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학살 미국은 어디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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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 미국은 어디에 있었나
오연호(말)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광주에서의 진실이 무엇입니까. 미군이 광주 탄압에 관여했습니까. 아닙니다. 미군장교가 광주에서 부대를 지휘했습니까. 아닙니다. 광주에 있던 부대가 미군작전지휘권 아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
미국은 기회 있을 때마다 '광주 알리바이' (현장부재증명)를 주장하면서 무죄임을 강조해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위에 인용한 릴리 전주한미대사의 말일 것이다.
그는 1988년 5월 2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책임을 주장하는 한국민들을 비꼬아대며 그렇게 단언했다. 광주에 대한 미국의 배반은 한국민들에게 '우리에게 미국은 누구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대한 답 찾기는 곧 한국현대사의 본질을 캐내는 작업과 연결돼 있다. 미국이 광주 알리바이를 정교하게 다듬어 무책임론을 주장하는 것도 이 사건의 진실이 가져다 줄 파장이 너무도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국이 주장한 알리바이 논리는 주로 제도언론에 의해 그럴 듯하게 보도돼 널리 유포되었다. 그 줄거리는 당시의 카터정부가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 세력과 일정한 갈등관계에 있었고 한국의 사태발전에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80년 5월 30일, 주한 미대사관 대변인은 한국의 중요 언론기관을 개별적으로 방문하였다. 그는 지극히 이례적으로 과거의 몇 가지 사건을 지적하였다. 즉 '12·12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는 미국과 사전연락이 없었다, 전두환 장군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대리를 겸임한 것에 대한 통지는 발표 30분 전에 받았다,
5·17조치의 사전 연락은 없었다' 등이었다.
이러한 미측의 사후단속은 국보위 설치 하루 전의 일이었다. 카터정권이 얼마나 전두환 군사정권 탄생의 공범자로 확인되는 것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제3세계 독재정권 지원자라는 불명예를 감추기 위해 미국은 절대로 서툰 방법을 쓰지 않았다.
"몰랐다"로 일관하는 미국의 주장이 은폐·조작된 것임을 증명하는 작업은 의외로 쉽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이 취한 행동과 사후에 그들이 언급한 말 속에 은폐의 징후들이 너무 많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우 정통한 정보시스템과 모니터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이 시스템은 주야로 움직이고 있으며,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글라이스틴, 『신동아』 1985. 7) .
위와 같이 미국은 확실히 한국의 사태에 대해 잘 보고 받았고 잘 처리했다.
12·12세력은 80년 봄의 초기단계에 이미 국회해산과 기성정치인의 거세계획을 세우고 이를 미국측에 타진했다. 이와 때를 맞춰 1980년4월 7일 「뉴스위크」는 3김씨의 거세를 예고하는 주한미대사관 관계자의 정보를 보도해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3김씨 중 어느 누구도 이상적인 선택은 되지 못한다. 김영삼 씨는 덜 유능하고, 김대중 씨는 과격하고, 김종필 씨는 때가 묻었다. "
미국은 12·12 직후 이미 자기식의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위컴은 사후에 "80년 초 전 장군측에 반대하는 일단의 장교들이 거사할 계획을 갖고 이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타진했는데 미국은 이를 거절했다"고 털어놓았다.
미국은 광주 알리바이를 정당화하려고 당시 전정권과 몇 가지 갈등(전두환의 독주에 따른 몇 가지 비공식적 우려 표명 및 경제제재 조치의 거론)이 있었음을 강조하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특전단 이동 과연 몰랐는가
일본의 한국관계 전문가인 『코리아 리포트』 기자 고도다케오 씨는 그것은 일종의 위장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결국 미국관리들의 전두환에 대한 한두 번의 불쾌감 표시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내건 미국(카터)의 표정관리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사실 12·12 1개월 후인 1980년 1월 12일, 박건수 국방부 대변인은 "한미간에 마찰이 있다는 소문은 완전히 잘못이다. 전보안사령관은 12·12처러에 있어 절대적인 공로자다"라고 말했다.
