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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미국의 광주사태 무책임론'을 반박한다

본문

'미국의 광주사태 무책임론'을 반박한다

이삼성(사회와 사상)

1. 미국의 대한정책의 본질을 보다 명확히 인식하기 위하여

  마크 피터슨의 글은 광주'사태'의 폭력성을 그가 일부나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글의 목적은 광주의 비극에 대해 미국은 도덕적 책임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주장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전적으로 위컴과 글라이스틴과의 인터뷰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공평한'역사가로서의 진실규명이라는 과제를 스스로 설정하고 있으나 그가 이 비극에 관련되어 있던 두 미국고위관리의 '사실설명'과 '가치관단'을 제 3자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태도를 보이는 곳은 그의 글 전체를 통하여 아무데에도 없다.
  필자는 피터슨이 인용하고 있는 위컴과 글라이스틴의 발언들은 그것 자체로서 중요한 자료라는 것을 인정한다. 더 중요하게는 앞으로 미국정부가,한국에서 독재정권과 미국이 지난 수십년간 협력해온 과거를 부정하는 데 있어서 끊임없이 그들 둘의 주장을 인용할 것이기 때문에,그리고 피터슨이 그들 둘의 주장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방식은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한 미국인들이 앞으로도 한미관계의 성격을 규정하는 기본 양상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이에 관하여 제한된 형태로나마 일정한 반론을 제기해두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뿐만 아니라 피터슨의 논문에 관한 최근의 국내언론의 보도가 거의 대부분 무비판적인 소개로 일관한 느낌이 없지 않으므로,그가 위컴과 글라이스틴의 주장을 이용하는 방식이 가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필자는 『사회와 사상』 1989년 2월호에 실린 「광주민중봉기와 미국」이라는 논문에서 광주에서 미국의 역할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 이야기한 바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지적한 내용은 대체로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 문제는 단순하게 광주사태를 전후한 1∼2주 기간 동안에 미국이 보여준 행동들(겉으로 표명된 것이든 은폐된 것이든)만에 기초해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미국정부의 대한정책을 결정지워온 것은 한국에 있어서와 미국의 :국익'이라는 것이며, 또 미국의 한국에서의 '국익'이라는 것은 한미관계 현대사 전반의 맥락 속에서 볼 때만이 그것의 전체상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극우반동적인 것이든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미국 관리들의 행동과 발언은 바로 그러한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드러나는 미국관리들의 행동을 판단하는 두번째의 보다 커다란 맥락이 되어야 하는 것,혹은 미국의 대한정책의 역사적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두번째 맥락은 미국의 제 3세계 전반에서 전개해온 정책기조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라는 것을 아울러 중요한 것으로 지적하였다. 필자가 지난 번 글에서 미국이 제 3세계에서 미국적인 사회상에 대립하는 인간세계를 추구하는 세력들에 의한 민중정권의 성립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선거를 통해 등장한 멀쩡한 민간정권을 쓰러뜨리는 각종의 극우적 활동에 미국이 다수 개입해온 역사를 상기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또 1986년 2월 필리핀의 경우 등에 관하여 마치 미국이 제 3세계에서 시민민주주의적 질서를 발전시키는 데 음양의 기여를 해온 것처럼 간주하는 시각이 어째서 매우 왜곡된 인식일 수 있는가를 설명하려 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광주에서 미국이 취한 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자는 그러한 한국현대사와 세계적인 차원에서 바라본 미국대외정책의 전체상이라는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으나,동시에 미국관리들이 광주봉기 기간이라는 한정된 시기에 보여준 행동들은 우리가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한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이해를 보다 명확히 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미국이 광주에서 "살인적인 군부세력의 편에 서서 광주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한 데 기꺼이 협력"했음을 논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2. 가해자가 제시하는 자료의 무비판적 수용

  마크 피터슨의 기본입장은, 광주에서 한국군부가 수많은 시민들을 잔혹한 폭력을 동원하여 살상한 사태는 전적으로 한국군부의 책임이며 거기에 미국이 '부분적'으로라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반정부세력의 주장은 부당하기 짝이 없다는 위컴과 글라이스틴의 이구동성의 주장을 아무런 비판 없이 또 의심의 여지 없는 객관적 '사실'로써 선전하는 데 있다. 피터슨은 미국을 비난하는 한국의 운동권 재야세력의'주장은 '정치적 이용'에 해당하는 진실의 왜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크 피터슨은 위컴과 글라이스틴의 발언들을 광주로 상징되는 미국의 한국에서의 독재정권과의 공생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과격한' 주장을 전개하는 데 이용한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위컴과 글라이스틴이 미국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사실'들을 잘 들여다보면 그 중에는 오히려 우리의 주장을 일층 뒷받침해주는 증거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가해자'혹은 가해자의 '공동정범'이라고 할 미국의 관리들이 자기들에게 필요한때에 자기들에게 필요한 부분들만을 공개하기 마련인 '가해자가 제시하는 자료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피터슨식의 역사서술을 비판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미국측이 제시한 자료들을 미국의 대한정책과제 3세계정책의 현대사라는 전체적인 맥락에 비춰 그들의 '말'과 '행동'이 어떻게 일치되고 모순되는지를 투철하게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가해자들이 취사선택한 '공개된 자료들'이 '확실한 객관적 ·경험적 증거'라는 이름하에 '보다 심층적인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데 이용되는 사태를 저지해야 할 것이다.

