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미국의 '광주 알리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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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광주 알리바이'
미국, "우리는 책임 없다"
금남로와 망월동이 다시 5월을 맞았다. 국민들은 이제 광주사태에 대해 막후의 실질적 책임자에게 따지고 싶어 한다. 여기에 미국이 가장 당황하고 있다. 그들은 기회있을 때마다 '광주 알리바이'(현장부재 증명)를 주장하면서 무죄임을 강조해 왔다.
85년,미 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과의 면담에서 던롭 미 참사관은 "광주사태 당시 군병력 지휘자는 한국측이었으므로 미국은 책임질 일이 없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당시 주한미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85년 7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책임기관에 있던 우리 모두는 워싱턴에서건 한국에서건 광주사태 발전에 관한 사전지식이 절대로 없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87년 1월 언론인 간담회에서 "도든 사상자 발생 사건은 우리가 관여한 제20사단 투입 이전에 이뤄졌다"면서 책임이 없다는 식의 주장을 했다.
이러한 면책주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미국의 책임논의가 계속되자 글라이스틴은 여러가지 대응으로 알리바이를 댔다. 그는 "지금에도 서울에서 이 논쟁이 된다니 한심하다"(85년)며 비아냥거렸는가 하면, "미국의 영향력이 제대로 먹혀 들지 않는 데 대해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86년)며 엄살을 부리기도 했다.
또 "한국인은 우리의 영향력이 실물 이상으로 크게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사건의 전개 과정을 뒤집지 못하는 미국의 무능력을 전정권과의 공범자적 협력관계로 낙인찍었다"면서 본질에 접근해가는 한국인의 노력을 원망하기도 했다.
고런데 지금까지 미국이 주장한 '알리바이'는 주로 제도언론에 의해 그럴듯하게 보도돼 널리 유포되었다. 그 줄거리는 당시의 카터정부는 전 ·노세력과 일정한 갈등관계에 있었고 한국의 사태발전에 소외돼 있었다는 따위의 것이다.
드러나는 알리바이의 허구성
80년 5월 30일, 주한 미대사관 대변인은 한국의 중요 언론기관을 개별적으로 방문하였다. 그는 그때 지극히 이례적으로 과거의 몇가지 사건을 지적하였다. 내용인즉 12 · 12 육군참모총장체포라는 군내부 이변은 사전연락이 없었다. 전장군이 4월 14일 kCIA 부장 대리를 겸임하는 것에 대한 통지는 발표 30분 전에 받았다, 5.17조치의 사전 연락은 없었다 등이었다 한다.
이러한 미측의 사후 단속은 국보위 설치 하루 전의 것으로 카터정권이 얼마나 한국군정의 공범자로 확인되는 것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제3세계 독재정권 지원자'라는 불명예를 감추기 위해 미국은 절대로 '서투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의 한 고위관리는 "미국이 자칫하면 역효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서투른 방법들을 쓰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의사전달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한국사태는 인권문제가 아니고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바라는 미국 국가이익에 관한 문제"(『동아일보』 80. 6. 1)라고 실토했다.
"몰랐다"로 일관하는 미국의 '광주 알리바이'가 은폐 조작된 것임을 증명하는 작업은 의외로 쉽다.왜냐하면 당시 미국이 취한 행동과 사후에 그들이 언급한 말 속에 은폐의 징후들이 너무 많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민을 대신하여 한국민이 어떠한 형태의 정부를 갖게 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었다" (글라이스틴, 87. 11. 미공보관 기자간담회 )
"우리는 매우 정통한 정보시스템과 기타 모니터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주야로 움직이고 있으며,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글라이스틴, 『신동아』 85. 7)
미국은 확실히 한국의 사태에 대해 잘 보고 받았고 잘 처리했다.
12 · 12세력은 80년 봄의 초기단계에 이미 국회해산과 기성정치인의 거세계획을 세우고 이를 미국측에 타진했다(신동아,88.3.)이와 때를 맞춰 80년 4월 7일 '뉴스위크'지는 3김씨의 거세를 예고하는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의 정보를 특종으로 보도하였고 '동아일보'는 일주일 후 즉각 전문을 외신 톱으로 보도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3김씨 중 어느 누구도 이상적인 '선택'은 되지 못한다. 김영삼씨는 덜 유능하고, 김대중씨는 과격하고 김종필씨는 때가 묻었다.
미국은 12 · 12 직후 이미 자기 식의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위컴은 사후에 "80년 초 전 장군측에 반대하는 일단의 장교들이 거사할 계획을 갖고 이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타진했는데 미국은 이를 거절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시아통으로 알려진 『뉴욕타임즈』의 R. 레롤런 지국장(당시 )은 주한미군 고관들이 12 · 12사건 직후, 12 · 12세력에 의해 체포된 정승화의 직속부하들에게 역쿠데타를 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매우 정통한 정보·모니터시스템은 주야로 움직이고 있으며 광주사태 진행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미국이 '광주 알리바이'를 정당화하려고 당시 전정권과의 몇가지 갈등(전두환의 독주에 따른 몇가지 비공식적 우려 표명 및 경제제재조치의 거론)이 있었음을 강조(국내 언론도 마찬가지임)하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 미간 마찰 소문은 위장
일본의 한국관계전문가인 『코리아 레포트』 기자 고도다께오씨는 이것이 일종의 위장이고 단순한 포즈에 불과했다고 평가했다. 결국 미국관리들의 한두번의 불쾌감 표시는, 인권과 민주주의 간판을 내건 미국(카터)이기에 형식적으로만 말했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께오의 날카로운 지적은 5월을 보내면서 명확히 입증되었다.
