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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중봉기와 미국의 역할

본문

광주민중봉기와 미국의 역할

        이삼성(사회와 사상)

광주를 통해본 미국의 제3세계정책
그 성격의 총체적 인식

1.광주항쟁을 통해 분기한 친미와 반미

  1. 반미주의의 질적 심화

  광주의 항쟁과 비극이 가져온 절망, 내연하는 분노가 군대의 총포와 얼음 같은 침묵으로 뒤덮여 있던 1980년 5월 29일 「뉴욕 타임즈」는 워싱턴의 미국관리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했다. "남한 사회의 모든 부문은 이란과 달리 친미적이다. 그것은 북한이 제기하는 군사적 위협 때문이며 또 군부나 민간인 모두 미국의 도움을 바라기 때문이다. " 광주의 경험은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가졌던 일부 환상을 크게 시정했으나 미국관리들은 광주 이후 반미주의가 한국민 사이에 크게 성장할 것을 예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특히 한국전쟁 이후 남한이 얼마나 철저하게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그리고 이념적인 지배하에 놓여져왔었는가를 역으로 설명해주는 것이며 이것은 다시 미국관리들이 광주에도 불구하고 견지했던 자신감의 바탕이었던 것이다.
  1982년 3월 비교적 보수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려진 고려신학교 학생들의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미 관리들의 자신감에 찬물을 끼얹었을 뿐 아니라 이 방화를 주동한 문부식씨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정에서 최후진술을 하는 가운데 말한 다음의 주장은 그후 한국의 저항운동의 정신적 흐름을 보다 정확하게 예견한 것이다. "이번 방화사건에 대한 미국의 최초의 반응은 지극히 냉소적인 태도였다. 이런 사태가 누구에게 이로울 것인가라며 이북이 이를 이용할 것이라고 암시했다. 한국민의 이익과 열망을 경멸하는 이같은 미국의 자세는 이장에서의 반미주의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장차 필연적으로 나와 같은 행동이 다른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 예언이 진실로 판명될 것을 나는 굳게 확신한다. "
  1985년 5월 73명의 대학생들이 서울 미문화원 건물을 점거하고 광주항쟁에 대한 잔혹한 억압을 공모한 데 대해 책임을 느끼고 미국정부는 공개사과할 것을 요구한 것은 문씨의 예언을 가장 극명하게 뒷받침해준 사건이었다. 당시 문교장관 손재석은 여기에 참여한 학생들은 전국대학생연합의 민중민주위원회에 관련된 학생들이라고 국회에서 증언했었다. 당시 일부 학원자율화조치에 따라 자율적 선거로 등장한 각 대학 학생회의 연합인 전국적인 대학생연합체가 관련되었다는 정부측 주장은 학원에 대한 광범한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이용하려는 측면도 있었으나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정부나 미국이 그간 주장해온 것처럼 강경한 반미적 행위가 소위 일부 과격학생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학생들 내부에서 광범한 지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고 이 점이 미국에게는 더욱 심각한 사태라고 판단케 했을 것이다.
  왜 광주를 거치면서 남한에 반미주의가 질적으로 강화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한국인들이 미국의 실체에 대해서 광주 이전에 지녔던 순진한 환상과 그 이후에 그들이 느꼈던 실망을 동시에 표현해주는 다음의 몇 가지 진술들을 통해 일부 발견할 수 있다. 한국 카톨릭교회는 1982년 부산미문화원에 대한 방화에 참여한 학생들에 동정을 표하는 공개성명을 냈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미국에 대한 직접적 적대행위인 이번 방화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한미관계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이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이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의 운명에 관여하기 시작한 이후 미국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인식되어왔었다. 그러나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1980년 5월의 광주학살에서의 미국의 역할 때문에 한국민의 미국에 대한 인식은 결정적으로 변화했다. "
또 어떤 지하문서는 광주의 교훈을 이렇게 요약했다.
"미국의 도덕정치와 인권정치는 광주에서 그 기만성을 드러냈다. 미국의 양심과 민주주의는 이제 우리에게 의미를 상실했으며 '국익우선'의 제국주의 정책은 한국민에게 여실히 폭로되었다. 명백한 반미의 횃불을 들 때가 왔다. "(5 · 18광주사태보고 : 시민항쟁-한국반군사독재세력연합으로부터의 편지 , 1982년 해외한민보사가 발행한 텍스트, 뉴욕, p.41)
  이 문건들은 한국에서의 반미주의가 광주의 경험을 통해서 성장 혹은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한편 그 이전에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것,즉 광주 이전엔 미국이 한국에 있는 이유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였다고 믿었다는 문부식씨의 법정진술이 나타내주는 것과 같이·긍정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럼 광주에서 미국의 어떤 형태가 그러한 심오한 인식의 변화를 초래한 것인가: 가장무난하게 광주사태를 정의한다면 군사독재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을 군부가 무력으로 억압한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바로 이러한 군사독재세력의 광주시민항쟁 혹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무력억압에 미국이 협조했다고 믿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은 그러한 군부통치의 재부과와 그것에 저항하는 광주민중에 대한 유혈진압을 미국이 교사한 것이었다는 인식도 존재한다.

