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미국은 광주학살을 사전 모의하고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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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광주학살을 사전 모의하고 집행했다
김광민(국민일보)
금남로와 망월동이 80년대와 마지막 5월을 맞이하고 있다. 투쟁으로 민주를 수호하고 죽음으로 광주를 사수했던 사람들은 망월동에서 금남로에서 피빛 함성으로 아우성치고 있다. 광주학살이 자행된지 10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진상 규명은 커녕 살인마 전두환은 백담사에 휴가중이고, 학살자 노태우는 대통령이라는 권좌에 앉아 있다. 또한 원격조종의 끄나불로 학살을 배후조종한 미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명과 자기 합리화를 획책하고 있다.
그러나 광주는 이 땅의 모든 진실을 낱낱이 토해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의 역할을 극명하게 드러내게 한 광주 민중항쟁은 독재정권을 지원, 조종하는 미국,입으로는 자유와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뒷구멍으로는 침략과 억압으로 민중을 죽음의 낭떠러지로 내모는 나라가 미국임을 명확히 증명해 주고 있다.
미국! 지금으로부터 120여년 전인 1866년 샤먼호로 한반도를 침범한 이래 일제의 한반도 점령을 부추기고, 해방된 1945년 이 땅에 민중을 학살하며 인천에 상륙하더니 민주 세력을 초토화하고 군정을 실시하면서 허리를 꺽어 분단을 강요한 나라. 동북아시아에서 전략적 이익을 위해서는 '안보'라는 명분으로 민주를 외치는 시민을 학살하는데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나라 미국!
그렇다 이땅의 진실은 한국 민중의 숨통을 조르는 나라가 미국이며, 미국이 물러가지 않는 한 민족의 자존도 민중의 생존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민족을 볼모로 삼아왔다. 어김없이 찾아온 5월에 미국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광주학살은 미국과 전두환 노태우 군부가 사전 모의 계획했다 !
-80년 광주의 비극은 79년 12· 12군사쿠데타에서 시작되었다. 12 · 12 당시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휴전선 부근의 제1군 제20사단(박준병,소장), 최강의 보병부대 제3군 제26사단 등의 전선을 지키던 국군을 빼돌려 서울을 침략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는 한·미 연합사의 편제상 명확히 미국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도표 참조) 그러나 미국측은 12 · 12를 사전에 몰랐다고 했는데 "한국내의 정찰 비행은 80년 이전부터 행해져 왔다. 한국내의 개미새끼 한마리의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다"는 주한미군 세네월드대장의 발언 등으로 미루어 "몰랐다"는 발언은 허구이다.
그런데 미국은 12 · 12쿠데타 때 전두환 그룹이 한미연합군 지휘하의 한국 군대를 미육군 제8군(주한미군)의 허가없이 이동시킨 것에 위컴 사령관은 격노하고 미국측은 전두환 퇴역을 촉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중앙정보부 (KCIA)부장 대리 겸임을 발표(80, 4. 14) 한 것에 대해 카터는 5훨1일 미·일 정상회담의 석상에서 오오히라 수상에 대해 "한 사람이 군 정보 · 보안, 각 부문을 한손에 장악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 했다고 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과연 전 ·노 군부독재와 마찰 관계를 가지면서 미국은 비위가 거슬렸을까?
한마디로 아니다. 전두환이 12· 12 쿠데타이후 1월 중순경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이상 없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제 5공화국과 군부인맥, 지양사)라는 것에서 미국과 밀월관계는 이상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전두환은 5월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 대학을 폐쇄하고 김대중과 김종필등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거물 정치가들을 체포하게 되었다. 실로 미국 쪽에서 나온 발언들은 '인권'과 민주주의 간판'을 내건 이상, '한마디 하지 않으면'이라는 체면과 허위 정보의 유포를 통해 미국의 의도를 관철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5 · 17을 전후하여 미 당국자와 5 · 17주도 세력간의 긴밀한 접촉의 결과 5 · 18을 유발시켰다?
이 땅에서 권력에 다가설 수 있는 자의 혈통은 미국피가 흘러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남한의 독재권력은 미국에 의해 양산되기 때문이며, 미국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여야만 권력에 다가설 수 있고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이런 구비조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1951년 당시의 주한미군 제8군 사령 관 제임스 밴프리트 대장에 의해 신설된 정규의 육군 사관학교 제1기생 (옛제도로 하면 11기인 전두환은 56년 60년 두번에 걸쳐 도미한 경험이 있다. 그당시 미국은 맥카시 선풍이 불어닥쳐 냉전파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전두환은 미국에서 군사 유학을 했으며 '유신체제'후 민중탄압정책으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공수부대를 이끌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철저한 친미반공주의자, 반민족, 반민중적인 인물이 전두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전두환은 1960년,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방한했을때, 대통령의 신변 경호를 맡는 등 미국 군부로부터 "친미파"로서 평가 받고 있었다.
