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SBS 「뉴스 따라잡기」프로가 참회자로 등장시킨광주진압군 사병 출신 이성우씨 추적

본문

SBS 「뉴스 따라잡기」프로가 참회자로 등장시킨광주진압군 사병 출신 이성우씨 추적

그는 정신 건강에 문제, 증언 내용도 근거 없다.



이동욱 (월간조선 기자)



  광주 계엄군의 참회?

지난 1월9일 밤 11시 SBS 는 「생방송 뉴스 따라잡기」에서 1980년 광주사태 당시 20사단 60년대 사병 출신 이성우씨(38)를「 참회의 증인」으로 출연시켰다. 진행자 오세훈 변호사의 말처럼 「익명으로 얼굴을 가리고 증언한 사람들은 여럿 있었으나 실명으로 직접 출연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특히 증언 내용이 충격적이어서 중앙 일간지들이 이 내용을 받아서 보도했다.
자막을 통해 소개된 이씨는 당시 진압작전에 투입된 이후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다. 제대 후 경남대 무역학과 1학년에 복학했으나 제적당했고 결혼을 하고서도 아홉번의 요양소 생활을 했으며 이혼하는 아픔까지 겪었다고 한다. 지금도 대인 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소개됐다. 그런 이성우씨가 당시 텔레비젼에서 증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주 사직공원에서 4백50명이 죽었지만 폭도들 때문에 시체를 운반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국민대학교에 주둔 중이던 80년 5월 21일 강당에서 지휘관으로부터 들었다」
  ◀「국민대에서 실탄을 지급받고 발포명령도 받고 내려갔다」
  ◀「5월 22일 새벽 서울 공항(성남)에서 민간인 시체가 비행기에서 내려지는 것을 직접 봤다. 숫자를 밝히는 건 곤란하다」
진행자 오세훈씨는 이성우씨 프로의 맨 마지막 무렵 이씨의 대대장으로부터 이날 오후에 받았다는 전화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양측 의견을 전달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 이성우씨가 차지한 양에 비하면 대대장의 전화내용은 조죽지혈에 불과했다.
당시 이성우씨 부대의 대대장이던 윤재만씨(52. 현재 LG 그룹 이사)는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미 신문에 보도된 이성우씨의 증언을 지적하며 반박했다고 한다. 윤씨는 기자에게도 동일한 설명을 했다. 우선  광주 사직공원에서 4백50명이 죽었다는 등의 발언을 한 적이 없었고 실탄분배와 발포명령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병력을 수송하기도 전에 실탄분배를 할 경우 비행기 내 오발로 인한 대형참사가 야기될 수도 있는데 과연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성남비행장에서 민간인 시체를 내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못박았다. 80년 5월21일 광주에서 총격전이 있었지만 민가닌 사상자들은 시위대 속에서 발생해 군인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으며 만약 사망한 군인이 있었다면 광주 인근의 군병원 영안실에 안치하는 것이 순서라고 설명했다.

조선대 부속병원 신후 박사

그동안 검찰 발표 및 재야단체에서 출판된 기록과 수많은 증언에서도 이성우씨와 유사한 주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인물을 등장시켜 광주사태를 증언하도록 한 이 프로는 시청자들에게 광주사태에 참여한 군의 인상을 극도로 잔인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이씨의 주장은 신뢰도를 얻었다.
지난 1월30일 밤 이성우씨가 입원하고 있다는 광주 조선대 병원으로 그는 퇴원하고 없었다. 기자는 그를 입원시켜 준 신후(50) 박사와 전화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보시기엔 이성우씨 건강상태가 어땠습니까.
『제 분야는 아닙니다만… 지금처럼 자꾸 언론에 나가고 사회활동하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나쁘다고 봐요.  또 약물치료는 어려울 것 같았어요. 조용히 마음을 가라 앉히고 기자들과는 만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은 했지요』
  -다시 집으로 갔었지요.
『갈때 나하고 약속을 했어요. 교회에 다니겠다고 말입니다. 신앙으로 극복해야 할 것 같았어요』