5·17조치가 발표된 다음날, 백악관 대변인은 글라이스틴대사가 권력에서 밀려난 민간정부 지도자들과 협상하고 있는지,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부 지도자들과 직접 얘기하고 있는지 묻는 미국기자의 질문에 "가장 적절한 사람들과 만난다는 점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답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약소국과 주변국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이 미국의 대통령이나 집권당의 교체에 따라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카터행정부의 인권외교(1977∼80)도 실제에 있어서는 트루만 독트린에서 시작된 제3세계 반공독재정권 지원전략에서 한 발자욱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권을 내건 카터행정부는 인권탄압의 악명을 드날린 니카라과의 소모사정권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CIA를 통해 비밀리에 도왔다. 또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둘 중의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자유가 고작이었던 엘살바도르의 1979난 10월 쿠테타도 막후조정하였다. 카터행정부는, 그들의 외교목표를 분명히 한 레이건 행정부에 비해 솔직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 가식은 5·17 전후에 극에 달했으나 5월 31일 카터의 이른바 안보우위 선언으로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우리의 우방이나 무역상대국이 단지 우리의 인권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 단교할 수 없다"고 5· 17 세력을 감쌌다.
밝혀지지 않은 요담들
5·17을 며칠 앞두고 '코프 제이드 80'이라 불리는 한미 연합훈련이 13, 14일 이틀 동안 한국의 각 기지에서 실시되어 내외신 기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실시된 그 합동훈련에서는 후방으로부터의 물자 및 병력지원을 차단하는 훈련, 공중정찰, 탐색 그리고 구조작전이 입체적으로 전개됐다.
또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미군은 일본군과 함께 오키나와에서 합동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한미간 군정보가 가장 민활한 합동훈련 기간 중에 취해졌을 7공수특전단의 광주로의 이동을 미군은 과연 몰랐을까. 미8군 소식통에 의하면 실지로 미군은 12, 15일 양일에 걸쳐 한국군부가 수도경비사령부의 병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야전군으로부터 비밀리에 병력을 차출하려는 것을 탐지, 저지하기도 했다. 그만큼 미군은 한국군의 병력이동을 소상히 정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5·17을 전후한 한미 고위 군장교 및 관리들의 바빴던 연쇄접촉은 미국이 얼마나 당시 상황을 세세히 알고 있었나를 보여준다. 한미연합사령관 위컴은 13일 국방부로 주영복 국방장관을 찾아가 '한국내의 제반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날 위컴은 미국으로 '공적인 일'을 위해 날아간다. 주장관은 16일 밤 11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등과 대책을 논의한다.
비극의 날 5·17, 그 바쁜 와중에도 주장관은 '미군의 날'을 맞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노고를 치하"하는 축하 메시지를 위컴에게 보냈다.
이보다 앞선 9일, 주장관은 주한미군 시찰차 내한한 미 전투준비 사령관 워너대장을 만난다.
미국무성의 콜버트 아·태담당 부 차관보와 리치 한국과장은 10일 현재 한국정세와 관련, 미대사관 관리들과 협의차 방한중이었다.
글라이스틴도 바빴다. 그의 통로는 박동진 외무장관이었다. '요담'은 19, 20일 양일간 이루어졌고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바쁘기는 워싱턴도 마찬가지였다. 김용식 주미대사는 주말인 17,18일 미국무성에서 흘부르크 아·태담당 차관보와 두 차례에 걸쳐 만나 한국의 새로운 사태에 관해 협의했다. 홀부르크는 백악관에서 22,29, 31일 세 차례에 걸쳐 국가안보회의 (NSC), 고위정책조정회의(PRC)에 참여하고 한국사태를 논의했다.
계엄군 작전일지 속의 '한미협의사항'
미국과 광주 현지와의 긴밀한 사태 파악통로와 진압승인 경위는 글라이스틴의 입을 통해 알려졌다.
"처음엔 미문화원 관계자가 광주소스의 한 사람이었고 현지에의 한국인 직원들이 있었다…… 위컴장군은 한미연합사를 통해 미국의 의사를 전달했다. 위컴의 부사령관은 유병현 장군이었다. 당시 유장군은 이회성 육군참모총장과 계속 연락중이었다…… 20사단 이동승인은 위컴과 내가 검토했고 내가 '그렇게 하시오' 했다. 나는 부대의 이동 전에 이것을 워싱턴에 보고했다"(『신동아』, 1985. 7) .
그러나 미국 당국자들은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 사실이 한국에서 큰 쟁점이 되자 20사단 이동 승인을 슬그머니 번복, 역사를 왜곡하려 들고 있다.
전주한미대사 릴리는 1988년 5월 2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발뺌했다.