  2. 친미관의 몇 가지 유형

그러나 광주에서 군부에 대한 미국의 협조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다 반미의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친미적인 태도를 갖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미국은 당연히 할 일을 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특히 북한과의 대결이라는 소위 안보상황을 이유로 내걸면서 광주에는 시민시위에 대한 군부의 무력진압은 불가피하고 당연한 조치였고 미국은 당연히 한국정부(군부)의 조치에 협조해야 하는 것이었고 다행히도 그렇게 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런 태도를 우리는 좀 어렵고 애매한 표현을 쓰면 '권위주의적 지향의 친미관'이라고 할 만하고 좀 쉽게 말한다면 '파쇼형 친미관'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유형의 친미관은 이와는 달리 좀 유연한 성격을 띠고 있어서 반박하기도 좀 까다로운 친미적 시각이다· 이것은 광주와 관련해 군부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을 미국이 방조한 것 자체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형태는 일회적인 것이었거나,혹은 광주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미국이 달리 행동하기 어려웠던 점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미국은 군사독재의 파수꾼이라는 반미적인 일반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무리한 논리적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각은 미국이 일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편에 서왔다는 이미지에 기초해 있으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들 속에서 미국이 독재의 편에 서 있었던 사례들을 아무리 많이 제시한다 하더라도 이 시각에 셔 있는 사람들의 미국에 대한 그같은 총체적인 이미지를 손상시키지는 못한다. 이들의 미국관의 저변에는 미국의 세련된 부와 현란한 민주주의의 모습이며 대외적으로는 인권외교 혹은 도덕주의 '등의 개념들이 깊이 잠재해 있다. 광주에도 불구하고 견지되는 이런 시각을 우리는 '동정형 ' 친미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이 유형의 친미적 관점은 광주에서의 한국군부에 대한 미국의 협조를 파쇼형 친미관처럼 폭동진압을 위한 당연한 조치였다고는 보지 않고 보다 고상하게 "유감스럽지만 질서회복을 위한 불가피한 행동" 이었거나 혹은 보다 더 유연한 표현을 사용해서 "미국으로서는 달리 대안이 없는 조처"였다고 봄으로써 어떻든 그것을 '이해할 만한' 행동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태도가 친미적인 이유의 본질은 한국군부가 폭력으로 광주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협조했던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미국이 민주주의보다는 독재의 친구라는 일반론을 거부하는 데 있다. 이 입장은 미국은 다행히도 인민민주주의의 적이지만 시민민주주의의 옹호자라고 간주한다. 혹은 한걸음 물러서서 미국이 시민민주주의의 능동적인 옹호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한국같이 민주주의의 전통이 없는 나라에서 그나마 독재의 거친 모서리를 다소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동정형 친미관은 최근 미국의 경제개방압력 등을 비난하는 한국의 많은 경제인들 및 중산층을 위시한 다수 한국인들 일반을 광범하게 지배하고 있는, 무정형적인 것 같으면서도 강력하게 자리잡은 사고유형인 것으로 판단된다.소위 '정치적 현실주의'의 입장에서 미국의 대한정책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당수 학자들의 견해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동정형 친미관 혹은 '현실주의적' 친미관은 광주에서 미국의 역할을 정의하는 데 있어 상당한 개념적 혼란 혹은 애매성을 가져다 준다. 이들은 미국이 20사단의 파견을 승인함으로써 광주라는 특정상황에서 시민들의 시위를 군부가 무력진압하는 데 협조했다는 것을 인정하되, 이 사실 자체가 미국이 군사독재의 협조자였다는 결론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이것은 미국은 전체적으로는 시민민주주의의 친구이거나 적어도 그 적은 아니라는 하나의 총체적인 미국관을 통해서 광주에서의 미국의 형태를 이해하며 평가하는 것이다. 당시 한국군부의 폭력적 조치에 미국이 실질적으로 협조했다는 것을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여 아무리 입증한다 해도 미국이 '군사독재의 협조자였다'는 것을 설득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근본적인 벽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해방 후 한국의 좌익민중을 미국이 폭력으로 억압했다는 사실을 아무리 설득력 있게 제시해도 이들 동정형 친미시각에 선 사람들은 미국이 한국민주주의의 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꾸할 것이다. "미국이 그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인민민주주의의 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원래적인(원래적이란 이들에게는 서구적인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의 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미국의 정책은 한국에 서구적 민주주의에 기본적인 정치적 환경(즉 폭력적인 공산독재세력의 배제)을 마련하기 위한 불가피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해야 한다. "

