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미국은 광주사태 책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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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광주사태 책임이 없다.
마크 피터슨(이삼성 옮김)
● 다음 글은 1988년 미국 웨스트 뷰 (West View) 출판사에서 발행된 광주사태 논문집「광주봉기』 (The Kwangju uprising)에 들어 있는 마크 피터슨의 논문 「미국인들과 광주사태」 (Americans and the Kwang-ju Incident)를 옳긴 것이다. 도날드와 클라크가 편집한 이 책은 광주사태를 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마크 피터슨은 미국 뉴타주 브리검영대 극동문화연구소에서 극동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1. 광주봉기와 전두환 그리고 육사 11기
어떤 현상들을 공평하게,그리고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역사가에게 광주봉기는 일련의 재미있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광주의 경우 많은 설명들이 감정적이고, 당파적이며 부정확하다. 이 대부분의 문제들은 이 사태가 매우 최근에 일어난 것이라는 데에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사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정부의 정통성 여부, 회개하지 않는 군부의 태도,그리고 용서할 태세가 아닌 광주시민들, 이런 문제들은 모두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다. 정보도 역시 문제가 있다. 신문과 잡지들은 중요한 공적인 기록들을 실어왔지만 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해답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의 한가지 이점은 당시 현장의 참여자들 중에서 기꺼이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공식적인 보도와 목격담,공식기록,그리고 당시 한국에 있었던 미국의 두 고위관리인 월리엄 글라이스틴 대사와 존 위컴 장군과 최근에 가진 인터뷰에 기초한 것이다.
광주봉기에 관한 여러 가지 보도들을 제시하고 지금 갖고 있는 자료들을 분석하기 전에 우선 실제 발생한 사태의 기본적인 개요를 이야기하여야겠다. 중요한 것은 광주를 역사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이다. 얘기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에서 시작해야 하며 이 사건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소장에 의한 군사쿠데타에의 길을 열었다. 애당초는 소규모였던 이 쿠데타를 통해서 전장군과 그의 육사 11기 (1955년 졸업반)의 동기생들인 일단의 동료들이 군부를 장악했다. 군부는 점차로 계엄령하에서 사회의 모든 분야로 통제를 확대해 나갔으며 처음에 이들이 내세운 구실은 사회를 청소 혹은 정화한다는 것이었다. 군부는 병영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천명했지만 12월 12 일 에서 5월 초 사이에 그것의 영향력은 점차로 증대해 갔다. 전두환의 개인적인 권력도 동시에 커져갔다. 그가 한국 중앙정보부의 부장이 된 4월 중순경엔 전이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이 행동을 비판했다). 일부 민간인들은 이제 "군사정권이 서기에는 너무 성숙한"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계엄령 철폐를 위한 운등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 광주민중의 저항과 특전단의 잔혹행위
학생데모는 캠퍼스를 벗어나 거리로 번졌으며 5월 15일 최고조에 달했다.한편 교수들,종교지도자들 및 문인들은 계엄령 종식을 요구하는 서명을 벌였다. 국회의원들은 다음 월요일인 5월 19일 계엄령의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1961년 군사쿠데타의 19번째 기념일인 1980년 5월 16일 (금요일)은 지극히 조용했다. 학생지도자들은 군부의 공작정치에 대한 경계,그리고 흑색공작 요원들에 의한 침투를 의심하여 모든 데모를 취소했다. 토요일인 5월 17일 군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 첫 조짐들이 드러났다. 앞으로의 행동계획에 관해 토론하고 있던 학생지도자들의 모임을 파괴하기 위해 군대가 이화여자대학 캠퍼스를 덮쳤던 것이다. 이 학생들 중에는 정부가 자신들에게 굴복해 있는 처지라고 믿고 더 큰 데모로 계속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군부는 아직도 사회를 지배할 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한 접근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결국은 후자의 주장이 맞은 것이 드러나고 말았지만 불행하게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군인들이 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대부분 체포하고 소수만이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했다 (이 학생회의의 자세한 내용을 말해준 사람은 이날 거기에서 도망쳐서 몇 달간 도피해 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이날 밤 늦게 3김 - 김 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체포되었고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서울에서의 데모진압은 효과적이었다. 검은 혁띠를 착용해서 구별되는 검은 베레모의 특전 단들이 주요 대학에 진주하고 작은 대학들에서는 일반정규군대가 야영을 시작했다. 운동장에 세워진 천막들은 눈에 잘 띄었고 군인들이 모든 대학 캠퍼스의 문을 지키며 교대로 근무하면서 접근을 통제했다.
이 전술은 한국의 다른지역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광주시에서는 대단한 실패였다. 광주에서는 데모가 이미 캠퍼스 밖으로 번졌으며 도청 근처의 시내 한복판에 집중되었다. 군부는 그들이 이미 한발 늦었으며 데모를 캠퍼스 안에서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서울에서 군인들이 사용한 방식에 비해 더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다. 일요일인 5월 18일 오후 3시경 검은 베레들은 작은 단위로 나뉘어 시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데모대나 데모대로 보이는 사람들을 곤봉과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하였다. 데모대는 안전을 찾아 근처의 건물들 안으로 피신했다. 검은 베레들은 건물에 들어가서 데모했는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젊은 사람은 무조건 곤봉으로 치고 때렸다. 이들이 무차별적인 잔인성을 보이자, 이미 분노해 있던 핵심 학생세력,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도 일반 시민들이 격분하여 데모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월요일,검은 베레들은 데모진압에 실패하자 폭력의 수준을 더욱 높여 학생과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여 거리에서 몰아내려는 작전을 시도했다. 화요일에는 폭력의 수준이 더욱 높아졌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검은 베레들은 지방경찰을 소외시켰으며 그 결과 많은 경찰관들이 강도적인 특전단과 싸우는 시민들에 협력하였다. 파출소와 그들의 무기고가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수요일에 벌어졌는데, 이날 시민들은 검은 베레들을 광주시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행동은 검은 베레들의 요새였던 도청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 공격은 택시기사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시내의 반대쪽 끝에 있는 한운동장에 집결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여러 동료들이 피를 흘리고 부상당한 시민들을 각 병원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병원은 도청 뒤에 있었다- 에 실어 나르다가 특전단에게 당한 잔혹행위에 대한 대응을 계획하기 위한 것이었다. 회의를 하고 공격을 계획한 후에 기사들은 택시로 여러개의 열을 지어 금남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도청 주변의 방어망을 파괴했다. 그리고 검은 베레들을 분산시키면서 이들을 시의 끝까지 몰아냈다. 이렇게 해서 군대는 비무장한 시민들의 조직적인 노력에 밀려 패주한 것이다.
다음 주 동안,즉 화요일인 5월 27일 이른 아침까지 시민들은 군대와 협상을 하는 일과 외부세계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광주시의 일을 맡아 나갈 여러 가지 위원회를 조직했다. 정부의 보도와는 반대로 광주시의 상황은 무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임시조직들,그리고 광주시 내부의 협조정신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재된 타결이 있을 것으로 희망했으나 결국은 군대가 광주시를 재침탈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침내 한국 정규군인 20사단이 서울지력에서의 임무로부터 해제되어 화요일 아침 여명이 밝아올 무렵 광주시에 투입되었다. 이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는 대략 30명이었다.저항의 중심거점이었던 도청이 떨어지면서 군대는 시 전체를 장악하고 계엄령 질서를 재확립 했다. 봉기는 끝난 것이다.
3. 미국이 20사단와 광주투입을 승인하다
당시 한국정부가 제시한 공식적인 보도는 '불순세력'이 광주시민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남한에서 불순세력이라고 할 때는 북한의 첩자들 혹은 북한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말한다. 특히 5월 18일 이른 아침에 체포된 김대중은 그가 이미 구속되고 난 후에 시작된 저항운동을 교사한 혐의로 기소 되었다(계엄령하에서 재판을 받은 김은 유죄로 결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이 선고는 결국에는 '무기형'으로,그 다음엔 다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김에 대한 죄목이 '억지'(far-fetched)라는 견해를 미국이 표명함으로써 그런 감형이 촉진되었다. 실제로는 김은 미국에서 2년의 망명생활을 할 수 있게 허용되었으며 그 다음엔 2년간의 가택연금이 뒤따랐고 1987년 여름에 한국의 민주화의 일부로서 그의 시민적 권리가 회복되었다).