사실 12 · 12사건 1개월 후인 80년 1월 12일 박건수 국방부대변인은 "한 ·미 간에 마찰이 있다는 소문은 완전히 잘못이다. 전보안사령관은 12·12처리에 있어 절대적 공로자다"라고 발했다.
5 17조치가 발표된 다음날,백악관의 카터대변인은 글라이스턴대사가 권력에서 밀려난 민간정부 지도자들과 협상하고 있는지.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부지도자들과 직접 얘기를 하고 있는지 묻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우리의 입장과 관련된 이 메시지에 가장 적절한 사람들과 만나는 점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답했다. 그가 지칭한 적절한 사람들'이 당시 상황을 쥐고 있던 12 · 12그룹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이건 후보 참모였던 싱글러브가 5·17직전에 전두환과 극비리에 만난 것은 전두환의 밀사인 김광헌 준장의 미국방문에 답하는 것으로…
약소국과 주변국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이 미국의 대통령이나 집권당의 교체에 따라 근본적인 변화를 맞 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카터행정부의 인권외교(77-80년)도 실제에 있어서는 트루만 독트린에서 시발된 제3세계에 대한 반공독재정권지원전략에서 한발자욱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권을 내건 카터행정부는 인권탄압의 악명을 드날린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 CIA를 통해 비밀리에 도와왔다"(『조선일보』.86.6. 27). 또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둘 중의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자유가 고작이었던 엘살바도르의 쿠테타도 막후조정하였다(79년 10월). 카터행정부는, 그들의 외교 목표를 분명히 한 레이건 행정부에 비해 솔직하지 못했다.
그 가식은 5 · 17전후에 극에 달했으나 5월 31일 이른바 '카터선언'(안보우위선언)으로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우리의 우방이나 무역상대국이 단지 우리의 인권기준에'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 단교할 수 없다"고 5 · l7세력을 감쌌다. 이러한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는 제도언론들이, 당시의 카터행정부와 한국군부와의 갈등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허술한 알리바이 주장을 쫓는 한심한 모습에 다름 아니다.
특전단 이동 과연 몰랐는가
5· 17을 며칠 앞두고 '코프 제이드 80 ∥'라 불리는 한 미 연합훈련이 13, 14일 이틀 동안 한국의 각기지에서 실시돼 내외신 기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실시된 그 합동혼련에서는 "후방으로부터의 물자 및 병력지원을 차단하는 훈련, 실무장투하훈련, 공중정찰, 탐색, 고리고 구조작전이 입체적으로 전개됐다." ( 「동아일보l, 80. 5. 13)
문제는 한 · 미 간 군정보가 가장 민활한 합동훈련 기간 중에 취해졌을 특전단의 이동을 미군이 몰랐다는 주장은 아무리 군사문외한이 생각하더라도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미 8군 소식통에 의하면 ·실지로 미군은 12, l5일 양일에 걸쳐 한국군부가 수도경비사령부의 병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야전군은로부터 비밀리에 병력을 차출하려는 것을 탐지. 저지했을 만큼이나 병력이동을 소상히 정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5월 12일부터 I6일까지 미군은 일본군과 함께 오끼나와에서 합동훈련을 하고 있었다. 주한미군의 세네월드 대장은 84년 5월 24일 기자 회견에서 한국기자의 예리한 질문을 받고 마침내 "한국 내에서의 정찰비행을 '이전부터' 행해져 왔다"라는 것을 시인했다. 미군장교들이 평소에 "우리는 한국 내에서 개미 한마리 움직이는 것도 포착한다"며 공중정찰의 완벽성을 자랑해온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 것이다.
5 ·l7을 전후한 한 ·미 고위 군장교 및 관리들의 바빴던 연쇄접촉 움직임과 백악관의 수차례에 걸친 고위관계자 회담은 "나의 보고는 '지체 없이' 카터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되고 있다"(「동아일보」,80. 5.23 )는 글라이스틴의 말처럼, 미국이 얼마나 5 · 17전후 상황을 세세히 알고 있었나를 알게 해준다.
밝혀지지 않는 '요담'들
당시 일 간신문 보도(이하 '동아일보' 80년5.9∼31)를 추적하면서 미국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한 ·미 연합사령관 위컴은 13일 국방부로 주영복 국방장관을 찾아가 '한국 내의 제반 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날 위컴은 미국으로 "공적인 일"을 위해 날아간다. 주국방장관은 16일 밤 11시 전두환중앙정보부장 등과 대책을 논의한다. 비극의 날 5.17, 그 바쁜 와중에도 주국방장관은 「미군의 날」을 맞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주한 미군의 노고를 치하" 하는 축하메시지를 위컴에게 보냈다.
이보다 앞선 9일 주국방장관은 주한미군 시찰차 내한한 미 전투준비 사령관 워나대장을 만난다. 또 미국무성의 콜버트 아· 태담당 부 차관보와 리치 한국과장이 10일 현재 한국정세와 관련. 미대사관 관리들과 .협의 차 방한 중이었다.
글라이스틴도 몹시 바빴다. 그의 통로는 박동진 외무장관이었다. '요담'은 19, 20 양일간 이뤄졌고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바쁘기는 워싱턴도 마찬가지였다. 김용식 주미대사는 주말인 17. l8일 이례적으로 미국무성에서 홀부르크 아·태담당차관보와 두차례에 걸쳐 만나 한국의 새로운 사태에 관해 협의했다. 홀부르크는 백악관에서 22, 29, 31일 세차례에 걸쳐 국가안보회의(NSC), 고위정책조정회의(PRC)에 참여하고 한국 사태를 논의했다.
미국과 광주 현지와의 긴밀한 사태파악통로는 글라이스틴의 입을 통해 알려졌다.