  3. 시민민주주의적 반마관과 민중주의적 반미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광주라는 경험을 통해 미국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 궁극적인 문제로 되는 것은 광주에서의 무력진압을 위해 한국군부 장성들이 모일 모시에 위컴이나 글라이스틴과 만나 무엇을 협의했다는 것 등을 밝히는 사실적인 판정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 대한 몇 가지 전제상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대립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광주에서 미국이 한국군부와 긴밀히 협조했다는 사실을 보다 명확히 밝히는 일은 중요하다. 한국인들이 광주를 경험하기 이전에는 미국을 시혜자로서 간주하거나 혹은 적어도 동정형적 친미관의 시각에서 한미관계를 이해하는 이데올로기가 대다수 한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상태에 있었다. 광주라는 역사적 체험은 그런 친미적 세계관의 지적 헤게모니에 중대한 타격을 가했다.
  해방후의 폭발적인 혁명적 상황 속에서 미국과 미국이 키우고 무장시킨 우파세력이 미군정기간을 통해서 그리고 한국전쟁기를 거치면서 , 좌익민중의 도전으로 상징되는 한국내의 계급적 모순은 외세가 주도하는 정치 군사적인 외적. 결정력에 의해서 순치되었으며,또한 남한 안에서 좌익의 존재가 정치적으로 철저히 부정됨으로써 한국민족사에서의 좌우의 대립은 현실적으로는 남과 북의 군사적인 대결로 전화 혹은 왜곡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후 좌익의 체제적인 배제라는 정치구조는 독재권력의 억압력으로 유지되어왔고 따라서 한국내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적 모순과 갈등에 상응하는 이념적 다양성과 그 표출은 원천적으로 제약되어왔다.
  이처럼 계급적 갈등 혹은 모순에 대응하는 이념적 다양성이 존재할 수 없는 왜곡된 상황을 결정적으로 깨뜨린 사건이 곧 광주이며 이로부터 친미적 세계관의 헤게모니가 크게 도전받고 또 그것을 대체하는 반미적 인식도 폭발하게 된 것이다. 긴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이 부마사태로부터 그 이듬해 5월의 대규모 학생투쟁으로 연결되면서 고조된 반독재저항의 열기, 또 이것을 억누르기 위해 군부가 광주에서 보여준 적나라한 폭력성,이처럼 극명하게 양극화된 상황에서 미국이 철저하게 군부의 편에 서 있었던 사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그간 반독재 대열에 서 있던 한국인들의 상당부분까지도 지배해왔던 친미적 미국관의 헤게모니를 혁파하는 역사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충격적인 방식으로 등장한 한국의 반미적 세계관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시민민주주의적 반미관이다. 이 입장은 미국은 한국에서 민중혁명적 변혁은 물론 서구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조차도 저해하는 세력이라고 인식한다. 이 관점은 스스로는 시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런데 미국은 한반도에서 자신의 위상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민민주주의적인 정치형태보다 군사독재가 더 확실하다고 보고 미국은 남한에서 이 후자를 선호하며, 바로 이 점을 명확히 한 것이 광주의 경험이 보여준 바의 핵심이라고 파악한다.
  이 입장에 선 사람들은 또 광주에서 미국이 보여준 형태는 동정형 친미관에서 믿는 것처럼 일회적인 것이거나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 전반을 통해 미국이 한국에 대해 취한 정책을 일관되게 특징 지우는 일반적 태도라는 인식을 수용한다. 이 시각은 광주항쟁을 비교적 시민민주주의적 지향을 가진 광주'시민들'의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는 측면이 있다.
  두번째 반미적 미국관은 민중주의적 반미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앞의 시민민주주의적 시각이 광주항쟁의 주체를 시민민주지향적인 '시민'으로 정의하는 데 비해서 이 민중주의적 반미관은 그 항쟁의 주체를 '시민'이라고 하기보다는 보다 계급적인 대립관계 속에서 파악된 피지배자집단으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한 의미에서의 '민중'으로 정의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시민민주주의적 반미관이 광주에서의 미국의 행동을 독재자 대 시민의 대립에서 미국이 독재자를 지원했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데 비해서, 민중주의적 반미관은 지배자 대 피지배자의 대립이 첨예화한 상태에서 미국이 지배자의 편에 서있었던  것을 재확인해 준 것이 광주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민중주의적 반미관은 반파쇼·반 독재의 입장에서 그러한 파쇼세력의 지원자 흑은 대형으로서의 미국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미국이 한반도에 민중을 억압하는 반민중적인 지배세력을 조장하고 그 편에 서서 민중적인 열망을 체계적으로 억눌러왔음을 상기시킨다·
  이렇게 민중적 시각에 입각한 반미관은 한국현대사에 관한 인식에 있어 시민민주주의와 또 하나의 중대한 차이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북한정권과 한국전쟁 그리고 미군정시대에 관련해서 한국의 좌익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문제를 둘러싼 것이다. 시민민주적 반미관은 그것이 갖는 정치적 정향 혹은 가치관 때문에 북한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평가하고 북한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일정한 제약을 내포한다. 해방후 식민주의와 봉건주의의 모순들 속에서 좌익이 주도하는 혁명적 상황을 연출한 시절의 정치정세는 사실적으로 인식하더라고 그 좌익이 추구했던 한국역사의 미래상,그리고 그러한 자주적인 사회적 비전을 추구한 좌익민중을 탄압한 미국의 역할에 대해 민족주의의 논리적 귀결에 따라 평가하는 데 있어 일정한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정권의 자주성(북한정권의 지도세력이 가진 항일반식민투쟁의 인식과 북한정권이 소련 ·중국 등의 외부 사회주의세력으로부터 독자적인 내적 정치기반을 가졌음을 인정하는 것)과 민중성(북한정권이 북한민중의 열망에 기초한 것)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데 있어서도 일정한 제약이 따른다. 따라서 해방후 한국 현대사에서 수행한 좌익민중에 대한 탄압이라고 하는 미국의 역할의 핵심부분에 대해서, 시민민주적 반미관은 미국을 파쇼의 옹호자로 비판은 하되 파쇼의 대형으로서 미국이 남한을 정치 ·군사·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궁극적인 이념적 기반 - 즉 '침략적 공산독재집단'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 을 원천적으로 공격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이에 비해서 민중주의적 반미관은 사회주의적 혁명을 거치고 그에 바탕한 북한체제를 역사적 피지배자 혹은 민중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북한사회주의의 형태적인 정통성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의 이견이 있더라도 그 정치적 정향에 있어서,그리고 민족주의적 논리를 그 귀결까지 추구하는 데 있어서,북한 정권을 한국민중사의 정당한 일부로 수용하는 데 있어,근본적인 제약이 없음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반미적 미국관의 철저성에 커다란 차이를 내포한다. 즉 시민민주적 반미 관과는 달리 민중주의적 시각은 미국이 동북아를 범미적 세계질서 속에 편입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남한에 군사적으로 깊이 현존해 있는 것을 스스로 정당화 해온 이념적 기반을 철저하게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의 체험을 통해 양산된 이 두 가지 반미적 세계관은 그처럼 서로 다른  원의 것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지배하는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시민민주적  반미관이 강력하게 존재하는 것은 민중주의적 반미관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친미적 미국관의 헤게모니를 공격하는 것이고 그러한 시민민주적 시각의 강세와 친미적 시각의 헤게모니 약화는 민중주의적 미국관의 성장과 유지에 유리한 이념적 공간 혹은 문화적 공간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군부를 중심으로 한 파쇼독재세력과 '시민'의 대립에서 미국은 항상 독재를 지원했으며 그 독재의 물적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꾸준히 강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해 왔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존재로 오히려 득보다 실이 많다고 보는 시민민주적 반미관이 계속 그 증거를 보충받음으로써 이 시각이 비교적 광범한 시민층에 이념적 정당성을 획득할 때,일정한 피지배층과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 안에서만 깊이 뿌리 내릴 수 있는 민중주의적 반미관의 반민가 보다 폭넓은 도덕적 정당성과 논리적 설득력을 확보할 저변의 토양이 유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6 · 29현상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6 · 29선언이라는 독재의 온건화, 혹은 집권층 내부에서의 온건파가 우세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군부내의 강경파의 득세를 억제하는 데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다는 일반적 인식은 민중주의적 반미시각을 논리적으로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에 있어서의 미국의 존재와 한국의 민주주의를 양립하기 힘든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민민주적 반미관의 설득력을 상당 정도 침식함으로써 민중주의적 반미관이 파고 들어갈 주변토양을 상당히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3세계정책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없이 비교적 막연한 제국주의론에 근거해서 민중주의적 반미시각을 갖던 사람들이나 혹은  광주의 충격으로 상당히 감성적인 수준에서 민중주의적 반미시각에 경도되었던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미국이 구사하는 유연한 정책에 의해 지적인 혼란에 빠지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조직화된 민중정치의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취약한 한국사회의 경우 민중주의적 시각은 끊임없이 지적인 도전에 직면한다(1988 봄 총선에서 이념적 정당들이 대중정치의 차원에서 전멸한 것은 한국정치의 그같은 척박한 환경을 그대로 웅변해 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4. 설득력 잃고 있는 시민민주주의적 반미관

