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12·12세력과 「광주사태」와 미국
본문
12·12세력과 「광주사태」와 미국
이상우(저널리스트)
광주항쟁의 진압을 딛고 나타난 12·12세력의 집권과정에서 보여준 미국의 대한정책은 민주화보다는 안보에 치중, 반미감정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내친 김에 정권장악(?)
「12·12」군부거사를 주도한 이른바 개혁세력들은 거사 당시 이미 정권을 장악할 스케줄을 세우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거사 당시에는 김재규재판과 관련하여 군부의 정리만을 생각했던 것이 그후의 사태진전에 따라 내친 김에 정권까지 장악하게 된 것일까?
12.12당사자들은 전자의 경우를 부인한다.그때나 지금이나 군부거사를 주도했던 당사자들의 말은 12.12는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연루자(계엄사령관)를 연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총격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계기로 김재규를 비호하는 세력을 정리하고, 그 자리를 메꾸기는 했지만, 거사세력이 그 당시 정권까지를 넘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12·12세력은 거사 후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의 표면무대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다짐했다.「12·12」직후 정승화씨의 후임으로 임명된 이희성계엄사령관은 특별담화를 통해, 『군의 기본 사명은 국토방위에 있으며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의 분야이기 때문에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군은 사심 없이 계엄업무를 수행해 나갈 것이며 조속한 시일내에 계엄목표를 달성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라고 다짐 했다.
주도세력의 리더였던 전두환장군은 자신이 공개적으로는 「12·12」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 발언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비공개 석상에서 정치적 중립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는 「12· 12」직후 주위사람들에게 『군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관여해서도 안된다』면서, 『나 자신은 정치에 취미도 없을 뿐 아니라 정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정치하려 했다면 5·16때 군복을 벗고 나가 무슨 청장이나 하나 하고 끝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2·12」이듬해인 80년 초, 그가 이끄는 보안과 부대 장병들 앞에서 행한 신년 인사말에서도 「12·12」가 자신의 권력쟁취에 있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만일 내가 권력에 목적이 있었다면 지금쯤 청와대에 있지 왜 여기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12·12」 당사자들의 당초 의도나 주장 여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12·l2」세력은 정권을 장악했다. 그 과정은 보기에 따라서는 치밀히 계획된 각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중권력구조」하의 「복면의 기사들」
훗날 노태우씨는 여러 기회에 「12·12」는 쿠데타가 아닌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만일 쿠데타였다면 혁명공약이나 집권 후의 정책같은 것을 들고 나왔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12·12」는 통상적 의미의 쿠데타와는 달랐다. 주도세력은 적어도 형식상 군부의 주도권 장악에만 그쳤으며, 정치는 최규하정부가 담당하고 있었다. 최내각은 「12·12」 이전에 다짐했던 헌법개정, 민주절차에 따른 정부 이양 등 국민과의 약속사항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80년 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학생데모가 격화되고 이른바 3김씨가 서로 다투어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졌기 때문에 「부득이」 군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주도세력측은 설명한다.
그렇다면 「부득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5·17계엄확대조치」 이전까지 군부의 주도세력은 전혀 정치와는 무관한 입장에 있었던 것일까?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12·12」 세력은 「5·17」이전에도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집권을 위한 준비 절차를 단계적으로 밟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계엄령하의 정치상황 자체가 이미 군의 정치적 영향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출범 초부터 스스로를 과도정부로 규정한 최내각은, 시정면에 있어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최내각이 군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독자적인 판단 아래 시정 목표와 스케줄을 추진했다고 믿는 사람은 당시 별로 없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지만, 그당시 최내각은 국정의 중요 방향설정에 관해서 일일이 「계엄당국」의 자문을 받고 있었다. 개헌내용, 개헌일정, 과도정부의 기간 등등에 대해 최내각은 「12·12」세력으로 요약되는 「계엄당국」의 의견에서 거의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형편에 있었다.
미국은 당시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그때의 한국 권력상황을 가리켜, 「최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형식적 정부와 전장군을 정점으로 하는 실재적인 권력』으로 성립된 「2중권력구조」(dual authority structure)라고 지칭했다. 국내의 어느 정치인은 실제적 권력의 핵심인물을 「복면의 기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커튼 뒤에 도사리고 있던 「실제적 권력」은 「5· l7」을 계기로 정치의 전면무대에 나서게 되지만, 그보다 앞서 이미 무대등장의 몸짓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뚜렷한 움직임은 전두환장군의 중앙정보부장서리직 취임이었다.
『전합동수사본부장 급부상』
전소장(당시)이 국민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0·26」직후부터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 전두환소장의 성명 3자는 전혀 낯선 이름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소장은 그가 이끌고 있던 보안사가 계엄업무의 핵심과제 중 하나였던 「10·26」의 뒷처리와 관련하여 막강한 권력실체로 등장하게 되자 이와 함께 급속히 부상한 사람이었다.
그가 국민 앞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은 「10·26」이틀 후인 79년 10월28일 이었다. 그날 전소장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의 자격으로 박대통령 살해사건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섰다. 바로 그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천하를 주름잡던 김재규 차지철 등을 일거에 몰아세운 전소장의 발표 모습에서 이미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을 감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로부터 9일후인 11월 6일, 전소장은 다시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 앞에 나타나 「IO·26」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박대통령 살해사건의 수사과정을 통하여 전두환장군은 당시 이 나라의 어떤 사람보다도 우월한 실질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와 그의 보안사 조직은 김재규 체포에 이어 김규원 전청와대비서실장을 연행 구속했고,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대장을 신문했다. 청와대 경호실 차장이던 이재전중장을 구속했는가 하면 중앙정보부 간부 수십명을 연행 조사했다.
그 무렵 외신에서는 전장군의 부상을 재빨리 보도했다. 이를테면 「10·26」이 있은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은 79년 11월2일자 일본 「산께이신문」은 「전합동수사 본부장 급부상」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박대통령 사살사건 후 한국 정세는 여전히 혼미를 거듭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서 전두환 계엄사령부합동수사본부장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전두환 본부장은 현재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군부내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거의 굳어가고 있다.…… 그의 권력기반은 국군보안사령부를 장악하고 있는 데 있다. 전사령관은 이 강력한 조직의 대표자로서, 사살사건으로 권위가 흔들리고 있는 KCIA에 대신하여 부상한 것인데, 김재규 전 KCIA부장을 재빨리 무장해제시키는 등 그의 기민한 행동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 노재현국방부장관과 정승화계엄사령관이 군부의 실력자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사령관은 사건 당시의 행동에 불투명한 점이 많아 의혹을 받고 있다.노국방장관은 조직 상으로는 전사령관의 상사이지만 사살 사건후에는 전사령관의 활발한 활약에 비해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고 있다』
민· 군의 정보기관 장악
박대통령 살해사건 수사라는 대의명분아래 전장군과 휘하의 보안사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를 주름잡던 막강한 실력자들과 청와대, 중앙정보부 등 실권 조직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그리고 군 정에 걸친 국가대권을 향한 사실상의 결전인 「12·l2」에서 승리함으로써,당초의 의도 여하에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제5공화국에의 길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소장은 80년 3월 중장으로 진급했고 다시 그해 8월 대장으로 승진했다.그에 앞서 전중장은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게 되었는데, 이는 「12·l2」 세력의 대권행진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계기였다.
그가 정보 ·수사에 걸쳐 국내 ·국외에 방대한 조직력을 갖고 막강한 영향력을 끼쳐왔던 중앙정보부 책임자 자리에 취임한 것은 80년 4월14일이었다. 이날 그는 현역 육군 중장으로서 국군보안사령관이라는 위치와 함께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 하는 임명장을 최규하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정보부장 자리는 김재규가 체포되고,「12·12」다음날인 12월13일,당시 부장서리이던 이회성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전임된 이래 4개월간 공석중이었다. 당시 당국자는 그토록 상당 기간 동안 정보부장 임명을 보류해 온 이유에 관해, 『박대통령을 시해한 사람이 정보부의 부장이었다는 점에서 도의적으로 중앙정보부에 책임과 반성의 여지가 없지 않았다고 판단, 그 기관의 책임자 임명을 상당 기간 보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적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12·l2」 세력은 거사성공 직후 곧바로 군부요직을 장악했고, 김재규의 후임 정보부장자리에도 주도세력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차규헌장군(당시 수도군단장)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 인사에 대해 미국측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12-12j성공 후 전격적으로 단행한 군부 개편에 대해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던 미국측은 막강한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거사주체이며 현역인 사람을 임명한 데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차장군의 정보부장 취임은 유산되고 말았으며, 그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인 채로 남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전두환장군이 정보부장직에 취임하게 된 것인데, 이때도 미국측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핵심적인 문제점은 현역 장성인 보안사령관인 정보부장직을 겸임함으로써 모든 실권이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는 우려감 이었다. 전장군의 정보부장 취임 이튿날인 4월15일자 「뉴욕 타임즈」는 장문의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직에 군 장성이 취임』이라는 제목으로 비판적인 시각의 글을 내보냈다.
「뉴욕타임즈」지는 『한국의 정보부장직은 보통 민간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전장군 임명소식이 한국 국민에게 놀라움을 주었다』고 말하고, 『군정보기관인 국군보안사령관이 정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장직까지 맡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지적, 『전장군이 두 개의 정보기관을 동시에 관장하게 됨으로써 최고실력자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그의 지위는 강화되었다』고 논평했다.
전장군의 겸직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비록 공개적으로 거론은 못했지만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권력집중에 대한 우려와 함께, 현역인 보안사령관직과의 겸직이 중앙정보부법 제7조 『부장 ·차장 및 기획조정관은 일체 타직을 겸할 수 없다』는 규정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지적 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청와대 당국자는, 『현역 군인인 보안사령관을 정보부장에 겸임시킨 것은 계엄하에서 군이 보안업무를 조정하고 있어 정보부의 기능에 비추어서 겸무토록 하는 것이 업무의 조정과 효과를 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한편, 정보부법 규정 위반 여부에 관해서는, 『신임 전두환정보부장서리는 「부장」이 아니고 「서리」이기 때문에 보안사령관 겸직이 가능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미국측의 반발과 우려
전두환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에 대한 미국측의 반발은 당시 정가와 언론계에 파다하게 소문나 있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한국의 정치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이 인사발령에 대해 미국은 전혀 사전 협의나 통고를 받지 못했다. 물론 국내 인사문제에 대해 한국정부가 미리 미국측과 어떤 협의를 하거나 사전 예고를 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그때까지의 경위로 보아 전장군의 거취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예고해줄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전장군의 인사발표가 있기 20분 전에야 그 사실을 미국측에 통고해 주었다.
문제는 얼마나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사전 통고해주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장군의 정보부장 겸직발령 통고를 받고 미국이 충격을 받은 것은, 「10·26」과 「12·12」이후 한국의 정치발전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품어오던 우려감이 현실문제로 클로즈업되고 있음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인사발표가 있은 지 4일후인 4월18일 「월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는 청와대로 최규하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때 무엇이 논의했는지에 관해서는 일체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담 자체에 대해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며칠 후 외교가 소식통으로부터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때 「글라이스틴」대사는 그해 여름 로스엔젤레스에서 개최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한 ·미 연례안보협의회의 무기연기를 통고했다.
연기 이유에 관해서 「글라이스틴」대사는 『최근의 정세와 관련하여』라고 간단히 표현했으나, 그것이 전장군의 겸직발령을 뜻하고 있었음은 명백했다. 당시 일부 외신은, 한 ·미 안보헙의회의 무기연기를 미국측이 통고한 것은 「군의 진출에 대한 압력」이며, 「민주화가 지연되고 있는 데 대한 강한 우려감의 표현」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측의 불만은 얼마 후 좀더 직선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5월1일, 워싱턴에서는 「카터」대통령과 「오히라」 수상간에 미 · 일 수뇌회담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한국 정세를 논의하는 가운데 「카터」대통령은 한국 군부의 동향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에 관해 5월5일자 일본 「조일신문」은 1면 톱기사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카터」 미 대통령은 지난 1일 워싱턴에서 열린 일 ·미 수뇌회담에서 박정권 붕괴후의 동향에 관해 「한 사람이 군 ·정보 ·보안의 각 분야를 한손에 장악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는 태도를 표명했다. 「한 사람」이란, 지난 4월 한국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지칭한 것으로 보여진다. 미국으로서는, 최규하 정부 아래서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민주화에 군부가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지 않을 것인가고 심각히 우려하고 있음을 표명한 것으로 보여진다. 「카터」대통령이 이런 유의 수뇌회담에서 일국의 군부 지도자를 구체적으로 전제하며 발언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같은 사실은 수뇌회담에 동석한 복수의 사람들이 밝힌 것인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카터」대통령의 발언을 「한국군부, 특히 전두환보안사령관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보부장 겸직을 통한 전두환장군의 대두에 대해서는 국내 정가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정국은 이른바 「3김씨」가 바야흐로 「80년의 봄」을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안개정국」이라는 표현처럼 불투명한 요인들이 속출하고 있었으나 3김씨들은 저마다 대권에의 꿈을 안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이럴 때 전장군의 겸직 등장은 정국의 앞날과 관련하여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야당인 신민당 소속 의원들은 『이번 정부가 취한 조치는 앞으로 정국추이에 새로운 변수 역할을 할지 모르며 어쩌면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현상이 노정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박대통령 사망 후 사실상 야당으로 전락하여 김종필씨를 중심으로 당세를 가다듬고 있던 공화당도 전장군의 부상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공화당은 그때까지 대권을 향해 움직이고 있던 김종필 총재가 「정치과열을 선도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예정돼 있던 각도 지구당 순시계획을 중단시키기까지 했다.
