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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미국은 왜 전두환정권을 지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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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전두환정권을 지지했나

이상우(저널리스트)

연이은 군사정권의 탄압통치

  광주항쟁에 대한 집권당국의 무자비한 탄압과 진압작전은 5·16후 이 나라를 지배해온 군사정권의 통치형태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61년 박정희소장이 정권을 장악한 이래, 집권 군부세력은 아주 유효한 통치술 한가지를 몸에 익혀왔다. 국민을 다스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통치권자의 의지를 「소신을 갖고」 밀어 부치는 것이다.
군사집단이 지니는 본질적인 속성과 4반세기에 걸친 통치체험을 통하여 이 나라의 집권세력은 국민이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의 대상이라는 점을 나름대로 터득했다. 박정희장군은 5·16후 한때 군정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쳐,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급속히 이같은 통치 술책을 몸에 익혔다.
  이같은 5·16군사정권의 강압적 통치술은 단기 내지는 중기정책으로서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국민은 공포분위기 속에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그런 가운데 사회는 일사불란한 병영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탄압 통치책의 절정은 부마사태 때였다.유신군사체제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쌓인 끝에 79년 10월 중순, 부마지역에서 폭발한 시민항쟁에 대해, 정부는 여론을 수용 하기보다는 특전단 병력을 투입, 공포스러운 방법으로 이를 진압해버렸다. 그 주역은 박대통령이었고, 하수인은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이었다.
  국민의 반정부항의에 대한 유신군사정권의 대응자세는 부마사태를 진압한 다음, 10월26일 저녁 궁정동 밀실회합에서 있은 차지철의 발언을 통해 상징적으로 실토되었었다. 김재규로부터 사살당하기 전 차지철은 「부마사태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경우, 탱크로 한 2,3백만명만 깔아 죽이면 잠잠해진다」고 호언했다. 폭력에 의한 공포심 조성으로 국민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몸에 배인 군사독재적 통치술을 이보다 더 직선적으로 토로한 발언은 없었다. 그 주역들은 그날 밤 제지당했다. 그러나 그들이 신봉하고 있던 통치철학은 쓸모 있는 것으로 인계되었던 것이다.

광주항쟁은 군사문화의 한 표현

  광주사태는 유신주역의 퇴장 후 등장한 군부실권세력이 새 시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신적 통치술책을 그대로 적용하려다가 불러일으킨 민족적 비극이었다. 그 실행 수법은 부마항쟁 때보다 훨씬 혹독했을 뿐더러, 지역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사태의 경위와 결과는 한층·무거운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부마항쟁의 경우는 진압주역들이 제지되고 정권이 붕괴됨으로써 어느 의미에서는 곧바로 해결됐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이를 딛고 일어선 주도세력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그 응어리는 풀리지 못한 채 내연해 왔던 것이다.  결국 광주항쟁은 최악의 모습으로 드러난 군사문화의 한 측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광주항쟁을 최악의 사태로 몰고 간 원인의 하나는 사실의 과장, 흑은 유언비어에 있었다. 그리고 이런 유언비어가 난비한 까닭은 정규의 매스 미디어가 사실에 대해 침묵하거나 왜곡보도했기 때문이었다.
  그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국내 신문과 방송들은 상당한 기간 꿀먹은 벙어리처럼 한줄이나 한마디의 보도도 하지 않았다. 한국 5대 도시의 하나가 온통 격전지로 화하여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에 대해, 언론기관이 4일간이나 한마디 보도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간에 한국 언론사상 치욕적인 기록으로 남을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당시 계엄당국이 실시한 검열 때문이었다. 광주사태에 관한 기사원고는 한줄도 빠짐없이 체크되어 보도관제됐다. 그동안 나라 안은 광주에 관한 소문들로 가득찼으며, 그 내용은 과장되거나 왜곡되는 경우도 많았다.
  국내 신문이 광주사태를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항쟁 나흘째인 5월21일 석간부터였다. 그나마 독자적인 취재에 의한 객관보도가 아니라 계엄사령부의 발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는데, 발표내용 자체가 사태의 실상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발표가 있던 그 시각까지 적어도 1백명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엄사는 민간인 1명만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신문들은 그후 광주사태에 대해 속보를 내보냈으나, 그 내용은 거의가 계엄사 발표에 준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광주시민들은 시위 도중, 국내 일부 매스컴 사를 불태웠으며 국내 보도진의 취재를 불신했다. 그런 반면 외신기자들의 취재는 비교적 자유로워, 경우에 따라서는 시민군들이 외신 취재를 앞장서 도와주기까지 했다.