3. 전두환일당의 12·12쿠데타와 미국의 관계

  미국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일파에 의한 군내부 쿠데타가 있었을 때 '가능하기만 했다면' 저지하고 싶어 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전두환 등 정치군부의 등장은 미국의 의사에는 대립된 것이었으며 미국은 이를 싫어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피터슨이 제시하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은 쿠데타의 소문을 한국고위장성들에게 전달했으나 이들이 무시했다. 둘째 , 피터슨은 역쿠데타를 미국관리들이 '한때 ' 고려 했었다는 글라이스틴 등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강조하고 있다. 셋째, 전두환등은 쿠데타 후에 위컴과 글라이스틴에게 와서 자기를 믿어달라는 부탁을 했으며 자기들은 부패를 척결한 후에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이를 의심했다고 지적함으로써,피터슨은 위컴 등 미국관리들이 전두환일파와 관계를 맺은 것은 쿠데타가성공한 이후였으며, 미국은 전두환일파의 정치개입 가능성을 '불안한 마음으로 경 계 했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넷째 , 미국관리들이 전두환의 쿠데타를 저지하고자 했으나 결국 여러 '현실적인'제약들 때문에 뜻을 이를 수가 없었다는 듯이 주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전두환일파가 한국군 내부에서 확보한 전폭적인 지지 때문에 미국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섯째,전두환이 1950년 4월에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는 것을 미국은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이것은 곧 전두환일파의 정치적 부상을 미국은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피터슨은 암시한다.
  마크 피터슨의 이같은 주장들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비록 미국이 12월 12일 쿠데타를 통한 전두환일파의 등장을 사전에 모르고 있었으며 이를 미국은 원하지 않았다는 위컴 등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곧 한국에서 군부중심의 정치를 후원하는 것이 미국의 기본입장이 아니라고 간주할 근거가 못된다. 미국언론이 당시에 지적하고 있었듯이,전두환일파가 쿠데타로 득세하여 한국사회에 대한 군의 통제가 더욱 확장되기 이전부터 10·26이후 정승화 지휘하의 한국군부는 군에 의한 사회통제를 이미 크게 확대해놓은 상태였다(『워싱턴 포스트』, 79년 12월 13일). 또 1979년 12월 11일 서울발『워싱턴 포스트』의 기사는 10·26이후 12·12이전에 한국 계엄사 휘하의 군인들이 민주인사들에 대해 가한 고문과 폭력은 박정희 치하의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에 의해 자행된 것보다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워싱턴 포스트』, 1979년 12월 12일).이러한 잔학행위는 박정희체제하의 긴급조치 위반 명목이었던 것으로 정승화를 중심한 10·26이후의 군부체제가 가진 억압성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 가야 한다.
  둘째, 미국이 정치 ·군사적으로 깊이 관련을 맺고 있는 제 3세계 국가에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현지 군부와 치안기관들의 주요수뇌부와 긴밀한 의사소통 및 정보교환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미군이 수만명 주둔할 뿐 아니라 첨단 군사장비 및 다수의 핵기지를 운영하고 있는 곳에서, 더구나 10·26이후의 '위기'적인 상황에서 대사관 내부의 CIA요원들,그리고 이들이 음양으로 고용하고 있는 현지인 에이전트들,그리고 미군 휘하의 각종 군정보기관들이 한국의 주요장성들과 '의견교환' '정보교환'을 강화하고 '그들 군 수뇌부의 동정'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었을 것은 의심할 바가 아니다. 더욱이 당시 박정희 암살범으로 체포된 김재규 들을 수사하고 있던 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일당의 동정을 미국이 사전에 몰랐으며 단지 '소문'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은 미국의 제 3세계에서의 정보체제와 행동방식을 매우 오도하는 발언이라는 것이 일단 지적되어야 한다. 위컴 등은 그러한 '소문'을 한국 고위장성들에게 전달했으나 그들은 "한국인 자신들도 모르는 일을 미국인들이 어떻게 안단 말이냐"고 반문하면서 무시해 버렸다고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득력이 없다.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과 그들의 정보체제의 능력과 철저성을 한국사회의 어떤 부류보다도 더 피부로 인식하고 있을 한국 고위장성들이 그런 식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운위하는 것 자체가 그러한 쿠데타의 사전 저지를 위해 그들이 한국군부와 협의한 사실이 있었다는 이들 미국인들의 말을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미국은 군부의 쿠데타 계획을 한국정부에 전달했으나 한국정부측이 이를 무시해버려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식의 주장은 미국이 이미 1961년 박정희 쿠데타 당시에 했던 것과 똑같은 주장이다.
  셋째, 글라이스틴 등은 전두환 일파의 군부대가 이동하는 시간에 이를 탐지하고 역쿠데타를 시도할 생각을 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한 가지 가능성은 위컴과 글라이스틴이 정말 전두환일파의 등장 이전에 정승화일파를 주축으로 한군부를 통해서 한국청치의 전개를 구상했을 가능성이다. 두번째 가능성은 물론 위컴과 글라이스틴이 다같이 전두환 세력의 등장을 둘러싸고 한국군 내부에 갈등이 존재함을 일찌기 감지한 가운데 이들 신군부의 부상을 기본적으로 방조했을 가능성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가능성은 글라이스틴은 한국군부 내.에서 정승화를 축으로 한 질서를 지지했던 입장인 데 반해서 그가 모르는 사이 위컴으로 대변되는 미국정부의 한정책노선이 전두환일당에 보다 긴밀히 연결되면서 이를 은밀히 지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미국의 '국익'을 안정성 있게 확보한다는 미국의 대한정책의 핵심적 측면을 관철하는 데 있어서 미국이 신임할 수 있는 군부정치의 리더십을 이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일당 - 전두환집단은 '놀랄 만한' 단결력을 가졌으며 '군부내의 광범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위컴의 판단은 12·12훨씬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다고 이들 국방성의 미국관료들은 판단하고 있었을 가능성인 것이다. 이것은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 반경 전두환일당의 군부대 이동의 실행에 접하여 용산벙커에 모였던 위컴과 글라이스틴 둘이 이를 저지하기 위한 역쿠데타를 모의하다가 위컴이 새벽까지 기다려보자고 했던 사실을 볼 때 이에 대한 의혹이 더욱 짙어진다. 즉 위컴은 글라이스틴과 같이 이를 모의하는 척하다가 새벽까지 기다리자고 하여 일단 이를 중지시켰으며 그로써 결과적으로 쿠테타군은 서울시내를 장악할 시간을 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위컴은 이들이 서울을 장악한 다음엔 이들과 대치하는 것은 시가전을 수반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론'으로 역쿠데타를 합리적인 이유로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정보관계에 있어서 한국군 수뇌들과 미국의 관계는 주로 위컴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임에 비추어 이 문제에 관해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입장 차이를 가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점에 기초해서 우리는 하나의 가설을 구성해볼 수 있다. 이 가설은 미국의 대한정책에 관해 미국 국무성곽 국방성이 어느 정도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국무성의 대변자로서 가능하다면 적어도 외견상 적나라한 폭력을 구사하는 집단으로 인해 미국의 대한정책 이미지가 손상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쪽이라고 가정하자.그래서 글라이스틴측은 전두환일 당보다는 정승화를 택하는 경 향을 보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위컴을 통해 대변되는 미국 국방성은 한국이 갖는 미국에 대한 군사적 기지로서의 역할 때문에 한국정치의 경직성의 완화가 미국이 한국에서 갖고 있는 핵기지 등을 비롯한 군사적 위치를 손상시킬 위험성에 보다 민감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70년대 후반 카터가 주한미군의 감축을 추진하려 했을 때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 해임된 바 있는 주한미군 장성 싱글러브 소장은 위컴과 같은 방식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 국방성의 시각을 반영했다고'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12월 12일 쿠데타를 전후한 미국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국무성과 국방성의 미묘한 입장 차이가 글라이스틴과 위컴이 보여준 미묘하지만 다소간 존재했던 행동의 차이로 표현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이해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무래도 군사적인 기지로서의 성격이기 때문에 국방성을 대변하는 위컴의 입장이 관철되어 전두환 일파의 쿠데타가 부드럽게 진행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해석을 가정 해보는 경우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은 위컴은 물론이려니와  글라이스틴도 전두환일파의 쿠데타 주도세력의 비위를 어떻게 잘 맞출 것인가에 대한 면밀한 고찰 끝에 '현명하게'(바보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처신했다는 그 자신의 고백이다.
  넷째, 미 국무성이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취임을 비관하는 성명을 1980년 4월초에 발표했다고 하나, 바로 이 무렵 주한미대사관 관리들은 "김영삼은 무능하고, 김 대중은 과격하며 , 김종필은 때가 묻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었던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뉴스위크』 1980년 4월 7일). 미국무성의 입장이 이랬다면 미국방성의 입장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피터슨을 비롯한 미국인들이 미국의 외교를 설명할 적에 자료를 '취사선택'하는 태도-생각해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를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4. '공수부대의 잔악한 진압행위'를 미국은 과연 몰랐을까