"처음엔 USIA(미중앙 정보부) 관계자가 광주소스의 한사람이었고 현지에 한국인 직원들이 있었다…. 위컴장군은 한 ·미연합사를 통해 미국의사를 전달했다. 위컴의 부사령관은 지금의 유병현 주미대사였다. 당시의 유장군은 한국의 육군참모총장(이희성)과 계속 연락중이었다. 그리고 한국 육군참모총장은 광주에 있던 군의 협상역과 연결돼 있었다…. 20사단 이동승인은 위컴과 내가 검토했고 내가 '그렇게 하시오'했다. 나는 부대의 이동전에 이것을 워싱턴에 보고 했다"(85. 7, 『신동아』 인터뷰에서 ).
미 '3총사'의 광주대책
이상을 통해 나타난 것과 같이 미국정부는 광주와 너무나도 가까이 있었다. "사태를 몰라 쩔쩔맸다"는 글라이스틴의 또다른 말들은 우리들에게 하등의 '혼란'을 주지 못한다.
전두환의 취임 직후 『서울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최근 몇달간 워싱턴의 대한정책은 글라이스틴 ·워컴 · 리치(국무성 한국과장)의 3자협의에서 주로 입안되었으며, 그들의 건의 내용을 홀부르크가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머스키국무장관을 거쳐 카터의 재가를 받았다( 『서울신문』, 80.8.30.)
사실 주한미대사와 주한 미 사령관의 실질적 세도는 한국의 역대 정권을 통해 이뤄진 일종의 '관습'이자 '실제'였다.
오늘의 정정이 그 한 초점을 미국 대사의 거동에 두고 주목하고 있다. 한국에 정치적위기가 내습할 때마다 국민은 미대사관주변의 동정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미국은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관심을 표명치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설명이 무색할 하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4 · 19이후의 매카나기 대사와 5 16 전후의 버거대사는 그 사실을 한국인 앞에서 보여 주었다( 『경향신문』, 63. 2. 16).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 권위주의체제의 치부를 가려주는 정치적 무화과 잎사귀가 되어 왔다… 그의 주기적 의사표명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라는 평판이 있어왔다. 그들은 정부를 지지하는 전방방송망을 갖고 있는데. 이는 '북으로부터의 위협 '이란 미명 하에 자행되는 숙청 · 학생 체포 ·입법지연 민주주의 제한 등을 정당화시켜 주기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북한에 대항하기 보다는 한국민중을 소외시킴에 있어 더욱 효율적인 기구가 될 움직임이 있어왔다(미 하버드대. 핸더슨 연구원 Ameirican Command in Korea 87년 판)
레이건 후보와 전(全) 중정부장
한편 일본의 정통한 한국 군부관계 소식통인 고도다케오 『코리아 레포트』 기자는 전두환이 당시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레이건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보도,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레이건 후보의 외교브레인에 리처드 알렌(Allen,88. 4 현재 레이건 안보담당특별보좌관)이 있다. 그는 72년 8월. 당시 ClA장관이었던 제임스 슬레진저와 만나 CIA와 특별 에이전트 계약을 맺는다. 알렌과 위컴 사령관파의 공통점은 모두닉슨 정권 하의 키신저 ·슬레진저라는 실력자의 보좌관 경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슬레진저는 75년 8월 한 미 안보정례협의를 위해 방한했을 때, 위컴 보좌관을 동행했다. 이 회의에서 위컴은 이회성 유병현 백석주 등 한국군부와 친교를 맺었다.
전두환을 밑받침하는 선배장군들과 친교를 갖은 위컴의 전두환과의 관계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을라간다. 즉 한 ·미 양국의 베트남 파견시대에 둘은 베트남에서 같은 계급의 동지로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전두환은 위컴의 중개로 차기 미대통령이 되려하는 레이건의 브레인 리처드 알렌과 만나왔다.
‥‥또 금년(80년) 5월 중순, 레이건 대통령후보의 외교고문 싱글러브 퇴역소장이 방한하여 극비리에 전두환과 회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카터의 주한미군철수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해서 77년 5월 군사정권위원회 UN수석대표에서 해임되었던 바로 그 존싱글러브 사령관이다.
미국에 귀국 후 싱글러브는,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광주사건에 관한 감상을 질문받았는데. 주저없이 무력진압을 긍정했다…. 싱글러브의 방한은 5월 17일 전두환이 권력유지 결의를 내외에 보인 김대중 등의 체포사건 직전으로, 전두환의 밀사로 말해지는 김광헌준장의 미국방문에 답하는 형식이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재일 미대사관 소식통에 의하면 전두환에게 도움을 주는 미국인은 주한미대사관 정무담당참사관인 존 쟘져이다. 주 서을 CIA 책임자인 블루스터 밑에서 쟘져는 주로 한국의 종교관계자와 접촉. 정보를 수집하여 한국 정부측에 전달한다고 한다(고도 다케오. 『제5공화국과 군부인맥』,1987,지양사)
이러한 여러 요로를 통한 미국의 한국 내에서의 움직임은 광주항쟁 중인 5월22일 적나라하고도 극적으로 나타났다. 이 22일은 미국으로서는 가장 바쁜 날이었다. 미 국방성 대변인이 "위컴 휘하의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승인했다"고 발표하였고,백악관에서는 고위정책회의(PRC)가 열렸다. 또한 글라이스틴은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으며 오키나와의 조기경보기 2대가 긴급 출동되었다.
글라이스틴은 이러한 22일의 '중대결단'에 대해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23일 룻데호텔에서 공화 ·신민 유정회 회원들과 오찬하는 자리에서 실로 중대한 발언을 했다. 물론 익명을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23일자 『동아일보』는 "주한미국고위관리"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미국은 5 · 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국민이 다소 '잘못된 길'을 걷더라도 정치인들은 설득해야 한다.