이 공식적인 보도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봉기가 일어난 초기에 네 명의 군인과 한 명의 시민만이 죽었다는 정부의 발표-사실은 많은 시민이 죽었는데도-는 시민들을 크게 분노케 하여 이들은 그 정부발표를 방송한 문화방송사가 있는 건물을 불태웠다. 이 봉기 기간에 파괴된 주요 건물은 MBC건물, 세무서 그리 고 노동부 사무소뿐이었다.
목격담은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앞에서 언급한 문화방송사의 경우 문제가 되었던.점인 사망자 수의 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정부는 대략 200명 정도가 죽었다고 얘기하는 반면에 다른 이들은 2천 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보다 낫고 보다 합리적인 목격자의 진술의 하나는 당시 평화봉사단원이었으며 지금은 하와이 대학교의 대학원생인 팀 완버그가 쓴 것이다(그의 설명은 하와이 대학의 한국학 센터가 발행하는 잡지인 Korean Studies제 11권에 실려 있다).완버그는 한 사람의 죽음도 너무나 많은 것 이 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망자수를 둘러 싼 논쟁을 처리하고 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으며 글라이스틴 대사도 완버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죽은이에 대한 장례식을 매우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1960년4월 19일 죽음을 당한 이들 같은 순교자들을,특별한식을 거행하여 기념하는 이 나라에서 죽은 이들이 제대로 기념되게끔 될 수 있기 전에는 광주사태는 끝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들의 숫자를 셈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죽은 이들의 가족들은 아들딸이나 다른 가족성원이 죽었다는 사실을 정부의 보복이 두려워 숨기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많은 목격자들이 진술한 것 중의 하나는 미국의 개입에 관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여러 목격자들은 한국군대가 사용한 군사장비가 미국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미국무성은 검은 베레들의 행동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알지도 못했다고 누차 주장했다. 그러나 국무성은 광주시를 탈환하기 위해서 20사단을 한미연합사통제에서 해제하는 것을 허용했음을 시인했다.
4. 미국은 12·12쿠데타를 제어할 능력이 없었다
미국정부와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정부를 대표하는 이들의 역할은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으나 그 대표자들 자신, 즉 월리엄 글라이스틴 대사와 존 위컴 장군은 최근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글라이스틴은 한국에서 그의 견해를 밝히고 있으며 또 그가 주한대사로 있는 동안에 벌어졌던 네 가지의 주요사건에 관한 내부자로서의 정보 몇 가지를 적고 있다.
1987년 초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장군은 광주사태를 둘러싼 사건들에 관해서 나와 토론하기로 동의했는데 이 인터뷰들은 많은 통찰을 제공해주었다.현직 육군참모총장이 그의 과거활동에 대해 인터뷰에 응한 것은 특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느껴졌었다. 두 사람은 모두 솔직했으며 알려져 있는 사실들 중 일부를 바로잡으려 호 애썼다. 이들은 광주봉기 이후에 성장한 소위 '신화'들과 1980년 군사쿠데타와 관련한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위컴은 훌륭한 군인 스타일로 사무적인 방식으로 얘기했으며 그가 당시 내린·결정들을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고 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학자적 외교관인 글라이스틴은 매우 회고적인 태도였다. 그는 그들이 고려할 수 있었거나 혹은 고려했어야 할 여러 가지 대안들에 관한 문제들을 즐겨 토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가 다같이 당시 그들이 결정을 내릴 때 서로 긴밀하게 일했으며 서로 화합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의 입장은 전두환이 한국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1979년 12월 12일의 쿠데타는 너무나 잘 실행되어서 그들로서는 그 쿠데타를 수용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1980년 5월 신군부가 광주봉기를 다룬 방식은 엄청난 실패작이었고 이 광주의 상처는 아직도 정부를 곤란케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광주봉기의 진압은 단계적인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의 한단계였다. 즉 그것은 12월에 시작되어 다음해 8월 전두환의 대통령선출에서 완성된 일련의 사태의 하나였던 것이다.
미국의 행등에 대한 비판은 12월 12일 사태에 대해 미국이 보인 반응에 대한 것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봉기를 예방할 수 있었을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12월 12일에 쿠데타를 예방하거나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었을 것이다.미국관리들은 왜 쿠데타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뭔가 좀더 하지 못했는가? 이날 밤의 사태에'관한 글라이스틴과 위컴이 진술한 것을 보면, 전두환의 상관들의 휘하에 있던 한국군대는 전과 그의 동료들이 매우 잘 계획하고 갈 실행한 쿠데타를 중지시킬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해진다. 그렇다면 하물며 미국이 어떻게 이 쿠데타를 방지할 수 있었겠는가? 글라이스틴은 용산의 사우스포스트에 있는 미 8군사령부 벙커에 오후 7시 30분경 연락을 받고 들어갔다. 위컴은 그보다 몇 분 전에 도착해 있었다. 비무장지대 (DMZ)지역과 그리고 한국군부대가 주둔하거나 이동해간 지역에 있던 미군부대들을 포함한 여러 가지 정보원으로부터 그들은 일단의 군대가 서울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 사실 이외에 그들이 아는 것은 그 군대가 북한군은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9시경에 국방장관 노재현이 합참의장 김종환과 함께 그 벙커에 들어왔다. 곧 그들은 이동중인 군부대는 당시 계엄사내 박대통령 암살사건 수사부장이며 육군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이 장악하고 있는 부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가지 방도는 고위 한국군 장성들이 자기들 휘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서을의 거리에서 전두환의 군대와 대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 방도를 강구하기 시작했으나 위컴 장군이 새벽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그들은 또 그런 명령을 내리더라도 전두환이 그 자신이 갖고 있는 지휘라인,즉 일선부대에 배치된 보안사 장교들을 통해서 그 명령의 실행을 저지할수 있다는 것을 인식했었을 것이다) .
그날 저녁 나중에 쿠데타 지도자들은 노국방장관과 김 합참의장에게 벙커에서 나와 국방부건물로 와서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그들에게 가지 말라고 권유했으나 그들은 떠났다. 국방부에 대한공격이 있은 다음 이들 두 사람은 체포되었으며 정승화 장군 등에 대한 체포영장에 최규하 대통령과 함께 강제로 서명해야 했다(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당시 헌법상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장군은 대통령이 체포를 허가하기 전에 이미 폭력에 의해 체포되어 있었던 점이다).
이어서 정승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에 공모한 죄로 기소되었다. 그는 박이 살해된 날 밤에 현장에 (옆 건물이었지만) 있었으며 그후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정은 12월 12일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일설에 의하면 정승화가 체포된 이유는 그가 전두환을 동해안쪽 먼 사령부로 전출명령을 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며,곧 전출될 것이라는 말이 전두환 귀에 들어가자 정승화를 거세하기 위한 쿠데타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가 뒤집어 쓴 죄 목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정의 생명은 위컴에 의해서 무심코 구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위컴은 한국군 고위 장성들에게 으레 했던 것처럼,정이 감옥에 있었지만 그에게 생일카드를 보냈던 것이다. 이때 전두환은 즉시 글라이스틴을 찾아가서 위컴이 한국내정에 간섭한 데 대해 해명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정은 정대로 그 카드를 받아들고 눈물을 흘렸다. 정은 그 카드가 자신이 사형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위컴이, 보장한 것으로 해석했던 까닭이다).그는 결국 20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건강상 이유로 석방되었다.
5. "언젠가 당신들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쿠데타에 대한 소문을 위컴은 계속 접했었다. 그때마다 위컴은 한국 육군과 국방부에 그런 소문을 전달했었다. 그러나 이들 한국군 장성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그들은 마치 '한국인들 자신이 알기 전에 어떻게 미국인이 그런 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는 듯한 태도였다.