미국이 자주적으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제3세계의 민중세력을 직간접의 정치군사적 개입을 통해 억압하려 시도해왔다는 사실은 매우 명확하다. 미국 대외정책의 현대사는 그것을 입증하는 숱한 증거들의 박물관이다. 이것은 민중주의적 반미관을 입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용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제3세계에서 민간정권을 무너뜨리고 우익독재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직간접으로 개입되었던 많은 사례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들은 민중주의적 반미관과 시민민주적 반미관을 공히 강화시키는 예들이다. 민중주의적 시각에서 제시하는 미국의 신식민주의정책을 예증하는 동시에 '시민'을 억압하는 독재자의 편에 선 미국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시민민주적 반미관을 뒷받침해주는 역사적 경험들이라고 할 것이다.
문제는 87년 6 · 29와 같은 현상, 즉 미국이 친미독재정권의 온건화를 시도하거나 혹은 그러한 내적인 변화를 수용한 예들을 막연하게 전략전술의 변화라든지 혹은 일부 예의적인 경우들로 간주하지 않고 그러한 변용들을 제3세계 친미독재정권들에 대한 미국의 정책의 전체적인 양식 속에 소화시켜 설명하는 일이다. 친미독재의 온건화가 진행되었던 역사적인 경우들에서 그 변화의 동력이 과연 미국에서 온 것인가를 살펴야 하며 또 미국이 그것을 수용한 이유들이 미국의 신식민지적 질서유지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기여하게 했던 특수한 상황들을 밝혀내야 하고 또 그러한 온건정책으로의 변화가 해당 제3세계국가에서의 미국의 위치를 위협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듯할 때는 미국은 어김없이 지배층의 파쇼반동화를 조종하거나 촉진시켰음을 보이는 역사적 경험들을 제시해야 한다.
  이로서 미국의 대외정책이 근본적으로 계급적 갈등이 첨예하게 존재함으로써 좌익으로부터의 정치적 도전이 범미적 친미질서의 유지에 끊임없는 위협요인으로 되고 있는 대다수 제3세계 나라들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와 정책이 좌익을 포용하는 서구적 의미의 민주주의의 확립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 제3세계정책의 핵심은 자주적이고 좌익적인 세력을 정치권에서 어떤 형태로든 배제한다는 데 있으며 이러한 정책은 대개의 경우 제3세계 국가들에서 기본적인 시민민주주의원리를 부정함으로써 관철되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또 많은 경우에 있어 미국은 제3세계국가를 미국의 세계적 차원의 범미질서 유지를 위한 군사전략의 기지로 이용함으로써 그러한 기지적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해당 제3세계국가의 병영화를 구조적으로 촉진했고 그것을 가능한 한 유지하려는 세력이기 때문에, 제3세계국가에서 군부중심의 파쇼독재와 시민이  대립하는 경우에 미국의 존재는 양자간의 역관계를 파쇼에게 구조적으로 유리하게끔 기능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은 미국이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에게 대변하는 것은 미국의 현란한 민주주의의 외피가 아니라 미국의 자기중심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파쇼형 봉건세력이나 파쇼형 자본주의세력과 연대하기 때문에 미국의 존재는 시민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부정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보다 명확히 보여줌으로써 미국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미국의 태도 변용에 의해 퇴색되거나 지적인 설득력을 상실하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시민민주적 반미관의 논리적 타당성을 외견상 위협하는 상당수의 사례들이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국가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의 현대사에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1960년 이승만정권의 붕괴시 미국의 태도, 1961년 박정희군사정권이 등장한 이후 박정권의 온건화를 미국이 강요했다는 설을 둘러싼 논란,그리고 1970년대 후반 카터의 소위 인권외교가 한국인에게 미친 미국에 대한 이미지,그리고 보다 최근엔 지난 87년 6· 29와 관련한 미국의 역할등이 미군정시대 미국의 정책이 가졌던 반민주적 성격, 이승만독재의 수립과 그에 대한 10여 년에 걸친 지원,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20년간의 지원, 광주를 포함한 전두환정권의 등장과정에서의 미국의 한국군부와의 공생,그리고 레이건정권의 전두환정권에 대한 증폭된 지원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친독재정책의 이미지를 희석화시키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또 세계적인 차원에서 예를 들면, 1961년 도미니카공화국의 친미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의 제거, 1963년 남베트남의 친미독재자고 딘 디엠의 암살, 1980년대 중반 남미의 아르헨티나·브라질·우루과이 등에서의 독재정치의 온건화 혹은 민간정권에의 변화, 그리고 1986년초 필리핀 마르코스정권의 붕괴와 아키노 민간정권의 등장, 또 88년말에 파키스탄에서 진행된 민간정부의 등장이 광주의 충격을 통해서 적어도 시민민주적 반미관을 포용했던 한국의 상당수 중산시민 혹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지적인 혼란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앞에서 나는 광주를 둘러싼 시각의 대립은 단순히 광주에서 미국이 어떻게 군부에 협조했느냐를 사실적으로 밝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 대한 총체적인 이미지들의 싸움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곧 이 시점에서 광주를 규명하는 작업을 앞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시민민주적 반미관의 논리적 일관성을 저해하는 듯한 현실적인 역사적 현상들을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을 포함한 신식민지적 제3세계 경영이라는 총체적인 미국관의 맥락에서 해명해야 함을 의미한다.
  최근 전임 주한미국대사 릴리가 한국을 떠나면서 미국이 대한정책에 있어 실수를 한 적이 있음을 시인했다고 보도되었다. 물론 그는 미국의 전반적인 대한 정책은 한국에서 긍정적인 목적에 봉사해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걸 잊지 않았다(「동아일보」, 1989년 1월 5일자). 즉 그는 1980년 광주에서의 미국의 태도가 실수한 측면이 있음을 일부 시인하면서 그러나 1987년 이후 한국의 자유화에 미국이 긍정적으로 역할해왔으며 따라서 미국은 미국의 과거의 일부 실수를 시정하고 이미 올바른 궤도에 올라 있음을 은근히 강조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크게 보면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동정형적 친미관과 일맥상통하는 발언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릴 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은 1980년 광주에서 단지 일시적으로 실수한 것일까? 여기에서 나의 논의는 미국은 그 당시 실수한 것이 아니라 전형적으로 행동한 것이라는 것을 보이고 1987년 6 · 29를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인가를 밝히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광주와 미국의 문제를 세 가지 수준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첫째,미국이 광주에서 군부와 긴밀히 협조한 사실의 의미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관리들이 제기한 몇 가지 대표적인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당시 미국의 조치는 주한미국관리들뿐 아니라 워싱턴 고위관리들의 인식을 또한 반영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는 증거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둘째 , 광주와 6 · 29를 제3세계의 친미독재자들에 대한 미국의 일반적인 정책의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켜 파악하려고 한다. 세째, 광주의 경험은 그 자체로서 뿐만이 아니라 해방후 미군정기 미국의 역할에 대한 급진적 재해석을 촉구함으로써 민중주의적 반미관을 지적으로 한국현대사에 보다 확고히 기초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광주가 민중주의적 시각의 형성에 끼친 영향력을 충분히 논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이 재촉한 해방직후사에 대한 재인식이 어떻게 민중주의적 반미관을 풍부히 하고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2.광주민중봉기와 미국의 책임론

