

  역사는 과연 반복되는 것인가, 45년 8월말 어느 날 오후, 광주시 건준 노동부장 이기홍은 지금 막 미군 B-29 비행기에서 뿌려진 삐라 2장을 들고 헐레벌떡 건준사무실(지금의 신동아 극장)로 뛰어 들었다. 사무실에는 박준규, 국기열, 강석봉 등이 이미 입수한 동일한 삐라를 들고 근심스런 표정들이었다. 삐라의 요지는 대충 이러했다.

  미점령군은 곧 한국에 상륙한다. 미군이 상륙할 때가지 도든 행정기구는 현행 그대로 유지한다.

  말하자면 일제 총독부를 그대로 유지시키고 일본인의 통치도 미군이 들어올 때까지는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해방의 분위기에 출렁거리던 건준사무실에서는 침통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때 이들은 '주권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 온 것이 아니고 미국으로 넘어가 버렸다'고 판단했다.
1945년 9월10일 미군의 최초 광주점령 8월15일부터 26일간의 해방광주에서 이 지역 민중들이 형성해 놓은 자치적인 노력들이 부정되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1945년 9월10일 오후 2시. 야전복 차림의 미육군 소령 한 사람이 전남도지사실에 들어섰다. 혼자서 지사실을 지키고 있던 일본인 비서는 깜짝 놀라 허겁지겁 인사를 한 후 소령의 눈치를 살폈다. 소령은 바로 일본인 지사를 찾았다.… 야기지사와 만난 소령은 출납 중지의 임무를 띠고 파견됐다면서 통역과 승용차를 요구했다.… 그 길로 도청 금고를 잠그고 출납을 중지시킨 후 한국은행, 종연방직회사(전방·일신방직 전신), 광주시청에 들러서도 일체의 출납을 중단시켰다.
미군이 최초로 행한 출납중지 조치는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인민위원회의 활동자금을 막아 보겠다는 의도였다. 당시 종연방직 공장관리 자치위원회는 광주시 건준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건준의 행정적인 지시를 받고 있었던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로부터 13일 후인 9월 23일 킬버드소령을 책임자로, 20명의 제 40사단 전술군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10월 7일 야기지사를 만나 도정(道政)을 인수했다. 10월 22일 제 6산단 보병20연대가 진주하여 미약한 40사단 전술군을 교체하면서 본격적인 점령작전을 펼쳐나간다. 이 지역에 도착한 최초의 군정단위 부대는 33중대, 다음날 53·55·61·69중대가 연이어 진주했다. 11월 9일과 11월 22일에 59중대와 45중대가 최종적으로 도착했다. 이둘 중 일부는 도내 각시·군으로 진주하였다. 이와 함께 10월 23일에는 101군정대가 도착했다. 총18명인 이들은 2명의 해군대위를 포함, 중위에서 소령에 이르기까지 장교 8명과 10명의 하사관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미국이 일본의 항복에 대비해 육해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군정요원 교육을 받고 한국에 투입된 구정요원 2천명중의 일부였다. 이들이 받은 교육 내용은 일본의 조선관구 사령부에서 제공한 정보에 기초해서 실시된 것이었다. "지금 한국에는 현 상황을 이용하여 평화와 질서를 깨뜨리려는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선동가들이 날뛰고 있다."는 정보였다. 하지와 그의 24군단은 '소련의 남하를 막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좌익세력도 억압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은 더 이상 적이 될 수 없고 한국인들이 적과 유사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하지는 "한국에서의 임무수행을 적국에서처럼 행하라"고 교육시켜 미군정요원들을 투입시켰던 것이다.