위에서 나타나듯이 미국은 광주항쟁을 '잘못된 길'로 파악하였고, 진압이 불가피하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군이 한국상황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했다'(병력이동승인 발표문, 5. 22)고 하면서도 항쟁진압을 위해 미군사령관휘하의 20사단을 투입하였다.
글라이스틴은 그래도 일정한 명분을 찾으려고 1945년 이래 40여년간 써먹은 판에 박은 말대로 "광주사태가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 같은 북괴가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했다.
5월 22일-미국 서울
이에 대해 5월 27일자 북한 정부기관지 『민주노선』은 논평을 통해 '남조선 인민의 투쟁은 누군가의 침투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신지배층의 반인민적 반동정치가 초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신동아」, 88. 2).
북한은 또 25일 평양방송을 통해 광주사태를 '성스러운 애국투쟁'이라면서 미국의 여러 차례에 걸친 경고에 대해 '우리 보고 개입이니 뭐니 떠드는 것은 도적이 매를 드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비난했다(동아일보
,5. 25).
미국방성 대변인은 광주항쟁이 끝나는 27일까지도 '북한의 남침기도 징조는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5.28.).
그러나 광주항쟁이 한창이던 27일 새벽, 미국은 '한국의 안전보장에 대한 미국의 결의를 과시하기 위해' 6척의 군함을 한국해역에 출동시켰고 5백 km이상을 관찰할 수 있는 정교한 레이다를 갖춘 E3.A공중조기경보통제기 2대를 오끼나와에 출동, 활동케 했다.( 『동아일보』, 5. 28).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일부 외신 소식통들은 미국이 북한의 침략저지라는 명분 아래 광주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무력 진압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내비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작전지휘권의 실상
지난 85년,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성명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군 작전지휘권이 한 ·미 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고 미국은 제7공수특전단과 제20사단의 병력투입을 막을 수 있었는데 왜 동의했는가?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행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한 · 미 연합사의 한국군과 미국군의 결합구조와 작전지휘체계는 앞의 표(1). (2)와 같다.
현재 형식적으로나마 정치적으로 독립된 나라에서 작전지휘권의 예속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유일하며 이는 경악할 만한 일이다. 하버드대의 핸더슨 한국문제연구가는 그의 논문 「주한미군 작전지휘권의 정치적 위험요소」(1987)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50년 7월 l5일 서울에서 급히 체결된(차라리'노획'이란 말이 옳다)이 협정은 체결과정 자체부터가 아직까지는 표면화되지 않았던 분노를 자아내게 할 요소로 가득 차·있다… 주한미사령관을 지냈던 스틸웰(Richard Stillweel)장군은 이 협정을 '이 지구장에서 가장 경이로운 주권의 양도'라고 묘사했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써줬다는 작전권이양에 대한 편지는 명백히, 완전히 그리고 모두 미국이 초고를 잡아준 것이다.
핸더슨씨에 의하면 몇번에 걸친 수정이 가해진,공개되지 않은 한·미연합사 협정은 작전지휘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다.
미군사령관 예하부대는 이동할 때마다(쿠데타의 경우 같이) 미군사령관의 승인을 반드시 얻어야 하나, 외부의 적으로부터의 현존하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방어적 필요성이 있을 경우엔 승인을 얻지 않아도 무방하며, 또 일정 시한 내에 승인을 얻지 못할 경우.대통령 혹은 다른 한국군 지휘관들의 임의로 부대를 이동시킬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미국이 남한군 장성에게 쿠데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실질적이고 항상적으로 한국군부를 장악 통제하고 있으면서도 "한·미 연합사의 작전통제권을 이탈한 군대의 운용에 대해 연합사는 관련당사자가 아니다"(미문화원 발행 『시사평론』 중 한미연합사 대변인의 진술)고 함으로써 남한 내 군부의 민주압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면 하려하는 것이다. 실지로 글라이스틴은 "거의 모든 사상자 발생사건과 모든 도발적인 행동은, 20사단 투입에 관한 결정으로 우리가 관여하기 이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광주사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누차 말했다.
그러나 국방성의 한 고위관리가 광주진압 직후에 "오늘날 한국사태는 인권문제가 아니고 동북아 안정을 바라는 미국의 국가이익에 관한 문제"(동아 80.6. 1)라고 말한 것은 미국이 그들이 진압승인한 광주진압계엄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예측 가능케 한다.
불가피한 것들
이상에서 미국의 '광주 알리바이'의 허구성을 밝혀보았다. 그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면책을 주장할지라도 한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미국을 우방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국민은 미국이 민주주의 씨를 양육시킬 것이라는 희망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는 악의 보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뉴욕타임스』, 80. 7. 6, 사설 ).
그러나 미국은 아직도 그들이 행했던 잘못을 반성은 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인들의 반미감정 점증에 대해 5.17조치 때에 논평했던 것과 똑같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반미감정에. 대해 책임질 만한 그릇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행한 몇가지 옳은 일이 반미 감정을 간접적으로 자극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피한 것 같다. "(글라이스틴, 87, 1. 13 언론인 간담회).
그러나 정말로 확실한 것은, 미국의 광주학살에 대한 해명과 사죄가 없는 한, 그리고 5· 17 주도세력이었던 노태우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가 없는 한, 한국민들의 반미감정의 점증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미국은 분명 히 알아야 할 것이다.
82년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한 문부식등 관련자들은 일심 최후진술에서 "방화의 목적은 반공만 내세우면 어떤 정권이라도 지지해 온 미국에 대한 국민적 경고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인사들이 계속 유죄로 감옥에 있는 한 이땅의 반외세 민족자주화의 불꽃은 끊임없이 타오를 것이다.