사실로 나타난 소문
당시 항간에는 각종 루머가 난비했다.개헌과 민주화 일정에 관한 최규하정부의 거듭된 다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군부 등장과 헌정 중단설을 거론하고 있었다. 정가와 외교가에 나돌고 있던 이야기들은 전두환장군을 비롯한 「12 ·12」세력이 「80년 봄」의 초기 단계에 이미 국회해산과 기성정치인의 거세계획을 세우고 이를 미국측에 간접적으로 타진했다는 것이다.
당시 돌아다니고 있던 소문에 의하면「12 · 12」세력의 계획은 헌정중단과 함께 김대중씨의 체포, 김종필씨의 추방, 부패정치인의 숙청, 신당 창당이나 공화당 기반을 이용한 정계 진출이라는 시나리오로 작성되어 있다고 알려겼다. 다만 미국측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12 · l2」세력의 정국장악은 상당기간 견제받고 있었다는 것이 당시 외교가 일각에서 이야기되고 있던 내막소식이었다.
이러한 소문들에 대해 정부와 계엄당국은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두환장군 자신이 명백히 이를 부인했다. 전장군은 4월28일, 정보부장 겸직 후 처음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본인이 양대 정보기구를 장악함에 따라 정치발전에 차질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부 억측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하며, 오히려 내외의 난관을 극복하는 데 긍정적 기여를 함으로써 정치발전을 촉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겸직에 대하여 『항간에서는 구구한 억측과 낭설이 나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정치발전 일정에 대해서는 이미 정부에서 누누히 밝힌바 있고 개헌안 역시 정부와 국회가 계획대로 추진하고 있는데 어떻게 차질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본인은 본인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것이 오히려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차질을 초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달도 안되어 헌정이 중단되고, 대권을 향해 뛰고 있던 정치인들이 체포 혹은 숙청되는 등 소문대로의 상황이 벌어진다.
「5·l7」 비상계엄령 확대실시
80년 5월17일, 최규하대통령은 이날밤 24시를 기해 전국일원에 비상계엄령확대실시를 선포했다. 곧이어 이희성계엄사령관은 18일 새벽 1시를 기해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집회 및 시위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에 대한 사전검열, 전문대학을 포함한 각 대학의 휴교, 정당한 이유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의 금지를 선포했다.
최 대통령은 특별성 명을 통해 계엄확대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계속되는 사회혼란을 이용한 북한 공산집단의 대남적화책동이 날로 격증되고 우리 사회 혼란을 목적으로 한 무장간첩의 계속적인 침투가 예상되고 있다. 그들은 우리 학원의 소요사태 등을 고무 ·찬양 ·선동함으로써 남침의 결정적인 시기조성을 획책하고 있다. 이같은 중대한 시기에 일부 정치인 학생 및 근로자의 무책임한 경거망동은 이 사회를 혼란과 무질서, 선동과 파괴가 난무하는 무법지대로 만들고 있으며,설상가상으로 사회혼란의 여파는 수출부진과 경기침체를 심화시키면서 노사분규와 실업이 증가함으로써 사회불안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어 문자 그대로 우리 국가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계엄하에서 학원소요가 진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현실 정치문제에 깊이 관여하면서 교외소요로 과열 폭력화 되어감으로써 극심한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국방 및 치안력의 투입을 강요하는 사태로 발전되어 막대한 국력의 소모를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질서 회복에 앞장서야 할 지도급 정치인이 정부의 안정유지 노력을 외면하고 오히려 사회 불안을 선동 자극함으로써 소요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된다면 우리의 국기마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우려가 없지 않다. 이에 정부는 국가를 보위하고 3천7백만 국민의 생존권을 바라고 있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여 일대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요컨대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의 경거망동으로 국기마저 흔들릴 우려가 있어, 국가보위를 위해 계엄확대조치를 취했다는 배경설명이었다.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는 유신 이래 정부가 정치적 강경수단을 동원할 때마다 들먹인 책임전가의 대상이었다. 그 말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동원된 것이었다.
따라서 80년 봄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5 · 17조치를 필요로 할 만한 객관적 이유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5·17」조치, 과연 필요했나
먼저 「일부 정치인」의 경우를 보자. 확실히 80년 봄은 「정치만개」의 계절이었다. 국민들은 민주화에의 기대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고, 정치인들은 대권을 향해 일제히 뛰기 시작했었다. 유신체제하 거의 I0년 가까이 정치는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80년 봄의 정치상황은 더욱 대조적으로 활기있게 보였다. 가라앉은 정치에 오랫동안 익숙해 온 집권세력의 눈에는 갑작스러운 정치활동이 위험스러운 것으로 비칠만도 했다.
더우기 대권레이스를 벌이고 있던 이른바 3김씨 가운데는 80년 봄의 실권세력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점찍힌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의 정치상황은 활성에도 불구하고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권세력은 민주정치의 기본적 양상인 경쟁 자체를, 혼란스럽고, 따라서 북괴에 틈을 주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훗날 자신들의 대권경쟁이 5 · 17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3김씨는 이렇게 반박했다.
김영삼 -『우리들의 지나친 경쟁이 5 · 17의 구실이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경쟁인데 좀 떠들기도 해야 한다. 우리가 경쟁하면 안정이 파괴되는 것처럼 국민들은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구실일 뿐 그들은 이미 12 · 12사태를 통해 정권획득 준비를 갖췄다』
김대중 -「5 · 17이전까지 세 김씨가 등장하니 모두 서울의 봄이라고 해서 환영했다. 열사람만 모여도 모의투표를 하고 그랬다. 그냥 그대로 놔뒀더라면 세사람 중 하나는 대통령이 되고 둘은 야당이 됐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 나쁜가. 세 사람이 싸웠다고 사태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학생 데모는 12 · 12사태의 주도세력이 정권을 탈취하려 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지 우리 때문이 아니었다」
김종필씨 -『그들(12 12세력)은 미리 집권시나리오를 짜놓고 5 · 17조치를 취했다. 그것을 정치인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노동쟁의와 학생시위의 실상
5 17의 당위성과 관련하여 다음으로 검증되어야 할 것은 노동쟁의이다. 10 ·26은 사회 각 부문에 자유화의 열기를 불어 넣었으며, 노동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어느 사회분야보다도 자율과 민주화에의 몸부림이 강하게 드러난 곳이 노동계였다. 그것은 유신체제하에서 노동계가 가장 심하게 권력의 규제를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70년대를 통해 민주화운동의 주역 가운데 하나로 성장해온 노동계는 10 · 26을 계기로 욕구분출의 돌파구를 찾았다. 당국의 집계에 의하면 80년 들어서부터 그 해 4월까지 발생한 집단노사분규는 7백20여건이었는데, 이는 79년 같은 기간의 7배에 해당하는 건수였다. 적어도 수자만으로 보자면 「노사분규의 폭발」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권력의 통제로 인하여 불만이 있으면서도 아무 소리 못하고 숨죽여 지냈기 때문에 분쟁이 표면화되지 않았던 70년대보다 80년의 노사분쟁 양상이 오히려 정상이었다고 말할 만했다.
분쟁의 발생 원인을 보면, 80년 봄 당시의 노사분규는 굳이 10.26과 관련하지 않더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분규건수의 75%에 해당하는 5백30여건이 체불임금 지급요구에서 비롯했고, 휴 ·폐업반대가 25건이었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한 몸부림이 분규로 나타난 수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밖에 어용노조 개편을 요구하는 등의 노조관계 분규가 33건, 임금인상 요구는 26건이었다.
분규의 형태도 과격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작업거부가 19건, 농성사태로 번진 것이 19건, 시위는 9건에 지나지 않았고, 6백70여건에 아르는 태반의 분규가 진정, 혹은 간단한 항의 정도였다. 이들 분규의 대부분은 노사간의 자체 조정이나 노동청, 혹은 시 ·도의 조정을 통해 해결됐다.
단 하나, 예외적인 과격 분규가 있었다. 4월25일에 있었던 사북탄광촌의 유혈사태였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소재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 수백명이 임금소폭인상과 어용노조에 불만, 사흘 동안 사실상 사북읍을 점거하고 폭력 행위를 벌여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여러 사람이 부상한 불상사였다. 이 사건은 저임금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유신체제하에서 일반화되었던 어용노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함으로써 터진 결과였다.
한때 무법사태를 야기하기는 했지만 사복분규는 노사간의 합의에 의해 자율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과격한 노사 분규는 5 · 17때까지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사북사건은 80년 봄 노사분규의 유일한 특이상황이었으며, 결코 노동쟁의의 일반 패턴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학원사태를 검증해본다. 학원가의 동향이 10· 26 후, 특히 80년봄의 정국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하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10 · 26 후 일부 대학교에서 학원자율화 문제를 거론하면서 학생들이 집단 행동을 취하려는 움직임이 대두하였으나, 이는 곧 이어 시작된 겨울방학으로 잠잠해졌다. 그러다가 80년 봄학기 시작과 더불어 학원가의 움직임은 아연 활발 해졌다.
처음 대학생들의 이슈는 어용교수 퇴진, 학교재단운영문제, 입영집채교육반대 등 학내문제였다. 특히 입영훈련 반대는 정부측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고, 최규하대통령은 담화를 발표하면서까지 학생운동에 제동을 걸려고 했다.
학원가의 쟁점은 5월에 들어서자마자 급속히 학교 밖 정치문제로 확산되어갔다. 그 핵심은 계엄령 철폐, 정부주도하의 개헌반대, 2원집정부제 구상.반대, 유신잔여세력 퇴진 등이었다.
학생시위는 5월13일부터 15일까지의 사흘동안 절정을 이루었다. 13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집결한 수천명의 학생들은 「계엄철폐」 「전두환세력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일대를 데모행진했다. 10.26 후 최대규모의 조직적인 가두시위였으며, 12.12세력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인 성토였다. 이튿날인 14 일 학생데모의 규모는 더욱 커져 서울시내 20개 대학의 수만명이 광화문과 안국동, 종로 일대에서 격렬한 데모를 벌여 경찰과 충돌했다.
광화문 네거리를 중심으로 반경 약 1km의 서울 중심부는 이날 오후 6시경부터 밤10시30분께까지 대학생들과 기동경찰간에 쫓고 쫓기며 다시 집결하는 혼란이 되풀이되었다. 이날 지방에서도 경북대 전남대 전북대 강원대 아주공대 부산대 계명대 충북대 청주대 등 15개 대학이 시위를 벌였다.
3일째가 되는 15일에는 서울역 앞 광장에 서울시내 35개 대학에서 10만명 가까운 대학생이 집결, 학생데모의 피크를 이루었다. 이날 데모에서 경찰과의 충돌로 인하여 1명의 전경대원이 사망하고,수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80년 봄의 실권세력이 학생데모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학생들의 조직적인 힘과 열기 그리고 서슴없이 표현하는 12·12에 대한 규탄은 당시 실권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섬뜩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학생운동의 과정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고,행동에 자제력이 따랐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학생들은 그들의 시위행동과 정치적 주장을 이렇게 정당화했다. 『우리 학생들은 대단수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참된 정치민주화가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한다. 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던 구체제가 일단 무너진 마당에 그 잔재를 말끔히 씻고 민중의 뜻이 통하는 개헌-선거-정권이양을 조속히 실현하는 것이 정차민주화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체제의 정치질서를 그대로 끌고 가려는 집단이 기득권을 바탕으로 아무런 반성의 기색도 없이 새로운 역사의 장에 끼어 들려는 본색을 이미. 드러냈다‥‥‥」(5월3일 서울대 학생총회에서)
『우리는 현하 학원의 민주화투쟁이 사회일각의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성급한 판단과 단순한 열기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며, 냉철한 역사의식과 철저한 사회의식에 입각한 민족적 애국심적 발로임을 천명한다. 박정권의 비호하에 있었던 유신잔당들은 명분없는 비상계엄의 존속과 관제언론의 호도를 이용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모든 학원의 민주화운동은 민족통일과 민족의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역사적,민족적 사명의 표현이다』(5월 14일 고려대학교 학생일동의 성명)
『박정희독재정권은 무너졌다. 우리나라가 또다른 독재정권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민은 저희들과 함께 애써 달라』(5월15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성명)
「데모 중지하자」는 학생들 연행
학생들은 데모를 하면서도 국민들이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끊임없이 가늠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군부의 반격을 초래하지나 않을까 주의하면서 자제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사흘간의 대규모시위를 벌인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 각 대학 총학생회장단을 16일 상오 고려대 도서관에서 회의를 열고 그간의 데모를 평가한 끝에 16일에는 가두시위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27개 대학 학생회장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었고, 데모로 말미암아 서민경제에 지장을 주고, 안보적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 앞으로 정상수업을 받으며 사태를 관망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거의 모든 대학이 16일부터는 정상수업에 들어갔다.