진실에 접근한 외신보도

  광주항쟁기간뿐만 아니라 그 후에 있어서도 오랫동안 국내 매스컴의 보도가 사태의 진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데 반해,외신들은 비교적 진실에 가까운 보도들을 했다. 특히 외신은 국내 매스컴이 전혀 보도하지 못했던, 항쟁의 배경과 군부 실권세력의 동향 및 사태의 정치적 의미에 조명을 맞춰, 종합적인 평가보도를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보도들 가운데 두기사를 요약 전재해 본다. 항쟁 진압 6일 후인 6월2일자 「타임」지와 「뉴스위크」지의 보도 내용이다.
  『계엄령을 철폐하라! 시위자들은 외쳤다. 또 ○○○에 죽음을! 이라고 절규했다. 남한의 한 도청소재지 광주에서  10만여 시위대는 서울의 계엄정권과 새로운 권력자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위는 곧 전면적인 봉기로 확대되었다. 시민들은 도주한 경찰을 대신해서 광주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봉기는 16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4일동안 1백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했다. 이는 1960년 이승만정권을 붕괴시켰던 4·19이래 가장 처절한 사건이었다.
이번 사태는 (2주일전 서울의)학생사위의 물결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들은 7개월전 박정희대통령 암살 후 계속 발효중인 계엄령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의 명백한 타게트는 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가 아니라, 배후 권력자 전두환 장군이었다.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거머쥐고 있는 전장군은 이미 이나라 군부의 배후 권력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학생데모가 가라앉자마자 정부는 철권의 포고령을 내렸다. 서울은 암울한 분위기로 뒤덮여 있다. 불신감과 불안감이 휩싸고 있다.… 경희대학교의 한 교수는 이렇게 논평했다. 「지금은 분노와 통한의 계절이다 」. 카터행정부는 최대통령의 지위가 강화되기를 바랄 수도 없다. 그는 거의 실제적 권력을 갖지 못하고 있고 사실상 대통령수용소-청와대에서 군대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전두환장군이 권력을 장악한 후 그의 목표중에는 ‥‥‥ 박정회를 암살한 김재규의 처형과 또 내년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정적 김대중을 배제시키기 위한 그의 처형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주 전장군은 양쪽 문제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았다. 대법원은 김재규의 상고를 기각시키고 4일후에 사형을 집행했다. 한편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의 유죄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는 분명 그를 사형에 처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정치 무대로부터 김과 같은 반대지도자를 제거시키는 것은 군부독재 수립의 관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광주의 폭발적인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몇 주가 보여준 대로 일련의 무법상태는 군부독재의 후계자 ○○○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만 한 것이었다」-「타임」
「20여만명의 데모군중이 군부통치 철폐를 요구하면서 이 도청소계지 전역에 걸쳐 들끓었다. 처음에는 총검을 휘두르는 공수부대가 우세한 듯했으나 곧 군중의 분노가 끓어 올랐다. 이는 6·25  후 최악의 폭력사태였으며, 5·17폭거를  감행하여 권력을 장악한 군장성들에게 불길한 징조였다. 지난 주 내내 군중의 분노는 폭발점에 다달아 있었다. 군부 권력자 전두환장군은 ‥‥‥국무총리를  내세웠고 내각에서 온건파를 내몰았으며  최규하대통령을 허수이비로 만들어버렸다. 전은 또 카리스마적 반정부 지도자 김대중을 비롯한 수십명의 반정부 지도자를 체포했다.
전은 북한이 호시탐탐 남한의 혼란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과격한 조치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소식통들은 침략 가능성의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밝혔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치명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박정희의 사망후 대부분의 관측자들은 남한이 군부독재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온건파가 박의 전제적 유신헌법을 개정하려 하고 자유선거 일정에 착수하자, 군부지도자들은 겁을 집어먹었다고 소식통들은 말하고 있다. 학생데모를 구설 삼아 장성들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대학 휴교령을 내렸으며 언론을 탄압하고, 이어 뒤따른 폭력사태가 마치 이 나라가 아직도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증거인 양 전가시켰다. 한국의 한 지식인은 「이제 이 나라는 무법천지입니다」라고 말했다.
한 정부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무법상태가 무한정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정부의 정치적 전략은 군대식으로 매우 압제적 이었다.
5월17일, 각료들이 서울 중앙청 내각의 소집을 통고받았다. 장관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계단과 복도에 줄지어선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 총리 신현확이 주영복국방장관과 같이 회의실에 들어 섰다. 신이 의사봉을 세번 두드리자, 주는 현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고 발표했다. 전 각료는 서명하도록 요구받았다. 「우린 입을 다물고 있었지요. 아무런 토론도 없었답니다」 김옥길 장관이 말했다. 침묵하고 있던 다수의 각료들에게 있어 나머지 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최대통령은 화해작업을 위해 일하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1주일도 채 안되어 그 역시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다. 그는 공석에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삼엄한 경비하에 있는 대통령 관저에 머물러 있었다.
전두환장군은 무해한 관료 박충훈을 신임총리로 세웠다. 박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재건하겠다고 약속했으나,그가 해낼 역할이 군부의 충실한 앞잡이 노릇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는 취임직후 헬리콥터로 광주에 갔으나 계엄분소장이 신변이 위험하다고 경고하자 그냥 돌아가 버렸다.
이 정권이 국민을 괴롭히려고 하는 욕망에는 끝이 없어 보인다.전두환장군의 측근들은 함께 육사에서 공부했고 박정권하에서 권력에 부상하여 언젠가는 자기들이 이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 생각해온 직업군인들이다. 지난 12·12때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1백명에 가까운 장성들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요직을 독차지해 버렸다.
결국 전장군는 일반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군 내부에서도 그를 비방하는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의 한 정치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군부에 너무 많은 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권을 장악하기 전에는 안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지난 주 봉기가 터졌을 때 전은 거의 매일 숙소를 바꾸기 시작했다. 극소수 측근들만 그의 소재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뉴스위크」

일본 언론도 과잉진압 비판

  광주항쟁에 대한 군부실권세력의 강압적인 과잉 진압작전에 대해서는 일본 언론들도 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를 보도했다. 다음은 항쟁진압 다음날인 5월28일자 「조일신문」의 사설요지이다.
  『광주시의 소요사태는 계엄령 전국확대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항의행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전라남도 출신의 유력 정치가 김대중씨의 연행도 광주학생, 시민들의 저항을 보다 격렬한 것으로 만들었다.
  계엄사령부는 광주 소요를 「외부로부터의 불순분자와 간첩의 선동에 의한 것」 이라는 논리로 일관했다. 여기에는 민심의 동향을 바르게 파악하려는 자세는 찾아볼 수 없다. 학생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들어줄 것은 들어주면서 해결의 길을 찾으려는 도량을 지녔더라면 이처럼 사태를 어렵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주화를 바라는 민의를 무력으로 틀어 막으려 한다면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그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역전시키려는 기도이며, 한국민의 여태까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짓이다.
한국정부는 사실상 내각보다도 더 강력한 국가보위위를 설치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본격적인 「군정」의 추진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정치정세의 혼란, 학생 ·시민의 소요. 권력의 강압과 정책적 실패에 대한 반발 때문에 확산된 것이다. 일시적인 증요법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는다. 군정강화는 보다 광범위한 민중의 저항을 불러 일으킬 것이 아닌가? 국민에게 총뿌리를 돌리더라도 결코 민심을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군부가 전면에서 물러나 본래의 임무에 전념하고 민의에 귀기울이는 것이 안정에의 첩경이다』
  광주항쟁에 대한 한국 계엄군의 강압적인 진압작전에 대해 우방의 언론들이 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도한 데 비해 워싱턴 당국은 이를 비교적 침착한 태도로 받아들인 점이 주목되었다. 항쟁이 평정된 직후인 5월27일(워싱턴 시간)  미국무성의 「토머스 레스턴」 대변인은 『한국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한국의 정부, 군당국과 반체제파가 서로 한발짝씩 양보하여 접근하는 정신으로 사태를 수습하여, 폭넓은 지지기반을 갖는 문민정부를 수립하도록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광주항쟁과 계엄당국의 평정작전 및 이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과 살상행위에 대해, 미정부당국은 의식적으로 거론하기를 회피했다. 미국은 계엄군이 진입하여 광주항쟁을 종식시킨 일은 부득이한 일로 여기고 있었으며. 진압작전 그 자체보다는 진압후에 있을 한국 정치정세의 추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5월28일, 워싱턴당국은 「머스키」 국무장관 주재하에 국무성 각 지역 담당자 30 여명이 참석하는 주례분석보고회의를 열고 한국사태를 검토했다. 회의 벽두 「머스키」 장관은 한국의 위기와 관련된 인권 문제의 해결과 민주화 추세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어 「홀부르크」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는 한국군부가 권력을 강화해 가는 과정에서 드러내 보이고 있는 움직임에 관해 보고했다. 「홀부르크」차관보는 「글라이스틴」대사와 「위컴」' 한미연합군사령관이 현지에서 한국군부인사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민간인과의 대화와 국민의 지지기반을 갖는 정부수립의 중요성애 관한 미국측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미국은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군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전에 이같은 미국측 주장을 그들이 새겨듣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태가 더욱 분명해질 때까지 한국군부를 비난하는 어떤 성명도 발표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결국 이날 국무성 주례 분석보고회의는 앞으로 한국 군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더 두고 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국이 민간정부 수립쪽으로 나아간다면 찬양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군사위원회(흑은 혁명평의회) 같은 것을 만들어 군사집권을 계속하려 한다면 미국은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던 것이다.