"20사단은 한국이 연합사 작전통제권 밖으로 빼갔습니다. 광주에 투입됐을 때는 연합사의 작전통제권 밖이었습니다. "
그러나 1980년 5월 22일 미국방성 대변인 토머스 토스는 이미 다음과 같이 발표했었다.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동아일보』, 1980. 5. 22) .
한편, 미국은 20사단의 이동 승인뿐만 아니라 최종 진압작전인 '충정작전'의 실시여부 혹은 실시기간 선정에 깊이 개입했음이 「계엄군 작전일지」(『말』, 1988. 8)를 통해 확인됐다.
이 작전기록의 5월 22일자에는 '한미간 협의사항: 24일까지 대기' 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서 유추 가능한 것은 미국이 항쟁진압 과정에서 한국군 고위충과 계속 협의해왔으며, '대기'가 아닌 충정작전의 '시행'에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미 양정부는 24일을 전후한 협의사항의 구체적 내용을 공개해야만 할 것이다.
미국의 광주대책은 5월 22일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이 22일은 미국으로서는 가장 바쁜 날이었다. 미국방성 대변인이 "위컴 휘하의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승인했다"고 발표하였고, 백악관에서는 고위정책회의 (PRC)가 열렸다. 또한 글라이스틴은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으며 오키나와의 조기경보기 2대가 긴급 출동되었다.
익명 요구한 글라이스틴의 진심 토로
글라이스틴은 이러한 22일의 '중대결단'에 대해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23일 롯데호텔에서 공화·신민·유정회 의원들과 오찬하는 자리에서 실로 중대한 발언을 했다. 물론 익명을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23일 「동아일보』는 '주한미국 고위관리'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미국은 5·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국민이 다소 '잘못된 길'을 걷더라도 정치인들은 설득해야 한다. "
미국은 광주항쟁을 '잘못된 길'로 파악하였고, 진압이 불가피하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군이 한국상황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항쟁진압을 위해·미군사령관 휘하의 20사단을 투입하였다.
글라이스틴은 투입의 명분을 찾으려고 이렇게 덧붙였다. "광주사태가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 같은 북괴가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
지난 1985년,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성명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군 작전지휘권은 한미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따라서 미국은 제7공수특전단과 제20사단의 광주에로의 병력투입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동의했는가. 광주학살 책임 지고 미행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
광주항쟁은 한국민들에게 군작전지휘권의 대미의탁 실상에 눈뜨게 했다.
하버드대의 한국문제연구가 핸더슨은 그의 논문 (「주한미군 작전지휘권의 정치적 위험요소」, 1987)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50년 7훨 15일 서울에서 급히 체결된(차라리 '노획'이란 말이 옳다) 이 협정은 체결과정부터가 아직까지는 표면화되지 않았던 분노를 자아내게 할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주한미사령관을 지냈던 스틸웰장군은 이 협정을 '이 지구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주권의 양도'라고 묘사했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써주었다는 작전권 이양에 대한 편지는 명백히, 완전히 그리고 모두 미국이 초고를 잡아준 것이다. "
핸더슨에 의하면 몇 번에 걸친 수정이 가해진, 공개되지 않은 한미연합사 협정은 작전지휘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다.
"미군사령관 예하부대는 이동할 때마다(쿠데타의 경우처럼) 미군사령관의 승인을 반드시 얻어야 하나, 적으로부터의 현존하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방어적 필요성이 있을 경우에 승인을 얻지 않아도 무방하다. 또 일정 시한내에 승인을 얻지 못할 경우, 대통령 혹은 다른 한국군 지휘관들이 임의로 부대를 이동시킬 수 있다. "
사라진 희망과 악의 보답
광주항쟁은 한국민에게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져줬다. 광주가 평정된 뒤 『뉴욕타임스』(1980, 7. 6)는 사설에서 이렇게 미래를 예측했다.
"한국국민은 미국이 한국에 민주주의의 씨앗을 양육시킬 것이라는 희망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는 악의 보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그 보답은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등을 포함한 반미감정의 국민적 확산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도 그들이 행했던 잘못을 반성은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인들의 반미감정 점증에 대해 5·17조치 때 논평했던 것과 똑같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반미감정에 대해 책임 질 만한 그룻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행한 몇 가지 옳은 일이 반미감정을 간접적으로 자극했을지 모른다:‥‥:그러나 그것은 불가피한 것 같다"(글라이틴,1987.1.13)
오연호(말)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광주에서의 진실이 무엇입니까. 미군이 광주 탄압에 관여했습니까. 아닙니다. 미군장교가 광주에서 부대를 지휘했습니까. 아닙니다. 광주에 있던 부대가 미군작전지휘권 아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
미국은 기회 있을 때마다 '광주 알리바이' (현장부재증명)를 주장하면서 무죄임을 강조해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위에 인용한 릴리 전주한미대사의 말일 것이다.