미국, "우리는 책임 없다"
금남로와 망월동이 다시 5월을 맞았다. 국민들은 이제 광주사태에 대해 막후의 실질적 책임자에게 따지고 싶어 한다. 여기에 미국이 가장 당황하고 있다. 그들은 기회있을 때마다 '광주 알리바이'(현장부재 증명)를 주장하면서 무죄임을 강조해 왔다.
85년,미 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과의 면담에서 던롭 미 참사관은 "광주사태 당시 군병력 지휘자는 한국측이었으므로 미국은 책임질 일이 없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당시 주한미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85년 7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책임기관에 있던 우리 모두는 워싱턴에서건 한국에서건 광주사태 발전에 관한 사전지식이 절대로 없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87년 1월 언론인 간담회에서 "도든 사상자 발생 사건은 우리가 관여한 제20사단 투입 이전에 이뤄졌다"면서 책임이 없다는 식의 주장을 했다.
이러한 면책주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미국의 책임논의가 계속되자 글라이스틴은 여러가지 대응으로 알리바이를 댔다. 그는 "지금에도 서울에서 이 논쟁이 된다니 한심하다"(85년)며 비아냥거렸는가 하면, "미국의 영향력이 제대로 먹혀 들지 않는 데 대해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86년)며 엄살을 부리기도 했다.
또 "한국인은 우리의 영향력이 실물 이상으로 크게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사건의 전개 과정을 뒤집지 못하는 미국의 무능력을 전정권과의 공범자적 협력관계로 낙인찍었다"면서 본질에 접근해가는 한국인의 노력을 원망하기도 했다.
고런데 지금까지 미국이 주장한 '알리바이'는 주로 제도언론에 의해 그럴듯하게 보도돼 널리 유포되었다. 그 줄거리는 당시의 카터정부는 전 ·노세력과 일정한 갈등관계에 있었고 한국의 사태발전에 소외돼 있었다는 따위의 것이다.
드러나는 알리바이의 허구성
80년 5월 30일, 주한 미대사관 대변인은 한국의 중요 언론기관을 개별적으로 방문하였다. 그는 그때 지극히 이례적으로 과거의 몇가지 사건을 지적하였다. 내용인즉 12 · 12 육군참모총장체포라는 군내부 이변은 사전연락이 없었다. 전장군이 4월 14일 kCIA 부장 대리를 겸임하는 것에 대한 통지는 발표 30분 전에 받았다, 5.17조치의 사전 연락은 없었다 등이었다 한다.
이러한 미측의 사후 단속은 국보위 설치 하루 전의 것으로 카터정권이 얼마나 한국군정의 공범자로 확인되는 것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제3세계 독재정권 지원자'라는 불명예를 감추기 위해 미국은 절대로 '서투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의 한 고위관리는 "미국이 자칫하면 역효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서투른 방법들을 쓰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의사전달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한국사태는 인권문제가 아니고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바라는 미국 국가이익에 관한 문제"(『동아일보』 80. 6. 1)라고 실토했다.
"몰랐다"로 일관하는 미국의 '광주 알리바이'가 은폐 조작된 것임을 증명하는 작업은 의외로 쉽다.왜냐하면 당시 미국이 취한 행동과 사후에 그들이 언급한 말 속에 은폐의 징후들이 너무 많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민을 대신하여 한국민이 어떠한 형태의 정부를 갖게 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었다" (글라이스틴, 87. 11. 미공보관 기자간담회 )
"우리는 매우 정통한 정보시스템과 기타 모니터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주야로 움직이고 있으며,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글라이스틴, 『신동아』 85. 7)
미국은 확실히 한국의 사태에 대해 잘 보고 받았고 잘 처리했다.
12 · 12세력은 80년 봄의 초기단계에 이미 국회해산과 기성정치인의 거세계획을 세우고 이를 미국측에 타진했다(신동아,88.3.)이와 때를 맞춰 80년 4월 7일 '뉴스위크'지는 3김씨의 거세를 예고하는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의 정보를 특종으로 보도하였고 '동아일보'는 일주일 후 즉각 전문을 외신 톱으로 보도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3김씨 중 어느 누구도 이상적인 '선택'은 되지 못한다. 김영삼씨는 덜 유능하고, 김대중씨는 과격하고 김종필씨는 때가 묻었다.
미국은 12 · 12 직후 이미 자기 식의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위컴은 사후에 "80년 초 전 장군측에 반대하는 일단의 장교들이 거사할 계획을 갖고 이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타진했는데 미국은 이를 거절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시아통으로 알려진 『뉴욕타임즈』의 R. 레롤런 지국장(당시 )은 주한미군 고관들이 12 · 12사건 직후, 12 · 12세력에 의해 체포된 정승화의 직속부하들에게 역쿠데타를 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매우 정통한 정보·모니터시스템은 주야로 움직이고 있으며 광주사태 진행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미국이 '광주 알리바이'를 정당화하려고 당시 전정권과의 몇가지 갈등(전두환의 독주에 따른 몇가지 비공식적 우려 표명 및 경제제재조치의 거론)이 있었음을 강조(국내 언론도 마찬가지임)하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 미간 마찰 소문은 위장
일본의 한국관계전문가인 『코리아 레포트』 기자 고도다께오씨는 이것이 일종의 위장이고 단순한 포즈에 불과했다고 평가했다. 결국 미국관리들의 한두번의 불쾌감 표시는, 인권과 민주주의 간판을 내건 미국(카터)이기에 형식적으로만 말했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께오의 날카로운 지적은 5월을 보내면서 명확히 입증되었다.