  1. 광주에서 미국의 역할을 논의한다는 것

문부식씨는 그가 1982년 부산미문화원에 방화한 주요동기는 1980년 한국군부의 광주학살을 미국이 '묵인'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교사'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그는 법정에서 "미국은 전두환을 묵인했으며 그의 행위를 지원했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우리 시민에 대한 폭력적 공격을 교사했다.
결국 미국은 독재정치권력의 후원자였다"고 주장했다(「해외한민보」 , 1982년 9월 15일).
  미국이 광주학살을 부추겼다는 이와 같은 주장은 1985년 수십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 미 문화원을 점거하고 제기한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광주학살에 공모한 데 대하여 미국관리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문부식씨나 1985년의 대학생들이 제기한 반미적 주제는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공모 자체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후자는 한반도 핵문제에 대한 공개질의를 미국행정부제 제시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한국반정부운동사에서 거의 최초로 광범한 대중에 전달된 반핵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또 문부식씨는 그의 같은 법정진술에서 그의 행동은 광주라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미국의 행태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고 해방후 남한의 주요한 모든 정치적 범죄의 배후에는 미국이 그 독재세력의 대형으로서 존재해온 사실을 주목하고 이러한 일관된 범죄행위에 대하여 미국을 '응징'한다는 차원에서 방화와 같은 수단에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었다.
  보다 최근에는 10·26 이후 전두환일파가 득세하여 광주학살을 주도하기까지 미국이 배후에서 이들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조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이론이 반독재운동권 일각에서 제기되어왔다(특히 「말」지 1988년 호들을 참고) . 즉 광주학살에 관련한 미국의 역할에 대한 규탄은 한국의 정치 ·군사·경제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반민주·반민족·반민중적인 성격에 대한 보다 광범한 인식을 수반하면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학살과 직접 관련되는 미국의 행동은 그러한 원환에서 가장 상징적인 고리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광주 이후 한국에서 질적 양적으로 성장한 반미주의의 역사관에서 볼 때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관련부분은 해방후 한국민중과 미국 사이에 존재하게 된 그 첨예한 모순들의 극명한 폭발점이었으며 애당초 썩어 문드러진 한미관계의 본질이 그것을 은폐하고 있던 외피를 벗어던지고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따라서 광주학살과 직접 관련된 몇 가지 이슈들을 둘러싼 한국내 반미적 관점에서의 주장과 이를 일축하는 미국관리들의 주장을 검토하는 것은 반미관의 총체적인 위상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증요한 문제에 속한다.
  미국관리들은 충분히 예상되는 바와 같이 미국이 군부의 광주학살을 교사했다는 주장은 물론이고 그에 협조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라고 일축해왔다. 미국관리들은 미국측이 '폭동진압'을 위해 한국군부가 요청한 20사단의 이동요구를 승인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뉴윽 타임즈」나 「워싱턴 포스트」등 미국주요 일간지의 1980년 5월 23일자 신문에 미국방성 명의의 발표문으로 명백히 보도된 사실이며 광주사태.당시 주한미대사였던 월리엄 글라이스틴의 누차에 걸친 발언에서도 자주 확인된 바였다. 그런데 미국은 군부의 광주 학살에 전혀 책임이 없다는 미국측의 주장은 대체로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첫째는 노태우정권·출범 이후 미국측과 한국정부가 공히 밝히고 있는 이론으로서 미국이 한국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작전통제권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며 심지어는 형식적인 고무도장에 불과하다는 식의 논지이다. 두번째는 글라이스틴 전대사가 주로 대변한 논지이다. 그는 1987년초에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열린 한 기자회견에서 다음의 사항들을 진술했다. "①한미연합사를 맡고 있는 장군(존 위컴)은 한국의 공수부대가 초기에 행한 잔혹한 조치를 '사전에'모르고 있었으며 공수부대는 결코 연합사의 관할내에 있지 않았었다. ②그는 이 사태의 처음부터 끝까지 '배후에서'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었다. ③그가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한 것은 '공수부대'의 잔혹한 조치가 이미 일어난 다음이었다"(Douglas G. Bond, 1988).글라이스틴은 다른 좌석에서 다음의 주장을 수차례 개진 했다. ①광주학살로 인해 미국이 입은 이미지 손상은 당시 미국이 취한 행동들에 관한 한국인들의 오해와 부정확한 정보 때문이었다. ②광주비극의 원인은 한국공수부대의 성급하고 폭력적인 전술에서 비롯되었다. ③한국군부가 20사단을 서울에서 광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미국에 승인을 요청한 것은 광주시에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전남사회문제연구소, 1986).
  글라이스틴이 제시한 또 하나의 중요한 주장은 미국이 20사단의 파견을 승인한 이유는 이 부대는 공수부대와 달리 계엄군으로서 불필요한 사상자를 낳지 않도록 잘 훈련된 부대여서 당시 20사단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때문이라고 변호한 점이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위컴이 글라이스틴 자신과 협의를 거쳐서 20사단 파견을 승인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러한 군부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어서였다기보다는 군과 무장군중 사이에 협상이 실패할 경우 광주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회복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으며 또 공수부대가 재투입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전남사회문제연구소, 1986). 즉 글라이스틴은 미국이 군대의 광주투입에 동의하고 승인한 사실을 인정하되, 첫째로 미국은 광주에서 소위 과잉진압 등의 잔혹상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이 없다는 것,둘째로 미국은 광주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었다는 것, 세째로 미국의 20사단 파견승인은 광주지역에서의 질서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공수부대의 재투입으로 인한 초기 과잉진압의 재판을 막기 위해서 취한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선의에서 나온 조치였다는 것을 역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선 작전지휘권의 문제와 글라이스틴의 주장을 중심으로 보면서 주로 이 두 가지 형태의 미국측 반론이 내포한 문제점과 모순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1) 미국의 한국군부에 대한 작전통제권 문제