그는 1988년 5월 2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책임을 주장하는 한국민들을 비꼬아대며 그렇게 단언했다. 광주에 대한 미국의 배반은 한국민들에게 '우리에게 미국은 누구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대한 답 찾기는 곧 한국현대사의 본질을 캐내는 작업과 연결돼 있다. 미국이 광주 알리바이를 정교하게 다듬어 무책임론을 주장하는 것도 이 사건의 진실이 가져다 줄 파장이 너무도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국이 주장한 알리바이 논리는 주로 제도언론에 의해 그럴 듯하게 보도돼 널리 유포되었다. 그 줄거리는 당시의 카터정부가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 세력과 일정한 갈등관계에 있었고 한국의 사태발전에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80년 5월 30일, 주한 미대사관 대변인은 한국의 중요 언론기관을 개별적으로 방문하였다. 그는 지극히 이례적으로 과거의 몇 가지 사건을 지적하였다. 즉 '12·12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는 미국과 사전연락이 없었다, 전두환 장군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대리를 겸임한 것에 대한 통지는 발표 30분 전에 받았다,
5·17조치의 사전 연락은 없었다' 등이었다.
이러한 미측의 사후단속은 국보위 설치 하루 전의 일이었다. 카터정권이 얼마나 전두환 군사정권 탄생의 공범자로 확인되는 것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제3세계 독재정권 지원자라는 불명예를 감추기 위해 미국은 절대로 서툰 방법을 쓰지 않았다.
"몰랐다"로 일관하는 미국의 주장이 은폐·조작된 것임을 증명하는 작업은 의외로 쉽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이 취한 행동과 사후에 그들이 언급한 말 속에 은폐의 징후들이 너무 많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우 정통한 정보시스템과 모니터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이 시스템은 주야로 움직이고 있으며,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글라이스틴, 『신동아』 1985. 7) .
위와 같이 미국은 확실히 한국의 사태에 대해 잘 보고 받았고 잘 처리했다.
12·12세력은 80년 봄의 초기단계에 이미 국회해산과 기성정치인의 거세계획을 세우고 이를 미국측에 타진했다. 이와 때를 맞춰 1980년4월 7일 「뉴스위크」는 3김씨의 거세를 예고하는 주한미대사관 관계자의 정보를 보도해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3김씨 중 어느 누구도 이상적인 선택은 되지 못한다. 김영삼 씨는 덜 유능하고, 김대중 씨는 과격하고, 김종필 씨는 때가 묻었다. "
미국은 12·12 직후 이미 자기식의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위컴은 사후에 "80년 초 전 장군측에 반대하는 일단의 장교들이 거사할 계획을 갖고 이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타진했는데 미국은 이를 거절했다"고 털어놓았다.
미국은 광주 알리바이를 정당화하려고 당시 전정권과 몇 가지 갈등(전두환의 독주에 따른 몇 가지 비공식적 우려 표명 및 경제제재 조치의 거론)이 있었음을 강조하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특전단 이동 과연 몰랐는가
일본의 한국관계 전문가인 『코리아 리포트』 기자 고도다케오 씨는 그것은 일종의 위장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결국 미국관리들의 전두환에 대한 한두 번의 불쾌감 표시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내건 미국(카터)의 표정관리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사실 12·12 1개월 후인 1980년 1월 12일, 박건수 국방부 대변인은 "한미간에 마찰이 있다는 소문은 완전히 잘못이다. 전보안사령관은 12·12처러에 있어 절대적인 공로자다"라고 말했다.