  1980년 5월 17일 계엄령 확대선포 이후 광주사태기간에 있어서의 미국의 태도는 군부의 잔혹한 인권유린을 반대했으며 미국이 취한 일련의 '협조적인 조치들은 불가피한 최소한의 협조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피터슨이 증거라고 제시하는 주장들을 몇 가지로 묶어서 살펴보자.
  계엄령 확대선포 직후 군부가 3김을 체포하자 미국은 즉각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여기에 온통 신경을 쓰느라 광주에서 한국 공수부대가 벌인 잔학한 진압행위를 일찍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당국이 광주에서 한국 공수부대의 동태를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몇 가지 상황증거가 있다.
  그 첫째는 앞에서 12·12쿠데타의 진행에 관해서 미국이 정확히 몰랐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 제기한 같은 이유에서이다. 미국이 한국에서 가동하고 있는 민간 및 군 정보기관들,그리고 5·17전후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미국이,특전단이 광주로 이동하는 것을 몰랐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걸음 물러서서 글라이스틴 대사가 몰랐다고 하는 주장은 애교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위컴이 몰랐을 가능성은 더욱 수긍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두번째의 상황적인 이유는,광주'사태'가 발발하기 전에 이미 공수부대가 광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한 미국인 민간인이 있다. 그는 피터슨의 글에도 인용되고 있는 팀 완버그로서 당시 광주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있던 사람이다. 그런 목격에 근거해서 그는 광주사태는 사전에 미리 계획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이러한 고의 진술 때문에 80년대 초에 그는 한국정부로부터 추방조치를 당한 바 있다).이것 자체가 미국관리들이 특전단의 이동을 사전에 알았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측의 모든 정보기관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이 시기에 이러한 정보를 미국이 모르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셋째 , 5 · 17을 며칠 앞두고 '코프 제이드 80-ll '라고 불리는 한미 간 연합군사훈련이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한국의 각 기지에서 실시되어 내외신기자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오연호씨는 지적하고 있다 (식민지의 아들에게』, 백산서당,1989).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실시된 그 합동훈련에서는 후방으로부터의 물자 및 병력지원을 차단하는 훈련,실무장투하훈련, 공중정찰, 탐색 그리고 구조작전이 입체적으로 전개됐다"(『동아일보A, 1980년 5월 13일. 오연호, 위의 책, 158ㅉ족에서 재인용) 이러한 상황은 오연호씨의 지적대로 한미간의 정보교환이 이 시기에 특히 민활할 수밖에 없었을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 한 합동군사훈련은 또 한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훈련은 전두환일파를 타도해야 한다는 비판이 한국의 전역에서 빗발치며 최고조에 달해 있던 시기에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곧 5·17직전 그러한 전두환일파가 이끄는 한국의 군부와 미국은 매우 긴밀한 공동작업 관계에 있음을 재확인한 것이며 전두환일파의 군부에 대해 미국이 '우호적 태도'를 갖고 있음을 과시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이 5·17을 전후한 한국군부의 동향을 몰랐다고 하는 주장이나 이미 앞서 살펴본 12·12의 진행과정에 미국이 무관했다고 주장하는 미국관리들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미국의 공직관리들의 일반적인 행동방식에 관해 단순한 얘기지만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미국의 케네디정권은 1961년 쿠바의 피그만에 수천명의 무장군대를 침투시켜 침략행위를 자행하였는데, 이 뻔한 비밀 아닌 비밀작전에 대한 유엔에서의 비난이 고조되자 미국 리버럴의 대부인 당시 주유엔 미국대사 아들라이 스티븐슨-그는 1952년에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한 인물이다-은 이 작전에 미국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사코 부인했었다 (David Halberstam, The Best and the Brightest, Penguin Books ,1972)
  레어건정권 시절 국무성 대변인이었던 한 관리는 미국정부가 의도적으로 공개적인 성명을 통해 역정보를 유포하는 일에 반대한다면서 사임한 일이 있었다. 1980년 미국의 대한정책 성명들을 접할 때 우리는 미국 국무성이 이처럼 공식적으로 '거짓'을 이용하는 관행이 있다는 것을 새삼 염두에 둘 일이다. 또1980년에 레이건정권이 중미 니카라과의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콘트라에 대한 비밀지원을 실시했다가 나중에 레바논 언론의 이란-콘트라 스캔들의 폭로로 미국정가에 파문이 일자 슐츠 미국무장관은 한사코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고 주장했었다. 그는 레이건과 같이 "나는 모른다"고 주장했던 것인데 미국의회와 언론은 대체로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당시 콘트라에 대한 비밀지원의 실무자였던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직원 올리 노스 중령은 레이건으로부터 사실을 은폐하라는 압력을 받은 일이 있음을 시인했다. 슐츠 국무장관 역시 물론 자세한 실무는 접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당시의 행정부내 정치관계의 맥락으로 볼 때 이해가 가는 면이 없지 않으나 그러한 작전이 실행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러한 몇 가지 예들을 통해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미국의 공직에 있는 관리들,특히 고위관리들의 좌우명의 하나는, 미국의 대외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있는 정치군사공작에 미국이 개입하고 난 후 그러한 사건에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발뺌 가능성 ' (deniability)의 여지를 남겨두고 또 이를 확보하기 위해 각종의 둔사(適辭)와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 국무성의 두뇌들이 하는 중요한 작업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히 미국관리들의 주장을 증거로 한 역사연구를 검토할 적에 반드시 유념해야 할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5. 20사단의 광주투입을 승인한 이유에 대하여