이렇게 "친미 · 반공주의자" 전두환은 미국의 승인하에 12·. 12쿠데타와 5 17쿠데타를 일으켜 철의 권력을 형성했다. 여기서 주의깊게 살펴볼 점은 전두환은 미국의 대소강경론파요 매파로 알려진 공화당 대통령 후보 로널드 레이건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 (79년 5월에 부임 )은 한 · 미 양국의 베트남 파견시대에 전두환과 같은 계급 (대령)으로 둘은 친교를 깊이하고 있었으며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임관후, 전두환과는 빈번히 접촉을 가져왔다. 또한 레이건 후보의 외교 브레인에 리처드 알렌이라는 인물이 있다. 위컴과 알렌은 닉슨시대에 주한미군철수 반대론자들이며,이들은 박정희 죽음후의 급격한 민주화에 브레이크를 건 전두환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는 80년 3월경 "전두환이 비밀리에 미국에 가서, 미국 관계자와 접촉했다"라는 정보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전두환은 위컴의 중개로 차기 미 대통령이 되려 하는 레이건의 브레인 리처드 알렌과 만나 미국의 뒷받침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는 그해 11월의 미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 정권이 들어서리라는 객관적 조건에 발 맞추어 미국과 전두환은 국내의 반정부운동을 힘으로 밀어부치고 최규하 대통령이 공약한 정치일정(헌법 개정과 대통령 선거)을 무시해 버리는 5 17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5월 중순경, 레이건의 참모 알렌과 전두환이 회담을 했는데 미국은 이 내용을 전혀 공개시키고 있지 않다. 아마도 중요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으리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은 5 · 17을 전후로 한 시기인 점과 5월 13-14일에 걸쳐 '코프레 이드 80Ⅱ'라는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후방침투,적 퇴로차단, 물자수송 등의 내용으로 벌어졌다는 점이다. 민중 봉기를 진압하는데 쓰여질 목적으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깊게 하는 대목이다. 더욱더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은 5 · 18직전 광주에 거주하던 모든 미국인이 시외곽으로 철수했다고 알려졌는데, 당시 광주의 정황으로 보아 자국인을 대피시킬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으며, 이러한 사전 조치야말로 미국이 광주학살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계획적으로 학살에 동참한 것임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는가!
숨가쁘게 진행된 미국과 전두환 일파의 연속적인 접촉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 광주를 죽음으로 내몰려는 음모를 획책한 것은 아닌가!
미국의 책임하에 있는 한국군을 광주학살에 동원했다
미국이 광주학살의 배후조종자임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이 진압군의 병력이동을 승인해준 일이었다. 공수특전 단의 무자비한 총칼에 분연히 떨쳐 일어선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시민군을 형성, 계엄군이 시외곽 밖으로 철수함으로써 광주가 해방된 날인 5월22일, 주한미군 사령관 겸 한미연합 사령관 존위컴 대장은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와의 합의하에 한국 계엄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한국군 병력의 일부를 광주지역으로 이동시키는데 동의했다. 이 병력은 제20사단 소속 4개 연대였다. 이날 미 국방성의 토마스 토스 대변인은 " 한국의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 대장에게 그의 지휘하에 있는 일부 한국군 부대를 차출해 주기를 요청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를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당시 주한미대사로 있던 글라이스틴은 퇴임 후 발표한 논문 「미국 이해의 한 특별한 표적』에서 "미군사령관 (존 위컴)은 나와 함께 20사단을 점검한 후 이 요청에 동의하였으며 나는 우리의 결정을 워싱턴에 즉각 보고했다"고 고백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당시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 경보기 2 대와 필리핀에 정박 중인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부산항에 급파하였다. 그 이유는 "현재의 한국 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그들 주장대로라도 미국은 한국군의 광주학살 작전이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적극 지원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미국 스스로도 수차 확인하였고 중국과 당사자인 북한에 의해 표명되었던 바 당시 북한의 무력 남침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무력시위를 보였던 것은 미국의 무력 개입이 단순히 대북 경계용이 아니라 한국 민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음을 볼때 피가 끓는 전율을 느끼게 까지 한다.