이날 저녁 6시부터는 전국 56개 대학학생회장단이 다시 이화여대에 모여 당분간 가두시위를 벌이지 않는다는 결의를 재확인했다. 학생회장단회의는 16일 하오 6시부터 이튿날인 17일까지 철야로 24시간 계속되었는데, 시위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을 작성하려는 찰나 갑자기 경찰기동대가 회의장을 덮쳐 대부분의 학생들을 연행해 갔다. 계엄령 확대 선포를 하기 수시간 전인 17일 저녁 6시경이었다.
그때 당국이 왜 학생회장단 회의장을 덮쳤는지는 지금도 하나의 의문으로 남아 있다. 데모를 모의하는 자리였다면 모르지만 그와는 반대로 데모를 하지 말자는 결의를 하고 있던 자리를 방해한 일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철야로 계속된 회의장밖에는 사복 요원들이 지키고 있어,회의의 분위기나 내용은 수시로 파악되고 있었다. 따라서 학생들이 데모중지를 협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벌써부터 알려지고 있던 터였다. 그 결의를 성명으로 작성하려는 찰나에 이를 무산시켰고, 그 몇시간 후에 전국계엄령이 선포된 사실과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의혹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5·17조치와 관련된 의문은 이밖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우선 최규하대통령의 중동방문이었다. 최대통령은 5·17일 주일 전이며 정국이 가파르게 치닫고 있던 5월10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순방길에 올랐다. 이 여행은 박대통령 때부터 약속됐던 것이었다. 박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79년 12월 6일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같은 약속과 함께 원유의 안정적 장기공급을 확보하고 오일달러로 부호국이 된 이들 나라의 경제건설에 한국의 참여폭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어차피 국가원수가 중동여행을 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당시 사우디에 진출해 있는 모건설회사가 잘못된 로비활동을 벌이는 바람에 외교상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도 최대통령의 중동방문은 필요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국내적으로 그토록 결정적인 시기에 국가원수를 해외여행길을 떠난다는 것은 얼핏 납득이 안 가는 데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최대통령의 중동여행은 중단하거나 연기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최대통령의 측근 가운데서도 그렇게 건의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최대통령은 떠났다. 대통령 부재중에는 계엄당국쪽에서 가능한 한 군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는 것이었고, 여행중 수시로 연락할 수 있도록 「핫 라인」을 설치 했다. 그러나 이런 다짐이나 시설은 별 의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최대통령이 없는 동안 정국은 고비를 치닫고 있었으며, 군부의 실권세력은 이에 대처하는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 부재중의 「시국문제회의」
최대통령의 부재중, 형식상의 최고 통치권자는 신현확국무총리였다. 12·12주역들과 비교적 뜻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신총리는, 학생 데모가 절정에 이르고, 김영삼 · 김대중씨 등 야권의 리더들이 비상계엄령 즉각해제, 정부개헌구상의 철회, 민주정부의 연내수립 등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를 한층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시국문제회의를 주재, 강경책의 발동여부를 검토했다. 이 시국대책회의에는 김종환내무장관, 주영복국방장관과 전두환국군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이 참석했다.
5월15일, 신총리는 「시국에 대한 담화」를 발표, 『학생시위로 조성된 사회불안을 하루 빨리 해소하여 사회안정을 되찾기 위해 국민과 학부모들의 따뜻한 협조와 학생들의 자숙 ·자제를 다시 한 번 간절히 호소한다』고 말한 다음, 『학생들이 사회를 불안에 떨게 하는 질서파괴 행동을 계속한다면 언제까지나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그 무렵 정가에는, 군의 출동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그럴 경우 실권 세력은비상계엄을 강화하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함으로써 헌정을 중단시킨 가운데 개헌과 새 정부 수립을 계엄하에서 주관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나돌았다.
17일 오전 9시, 각 군에서는 주요 지휘관회의를 열어 정국에 대응한 단호한 조치의 필요성을 결의했다. 이어 오전 11시, 국방장관 주재로 전군지휘관회의를 열고, 4시간의 토의 끝에 군의 투입과 지역계엄을 전국비상계엄으로 전환시켜「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할 것을 만장일치로 합의 」했다.
군부의 이같은 결정이 있은지 몇시간 전 최규하대통령은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했다. 최대통령은 귀국 즉시 시국대책회의를 열고 보고를 들었다. 신현확총리를 비롯, 전두환중앙정보부장서리와 국방, 내무장관, 계엄사령관 등이 참석한 이날 시국대책회의에서 군부의 강경책이 건의되었으나 최종 결정은 내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통령은 이튿날인 17일 아침부터 청와대에서 측근들과 회의를 여는 한편 그 사이사이에 신총리의 방문을 세차례나 받고 요담했다.
최대통령은 가능한 한 헌정중단과 같은 강경수단은 피하려 했다고 한다. 그때문에 마지막까지도 자신이 직접 3김씨와 개별적으로 만나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그가 없는 동안에 강경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17일 상오 최대통령은 결국 계엄확대 조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밤 9시30분, 총리 주재하에 열린 긴급국무회의는, 이미 출동한 무장계엄군이 중앙청 주변을 에워싼 가운데 비상계엄령의 전국확대실시를 선포하기로 의결했다.
북한의 도발 가능했나
5 · 17조치와 관련하여 또 하나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점은, 그 무렵 북괴가 한국의 국내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떤 위협적인 움직임을 취했느냐 하는 점이다. 정국이 심상찮은 분위기로 치닫고 있던 5월12일 밤, 수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공공기관과 신문사 ·방송국에 계엄군이 갑자기 증강 배치된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그날 밤 12시 넘어 무장군인을 만재한 트럭과 장갑차가 시 중심부를 질주했으며, 정부종합청사, 신문사 방송국 등의 건물에 중무장한 계엄군이 배치됐다. 이같은 경계태세는 북괴가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에 근거한 것으로, 12일 낮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에서 주영복국방장관과 전두환 정보부장서리에 의해 보고 됐다. 보고 내용은 국민에게 불안감을 준다는 이유 때문에 발표되지 않았으나, 당시 관계 소식으로부터 알려진 바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① 휴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북괴 특수부대 124군단의 2개여단병력, 약 6천명이 갑자기 행방을 감추었는데, 이들은 15일부터 20일 사이에 30인승 글라이더 2백 35대에 분승하여 한국의 후방지역에 침투한다는 유력한 정보를 입수했다.
② 황해도 해주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북괴 제8군단의 행방이 최근 수일간 파악되지 않고 있다.
③휴전선 일대에 최근 북괴 인민군 11개 사단이 추가로 증강 배치되었다.
임시국무회의에 보고된 이같은 내용의 정보를 당국은 일본 방위청과 내각조정실로부터 통보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다만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당시 미국정부가 한국측의 북괴침공설을 즉각 부인하고 나선 점이었다.
즉, 미국무성은 13일 성명을 통해,『미국측의 정보로는 북한 내에 별다른 부대이동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한국에 대해 어떤 류의 공격이 절박해 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도 언다」고 단언했다. 보통 동맹국에 의한 이같은 정보가 미국의 견해와 다를 경우, 미국은 논평을 하지 않거나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공식 성명을 통해 즉각 부인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국은 그후로도 거듭해서 한국측이 주장하는 북괴의 위협설을 부인했다. 19일 국무성의 「호딩 카터」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한국에 대한 외부의 어떤 위협조짐을 발견했는가』라는 기자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이 순간에 북한군의 어떠한 비정상적인 이동조짐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북한이 즉각적인 남침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사흘후인 22일 「카터」대변인은 성명을 발표, 『미국은 한국의 불안한 정정을 이용하려는 북한측의 어떠한 기도에 대해서도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말하면서,『1주일 전 한국에서 반정부데모가 발생한 이래, 북한군이 어떠한 비정상적인 군의 이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갖고 있지 않다』고 또다시 부인했다.
아마도 미국은 한국 군부가 「북안에 의한 위협정보」를 강경책의 구실로 삼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미리 쐐기를 막기 위해 거듭해서 부인성명을 낸 것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80년의 봄」을 잠재운 「5·l7」
80년 봄, 안개정국속에서 끊임없이 우려되어 왔던 사태의 轉變은 「5 · 17」이라는 최악의 조치로 현실화되었다. 헌정중단이라는 강경책을 선포하고 나선 계엄당국은 곧 바로 대대전인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3김씨 가운데 실권세력으로부터 가장 위험시되고 있던 김대중씨는 그날 밤 계엄령 전국확대조치가 국무회의에서 정식으로 의결되기 수시간 전 동교동 자택에 들이닥친 무장 계엄군에 의해 체포당했다. 또 거의 같은 시간 문익환 예춘호 김동길 고흔 이영호씨 등, 70년대 이래 반체제운동에 전념해 온 재야인사들도 사회혼란 조성 및 학생 노동자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로 계엄당국에 연행되었다.
대권경쟁에 나섰던 또다른 김씨들인 김종필씨는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되었고, 김영삼씨는 자택에 연금당했다가 결국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는 성명을 발표케 되었다. 이렇게 해서 10.26후 부풀었던 민주화에의 기대는 송두리채 무산되고 정치적 엄동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몸을 도사렸다. 그 누구도 속에 맺힌 회한과 울분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다.이럴 때 5·17조치에 불만을 표하고 나선 것이 미국이었다. 5·17다음날 미국무성은 한국정부당국의 조치에 우려를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한국전역에 대학교의 휴교, 그리고 정치지도자와 학생지도자들의 구속을 수반하는 계엄령 확대조치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정치자유화를 향한 전진은 법의 존중과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정부가 현재 취하고 있는 행동이 한국문체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염려한다. 우리는 우리의 진지한 관심을 한국지도자들에게 분명히 전해왔고, 최규하대통령이 일찌기 밝힌 대로, 헌법개정과 폭넓은 기반위에서는 민간정부선거를 위한 전진이 즉각 계속되어야 할 것이라는 우리의 신념을 강조해 왔다.
우리는 한국사회의 모든 구성 원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맞아 자제심을 갖고 행동하길 촉구한다. 79년 10월26일에 확인했던 것처럼 미국정부는 한국 정세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조약상의 의무에 따라 강력히 대응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우방인 일본도 공식성명 발표는 유보했으나 한국의 계엄확대조치에 우려하는 태도를 명백히 했다. 18일 「이토」관방장관은, 5·17조치는 『한국민의 의식의 문제이며 양식에 기대한다』고 말하면서, 『민주화의 싹이 꺽이지 않도록 지컸보겠다』고 논평했다. 이날 일본 외무성 당국자는 한국의 계엄령확대조치가 『현재 한국의 정부 및 군부의 의향에 반대하는 세력을 봉쇄하여 정치체제의 재정립을 꾀하려는 군부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말하고, 박대통령 암살사건 후의 민주화 노선을 대폭 후퇴시킬 것이 틀림없으며, 정부와 군부는 계속해서 새로운 조치들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 보았다.
『현재 사태를 검토중』
한국의 5·17조치에 대해 미국은 사전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 임시국무회의가 열리기 30분 전에야 주한미대사관을 통해 그같은 사실을 보고 받았을 뿐이었다. 때마침 주말을 맞이하고 있던 워싱턴의 국무성 한국데스크는 서울로부터의 긴급전문에 접하여 주말계획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정보정리와 사태분석 및 앞으로의 대응책에 관해 검토했으나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러스 밴스」의 뒤를 이어 국무성의 총책임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에드먼드 머스키」 장관은 그때 소련의 「그로미코」외상과 아프가니스탄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빈에 가 있었다.