  아버지 이종렬씨

주인공 이성우씨는 청주에 살고 있었다. 광주사태 이후 이성우씨의 16년간의 생활은 아버지의 탄식 속에 남겨져 있었다. 술에 탐닉하고, 몇 차례인지 모를 요양원 입원과 퇴원의 반복. 아버지 말을 빌면 이성우씨의 최근 행적은 작년 9월 노태우씨의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부터 「재발」됐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 일을 나갔다가 낮에 집을 들러보니 전화통을 붙들고 여기 저기 전화를 하길래 야단을 쳤지요. 며칠 후 무슨 신문사에서 찾아 왔어요. 저희들끼리 뭐라고 얘길 하는 것 같더구만. 얼마 후 무슨 신문에 얘 사진하고 기사가 났어요. 그걸 갖고 또 방구석에서 뒹구는 거라. 몇 달 동안 그런 일이 많아졌지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철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성우씨가 들어왔다. 약간 흥분된 상태로 그가 겪었다는 광주사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내가 광주 비행장에서 직접 파묻은 시체가 일곱 구는 될 거요. 세 번이나 사격을 했어요. 광주 시민들 기분 나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먼저 쐈어요…』
  -서울 공항에서 시체를 정말 봤습니까.
『정말이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몇 구나 됐습니까.
『50구는 됐지요』
  이 숫자는 방송에서 나오지 않은 말이다. 그 이유를 물으니 당시 이응모 부장과 서유정 PD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언론에서 찾아오기 시작했습니까.
『작년  9월쯤이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충청 리뷰」  95년 10월호가 그의 말을 최초로 언론화한 것이었다. 표지 상단엔 「광주 진압군 이성우씨의 양심선언이란 표제가 달려 있었고 「시신 20~50구 운구 장면 봤다」는 제목으로 네 페이지에 걸쳐 그의 주장을 기사로 다루고 있었다. 이 보도를 시작으로 그의 주장이 지방지 곳곳에 실리면서 언론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이고, 급기야 해가 바뀐 96년 1월 9일 SBS를 통해 대대적인 방송을 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중앙 일간지들도 보도했다.
  -참회도 충분히 한 것 같은데 기분이 좀 어때요.
『저는요, 광주의 원한을 풀어야 해요. 시민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죽었는데요. 동사무소 직원이…암매장한 걸 보고… 나는 알아요… 어디에 파묻었는지…동사무소 직원이…』
  -왜 광주사태에 대해서 이성우씨가 죄책감을 느껴요.
  『얼마나 많이 죽었어요? 수천명이요』
  -이성우씨가 그 중에서 얼마나 죽였어요
『난 안 죽였어요. 다만 내가 쏜 총알에 맞았을지도 모르는 거지』
  -그럼 죄책감 느낄 필요가 없는데 왜 죄책감을 느끼죠.
『자면 꿈 속에 나타나니까. 시체들이…
  -처음에 광주에 내려갈 때 겁났지요
『그럼요』
  -태어나서 사람 죽은 시체는 그때 처음 봤습니까
『그때가 처음이에요. 창자가 튀어나오고 피…』
  -그럼 그때는 엄청나게 무서웠겠네요. 겁이 많이 났지요.
  그는 이 질문에 숨이 가빠지더니 갑자기 「왁」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흘리는 눈물은 두 볼을 타고 내려와 이불을 적실 만큼 많았다. 콧물과 눈물이 범벅된 채 울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얼마나…고생했는지…알아요…말도…말아요…  내…전두환이 때려 죽일 놈…』

최초 증언이 아닌 재탕증언

기자는 이성우씨의 전부인도 만나보았다. 그녀는 6년 동안 연애한 다음 이성우씨와 결혼한 사이였다고 한다. 6년간 연애, 7년간 결혼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술로 날을 지새고 요양원을 수시로 드나들던 생활능력이 전혀 없는 남편을 두고 고민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딸의 교육문제를 생각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혼할 수 밖에 없었다며 눈물을 적셨다.
-이성우씨는 언제부터 그런 생활을 한 겁니까.
『착한 사람이었어요. 군대 갔다 오더니 복학해도 집에만 있더라구요. 그땐 괜찮겠지 싶어 결혼했지요. 그런데 밤 길 걷는 것도 무서워하고 술만 마시는 거예요』
-광주사태 때 실탄지급 받은 얘기나 서울 공항에서 민간인 시체가 공수되어 온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까.
『그런 얘기는 못 듣고요, 무슨 공원에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은 걸 직접 나르고 청소했다고 했어요. 그런 얘기는 잘 안하려 해요.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어요』
  -어떤 증상을 호소합니까
『 가슴이 답답하다고 그래요. 텔레비젼에서 과격한 장면이 나오면 특히 더 그랬어요. 그럴 때마다 술을 먹고요. 술을 왜 먹냐고 물으면 술을 먹어야 아픈 게 가라앉는다고 하더라고요. 밤길 나서는 걸 두려워했어요』
  -입원은 했습니까
『 첫번째 입원한 게 결혼한 지 2년째 됐을 무렵일 거예요. 그동안 한약이고 침이고 다 했는데 소용없더라고요. 입원 안 할 수는 없고 돈은 없고 요양원에 보냈지요』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그런 적이 없어요. 요양원에도 의사가 있다고는 하는데 1주일인가 한달에 한번 의사가 왔다 가는 정도래요』
  -그럼 정확한 병명도 모릅니까.
『모르죠. 그것 때문에 이혼할 때도 무척 고생했어요』