또한 미국이 20사단의 이동 승인뿐만 아니라 최종 진압작전인 충정 작전 실시 여부 혹은 실시 시간설정에 개입했음이 '작전일지'(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20사 31사 전투교육사령부 등의 일일 진압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를 통해 드러났다. '한미간 협의사항 24일 까지 대기'라는 기록에서 유추가능한 것은 미국이 항쟁 진압 과정에서 한국군 고위 간부들과 계속'협의'해왔으며 '대기'가 아닌 충정작전의 '시행'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시해야 할 부분은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전두환은 위컴과 향후 정치 일정에 대해 12 · 12쿠데타이후 계속 협의해 왔으며 이는 광주학살이 피의 살육으로 끝난지 일주일 만일 6월2일 카터정권이 전두환지지를 천명한 것과 8월7일 위컴이 LA타임즈와의 회견에서 "전두환이 부자연스럽지만 지도자로 부상하게 될 것이고 한국인은 맹목적으로 우두머리를 따르는 들쥐들처럼 그의 주위로 모여들 것이며 그는 무지막지하여 본인만큼의 식견도 없지만 미국의 이익을 잘 대변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그를 지지한다"는 요지의 뜻을 밝힌것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광주학살은 미국에 의해 추진된 '전두환 옹립'일정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비극이었다. 광주애국민중은 미국과 전두환 일파의 합작에 의해 추진된 군부독재 재편 프로그램의 계획적인 살인만행이었다.
5월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미제 강점 · 분단조국 45년!
반미구국투쟁 45년!
광주민중항쟁 10년!
「‥‥ 우리는 광주와 지난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 실현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적이 바로 미국임을,그러기에 미국으로부터의 이 땅의 자주화 없이는 민주주의가 자라날 수 없음을 똑똑히 알았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미국이 세계평화의 수호자라고, 민주주의의 모국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미국이야말로 조국분단의 원흥이고, 독재의 실질적인 조종자‥‥‥‥
(88년 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 협의회 발간 「동지여, 나의 동지여 ! ! 」소책자 중에서) 미국의 진정한 관심사는 한국의 인권이나 민주화가 아니라 대소전진기지로서의 한국의 전략적 위치가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80년 광주학살이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조국이 민주화되기 위해서는 미국이 이땅에서 축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것이 광주의 교훈이며, 80년대
반미투쟁의 기본축으로 되는 점이다.
이제 5월은 반미의 무풍이 아니라 태풍을 몰고오는 바람이 되고 있다.
5월에서 반미로!
5월에서 민족해방으로!!
김광민(국민일보)
금남로와 망월동이 80년대와 마지막 5월을 맞이하고 있다. 투쟁으로 민주를 수호하고 죽음으로 광주를 사수했던 사람들은 망월동에서 금남로에서 피빛 함성으로 아우성치고 있다. 광주학살이 자행된지 10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진상 규명은 커녕 살인마 전두환은 백담사에 휴가중이고, 학살자 노태우는 대통령이라는 권좌에 앉아 있다. 또한 원격조종의 끄나불로 학살을 배후조종한 미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명과 자기 합리화를 획책하고 있다.
그러나 광주는 이 땅의 모든 진실을 낱낱이 토해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의 역할을 극명하게 드러내게 한 광주 민중항쟁은 독재정권을 지원, 조종하는 미국,입으로는 자유와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뒷구멍으로는 침략과 억압으로 민중을 죽음의 낭떠러지로 내모는 나라가 미국임을 명확히 증명해 주고 있다.
미국! 지금으로부터 120여년 전인 1866년 샤먼호로 한반도를 침범한 이래 일제의 한반도 점령을 부추기고, 해방된 1945년 이 땅에 민중을 학살하며 인천에 상륙하더니 민주 세력을 초토화하고 군정을 실시하면서 허리를 꺽어 분단을 강요한 나라. 동북아시아에서 전략적 이익을 위해서는 '안보'라는 명분으로 민주를 외치는 시민을 학살하는데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나라 미국!
그렇다 이땅의 진실은 한국 민중의 숨통을 조르는 나라가 미국이며, 미국이 물러가지 않는 한 민족의 자존도 민중의 생존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민족을 볼모로 삼아왔다. 어김없이 찾아온 5월에 미국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광주학살은 미국과 전두환 노태우 군부가 사전 모의 계획했다 !
-80년 광주의 비극은 79년 12· 12군사쿠데타에서 시작되었다. 12 · 12 당시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휴전선 부근의 제1군 제20사단(박준병,소장), 최강의 보병부대 제3군 제26사단 등의 전선을 지키던 국군을 빼돌려 서울을 침략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는 한·미 연합사의 편제상 명확히 미국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도표 참조) 그러나 미국측은 12 · 12를 사전에 몰랐다고 했는데 "한국내의 정찰 비행은 80년 이전부터 행해져 왔다. 한국내의 개미새끼 한마리의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다"는 주한미군 세네월드대장의 발언 등으로 미루어 "몰랐다"는 발언은 허구이다.