사실 12 · 12사건 1개월 후인 80년 1월 12일 박건수 국방부대변인은 "한 ·미 간에 마찰이 있다는 소문은 완전히 잘못이다. 전보안사령관은 12·12처리에 있어 절대적 공로자다"라고 발했다.
5 17조치가 발표된 다음날,백악관의 카터대변인은 글라이스턴대사가 권력에서 밀려난 민간정부 지도자들과 협상하고 있는지.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부지도자들과 직접 얘기를 하고 있는지 묻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우리의 입장과 관련된 이 메시지에 가장 적절한 사람들과 만나는 점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답했다. 그가 지칭한 적절한 사람들'이 당시 상황을 쥐고 있던 12 · 12그룹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이건 후보 참모였던 싱글러브가 5·17직전에 전두환과 극비리에 만난 것은 전두환의 밀사인 김광헌 준장의 미국방문에 답하는 것으로…
약소국과 주변국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이 미국의 대통령이나 집권당의 교체에 따라 근본적인 변화를 맞 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카터행정부의 인권외교(77-80년)도 실제에 있어서는 트루만 독트린에서 시발된 제3세계에 대한 반공독재정권지원전략에서 한발자욱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권을 내건 카터행정부는 인권탄압의 악명을 드날린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 CIA를 통해 비밀리에 도와왔다"(『조선일보』.86.6. 27). 또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둘 중의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자유가 고작이었던 엘살바도르의 쿠테타도 막후조정하였다(79년 10월). 카터행정부는, 그들의 외교 목표를 분명히 한 레이건 행정부에 비해 솔직하지 못했다.
그 가식은 5 · 17전후에 극에 달했으나 5월 31일 이른바 '카터선언'(안보우위선언)으로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우리의 우방이나 무역상대국이 단지 우리의 인권기준에'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 단교할 수 없다"고 5 · l7세력을 감쌌다. 이러한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는 제도언론들이, 당시의 카터행정부와 한국군부와의 갈등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허술한 알리바이 주장을 쫓는 한심한 모습에 다름 아니다.
특전단 이동 과연 몰랐는가
5· 17을 며칠 앞두고 '코프 제이드 80 ∥'라 불리는 한 미 연합훈련이 13, 14일 이틀 동안 한국의 각기지에서 실시돼 내외신 기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실시된 그 합동혼련에서는 "후방으로부터의 물자 및 병력지원을 차단하는 훈련, 실무장투하훈련, 공중정찰, 탐색, 고리고 구조작전이 입체적으로 전개됐다." ( 「동아일보l, 80. 5. 13)
문제는 한 · 미 간 군정보가 가장 민활한 합동훈련 기간 중에 취해졌을 특전단의 이동을 미군이 몰랐다는 주장은 아무리 군사문외한이 생각하더라도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미 8군 소식통에 의하면 ·실지로 미군은 12, l5일 양일에 걸쳐 한국군부가 수도경비사령부의 병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야전군은로부터 비밀리에 병력을 차출하려는 것을 탐지. 저지했을 만큼이나 병력이동을 소상히 정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5월 12일부터 I6일까지 미군은 일본군과 함께 오끼나와에서 합동훈련을 하고 있었다. 주한미군의 세네월드 대장은 84년 5월 24일 기자 회견에서 한국기자의 예리한 질문을 받고 마침내 "한국 내에서의 정찰비행을 '이전부터' 행해져 왔다"라는 것을 시인했다. 미군장교들이 평소에 "우리는 한국 내에서 개미 한마리 움직이는 것도 포착한다"며 공중정찰의 완벽성을 자랑해온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 것이다.
5 ·l7을 전후한 한 ·미 고위 군장교 및 관리들의 바빴던 연쇄접촉 움직임과 백악관의 수차례에 걸친 고위관계자 회담은 "나의 보고는 '지체 없이' 카터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되고 있다"(「동아일보」,80. 5.23 )는 글라이스틴의 말처럼, 미국이 얼마나 5 · 17전후 상황을 세세히 알고 있었나를 알게 해준다.
밝혀지지 않는 '요담'들
당시 일 간신문 보도(이하 '동아일보' 80년5.9∼31)를 추적하면서 미국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한 ·미 연합사령관 위컴은 13일 국방부로 주영복 국방장관을 찾아가 '한국 내의 제반 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날 위컴은 미국으로 "공적인 일"을 위해 날아간다. 주국방장관은 16일 밤 11시 전두환중앙정보부장 등과 대책을 논의한다. 비극의 날 5.17, 그 바쁜 와중에도 주국방장관은 「미군의 날」을 맞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주한 미군의 노고를 치하" 하는 축하메시지를 위컴에게 보냈다.
이보다 앞선 9일 주국방장관은 주한미군 시찰차 내한한 미 전투준비 사령관 워나대장을 만난다. 또 미국무성의 콜버트 아· 태담당 부 차관보와 리치 한국과장이 10일 현재 한국정세와 관련. 미대사관 관리들과 .협의 차 방한 중이었다.
글라이스틴도 몹시 바빴다. 그의 통로는 박동진 외무장관이었다. '요담'은 19, 20 양일간 이뤄졌고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바쁘기는 워싱턴도 마찬가지였다. 김용식 주미대사는 주말인 17. l8일 이례적으로 미국무성에서 홀부르크 아·태담당차관보와 두차례에 걸쳐 만나 한국의 새로운 사태에 관해 협의했다. 홀부르크는 백악관에서 22, 29, 31일 세차례에 걸쳐 국가안보회의(NSC), 고위정책조정회의(PRC)에 참여하고 한국 사태를 논의했다.
미국과 광주 현지와의 긴밀한 사태파악통로는 글라이스틴의 입을 통해 알려졌다.