「급성 전역 신경쇠약증」

기자는 이성우씨를 취재하며 그가 출연했던 비디오 테이프와 인터뷰 테이프 및 검찰의 5.18 수사발표 자료와 이씨의 주장을 비교한 자료들을 서울의 모 신경정신과 전문의(62)에게 의뢰해 보았다. 다음은 그 정신과 의사의 소견 내용이다(그는 익명을 요구했다).
<진단-자료만을 놓고 볼 때 이 사람은 광주사태 당시 전투에 맞먹는 환경 속에서 「급성적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급성적 스트레스」에는 한국동란이나 월남전 같은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급성 전역 신경쇠약증(acute battle exhaustion)」이 있다.
증세-망각, 현실에 대한 무관심, 무기력증 등으로 시작된다. 우울증은 여기서 파생된 현상일 가능성이 많다. 이로 인해 환자는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불면증이 나타나고 상당한 기간 악몽에 시달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성우씨의 경우 텔레비젼에 출연해 발언하는 모습을 보니 이같은 최악의 상태를 다행히 빠져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환자는 이 병이 회복되는 단계에서 다른 합병증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녹음된 가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환자는 그동안 술에 의존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 자료의 코멘트에 의하면 이성우씨가 증언한 광주사태의 내용 중에는 사실과 거리가 먼 것들이 많다고 한다. 이 코멘트가 맞다면 그는 현재 「알콜성 망상증」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이때 환자는 자신의 단절된 기억들을 상상과 외부로부터 입수된 정보로 적당히 끼워 맞추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을 「알콜성 작화증(Alcoholic Compeblation)」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성우씨의 경우 증세가 어디까지 진전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는 이런 증세의 연장선에 머물고 있다고 판단된다.
결론- 입원 치료가 요망된다>
이성우씨의 방송출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작년 12월1일 지금 프로의 모태가 되는 「인간탐험 뉴스 따라잡기」에 한 번 출연한 적이 있었다. 11공수 출신 1명과 전교사 상사 출신 한 명 등 세 사람이 증언하는 내용이었다. 이때에도 이성우씨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런 그를 한달이 조금 지나  다시 출연시킨 이유를 물었더니 담당 PD는 『당시엔 반응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고방송도 하고 이성우씨의 기구한 삶을 강조해서 내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반응은 꽤 있다』고 했다.
SBS 담당 프로듀서 서유정씨와 인터뷰를 했다.
  -광주사태에 관해서는 양쪽 이야기를 들어도 부족할 때가 많은데, 일방적으로 한쪽 이야기만을 방송에 내보낸 것 아닌가.
『인정한다. 상식적으로 납득 안가는 부분도 있다. 국민대에서 실탄을 주었다는 것도 그렇고...그러나 시간이 없을 때는 완성도에 문제가 생긴다. 어쩔 수 없다. 취재하다 보면 괜히 믿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어쩌면 그의 말은 전체가 엉터리일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시 계엄군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이 프로를 다시 하고 싶다』
-대대장이 사실확인을 위해 전화하지 않았나.
『하긴 했다. 그러나 나와 달라고 하자 피했다. 진압군에 섰던 사람들이 전부 그렇다. 그들은 숨어서만 얘기한다. 「소속도 이름도 밝힐 수 없다. 그러나 내 주장은 사실」이란 식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진압군들은 너무 비겁하다. 그렇게 옳다면 자신의 직을 걸고라도 언론에 나와야 하지 않는가. 이성우씨는 오히려 순수하다. 그는 아무 보상도 없이 위험할지 모르는 자리에 나온 것이다』