서울에서 5·17조치가 선포된 직후, 기자들의 논평요구에 대해 국무성 대변인은 『현재 사태를 검토중』이라는 이유로 코멘트를 회피했다. 30시간 이상이 지난 18일(워싱턴 시간)에야 「우려를 표명한다」는 논평을 가했는데, 이것도 한국과 일본 특파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나온 것이었다. 국무성 대변인의 정식논평은 이틀이 지난 19일에야 나왔다. 그동안 국방성이나 백악관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빈에서 돌아온 「머스키」 국무장관은 20일 처음으로 공식기자회견석상에서 한국사태에 관해 발언했다. 이때도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야기했다. 「머스키」장관은 『한국정부가 민주화로부터 일탈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대해 우려한다』고 말했으나 그 이상의 태도표명은 하지 않았다.
그는 또 『광범위한 기반과 정치적 지지를 결여한 한 동맹국정부를 미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원할 수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그같은 질문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나 민감한 것』이라고 답변을 회피하면서 『좀더 강한 발언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유용한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회견장에 나온 어느 한국기자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한 데 대해 「머스키」 장관은 『국무장관에 취임한 순간에 미국의 모든 외교정책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한국사태에 대한 미국의 태도표명을 끝까지 뚜렷이 하지 않았다.
「5·17」에 대한 미국의 태도
5·17조치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극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것이었다. 이같은 소극적인 반응은 과거 카터정부가 한국정부의 국내 탄압정책에 대해 즉각적이고도 강경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는 퍽 대조적이었다. 그 까닭은 당시 「카터」대통령이 처해 있던 국내외적인 사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었다.
인권과 도덕을 내세웠던 「카터」의 외교정책은 세계 도처에서 실패작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란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 등에서 미국의 외교는 거듭 좌절을 맛보았다. 특히 이란에서는 결정적인 펀치를 얻어맞았다. 독재자이긴 했지만 친미적이던 「팔레비」정권이 미국의 외면으로 붕괴된 다음 들어선 「호메이니」의 회교공화국은 강력한 민족주의 열기 속에서 반미감정을 노골화했으며, 일단의 회교학생들은 79년 11월4일,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 그후 1년3개월여 동안에 걸쳐 미국외교관 등 52명을 인질로 억류했다.
「카터」 대통령은 80년 4월24일 테헤란에 인질로 잡힌 미국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특공작전을 벌였으나, 결과는 특공대원 8명이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 위신의 치명적인 실추이며 「카터」외교의 결정적인 실패였다. 한국에서 5·17조치가 있을 때 미국은 이란 실패의 악몽에서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국내적으로도 카터정부는 선거 때문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임기 마지막 해를 맞고 있던 「카터」는 차기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을 둘러싸고 정쟁자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다투고 있었으며, 지명획득 후의 대통령선거전에도 대비하여 선거전략을 마련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워싱턴 정가가 선거 때문에 외국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을 때 한국에서 5·17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의 실권세력이 카터정부가 처해 있는 이같은 입장을 계산하면서 5·17의 타이밍을 잡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 당시 일부 외신은, 『한국의 장군들이, 미국은 한국의 안보를 희생하면서까지 강경하게 나오지는 못하리라는 점을 알고서, 마음 놓고 일을 저질렀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카터 미국정부가 이렇다 할 태도 표명이나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사태는 최악의 경지를 맞게 된다. 계엄령확대선포가 있던 바로 다음날, 광주에서 항쟁이 터져, 결국 한국 헌정사상 최대의 민족적 비극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비상계엄 해제, 유신잔재세력 퇴진 등 민주화를 요구하며 데모에 들어갔던 광주학생들의 가두시위는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시작되었으나 계엄군의 상상을 초월한 과잉진압으로 사태는 급속히 악화되어 갔다.
진압을 위해 수도권으로부터 투입된 공수특전단 병력은 「본때를 보여주려는 듯」 무차별 구타 살상을 자행했으며, 이때 격분한 데모는 광주 전시민의 항쟁으로 화대되었다.
시민들은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를 끄집어내 무장계엄군을 시 외곽 지역으로 몰아냈다. 이렇게 해서 광주는 한때 정부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시민의 자율적인 도시로 존재했다. 그러한 상태는 계엄군이 다시 진입하여 일부에서의 시가전 끝에 사태를 장악한 5월27일까지 계속되었다(光州항쟁의 진상에 관해서는 아직도 객관적인 전모가 밝혀져 있지 않다. 필자는 항쟁 당시의 현지 취재메모와 그후 입수한 자료를 갖고 있으나 그 공표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항쟁의 원인과 경과가 어떠한 것이었던 간에 광주사태는 집권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통치권의 크나큰 위기였다. 그리고 한국의 집권세력을 통하여 한반도 안정과 한국의 반공화를 추진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대한안보정책의 중대한 위기였다.
미국, 「안보」를 중시
광주항쟁에 관하여 미국이 반응하고 나선 것은 사태가 시작된지 3일후의 일이었다. 22일 낮(워싱턴 시간) 국무성의 「호딩 카터」 대변인은 일일 브리핑시간에 다음과 활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한국의. 남쪽에 위치한 광주에서 ·발생한 민간인투쟁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태와 관련되는 모든 당사자에게 최대한의 자제와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인 사태수습 방안을 모색하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불안사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태로운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 평온이 되찾아지면 우리는 모든 당사자들이 최규하대통령이 밝힌 대로 정치발전일정을 다시 시작하는 길을 찾도록 촉구할 것이다. 미국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미국은 한 미 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이같은 성명을 발표한 몇시간 후 미국은 백악관에서 고위정책조정회의(PRC)를 열어 한국사태에 대한 종합대책을 검토했다. 이 회의는 「머스키」국무장관 주재 아래, 「브레진스키」 대통령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브라운」 국방장관, 「터너」CIA국장, 「홀브루크」 국무성태평양 및 동아시아담당차관보, 「아마코스트」 국무성 아시아 ·태평양담당부차관보, 「플래트」 국방성 아시아 · 태평양담당부차관보 등 한반도 정책결정에 관련 있는 미행정부의 주요 관리들이 참석, 약 1시간 15분 동안 계속되었다.
이날 정책조정회의는 북한이 한국의 국내 정정불안을 틈타 무력도발을 할 경우에 대비, 한국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미국측의 확고한 결의를 재확인하고, 이에 대한 실증을 보이기 위해 조기경보기 파견 등 구체적인 경고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태가 가라앉은 다음, 좀더 개방적인 대의정부를 구성하도록 한국정부측에 촉구토록 노력하기로 했다.
이같은 결정에 따라 미국은 즉각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대응 안보조치를 취했다. 그 내용은, 10·26때도 취했던 것과 같은 기동함대의 파견과 조기경보기를 통한 북한측 동향에 대한 감시기능의 강화였다. 미국은 필리핀의 수빅만에 정박중이던 샌프란시스코로 귀항예정인 5만t급 항공모함 코럴시호의 항로를 바꿔 한국해역으로 급파하는 한편, E3A 조기경보통제기 2대를 예정보다 2개월 앞당겨 일본의 오끼나와에 급파, 한국지역에서 활동토록 했다. 또한 일본의 요꼬쓰까항에서 최근 보수를 마친 항모 미드웨이호에 대해서도 일단 유사시에는 단시간내에 코럴시호와 합세할 수 있도록 경계태세령을 내렸다.
항모 2척의 전력은 당시 한 ·미지상공군력과 합칠 경우 북한의 공군력을 제압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었으며, 유사시 한반도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전략변수였다. 이와 함께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는, 북한이 남침해 올 경우 미국은 즉각적인 대응을 하겠다는 경고를 한 외교경로를 통해 북한측에 통보했다.
『현상황에서 질서와 안보가 중요』
광주항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은 이처럼 한국의 안보를 맨먼저 떠올리면서 여기에 대비했다. 수많은 광주의 시민과 학생들이 민주화를 부르짖다가 무참히 쓰러져간 사태에 접하고서도, 그토록 인권과 민주화를 부르짖던 미국은 한국 집권 당국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해서 이렇다 할 규탄의 말 한마디 없었다.
광주항쟁에 있어 당시 미국은 시민편이라기보다는 명백히 정부편이였다. 광주항쟁이 단순한 민주화 요구를 뛰어 넘어 그 충격이 한국의 안보에까지 영향을 미쳐, 미국의 전략적인 이해에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태인식 아래서 미국은 그들이 추진하는 대한정책의 두 기등인 민주화와 반공화(안보) 가운데서 당면정책의 중점을 후자로 집중했던 것이다.
이같은 정책중심의 변화는, 따지고 보면 미국 대한정책의 특징이었다. 미국이 내세우는 인권이나 민주화 요구는, 그것이 안보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일이며 일단 안보가 우려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는 어김없이 안보 앞에 인권 ·민주화는 희생되기 마련이었다. 그 극적인 예가 광주사태에서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한 흐름은 광주항쟁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나타났다. 살상과 폭력의 회오리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5월21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는 서울에 온 미국기자들과 대사관에서 만나 한국사태에 관해 브리핑했다. 이 자리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은 광주사태를 심각한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이 사태에 간여할 생각이 없다』고 명백히 했다.
기자들이 한국의 최대와 동맹국인 미국이 비극적인 광주사태에 대해 뭔가 역할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물은 데 대하여 「글라이스틴」대사는 『솔직이 말해 이 단계에서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한국당국의 조치에 항의하는 뜻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고려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기자질문에 대해, 『광주사태로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할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한 다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는 판단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5월26일, ABC방송의 특별뉴스시간에 출연할 「아마코스트」국무성 아시아 태평양담당부차관보는 『미국은 타국의 국내 문제에 간섭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서는, 『한국사태에 대한 미국의 기본입장은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요구도 경청해야 하고, 질서와 안보확립도 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의 상황에서는 질서확립에 중점이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27일, 국무성의 「토마스 레스턴」대변인도 성명을 통해 『분명히 한국국민들의 국내문제인 광주사태와 같은 상황에 외국으로서 미국이 개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글라이스틴」대사는 서울에서 한국의 여야 중진들과 만난 자리에서 『광주사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 같은 북한이 이를 이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국민과 정부간의 타협을 강조하고 최대통령이 공약한 정치 일정이 준수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면서도, 『미국은 5·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명분은 「내정 간섭 불가」
미국의 광주항쟁을 보는 시각은 명백했다. 한국 정부당국의 강경조치가 민주주의 원칙과 인도주의에 어긋난 것은 틀림없지만, 한 지역에 통치권의 공백까지를 초래한 결과는 안보상의 중대위협이 되며, 이는 미국의 이해에도 관계가 된다는 시각이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시민측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으며, 한국당국의 진압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태도였다. 그렇게 하는 명분으로서 미국은 「내정간섭 불가」라는 원칙론을 내세웠다.
이같은 미국측의 태도는 대한정책의 기본적인 룰이기는 하지만 그 변화의 모습은 극적일 만큼 심한 데가 있었다. 광주항쟁이 있기 1년도 채 안 되는 79년 여름, 박정권의 탄압정책에 대해 취했던 대응태도와 광주사태에 임하는 미국의 태도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얼마나 심한가를 바로 알 수가 있었다.
YH사건, 김영삼파동 등으로 한국의 정정이 위기를 치닫고 있던 79년 당시, 미국은 노골적인 내정간섭의 자세로 박대통령에게 대들었다. 특히 YH 사건 때는, 한국 경찰이 여공들의 농성장에 난입하여 폭력을 휘두른 데 대해 미국은 『야수적인 행동』이라고 극렬하게 비난하면서,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끝내는 주한 미대사를 본국에 소환하기 까지 했다.
YH사건때의 폭력에는 비할바가 되지 못하는, 그야말로 「야수적인」 광주의 폭력행위에 대해 이렇다 할 비난의 코멘트 한마디 하지 못한 80년5월의 미국과 79년 여름의 미국 가운데 어느 쪽이 참 모습의 대한정책인 것일까?
미국은 광주항쟁 동안 북한이 이를 악 이용하여 한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어떤 군사적 조치를 취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그 때문에 민주화조치는 일단 뒤로 돌리고 안보에 정책의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가 한국의 군부 실권세력을 고무한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런 점에서 그 당시 과연 북괴의 위협이 현실적으로 임박해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당국은 두말할 것 없이 북한의 위협을 계속 강조했다. 5·17직후 당국은 「비상계엄 전국확대선포의 배경과 불가피성」이라는 팜플렛을 만들어 요로에 배부한 적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당국은 『10·26사태 이후 한국의 정국이 혼란해지자 북괴공산집단은 개성 북방의 곡산지역에 대규모의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키고 그들의 정예부대인 특수8군단의 행방을 은닉시켰으며, 학생 및 근로자들의 폭력시위와 때를 같이하여, 「결정적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판단, 5월15일부터 20일 사이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했
이상우(저널리스트)
광주항쟁의 진압을 딛고 나타난 12·12세력의 집권과정에서 보여준 미국의 대한정책은 민주화보다는 안보에 치중, 반미감정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내친 김에 정권장악(?)