"처음엔 USIA(미중앙 정보부) 관계자가 광주소스의 한사람이었고 현지에 한국인 직원들이 있었다…. 위컴장군은 한 ·미연합사를 통해 미국의사를 전달했다. 위컴의 부사령관은 지금의 유병현 주미대사였다. 당시의 유장군은 한국의 육군참모총장(이희성)과 계속 연락중이었다. 그리고 한국 육군참모총장은 광주에 있던 군의 협상역과 연결돼 있었다…. 20사단 이동승인은 위컴과 내가 검토했고 내가 '그렇게 하시오'했다. 나는 부대의 이동전에 이것을 워싱턴에 보고 했다"(85. 7, 『신동아』 인터뷰에서 ).
미 '3총사'의 광주대책
이상을 통해 나타난 것과 같이 미국정부는 광주와 너무나도 가까이 있었다. "사태를 몰라 쩔쩔맸다"는 글라이스틴의 또다른 말들은 우리들에게 하등의 '혼란'을 주지 못한다.
전두환의 취임 직후 『서울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최근 몇달간 워싱턴의 대한정책은 글라이스틴 ·워컴 · 리치(국무성 한국과장)의 3자협의에서 주로 입안되었으며, 그들의 건의 내용을 홀부르크가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머스키국무장관을 거쳐 카터의 재가를 받았다( 『서울신문』, 80.8.30.)
사실 주한미대사와 주한 미 사령관의 실질적 세도는 한국의 역대 정권을 통해 이뤄진 일종의 '관습'이자 '실제'였다.
오늘의 정정이 그 한 초점을 미국 대사의 거동에 두고 주목하고 있다. 한국에 정치적위기가 내습할 때마다 국민은 미대사관주변의 동정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미국은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관심을 표명치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설명이 무색할 하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4 · 19이후의 매카나기 대사와 5 16 전후의 버거대사는 그 사실을 한국인 앞에서 보여 주었다( 『경향신문』, 63. 2. 16).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 권위주의체제의 치부를 가려주는 정치적 무화과 잎사귀가 되어 왔다… 그의 주기적 의사표명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라는 평판이 있어왔다. 그들은 정부를 지지하는 전방방송망을 갖고 있는데. 이는 '북으로부터의 위협 '이란 미명 하에 자행되는 숙청 · 학생 체포 ·입법지연 민주주의 제한 등을 정당화시켜 주기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북한에 대항하기 보다는 한국민중을 소외시킴에 있어 더욱 효율적인 기구가 될 움직임이 있어왔다(미 하버드대. 핸더슨 연구원 Ameirican Command in Korea 87년 판)
레이건 후보와 전(全) 중정부장
한편 일본의 정통한 한국 군부관계 소식통인 고도다케오 『코리아 레포트』 기자는 전두환이 당시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레이건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보도,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레이건 후보의 외교브레인에 리처드 알렌(Allen,88. 4 현재 레이건 안보담당특별보좌관)이 있다. 그는 72년 8월. 당시 ClA장관이었던 제임스 슬레진저와 만나 CIA와 특별 에이전트 계약을 맺는다. 알렌과 위컴 사령관파의 공통점은 모두닉슨 정권 하의 키신저 ·슬레진저라는 실력자의 보좌관 경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슬레진저는 75년 8월 한 미 안보정례협의를 위해 방한했을 때, 위컴 보좌관을 동행했다. 이 회의에서 위컴은 이회성 유병현 백석주 등 한국군부와 친교를 맺었다.
전두환을 밑받침하는 선배장군들과 친교를 갖은 위컴의 전두환과의 관계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을라간다. 즉 한 ·미 양국의 베트남 파견시대에 둘은 베트남에서 같은 계급의 동지로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전두환은 위컴의 중개로 차기 미대통령이 되려하는 레이건의 브레인 리처드 알렌과 만나왔다.
‥‥또 금년(80년) 5월 중순, 레이건 대통령후보의 외교고문 싱글러브 퇴역소장이 방한하여 극비리에 전두환과 회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카터의 주한미군철수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해서 77년 5월 군사정권위원회 UN수석대표에서 해임되었던 바로 그 존싱글러브 사령관이다.
미국에 귀국 후 싱글러브는,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광주사건에 관한 감상을 질문받았는데. 주저없이 무력진압을 긍정했다…. 싱글러브의 방한은 5월 17일 전두환이 권력유지 결의를 내외에 보인 김대중 등의 체포사건 직전으로, 전두환의 밀사로 말해지는 김광헌준장의 미국방문에 답하는 형식이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재일 미대사관 소식통에 의하면 전두환에게 도움을 주는 미국인은 주한미대사관 정무담당참사관인 존 쟘져이다. 주 서을 CIA 책임자인 블루스터 밑에서 쟘져는 주로 한국의 종교관계자와 접촉. 정보를 수집하여 한국 정부측에 전달한다고 한다(고도 다케오. 『제5공화국과 군부인맥』,1987,지양사)
이러한 여러 요로를 통한 미국의 한국 내에서의 움직임은 광주항쟁 중인 5월22일 적나라하고도 극적으로 나타났다. 이 22일은 미국으로서는 가장 바쁜 날이었다. 미 국방성 대변인이 "위컴 휘하의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승인했다"고 발표하였고,백악관에서는 고위정책회의(PRC)가 열렸다. 또한 글라이스틴은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으며 오키나와의 조기경보기 2대가 긴급 출동되었다.
글라이스틴은 이러한 22일의 '중대결단'에 대해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23일 룻데호텔에서 공화 ·신민 유정회 회원들과 오찬하는 자리에서 실로 중대한 발언을 했다. 물론 익명을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23일자 『동아일보』는 "주한미국고위관리"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미국은 5 · 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국민이 다소 '잘못된 길'을 걷더라도 정치인들은 설득해야 한다.