그런데 미국은 12 · 12쿠데타 때 전두환 그룹이 한미연합군 지휘하의 한국 군대를 미육군 제8군(주한미군)의 허가없이 이동시킨 것에 위컴 사령관은 격노하고 미국측은 전두환 퇴역을 촉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중앙정보부 (KCIA)부장 대리 겸임을 발표(80, 4. 14) 한 것에 대해 카터는 5훨1일 미·일 정상회담의 석상에서 오오히라 수상에 대해 "한 사람이 군 정보 · 보안, 각 부문을 한손에 장악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 했다고 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과연 전 ·노 군부독재와 마찰 관계를 가지면서 미국은 비위가 거슬렸을까?
한마디로 아니다. 전두환이 12· 12 쿠데타이후 1월 중순경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이상 없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제 5공화국과 군부인맥, 지양사)라는 것에서 미국과 밀월관계는 이상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전두환은 5월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 대학을 폐쇄하고 김대중과 김종필등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거물 정치가들을 체포하게 되었다. 실로 미국 쪽에서 나온 발언들은 '인권'과 민주주의 간판'을 내건 이상, '한마디 하지 않으면'이라는 체면과 허위 정보의 유포를 통해 미국의 의도를 관철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5 · 17을 전후하여 미 당국자와 5 · 17주도 세력간의 긴밀한 접촉의 결과 5 · 18을 유발시켰다?
이 땅에서 권력에 다가설 수 있는 자의 혈통은 미국피가 흘러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남한의 독재권력은 미국에 의해 양산되기 때문이며, 미국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여야만 권력에 다가설 수 있고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이런 구비조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1951년 당시의 주한미군 제8군 사령 관 제임스 밴프리트 대장에 의해 신설된 정규의 육군 사관학교 제1기생 (옛제도로 하면 11기인 전두환은 56년 60년 두번에 걸쳐 도미한 경험이 있다. 그당시 미국은 맥카시 선풍이 불어닥쳐 냉전파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전두환은 미국에서 군사 유학을 했으며 '유신체제'후 민중탄압정책으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공수부대를 이끌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철저한 친미반공주의자, 반민족, 반민중적인 인물이 전두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전두환은 1960년,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방한했을때, 대통령의 신변 경호를 맡는 등 미국 군부로부터 "친미파"로서 평가 받고 있었다.
이렇게 "친미 · 반공주의자" 전두환은 미국의 승인하에 12·. 12쿠데타와 5 17쿠데타를 일으켜 철의 권력을 형성했다. 여기서 주의깊게 살펴볼 점은 전두환은 미국의 대소강경론파요 매파로 알려진 공화당 대통령 후보 로널드 레이건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 (79년 5월에 부임 )은 한 · 미 양국의 베트남 파견시대에 전두환과 같은 계급 (대령)으로 둘은 친교를 깊이하고 있었으며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임관후, 전두환과는 빈번히 접촉을 가져왔다. 또한 레이건 후보의 외교 브레인에 리처드 알렌이라는 인물이 있다. 위컴과 알렌은 닉슨시대에 주한미군철수 반대론자들이며,이들은 박정희 죽음후의 급격한 민주화에 브레이크를 건 전두환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는 80년 3월경 "전두환이 비밀리에 미국에 가서, 미국 관계자와 접촉했다"라는 정보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전두환은 위컴의 중개로 차기 미 대통령이 되려 하는 레이건의 브레인 리처드 알렌과 만나 미국의 뒷받침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는 그해 11월의 미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 정권이 들어서리라는 객관적 조건에 발 맞추어 미국과 전두환은 국내의 반정부운동을 힘으로 밀어부치고 최규하 대통령이 공약한 정치일정(헌법 개정과 대통령 선거)을 무시해 버리는 5 17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5월 중순경, 레이건의 참모 알렌과 전두환이 회담을 했는데 미국은 이 내용을 전혀 공개시키고 있지 않다. 아마도 중요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으리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은 5 · 17을 전후로 한 시기인 점과 5월 13-14일에 걸쳐 '코프레 이드 80Ⅱ'라는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후방침투,적 퇴로차단, 물자수송 등의 내용으로 벌어졌다는 점이다. 민중 봉기를 진압하는데 쓰여질 목적으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깊게 하는 대목이다. 더욱더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은 5 · 18직전 광주에 거주하던 모든 미국인이 시외곽으로 철수했다고 알려졌는데, 당시 광주의 정황으로 보아 자국인을 대피시킬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으며, 이러한 사전 조치야말로 미국이 광주학살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계획적으로 학살에 동참한 것임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는가!