「12·12」군부거사를 주도한 이른바 개혁세력들은 거사 당시 이미 정권을 장악할 스케줄을 세우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거사 당시에는 김재규재판과 관련하여 군부의 정리만을 생각했던 것이 그후의 사태진전에 따라 내친 김에 정권까지 장악하게 된 것일까?
12.12당사자들은 전자의 경우를 부인한다.그때나 지금이나 군부거사를 주도했던 당사자들의 말은 12.12는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연루자(계엄사령관)를 연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총격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계기로 김재규를 비호하는 세력을 정리하고, 그 자리를 메꾸기는 했지만, 거사세력이 그 당시 정권까지를 넘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12·12세력은 거사 후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의 표면무대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다짐했다.「12·12」직후 정승화씨의 후임으로 임명된 이희성계엄사령관은 특별담화를 통해, 『군의 기본 사명은 국토방위에 있으며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의 분야이기 때문에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군은 사심 없이 계엄업무를 수행해 나갈 것이며 조속한 시일내에 계엄목표를 달성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라고 다짐 했다.
주도세력의 리더였던 전두환장군은 자신이 공개적으로는 「12·12」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 발언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비공개 석상에서 정치적 중립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는 「12· 12」직후 주위사람들에게 『군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관여해서도 안된다』면서, 『나 자신은 정치에 취미도 없을 뿐 아니라 정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정치하려 했다면 5·16때 군복을 벗고 나가 무슨 청장이나 하나 하고 끝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2·12」이듬해인 80년 초, 그가 이끄는 보안과 부대 장병들 앞에서 행한 신년 인사말에서도 「12·12」가 자신의 권력쟁취에 있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만일 내가 권력에 목적이 있었다면 지금쯤 청와대에 있지 왜 여기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12·12」 당사자들의 당초 의도나 주장 여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12·l2」세력은 정권을 장악했다. 그 과정은 보기에 따라서는 치밀히 계획된 각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중권력구조」하의 「복면의 기사들」
훗날 노태우씨는 여러 기회에 「12·12」는 쿠데타가 아닌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만일 쿠데타였다면 혁명공약이나 집권 후의 정책같은 것을 들고 나왔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12·12」는 통상적 의미의 쿠데타와는 달랐다. 주도세력은 적어도 형식상 군부의 주도권 장악에만 그쳤으며, 정치는 최규하정부가 담당하고 있었다. 최내각은 「12·12」 이전에 다짐했던 헌법개정, 민주절차에 따른 정부 이양 등 국민과의 약속사항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80년 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학생데모가 격화되고 이른바 3김씨가 서로 다투어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졌기 때문에 「부득이」 군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주도세력측은 설명한다.
그렇다면 「부득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5·17계엄확대조치」 이전까지 군부의 주도세력은 전혀 정치와는 무관한 입장에 있었던 것일까?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12·12」 세력은 「5·17」이전에도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집권을 위한 준비 절차를 단계적으로 밟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계엄령하의 정치상황 자체가 이미 군의 정치적 영향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출범 초부터 스스로를 과도정부로 규정한 최내각은, 시정면에 있어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최내각이 군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독자적인 판단 아래 시정 목표와 스케줄을 추진했다고 믿는 사람은 당시 별로 없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지만, 그당시 최내각은 국정의 중요 방향설정에 관해서 일일이 「계엄당국」의 자문을 받고 있었다. 개헌내용, 개헌일정, 과도정부의 기간 등등에 대해 최내각은 「12·12」세력으로 요약되는 「계엄당국」의 의견에서 거의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형편에 있었다.
미국은 당시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그때의 한국 권력상황을 가리켜, 「최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형식적 정부와 전장군을 정점으로 하는 실재적인 권력』으로 성립된 「2중권력구조」(dual authority structure)라고 지칭했다. 국내의 어느 정치인은 실제적 권력의 핵심인물을 「복면의 기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커튼 뒤에 도사리고 있던 「실제적 권력」은 「5· l7」을 계기로 정치의 전면무대에 나서게 되지만, 그보다 앞서 이미 무대등장의 몸짓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뚜렷한 움직임은 전두환장군의 중앙정보부장서리직 취임이었다.
『전합동수사본부장 급부상』
전소장(당시)이 국민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0·26」직후부터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 전두환소장의 성명 3자는 전혀 낯선 이름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소장은 그가 이끌고 있던 보안사가 계엄업무의 핵심과제 중 하나였던 「10·26」의 뒷처리와 관련하여 막강한 권력실체로 등장하게 되자 이와 함께 급속히 부상한 사람이었다.
그가 국민 앞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은 「10·26」이틀 후인 79년 10월28일 이었다. 그날 전소장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의 자격으로 박대통령 살해사건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섰다. 바로 그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천하를 주름잡던 김재규 차지철 등을 일거에 몰아세운 전소장의 발표 모습에서 이미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을 감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로부터 9일후인 11월 6일, 전소장은 다시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 앞에 나타나 「IO·26」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박대통령 살해사건의 수사과정을 통하여 전두환장군은 당시 이 나라의 어떤 사람보다도 우월한 실질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와 그의 보안사 조직은 김재규 체포에 이어 김규원 전청와대비서실장을 연행 구속했고,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대장을 신문했다. 청와대 경호실 차장이던 이재전중장을 구속했는가 하면 중앙정보부 간부 수십명을 연행 조사했다.
그 무렵 외신에서는 전장군의 부상을 재빨리 보도했다. 이를테면 「10·26」이 있은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은 79년 11월2일자 일본 「산께이신문」은 「전합동수사 본부장 급부상」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박대통령 사살사건 후 한국 정세는 여전히 혼미를 거듭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서 전두환 계엄사령부합동수사본부장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전두환 본부장은 현재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군부내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거의 굳어가고 있다.…… 그의 권력기반은 국군보안사령부를 장악하고 있는 데 있다. 전사령관은 이 강력한 조직의 대표자로서, 사살사건으로 권위가 흔들리고 있는 KCIA에 대신하여 부상한 것인데, 김재규 전 KCIA부장을 재빨리 무장해제시키는 등 그의 기민한 행동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 노재현국방부장관과 정승화계엄사령관이 군부의 실력자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사령관은 사건 당시의 행동에 불투명한 점이 많아 의혹을 받고 있다.노국방장관은 조직 상으로는 전사령관의 상사이지만 사살 사건후에는 전사령관의 활발한 활약에 비해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고 있다』
민· 군의 정보기관 장악
박대통령 살해사건 수사라는 대의명분아래 전장군과 휘하의 보안사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를 주름잡던 막강한 실력자들과 청와대, 중앙정보부 등 실권 조직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그리고 군 정에 걸친 국가대권을 향한 사실상의 결전인 「12·l2」에서 승리함으로써,당초의 의도 여하에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제5공화국에의 길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소장은 80년 3월 중장으로 진급했고 다시 그해 8월 대장으로 승진했다.그에 앞서 전중장은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게 되었는데, 이는 「12·l2」 세력의 대권행진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계기였다.
그가 정보 ·수사에 걸쳐 국내 ·국외에 방대한 조직력을 갖고 막강한 영향력을 끼쳐왔던 중앙정보부 책임자 자리에 취임한 것은 80년 4월14일이었다. 이날 그는 현역 육군 중장으로서 국군보안사령관이라는 위치와 함께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 하는 임명장을 최규하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정보부장 자리는 김재규가 체포되고,「12·12」다음날인 12월13일,당시 부장서리이던 이회성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전임된 이래 4개월간 공석중이었다. 당시 당국자는 그토록 상당 기간 동안 정보부장 임명을 보류해 온 이유에 관해, 『박대통령을 시해한 사람이 정보부의 부장이었다는 점에서 도의적으로 중앙정보부에 책임과 반성의 여지가 없지 않았다고 판단, 그 기관의 책임자 임명을 상당 기간 보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적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12·l2」 세력은 거사성공 직후 곧바로 군부요직을 장악했고, 김재규의 후임 정보부장자리에도 주도세력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차규헌장군(당시 수도군단장)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 인사에 대해 미국측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12-12j성공 후 전격적으로 단행한 군부 개편에 대해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던 미국측은 막강한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거사주체이며 현역인 사람을 임명한 데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차장군의 정보부장 취임은 유산되고 말았으며, 그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인 채로 남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전두환장군이 정보부장직에 취임하게 된 것인데, 이때도 미국측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핵심적인 문제점은 현역 장성인 보안사령관인 정보부장직을 겸임함으로써 모든 실권이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는 우려감 이었다. 전장군의 정보부장 취임 이튿날인 4월15일자 「뉴욕 타임즈」는 장문의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직에 군 장성이 취임』이라는 제목으로 비판적인 시각의 글을 내보냈다.
「뉴욕타임즈」지는 『한국의 정보부장직은 보통 민간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전장군 임명소식이 한국 국민에게 놀라움을 주었다』고 말하고, 『군정보기관인 국군보안사령관이 정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장직까지 맡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지적, 『전장군이 두 개의 정보기관을 동시에 관장하게 됨으로써 최고실력자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그의 지위는 강화되었다』고 논평했다.
전장군의 겸직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비록 공개적으로 거론은 못했지만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권력집중에 대한 우려와 함께, 현역인 보안사령관직과의 겸직이 중앙정보부법 제7조 『부장 ·차장 및 기획조정관은 일체 타직을 겸할 수 없다』는 규정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지적 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청와대 당국자는, 『현역 군인인 보안사령관을 정보부장에 겸임시킨 것은 계엄하에서 군이 보안업무를 조정하고 있어 정보부의 기능에 비추어서 겸무토록 하는 것이 업무의 조정과 효과를 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한편, 정보부법 규정 위반 여부에 관해서는, 『신임 전두환정보부장서리는 「부장」이 아니고 「서리」이기 때문에 보안사령관 겸직이 가능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미국측의 반발과 우려
전두환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에 대한 미국측의 반발은 당시 정가와 언론계에 파다하게 소문나 있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한국의 정치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이 인사발령에 대해 미국은 전혀 사전 협의나 통고를 받지 못했다. 물론 국내 인사문제에 대해 한국정부가 미리 미국측과 어떤 협의를 하거나 사전 예고를 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그때까지의 경위로 보아 전장군의 거취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예고해줄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전장군의 인사발표가 있기 20분 전에야 그 사실을 미국측에 통고해 주었다.
문제는 얼마나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사전 통고해주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장군의 정보부장 겸직발령 통고를 받고 미국이 충격을 받은 것은, 「10·26」과 「12·12」이후 한국의 정치발전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품어오던 우려감이 현실문제로 클로즈업되고 있음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인사발표가 있은 지 4일후인 4월18일 「월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는 청와대로 최규하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때 무엇이 논의했는지에 관해서는 일체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담 자체에 대해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며칠 후 외교가 소식통으로부터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때 「글라이스틴」대사는 그해 여름 로스엔젤레스에서 개최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한 ·미 연례안보협의회의 무기연기를 통고했다.
연기 이유에 관해서 「글라이스틴」대사는 『최근의 정세와 관련하여』라고 간단히 표현했으나, 그것이 전장군의 겸직발령을 뜻하고 있었음은 명백했다. 당시 일부 외신은, 한 ·미 안보헙의회의 무기연기를 미국측이 통고한 것은 「군의 진출에 대한 압력」이며, 「민주화가 지연되고 있는 데 대한 강한 우려감의 표현」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측의 불만은 얼마 후 좀더 직선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5월1일, 워싱턴에서는 「카터」대통령과 「오히라」 수상간에 미 · 일 수뇌회담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한국 정세를 논의하는 가운데 「카터」대통령은 한국 군부의 동향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에 관해 5월5일자 일본 「조일신문」은 1면 톱기사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카터」 미 대통령은 지난 1일 워싱턴에서 열린 일 ·미 수뇌회담에서 박정권 붕괴후의 동향에 관해 「한 사람이 군 ·정보 ·보안의 각 분야를 한손에 장악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는 태도를 표명했다. 「한 사람」이란, 지난 4월 한국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지칭한 것으로 보여진다. 미국으로서는, 최규하 정부 아래서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민주화에 군부가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지 않을 것인가고 심각히 우려하고 있음을 표명한 것으로 보여진다. 「카터」대통령이 이런 유의 수뇌회담에서 일국의 군부 지도자를 구체적으로 전제하며 발언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같은 사실은 수뇌회담에 동석한 복수의 사람들이 밝힌 것인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카터」대통령의 발언을 「한국군부, 특히 전두환보안사령관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보부장 겸직을 통한 전두환장군의 대두에 대해서는 국내 정가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정국은 이른바 「3김씨」가 바야흐로 「80년의 봄」을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안개정국」이라는 표현처럼 불투명한 요인들이 속출하고 있었으나 3김씨들은 저마다 대권에의 꿈을 안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이럴 때 전장군의 겸직 등장은 정국의 앞날과 관련하여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야당인 신민당 소속 의원들은 『이번 정부가 취한 조치는 앞으로 정국추이에 새로운 변수 역할을 할지 모르며 어쩌면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현상이 노정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박대통령 사망 후 사실상 야당으로 전락하여 김종필씨를 중심으로 당세를 가다듬고 있던 공화당도 전장군의 부상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공화당은 그때까지 대권을 향해 움직이고 있던 김종필 총재가 「정치과열을 선도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예정돼 있던 각도 지구당 순시계획을 중단시키기까지 했다.