쿠데타 후에 전두환은 먼저 글라이스틴을 방문했으며 그 다음 하루나 이틀 후에 위컴을 방문했다. 그의 메세지는, 자신들은 "부패를 척결하려고 하며 그런 다음엔 병영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전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믿어주시오,우리가 뭘 하는지 잘 보아주시오.그러면 당신들은 언젠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오." 글라이스틴과 위컴은 다같이 이 장군의 메시지를 의심했다. 위컴은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의 문서를 뒤져보고 그때도 박은 김종필을 당시 서울의 유엔사령관이었던 카터 매그루더 장군에게 보내 전두환이 말한 것과 똑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매그루더가 하와이 주둔 태평양지구 총사령관에게 보고한 내용에는 김종필이 매그루더에게 그들은 "부패를 척결하려고 하며 그런 다음엔 병영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김은 또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를 믿어주시오,우리가 뭘 하는지 잘 보아주시오,그러면 당신들은 언젠가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오."
전두환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 자신은 어떤 정치적 야심도 없다고 맹세했다.그들은 그 쿠데타는 철저하게 군사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했다. 부패한 민간지도자들과 24년간이나 4성 장군으로 있었던 사람들을 포함한 늙은 장군들을 제거하기 위한 집안청소라고 주장했다. 전두환 등의 젊은 장군들은 최고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길을 치우는 작업을 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미국관리들은 쿠데타가 곧 있을 거라는 정보에 접하고도 왜 행동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분명 그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한도내에서 행동을 취했다. 미국관리들은 공개적으로는 새로운 장성 그룹과 협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적으로는 그들을 비판했다. 이들 한국장성들은 내정간섭이라면서 그런 비판을 거부했다. 미국인들이 가진 몇가지 불만은 일부 언론에 흘러 나갔지만 워싱턴의 미국정부는 어떠한 공식적 비판도 제기하지 않았다.
글라이스틴은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 만일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에 대비한 비상사태 대비계획을 세웠다. 그의 관심사는 첫째는 군부내의 전투를 방지하는 것이었고,둘째는 북한의 개입을 막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정치적 불안정을 최소화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그의 목적은 3개항의 계획을 내포했다. 첫째 , 비용 (유혈 사태 )을 줄인다, 둘째 , 쿠데타의 지도자들과 접촉을 유지한다(이러한 접촉이 없이는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셋째, 미국이 바보 같은 곤란한 입장에 처하는 일이 없게 한다(keep the United States from being put in a foolish position) . 이 마지막 점에 관해서는 특히, 글라이스틴은 1961년 쿠데타 당시처럼 미국이 (쿠데타 지도자들에게-역자) 나쁘게 보였던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썼다. 1961년엔 매그루더 장군이 유엔사령관으로서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여 박정희 장군에게 병영으로 복귀할 것을 실제 명령한 셈이었는데 이것은 지내놓고 생각해보면 소용없고 순진한 행동이었다. 쿠데타를 조직한 사람들은 기꺼이 전투에 임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태세였던 것이다.
미국의 입장을 검토함에 있어 몇가지 문제들이 떠오른다. 미국이 쿠데타의 진행을 반드시 알고 있었던가? 쿠데타는 그 본질상 죽이기 아니면 죽기를 결단한 무장군인들에 의한 갑작스럽고 은밀한 행동이다. 미국관리들은 소문을 들었지만 한국군내 고위 장성들은 이를 무시했다. 미국은 1979년 12월 12일 밤에 뭔가 좀더 할 수 없었는가? 글라이슨틴은 워싱턴으로부터의 메시지는 군인들에게 각자의 위치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한 명령을 내렸더라도 1961년 5월 박정희의 쿠데타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무시되고 말았을 것이다.
6. 조용하게 같이 얼하고 가끔 공개적인 입장을 취한 미국
그후 미국은 무엇을 해야 했었는가? 글라이스틴은 일련의 결정을 통해 미국의 대응을 이끌어 나갔다. 그 첫 결정은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면서 권력의 핵심이 어디로 기우는지를 살피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 다음 쿠데타의 배후에 있는 권력을 파악한 연후에 그 권력집단을 어떻게 다룰지를 결정했다. 그는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어느 쪽과도 접촉선을 개방해놓는 것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전두환과도 접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최규하 대통령과도 접촉하는 이중적인 접근이 가장 생산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라이스틴은 12월 13일 아침 최규하를 방문했다. 글라이스틴은 그때 이미 최는 '독자적인 행동자'가 아닌 것이 분명했었다고 말했다.
12월 13일 오후 전장군은 정동에 있는 대사관저로 글라이스틴을 방문했다. 전은 이번 사태는 젊은 군인들과 늙은 군인들과의 싸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들은 민주적 과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헌정제도나 과정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은 대통령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자신은 박정희에 대해서 비판적이라고 하면서 박은 너무 오랫동안 권력을 잡으려고 애썼다고 말하였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이 새로운 쿠데타의 권력기반을 파악하고 평가한 미국은 대체로 세 가지의 선택을 앞에 놓고 있었다. 첫째,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역쿠데타를 지원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는 길, 둘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길, 셋째, 경고를 발하면서 불쾌한 태도로 관망하는것. 그러나 한국군부 전체에서 이 쿠데타가 한결같은 강력한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선택의 여지는 제한된 것이었다. 미국은 전의 쿠데타에 단결된 지지를 보인데 대해 매우 놀랐었다고 글라이스틴은 말했다. 위컴에 따르면 그와 글라이스틴에게 누군가가 접근하여 역쿠데타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 하였는데 , 그들은 그 군인들에게 그러려거든 성공하는데 필요한 군부내의 지지를 확보해 오라고 하면서-그들이 그런 지지 기반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 '쫓아버렸다'고 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맘에 드는 선택은 아니었다. 미국 대사관은 워싱턴과 협의 끝에 이 새로운 쿠데타로 인한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은 이 쿠데타지도자들과 대부분의 경우에는 조용하게 같이 일하고 가끔가다 공개적인 입장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후자의 한 예는 1980년 4월 전두환이 한국헌법을 위반하면서 스스로를 한국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을 때,미국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그 행동을 비 판한 것이었다.
쿠데타를 완성하는 데 있어 다음 단계는 1980년 5월 17일 밤과 5월 18일 아침에 각기 3김을 체포하고 계엄령을 확대시킨 일이었으며 이 사건들이 광주봉기를 이끌었다. 미국은 3김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이런 요구는 워싱턴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는 미국문화원체제 (서울·부산·대구·광주에 있는 네 개의 사무소)를 통해서 공개되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광주에서의 폭력과 그에 뒤따른 봉기의 와중에서 제대로 인식되지 않은 채 지나쳐졌다.
글라이스틴은 최근에 쓴 글에서 미 대사관은 처음에는 광주에서 전개된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당시 서울에서 김대중의 체포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은 계속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대사관과 미군사령부는 결정적인 사태가 이미 벌어지고 난 다음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 한국당국은 소란스러운 그러나 특별히 폭력적이지는 않았던 광주에서의 데모를 경찰병력 이외에 한미연합사 휘하에 있지 않았고 또 있어본 일도 없는 특전단을 동원하여 진압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검은 베레들은 지극히 도발적인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광주사람들을 분노케 하여 이들 광주사람들이 급격히 폭력의 수준을 높이게 만들었으며,정부군을 죽이고 나아가 이들 정부군을 며칠 동안이나 광주시 밖의 방위 선으로 몰아내게 했던 것이다. "
일단 한국군대가 광주시에서 내몰린 다음에 미국이 취한 행동들에 관해서는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얘기 한다.