국보위출범과 「12·12」세력의 부상

그러나· 한국 정정은 미국의 희망과는 달리 후자의 방향으로 치달았다. 광주항쟁 진압 3일뒤인 5월31일 정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를 발표했다. 이 기구는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고 국무총리 부총리 외무 내무 법무 국방 문교 문공장관 중앙정보부장 대통령비서실장 계엄사령관 합동참모회의의장 각군 참모총장 및 국군보안사령관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10인의 위원 등 도합 26명으로 구성되었다. 임명직 위원에는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윤성해 등 12·12주역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대책위 첫 회의를 주재한 최규하대통령은, 『나는 국가비상시국에 대처하여 대통령으로서, 또한 국군통수권자로서 헌법에 명시된바 국가보위의 책임을 완수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헌법과 관계법령에 입각하여 대통령 자문보좌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기구가 통상적 의미에서의 자문, 보좌 기구가 아니었음은 당시 누구나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의 기구라면 이미 그해 2월18일에 각계 원로 23명으로 구성한 대통령 자문기관인 국정자문회의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는, 12·12세력이 군부주도권을 장악한 이래 꾸준히 정치실권에 영향력을 끼쳐 오다가 5·17 계엄확대와 광주항쟁을 누르고 마침내 정권의 표면무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막올림이었던 것이다. 당시 일부 외신은 국보위를 혁명평의회와 같은 성격의 기구라고 보도했다.
  국정의 최고정책기구로 등장한 국보위에서도 그 핵심처는 전두환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가 위원장인 국보위상임위원회였다. 30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는 외무 내무 상공 경제과학 문공 정화 등 국정과 개혁작업에 대응하는 13개 분과위원회로 구성되었으며, 위원중 현역장성이 18명이었다. 각 분과위원회 소속 위원으로는 12·12때 활약했던 영관급 현역 장교들이 다수 등장했다.
  국보위 설치가 공식 발표된 것은 5월31일이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2주일 이전에 이미 군부내에서 이 기구의 설치를 결의해 놓고 있었다. 최규하대통령이 중동 2개국 순방으로 부재중이던  5월16일, 국방부회의실에서 열린 비상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보위 설치안이 결의됐다. 이 아이디어는 12·12주도세력이 구상해낸 것이며, 최대통령 부재중, 대통령권한 대행이었던 신현확총리가 동조하여 성안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는 주영복국방장관 주재아래 정호용특전사령관이 제안하여, 「비상기구(국보위) 설치를 위한 군부의 결의」를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형식의 보고서에 참석한 지휘관들이 서명했다.
  국보위 구성에 관한 세부적인 청사진을 보안사 영관급 주도세력에 의해 성안되어 전두환장군에게 보고되었으며, 전장군은 최대통령이 귀국하자 마자 곧바로 공관으로가, 최대통령으로부터 국보위설치에 관한 재가를 받아냈다.
  국보위 출범이 앞으로의 정국진행에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많은 국민들이 우울한 심정으로 내다보고 있는 가운데, 과거 유신치하에서 정치적으로 인기없는 조치를 취할 때마다 곧잘 동원되었던 일부 사회단체들의 신문광고 공세가 시작되었다.  대한반공청년회 국제숭공연합회 대한상이군경회 대한전몰군경유족회 대한요식업중앙회 대한숙박업중앙회 한국목욕업중앙회 등 62개 단체는 「총력안보 중앙협의회」 명의의 성명광고를 내고, 『5월13일을 기점으로 서울시내 전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5월15일에는 과열난동화하여 서울시 중심지가 소요군중에 점거되다시피 하였고, 또한 5월18일부터 5월27일 진압되기까지 10일간에 걸쳐 광주일원에서 벌어진 폭동사태는 총기를 탈취한 무장폭도들의 난동과 파괴로 무려 2백60억원의 엄청난 물적 손실과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가져왔다』면서, 『이러한 국내 상황은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생존권자체를 위협하는 누란의 위기라 아니할 수 없으며, 따라서 5월17일에 정부가 단행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월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시의에 맞는 현명한 결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국보위에 밀린 최대통령