5·17조치가 발표된 다음날, 백악관 대변인은 글라이스틴대사가 권력에서 밀려난 민간정부 지도자들과 협상하고 있는지,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부 지도자들과 직접 얘기하고 있는지 묻는 미국기자의 질문에 "가장 적절한 사람들과 만난다는 점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답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약소국과 주변국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이 미국의 대통령이나 집권당의 교체에 따라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카터행정부의 인권외교(1977∼80)도 실제에 있어서는 트루만 독트린에서 시작된 제3세계 반공독재정권 지원전략에서 한 발자욱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권을 내건 카터행정부는 인권탄압의 악명을 드날린 니카라과의 소모사정권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CIA를 통해 비밀리에 도왔다. 또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둘 중의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자유가 고작이었던 엘살바도르의 1979난 10월 쿠테타도 막후조정하였다. 카터행정부는, 그들의 외교목표를 분명히 한 레이건 행정부에 비해 솔직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 가식은 5·17 전후에 극에 달했으나 5월 31일 카터의 이른바 안보우위 선언으로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우리의 우방이나 무역상대국이 단지 우리의 인권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 단교할 수 없다"고 5· 17 세력을 감쌌다.
밝혀지지 않은 요담들
5·17을 며칠 앞두고 '코프 제이드 80'이라 불리는 한미 연합훈련이 13, 14일 이틀 동안 한국의 각 기지에서 실시되어 내외신 기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실시된 그 합동훈련에서는 후방으로부터의 물자 및 병력지원을 차단하는 훈련, 공중정찰, 탐색 그리고 구조작전이 입체적으로 전개됐다.
또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미군은 일본군과 함께 오키나와에서 합동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한미간 군정보가 가장 민활한 합동훈련 기간 중에 취해졌을 7공수특전단의 광주로의 이동을 미군은 과연 몰랐을까. 미8군 소식통에 의하면 실지로 미군은 12, 15일 양일에 걸쳐 한국군부가 수도경비사령부의 병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야전군으로부터 비밀리에 병력을 차출하려는 것을 탐지, 저지하기도 했다. 그만큼 미군은 한국군의 병력이동을 소상히 정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5·17을 전후한 한미 고위 군장교 및 관리들의 바빴던 연쇄접촉은 미국이 얼마나 당시 상황을 세세히 알고 있었나를 보여준다. 한미연합사령관 위컴은 13일 국방부로 주영복 국방장관을 찾아가 '한국내의 제반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날 위컴은 미국으로 '공적인 일'을 위해 날아간다. 주장관은 16일 밤 11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등과 대책을 논의한다.
비극의 날 5·17, 그 바쁜 와중에도 주장관은 '미군의 날'을 맞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노고를 치하"하는 축하 메시지를 위컴에게 보냈다.
이보다 앞선 9일, 주장관은 주한미군 시찰차 내한한 미 전투준비 사령관 워너대장을 만난다.
미국무성의 콜버트 아·태담당 부 차관보와 리치 한국과장은 10일 현재 한국정세와 관련, 미대사관 관리들과 협의차 방한중이었다.
글라이스틴도 바빴다. 그의 통로는 박동진 외무장관이었다. '요담'은 19, 20일 양일간 이루어졌고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바쁘기는 워싱턴도 마찬가지였다. 김용식 주미대사는 주말인 17,18일 미국무성에서 흘부르크 아·태담당 차관보와 두 차례에 걸쳐 만나 한국의 새로운 사태에 관해 협의했다. 홀부르크는 백악관에서 22,29, 31일 세 차례에 걸쳐 국가안보회의 (NSC), 고위정책조정회의(PRC)에 참여하고 한국사태를 논의했다.
계엄군 작전일지 속의 '한미협의사항'
미국과 광주 현지와의 긴밀한 사태 파악통로와 진압승인 경위는 글라이스틴의 입을 통해 알려졌다.
"처음엔 미문화원 관계자가 광주소스의 한 사람이었고 현지에의 한국인 직원들이 있었다…… 위컴장군은 한미연합사를 통해 미국의 의사를 전달했다. 위컴의 부사령관은 유병현 장군이었다. 당시 유장군은 이회성 육군참모총장과 계속 연락중이었다…… 20사단 이동승인은 위컴과 내가 검토했고 내가 '그렇게 하시오' 했다. 나는 부대의 이동 전에 이것을 워싱턴에 보고했다"(『신동아』, 1985. 7) .
그러나 미국 당국자들은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 사실이 한국에서 큰 쟁점이 되자 20사단 이동 승인을 슬그머니 번복, 역사를 왜곡하려 들고 있다.
전주한미대사 릴리는 1988년 5월 2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발뺌했다.