"우리가 가진 영향력의 한계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고 또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정부는 서울과 워싱턴에서 즉각 폭력을 개탄하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우리는 가톨릭 대주교가 사태해결을 위해 중재하려는 노력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그의 노력은 마지막 이틀 전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주고 있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한국군으로 하여금 대화를 계속하고 더 이상의 폭력을 축소화하도록 권유했다. "
글라이스틴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지내놓고 생각해보면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관한 궁극적인 인식과 관련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한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많은 공개성명을 발표했다. 그 중에는 양측에게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북한에게는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성명을 조심스럽게 작성한 일이 있었다. 한국당국은 이 성명서를 방송하고 공중살포할 것을 동의했으며 미국언론에서는 이 성명이 잘 보도되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거의 우리의 성명서를 듣거나 읽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광주시민들은 미국은 억압을 촉진하고 지원한다는 역정보를 들었다. 누가 이렇게 치졸하게 왜곡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단지 추측만 할 뿐이다. "
미국은 중재를 통한 해결을 측구했다는 성명서 삐라를 약속한 대로 살포하는 것은 계엄령군대에게 이롭지 못했을 것은 물론이다. 한국군부는 미국이 그들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7. 전두환집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언론이 왜곡보도
그 다음 사태,즉 한국의 제 20보병사단이 한미연합사 지휘에서 해제되어 서울지역 임무에서 빠져나간 것은 미국이 한국군부와 연대하고 있다는 의혹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위컴은 이 행동이 한국 국방장관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고 '미리 싹을 자를'필요가 있었던 상황을 통제하는 데 있어 한국군부와 협조하는 수단이었다고 설명했다(Wickham explained the action as a response to a request from the Minister of Defense and as a means of cooperating with the military in controlling a situation that needed to be "nipped in the bud") . 글라이스틴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이 연합사지휘로부터 20사단의 해제를 허용한 것은 광주에서의 협상이 결렬될 때만 사용한다는 조건을 단 것이었다고 했다. 글라이스틴은 또한 20 사단은 폭동진압훈련을 받은 부대였기 때문에 검은 베레들과는 달리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광주시를 탈환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미국은 한국군부가 기다리면서 협상이 성공할 기회를 줄 것을 촉구했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군부의 진압작전을-역자) 지연시켰는지는 모르지만 미대사관은 그들이 약 이틀의 지연을 얻어냈다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결국 20사단은 도청에 남아 있던 얼마 안되는 잔류자들로부터 이외에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광주시를 탈환했다. 여기에서 약 30명 정도가 죽었다.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보고한다. "거의 즉각적으로, 그리고 (워싱턴으로부터-역자) 지시를 받지 않고, 나는 정부 고위당국자들에게 광주에서 발생한 사태에 대하여 사과하거나 적어도 깊은 유감을 표시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필시 자신들의 실수를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권위가 실추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글라이스틴은 광주봉기에 대한 그의 회고를 이렇게 맺었다. "당시에는 미국을 칭찬하는 이야기든 비판하는 이야기든 많지가 않았다. 그러나 몇 달 안에 광주에서는 미국이 이 사태에 분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신화가 솟아났다. 그 시기 (그런 신화가 솟아난 시기-역자)는 레이건-전두환 정상회담 뒤였으며 이 사실은 이 행위 (레이건이 전두환을 만난 행위 -역자) 때문에 누군가가 미국에 대한 그릇된 비난을 악의적으로 유포시켰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자라난 '신화들'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혹은 달리 말하면 역사가 기록되는 방식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반대파와 군부는 다같이 미국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었다.반대파로 말하면 미국에 대한 비판은 현정권에 대한 모든 비판에 자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되었다. 한국정부는 그것대로 레이건과의 정상회담을 위시한 미국의 행동들에 감사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한국정부는 자신이 미국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한국인들이 믿기를 원하고 있는 인상을 주어 왔다.
나는 여기에서 광주봉기라는 사태를 12월 12일의 군내부 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태의 한 부분으로 묘사했다. 광주는 하나의 중간점이었으며 그 과정의 완성을 본 것은 1980년 8월이었다. 전은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 전에는 스스로는 '쇼군'처럼 배후에 남아 있으면서 형식적인 민간정부를 허용하는 방안을 고려했었다. 전두환이 민간복을 입은 대통령이 된 과정도 역시 위컴 장군과 결부되어 있었다. 1980년 8월 8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와 AP통신은 익명의 고위 군장성이 미국은 한국에서 또 하나의 군부 스타일의 정권을 지지할것이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는 그 유명 한 '들쥐 ' (lemming)발언, 즉 한국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도자에 착 줄을 서서 복종하는데 전두환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발언이 들어 있었다.
위컴 장군은 나와 만나서 이 사건에 관하여 올바른 기록을 남기려는 관심을 보여주었다. 1980년 사태가 진전되면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위컴더러 기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사태 발전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라고 권유했다. 그것은 언론이 사태진전을 제때에 좇아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8월에 위컴은 두 명의 기자들,즉 AP통신의 테리 앤더슨(그는 지금 현재 레바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샘 제임슨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 인터뷰는 분명히 '보도하지 않는다는 조건'(off the record)이었으며 '배경설명만을 위한'것으로 양해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인터뷰가 늘 그렇듯이 위컴은 그의 대화가 녹음되는 것을 허락했다. 앤더슨과 제임슨이 떠나려고 일어섰을 때 앤더슨은 마지막 질문으로 미국은 한국에서 또 하나의 군사지도자를 지지할 것이냐고 물었다. 위컴은 당시 국무성에서 논의되고 있던 얘기를 가지고 답변했다. 즉 한국의 새 군사지도자들은 선거를 포함한 정당성확보과정 (a legitimatizing process)을 거쳐야 할 것이며 그들이 한국인 대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만일 그런 조건들이 갖추어지기만 한다면 미국은 틀림없이 새정권을 지지할 것이라고 위컴은 말했다. 그런데 기자들은 이 장군의 발언을 특종으로 채택하여 "남한의 전에 대한 미국의 지지 주장" (U.S. Support Claimed for South Korea's Chun) 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당시 앤더슨·제임슨과 (위컴과의 인터뷰 장소에-역자) 같이 있었던 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코트 스토크스 기자는 그 다음날 (위컴과 인터뷰한-역자)녹음테이프를 가지고 전두환 장군을 인터뷰하러 갔다. 그는 전에게 그 테이프를 틀어주고는 전에게 누구의 음성인지를 알아 맞춰보라고 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앤더슨과 제임슨이 약속했던 (그 발언을 한 사람이 위컴이라는-역자) 비밀을 지키기로 했던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스토크스는 전두환은 위컴이 그 발언의 당사자인 ,것으로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런 뒤 보름 안에 전두환은 최규하를 사퇴시켰으며 스스로 과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곧 얼마 안되어 그는 선거인단에 의해 당당하게 (in his own right) "선출되었다. "
8. 반미주의를 보는 미국관리들의 시각
그러나 이번에는 역시 한국정부관리들의 조작이든 혹은 미국인들의 실수에 의해서든 아니면 그 두 가지가 합해져서였든, 미국은 또 한국에서 군사쿠데타와 전두환정권을 지지 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다같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은 그들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단지 나중에 가서 그들로서는 다른 합리적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쿠데타 집단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들은 극적인 조치를 제외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극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극적인 혹은 불확실한 혹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나에게 새로왔던 것은 그들이 둘 다 역쿠데타의 가능성을 두고 얘기했었으며 또 역시 다같이 전두환의 쿠데타가 놀랄 만치 효율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점이었다. 그 쿠데타는 잘 계획되고, 잘 실행되었으며, 잘 지지받은 것이었다. 오직 극적인 대안들만이 남았었던 것이지만, 그 당시의 현실적 상황과 위험스런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그런 극적인 대안들을 시도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지내놓고 나서 그리고 한국에 반미주의가 성장한 것을 고려한다면,미국이 당시 '바보같이'(foolish) 보이는 행동을 했었다면 미국의 입장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라이스틴은 쿠데타 후에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 그의 견해로는 미국의 영향력은 미미한 것이었다. 효율성에 있어서도 그랬고 주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위컴은 반미주의에 대해서 덜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반미주의는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경제적으로 뒤따라 잡아가는 관계에 있는 경우 자연히 성장하게 되는 현상으로 간주한다. ) 그런 반면에 글라이스틴은 한국에서 좌우 양측에서 미국을 욕하는 현상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실과는 관계없이 그 양측은 미국을 계속 논란의 핵심으로 삼음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고 있다.
광주에 관한 완벽한 역사는 거기에 개입되었던 모든 수준의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거나 혹은 숨겨졌던 문서들이 드러나서 연구될 때에야 비로소 알려지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선 언론보도와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이 있고 또 이제 미국관리들이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기 시작한 때문에 우리는 그 사태에 관해 정확한 역사를 기술하는 데에로 더 가까이 왔다. 정부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고 참가했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될 때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태가 있은 지 7년이 지난 지금으로서는 감정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역사가(dispassionate historian)라 할지라도 광주봉기에 관해 객관적인 역사를 쓰는 데는 아직 한계가 있다.