  「12·12」이후 외신과 정가 일각에서 「형식적 정권」 「반쪽 집권자」 「허수아비」 등등으로 불리었던 최규하대통령은 국보위와 국보위상임 위원회 출범을 계기로 문자그대로 「허수아비」꼴이 되어버렸다. 그의 실각은 시간문제로 비쳐졌다. 최대통령의 발언은 급속히 무게를 잃어간 대신 전두환상임위원장의 발언이 내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최대통령은 6월12일 「국가기강확립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 「헌법개정심의위를 통한 개헌작업을 촉진하여 현행헌법의 규정에 따라 국민투표에 붙이게 될 안을 마련, 늦어도 금년 10월말까지 이를 국민투표에 회부, 확정 지을 방침」이라고 말하고「그런 다음 필요한 법적, 행정적 조치를 취하여 내년 상반기중에 선거를 실시하고 6월말까지 새 정부를 수립, 정권을 이양할 계획」이라고 밝졌다.
  담화에서 밝힌 최대통령의 발언내용은 그동안 여러차례 정부가 발표한 정치일정의 되풀이였다. 그러나 5·17과 국보위 출범을 본 국민들은 최대통령의 담화를 그전처럼 실현성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어딘지 모르게 거리낌을 느꼈다.
  국민들 가운데는 최대통령이 말하는 정치일정의 이면에 숨겨진 어떤 본질 변화의 낌새를 눈치챈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개헌, 국민투표 실시일, 선거날짜 등 표면적인 일정의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그 알맹이가 전혀 당초의 구상이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10·26후 애당초 정부가 발표한 개헌작업이나 선거 등 정치일정은 몇가지의 공통적인 국민합의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즉 개헌의 내용은 대통령중심제와 대통령직선제 였다.
  개헌에 관한이 두가지 원칙은 한동안 떠돌아 다녔던 2원집정부제니 뭐니하는 연막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5·17조치 이전까지는 확고부동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개정된 헌법하에서 실시되는 선거를 통해 수립될 정부는 민간정부일 것으로 기대됐다.
  정치일정에 관한 이런 실질내용이 국보위 설치 이후에는 사실상 변질되었음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일관되고 있는 양 국민들에게 보이려한데에 최대통령 담화의 노리는 바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후의 사태진전을 보면, 담화에서 약속한 일정은 그대로 실현되었지만 개헌과 선거의 실질내용은 당초 국민합의사항과 정반대의 결과로 드러났다. 즉 개헌의 내용은 핵심의 하나인 대통령선거방법에 있어 국민직접선거가 아닌 유신헌법과 대동소이한 간선제가 되었고, 선거결과는 애당초 국민의 절대적 기대였던 민간정부의 등장이 아니라, 군사정권의 계속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국보위  설치  미국의 의표 찔러

  광주항쟁 진압 이후 적극적인 논평을 유보한 채 한국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던 미국은 사실상 군사혁명위원회격인 국보위설치와 전두환장군을 비롯한 12·12군부주도세력의 전면 등장에 우려와 함께 불쾌감을 표시했다.
  워싱턴당국은 12·12사태 이후 군부의부상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공식,비공식으로 견제태세를 보여왔지만 5월17일을 전후하여 12·12세력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곧바로 정권의 전면무대에 나서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같다. 미국이 국보위 설치에 관해 사전통보를 받거나 독자적인 사전 정보를 입수한 흔적은 없다.
  이 사실을 미국무성인 처음으로 알게 된 시점은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되고, 전두환장군이 최대통령을 만나 재가를 얻어낸 다음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뒤늦게 정보를 입수하고 부랴부랴 열린 28일의 국무성 주례 분실보고회의 석상에서「머스키」장관은 『한국군부의 정치적 의도에 대한 정보가 민족할 만큼 완벽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불평했다. 정보입수가 왜 그렇게 늦었느냐는 장관의 물음에 대해 「홀부르크」차관보는『광주사태에 지나친 신경을 쓴 나머지 좀더 광범위한 의문들에 대한 관심을 소출히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결국 한국 군부의 국보위 설치는 워싱턴 당국의 의표를 찌른 조치였던 것 같다.
  한국정부가 국보위 설치를 공식 발표한 직후인 5월31일(워싱턴 시간), 미국은 국무성 국방성 국가안전보장회의의 한국문제 담당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사태에 대한 비상검토회의를 가졌다. 「흘부르크」차관보 주재 아래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3시간동안이나 계속된 이 회의에서 국보위설치의 배경과 국보위 설치후의 한국정정 변화 및 이에 대한 미국측의 대응책 등에 관해 광범위한 검토가 행해졌으나 최종적인 결론은 얻지 못했으며, 어떤 공개성명도 발표되지 않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한국사태의 진전을 계속 지켜보면서 신중하고 단계적으로 대처한다는 기본방침을 세웠다.
  6월1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의하면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 국무성 관리는, 『장군들이 중심이 되어 설치및 한국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는 군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의 중간조치로 간주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일본 「독매신문」의 워싱턴 특파원은 이날 회의와 관련하여 『미국정부의 일반적인 평가에 의하면 전두환장군 등은 미국이 내세우는 정치적 자유화 요구를 거의 무시하고 있다』면서, 『한국 군인들의 이같은 태도를 독특한 내셔널리즘에 기초를 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미국이 잘못 대응하면 이것이 반미감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6월2일 미국무성도 국보위 설치에 대한 최초의 공식논평을 발표했다. 「레스턴」국무성 대변인은 국보위의 역할에 대해 앞으로 미국정부는 『말이 이니라 금후의 행동을 통하여 평가할 것』이라고 밝힌 다음, 『한국은 광범위한 기반 위에 서는 문민정부 수립을 위해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성명했다.

미국의 「불쾌감」 표시

  이후 워싱턴 당국은 한국 군부의 동향을 살폈다. 약 1주일간의 주시 결과는 문민정부의 수립 가능성은 희박해진 반면 군부의 전면적인 정권장악이 머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5·17조치와 광주사태 및 국보위 설치에 대한 불쾌감의 표시로서 미국은 몇가지의 대응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은 제 2차 한미정책협의회의 개최를 연기시켰다. 한미정책협의회는 양국의 외교·경제정책상에 있어서 이견이 발생하기 전에 정책을 사전 조정하고 양국의 정책 수립과 수행에 도움을 주기 위해 박정권 때인 79년에 발족했으며, 그해 5월, 광주에서 제 1차 회의를 열었었다.제 2차회의는 80년 6월하순경 워싱턴에서 열 예정이었는데, 이 예정이 연기된 것이었다. 6월9일 외무부 당국자는 한미정책협의회 2차회의의 개최예정이 연기됐음을 시인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양국내 사정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미국은 국내적으로 대통령선거와 대외적으로 이란 미 인질사태 및 아프간사태 등에 직면해 있으며, 한국은 국내안정유지가 급선무이므로, 쌍방 모두가 협의회 개최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외교가에서는 한미정책회의 개최 연기가 미국측에 의한 불쾌감 내지는 견제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어 미국은 대한 신규투자를 협의하기 위해  6월초로 계획되어 있던 미국해외민간투자공사 「브루스 르웰린」총재를 단장으로 하는 경제사절단의 한국파견을 무기 연기시켰다. 그리고 인천항만시설을 위한 아시아개발은행의 5천4백만달러의 차관과 국제금융공사의 1천만달러 차관에 대한 표결도 연기시켜 버렸다. 그밖에 2년전에 미국이 약속했던 Fl6전투기의 대한판매 문제를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미국은 한국정부당국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내는 태도를 드러내 보였다. 6월13일 최규하대통령이 개헌과 선거일정 등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을  때 워싱턴 당국은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신감을 표명했다. 「머스키」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최대통령이 밝힌) 그런 유의 정치목표를 말로서 듣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약간 빈정대는 투로 논평한 다음, 「미국은 여태까지도 그러한 공식발표를 몇차례 들어왔으며,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까지는 판단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불신감을 표명했다.
  아마도 「머스키」장관은 국보위가 설치된 마당에 실권을 더욱 상실한 최대통령의 약속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되며 정치일정의 실질내용이 변질되어가고 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의 「딜레머」