위에서 나타나듯이 미국은 광주항쟁을 '잘못된 길'로 파악하였고, 진압이 불가피하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군이 한국상황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했다'(병력이동승인 발표문, 5. 22)고 하면서도 항쟁진압을 위해 미군사령관휘하의 20사단을 투입하였다.
글라이스틴은 그래도 일정한 명분을 찾으려고 1945년 이래 40여년간 써먹은 판에 박은 말대로 "광주사태가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 같은 북괴가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했다.
5월 22일-미국 서울
이에 대해 5월 27일자 북한 정부기관지 『민주노선』은 논평을 통해 '남조선 인민의 투쟁은 누군가의 침투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신지배층의 반인민적 반동정치가 초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신동아」, 88. 2).
북한은 또 25일 평양방송을 통해 광주사태를 '성스러운 애국투쟁'이라면서 미국의 여러 차례에 걸친 경고에 대해 '우리 보고 개입이니 뭐니 떠드는 것은 도적이 매를 드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비난했다(동아일보
,5. 25).
미국방성 대변인은 광주항쟁이 끝나는 27일까지도 '북한의 남침기도 징조는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5.28.).
그러나 광주항쟁이 한창이던 27일 새벽, 미국은 '한국의 안전보장에 대한 미국의 결의를 과시하기 위해' 6척의 군함을 한국해역에 출동시켰고 5백 km이상을 관찰할 수 있는 정교한 레이다를 갖춘 E3.A공중조기경보통제기 2대를 오끼나와에 출동, 활동케 했다.( 『동아일보』, 5. 28).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일부 외신 소식통들은 미국이 북한의 침략저지라는 명분 아래 광주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무력 진압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내비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작전지휘권의 실상
지난 85년,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성명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군 작전지휘권이 한 ·미 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고 미국은 제7공수특전단과 제20사단의 병력투입을 막을 수 있었는데 왜 동의했는가?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행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한 · 미 연합사의 한국군과 미국군의 결합구조와 작전지휘체계는 앞의 표(1). (2)와 같다.
현재 형식적으로나마 정치적으로 독립된 나라에서 작전지휘권의 예속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유일하며 이는 경악할 만한 일이다. 하버드대의 핸더슨 한국문제연구가는 그의 논문 「주한미군 작전지휘권의 정치적 위험요소」(1987)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50년 7월 l5일 서울에서 급히 체결된(차라리'노획'이란 말이 옳다)이 협정은 체결과정 자체부터가 아직까지는 표면화되지 않았던 분노를 자아내게 할 요소로 가득 차·있다… 주한미사령관을 지냈던 스틸웰(Richard Stillweel)장군은 이 협정을 '이 지구장에서 가장 경이로운 주권의 양도'라고 묘사했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써줬다는 작전권이양에 대한 편지는 명백히, 완전히 그리고 모두 미국이 초고를 잡아준 것이다.
핸더슨씨에 의하면 몇번에 걸친 수정이 가해진,공개되지 않은 한·미연합사 협정은 작전지휘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다.
미군사령관 예하부대는 이동할 때마다(쿠데타의 경우 같이) 미군사령관의 승인을 반드시 얻어야 하나, 외부의 적으로부터의 현존하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방어적 필요성이 있을 경우엔 승인을 얻지 않아도 무방하며, 또 일정 시한 내에 승인을 얻지 못할 경우.대통령 혹은 다른 한국군 지휘관들의 임의로 부대를 이동시킬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미국이 남한군 장성에게 쿠데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실질적이고 항상적으로 한국군부를 장악 통제하고 있으면서도 "한·미 연합사의 작전통제권을 이탈한 군대의 운용에 대해 연합사는 관련당사자가 아니다"(미문화원 발행 『시사평론』 중 한미연합사 대변인의 진술)고 함으로써 남한 내 군부의 민주압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면 하려하는 것이다. 실지로 글라이스틴은 "거의 모든 사상자 발생사건과 모든 도발적인 행동은, 20사단 투입에 관한 결정으로 우리가 관여하기 이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광주사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누차 말했다.
그러나 국방성의 한 고위관리가 광주진압 직후에 "오늘날 한국사태는 인권문제가 아니고 동북아 안정을 바라는 미국의 국가이익에 관한 문제"(동아 80.6. 1)라고 말한 것은 미국이 그들이 진압승인한 광주진압계엄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예측 가능케 한다.
불가피한 것들
이상에서 미국의 '광주 알리바이'의 허구성을 밝혀보았다. 그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면책을 주장할지라도 한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미국을 우방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국민은 미국이 민주주의 씨를 양육시킬 것이라는 희망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는 악의 보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뉴욕타임스』, 80. 7. 6, 사설 ).
그러나 미국은 아직도 그들이 행했던 잘못을 반성은 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인들의 반미감정 점증에 대해 5.17조치 때에 논평했던 것과 똑같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반미감정에. 대해 책임질 만한 그릇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행한 몇가지 옳은 일이 반미 감정을 간접적으로 자극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피한 것 같다. "(글라이스틴, 87, 1. 13 언론인 간담회).
그러나 정말로 확실한 것은, 미국의 광주학살에 대한 해명과 사죄가 없는 한, 그리고 5· 17 주도세력이었던 노태우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가 없는 한, 한국민들의 반미감정의 점증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미국은 분명 히 알아야 할 것이다.
82년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한 문부식등 관련자들은 일심 최후진술에서 "방화의 목적은 반공만 내세우면 어떤 정권이라도 지지해 온 미국에 대한 국민적 경고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인사들이 계속 유죄로 감옥에 있는 한 이땅의 반외세 민족자주화의 불꽃은 끊임없이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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