마크 피터슨(이삼성 옮김)
● 다음 글은 1988년 미국 웨스트 뷰 (West View) 출판사에서 발행된 광주사태 논문집「광주봉기』 (The Kwangju uprising)에 들어 있는 마크 피터슨의 논문 「미국인들과 광주사태」 (Americans and the Kwang-ju Incident)를 옳긴 것이다. 도날드와 클라크가 편집한 이 책은 광주사태를 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마크 피터슨은 미국 뉴타주 브리검영대 극동문화연구소에서 극동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1. 광주봉기와 전두환 그리고 육사 11기
어떤 현상들을 공평하게,그리고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역사가에게 광주봉기는 일련의 재미있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광주의 경우 많은 설명들이 감정적이고, 당파적이며 부정확하다. 이 대부분의 문제들은 이 사태가 매우 최근에 일어난 것이라는 데에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사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정부의 정통성 여부, 회개하지 않는 군부의 태도,그리고 용서할 태세가 아닌 광주시민들, 이런 문제들은 모두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다. 정보도 역시 문제가 있다. 신문과 잡지들은 중요한 공적인 기록들을 실어왔지만 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해답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의 한가지 이점은 당시 현장의 참여자들 중에서 기꺼이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공식적인 보도와 목격담,공식기록,그리고 당시 한국에 있었던 미국의 두 고위관리인 월리엄 글라이스틴 대사와 존 위컴 장군과 최근에 가진 인터뷰에 기초한 것이다.
광주봉기에 관한 여러 가지 보도들을 제시하고 지금 갖고 있는 자료들을 분석하기 전에 우선 실제 발생한 사태의 기본적인 개요를 이야기하여야겠다. 중요한 것은 광주를 역사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이다. 얘기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에서 시작해야 하며 이 사건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소장에 의한 군사쿠데타에의 길을 열었다. 애당초는 소규모였던 이 쿠데타를 통해서 전장군과 그의 육사 11기 (1955년 졸업반)의 동기생들인 일단의 동료들이 군부를 장악했다. 군부는 점차로 계엄령하에서 사회의 모든 분야로 통제를 확대해 나갔으며 처음에 이들이 내세운 구실은 사회를 청소 혹은 정화한다는 것이었다. 군부는 병영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천명했지만 12월 12 일 에서 5월 초 사이에 그것의 영향력은 점차로 증대해 갔다. 전두환의 개인적인 권력도 동시에 커져갔다. 그가 한국 중앙정보부의 부장이 된 4월 중순경엔 전이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이 행동을 비판했다). 일부 민간인들은 이제 "군사정권이 서기에는 너무 성숙한"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계엄령 철폐를 위한 운등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 광주민중의 저항과 특전단의 잔혹행위
학생데모는 캠퍼스를 벗어나 거리로 번졌으며 5월 15일 최고조에 달했다.한편 교수들,종교지도자들 및 문인들은 계엄령 종식을 요구하는 서명을 벌였다. 국회의원들은 다음 월요일인 5월 19일 계엄령의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1961년 군사쿠데타의 19번째 기념일인 1980년 5월 16일 (금요일)은 지극히 조용했다. 학생지도자들은 군부의 공작정치에 대한 경계,그리고 흑색공작 요원들에 의한 침투를 의심하여 모든 데모를 취소했다. 토요일인 5월 17일 군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 첫 조짐들이 드러났다. 앞으로의 행동계획에 관해 토론하고 있던 학생지도자들의 모임을 파괴하기 위해 군대가 이화여자대학 캠퍼스를 덮쳤던 것이다. 이 학생들 중에는 정부가 자신들에게 굴복해 있는 처지라고 믿고 더 큰 데모로 계속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군부는 아직도 사회를 지배할 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한 접근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결국은 후자의 주장이 맞은 것이 드러나고 말았지만 불행하게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군인들이 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대부분 체포하고 소수만이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했다 (이 학생회의의 자세한 내용을 말해준 사람은 이날 거기에서 도망쳐서 몇 달간 도피해 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이날 밤 늦게 3김 - 김 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체포되었고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서울에서의 데모진압은 효과적이었다. 검은 혁띠를 착용해서 구별되는 검은 베레모의 특전 단들이 주요 대학에 진주하고 작은 대학들에서는 일반정규군대가 야영을 시작했다. 운동장에 세워진 천막들은 눈에 잘 띄었고 군인들이 모든 대학 캠퍼스의 문을 지키며 교대로 근무하면서 접근을 통제했다.
이 전술은 한국의 다른지역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광주시에서는 대단한 실패였다. 광주에서는 데모가 이미 캠퍼스 밖으로 번졌으며 도청 근처의 시내 한복판에 집중되었다. 군부는 그들이 이미 한발 늦었으며 데모를 캠퍼스 안에서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서울에서 군인들이 사용한 방식에 비해 더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다. 일요일인 5월 18일 오후 3시경 검은 베레들은 작은 단위로 나뉘어 시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데모대나 데모대로 보이는 사람들을 곤봉과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하였다. 데모대는 안전을 찾아 근처의 건물들 안으로 피신했다. 검은 베레들은 건물에 들어가서 데모했는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젊은 사람은 무조건 곤봉으로 치고 때렸다. 이들이 무차별적인 잔인성을 보이자, 이미 분노해 있던 핵심 학생세력,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도 일반 시민들이 격분하여 데모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월요일,검은 베레들은 데모진압에 실패하자 폭력의 수준을 더욱 높여 학생과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여 거리에서 몰아내려는 작전을 시도했다. 화요일에는 폭력의 수준이 더욱 높아졌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검은 베레들은 지방경찰을 소외시켰으며 그 결과 많은 경찰관들이 강도적인 특전단과 싸우는 시민들에 협력하였다. 파출소와 그들의 무기고가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수요일에 벌어졌는데, 이날 시민들은 검은 베레들을 광주시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행동은 검은 베레들의 요새였던 도청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 공격은 택시기사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시내의 반대쪽 끝에 있는 한운동장에 집결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여러 동료들이 피를 흘리고 부상당한 시민들을 각 병원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병원은 도청 뒤에 있었다- 에 실어 나르다가 특전단에게 당한 잔혹행위에 대한 대응을 계획하기 위한 것이었다. 회의를 하고 공격을 계획한 후에 기사들은 택시로 여러개의 열을 지어 금남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도청 주변의 방어망을 파괴했다. 그리고 검은 베레들을 분산시키면서 이들을 시의 끝까지 몰아냈다. 이렇게 해서 군대는 비무장한 시민들의 조직적인 노력에 밀려 패주한 것이다.
다음 주 동안,즉 화요일인 5월 27일 이른 아침까지 시민들은 군대와 협상을 하는 일과 외부세계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광주시의 일을 맡아 나갈 여러 가지 위원회를 조직했다. 정부의 보도와는 반대로 광주시의 상황은 무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임시조직들,그리고 광주시 내부의 협조정신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재된 타결이 있을 것으로 희망했으나 결국은 군대가 광주시를 재침탈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침내 한국 정규군인 20사단이 서울지력에서의 임무로부터 해제되어 화요일 아침 여명이 밝아올 무렵 광주시에 투입되었다. 이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는 대략 30명이었다.저항의 중심거점이었던 도청이 떨어지면서 군대는 시 전체를 장악하고 계엄령 질서를 재확립 했다. 봉기는 끝난 것이다.
3. 미국이 20사단와 광주투입을 승인하다
당시 한국정부가 제시한 공식적인 보도는 '불순세력'이 광주시민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남한에서 불순세력이라고 할 때는 북한의 첩자들 혹은 북한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말한다. 특히 5월 18일 이른 아침에 체포된 김대중은 그가 이미 구속되고 난 후에 시작된 저항운동을 교사한 혐의로 기소 되었다(계엄령하에서 재판을 받은 김은 유죄로 결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이 선고는 결국에는 '무기형'으로,그 다음엔 다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김에 대한 죄목이 '억지'(far-fetched)라는 견해를 미국이 표명함으로써 그런 감형이 촉진되었다. 실제로는 김은 미국에서 2년의 망명생활을 할 수 있게 허용되었으며 그 다음엔 2년간의 가택연금이 뒤따랐고 1987년 여름에 한국의 민주화의 일부로서 그의 시민적 권리가 회복되었다).