  광주비극에서 한국군부와의 공모자였다는 한국의 반독재학생들이 제기한 주장은 남한군대에 대해서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미국측이 광주시위를 무력으로 해결하기 위한 한국군부의 부대이동요청을 승인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는 논리와 연결되어 있다. 지난해부터 미국이 주장하듯이 미국측의 '승인'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미국이 무력부대의 이등요청에 도장을 찍은 것은 미국관리들이 어떤 결과를 예측하고 한 행위이든 그들이 한국군부의 무력해결방식에 적어도 상징적인 차원에서 협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러한 승인절차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미국이 상당한 실질적 권위를 가지고 행사하는 통제권을 의미한다면 미국이 한국군부의 유혈탄압에 협조한 책임의 강도는 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승인절차가 형식적인 권위인가 아니면 실질적인 권위인가 하는 질문은 자칫 문제의 핵심을 그르치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 미국이 어떻든 '승인'한 마당에서 그러한 승인은 그것이 실질적인 것이든 형식적인 것이든 미국측이 한국군부의 요청에 적어도 아무런 조건 없이 부응했다는 것은 한국민의 민주화요구를 계엄령의 확대를 통해 유린하면서 급기야는 광주에서 대규모로 발전한 시민들의 민주화요구행진을 무력으로. 억압하기 위한 조치에 한국의 정치군부와 미국이 발을 맞추어 나간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며 이것은 어떤 논리로도 호도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더구나 한국군부를 만들고 키워온 미국의 오랜 역사적 역할을 그러한 승인권의 형식적 여부에 관한 논란 속에 묻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터이다.
  이처럼 미국측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여부를 미국의 작전통제권이 갖는 형식성여부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는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고 왜곡 시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따라서 광주사태 당시 미국의 작전통제권 행사에 관한 문제는 그 작전통제권의 실질적 권위 여부의 차원보다는 미국이 그러한 법적 권위를 행사한 태도 흑은 양식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작전통제권의 실질성에 관한 미국측의 최근 주장을 미국측이 그 권위에 근거해서 80년 5월 한국군부의 요청을 승인한 '태도'의 맥락에서 우리가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논의의 핵심을 그르치지 않으면서 미국측 승인권한이 실질적인 것인가의 문제를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88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는 육정수기자의 명의로 미국측의 작전권 문제를  다루었다. 이 기사는 기본적으로 미측의 작전권을 형식적인 차원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기사는 이러한 견해가 '전문가들' 흑은 '학계'의 일치된 견해라는 해석을 제시했으나 기본적으로 국방부의 견해를 대변한 것으로 보이며 , 이점은 이 기사에 표현된 것과 같은 견해가 보다 간략한 형태로지만 1988년 12월20일자 「조선일보」에 '국방부'의 공식견해로서 김영철기자에 의해 보도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주한미대사관 관리들은 지난해부터 이들 신문에 보도된 해석이 한국에서 미국이 가진 작전권의 실상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라고 동조하고 또 이 사실을 애써 강조해왔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가 제시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의 미국에의 이양은 6·25전쟁 직후인 1950년 7·15일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스스로 맥아더에게 작전권 이양을 제의했으며 맥아더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졌다라는 것이다. ②이때 이양된 것은 작전 '통제권'(operational control)일 뿐이며 작전 '지휘권'(operational command)은 주권국인 한국에 변함없이 그리고 영원히 귀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③박정희정권 때 미국측의 작전권은 외부의 위협(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위하는 경우에만 행사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④1978년 11월 한미연합사가 창설되어 작전권은 유엔사에서 연합사로 넘어왔는데 이것은 유엔사체제에서 미국이 단독으로 행사하던 작전권이 한미간에 공동으로 행사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한미연합사의 사령관을 미국측이 맡고 있더라도 이 사령관은 '한미공동군사위원회'라는 조직으로부터 전략지침을 시달받기 때문에 작전권은 한미공동으로 행사되는 결과가 된다는 주장이다. ⑤연합사령관이 통제하는 한국군부대도 매우 한정된 범위의 것이라는 것이다. 즉,그것은 전방의 전투부대에 국한된 것으로서 수도방위사령부, 특전사령부를 비롯한 후방의 주요부대들은 연합사의 통제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⑥ 연합사령부의 작전통제하에 있는 부대도 사전 '승인'(approval) 없이 '통보'(notification)만으로 한국군부가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첫번째 주장은 작전권이양이 이승만의 발의로·된 것처럼 시사함으로써 이 작전권이양이 미국측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존 카치의 분석(John Kotch, 1983)과 배치된다. 카치의 분석이나 혹은  동북아 지역통합에서 미국은 남한이 거대한 예비군대의 분업을 담당케 했다는 허버트 빅스(Herbert Bix 1973)의 견해를 고려하면 미국은 한국군대의 과대성장을 촉진시켜 왔을 뿐 아니라 미국의 동북아 군사상황의 통제를 위해서 한국의 거대군부에 대한 통제권에도 구조적으로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을 위의 신문기사에 보도된 내용은 간과하거나 오도하고 있다.
  두번째로 위의 신문기사가 통제권은 지휘권과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매우 모호한 얘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 목정수기자의 보도와는 달리 학계의 많은 전문가들은 연합사에 소속된 한국군부대의 이동에 관한 미국의 작전권은 실질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예로 유세희교수는 한미연합사령관이 거의 모든 전략지침을 실행하며 아무리 적은 이동이라도 한반도에서 군부대의 이동은 일부 특수부대들을 제외하고는 그의 승인이 없이는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유세희, 1986). 하영선교수의 한 논문도 1950년에 이양된 작전권은 목기자의 보도와는 달리 통제권이 아닌 지휘권으로 기술하고 있다(하영선, 1984).
이는 곧 그 기사에서처럼 통제권과 지휘권을 나누어 지휘권은 한국군부가 갖고 미국은 통제권만 갖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가운데 오히려 개념적 혼란만 가중시키는 데 불과한 것으로 느끼게 한다.