  그 당시 외교가에는 한미관계가 긴장상태에 있으며, 한국의 실권자인 전두환장 군과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장군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 하나의 예로서, 전장군이 중앙정보부장서리직을 겸임한 직후에 있었던 한 에피소드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지가 서울발 특전으로 보도까지 했던 그 에피소드의 내용이란 이런 것이었다.
  4월초 전장군이 용산에 있는 미군 골프장에 나타났다. 그런데 스포츠인 골프장 행차에 전장군은 30명의 완전 무장한 경호원을 대동했다는 것이다. 골프는 생전에 박대통령도 좋아하는 편이었으며 그가 골프장에 갈 때는 어머어마한 경비가 베풀어졌었다.
전장군이 박대통령의 전례를 의식적으로 따랐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날 골프장에 나온 「위컴」사령관은 어마어마한 무장 경호원의 대동을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한다. 「선데이 타임즈」에 의하면 「위컴」사령관은 미군기지안에 무장한 호위병을 데리고 오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위컴」사령관은 전 장군이 악수를 청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국측의 불쾌감 표명이나, 견제조치들은 당시 한국정정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충분한 압력수단이 될 수는 없었다. 정세는 군부실권세력이 계획했던대로의 방향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가 출범한 후 국정의 실권은 명실공히 전두환장군이 위원장으로 있는 국보위 상임위원회로 집중되었다. 상임위가 설치되자마자 이 기구는 국정전반에 대해 대대적인 개혁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치거물급 부정축재자들을 색출, 재산을 환수하는 한편 사회정화작업의 일환으로 도합 3천1백여명에 달하는 각급 공무원들을 추방했다.
  폭력사범 공갈사범 사기사범 등 4만6천 여명을 전국에서 적발하여 그중 상당수를 순화교육이라는 이름 아래「인간개조교육」을 실시했다. 당시의 숙정, 정화작업에 대해 항간에서는 「단군이래의 회오리 바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국보위는 이밖에 과외공부 금지, 대학졸업정원제 실시, 대입방식 개혁 등 굵직한 교육개혁 작업도 단행했다.
  국보위가 거창한 개혁작업을 벌이는 동안 청와대와 내각은.한쪽에 저만큼 처져있는 꼴이었다. 국보위 설치령에 의하면 국보위는 대통령의 자문, 보좌기관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대통령은 그 기구의 자문과 보좌를 받는 주체가 아니었다. 거의 모든 작업이 상임위가 중심이 되어 독자적으로 계획하고 추진되었다. 최대통령은 국보위 설치가 발표된 날 의장으로서 첫 회의를 한번 주재했을 뿐, 그후 대통령직을 전두환장군에 물려줄 때까지 국보위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통령의 하야는 국보위가 출범한 시점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는지도 모른다.
  광주사태후 한국의 정치정세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극히 바람직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미국은 초기단계에서 내다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불쾌감의 표현으로서 몇가지의 제재조치를 취했지만, 이같은 조치들이 한국 군부의 의욕을 저하시킬만한 효과적인 압력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미국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점에서 미국은 그 이상의 어떠한 효과적인 정책수단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이란, 아프간에서의 외교적 실패와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둔 국내적 사정 때문에 당시 카터행정부는 한반도에서의 현상유지에 영향을 줄만한 어떤 극적인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국보위 설치후 미국은 한국 군부실권세력이 사실상 완벽한 군사정권 수립을 위해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했지만, 이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한 까닭은,그로 말미암아 야기될지도 모르는 한국 권력내부의 대립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당시 정가에는 80년초 전장군측에 반대하는 일단의 장교들이 거사할 계획을 갖고 이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타진한 바가 있었는데 미국측은 이를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그 무렵 소식통의 관측에 의하면, 미국정부의 분석으로는 전장군세력에 대한 군부내 반감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으며, 만약 미국이 전장군을 공공연히 비판하고 나선다면 이같은 군부내의 반감이 일거에 분출하여 한국 군부가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렇게 될 경우 북한이 어떤 도발 행위를 취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미국은 분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언」에 신중해야』

  이와같은 상황분석과 카터행정부가 처해 있던 내외사정 때문에 미국은 우방동맹국의 하나가 문민정부 수립의 찬스를 놓치고 명백히 군사통치 체제로 역행하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결정적인 손을 쓰지 못한 채 수수방관하고'있었던 것이다.
  카터 행정부가 기껏 공식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코멘트는 『광범한 지지기반을 갖는 정부가 들어서기를 희망한다」는 정도였다. 그나마 이 정도의 반응에 대해서 마저  일부 언론이 반대하는 형편이었다. 이를테면 보수지 「월 스트리트 저널」의 5월 30일자 사설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한국의 군사정권은 학생들의 반항을 봉쇄했지만, 한국정세는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고전적인 딜레머를 제시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에 대한 미국무성의 반응도 고전적인 것으로서, 「폭넓은 기반에 서는 민정수립」을 향해 노력을 베풀도록 장군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좋은 생각이며, 긴 눈으로 보자면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를 안정시키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그렇게 되기를 아무리 바란다 해도 시민의 소란이 있을 때마다 그 기회는 위태롭게 되어간다. 한국의 군정은 18년간 계속되고 있으며, 전두환장군은 권력을 기울여 새로운 군사정권의 지도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우리들은 위기가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에 민정을 요구한 국무성의 타이밍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 까닭의 하나는 국무성 자체가 인정한 것처럼, 이번의 위기가 왜 생겼는가에 관해 뚜렷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은 전두환장춘같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국가를 통치할 것인지 충고할 수 있는 능력은 지니지 못하고 있다.우리들은 보다 자유스러운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월남의 「고 딘 디엠」정권을 타도하도록 승인했다가 그 결과 월남전쟁에 말려들었다. 이란에서는 「팔레비」 국왕에게 민주화를 촉구했다가 이 경우에도 보다 독재적인 이란이 생겨나는 것을 도와주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우리는 조언을 하는데 좀 더 신중해야 한다. 개발도상국은 민주주의 세계로부터 버림받지 않는 한 민주체제를 향하여 나아갈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나라 국민이 판단할 문제』