  이들 미국관리들은 자신들이 20사단의 광주투입을 승인한 사실이 한국의 정치군부에 미국이 협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미국은 첫째:공수부대에 의한 잔학상을 알고 난 이후 폭력을 개탄하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둘째, 20사단 파견을 승인한 것은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에만 사용한다는 조건이었고 또 20사단은 공수부대에 비해 '폭동진압훈련'을 잘 받은 부대여서 폭력을 덜 사용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며,셋째,협상기회를 주기 위해 최종적인 진압작전을 이틀간 연기시 켰다고 강조하고 있다.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는 글라이스틴의 주장을 우선 들여다보자. 『뉴욕 타임즈』지의 보도에 의하면, 광주시민들은 5월 22일 몇 가지 조건을 내걸면서 협상을 요구했다. 이들이 당시 요구한 것은 정부는 모든 군대를 질서가 회복될 때까지 광주시로부터 철수할 것, 900명의 체포된 시민을 석방할 것, 사망자와 부상자의 가족들에게 보상할 것,고리고 시위자에 대한 보복을 하지 말 것 등이었다(『뉴욕 타임즈』, 1980년 5월 23일). 미국이 20사단의 이동 허가를 통해 광주에 대한 병력증강에 협조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광주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강화시 켜준 바로 그 자신들이 평화적 협상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 머리 위에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미국성명서 삐라를 뿌리라고 요구했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행동인가?
  위컴과 글라이스틴이 20사단의 광주투입을 승인한 이유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라이스틴은 미국의 이 행동을 변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군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한편으로는 폭력을 개탄하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고 글라이스틴은 주장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협상하자고 나선 광주시민들의 입장을 진정 존중하는 마당이었다면 미국은 20사단 자체의 증원파견을 거부했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일이다. 광주시민이 평화적 중재를 요청하고 나선 바로 그 날짜에 군부대의 증원파견을 승인한 마당에 20·사단의 실제 이동은 협상결렬 때만 사용한다는 조건이었다고 내세우는 글라이스틴의 주장은 후안무치의 군소리임에 틀림없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통해 그 폭력성을 여실히 입증해 보인 전두환일파의 정치군부,즉 만인 공인의 야수에게 또 하나의 증원군을 맡기면서 협상결렬 때만 사용하라고 말했다는 것은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궁색한 궤변이다.
  『뉴욕 타임즈』 1980년 5월 26일자의 보도대로 광주봉기의 학생지도자들은 그날 월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로 하여금 '휴전'(truce)을 주선하여 유혈사태를 중단할 수 있게 할 것을 미국에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미국측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공식통로'를 통해 접수된 요청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에 협력할 것을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반란군과의 휴전'을 원하지 않았다. 민주시민들의 '굴복'을 원했던 것이다. 군부가 엄청난 잔학상을 보인 직후 무력부대의 증원파견을 승인한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20사단의 증원파견을 승인한 것 자체가 광주봉기에 대한 무력진압에의 개입이기 때문에, 이것은 '휴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국군부와 미국의 입에 맞지 않는 '협상'에 대한 원천적 거부를 이미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라이스틴이 주장한 또 하나의 군소리는 20사단을 파견한 것은 20사단은 '폭동진압훈련'을 받아서 폭력을 덜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는 주장이다. 광주시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였다는, 말하자면 광주시민을 생각해준 조치였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지난 번 글에서 이러한 주장이 지극히 기만적인 것임을 지적 한 바 있다. 한국군부가 20사단의 파견을 선택 요청하고 미국이 이를 승인한 것은 첫째,광주시의 수십만에 달하는 거의 모든 성인 남녀 시민이 거리를 횝쓸며 군부의 만행에 저항한 사태를 당하여 군부는 공수부대와 그들에 의한 무차별총격으로도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없어 철수한 직후였다.
  이것은 곧 광주시와 외부를 차단하고 그래서 그 엄청난 사태로 인식된 광주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군부대의 절대량의 증원이 불가피했던 것이다.이런 상황은 정웅 휘하의 지역사단의 소극적인 진압자세로 인해 더욱 필요해진 것이었다. 필자는 또 군부가 20사단을 선택한 이유는 특전단 못지 않게 정치군부에 충성할 군부대로서 20사단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이 부대는 정치군부의 핵심구성원의 하나인 박준병의 군대였기 때문이다. 즉 한국군은 필요한 때에 제대로 선택된 군부대의 이동승인을 미국에 요청했고 미국은 지체없이 이를 승인했던 것이다.
  글라이스틴이 제시한 세번째 군소리는 20사단을 승인한 후에 광주에서 진압 작전을 실시하는 것을 이틀간 연기시킨 것은 자신들의 노력 덕분이었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러할까?한국 정치군부는 21일 오후 노도와 같은 수십만의 광주시민들의 피의 저항에 부딪쳐 철수했었다. 이러한 수십만의 시민들에 의한 연일 시위를 진압하는 작전을 늦춘 것이 미국의 노력 때문일까?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한국군부가 부딪친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처럼 수십만의 시민을 다시 총검으로 상대하여 진압하기에는 누가 보더라도 무리였을 것이며 이것은 곧 그들이 일단 철수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며칠을 기다리면서 소위 그들이 말하는 '과격파'와 일반 '선량한 시민'을 분리 시키는 작업을 위해 며칠을 기다리는 것은 어느 누구로서도 당연한 계책일 것이었다. 그런데 두번째 문제는 그렇다고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한 무통제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민중봉기의 타지역으로의 확산이 우려되는 것이었다. 결국 날짜를 어느 선에서 정하는 것이 '작전상 합리적'이며 또 어떤 조건을 마련하면서 진압작전을  전개하느냐 하는 고민인 것이었는데,한국군부가 미국 세네월드 장군을 매개로 미국측과 긴밀히 협의한 끝에 진압 작전 D데이를 27일 새벽으로 결정한 것은 그러한 군사작전상의 합리성에 기초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5일에는 이미 다수의 특전단 부대와 20사단이 광주시 외곽에서 진압작전을 위한 준비작전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세네월드와 한국군부가 협의한 것은 광주시민들의 협상노력에 기회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희성이 증언한 대로 소위 '북의 오판'에 대비하여 미국의 항공모함과 공중정보기 등을 한국쪽에 증파하는 문제 등,광주시민과 군부의 최종적인 충돌이 어떤 사태를 유발할지 모르는 그 '만약의 사태들'에 대비하여 주변정지작업에 미국이 협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코랄시호등의 파견이 20사단이라는 전방부대의 광주투입으로 생긴 서울지역 전방의 방위력 약과를 심리적으로 보강해주는 의미도 갖는 것이었다는 것을 지난 번에 지적한 바 있다.
  글라이스틴이 여러 가지 군소리를 늘어놓으며 미화하려고 애쓴 20사단의 광주투입 승인이라는 미국의 행동이 취해진 1980년 5월 23일 무렵을 전후해서 미국정부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했고 또 한국의 군사·정권에 어떤 공개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었을까? 광주에서의 비극을 안타까와하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전두환일당의 학살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었을까?광주에서 공수부패에 의한 잔학상을 안 직후 미국은 폭력을 개탄했다고 글라이스틴은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 1980년 5월 21일자 보도는 이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미국은 남한의 군사지도자들에게 어떤 의미있는 압력도 가할 계획이 없다. 보복조치로 미군철수위협을 할 생각도 없다. 서울과 워싱턴의 미국관리들은 안보가 제일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남한에 간섭하려는 어떤 시도도 이미 분단된 나라를 더욱 약화시킬 것으로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남한의 군사정군에-역자) 어떤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압력도 가할 계획이 없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상황분석이라고 하겠다." 또 이웃 일본에 미국대사로 가 있던 마이크 맨스필드 역시 20사단 광주투입을 미국이 승인한 무렵의 미국의 태도는 추호도 고민의 흔적을 보이지 않았음을 드러내준다. 명백히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한 한국의 정권을 미국은 지지할 것이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맨스필드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미국은 '필요한 한 언제까지나' 한국정부를 계속 지지 할 것이다" (Asian wall street journal,1980년 5월 24일)

