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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미국은 국익보장대가로 살인정권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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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국익보장대가로 살인정권지원

  미국은 12 ·12군부반란과 5월 광주학살을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 세력이 한반도에서 미국 이익을 옹호해주는 댓가로 5공화국의 집권을 허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대한반도 정책에서 한국민의 인권 또는 민주화보다 국가안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 군부독재의 실질적인 배후세력임이 드러났다.
  전두환.노태우 세력이 5월 광주학살후 집권태세를 갖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 긍정적 태도를 표명했는가는 당시 AP, 로이터등 외국통신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국내에서 보도되지 못한  80년 8월∼81년 2월까지의 한국관련 외신기사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80년8월7일 AP통신은 12 · 12가 오랜 기간 동안 사전계획된 쿠데타였다고 주장,서울에 있는 한 미국관리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죽기 몇달 전 박정회 대통령이 점차 강경노선을 취하는데 대해 군내부의 몇몇 선임장성들이 이를 언짢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과 그의 동맹 자들은 지휘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
  이 관리는 또 12 · 12사태를 결행한 '7내지 8'명의 장성그룹 우두머리가 전두환임을 밝히면서 이들은 박정회 사망 후 선임장성들이 자신들을 한직으로 추방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12 · 12쿠데타로 전두환 그룹이 지휘권을 찬탈한 후 군내부는 동요하고 있었다. 상당한 세력을 결집한 반전두환 그룹이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80왼1월에 역쿠데타를 기도했으나 미국의 저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때의 상황을 외신은 주한 미고위군사관리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난 1월- 전두환이 주도한 선임장성들에 대한 쿠데타인 '장군들의 방'이 있은지 약1달 후 -몇명의 장성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가 도와주기만 하면 전두환씨를 몰아내겠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들을 내보내버렸다. "
  미국은 12 · 12당시 전 그룹과 긴장된 관계를 유지했으나 전이 실권을 장악함에 따라 관계를 개선시켜 가고 있었으며 대북한관계와 관련한 안보라는 측면에서 이들을 가장 신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다시 전두환 노태우 등 군부실권 그룹내부에 반미감정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으며 전에 대해 '미국을 이해하며 애정을 가지고 있고 미국과의·강력한 유대관계를 맺기 원하는 민족주의자'로 파악하고 있었다.
  실권을 장악한 전그룹은 80년 5월의 학생시위와 광주항쟁 과정을 거치면서 권력이 표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당시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군부지도자들이 정치자유화를 위한 일정과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관용조치를 포함한 일련의 방침들을 실행에 옮기기를 촉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한 미국관리들을 비롯한 미국의 대한반도관계 실무자들은 전그룹의 권력장악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조건만 갖춰지면 그를 승인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해  1월 머스키 국무장관과 주한미대사 월리엄 H .글라이스틴  그리고 주한미군사령관 존 A.위컴등은 도꾜에서 회동,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을 재검토했다. 거기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결정이 내려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8월초 위컴은 익명을 요구하면서 기자들에게 중대한 내용을 발설했다.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에 게재된 기사에서 그는 "만일 실력자 전두환장군이 예상대로 대통령직을  인수함으로써 이미 거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자신의 체제를 굳히기만 하면 미국은 기꺼이 그를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전두환씨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일정한 기간을 두고 한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내기만 한다면. 그리고 현상황이 안보를 위태롭게 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덧붙인 뒤 "그것이 바로 한국민들이 바라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고 강변했다.
  당시는 계엄령이 연장되고 있었고 대대적인 체포와 언론탄압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국민들은 이른바 '정치발전'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러한 한국내의 분위기를 의식한 나머지 위컴의 발설내용에 대해 "한국인들이 그것을 미국이 전두환을 인정하는 신호로. 해석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면서 강력히 부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대한정책에 관해 국무성과 아무런 견해차이도 없다고 주장해온 국방성도 그 기사와 위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잡아떼면서 그가 전두환을 승인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국방성관리들은 위컴이 "미국은 전두환이 이미 한국관리들에게 전달된 바 있는 기준에 합치될 때만이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이 제시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 새로운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기반이 확인될 수 있는 선거를 실시할 것
  · 정치자유화를 위한 일정을 계속 추진할 것
  · 한국사회의 개방분위기를 조성할 것.
그러나 미국은 전그룹이 이미 최규하대통령을 교체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할 책략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은 다만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적어도 당시까지는 전 그룹이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형식을 민들어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을에 있는 당시의 미국관리들은 "전두환이 이번 가을에 실권이 없는 최규하 대통령의 퇴임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될 경우 한국의 통일주체 국민회의는 전을 대통령으로 지명하게 될 것이고 미국은 그를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울의 정치분석가들도 박정회의 오랜 제자요 부하였던 전이 대통령 직을 차지하기 위한 계획들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조짐이 증대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은 무능한 최규하를 명목상으로 대퉁령에 앉혀 둔채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최규하가 8월에 사임하기 전, 서울의 고위 미국관리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또 다른 박정희가 될 것인가.?  내 생각에는 절호의 찬스다. 그는 할 것이다. "
  이 관리는 전이 허영심이 강하고 잔인하다고 묘사하면서 ·.그는 자신이 제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믿는 자이며 자기 능력으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매우 의지가 강한 자"라고 말했다.
  이 관리는 또 전이 일단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아마 평생 그 자리에 눌러 앉을 것이라고 말했다.
  8월 16일 최규하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8월27일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총투표자 2천 5백 25명 중·2천5백 24표(무효1표)를 얻은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은 곧 미국이 제시한 앞서의 기준들을 형식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주요 정치범들에게 특사를 내리는 한편 김대중씨를 미국으로 내보냈고 81년 선거 인단 선거를 통해 절대다수지지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은 그를 승인했고 강력한 지지의 표시로 새로 등장한 레이건 행정부는 그에게 최초의 외국원수방미 자격을 부여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81년 2월 초 전두환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계기로 미국외교 정책이 전환되었음을 명백히 밝혔다.
즉 미국은 우방국이 민주정부든 독재정권이든 상관없이 인권보다 안보 지원을 강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국무성은 전 대통령이 워싱턴을 떠나기 전까지는 의회의 '전세계 인권침해에 관한 보고서'의 발표를 연기시켰는데, 이 보고서는 카터 행정부가 작성한 것으로 전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조치보다 한술 더 떠 레이건은 카터의 주한 미군철수 계획을 유보하였고 3 만9천명의 미군을 계속 한반도에 주둔시킬 것을 약속하였으며, F-l6 전투기 판매를 허용하였다. 이는 전두환의 국내에서의 입장을 강화시켰고, 자국의 미군 철수를 우려하고 있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안심시켰다.
레이건은 자신을 방문한 전대통령과의 회견을 '미국이 아시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공약을 지니고 있음을 아시아인들에게 보여준 신호'라고 말했다.
  미국 정책의 변화가 명백히 드러나고 있었다.  한 국무성 관리는 "안보는 우리의 최상의 과제다 한 국가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나라 내부의 일일따름이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카터 시대의 냉담한 한미 관계를 해소하고 레이건과 새로운 동반자적 관계가 성립되었음을 부각시켜 주려는  듯,전두환의 워싱턴 체류 중 한국에서는,16만 1천 5백명의 미군과 한국군이 참가하는 연례기동훈련이 시작되었다. 레이건 시대 최초의 이 합동군사 훈련은 팀 스피리트 81'로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