"20사단은 한국이 연합사 작전통제권 밖으로 빼갔습니다. 광주에 투입됐을 때는 연합사의 작전통제권 밖이었습니다. "
그러나 1980년 5월 22일 미국방성 대변인 토머스 토스는 이미 다음과 같이 발표했었다.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동아일보』, 1980. 5. 22) .
한편, 미국은 20사단의 이동 승인뿐만 아니라 최종 진압작전인 '충정작전'의 실시여부 혹은 실시기간 선정에 깊이 개입했음이 「계엄군 작전일지」(『말』, 1988. 8)를 통해 확인됐다.
이 작전기록의 5월 22일자에는 '한미간 협의사항: 24일까지 대기' 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서 유추 가능한 것은 미국이 항쟁진압 과정에서 한국군 고위충과 계속 협의해왔으며, '대기'가 아닌 충정작전의 '시행'에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미 양정부는 24일을 전후한 협의사항의 구체적 내용을 공개해야만 할 것이다.
미국의 광주대책은 5월 22일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이 22일은 미국으로서는 가장 바쁜 날이었다. 미국방성 대변인이 "위컴 휘하의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승인했다"고 발표하였고, 백악관에서는 고위정책회의 (PRC)가 열렸다. 또한 글라이스틴은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으며 오키나와의 조기경보기 2대가 긴급 출동되었다.
익명 요구한 글라이스틴의 진심 토로
글라이스틴은 이러한 22일의 '중대결단'에 대해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23일 롯데호텔에서 공화·신민·유정회 의원들과 오찬하는 자리에서 실로 중대한 발언을 했다. 물론 익명을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23일 「동아일보』는 '주한미국 고위관리'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미국은 5·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국민이 다소 '잘못된 길'을 걷더라도 정치인들은 설득해야 한다. "
미국은 광주항쟁을 '잘못된 길'로 파악하였고, 진압이 불가피하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군이 한국상황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항쟁진압을 위해·미군사령관 휘하의 20사단을 투입하였다.
글라이스틴은 투입의 명분을 찾으려고 이렇게 덧붙였다. "광주사태가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 같은 북괴가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
지난 1985년,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성명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군 작전지휘권은 한미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따라서 미국은 제7공수특전단과 제20사단의 광주에로의 병력투입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동의했는가. 광주학살 책임 지고 미행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
광주항쟁은 한국민들에게 군작전지휘권의 대미의탁 실상에 눈뜨게 했다.
하버드대의 한국문제연구가 핸더슨은 그의 논문 (「주한미군 작전지휘권의 정치적 위험요소」, 1987)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50년 7훨 15일 서울에서 급히 체결된(차라리 '노획'이란 말이 옳다) 이 협정은 체결과정부터가 아직까지는 표면화되지 않았던 분노를 자아내게 할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주한미사령관을 지냈던 스틸웰장군은 이 협정을 '이 지구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주권의 양도'라고 묘사했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써주었다는 작전권 이양에 대한 편지는 명백히, 완전히 그리고 모두 미국이 초고를 잡아준 것이다. "
핸더슨에 의하면 몇 번에 걸친 수정이 가해진, 공개되지 않은 한미연합사 협정은 작전지휘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다.
"미군사령관 예하부대는 이동할 때마다(쿠데타의 경우처럼) 미군사령관의 승인을 반드시 얻어야 하나, 적으로부터의 현존하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방어적 필요성이 있을 경우에 승인을 얻지 않아도 무방하다. 또 일정 시한내에 승인을 얻지 못할 경우, 대통령 혹은 다른 한국군 지휘관들이 임의로 부대를 이동시킬 수 있다. "
사라진 희망과 악의 보답
광주항쟁은 한국민에게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져줬다. 광주가 평정된 뒤 『뉴욕타임스』(1980, 7. 6)는 사설에서 이렇게 미래를 예측했다.
"한국국민은 미국이 한국에 민주주의의 씨앗을 양육시킬 것이라는 희망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는 악의 보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그 보답은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등을 포함한 반미감정의 국민적 확산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도 그들이 행했던 잘못을 반성은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인들의 반미감정 점증에 대해 5·17조치 때 논평했던 것과 똑같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반미감정에 대해 책임 질 만한 그룻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행한 몇 가지 옳은 일이 반미감정을 간접적으로 자극했을지 모른다:‥‥:그러나 그것은 불가피한 것 같다"(글라이틴,198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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