사실로 나타난 소문
당시 항간에는 각종 루머가 난비했다.개헌과 민주화 일정에 관한 최규하정부의 거듭된 다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군부 등장과 헌정 중단설을 거론하고 있었다. 정가와 외교가에 나돌고 있던 이야기들은 전두환장군을 비롯한 「12 ·12」세력이 「80년 봄」의 초기 단계에 이미 국회해산과 기성정치인의 거세계획을 세우고 이를 미국측에 간접적으로 타진했다는 것이다.
당시 돌아다니고 있던 소문에 의하면「12 · 12」세력의 계획은 헌정중단과 함께 김대중씨의 체포, 김종필씨의 추방, 부패정치인의 숙청, 신당 창당이나 공화당 기반을 이용한 정계 진출이라는 시나리오로 작성되어 있다고 알려겼다. 다만 미국측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12 · l2」세력의 정국장악은 상당기간 견제받고 있었다는 것이 당시 외교가 일각에서 이야기되고 있던 내막소식이었다.
이러한 소문들에 대해 정부와 계엄당국은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두환장군 자신이 명백히 이를 부인했다. 전장군은 4월28일, 정보부장 겸직 후 처음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본인이 양대 정보기구를 장악함에 따라 정치발전에 차질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부 억측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하며, 오히려 내외의 난관을 극복하는 데 긍정적 기여를 함으로써 정치발전을 촉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겸직에 대하여 『항간에서는 구구한 억측과 낭설이 나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정치발전 일정에 대해서는 이미 정부에서 누누히 밝힌바 있고 개헌안 역시 정부와 국회가 계획대로 추진하고 있는데 어떻게 차질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본인은 본인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것이 오히려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차질을 초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달도 안되어 헌정이 중단되고, 대권을 향해 뛰고 있던 정치인들이 체포 혹은 숙청되는 등 소문대로의 상황이 벌어진다.
「5·l7」 비상계엄령 확대실시
80년 5월17일, 최규하대통령은 이날밤 24시를 기해 전국일원에 비상계엄령확대실시를 선포했다. 곧이어 이희성계엄사령관은 18일 새벽 1시를 기해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집회 및 시위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에 대한 사전검열, 전문대학을 포함한 각 대학의 휴교, 정당한 이유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의 금지를 선포했다.
최 대통령은 특별성 명을 통해 계엄확대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계속되는 사회혼란을 이용한 북한 공산집단의 대남적화책동이 날로 격증되고 우리 사회 혼란을 목적으로 한 무장간첩의 계속적인 침투가 예상되고 있다. 그들은 우리 학원의 소요사태 등을 고무 ·찬양 ·선동함으로써 남침의 결정적인 시기조성을 획책하고 있다. 이같은 중대한 시기에 일부 정치인 학생 및 근로자의 무책임한 경거망동은 이 사회를 혼란과 무질서, 선동과 파괴가 난무하는 무법지대로 만들고 있으며,설상가상으로 사회혼란의 여파는 수출부진과 경기침체를 심화시키면서 노사분규와 실업이 증가함으로써 사회불안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어 문자 그대로 우리 국가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계엄하에서 학원소요가 진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현실 정치문제에 깊이 관여하면서 교외소요로 과열 폭력화 되어감으로써 극심한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국방 및 치안력의 투입을 강요하는 사태로 발전되어 막대한 국력의 소모를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질서 회복에 앞장서야 할 지도급 정치인이 정부의 안정유지 노력을 외면하고 오히려 사회 불안을 선동 자극함으로써 소요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된다면 우리의 국기마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우려가 없지 않다. 이에 정부는 국가를 보위하고 3천7백만 국민의 생존권을 바라고 있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여 일대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요컨대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의 경거망동으로 국기마저 흔들릴 우려가 있어, 국가보위를 위해 계엄확대조치를 취했다는 배경설명이었다.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는 유신 이래 정부가 정치적 강경수단을 동원할 때마다 들먹인 책임전가의 대상이었다. 그 말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동원된 것이었다.
따라서 80년 봄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5 · 17조치를 필요로 할 만한 객관적 이유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5·17」조치, 과연 필요했나
먼저 「일부 정치인」의 경우를 보자. 확실히 80년 봄은 「정치만개」의 계절이었다. 국민들은 민주화에의 기대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고, 정치인들은 대권을 향해 일제히 뛰기 시작했었다. 유신체제하 거의 I0년 가까이 정치는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80년 봄의 정치상황은 더욱 대조적으로 활기있게 보였다. 가라앉은 정치에 오랫동안 익숙해 온 집권세력의 눈에는 갑작스러운 정치활동이 위험스러운 것으로 비칠만도 했다.
더우기 대권레이스를 벌이고 있던 이른바 3김씨 가운데는 80년 봄의 실권세력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점찍힌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의 정치상황은 활성에도 불구하고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권세력은 민주정치의 기본적 양상인 경쟁 자체를, 혼란스럽고, 따라서 북괴에 틈을 주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훗날 자신들의 대권경쟁이 5 · 17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3김씨는 이렇게 반박했다.
김영삼 -『우리들의 지나친 경쟁이 5 · 17의 구실이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경쟁인데 좀 떠들기도 해야 한다. 우리가 경쟁하면 안정이 파괴되는 것처럼 국민들은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구실일 뿐 그들은 이미 12 · 12사태를 통해 정권획득 준비를 갖췄다』
김대중 -「5 · 17이전까지 세 김씨가 등장하니 모두 서울의 봄이라고 해서 환영했다. 열사람만 모여도 모의투표를 하고 그랬다. 그냥 그대로 놔뒀더라면 세사람 중 하나는 대통령이 되고 둘은 야당이 됐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 나쁜가. 세 사람이 싸웠다고 사태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학생 데모는 12 · 12사태의 주도세력이 정권을 탈취하려 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지 우리 때문이 아니었다」
김종필씨 -『그들(12 12세력)은 미리 집권시나리오를 짜놓고 5 · 17조치를 취했다. 그것을 정치인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노동쟁의와 학생시위의 실상
5 17의 당위성과 관련하여 다음으로 검증되어야 할 것은 노동쟁의이다. 10 ·26은 사회 각 부문에 자유화의 열기를 불어 넣었으며, 노동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어느 사회분야보다도 자율과 민주화에의 몸부림이 강하게 드러난 곳이 노동계였다. 그것은 유신체제하에서 노동계가 가장 심하게 권력의 규제를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70년대를 통해 민주화운동의 주역 가운데 하나로 성장해온 노동계는 10 · 26을 계기로 욕구분출의 돌파구를 찾았다. 당국의 집계에 의하면 80년 들어서부터 그 해 4월까지 발생한 집단노사분규는 7백20여건이었는데, 이는 79년 같은 기간의 7배에 해당하는 건수였다. 적어도 수자만으로 보자면 「노사분규의 폭발」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권력의 통제로 인하여 불만이 있으면서도 아무 소리 못하고 숨죽여 지냈기 때문에 분쟁이 표면화되지 않았던 70년대보다 80년의 노사분쟁 양상이 오히려 정상이었다고 말할 만했다.
분쟁의 발생 원인을 보면, 80년 봄 당시의 노사분규는 굳이 10.26과 관련하지 않더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분규건수의 75%에 해당하는 5백30여건이 체불임금 지급요구에서 비롯했고, 휴 ·폐업반대가 25건이었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한 몸부림이 분규로 나타난 수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밖에 어용노조 개편을 요구하는 등의 노조관계 분규가 33건, 임금인상 요구는 26건이었다.
분규의 형태도 과격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작업거부가 19건, 농성사태로 번진 것이 19건, 시위는 9건에 지나지 않았고, 6백70여건에 아르는 태반의 분규가 진정, 혹은 간단한 항의 정도였다. 이들 분규의 대부분은 노사간의 자체 조정이나 노동청, 혹은 시 ·도의 조정을 통해 해결됐다.
단 하나, 예외적인 과격 분규가 있었다. 4월25일에 있었던 사북탄광촌의 유혈사태였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소재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 수백명이 임금소폭인상과 어용노조에 불만, 사흘 동안 사실상 사북읍을 점거하고 폭력 행위를 벌여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여러 사람이 부상한 불상사였다. 이 사건은 저임금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유신체제하에서 일반화되었던 어용노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함으로써 터진 결과였다.
한때 무법사태를 야기하기는 했지만 사복분규는 노사간의 합의에 의해 자율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과격한 노사 분규는 5 · 17때까지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사북사건은 80년 봄 노사분규의 유일한 특이상황이었으며, 결코 노동쟁의의 일반 패턴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학원사태를 검증해본다. 학원가의 동향이 10· 26 후, 특히 80년봄의 정국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하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10 · 26 후 일부 대학교에서 학원자율화 문제를 거론하면서 학생들이 집단 행동을 취하려는 움직임이 대두하였으나, 이는 곧 이어 시작된 겨울방학으로 잠잠해졌다. 그러다가 80년 봄학기 시작과 더불어 학원가의 움직임은 아연 활발 해졌다.
처음 대학생들의 이슈는 어용교수 퇴진, 학교재단운영문제, 입영집채교육반대 등 학내문제였다. 특히 입영훈련 반대는 정부측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고, 최규하대통령은 담화를 발표하면서까지 학생운동에 제동을 걸려고 했다.
학원가의 쟁점은 5월에 들어서자마자 급속히 학교 밖 정치문제로 확산되어갔다. 그 핵심은 계엄령 철폐, 정부주도하의 개헌반대, 2원집정부제 구상.반대, 유신잔여세력 퇴진 등이었다.
학생시위는 5월13일부터 15일까지의 사흘동안 절정을 이루었다. 13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집결한 수천명의 학생들은 「계엄철폐」 「전두환세력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일대를 데모행진했다. 10.26 후 최대규모의 조직적인 가두시위였으며, 12.12세력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인 성토였다. 이튿날인 14 일 학생데모의 규모는 더욱 커져 서울시내 20개 대학의 수만명이 광화문과 안국동, 종로 일대에서 격렬한 데모를 벌여 경찰과 충돌했다.
광화문 네거리를 중심으로 반경 약 1km의 서울 중심부는 이날 오후 6시경부터 밤10시30분께까지 대학생들과 기동경찰간에 쫓고 쫓기며 다시 집결하는 혼란이 되풀이되었다. 이날 지방에서도 경북대 전남대 전북대 강원대 아주공대 부산대 계명대 충북대 청주대 등 15개 대학이 시위를 벌였다.
3일째가 되는 15일에는 서울역 앞 광장에 서울시내 35개 대학에서 10만명 가까운 대학생이 집결, 학생데모의 피크를 이루었다. 이날 데모에서 경찰과의 충돌로 인하여 1명의 전경대원이 사망하고,수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80년 봄의 실권세력이 학생데모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학생들의 조직적인 힘과 열기 그리고 서슴없이 표현하는 12·12에 대한 규탄은 당시 실권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섬뜩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학생운동의 과정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고,행동에 자제력이 따랐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학생들은 그들의 시위행동과 정치적 주장을 이렇게 정당화했다. 『우리 학생들은 대단수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참된 정치민주화가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한다. 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던 구체제가 일단 무너진 마당에 그 잔재를 말끔히 씻고 민중의 뜻이 통하는 개헌-선거-정권이양을 조속히 실현하는 것이 정차민주화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체제의 정치질서를 그대로 끌고 가려는 집단이 기득권을 바탕으로 아무런 반성의 기색도 없이 새로운 역사의 장에 끼어 들려는 본색을 이미. 드러냈다‥‥‥」(5월3일 서울대 학생총회에서)
『우리는 현하 학원의 민주화투쟁이 사회일각의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성급한 판단과 단순한 열기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며, 냉철한 역사의식과 철저한 사회의식에 입각한 민족적 애국심적 발로임을 천명한다. 박정권의 비호하에 있었던 유신잔당들은 명분없는 비상계엄의 존속과 관제언론의 호도를 이용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모든 학원의 민주화운동은 민족통일과 민족의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역사적,민족적 사명의 표현이다』(5월 14일 고려대학교 학생일동의 성명)
『박정희독재정권은 무너졌다. 우리나라가 또다른 독재정권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민은 저희들과 함께 애써 달라』(5월15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성명)
「데모 중지하자」는 학생들 연행
학생들은 데모를 하면서도 국민들이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끊임없이 가늠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군부의 반격을 초래하지나 않을까 주의하면서 자제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사흘간의 대규모시위를 벌인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 각 대학 총학생회장단을 16일 상오 고려대 도서관에서 회의를 열고 그간의 데모를 평가한 끝에 16일에는 가두시위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27개 대학 학생회장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었고, 데모로 말미암아 서민경제에 지장을 주고, 안보적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 앞으로 정상수업을 받으며 사태를 관망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거의 모든 대학이 16일부터는 정상수업에 들어갔다.