숨가쁘게 진행된 미국과 전두환 일파의 연속적인 접촉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 광주를 죽음으로 내몰려는 음모를 획책한 것은 아닌가!
미국의 책임하에 있는 한국군을 광주학살에 동원했다
미국이 광주학살의 배후조종자임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이 진압군의 병력이동을 승인해준 일이었다. 공수특전 단의 무자비한 총칼에 분연히 떨쳐 일어선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시민군을 형성, 계엄군이 시외곽 밖으로 철수함으로써 광주가 해방된 날인 5월22일, 주한미군 사령관 겸 한미연합 사령관 존위컴 대장은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와의 합의하에 한국 계엄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한국군 병력의 일부를 광주지역으로 이동시키는데 동의했다. 이 병력은 제20사단 소속 4개 연대였다. 이날 미 국방성의 토마스 토스 대변인은 " 한국의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 대장에게 그의 지휘하에 있는 일부 한국군 부대를 차출해 주기를 요청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를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당시 주한미대사로 있던 글라이스틴은 퇴임 후 발표한 논문 「미국 이해의 한 특별한 표적』에서 "미군사령관 (존 위컴)은 나와 함께 20사단을 점검한 후 이 요청에 동의하였으며 나는 우리의 결정을 워싱턴에 즉각 보고했다"고 고백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당시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 경보기 2 대와 필리핀에 정박 중인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부산항에 급파하였다. 그 이유는 "현재의 한국 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그들 주장대로라도 미국은 한국군의 광주학살 작전이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적극 지원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미국 스스로도 수차 확인하였고 중국과 당사자인 북한에 의해 표명되었던 바 당시 북한의 무력 남침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무력시위를 보였던 것은 미국의 무력 개입이 단순히 대북 경계용이 아니라 한국 민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음을 볼때 피가 끓는 전율을 느끼게 까지 한다.
또한 미국이 20사단의 이동 승인뿐만 아니라 최종 진압작전인 충정 작전 실시 여부 혹은 실시 시간설정에 개입했음이 '작전일지'(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20사 31사 전투교육사령부 등의 일일 진압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를 통해 드러났다. '한미간 협의사항 24일 까지 대기'라는 기록에서 유추가능한 것은 미국이 항쟁 진압 과정에서 한국군 고위 간부들과 계속'협의'해왔으며 '대기'가 아닌 충정작전의 '시행'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시해야 할 부분은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전두환은 위컴과 향후 정치 일정에 대해 12 · 12쿠데타이후 계속 협의해 왔으며 이는 광주학살이 피의 살육으로 끝난지 일주일 만일 6월2일 카터정권이 전두환지지를 천명한 것과 8월7일 위컴이 LA타임즈와의 회견에서 "전두환이 부자연스럽지만 지도자로 부상하게 될 것이고 한국인은 맹목적으로 우두머리를 따르는 들쥐들처럼 그의 주위로 모여들 것이며 그는 무지막지하여 본인만큼의 식견도 없지만 미국의 이익을 잘 대변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그를 지지한다"는 요지의 뜻을 밝힌것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광주학살은 미국에 의해 추진된 '전두환 옹립'일정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비극이었다. 광주애국민중은 미국과 전두환 일파의 합작에 의해 추진된 군부독재 재편 프로그램의 계획적인 살인만행이었다.
5월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미제 강점 · 분단조국 45년!
반미구국투쟁 45년!
광주민중항쟁 10년!
「‥‥ 우리는 광주와 지난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 실현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적이 바로 미국임을,그러기에 미국으로부터의 이 땅의 자주화 없이는 민주주의가 자라날 수 없음을 똑똑히 알았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미국이 세계평화의 수호자라고, 민주주의의 모국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미국이야말로 조국분단의 원흥이고, 독재의 실질적인 조종자‥‥‥‥
(88년 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 협의회 발간 「동지여, 나의 동지여 ! ! 」소책자 중에서) 미국의 진정한 관심사는 한국의 인권이나 민주화가 아니라 대소전진기지로서의 한국의 전략적 위치가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80년 광주학살이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조국이 민주화되기 위해서는 미국이 이땅에서 축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것이 광주의 교훈이며, 80년대
반미투쟁의 기본축으로 되는 점이다.
이제 5월은 반미의 무풍이 아니라 태풍을 몰고오는 바람이 되고 있다.
5월에서 반미로!
5월에서 민족해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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