이 공식적인 보도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봉기가 일어난 초기에 네 명의 군인과 한 명의 시민만이 죽었다는 정부의 발표-사실은 많은 시민이 죽었는데도-는 시민들을 크게 분노케 하여 이들은 그 정부발표를 방송한 문화방송사가 있는 건물을 불태웠다. 이 봉기 기간에 파괴된 주요 건물은 MBC건물, 세무서 그리 고 노동부 사무소뿐이었다.
목격담은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앞에서 언급한 문화방송사의 경우 문제가 되었던.점인 사망자 수의 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정부는 대략 200명 정도가 죽었다고 얘기하는 반면에 다른 이들은 2천 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보다 낫고 보다 합리적인 목격자의 진술의 하나는 당시 평화봉사단원이었으며 지금은 하와이 대학교의 대학원생인 팀 완버그가 쓴 것이다(그의 설명은 하와이 대학의 한국학 센터가 발행하는 잡지인 Korean Studies제 11권에 실려 있다).완버그는 한 사람의 죽음도 너무나 많은 것 이 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망자수를 둘러 싼 논쟁을 처리하고 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으며 글라이스틴 대사도 완버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죽은이에 대한 장례식을 매우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1960년4월 19일 죽음을 당한 이들 같은 순교자들을,특별한식을 거행하여 기념하는 이 나라에서 죽은 이들이 제대로 기념되게끔 될 수 있기 전에는 광주사태는 끝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들의 숫자를 셈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죽은 이들의 가족들은 아들딸이나 다른 가족성원이 죽었다는 사실을 정부의 보복이 두려워 숨기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많은 목격자들이 진술한 것 중의 하나는 미국의 개입에 관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여러 목격자들은 한국군대가 사용한 군사장비가 미국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미국무성은 검은 베레들의 행동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알지도 못했다고 누차 주장했다. 그러나 국무성은 광주시를 탈환하기 위해서 20사단을 한미연합사통제에서 해제하는 것을 허용했음을 시인했다.
4. 미국은 12·12쿠데타를 제어할 능력이 없었다
미국정부와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정부를 대표하는 이들의 역할은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으나 그 대표자들 자신, 즉 월리엄 글라이스틴 대사와 존 위컴 장군은 최근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글라이스틴은 한국에서 그의 견해를 밝히고 있으며 또 그가 주한대사로 있는 동안에 벌어졌던 네 가지의 주요사건에 관한 내부자로서의 정보 몇 가지를 적고 있다.
1987년 초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장군은 광주사태를 둘러싼 사건들에 관해서 나와 토론하기로 동의했는데 이 인터뷰들은 많은 통찰을 제공해주었다.현직 육군참모총장이 그의 과거활동에 대해 인터뷰에 응한 것은 특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느껴졌었다. 두 사람은 모두 솔직했으며 알려져 있는 사실들 중 일부를 바로잡으려 호 애썼다. 이들은 광주봉기 이후에 성장한 소위 '신화'들과 1980년 군사쿠데타와 관련한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위컴은 훌륭한 군인 스타일로 사무적인 방식으로 얘기했으며 그가 당시 내린·결정들을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고 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학자적 외교관인 글라이스틴은 매우 회고적인 태도였다. 그는 그들이 고려할 수 있었거나 혹은 고려했어야 할 여러 가지 대안들에 관한 문제들을 즐겨 토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가 다같이 당시 그들이 결정을 내릴 때 서로 긴밀하게 일했으며 서로 화합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의 입장은 전두환이 한국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1979년 12월 12일의 쿠데타는 너무나 잘 실행되어서 그들로서는 그 쿠데타를 수용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1980년 5월 신군부가 광주봉기를 다룬 방식은 엄청난 실패작이었고 이 광주의 상처는 아직도 정부를 곤란케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광주봉기의 진압은 단계적인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의 한단계였다. 즉 그것은 12월에 시작되어 다음해 8월 전두환의 대통령선출에서 완성된 일련의 사태의 하나였던 것이다.
미국의 행등에 대한 비판은 12월 12일 사태에 대해 미국이 보인 반응에 대한 것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봉기를 예방할 수 있었을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12월 12일에 쿠데타를 예방하거나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었을 것이다.미국관리들은 왜 쿠데타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뭔가 좀더 하지 못했는가? 이날 밤의 사태에'관한 글라이스틴과 위컴이 진술한 것을 보면, 전두환의 상관들의 휘하에 있던 한국군대는 전과 그의 동료들이 매우 잘 계획하고 갈 실행한 쿠데타를 중지시킬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해진다. 그렇다면 하물며 미국이 어떻게 이 쿠데타를 방지할 수 있었겠는가? 글라이스틴은 용산의 사우스포스트에 있는 미 8군사령부 벙커에 오후 7시 30분경 연락을 받고 들어갔다. 위컴은 그보다 몇 분 전에 도착해 있었다. 비무장지대 (DMZ)지역과 그리고 한국군부대가 주둔하거나 이동해간 지역에 있던 미군부대들을 포함한 여러 가지 정보원으로부터 그들은 일단의 군대가 서울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 사실 이외에 그들이 아는 것은 그 군대가 북한군은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9시경에 국방장관 노재현이 합참의장 김종환과 함께 그 벙커에 들어왔다. 곧 그들은 이동중인 군부대는 당시 계엄사내 박대통령 암살사건 수사부장이며 육군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이 장악하고 있는 부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가지 방도는 고위 한국군 장성들이 자기들 휘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서을의 거리에서 전두환의 군대와 대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 방도를 강구하기 시작했으나 위컴 장군이 새벽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그들은 또 그런 명령을 내리더라도 전두환이 그 자신이 갖고 있는 지휘라인,즉 일선부대에 배치된 보안사 장교들을 통해서 그 명령의 실행을 저지할수 있다는 것을 인식했었을 것이다) .
그날 저녁 나중에 쿠데타 지도자들은 노국방장관과 김 합참의장에게 벙커에서 나와 국방부건물로 와서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그들에게 가지 말라고 권유했으나 그들은 떠났다. 국방부에 대한공격이 있은 다음 이들 두 사람은 체포되었으며 정승화 장군 등에 대한 체포영장에 최규하 대통령과 함께 강제로 서명해야 했다(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당시 헌법상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장군은 대통령이 체포를 허가하기 전에 이미 폭력에 의해 체포되어 있었던 점이다).
이어서 정승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에 공모한 죄로 기소되었다. 그는 박이 살해된 날 밤에 현장에 (옆 건물이었지만) 있었으며 그후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정은 12월 12일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일설에 의하면 정승화가 체포된 이유는 그가 전두환을 동해안쪽 먼 사령부로 전출명령을 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며,곧 전출될 것이라는 말이 전두환 귀에 들어가자 정승화를 거세하기 위한 쿠데타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가 뒤집어 쓴 죄 목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정의 생명은 위컴에 의해서 무심코 구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위컴은 한국군 고위 장성들에게 으레 했던 것처럼,정이 감옥에 있었지만 그에게 생일카드를 보냈던 것이다. 이때 전두환은 즉시 글라이스틴을 찾아가서 위컴이 한국내정에 간섭한 데 대해 해명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정은 정대로 그 카드를 받아들고 눈물을 흘렸다. 정은 그 카드가 자신이 사형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위컴이, 보장한 것으로 해석했던 까닭이다).그는 결국 20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건강상 이유로 석방되었다.
5. "언젠가 당신들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쿠데타에 대한 소문을 위컴은 계속 접했었다. 그때마다 위컴은 한국 육군과 국방부에 그런 소문을 전달했었다. 그러나 이들 한국군 장성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그들은 마치 '한국인들 자신이 알기 전에 어떻게 미국인이 그런 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는 듯한 태도였다.