이날 저녁 6시부터는 전국 56개 대학학생회장단이 다시 이화여대에 모여 당분간 가두시위를 벌이지 않는다는 결의를 재확인했다. 학생회장단회의는 16일 하오 6시부터 이튿날인 17일까지 철야로 24시간 계속되었는데, 시위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을 작성하려는 찰나 갑자기 경찰기동대가 회의장을 덮쳐 대부분의 학생들을 연행해 갔다. 계엄령 확대 선포를 하기 수시간 전인 17일 저녁 6시경이었다.
그때 당국이 왜 학생회장단 회의장을 덮쳤는지는 지금도 하나의 의문으로 남아 있다. 데모를 모의하는 자리였다면 모르지만 그와는 반대로 데모를 하지 말자는 결의를 하고 있던 자리를 방해한 일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철야로 계속된 회의장밖에는 사복 요원들이 지키고 있어,회의의 분위기나 내용은 수시로 파악되고 있었다. 따라서 학생들이 데모중지를 협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벌써부터 알려지고 있던 터였다. 그 결의를 성명으로 작성하려는 찰나에 이를 무산시켰고, 그 몇시간 후에 전국계엄령이 선포된 사실과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의혹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5·17조치와 관련된 의문은 이밖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우선 최규하대통령의 중동방문이었다. 최대통령은 5·17일 주일 전이며 정국이 가파르게 치닫고 있던 5월10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순방길에 올랐다. 이 여행은 박대통령 때부터 약속됐던 것이었다. 박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79년 12월 6일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같은 약속과 함께 원유의 안정적 장기공급을 확보하고 오일달러로 부호국이 된 이들 나라의 경제건설에 한국의 참여폭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어차피 국가원수가 중동여행을 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당시 사우디에 진출해 있는 모건설회사가 잘못된 로비활동을 벌이는 바람에 외교상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도 최대통령의 중동방문은 필요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국내적으로 그토록 결정적인 시기에 국가원수를 해외여행길을 떠난다는 것은 얼핏 납득이 안 가는 데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최대통령의 중동여행은 중단하거나 연기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최대통령의 측근 가운데서도 그렇게 건의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최대통령은 떠났다. 대통령 부재중에는 계엄당국쪽에서 가능한 한 군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는 것이었고, 여행중 수시로 연락할 수 있도록 「핫 라인」을 설치 했다. 그러나 이런 다짐이나 시설은 별 의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최대통령이 없는 동안 정국은 고비를 치닫고 있었으며, 군부의 실권세력은 이에 대처하는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 부재중의 「시국문제회의」
최대통령의 부재중, 형식상의 최고 통치권자는 신현확국무총리였다. 12·12주역들과 비교적 뜻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신총리는, 학생 데모가 절정에 이르고, 김영삼 · 김대중씨 등 야권의 리더들이 비상계엄령 즉각해제, 정부개헌구상의 철회, 민주정부의 연내수립 등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를 한층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시국문제회의를 주재, 강경책의 발동여부를 검토했다. 이 시국대책회의에는 김종환내무장관, 주영복국방장관과 전두환국군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이 참석했다.
5월15일, 신총리는 「시국에 대한 담화」를 발표, 『학생시위로 조성된 사회불안을 하루 빨리 해소하여 사회안정을 되찾기 위해 국민과 학부모들의 따뜻한 협조와 학생들의 자숙 ·자제를 다시 한 번 간절히 호소한다』고 말한 다음, 『학생들이 사회를 불안에 떨게 하는 질서파괴 행동을 계속한다면 언제까지나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그 무렵 정가에는, 군의 출동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그럴 경우 실권 세력은비상계엄을 강화하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함으로써 헌정을 중단시킨 가운데 개헌과 새 정부 수립을 계엄하에서 주관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나돌았다.
17일 오전 9시, 각 군에서는 주요 지휘관회의를 열어 정국에 대응한 단호한 조치의 필요성을 결의했다. 이어 오전 11시, 국방장관 주재로 전군지휘관회의를 열고, 4시간의 토의 끝에 군의 투입과 지역계엄을 전국비상계엄으로 전환시켜「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할 것을 만장일치로 합의 」했다.
군부의 이같은 결정이 있은지 몇시간 전 최규하대통령은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했다. 최대통령은 귀국 즉시 시국대책회의를 열고 보고를 들었다. 신현확총리를 비롯, 전두환중앙정보부장서리와 국방, 내무장관, 계엄사령관 등이 참석한 이날 시국대책회의에서 군부의 강경책이 건의되었으나 최종 결정은 내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통령은 이튿날인 17일 아침부터 청와대에서 측근들과 회의를 여는 한편 그 사이사이에 신총리의 방문을 세차례나 받고 요담했다.
최대통령은 가능한 한 헌정중단과 같은 강경수단은 피하려 했다고 한다. 그때문에 마지막까지도 자신이 직접 3김씨와 개별적으로 만나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그가 없는 동안에 강경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17일 상오 최대통령은 결국 계엄확대 조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밤 9시30분, 총리 주재하에 열린 긴급국무회의는, 이미 출동한 무장계엄군이 중앙청 주변을 에워싼 가운데 비상계엄령의 전국확대실시를 선포하기로 의결했다.
북한의 도발 가능했나
5 · 17조치와 관련하여 또 하나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점은, 그 무렵 북괴가 한국의 국내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떤 위협적인 움직임을 취했느냐 하는 점이다. 정국이 심상찮은 분위기로 치닫고 있던 5월12일 밤, 수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공공기관과 신문사 ·방송국에 계엄군이 갑자기 증강 배치된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그날 밤 12시 넘어 무장군인을 만재한 트럭과 장갑차가 시 중심부를 질주했으며, 정부종합청사, 신문사 방송국 등의 건물에 중무장한 계엄군이 배치됐다. 이같은 경계태세는 북괴가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에 근거한 것으로, 12일 낮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에서 주영복국방장관과 전두환 정보부장서리에 의해 보고 됐다. 보고 내용은 국민에게 불안감을 준다는 이유 때문에 발표되지 않았으나, 당시 관계 소식으로부터 알려진 바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① 휴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북괴 특수부대 124군단의 2개여단병력, 약 6천명이 갑자기 행방을 감추었는데, 이들은 15일부터 20일 사이에 30인승 글라이더 2백 35대에 분승하여 한국의 후방지역에 침투한다는 유력한 정보를 입수했다.
② 황해도 해주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북괴 제8군단의 행방이 최근 수일간 파악되지 않고 있다.
③휴전선 일대에 최근 북괴 인민군 11개 사단이 추가로 증강 배치되었다.
임시국무회의에 보고된 이같은 내용의 정보를 당국은 일본 방위청과 내각조정실로부터 통보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다만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당시 미국정부가 한국측의 북괴침공설을 즉각 부인하고 나선 점이었다.
즉, 미국무성은 13일 성명을 통해,『미국측의 정보로는 북한 내에 별다른 부대이동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한국에 대해 어떤 류의 공격이 절박해 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도 언다」고 단언했다. 보통 동맹국에 의한 이같은 정보가 미국의 견해와 다를 경우, 미국은 논평을 하지 않거나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공식 성명을 통해 즉각 부인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국은 그후로도 거듭해서 한국측이 주장하는 북괴의 위협설을 부인했다. 19일 국무성의 「호딩 카터」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한국에 대한 외부의 어떤 위협조짐을 발견했는가』라는 기자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이 순간에 북한군의 어떠한 비정상적인 이동조짐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북한이 즉각적인 남침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사흘후인 22일 「카터」대변인은 성명을 발표, 『미국은 한국의 불안한 정정을 이용하려는 북한측의 어떠한 기도에 대해서도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말하면서,『1주일 전 한국에서 반정부데모가 발생한 이래, 북한군이 어떠한 비정상적인 군의 이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갖고 있지 않다』고 또다시 부인했다.
아마도 미국은 한국 군부가 「북안에 의한 위협정보」를 강경책의 구실로 삼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미리 쐐기를 막기 위해 거듭해서 부인성명을 낸 것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80년의 봄」을 잠재운 「5·l7」
80년 봄, 안개정국속에서 끊임없이 우려되어 왔던 사태의 轉變은 「5 · 17」이라는 최악의 조치로 현실화되었다. 헌정중단이라는 강경책을 선포하고 나선 계엄당국은 곧 바로 대대전인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3김씨 가운데 실권세력으로부터 가장 위험시되고 있던 김대중씨는 그날 밤 계엄령 전국확대조치가 국무회의에서 정식으로 의결되기 수시간 전 동교동 자택에 들이닥친 무장 계엄군에 의해 체포당했다. 또 거의 같은 시간 문익환 예춘호 김동길 고흔 이영호씨 등, 70년대 이래 반체제운동에 전념해 온 재야인사들도 사회혼란 조성 및 학생 노동자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로 계엄당국에 연행되었다.
대권경쟁에 나섰던 또다른 김씨들인 김종필씨는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되었고, 김영삼씨는 자택에 연금당했다가 결국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는 성명을 발표케 되었다. 이렇게 해서 10.26후 부풀었던 민주화에의 기대는 송두리채 무산되고 정치적 엄동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몸을 도사렸다. 그 누구도 속에 맺힌 회한과 울분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다.이럴 때 5·17조치에 불만을 표하고 나선 것이 미국이었다. 5·17다음날 미국무성은 한국정부당국의 조치에 우려를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한국전역에 대학교의 휴교, 그리고 정치지도자와 학생지도자들의 구속을 수반하는 계엄령 확대조치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정치자유화를 향한 전진은 법의 존중과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정부가 현재 취하고 있는 행동이 한국문체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염려한다. 우리는 우리의 진지한 관심을 한국지도자들에게 분명히 전해왔고, 최규하대통령이 일찌기 밝힌 대로, 헌법개정과 폭넓은 기반위에서는 민간정부선거를 위한 전진이 즉각 계속되어야 할 것이라는 우리의 신념을 강조해 왔다.
우리는 한국사회의 모든 구성 원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맞아 자제심을 갖고 행동하길 촉구한다. 79년 10월26일에 확인했던 것처럼 미국정부는 한국 정세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조약상의 의무에 따라 강력히 대응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우방인 일본도 공식성명 발표는 유보했으나 한국의 계엄확대조치에 우려하는 태도를 명백히 했다. 18일 「이토」관방장관은, 5·17조치는 『한국민의 의식의 문제이며 양식에 기대한다』고 말하면서, 『민주화의 싹이 꺽이지 않도록 지컸보겠다』고 논평했다. 이날 일본 외무성 당국자는 한국의 계엄령확대조치가 『현재 한국의 정부 및 군부의 의향에 반대하는 세력을 봉쇄하여 정치체제의 재정립을 꾀하려는 군부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말하고, 박대통령 암살사건 후의 민주화 노선을 대폭 후퇴시킬 것이 틀림없으며, 정부와 군부는 계속해서 새로운 조치들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 보았다.
『현재 사태를 검토중』
한국의 5·17조치에 대해 미국은 사전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 임시국무회의가 열리기 30분 전에야 주한미대사관을 통해 그같은 사실을 보고 받았을 뿐이었다. 때마침 주말을 맞이하고 있던 워싱턴의 국무성 한국데스크는 서울로부터의 긴급전문에 접하여 주말계획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정보정리와 사태분석 및 앞으로의 대응책에 관해 검토했으나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러스 밴스」의 뒤를 이어 국무성의 총책임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에드먼드 머스키」 장관은 그때 소련의 「그로미코」외상과 아프가니스탄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빈에 가 있었다.