  이란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 등에서의 거듭되는 실패 끝에 「도덕외교」의 기치를 거둬들이고 「현실인정」으로 돌아선 카터 정부가 한국사태에 대처하여 새로운 대한 정책의 기본 틀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이 6월1일 있었던 CNN방송과의 회견 내용이었다. 워싱턴 지역에 새로 발족한 이 유선TV방송과의 단독회견에서 「카터」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의 전복, 또는 침략으로부터 한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 인권의 준수 및 민주절차의 확립에 전제되는 필수 요건』이라고 말했다. 이날 두 앵커맨의 질문에 대해 「카터」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미국의 대한정책에 영향을 미쳐온 두가지 불변의 고려되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는 외부공격, 주로 북한으로부터의 공격에서 한국을 보호하는 안보문제이고  둘째는 한국에서 인권보호와 함께 민주화발전을 고양하고 민주체제로 이행하는 문제이다.
미국이 대한 안보공약은 확고부동하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제 3국들이 북한으로부터 어떤 잠재적 위협도 면밀히 지켜보고 있으며, 나는 미군과 한국군이 어떤 잠재적 공격이나 한국안보에 대한 위협도 격퇴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의 민주화가 후퇴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알다시피 한국의 전지도자였던 박정희대통령은 많은 훌륭한 일을 했으나, 좀 더 신속히 단행했어야 할 일들을 하지 않음으로써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한국 군부지도자들과 선거를 통해 들어온 민간지도자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민주정부를 발전할 것을 촉구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한국안보에 관한 확신을 분명히 해나가고 있다.
나의 판단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전복과 침략으로부터 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 인권을 존중하고 민주발전을 달성하는데 불가결의 요소라고 본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국내정치과정을 통제할 방법이 없으며 통제를 시도하기 위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 나라 국민들이 판단할 문제다.
한국에는 눈에 띌 정도의 단합이 있다. 민족과 종교적인 배경, 그리고 자유추구와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아내겠다 는 통일된 신념 위에서 대단한 문화성이 눈에 띄고 있다.
나는 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민주적이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의 정부형태가 다른 나라에 의해 모방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남들이 꼭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미국의 우방과 친구들이 우리의 인권기준에 적합치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소련 영향권에 그들을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카터」의 이 회견내용에서는 76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화려하게 휘둘렀던 도덕 인권외교의 깃발이 거의 완벽하게 퇴색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이 단계에서 미국은 한국에서의 민주화 후퇴에 대해 사실상 대응책을 포기했으며, 군부의 집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신호를 내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 . 「글라이스틴」의 「상견례」

  「카터」대통령의 회견이 있은 지 사흘후 인 6월4일 오후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는 정동 미대사관저에서 국보위설치 후 최초로 전두환장군과 만났다. 이 만남은 당시 국내 언론에는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고 외신에도 나가지 않았다. 약 2시간에 걸친 단독 회담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의 주문보다는 전장군의 정치적 포부와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주로 질문했다 한다. 당시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전장군에 대한 「글라이스틴」 박사의 질문이 약 40개 항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명백히 워싱턴 당국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의 새로운 실권자와 미국 현지 대표간의 이 만남은 비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상견례에 해당되는 것이며, 전장군에 대해 미국이 지지의사를 전달해 주는 첫 출발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워싱턴 관리들의 한국 출장이 잦아지고 미국 언론 가운데서 한국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보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6월9일 「애버린 콜버트」 국무성 아시아 태평양담당 부 차관보와 「로버트 리치」 국무성 한국과장이 5·17조치 이후의 한국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내한했다. 같은 날 서울에서 한미경제협의회 제5차 합동회의가 양측대표 1백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한미간의 투자합작과 교역증대 문제에 관해 협의하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은 「월 스트리트 저널」지가 문민정부의 수립을 재촉하는 워싱턴 당국에  대해 비판적인 사설을 실은 데 이어,  6월25일 일간지 「저널 오브 코머스」는 「카터」대통령이 한국의 성급한 민주화를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문제에 관한 카터의 고민」이란 제하와 기고란에서 『「카터」대통령의 재선 참모진은 오는 11월 이전에는 한국에 불안정한 사태가 더 이상 발생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면서, 『「카터」대통령은 한국에서의 불안정을 피하기 위해 한국 지도자들에게 민주화 작업의 가속화를 강요하지 않기로 했으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국은 강력한 지도력 필요』

  미국의 대한시각이 급속도로 현실인정 내지는 호의적인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한편에서, 한국의 권력 내부에서는 통치권 이양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최규하대통령이 그 자리를 전두환장군에 물려주는 작업이었다. 국군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직을 겸직하고 있던 전장군은 7월18일 중정부장서리직을 사임했고, 이어 8월5일 육군대장으로 승진한 다음 8월22일 예편함으로써 대권 취임에 대비했다.
  5·17조치와 광주항쟁 진압, 국보위 설치 이후 전두환장군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의 과정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치밀하게 짜여진 시나리오의 전개였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국보위 상임위를 중심으로 정계 경제계 학원등 사회 각 부문에 걸쳐 대대적인 숙정과 개혁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전장군의 「얼굴익히기」작업이 베풀어졌다. 그는 7월말부터 국보위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지방시찰에 나섰고,「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기도회」같은 모임에 사복으로 참석, 신문과 텔리비전에 그 모습이 크게 등장했다. 8월초부터는 그에 관한 동정과 사진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매스컴에 보도되었다. 8월11일 전장군은 MBC 「경향신문」사장과의 단독인터뷰를 가졌는데, 그 내용은 각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11일 저녁 3개 TV가 동시에 회견 장면을 방영했다.
  이에 앞서 전장군은 미국 「뉴욕 타임즈」와 회견(8월9일자), 대통령직에 강한 의욕을 처음으로 드러내 보였다. 이 회견에서 전장군은 『자신이 국가 원수가 될지 어떨지는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은 지금 강력한 지도력과 군의 지배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불과 10개월 전 박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군부밖에서는 국민이나 국제사회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는 나에 주어진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으며 이제는 공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북한에서는 39세의 김정일이 대두했지만 한국에서는 50대 초반의 새로운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전두환장군에게 대장계급장을 달아주는 것을 사실상 마지막 임무로 최규하대통령은 8월16일 하야했다. 통대회의 등 각계에서 전장군의 대통령 추대 성명이 쏟아져 나온데 이어, 8월21일 국방부는 전군주요지휘관 회의를 열고, 전장군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할 것을 결의했다.
  이날 지휘관회의를 주재한 주영복국방부장관은 『이 역사적 전환점에서 그동안 구국일념으로 탁월한 영도력을 발휘하여 국가 위난을 수습하고 새 시대, 새 역사의 지도자로 국내외에 뚜렷이 부각된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장군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할 것을 전군적 합의로 결의한다」고 선언한 다음, 『오직 이 길만이 우리의 국가목표인 항구적 안전과 보람찬 민주복지국가 건설을 앞당길 수 있는 길임을 확산한다』고 강조했다.
  그 다음날 전장군은 전역식을 가졌고 사흘 후인 8월2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7백37명의 추천으로 11차 대통령에 단독후보로 등록, 8월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 7차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총투표자 2천5백25명중 2천5백24표(무효 1표)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5·17 계엄확대조치로부터 시작하여 전장군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해 일본의 어느 신문은 『그 솜씨가 마치 기습군사작전을 보는 것처럼 교묘하다』고 평했다.