  세째, 육기자의 보도는 박정희정권 때 미국의 작전권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방위할 목적에만 행사되는 것이라고 하나 이는 작전권 해석에 또 하나의 애매함만 가져다 줄 뿐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광주사태시 미국이나 한국군부가 광주에서의 민중항쟁을 북의 남침위협 가능성과 긴밀히 연결시켰던 사실에 비추어볼 때 어떤 부대이동이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는 조치인가는 좀 복잡한 문제가 된다. 이 문제는 당시 한국군부와 미국측의 이해가 어떤 부대이동을 놓고 서로 대립할 경우에는 문제가 될 것이나 상호간에 기본적으로 동일한 위기의식에서 동일한 대응방식을 추구하는 상황에서는 이 조항은 미국의 작전권행사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80년 5월에 20사단의 부대이동을 한국군부가 그 조항에 상관없이 위컴에게 승인요청을 하고 위컴은 그에 흔쾌히 응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네째, 연합사 휘하의 한국군부대도 사전승인이 필요없이 통보만으로 이동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이 주장은 광주사태 당시 한국군부는 20사단의 이동을 미국측에 단지 통보만 했다는 해석을 유도한다. 그 결과 무력군대의 이동을 위해 미국측은 한국측과 긴밀히 협의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한미간의 군사문제는 그간 베일에 가려져 정부는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필요한 부문만 통제하에 개방하는 상태에 있으므로 미국 작전권의 실제행사에 대해 확실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증거에 기초해서 미국의 작전권이 단지 통보의 문제라는 주장은 당시 미국의 관여 정도에 관해 지극히 오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
  우선 1980년 5월 23일 「뉴욕 타임즈」에 보도된 다음의 미국국방성 발표내용은 적어도 미국측은 자신들의 작전권이 실질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명백한 인상을 준다. "한국정부는 시위진압과 안보작전을 위해 몇몇 지상군부대를 한미연합사통제로부터 해제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연합사령관 존 위컴장군은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국방성이 밝혔다"(The Pentagon disclosed that South Korea had requested the release of several ground forces from the combined United States - South Korean command for use in crowed control and security work and the request was granted by Gen. John A.Wickham Jr., head of the joint command) .
  둘째로 글라이스틴 전대사가 미국이 한국군부의 부대이동요청을 왜 그리고 어떻게 승인했는가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그와 위컴이 그들이 가진 승인권이 실질적 권위를 내포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승인에 앞서 서로 긴밀히 협의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1987년 1월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열린 한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20사단의 광주투입을 '승인'(authorize)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그는 이 결정이 "광주시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글라이스틴과 위컴이 의식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군대이동에 대한 승인문제를 고찰했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실들은, 이들이 그들 자신이 한국군부로부터의 요청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실질적인 법적 권한을 갖고 있다는 명백한 인식 위에서 행동했으며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군부의 요구를 승인했다고 믿게 한다.
  그럼 이처럼 광주 당시 적어도 20사단에 대한 미국의 작전권이 실질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정권 출범 이래 미국과 노태우정부가 공히 말을 맞추며 미국의 작전권이 실질적인 권한이 아닌 것임을 애써 내세우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우선 미국측의 의도는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전두환정권이 노태우정권으로 교체된 마당에 미국은 더이상 광주학살을 통해 등장했던 전정권과 도덕적인 정당성에 관해 운명을 같이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며 가능한 한 전정권의 도덕적 치부와 스스로를 분리시키려 애쓰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있어 미국의 작전권이 법해석상 내포하고 있던 실질적 측면의 의미를 최소화시키는 작업은 미국으로서는 시의적절한 시도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의 작전권 이양문제가 한미간의 주요문제로 등장하면서 미국은 작전권 이양이 장기적으로는 필연적인 추세로 간주하는 듯하면서도 이를 선뜻 찬성하지 않고 있다. 작전권이 단순한 요식절차상의 문제요 단순한 '통보'의 문제라면 미국이 이의 이양문제를 이처럼 심각하게 고민할 이유는 없다. 결국 미국은 어떤 용도를 위해서건 자신이 깊은 관심을 갖고 육성해온 한국의 거대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하고 싶은 욕망과 광주학살에서의 미국의 책임을 최소화한다는 두 가지 언뜻 상반되는 목적을, 기존의 미국의 작전권은 형식적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동시에 해결하려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정부의 입장은 어떠한가? 한국의 노태우정권이 미국의 작전권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외에 강조함으로써 노릴 수 있는 이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①우선 미국이 전두환정권의 치부로부터 멀어지고 싶어하는 욕구에 부응함으로써 현정권은 적어도 미국에 '협조'한다는 이득이 있다.즉 미국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②작전권의 문제는 북한이나 주변 공산권 강대국으로부터 이념적인 공격의 대상이다. 작전권을 완전히 이양받지 않으면서 이러한 불리한 상황을 호도하는 길은 기존의 작전권이 갖는 형식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일부 가능해질 수 있다. 특히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려하는 마당에 이 작업은 매우 필요할 것이다. ③한국의 새 정권은 전두환정권과는 좀 달리 한국정부가 대외종속적이라는 국민의 민족주의적 감정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을 해야 하는데 작전권의 문제를 최소화하는 시도는 이런 각도에서도 노정권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노정권도 역시 미국이 가진 작전권의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위에서 지적한 이득을 얻고자 의도하는 데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88년 12월 「조선일보」의 관련기사는 한국정부가 지금 미국으로부터 작전권을 이양받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한국 국방부의 견해로는 미국의 작전권 포기는 곧 한국으로부터 미군의 철수를 의미하며 이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함으로써 한국군부가 받아오던 많은 국방상 '혜택'을 한국이 상실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정부와· 한국의 노태우정부는 현존의 미국 작전권을 그대로 두면서 각기 변화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요청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이 소유한 작전권이 갖는 실질적 내용을 적어도 한국국민에 대한 홍보차원에서 애써 극소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윌리엄  글리이스틴의 주장에 대하여