서울에서 5·17조치가 선포된 직후, 기자들의 논평요구에 대해 국무성 대변인은 『현재 사태를 검토중』이라는 이유로 코멘트를 회피했다. 30시간 이상이 지난 18일(워싱턴 시간)에야 「우려를 표명한다」는 논평을 가했는데, 이것도 한국과 일본 특파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나온 것이었다. 국무성 대변인의 정식논평은 이틀이 지난 19일에야 나왔다. 그동안 국방성이나 백악관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빈에서 돌아온 「머스키」 국무장관은 20일 처음으로 공식기자회견석상에서 한국사태에 관해 발언했다. 이때도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야기했다. 「머스키」장관은 『한국정부가 민주화로부터 일탈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대해 우려한다』고 말했으나 그 이상의 태도표명은 하지 않았다.
그는 또 『광범위한 기반과 정치적 지지를 결여한 한 동맹국정부를 미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원할 수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그같은 질문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나 민감한 것』이라고 답변을 회피하면서 『좀더 강한 발언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유용한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회견장에 나온 어느 한국기자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한 데 대해 「머스키」 장관은 『국무장관에 취임한 순간에 미국의 모든 외교정책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한국사태에 대한 미국의 태도표명을 끝까지 뚜렷이 하지 않았다.
「5·17」에 대한 미국의 태도
5·17조치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극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것이었다. 이같은 소극적인 반응은 과거 카터정부가 한국정부의 국내 탄압정책에 대해 즉각적이고도 강경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는 퍽 대조적이었다. 그 까닭은 당시 「카터」대통령이 처해 있던 국내외적인 사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었다.
인권과 도덕을 내세웠던 「카터」의 외교정책은 세계 도처에서 실패작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란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 등에서 미국의 외교는 거듭 좌절을 맛보았다. 특히 이란에서는 결정적인 펀치를 얻어맞았다. 독재자이긴 했지만 친미적이던 「팔레비」정권이 미국의 외면으로 붕괴된 다음 들어선 「호메이니」의 회교공화국은 강력한 민족주의 열기 속에서 반미감정을 노골화했으며, 일단의 회교학생들은 79년 11월4일,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 그후 1년3개월여 동안에 걸쳐 미국외교관 등 52명을 인질로 억류했다.
「카터」 대통령은 80년 4월24일 테헤란에 인질로 잡힌 미국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특공작전을 벌였으나, 결과는 특공대원 8명이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 위신의 치명적인 실추이며 「카터」외교의 결정적인 실패였다. 한국에서 5·17조치가 있을 때 미국은 이란 실패의 악몽에서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국내적으로도 카터정부는 선거 때문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임기 마지막 해를 맞고 있던 「카터」는 차기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을 둘러싸고 정쟁자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다투고 있었으며, 지명획득 후의 대통령선거전에도 대비하여 선거전략을 마련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워싱턴 정가가 선거 때문에 외국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을 때 한국에서 5·17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의 실권세력이 카터정부가 처해 있는 이같은 입장을 계산하면서 5·17의 타이밍을 잡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 당시 일부 외신은, 『한국의 장군들이, 미국은 한국의 안보를 희생하면서까지 강경하게 나오지는 못하리라는 점을 알고서, 마음 놓고 일을 저질렀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카터 미국정부가 이렇다 할 태도 표명이나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사태는 최악의 경지를 맞게 된다. 계엄령확대선포가 있던 바로 다음날, 광주에서 항쟁이 터져, 결국 한국 헌정사상 최대의 민족적 비극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비상계엄 해제, 유신잔재세력 퇴진 등 민주화를 요구하며 데모에 들어갔던 광주학생들의 가두시위는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시작되었으나 계엄군의 상상을 초월한 과잉진압으로 사태는 급속히 악화되어 갔다.
진압을 위해 수도권으로부터 투입된 공수특전단 병력은 「본때를 보여주려는 듯」 무차별 구타 살상을 자행했으며, 이때 격분한 데모는 광주 전시민의 항쟁으로 화대되었다.
시민들은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를 끄집어내 무장계엄군을 시 외곽 지역으로 몰아냈다. 이렇게 해서 광주는 한때 정부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시민의 자율적인 도시로 존재했다. 그러한 상태는 계엄군이 다시 진입하여 일부에서의 시가전 끝에 사태를 장악한 5월27일까지 계속되었다(光州항쟁의 진상에 관해서는 아직도 객관적인 전모가 밝혀져 있지 않다. 필자는 항쟁 당시의 현지 취재메모와 그후 입수한 자료를 갖고 있으나 그 공표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항쟁의 원인과 경과가 어떠한 것이었던 간에 광주사태는 집권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통치권의 크나큰 위기였다. 그리고 한국의 집권세력을 통하여 한반도 안정과 한국의 반공화를 추진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대한안보정책의 중대한 위기였다.
미국, 「안보」를 중시
광주항쟁에 관하여 미국이 반응하고 나선 것은 사태가 시작된지 3일후의 일이었다. 22일 낮(워싱턴 시간) 국무성의 「호딩 카터」 대변인은 일일 브리핑시간에 다음과 활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한국의. 남쪽에 위치한 광주에서 ·발생한 민간인투쟁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태와 관련되는 모든 당사자에게 최대한의 자제와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인 사태수습 방안을 모색하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불안사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태로운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 평온이 되찾아지면 우리는 모든 당사자들이 최규하대통령이 밝힌 대로 정치발전일정을 다시 시작하는 길을 찾도록 촉구할 것이다. 미국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미국은 한 미 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이같은 성명을 발표한 몇시간 후 미국은 백악관에서 고위정책조정회의(PRC)를 열어 한국사태에 대한 종합대책을 검토했다. 이 회의는 「머스키」국무장관 주재 아래, 「브레진스키」 대통령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브라운」 국방장관, 「터너」CIA국장, 「홀브루크」 국무성태평양 및 동아시아담당차관보, 「아마코스트」 국무성 아시아 ·태평양담당부차관보, 「플래트」 국방성 아시아 · 태평양담당부차관보 등 한반도 정책결정에 관련 있는 미행정부의 주요 관리들이 참석, 약 1시간 15분 동안 계속되었다.
이날 정책조정회의는 북한이 한국의 국내 정정불안을 틈타 무력도발을 할 경우에 대비, 한국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미국측의 확고한 결의를 재확인하고, 이에 대한 실증을 보이기 위해 조기경보기 파견 등 구체적인 경고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태가 가라앉은 다음, 좀더 개방적인 대의정부를 구성하도록 한국정부측에 촉구토록 노력하기로 했다.
이같은 결정에 따라 미국은 즉각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대응 안보조치를 취했다. 그 내용은, 10·26때도 취했던 것과 같은 기동함대의 파견과 조기경보기를 통한 북한측 동향에 대한 감시기능의 강화였다. 미국은 필리핀의 수빅만에 정박중이던 샌프란시스코로 귀항예정인 5만t급 항공모함 코럴시호의 항로를 바꿔 한국해역으로 급파하는 한편, E3A 조기경보통제기 2대를 예정보다 2개월 앞당겨 일본의 오끼나와에 급파, 한국지역에서 활동토록 했다. 또한 일본의 요꼬쓰까항에서 최근 보수를 마친 항모 미드웨이호에 대해서도 일단 유사시에는 단시간내에 코럴시호와 합세할 수 있도록 경계태세령을 내렸다.
항모 2척의 전력은 당시 한 ·미지상공군력과 합칠 경우 북한의 공군력을 제압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었으며, 유사시 한반도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전략변수였다. 이와 함께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는, 북한이 남침해 올 경우 미국은 즉각적인 대응을 하겠다는 경고를 한 외교경로를 통해 북한측에 통보했다.
『현상황에서 질서와 안보가 중요』
광주항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은 이처럼 한국의 안보를 맨먼저 떠올리면서 여기에 대비했다. 수많은 광주의 시민과 학생들이 민주화를 부르짖다가 무참히 쓰러져간 사태에 접하고서도, 그토록 인권과 민주화를 부르짖던 미국은 한국 집권 당국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해서 이렇다 할 규탄의 말 한마디 없었다.
광주항쟁에 있어 당시 미국은 시민편이라기보다는 명백히 정부편이였다. 광주항쟁이 단순한 민주화 요구를 뛰어 넘어 그 충격이 한국의 안보에까지 영향을 미쳐, 미국의 전략적인 이해에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태인식 아래서 미국은 그들이 추진하는 대한정책의 두 기등인 민주화와 반공화(안보) 가운데서 당면정책의 중점을 후자로 집중했던 것이다.
이같은 정책중심의 변화는, 따지고 보면 미국 대한정책의 특징이었다. 미국이 내세우는 인권이나 민주화 요구는, 그것이 안보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일이며 일단 안보가 우려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는 어김없이 안보 앞에 인권 ·민주화는 희생되기 마련이었다. 그 극적인 예가 광주사태에서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한 흐름은 광주항쟁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나타났다. 살상과 폭력의 회오리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5월21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는 서울에 온 미국기자들과 대사관에서 만나 한국사태에 관해 브리핑했다. 이 자리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은 광주사태를 심각한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이 사태에 간여할 생각이 없다』고 명백히 했다.
기자들이 한국의 최대와 동맹국인 미국이 비극적인 광주사태에 대해 뭔가 역할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물은 데 대하여 「글라이스틴」대사는 『솔직이 말해 이 단계에서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한국당국의 조치에 항의하는 뜻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고려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기자질문에 대해, 『광주사태로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할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한 다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는 판단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5월26일, ABC방송의 특별뉴스시간에 출연할 「아마코스트」국무성 아시아 태평양담당부차관보는 『미국은 타국의 국내 문제에 간섭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서는, 『한국사태에 대한 미국의 기본입장은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요구도 경청해야 하고, 질서와 안보확립도 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의 상황에서는 질서확립에 중점이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27일, 국무성의 「토마스 레스턴」대변인도 성명을 통해 『분명히 한국국민들의 국내문제인 광주사태와 같은 상황에 외국으로서 미국이 개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글라이스틴」대사는 서울에서 한국의 여야 중진들과 만난 자리에서 『광주사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 같은 북한이 이를 이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국민과 정부간의 타협을 강조하고 최대통령이 공약한 정치 일정이 준수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면서도, 『미국은 5·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명분은 「내정 간섭 불가」
미국의 광주항쟁을 보는 시각은 명백했다. 한국 정부당국의 강경조치가 민주주의 원칙과 인도주의에 어긋난 것은 틀림없지만, 한 지역에 통치권의 공백까지를 초래한 결과는 안보상의 중대위협이 되며, 이는 미국의 이해에도 관계가 된다는 시각이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시민측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으며, 한국당국의 진압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태도였다. 그렇게 하는 명분으로서 미국은 「내정간섭 불가」라는 원칙론을 내세웠다.
이같은 미국측의 태도는 대한정책의 기본적인 룰이기는 하지만 그 변화의 모습은 극적일 만큼 심한 데가 있었다. 광주항쟁이 있기 1년도 채 안 되는 79년 여름, 박정권의 탄압정책에 대해 취했던 대응태도와 광주사태에 임하는 미국의 태도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얼마나 심한가를 바로 알 수가 있었다.
YH사건, 김영삼파동 등으로 한국의 정정이 위기를 치닫고 있던 79년 당시, 미국은 노골적인 내정간섭의 자세로 박대통령에게 대들었다. 특히 YH 사건 때는, 한국 경찰이 여공들의 농성장에 난입하여 폭력을 휘두른 데 대해 미국은 『야수적인 행동』이라고 극렬하게 비난하면서,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끝내는 주한 미대사를 본국에 소환하기 까지 했다.
YH사건때의 폭력에는 비할바가 되지 못하는, 그야말로 「야수적인」 광주의 폭력행위에 대해 이렇다 할 비난의 코멘트 한마디 하지 못한 80년5월의 미국과 79년 여름의 미국 가운데 어느 쪽이 참 모습의 대한정책인 것일까?
미국은 광주항쟁 동안 북한이 이를 악 이용하여 한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어떤 군사적 조치를 취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그 때문에 민주화조치는 일단 뒤로 돌리고 안보에 정책의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가 한국의 군부 실권세력을 고무한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런 점에서 그 당시 과연 북괴의 위협이 현실적으로 임박해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당국은 두말할 것 없이 북한의 위협을 계속 강조했다. 5·17직후 당국은 「비상계엄 전국확대선포의 배경과 불가피성」이라는 팜플렛을 만들어 요로에 배부한 적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당국은 『10·26사태 이후 한국의 정국이 혼란해지자 북괴공산집단은 개성 북방의 곡산지역에 대규모의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키고 그들의 정예부대인 특수8군단의 행방을 은닉시켰으며, 학생 및 근로자들의 폭력시위와 때를 같이하여, 「결정적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판단, 5월15일부터 20일 사이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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