「위컴」의 전장군 지지 발언

  전두환장군의 집권이 카운트 다운 상태에 들어간 8월초부터 미국은 전정권의 탄생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몸짓은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의 공개적인 지지표명이었다.
「위컴」사령관은 8월7일, 8군사령부내의 그의 집무실에 서울에 주재하는 미국기자들을 불러, 「백그라운드 브리핑」(배경설명)회견을 갖고, 『전두환국보위상임위원장이 한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경우, 미국은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천명한다.「위컴」사령관은 자신의 신분을 익명으로해 달라고 부탁, 신문에는 「주한미군의 한 고위당국자」로 보도되었지만,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의 현지 두 대표중 한 사람(또 한 사람은 「글라이스틴」 대사)의 그같은 발언은 사실상 미국정부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만한 일이었다.
  「위컴」사령관은 이 회견에서 전두환장군이 가을쯤에 가서 최규하대통령을 사임시킬 가능성이 크며, 통대회의가 전장군을 잠정 대통령으로 지명할 경우, 미국은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다만 이경우 ①전장군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것 ②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것 ③안전보장이 확보될 것 등이 전제되 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미관계가 한때는 긴장하기도 했으나 최근에 와서 호전됐다고 전제하고, 『전장군은 미국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미국에 호의를 갖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독립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라, 전장군은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자이다. 박정희시대의 초기처럼 그는 독립성을 국민들 앞에 강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위컴」사령관은 또한, 『금년 1월, 전장군에 반대하는 한국군 장교 수명이 우리를 찾아와, 미국이 지지해 주기만 한다면 전장군을 제거하겠다고 제의해 왔으나 우리들은 그들의 계획을 저지시켰다』고 밝히면서, 전장군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은 전쟁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는 불안정재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불과 수개월 전만 해도 전장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위컴」이 전장군 지지를 표명하고 나선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위컴」사령관의 기자회견 내용은 국내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전두환장군의 집권에 대해 미국이 사실상 승인의 도장을 찍은 것과 다름없다는 방향의 보도였다. 그러나 워싱턴 당국의 처음 반응은 약간 미묘했다.  미국무성의 「트래트너」대변인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전두환장군을 새 지도자로 지지한데 대한 국무성의 입장은 무엇이냐는 기자질문을 받고,『한국의 새 지도자를 결정하는 것은 한국 국민들이며 미국정부가 간여할 문제가 아니다. 어떠한 미국의 고위관리도 그런 말을 할 수 없으며 그것이 미국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분히 공식적이고 외교적인 논평이었다. 미국의회에서는 「위컴」장군의 발언이 「정치적」이며, 군인이 할 수 있는 발언의 범위를 넘어섰다는 의견이 대두했다. 이 때문에 한때 의회 청문회에서 말썽이 되기까지 했다. 8월28일 미하원 아시아·태평양소위의 한국문제 청문회에서 「레스터 울프」위원장과 「돈 본커」의원 등은 「위컴」장군의 발언이 『군사령관의 자격을 넘어선 행동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청문회에 참석한 「홀부르크」차관보는, 『한국문제가 정치차원과 안보군사차원에서 함께 고려돼야 하기 때문에 현지 군사령관은 워싱턴의 정책결정에 줄곧 참여해 왔으며, 행정부내 정책입안 팀에도 관여해 왔다』고 「위컴」장군의 입장을 변호했다.
  의회와 언론의 비난에 대한 반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워싱턴 당국은 때마침 귀국중이던 「위컴」사령관의 귀임을 일시 중지시켰다. 「위컴」사령관은 문제의 회견직후 업무협의차 8월9일 귀국, 1주일내에 귀임할 예정이었으나, 하와이에서 귀임연기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이같은 워싱턴당국의 조치는 짐짓 그래보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위컴」사령관의 발언은 결코 워싱턴의 정책에 반하는 발언이 아니며 사견이라고만도 볼 수 없었다. 「위컴」이 전장군 지지 발언을 한 시기는 그가 워싱턴에 2주간 머무르면서 국무성 국방성 백악관의 정책팀과 긴밀한 혐의를 마치고 서울에 귀임한 직후였다. 이런 사실은 의회 청문회에서 「홀부르크」 차관보가 증언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위컴」은 그 당시 미정부정 책을 가장 정확히 대변한 것이었으며 발언의 배경에는 워싱턴 당국의 속셈이 깔려 있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했다. 즉 어차피 전장군의 집권은 시간문제로 굳어져 있으며, 그럴 바에는 워싱턴의 전장군 지지 흔적을 재빨리 기록해 놓자는 속셈이었다.