6.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정당화논리'의 차이

글라이스틴의 빙빙 돌리는 군소리들에 비하면 위컴의 정당화논리는 지극히 단순명쾌하다. 위컴은 미국이 20사단의 파견을, 승인한 이유는 "한국국방장관의 요청에 따라, '미리 ·싹을 자를 필요가 있었던 상황을 통제하는 데 있어 한국군부와 협조하는 수단" 이었다고 '당당하게 ' 말한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마크 피터슨이 위컴의 답변태도를 "훌륭한 군인적인 방식"이었다고 묘사한 이유였던 것이다.
  '미리 싹을 자를 필요가 있었던 상황'이란 위컴의 인식은 광주사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며 , 이것은 "사이공 함락 이후 아시아에서 미국의 맹방이 맞이한 최대의 위기"라고 말한 것으로 『워싱턴 포스트』 5월 27일자가 보도한 미국 관리들의 위기의식을 단순명쾌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는 미국정부가 3만 9천의 주둔미군과 미국이 한국에 갖고 있는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전략적 이익 때문에 미국은 안보와 공공질서를 최우선으로 삼았다"고 지적했는데 주한미국 고위관리들이 20사단의 광주투입을 승인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며 위에서 인용한 위컴의 발언은 이를 극명하게·부각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이 미국의 행동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미묘한 차이를 보노라면, 미국의 대외정책수행에 있어 미국 국무성이 담당하는 역할의 한 측면을 떠올리게 된다. 위기가 발생한 제 3세계에서 미국이 개입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처럼 미국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 있어서는 미군당국의 한국군부에 대한 정찰과 통제 및 방향유도 등을 통해서,또 CIA등을통한 한국의 체제치안경찰조직과의 긴밀한관계를 가동시키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국무성을 대변하는 현지 미국대사는 경우에 따라 이러한 타조직들(국방성, CIA)의 작전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지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든 미국대사관의 현지에서의 역할은 미국의 입장이 어느 쪽에서 보든 "바보같은 곤란한 입장에 처하는 일이 없게끔"미국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일이다. 피터슨이 이용하고 있는 글라이스틴 자신의 발언들은 바로 이 점이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는 것을 잘 짐작케 해주고 있다.
  미국의 국무성은 해외에서의 각종 비밀정치군사공작의 아지트와 커버로서 행동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작업을 맡고 있다는 사실은 제2차대전 후 미국이 비밀공작수행을 담당할 정부조직을 선정하는 결정과정에 잘 나타나 있다. 1946년 8월까지는 미국이 1945년 종전과 함께 트루만이 해체시켰던 정보기관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이 재건된 정보부는 055와 달리 비밀공작을 수행할 권한과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곧 해외에서 심리전 등 비밀공작의 필요성을 느끼고 1946년 말부터는 당시 전쟁성장관이던 로버트 패터슨과 해군성장관이던 포레스탈의 주도로 유럽에서의 심리전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46년 12월 말에는 국무성-전쟁성-해군성 조정위원회 (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의 한 소위원회에 의해 지침이 마련되었으며 이것은 나중의 모든 비밀공작 수행의 기초가 된다. 비밀공작에 대한 논의는 극비리에 1947년 계속되었으며, 이해 4월에는 SWNCC의 한 소위원회가 실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문제는 이 비밀공작을 어떤 부서가 책임을 맡아 집행하느냐였다. 처음엔 국무성에 맡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마샬은 그 필요성은 인정하되, "그것들이 발각될 경우 미국외교가 손상을 입을 것"이라면서 "다른 기관이 맡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47년 7월에 통과된 국가안보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안보회의의 제 1차회의는 역시 같은 법에 의해 CIG에서 이름을 바꾼 CIA에게 비밀공작업무를 전담시킬 것을 결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Thomas Powers, The  Man Who Kept the Secrets : Richard Helms and the CIA, Alfred A. Knopf, 1979, p.29) .