쿠데타 후에 전두환은 먼저 글라이스틴을 방문했으며 그 다음 하루나 이틀 후에 위컴을 방문했다. 그의 메세지는, 자신들은 "부패를 척결하려고 하며 그런 다음엔 병영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전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믿어주시오,우리가 뭘 하는지 잘 보아주시오.그러면 당신들은 언젠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오." 글라이스틴과 위컴은 다같이 이 장군의 메시지를 의심했다. 위컴은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의 문서를 뒤져보고 그때도 박은 김종필을 당시 서울의 유엔사령관이었던 카터 매그루더 장군에게 보내 전두환이 말한 것과 똑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매그루더가 하와이 주둔 태평양지구 총사령관에게 보고한 내용에는 김종필이 매그루더에게 그들은 "부패를 척결하려고 하며 그런 다음엔 병영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김은 또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를 믿어주시오,우리가 뭘 하는지 잘 보아주시오,그러면 당신들은 언젠가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오."
전두환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 자신은 어떤 정치적 야심도 없다고 맹세했다.그들은 그 쿠데타는 철저하게 군사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했다. 부패한 민간지도자들과 24년간이나 4성 장군으로 있었던 사람들을 포함한 늙은 장군들을 제거하기 위한 집안청소라고 주장했다. 전두환 등의 젊은 장군들은 최고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길을 치우는 작업을 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미국관리들은 쿠데타가 곧 있을 거라는 정보에 접하고도 왜 행동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분명 그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한도내에서 행동을 취했다. 미국관리들은 공개적으로는 새로운 장성 그룹과 협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적으로는 그들을 비판했다. 이들 한국장성들은 내정간섭이라면서 그런 비판을 거부했다. 미국인들이 가진 몇가지 불만은 일부 언론에 흘러 나갔지만 워싱턴의 미국정부는 어떠한 공식적 비판도 제기하지 않았다.
글라이스틴은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 만일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에 대비한 비상사태 대비계획을 세웠다. 그의 관심사는 첫째는 군부내의 전투를 방지하는 것이었고,둘째는 북한의 개입을 막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정치적 불안정을 최소화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그의 목적은 3개항의 계획을 내포했다. 첫째 , 비용 (유혈 사태 )을 줄인다, 둘째 , 쿠데타의 지도자들과 접촉을 유지한다(이러한 접촉이 없이는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셋째, 미국이 바보 같은 곤란한 입장에 처하는 일이 없게 한다(keep the United States from being put in a foolish position) . 이 마지막 점에 관해서는 특히, 글라이스틴은 1961년 쿠데타 당시처럼 미국이 (쿠데타 지도자들에게-역자) 나쁘게 보였던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썼다. 1961년엔 매그루더 장군이 유엔사령관으로서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여 박정희 장군에게 병영으로 복귀할 것을 실제 명령한 셈이었는데 이것은 지내놓고 생각해보면 소용없고 순진한 행동이었다. 쿠데타를 조직한 사람들은 기꺼이 전투에 임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태세였던 것이다.
미국의 입장을 검토함에 있어 몇가지 문제들이 떠오른다. 미국이 쿠데타의 진행을 반드시 알고 있었던가? 쿠데타는 그 본질상 죽이기 아니면 죽기를 결단한 무장군인들에 의한 갑작스럽고 은밀한 행동이다. 미국관리들은 소문을 들었지만 한국군내 고위 장성들은 이를 무시했다. 미국은 1979년 12월 12일 밤에 뭔가 좀더 할 수 없었는가? 글라이슨틴은 워싱턴으로부터의 메시지는 군인들에게 각자의 위치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한 명령을 내렸더라도 1961년 5월 박정희의 쿠데타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무시되고 말았을 것이다.
6. 조용하게 같이 얼하고 가끔 공개적인 입장을 취한 미국
그후 미국은 무엇을 해야 했었는가? 글라이스틴은 일련의 결정을 통해 미국의 대응을 이끌어 나갔다. 그 첫 결정은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면서 권력의 핵심이 어디로 기우는지를 살피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 다음 쿠데타의 배후에 있는 권력을 파악한 연후에 그 권력집단을 어떻게 다룰지를 결정했다. 그는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어느 쪽과도 접촉선을 개방해놓는 것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전두환과도 접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최규하 대통령과도 접촉하는 이중적인 접근이 가장 생산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라이스틴은 12월 13일 아침 최규하를 방문했다. 글라이스틴은 그때 이미 최는 '독자적인 행동자'가 아닌 것이 분명했었다고 말했다.
12월 13일 오후 전장군은 정동에 있는 대사관저로 글라이스틴을 방문했다. 전은 이번 사태는 젊은 군인들과 늙은 군인들과의 싸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들은 민주적 과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헌정제도나 과정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은 대통령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자신은 박정희에 대해서 비판적이라고 하면서 박은 너무 오랫동안 권력을 잡으려고 애썼다고 말하였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이 새로운 쿠데타의 권력기반을 파악하고 평가한 미국은 대체로 세 가지의 선택을 앞에 놓고 있었다. 첫째,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역쿠데타를 지원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는 길, 둘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길, 셋째, 경고를 발하면서 불쾌한 태도로 관망하는것. 그러나 한국군부 전체에서 이 쿠데타가 한결같은 강력한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선택의 여지는 제한된 것이었다. 미국은 전의 쿠데타에 단결된 지지를 보인데 대해 매우 놀랐었다고 글라이스틴은 말했다. 위컴에 따르면 그와 글라이스틴에게 누군가가 접근하여 역쿠데타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 하였는데 , 그들은 그 군인들에게 그러려거든 성공하는데 필요한 군부내의 지지를 확보해 오라고 하면서-그들이 그런 지지 기반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 '쫓아버렸다'고 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맘에 드는 선택은 아니었다. 미국 대사관은 워싱턴과 협의 끝에 이 새로운 쿠데타로 인한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은 이 쿠데타지도자들과 대부분의 경우에는 조용하게 같이 일하고 가끔가다 공개적인 입장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후자의 한 예는 1980년 4월 전두환이 한국헌법을 위반하면서 스스로를 한국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을 때,미국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그 행동을 비 판한 것이었다.
쿠데타를 완성하는 데 있어 다음 단계는 1980년 5월 17일 밤과 5월 18일 아침에 각기 3김을 체포하고 계엄령을 확대시킨 일이었으며 이 사건들이 광주봉기를 이끌었다. 미국은 3김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이런 요구는 워싱턴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는 미국문화원체제 (서울·부산·대구·광주에 있는 네 개의 사무소)를 통해서 공개되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광주에서의 폭력과 그에 뒤따른 봉기의 와중에서 제대로 인식되지 않은 채 지나쳐졌다.
글라이스틴은 최근에 쓴 글에서 미 대사관은 처음에는 광주에서 전개된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당시 서울에서 김대중의 체포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은 계속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대사관과 미군사령부는 결정적인 사태가 이미 벌어지고 난 다음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 한국당국은 소란스러운 그러나 특별히 폭력적이지는 않았던 광주에서의 데모를 경찰병력 이외에 한미연합사 휘하에 있지 않았고 또 있어본 일도 없는 특전단을 동원하여 진압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검은 베레들은 지극히 도발적인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광주사람들을 분노케 하여 이들 광주사람들이 급격히 폭력의 수준을 높이게 만들었으며,정부군을 죽이고 나아가 이들 정부군을 며칠 동안이나 광주시 밖의 방위 선으로 몰아내게 했던 것이다. "
일단 한국군대가 광주시에서 내몰린 다음에 미국이 취한 행동들에 관해서는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얘기 한다.