미국, 전두환체제를 인정

  「위컴」 발언이 워싱턴에서 문제가 됐을 때, 영향력 있는 미국의 학계 ·군부 인사들은 『35년간의 한미관계로 보나 미국의 국가이익으로 보나 우리가 한국의 새 정부 지도자를 지지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당연론을 피력했다. 또 어떤 사람은 좀더 강한 표현으로 『지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한국을 잘 아는 한 퇴역 장성은 △전장군은 스스로가 부패되지 않았다. △광주사태 해결을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으며 미국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희생을 최소화 하는 신중성을 보였다. △부패정치인의 숙정 등 과감한 결단력을 보여 한국국민들의 지지기반을 넓혔다.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면서도 경제정책에는 경제기술 관료들의 의견을 존중, 미국과의 협조에 부심하고 있다. △한때 반미적이라는 일부 평도 있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고박대통령보다도 미국에 대해 훨씬 더 개방적이며 밝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미국이 전장군의 역량을 아주 좋게 평가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정부가 현실문제로서 어쩔 수 없이 전두환체제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정에 대해 8월16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미국정부 당국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카터행정부는 한국 정국의 급변에 심각한 우려감을 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전두환대장이 명실공히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는데 대해 반대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한다.
전장군과 한국군부가 정치권력을 굳히기 위해 취한 억압조치들이, 미국에게 즐거울 리는 없다. 그런데도 워싱턴은 굳이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들이 온건노선을 취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번 군부의 진출에 대해 미국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반대한다고 해서 먹혀 들어갈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워싱턴의 권력이행에 관해 별로 간섭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어차피 헌법 범위안에서 결착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기 때문이다. 전장군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대통령의 후임으로 선출될 것이다. 다른 나라의 합법적 정권교체에 대해 주변에서 떠들 수도 없는 일이다.
  이번 정권교체는 올 일이 빨리 왔을 뿐이다. 실권을 쥔 사람은 전장군이며 따라서 전장군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것이다. 한편 전장군이 명실상부한 권력자가 됐을 경우에도 미국정부의 상층부가 품고 있는 불만이나 우려감을 해소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미정부의 태도를 변하게 하려면 전장군도 온건한  행동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전장군이 온건노선에의 전환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미국에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대해 일부 미정부 고관들은 격노하고 있다. 또 전장군이 국민적 지도자로서 받아들여질 것인지의 여부도 우려되는 점이다. 최근 채택하고 있는 강압방식은 단기적으로는 반대세력을 누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강력하고도 위험한 반응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른다.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최근 한국에서 가진 배경설명 인터뷰에 대해 미정부는 불쾌히 여기고 있기 때문에 「위컴」장군은 노포크에서 열린 사령관회의 후 서울 귀임이 보류된  채 일시 하와이 체재를 명령 받았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귀국해 있던 「글라이스틴」대사가 서울에서 수행할 최초의 임무는 정치자유화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있는 김대중씨의 구명을 미정부를 대표하여 다시금 요청하는 일이 될 것이다』
  8월16일 상오, 최규하대통령은 「예상되었던 대로」 대통령 직을 사임했다. 이날 최대통령은 전국에 중계 방송된 라디오 텔리비전을 통해 『민주국가의 평화적인 정권이양에 있어서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헌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면서 대통령직 하야를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하야가 평화적 정권이양의 선래를 남기게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로부터 11일후인 8월27일 전두환대장은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12·12거사로부터 계산하면 꼭 2백55일만에 대권장악의 일정을 마친 셈이었다.

「권력현실」이 「법적현실」로

  이미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내다보고 있던 미국은 최대통령의 하야와 전장군의 대통령취임에 대해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국무성 대변인은 15일 정오(한국시간 16일 상오 1시)부터 열린 정계기자브리핑에서 최대통령의 사임에 대해 한국정부로부터 사전 통보를 받았음을 시사하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여러 가지 개인신상이나 건강상 이유 또는 법적 필요에 따라 사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무성의 「캐넌」 동북아대변인도 최대통령의 사임이 놀라운 사실이 못된다고 잘라 말했다. 조지 워싱턴 대학의 한 교수는 한국의 권력이동에 관해 『권력의 현실이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치현실」이 되고, 그것이 「법적현실」로 옮아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워싱턴의 일반적인 반응은 한국의 정치변동은 예정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놀라운 일이 못되나,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진전이 좀 빠르다는 것이었다.
  미국무성은 16일 최대통령의 사임에 관해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이번 최대통령의 사임으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발표된 헌법개정과 광범한 기반 위에 서는 정부선출이 방해되지 않기를 희망한다』면서 「차기 한국지도자의 선택은 당연히 한국민이 선택할 일」이라고 논평했다.
  최대통령이 사임한 직후, 정부는 최광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밀리에 미국에 파견했다. 19일 워싱턴에 도착한 최실장의 행각은 일체 극비에 부쳐졌으나, 소식통에 의하면 그는 전두환장군'의 특명을 띠고 왔으며 전장군의 대통령취임에 앞서 미국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게 하기 위해 방미하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마침내 전장군이 11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미국은 이를 축하하고, 전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의 새 정부가 성공적이기를 바란다는 공식 태도를 표명했다. 미국무성 대변인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전두환대통령의 한국정부와 안보, 경제 그밖의 모든 분야에 걸쳐 한미 양국 이익을 위해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논평했다. 「존 트래트너」 대변인은, 그러나 『한국정부가 약속한대로 새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와 새로운 선거가 치러지게 될 것을 기대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민주발전일정을 성공적으로 이룩하는 것이 광범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인기 있는 정치제도를 마련하는데 기초가 될 것으로 믿는다』면서 『미국은 한국정부가 이같은 방향으로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국무성은 통대회의가 전장군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수시간전인 27일 하오 2시(워싱턴 시간), 「로버트리치」 한국과장을 주미한국대사관으로 보내 김용식대사에게 구두로 『전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며 새 정부 장래를 기원한다』고 표명했다. 「리치」과장은 자신의 구두 메시지가 『「머스키」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정부의 의사』임을 부연했다.
  미국은 바로 그날로, 2개월동안 귀국중에 있던 「글라이스틴」대사를 서울로 귀임시켰다. 「글라이스틴」대사는 「카터」대통령이 보내는 친서를 휴대했다. 귀임직후 청와대를 방문. 전대통령에 전달된 이 친서의 내용은 즉각 밝혀지지 않았으나, 대통령 당선축하와 미국의 대한안보공약 및 앞으로의 정치발전을 다짐하고 기대한다는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10·26후 희망과 실망, 우려와 기대, 분노와 현실인정 등으로 점철된 제 5공화국 주도세력과 미국간의 관계는 일단 정상적인 우호관계로 종결되었다. 전두환대통령이 이끄는 새 한국정부는 곧이어 등장한 「레이건」 미행정부와 역대 어느 정권때보다도 가까운 밀월관계를 형성한다. 카터정부로부터 「레이건 」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한미간에 있었던 현안문재는 김대중씨의 구명문제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