  글라이스틴은 1985년 6훨 워싱턴에서 가진 한 인터뷰에서 민국은 광주사태 당시 폭력을 개탄하고 또 동시에 카톨릭교회와 군부와의 접촉을 통해서 군부와 광주시민이 서로 협상하도록 진지하게 노력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그러한 미국의 협상노력이 실패하게 된 것은 광주시민들 안에 무기를 버리길 거부한 일파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면서 소위 이들 과격파에게 유혈사태의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전남사회문제연구소, 1986).
  미국측이 글라이스틴의 말대로 광주시민과 군부 양측에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한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폭동진압' 혹은 '질서회복'을 위해 군대이동을 승인한 미국이 폭력을 자제하고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할 때 그것을 한국 군부에 대한 진지한 압력이라고 해석할 사람은 없다. 그러한 권고의 대상은 광주시민들인 것이며 이들에게 조속히 무기를 버리고 군부의 질서회복 노력에 솔선 협력할 것을 촉구한 것과 실제로 다를 바가 없다. 5월 23일에 열린 백악관의 한 특별회의에서 국무장관 에드먼드 머스키 , 안보담당보좌관 즈비그뉴 브르제진스키 , 국방장관 해롤드 브라운 및 다른 고위관리들은 한 결의문을 작성했다.
  이 결의문은 "계속되는 소요사태와 폭력의 고조는 외부세력의 위험한 오판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뉴욕 타임즈」, 5월 23일). 여기에서 말한 '외부세력'이란 물론 북한을 가리킨 것이지만 당시 「뉴욕 타임즈」 5월 23일자는 북한이 아무런 위협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미국관리들 자신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결국23일의 백악관회의의 결정이 갖는 효과는 안보지향적인 경고를 발함으로써 군부의 입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광주가 진압된 직후인 5월 28일에 열린 한 고위참모회의는 한국군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 토의한 것으로 보도되었다(「뉴욕 타임즈」, 5월 29일). 여기에서 당시  동아시아 및 태평양 담당·국무차관보인 리처드 홀브루크는 한국군부가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취한 여러 가지 움직임들에 대해 보고했다. 그후 홀브루크는.상황이 보다 명확해질 때까지 (한국) 군부장성들을 성급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지 말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또 "한국군부가 민간정치인들과 대화를 열지 않고 보다 광범한 지지를 받는 정부형태로 복귀하려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홀브루크는 지적했다. 그래서 이 회의에서 합의된 결론은 남한군부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기다려보자'(wait and see) 는 것이었다고 보도되었다.
  글라이스틴은 미국측이 협상에 의한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이 자신들과 군부 사이에 협상중재를 해달라고 제안한 것을 미국측이 진지하게 받아들인 흔적은 없다. 5월 26일자 「뉴욕 타임즈」지는 "광주봉기의 학생지도자들은 오늘 (24일 이나 25일 경을 말함) 월리암 글라이스틴 대사로 하여금 '휴전'을 주선하여 유혈사태를 중단할 수 있게 할 것을 미국에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글라이스틴은 미국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없다는 근거에서 그 제안을 거부했다고 알려졌다.
  최근 국회의 광주특위청문회에서 광주사태 당시 육참총장이었던 이희성의 증언은 80년 5월 24, 25일경 광주에서의 최종적인 '질서회복'을 위한 군사작전에 미국측은 로버트 세네월드 장군을 매개로 긴밀히 협의하고 있었음을 밝혀주었다. 민정당의 정창화의원은 "5월 23, 24 양일은 시민들이 갖고 있던 무기를 반납하는 등 사태가 평정되는 듯한 기미를 보였는데 이때 진압 작전을 펴지 않고 5월 27일로 늦춘 이유는 무엇이며 이때 미국과의 협의내용은 무엇이었는가"고 질문하자 이희성 증인은"광주진압작전이 장시간 해결되지 않거나 실패할 경우 사태가 확대될 수 있다는 예비적 판단 아래 김일성의 오판이라도 있을까 해서 그 대비책을 세웠다. 따라서 김일성의 오판을 막기 위해 미국의 해 ·공군이 오키나와와 필리핀 등에서 한반도 주변에 전개할 시간이 필요했고,따라서 이 문제를 미국과 협의한 것이다"고 답변했다(「조선일보」, 88년 12월 20일).
  결국 광주시민들이 요구하는 '휴전'의 형식과 그것이 내포하는 '반란군과의 타협'혹은 조건들을 한국의 군부와 미국측은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고 이들의 공동 관심사는 기본적으로 광주와 같은 반독재항쟁의 장기화로 인한 이 사태의 다른 지역에의 확산 등을 방지하는 데 있었던 것이며, 미국은 한국군부와 긴밀한 협의를 거켜 광주에서의 최종적인 무력진압을 위한 환경조성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지 5월 27일자보도는 당시 미국 고위관리들의 기본관심이 무엇이었으며 그들이 광주와 같은 민중항쟁으로부터 어떤 형태의 심각한 위기의식을 같이 느끼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밝혀준다
"'(한국의) 상황은 거의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다'고 정보에 정통한 한 미국 관리가 말했다. 그는 1975년 사이공이 패망한 이후 아시아의 미국 맹방이 처한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성명을 발표한 것 이외에 미국이 취한 주요 조치는 두 개의 공중지휘용 공군기와 항공모함 코랄시호를 선봉으로 한 해군부대를 북한에 대한 경고용으로 한반도 해역에 배치한 일이었다. 서울의 미군사령관인 존 위컴 장군은 한미연합사에 배속되어 있는 한국군 네 개 연대를 '폭동진압'(riot control) 용으로 허용해달라는 한국군부의 요청을 '승인'(approve)했다. 이 조치는 반란진압을 꾀하는 한국군부를 미국이 편드는 입장에 서게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이 조치가 남한의 외적 안보를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한국군부의 요청을 거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워싱턴 당국은 3만9천 명의 미군 등 미국이 한국에 갖고 있는 막대한 경제적 정치적 전략적 이해관계 때문에 안보와 공공질서를 미국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기로 지난주에 결정한 것이다. "
  이 기사가 특별히 인용할 가치가 있는 이유는 광주라는 저항의 도시에서 "질서를 회복"하려는 한국군부의 노력에 대해 미국이 결코 마지 못해 협조한 것이 아니라 첫째로 광주가 한국군부에 제기한 심대한 위기의식을 미국이 공유하고 있었으며,둘째로 광주와 같은 사태로 인해 미국이 한국에서 위협받고 있는 막대한 "경제적 정치적 전략적 이익'에 대해 미국관리들이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능동적으로 협조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는 때문이다. 글라이스틴 자신도 그와 위컴이 한국군부에 협조한 것은 그로부터의 요청을 거부할 마땅한 핑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광주지역에서 '질서'를 회복할 필요성을 똑같이 인식하고 있었던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미 지적한 바이다.
미국관리들이 이 지역에서의 '질서' 회복에 그처럼 신경을 쓴 이유에는 광주지역의 미군기지에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핵무기의 안전에 대한 우려도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Korea Support Committee).
  다음으로는 미국이 20사단의 광주투입을 승인한 것은 미군의 통제 밖에 있는 공수부대에 의한 과인진압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글라이스틴의 주장을 검토해보자. 말하자면 광주시민을 보다 부드럽게 다루기 위해서 혹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20사단의 무력부대 파견을 승인했다는 식의 글라이스틴의 이론은 언뜻 베트남에서 베트남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유린하고 다니던 미군장교들이 내뱉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파괴한다"던 주장이 풍기는 냉소와 간교함을 연상케 하지만 우선은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첫째, 광주에서의 무력진압에 협조하면서 이 지역의 질서회복에 최우선순위를 둔 미국의 태도 전반의 맥락에서 바라볼 때 글라이스틴의 주장은 '사후의 합리화'논리라는 인상이 짙다. 둘째,더 큰 문제는 글라이스틴의 이 사후 합리화 논리는 앞뒤가 안 맞다는 사실이다. 당시 작전상황의 윤곽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20사단의 파견을 미국이 승인한 것이 공수부대의 재투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글라이스틴의 주장은 눈감고 아웅하는 거짓이요 말장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미국이 먼저 나서서 공수부대를 빼고 20사단을 파견하자고 제의한 것이 아니다. 20사단 파견을 제안한 것은 한국군부이며 미국은 그 요청을 승인한 것이다. 또 한국군부가 그의 파견을 요청한 이유는 첫째, 당시 오랜 기간 광주에서의 무력진압과 시민과의 대치로 필시 크게 지켜 있었던 공수부대를 일시 후퇴시키고 새로운 전투부대를 지원파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공수부대는 5월 18일부터 5월 21일 오후까지 광주에 투입되어 있었다.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