"우리가 가진 영향력의 한계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고 또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정부는 서울과 워싱턴에서 즉각 폭력을 개탄하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우리는 가톨릭 대주교가 사태해결을 위해 중재하려는 노력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그의 노력은 마지막 이틀 전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주고 있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한국군으로 하여금 대화를 계속하고 더 이상의 폭력을 축소화하도록 권유했다. "
글라이스틴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지내놓고 생각해보면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관한 궁극적인 인식과 관련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한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많은 공개성명을 발표했다. 그 중에는 양측에게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북한에게는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성명을 조심스럽게 작성한 일이 있었다. 한국당국은 이 성명서를 방송하고 공중살포할 것을 동의했으며 미국언론에서는 이 성명이 잘 보도되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거의 우리의 성명서를 듣거나 읽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광주시민들은 미국은 억압을 촉진하고 지원한다는 역정보를 들었다. 누가 이렇게 치졸하게 왜곡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단지 추측만 할 뿐이다. "
미국은 중재를 통한 해결을 측구했다는 성명서 삐라를 약속한 대로 살포하는 것은 계엄령군대에게 이롭지 못했을 것은 물론이다. 한국군부는 미국이 그들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7. 전두환집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언론이 왜곡보도
그 다음 사태,즉 한국의 제 20보병사단이 한미연합사 지휘에서 해제되어 서울지역 임무에서 빠져나간 것은 미국이 한국군부와 연대하고 있다는 의혹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위컴은 이 행동이 한국 국방장관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고 '미리 싹을 자를'필요가 있었던 상황을 통제하는 데 있어 한국군부와 협조하는 수단이었다고 설명했다(Wickham explained the action as a response to a request from the Minister of Defense and as a means of cooperating with the military in controlling a situation that needed to be "nipped in the bud") . 글라이스틴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이 연합사지휘로부터 20사단의 해제를 허용한 것은 광주에서의 협상이 결렬될 때만 사용한다는 조건을 단 것이었다고 했다. 글라이스틴은 또한 20 사단은 폭동진압훈련을 받은 부대였기 때문에 검은 베레들과는 달리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광주시를 탈환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미국은 한국군부가 기다리면서 협상이 성공할 기회를 줄 것을 촉구했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군부의 진압작전을-역자) 지연시켰는지는 모르지만 미대사관은 그들이 약 이틀의 지연을 얻어냈다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결국 20사단은 도청에 남아 있던 얼마 안되는 잔류자들로부터 이외에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광주시를 탈환했다. 여기에서 약 30명 정도가 죽었다.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보고한다. "거의 즉각적으로, 그리고 (워싱턴으로부터-역자) 지시를 받지 않고, 나는 정부 고위당국자들에게 광주에서 발생한 사태에 대하여 사과하거나 적어도 깊은 유감을 표시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필시 자신들의 실수를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권위가 실추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글라이스틴은 광주봉기에 대한 그의 회고를 이렇게 맺었다. "당시에는 미국을 칭찬하는 이야기든 비판하는 이야기든 많지가 않았다. 그러나 몇 달 안에 광주에서는 미국이 이 사태에 분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신화가 솟아났다. 그 시기 (그런 신화가 솟아난 시기-역자)는 레이건-전두환 정상회담 뒤였으며 이 사실은 이 행위 (레이건이 전두환을 만난 행위 -역자) 때문에 누군가가 미국에 대한 그릇된 비난을 악의적으로 유포시켰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자라난 '신화들'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혹은 달리 말하면 역사가 기록되는 방식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반대파와 군부는 다같이 미국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었다.반대파로 말하면 미국에 대한 비판은 현정권에 대한 모든 비판에 자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되었다. 한국정부는 그것대로 레이건과의 정상회담을 위시한 미국의 행동들에 감사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한국정부는 자신이 미국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한국인들이 믿기를 원하고 있는 인상을 주어 왔다.
나는 여기에서 광주봉기라는 사태를 12월 12일의 군내부 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태의 한 부분으로 묘사했다. 광주는 하나의 중간점이었으며 그 과정의 완성을 본 것은 1980년 8월이었다. 전은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 전에는 스스로는 '쇼군'처럼 배후에 남아 있으면서 형식적인 민간정부를 허용하는 방안을 고려했었다. 전두환이 민간복을 입은 대통령이 된 과정도 역시 위컴 장군과 결부되어 있었다. 1980년 8월 8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와 AP통신은 익명의 고위 군장성이 미국은 한국에서 또 하나의 군부 스타일의 정권을 지지할것이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는 그 유명 한 '들쥐 ' (lemming)발언, 즉 한국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도자에 착 줄을 서서 복종하는데 전두환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발언이 들어 있었다.
위컴 장군은 나와 만나서 이 사건에 관하여 올바른 기록을 남기려는 관심을 보여주었다. 1980년 사태가 진전되면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위컴더러 기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사태 발전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라고 권유했다. 그것은 언론이 사태진전을 제때에 좇아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8월에 위컴은 두 명의 기자들,즉 AP통신의 테리 앤더슨(그는 지금 현재 레바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샘 제임슨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 인터뷰는 분명히 '보도하지 않는다는 조건'(off the record)이었으며 '배경설명만을 위한'것으로 양해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인터뷰가 늘 그렇듯이 위컴은 그의 대화가 녹음되는 것을 허락했다. 앤더슨과 제임슨이 떠나려고 일어섰을 때 앤더슨은 마지막 질문으로 미국은 한국에서 또 하나의 군사지도자를 지지할 것이냐고 물었다. 위컴은 당시 국무성에서 논의되고 있던 얘기를 가지고 답변했다. 즉 한국의 새 군사지도자들은 선거를 포함한 정당성확보과정 (a legitimatizing process)을 거쳐야 할 것이며 그들이 한국인 대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만일 그런 조건들이 갖추어지기만 한다면 미국은 틀림없이 새정권을 지지할 것이라고 위컴은 말했다. 그런데 기자들은 이 장군의 발언을 특종으로 채택하여 "남한의 전에 대한 미국의 지지 주장" (U.S. Support Claimed for South Korea's Chun) 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당시 앤더슨·제임슨과 (위컴과의 인터뷰 장소에-역자) 같이 있었던 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코트 스토크스 기자는 그 다음날 (위컴과 인터뷰한-역자)녹음테이프를 가지고 전두환 장군을 인터뷰하러 갔다. 그는 전에게 그 테이프를 틀어주고는 전에게 누구의 음성인지를 알아 맞춰보라고 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앤더슨과 제임슨이 약속했던 (그 발언을 한 사람이 위컴이라는-역자) 비밀을 지키기로 했던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스토크스는 전두환은 위컴이 그 발언의 당사자인 ,것으로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런 뒤 보름 안에 전두환은 최규하를 사퇴시켰으며 스스로 과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곧 얼마 안되어 그는 선거인단에 의해 당당하게 (in his own right) "선출되었다. "
8. 반미주의를 보는 미국관리들의 시각
그러나 이번에는 역시 한국정부관리들의 조작이든 혹은 미국인들의 실수에 의해서든 아니면 그 두 가지가 합해져서였든, 미국은 또 한국에서 군사쿠데타와 전두환정권을 지지 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다같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은 그들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단지 나중에 가서 그들로서는 다른 합리적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쿠데타 집단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들은 극적인 조치를 제외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극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극적인 혹은 불확실한 혹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나에게 새로왔던 것은 그들이 둘 다 역쿠데타의 가능성을 두고 얘기했었으며 또 역시 다같이 전두환의 쿠데타가 놀랄 만치 효율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점이었다. 그 쿠데타는 잘 계획되고, 잘 실행되었으며, 잘 지지받은 것이었다. 오직 극적인 대안들만이 남았었던 것이지만, 그 당시의 현실적 상황과 위험스런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그런 극적인 대안들을 시도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지내놓고 나서 그리고 한국에 반미주의가 성장한 것을 고려한다면,미국이 당시 '바보같이'(foolish) 보이는 행동을 했었다면 미국의 입장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라이스틴은 쿠데타 후에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 그의 견해로는 미국의 영향력은 미미한 것이었다. 효율성에 있어서도 그랬고 주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위컴은 반미주의에 대해서 덜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반미주의는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경제적으로 뒤따라 잡아가는 관계에 있는 경우 자연히 성장하게 되는 현상으로 간주한다. ) 그런 반면에 글라이스틴은 한국에서 좌우 양측에서 미국을 욕하는 현상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실과는 관계없이 그 양측은 미국을 계속 논란의 핵심으로 삼음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고 있다.
광주에 관한 완벽한 역사는 거기에 개입되었던 모든 수준의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거나 혹은 숨겨졌던 문서들이 드러나서 연구될 때에야 비로소 알려지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선 언론보도와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이 있고 또 이제 미국관리들이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기 시작한 때문에 우리는 그 사태에 관해 정확한 역사를 기술하는 데에로 더 가까이 왔다. 정부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고 참가했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될 때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태가 있은 지 7년이 지난 지금으로서는 감정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역사가(dispassionate historian)라 할지라도 광주봉기에 관해 객관적인 역사를 쓰는 데는 아직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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