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학살은 「한미 합동군사작전」 이었다 /암호 통신문으로 드러난 미국 개입의 증거
본문
광주학살은 「한미 합동군사작전」 이었다
/암호 통신문으로 드러난 미국 개입의 증거
(국민신문)
'광주학살'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 80년 5월 당시 방위병이었던 한 시민이 미국의 '학살작전' 개입의 증거를 제시했다. 광주항쟁 첫날이었던 5월 18일 15시, '데프건3'으로 전통 암호를 내렸다가 1시간만에 '진도개3'으로 암호를 변경한 이유는 무엇인가,상황 발생시 초기 경계강화 지시때 내리는 '데프건3'은 한미연합사령부의 명령이라는데……
김영철(순천시 저전동 46번지)
민주쟁취국민운동전남본부 관계자 여러분들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고 계시는 분들께 신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하면서 몇 글자 적어 보냅니다.
저는 순천시 저전동 46번지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만 30세의 남자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름아닌 1980년 5월 18일 「광주의거」에서 미국인들이 광주학살을 묵인 내지는 방조한 행위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여 아래의 사실을 고발합니다.
당시 저는 방위병 근무자로서 순천시 행금동 95연대 예비군중대본부 무기관리 파견 근무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1980년 5월 18일 15시경 저는 한통의 전화통신을(전통)을 순천시 기동대로부터 받았습니다. 전통의 내용은 「태권3」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릴레이 전화 연락망이라 「데프건3」이 「태권」으로 오보됨). 그때 우리 근무자들은 태권3 이라는 암호문을 전혀 몰랐습니다. 출타중이었던 예비군 중대장(문대식:당시 예비역 중위)이 들어오시자 보고를 했는데 중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1시간 후 다시 전통이 왔는데 「데프건3」를 「진도개3」으로 수정 발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진도개3」은 아시는 바와 같이 예비군 비상전투 대기령의 암호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프건3」입니다. 어째서 「데프건3」이 발동되다 「진도개3」으로 교체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데프건3」은 한·미연합사령부 암호로써 대한민국국군은 사용하지 않는 암호였던 것입니다. 암호가 갑자기 교체되었던 이유는 주한미군(미국인)이 후일을 생각해서 바꾼 것 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태프건3」은 분명하게 주한미군에서 흘러나온 암호였습니다.
이런 사실이 있는데도 미국이 광주학살에 관계되지 않았다고 발뺌할 수 있을까요? 분명 미국은 광주의거에 깊숙히 관여하였기에 이러한 암호문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므로 미국은 발뺌할래야 할 수도 없고 용서받을래야 용서받을 수도 없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나온 세월이 이땅의 민주화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민주라는 것의 소중함을 알았고 어떻게 해야 민주화가 되는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일개 방위병이 「데프건」이라는 암호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당시의 전통, 그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염원하시는 여러분, 이제는 권력에 굴복하지 말고 힘차게 투쟁하면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 우리 광주의 억울한 희생자들은 지하에서나마 우리에게 힘찬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암호 통신문으로 드러난 미국 개입의 증거
(국민신문)
'광주학살'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 80년 5월 당시 방위병이었던 한 시민이 미국의 '학살작전' 개입의 증거를 제시했다. 광주항쟁 첫날이었던 5월 18일 15시, '데프건3'으로 전통 암호를 내렸다가 1시간만에 '진도개3'으로 암호를 변경한 이유는 무엇인가,상황 발생시 초기 경계강화 지시때 내리는 '데프건3'은 한미연합사령부의 명령이라는데……
김영철(순천시 저전동 46번지)
민주쟁취국민운동전남본부 관계자 여러분들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고 계시는 분들께 신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하면서 몇 글자 적어 보냅니다.
저는 순천시 저전동 46번지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만 30세의 남자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름아닌 1980년 5월 18일 「광주의거」에서 미국인들이 광주학살을 묵인 내지는 방조한 행위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여 아래의 사실을 고발합니다.
당시 저는 방위병 근무자로서 순천시 행금동 95연대 예비군중대본부 무기관리 파견 근무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1980년 5월 18일 15시경 저는 한통의 전화통신을(전통)을 순천시 기동대로부터 받았습니다. 전통의 내용은 「태권3」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릴레이 전화 연락망이라 「데프건3」이 「태권」으로 오보됨). 그때 우리 근무자들은 태권3 이라는 암호문을 전혀 몰랐습니다. 출타중이었던 예비군 중대장(문대식:당시 예비역 중위)이 들어오시자 보고를 했는데 중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1시간 후 다시 전통이 왔는데 「데프건3」를 「진도개3」으로 수정 발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진도개3」은 아시는 바와 같이 예비군 비상전투 대기령의 암호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프건3」입니다. 어째서 「데프건3」이 발동되다 「진도개3」으로 교체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데프건3」은 한·미연합사령부 암호로써 대한민국국군은 사용하지 않는 암호였던 것입니다. 암호가 갑자기 교체되었던 이유는 주한미군(미국인)이 후일을 생각해서 바꾼 것 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태프건3」은 분명하게 주한미군에서 흘러나온 암호였습니다.
이런 사실이 있는데도 미국이 광주학살에 관계되지 않았다고 발뺌할 수 있을까요? 분명 미국은 광주의거에 깊숙히 관여하였기에 이러한 암호문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므로 미국은 발뺌할래야 할 수도 없고 용서받을래야 용서받을 수도 없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나온 세월이 이땅의 민주화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민주라는 것의 소중함을 알았고 어떻게 해야 민주화가 되는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일개 방위병이 「데프건」이라는 암호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당시의 전통, 그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염원하시는 여러분, 이제는 권력에 굴복하지 말고 힘차게 투쟁하면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 우리 광주의 억울한 희생자들은 지하에서나마 우리에게 힘찬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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