7. 미국의 노력으로 '다행스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주장에 대하여

  광주에 대한 최종 진압작전에 관하여 피터슨이나 글라이스틴이 논하는 방식에 관하여 하나 더 지적하고 넘어가자.글라이스틴은 최종진압작전에는 불과 극소수가 잔류하여 반항하고 있는 자들만 사살되었기 때문에 희생이 '다행히도' 최소화되었으며 이것은 마치 자기들이 그간 폭력의 극소화를 위해서 노력해온 덕분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며 피터슨은 이런 주장을 충실히 되풀이하고있다. 글라이스틴은 다른 곳에서 당시 협상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무기를 놓기를 거부하는 일부 과격분자들의 소행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광주민주화투쟁에 대한 최종적인 무력진압에 개입한 한국군부와 미국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미국의 노력으로 '다행스런 결과'를 가져온, 광주시민에게 미국이 베푼 일종의 '선처'였던 것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30명의 광주시민에 대한 살인군부의 학살이 다행스런 폭력의 최소화였다는 것이다. 당시 도청에 최후까지 남아 부상당했던 정동년씨는 국회증언에서 최후에 희생된 광주시민은 1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증언했다.
  한걸음 뭍러서서 30명이냐 100명이냐는 중요치 않다고 하자. 글라이스틴이 동의한 대로 한명의 죽음도 너무나 많은 죽음이니까. 문제는 이들의 죽음을 (다행스런 소폭'의 것으로 규정하고 자화자찬하는 미국의 태도이다. 숨을 죽이면서 그러나 피눈물을 삼키며 말없는 함성으로 성원하는 수십만 광주시민들, 아니 한국의 수천만 민중의 깃발이 되어 최후까지 도청을 지키면서 광주의 이름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던 200여 명의 광주시민군들, 한국의 민주주의를 압살하며 동포들의 가슴을 대검과 총포로 쥐어뜯어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전두환일당의 군사세력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으려던 이들,차라리 죽어서 광주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던 이들을 사살하고 부상자들을 짓밟으며 오리떼처럼 묶어간 군부에 대해 충실하게 협조적이었던 미국은 그 행위 자체로서 광주학살의 처음부터 끝까지에 이르는 비극 전차에 적극적인 동참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광주학살에 대한 가해자'요, '공동정범' 이라는 규정을 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과격한 폭도들의 소규모 살상'에 그친 성공적인 진압작전에 공을 세운 양 오히려 자화자찬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미국인들의 그 구제불능의 사유방식,그 후안무치를 새삼 뼈저리게 느끼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문제점을 가진 글라이스틴의 또 하나의 주장은 광주'사태'가 끝난 직후 그는 "워싱턴과의 상의 없이" 한국군부에게 광주사태가 그렇게 된 데 대해서 사과를 하라고 요구했다고 한 것이다. 이 무렵 『뉴욕 타임즈』지의 보도에 따르면, 광주사태가 진압'되고 난 직후 워싱턴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인 리처도 홀부르크의 의견에 따라 전두환일당에 대한공개적인 비판을 삼가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은 아무튼 그의 얘기대로 그런 요구를 했다고 하자. '악어의 눈물'이라는 것은 아마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려니 생각한다. 그런데 글라이스틴의 행동이 내포하는 더 큰 문제는 그가 이 악어의 눈물마저, 미국인 자신들이 협력한,즉 자기들의 '우군'으로 삼아 같이 협력했던 한국군부에만 요구하고 자기 자신들은 그 악어의 눈물마저 흘려야 할 추호의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데에 있다. 피터슨은 그의 글 첫머리에서 광주와 관련하여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회개하지 않는 군부의 태도'를 지적하였으나 미국인인 그의 입장에서 정작 지적했어야 할 해결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 미국인의 태도'인 것이다.