미군, 친일경찰 비밀경찰 동원

이와 같은 미군의 입장은 맥아더의 포고령을 통해 삐라 혹은 방송으로 광주에 알려졌다.「광복30년」9전남일보사 발행)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편 무덕전(현 전남 도청앞 상무관자리. 이곳은 80년 5월 자치기간 도안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은 시민들의 시신이 안치됐던 장소다.)에 자리잡은 광주청년단 본부, 단장 김석은 이번 운동회를 계기로 시민의 단결을 호소하고 질서유지에 대한 방안을 발표할 작정이었다. 이때 주봉식(부단장)이 허겁지겁 사무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미군정이 방송으로 포고령을 발표하고 있소. 일반 공무원뿐만 아니라 경찰관은 자기 직장을 지키라는 내용이오."  "뭣이라고요?" 일반 공무원은 몰라도 경찰공무원까지 자리를 지키도록 포고령을 내린 것은 김석으로 보아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일제하에서 받은 쓰라린 상처를  되새기지 않더라도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맥아더의 포고령에 기초해 미군이 광주에 진주하자마자 행한, 광주시민에 대한 최초의 배신은 일제하 고등계 형사들을 주축으로 '전남경찰건설위원회'를 결성한 것이었다. 9월25일 오전 10시. 도경찰부 회의실에서는 김의택의 사회로 전남경찰관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는 현지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대 및 청년단의 불법적(미군정포고령2호에 의해) 행위를 저지하고 악화된 전남의 치안을 바로잡자는 등의 결의문도 채택됐다. 위원장은 노주봉이 뽑혔다. 노주봉은 일제때 전남에서 가장 높은 경시직을 맡을 정도로 악명 높은 특별 고등계 형사이다.
경찰건설위원회가 노주봉의 지휘아래 '광주치안대, 화랑단, 청년단 등을 해산시킬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짰다.'는 정보가 청년단 본부에 흘러들어 왔다. 미군정청의 정책에 의해 하루아침에 불법단체가 되어버린 광주치안대는 며칠 전까지 만해도 친일민족반역자라고 해서 자신들이 '즉결민족심판'을 가했던 친일경찰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돼버렸다.
치안대와 청년단은 노주봉을 즉각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노주봉은 항상 피습의 위험성 때문에 여러 명의 무장경관이 호위하곤 했다. 치안대와 청년단은 집무를 마치고 2명의 무장경관에 의해 호위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노주봉을 비밀리에 처치하기로 했다 으슥한 그의 집앞 골목길에서 청년 하나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었다. 당황해하는 노주봉과 호위병들을 향해 또 다른 청년 2명이 권총을 발사했다. 노주봉과 호위병 한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 사건은 다음날 광주시민들 사시에서 통쾌한 화젯거리로 등장했었다.
10월 28일 미군정의 전위대 역할을 수행하던 도비밀 경찰은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이 도지사와 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치안대가 도지사·부지사·경찰서장·20헌병대 지휘관 등 모든 미군장교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적발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음모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증명될 수 없었으나 '한국에서는 정치적 암살이 일상적인 것'이라는 기가 막힌 이유 하나로 미군정은 도인민위를 파괴시키려 들었다. 그 날 김석은 포고령 2호 위반혐의로 체로되 즉시 유죄선고가 내려졌다. 사흘후인 10월 31일 미군과 재건된 광주경찰서 형사 수십 명이 도인민위 치안부를 습격했다. 치안부장 이덕우도 다음날 체포 구속됐다. 이런식으로 미군정은 경찰 혹은 미군을 중무장시켜 도내 각 시·군(치안대가 장악하고 있는 19개) 경찰서를 12월말까지 모두 습격, 점령 완료했다. 전남도인민위는 치안부가 습격 당한 이틀후인 11월 2일 활동포기 각서를 미군정에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46년 2월말 전남도 미군정장관 프라이스는 경찰청장 막명제를 지사실로 불러들였다. "박청장, 인민위을 그대로 두고만 볼 것이오?" 프라이스는 화가 난 어조다
"……" 박명제의 대답이 늦어지자 프라이스는 대뜸 결론부터 내렸다. "내가 결정하겠소 인민위원회 위원장 박준규와 부위원장 국기열을 체포하시오. 여기는 점령지구니까 미군정 포고2호 위반으로 체포하란 말이요." 이렇게 해서 박준규와 국기열이 체포되고 도인민위 간판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도인민위는 간판이라도 걸어놓고 끝까지 버텨보자고 했제. 그러나 중무장한 미군의 힘 앞에서는 불가항력이었어. 그때 이후로 광주가, 한반도가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여요."
이기홍 옹의 말이다.

나는 확실한 조선의 자손이지만…

80년 5월 '해방광주'가 미국의 '배후조종'에 의해 함락됐다면 45년 9월 '해방광주'는 미군의 보다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 파괴되어버렸다. 해방후 44년 간 두 번이나 미국에 의해 좌절된 해방의 도시 광주에서 80년 5월 아래 미문화원은 10여차례나 학생들로부터 공격당했다. 이젠 더 이상 광주시내에서 미문화원이 버틸 수 없어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을 비치고 있다. 반외세 자주화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져가고 있는 오늘, 44년전 도인민위원회 치안부장 이덕우씨가 미군정 재판을 받고 나서 한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나는 확실히 조선의 자손이며 이 법정은 틀림없이 조선 땅에 있지만…! 나는 이 법정에서 전일에는 일본인 재판관의 재판을 받고, 조선이 해방됐다는 오늘 다시 미국인 재판관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1945. 12. 2 광주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