8. 1980년 8월 8일 위컴의 전두환지지 발언에 관하여

  피터슨은 위컴의 주장에 기초하여 1980년 8월 8일 위컴의 발언에 대한 신문보고 방식은'왜곡'이었으며 미국이 전두환정권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을 개진하고 있다. 위컴은 그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또 하나의 군부정권을 지지할 것이냐는 앤더슨 기자의 질문에 그가 대답한 내용이 왜곡·와전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는 한국의 새 군사지도자들이 '정당성 확보과정'을 거치면 미국은 틀림없이 새 정부를 지지할 것이라고 하는 당시 국무성에서 논의되고 있던 이야기를 전달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그냥 미국이 전두환정권을 지지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위컴과 피터슨은 이 문제를 하나의 중요한 문제인 양 '하나의 이슈'로서 제기하는 것 자체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하겠다.
  첫째, 위컴은 '정당성 확보과정을 거친 군사정권'을 미국이 지지한다고 하는 것과 '그냥 군사정권'을 미국이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주요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위장하고 있다. 유신보다 더 한 강압적인 환경 속에서 '선거를 포함한 정당성 확보과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미국이 모를 리가 없다. 여기서 미국의 제 3세계에서의 '민주주의의 가면정책'이라는 특유의 기만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한가지 덧붙일 것은 정당성 확보과정을 거친 군사정권을 미국이 틀림없이 지원할 것이라는 의견은 위컴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국무성에서 당시 논의되고 있던 것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러한 전두환일당에 대한 지지세력이 미국내에서 미국군부만이 아닌 미국국무성을 포함한 미국정부 자체의 광범한 합의였음을 폭로해주는 '실수'를 위컴 스스로 범하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 '우연한 언론의 왜곡보도'로 인해 전두환정권이 성립하게 된 것같이 시사하려 했던 위컴의 가증스러운 수작을 보다 확실하게 반박할 증거를 위컴 스스로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 에피소드가 미국이 전두환에 대한 지지표명이 왜곡된 형태로나마 최초로 이루어진 사건을 의미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줌으로써 피터슨과 위컴은 미국이 12·12이후 광주학살 과정에 이르기까지 전두환일당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온 사실의 의미를 축소·호도하려 하고 있다. 또한 미국이 광주사건 이후에 광주문제의 성격을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키는 동북아 안보의 문제"(워싱턴 포스트), 1980년 6월 1일)로 규정하여 전두환과 미국에 의한 광주무력진압을 정당화하고 광주에서 민주시민항쟁의 피가 마르기도 전인 1980년 6월 초에 카터정권이 한국군부정권에 경제원조를 제공했으며 (『뉴욕 타임즈』, 1980년 6월 3일), 미국자본가(데이비드 록펠러 등 미국은행가들)는 그들대로 전두환장군의 권력의 공고화'가 미국자본의 안정된  투자환경을 보장할 것이라고 발언하는 등 미국의 지배층이 한국의 새 군사정권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실시해온 전체적인 맥락을 피터슨의 글은 전혀 무시하고 있다. 더구나 위컴은 이 날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카터정권 기간중 그리고 레이건 전기간을 통해서 한국의 군사독재를 정당화하는 많은 발언을 해온 당사자였다. 물론 대통령 카터도 '한국인들은 그들의 판단에 의하더라도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는요지의 발언을 하여 위컴에 동조했었으며,미국무성 관리들도 광주학살 기간중인 1980년 5월 말에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정권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준비를 하면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은 넌센스'라는 식으로 주장하고 '서양과 제 3세계 사이에는 문화적 수준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한결같이 강조했다고 패트리샤 데리안 (당시 미국무성 인권담당차관보)이 증언했던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결국 위컴과 피터슨이 1980년 8월 8일 위컴이 발언한 내용이 한국의 군사 정권에 대한 지지표시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가증스러운 말장난이거니와,그때 비로소 미국은 전두환에 대해 지지할 조건을 조심스럽게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역시 구토증을 일으키는 태도들인 것이다.

9. 미국인들의 역사서술 :반역사적 역사인식

  이제 마지막으로 마크 피터슨의 '역사서술'방식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겠다. 그의 문제의 핵심은 광주에서의 미국역할에 관한 문제에 관해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끊임없이 "미국은 왜 그때 좀더 적극적으로 전두환일당의 행동을 억제하지 못했는가 ?"라고 묻는다. 그리고는 현실적인 제약들, 즉 전두환일당의 실력 , 미국 영향력의 한계,그리고 그 선택이 가장 인간적 희생을 최소화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미국은 '도덕적 책임이 추호도 없다'고 결론 짓는 수순을 밟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미국이 한국에서 가능하다면 '민주주의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피터슨의 글이 내포한 중요한 '역사서술상의 문제점'의 하나이다. 광주와 미국의 문제를 올바로 접근하여 올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미국은 왜 어떤 상황에서도 군부독재와 협조하며 더 나아가 미국은 왜 그러한 한국민중의 민주적 민족주의적 열망을 유혈로 압살하는 파쇼적인 군부독재세력이 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게 하는 데 역사적 구조적으로 기여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는 지난번 졸고에서 다소 길게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려고 한다. 단 피터슨의 글이 한국민중에게는 '가해자' 혹은 '가해자의 배후세력 '으로 인식되고 있는 주한 미국 고위관리들의 주장을 그들이 "현장에 있었던 솔직한 참여자들"이라는 구실하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역사서술 태도가 얼마나 '안이한' 수준의 것인가를 지적해두고 싶은 것이다.
  그는 광주사태는 '역사적인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으나 그에게 있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기껏해야 "광주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미국이 광주봉기를 당하여 군부의 편에 서서 유혈 무력진압을 승인하고 협조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워싱턴 포스트』지가 "한국에서 미국이 가진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전략적 이해관계"라고 했던 것의 그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해명하는 일은 피터슨이 그의 글에서 말한 '역사적인 시각'이라는 것과는 정말 실오라기만한 관련도 없는 것이다.  피터슨이 끊임없이 던지는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군부독재세력의 저지를 위해) 왜 좀더 적극적일 수 없었는가?" 하는 그의 비역사적인 질문은 불가피하게 역시 끊임없이 초점에 어긋난 해답을 이끌어내고 있다. 즉 미국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군부독재세력의 부상은 "미국이 한국에서 가진 영향력의 한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좀더‥‥‥ 라는 질문과 "영향력의 한계로 어쩔 도리가‥‥‥라는 답변은 하나의 사이 좋은 짝을 이루면서 이승만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변호하던 트루만의 발언으로부터 시작해서 매우 유서깊은 '교리문답'이 되어왔다.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해 비판적인 한국인의 시각을 접할 때 미국인들이 보이는 가장 전형적인 반응은 "미국더러 뭘 더 해달라는 것인가?"라는 반문이다. "산타클로스 미국의 호주머니도 한계가 있다"는 논리이다. 이들은 비판적인 한국인의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을 비롯한 제 3세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갖는 문제는 힘의 한계라는 문제가 아님에도 참으로 끈질기게 착각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힘의 한계라는 것은 미국이 제 3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하고자 하는 방향성이 정립된 경우라야 나을 수 있는 문제이다. 피터슨이 그의 논문 서두에서 먼저 묻고 답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했어야 하는 문제는 미국이 진정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이었는가 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미국이 한국에서 갖는 기본적인 관심은 미국의 동북아 경제 및 군사전략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또 그러한 구도에 대한 한국내의 민주주의 혹은 민족주의적 세력의 도전을 확고히 저지할 수 있는 정권을 수립하고 지원하는 일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시세에 따라 약간의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도록 한국의 정권에게 권유하는 일은 있었으나 이러한 권유가 '지나치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까지는, 즉 '우방 한국의 지도자들과 미국의 기본적인 우의'가 손상될 정도로까지 '민주주의의 가면정책'을 미국이 한국에 강요해본 일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에 5공화국이 출범한 것이 미국정책이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면 '힘의 한계론'은 타당할 수 있으되, 이 시기의 미국의 대한정책은 실패도 실수도 아니었다. 세계시민을 경악시킨 광주학살로 곰보가 된 한국의 5공화국이  출범하자마자 '세계 인의 축제'인 88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쓸만하게 똑똑하지만 얼굴이 못생긴 전두환체제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미국이라는 '형님'이 물심양면으로 발벗고 나서 전통적인 힘센 자기 친구들을 동원하고 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을 구워삶았기 때문이었다. .광주에서 20사단의 승인을 단순명쾌하게
정당화한 위컴의 발언은 곧 한미관계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며 글라이스틴의 여러 가지 군소리들은 미국이 자신의 대외정책의 본질을 은폐하기 위해 일용하는 '둔사'혹은 '가면정책'을 예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힘의 한계론'은 그것이 설 정당한 자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현대사에 관련하여 끊임없이 은폐되어온 진실의 하나는 동북아에 있어서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기지로서의 한국'을 보장하는 데 이롭지 아니한 정치세력으로부터 한미동맹체제는 부단히 도전에 직면해왔고,그러한 도전이 정치적으로 심각하지 않았던 때에는 또 그때대로 미국이 철저하게 친미적인 한국의 정권을 필요로 했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미국은 한국에서 파쇼독재를 '친애'함으로써 만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할 수 있었다. 해방후 미국은  중의 지지에 기초한 좌익의 도전을 '극복'하고, 미군이 진주할 무렵부터야 비로소 정치활동을 개시한 외세의존적인 우파세력을 긁어모으고 키워내 한국에 우파정권을 세우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한국전쟁은 그것대로 미국이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부재를 정당화하는 데 편리한 구실이 되어주었고, 6D년대 초반 학생혁명 후에는 민족의 자주통일운동이라는 반미적 함의를 가질 수 밖에 없는 도전에 직 면했었다.
  1960년대 중반에는 한국민중의 반일주의를 거스르며 동북아에서 한미일 협조체제를·다지는 데 바빴을 뿐 아니라,미국이 베트남에서의 제국주의전쟁에 도원할 수 있는 실질적인 동맹국 군대는 한국의 박정희 군부독재정권하의 군대뿐인 상황이었다. 베트남에서의 한국독재정권의 '기여'가 끝날 무렵에는 '월남패망'이라는 안보이데올로기가 미국 닉슨행정부의 비호 아래 한국 유신정권의 등장을 정당화했으며, 1970년 한국을 방문한 카터의 목적은 한국의 인권상황의 개선이 아니라 박정희를 미국침례교신자로 개종시키는 복음을 위한 것처럼 보였다(브루스 커밍스, 『뉴욕 타임즈』 1982년 7월 6일). 인권을 가지고 카터행정부가 박정희를 어느 정도 심난하게 만들기에는 카터정권의 군사주의의 강화운동도 너무나 빨리 왔다. 1980년 광주시를 둘러싸고 시민과 전두환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바로 그날들에 동북아에서 미소의 냉전은 깊어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25일자 『뉴욕 타임즈』는 미국정부는 그 한 달 전부터 유럽에서 분쟁 발생시에 극동의 미국군사력을 유럽으로 이동시킨다는 소위 '스윙전략'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태평양중시정책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극동에 대한 미국의 군사력 집중을 유지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하나의 '정책전환'이라고 이 신문은 보도했었다. 이 보도는 또 이 '신정책'은 항모를 이응하여 소련의 블라디보스톡 항구등 극동에 대한 '공격적 작전들'과 같은 '새로운 전쟁계획들' 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카터정권이 또 그의 이른바 인권정책의 체면을 세워주는 마지막 보루였던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에 대한 무기금수조치의 해제를 고려하고 있었던 것도 바로 한국에서 광주봉기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럴수록 광주문제가 미국관료들의 지적대로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 안보의 문제'였던 것은 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인식이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단순한 형태로나마 지난 40여 년간의 현대 한미관계사를 일별하여 느낄 수 있는 것은 도채체 그 민주주의의 가면정책'이나마 한국의 독재정권에 '지나치게'권유하는 '여유'를 부리는 것을 극동에서 미국의 국익추구는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문제에 대한 고찰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로,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때 왜 좀더 ‥‥" 하고 묻고는 위컴과 글라이스틴이라는 두 관료의 입을 빌려 미국도 힘이 한계가 있는 것 운운하는 것은 역사연구의 기본적인 원칙을 무시하는 서술이 라고 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10.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지 못한다"

  1980년 5월 광주봉기를 통해 미제의 끊임없는 격려와 물질적 지원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의 총검을 가슴으로 받으면서 이방에서 군부독재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하자고 싸웠던 남녀노소 수십만의 광주시민들의 분노 앞에서는 전두환일당과 똑같은 위기의식을 느끼며 이것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동북아안보'의 문제요, '사이공 함락 후 아시아 맹방이 처한 가장 위험스런 상황'으로 인식했던 미국관리들의 선봉장으로서 위컴은 전두환일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미리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군대에 의한 '폭동진압'에 기꺼이 나섰던 것인데,바로 이 위컴이란 자가 그러한 한미합동의 군사작전으로 광주에서의 전투가 미국이 지원한 야수들의 승리로 끝나고 한국의 전역이 군화로 유린되며 칠읅같은 침묵에 싸이자 적반하장으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위컴은 이러한 발언을 했음을 스스로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그가 사과를 한 일은 더더욱 없다) .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도자가 누구든 무조건 그를 따른다. 한국인에게는 민주주의가 적절한 체제가 아니다. "(koreans are like field mice, they just follow whoever becomes their leader. Democracy is not adequate system for koreans.『뉴욕 타임즈』, 1982년 7월 6일.브루스 커밍스의 기고문에서 재인용)
  우리들은 위컴을 비롯한 미국인들에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미국인들(특히 위컴과 같은 지배관료와 데이비드 록펠러 같은 자본가들)은 들개와 같다. 한국에서 그들은 아무리 피로 얼룩진 뼈다귀라도 그것을 마련해줄 수 있는 무장강도들을 무조건 지원한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그들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는 데 적절한 체제 가 아니기 때문이다. " (Americans are like wild dogs, they just support whoever can serve them bones in Korea, no matter how bloody they are, Democracy is not an adequate system to guarantee American interests in Korea. Lee Samsung, "Kwangju and America in Perspective," in Asian Perspective, Fall/winter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