『검찰 못 믿는다』

  -이씨의 증언이 사실과 다를 때 군과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았는가.
『이제는 겨우 진압군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내보낸 것인데... 책임은 있다. 욕해도 할 수 없고. 방송은 분위기 타는 것이니 어쩔 수가 없다』 
-검찰 발표에는 이씨가 소속했다는 20사단 60연대는 시민군과 교전한 적이 없다고 나와 있다.
『검찰 발표를 다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여러 증언들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여기저기서…』
검찰의 발표와 관련해 진행자 오세훈 변호사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해 보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광주사태와 관련해서는 누구도 객관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는 몰라도 국지적으로는 아무도 제대로 모른다. 예를 들어 「암매장설」이 있지만 누구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국지적이라 하지만 이성우씨가 진술한 내용은 1개 대대 4백여명의 집단 행적이다. 200사단 60연대 2대대는 80년 5월 22일 광주 비행장에 도착해 사태가 종료될 때까지 시민군과 교전한 사실이 검찰 조사에도 나오지 않는다. 또 이성우씨는 광주로 공수되기 전에 실탄을 지급받았다고 했는데 병사들에게 실탄 지급을 한 채 공수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전체적으로 군부대 이동이 적힌 작전 일지가 있어도 이성우씨 같은 개인이 겪은 사실은 기록이 없지 않은가.  사망자 숫자만을 보더라도 검찰은 자신있다고 하지만 광주시민들 입장에서는 지금도 검찰 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제3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 발표도 믿을 수 없다』

『국방부도 항의하지 않더라』

「뉴스 따라잡기」의 제작진들이 검찰 조사에 대해서는 신뢰를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검찰을 믿지 못한다고 하면서 정신질환자로 여겨지는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 부분을 서유정 PD에게 질문해보았다.
-증언자는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있다고 소개됐다. 화면에 비친 그의 행동거지에서도 정상적인 사람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의 정신건강을 검증했나.
『나름대로는 했다』
  -나름대로라는 의미는.
『비록 행동은 조금 이상하게 보이지만 그의 말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서울에서 숙식을 시키며 사흘 동안 함께 있었으며 실탄 지급 상황, 시체공수와 관련한 내용들을 수시로 물어봤다. 그의 진술은 항상 일관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물어 보았을 때 「내가 모르는 부분도 있다. 그건 모른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 정도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서유정 PD를 비롯, 이 프로를 담당한 구성작가들은 한결같이 이성우씨를 동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응모 부장 역시 서유정 PD와 거의 같은 말을 했다.
  -이 프로의 책임자로서 이성우씨를 내세우는 데 부담스럽지 않았습니까.
『요양원 경력 때문에 신경 많이 썼어요. 감정의 기복이 심한 편이었는데 못 믿을 정도는 아니다 싶었지요. 그래서 방송에 내보내기로 결정한 겁니다. 다만 「이건 과장이다」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기자는 이성우씨가 어떻게 방송국에 나오게 됐는지 이응모 부장을 통해 들어보았다.
『서PD하고 우리가 내려갔지요. 집에 들어가 자고 있는 걸 깨웠어요. 술이나 먹자고 안심시킨 다음 한참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리고는 「전에는(95년 12월1일) 방송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번엔 생방송이다. 나가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어요. 이씨는 좋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저 아이가 방송 나가서 마음이 편해진다면 가도 좋다」고 허락했고요. 그렇게 해서 데려온 겁니다』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군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우리 사회에 피해를 줄 수도 있는데요.
『충분히 납득합니다. 그러나 이게 시작이 아닐까요. 가해자측의 이야기를 다 모아보면 그때 가서야 실제 파악이 제대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국방부에서 항의가 오길 기다렸어요. 그런데 그쪽에서 침묵합니다.
물론 우리가 무리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들겨 맞더라도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도 있었어요. 월간지에서 방송매체인 우리의 한계를 이해하시고 대신 추적해 주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발포명령 받고 내려갔다고 얘기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성우씨는 했습니다』
  -검증했어야지요.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닙니다. 검증할 상대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대대장이 전화는 했잖습니까.
『숨어서 말이지요...처음엔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세훈 변호사에게 꼭 집어넣으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어요』
  -만약 이성우씨 주장이 부정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렇다면 사과방송할 겁니다. 그러나 검증 안되잖습니까. 전화는 많이 받았어요. 주로 공수부대 출신들이었는데 거의 전부가 정당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신분은 못밝힌다고 해요. 이러니 뭐가 됩니까』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정진홍 교수는 이 프로에 패널로서 처음 출연하고 자진 사퇴(?)했다. 그 이유가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은 왜 첫날만 출연하셨습니까.
『학자가 그런 데서 하는 일을 잘 모르고 끼어든 거지요. 첫날 해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그만뒀습니다』
  -그날 이성우씨를 보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까.
『저는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이 그 자리에 갔었습니다. 들은 게 전부였어요 그 사람이 이혼했는지도 모르고 방송 도중에 결혼 생활은 원만했느냐고 물을 정도였으니까요. 진행하기 전에 이런 얘기는 했습니다. 「이 사람은 인성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다. 어떤 잘못을 고발하는 민주 시민의 전형으로 삼기엔 퍼스낼리티가 제대로 성숙되지 못한 것 같다」고 말입니다』
  -「양심선언」이나 「참회」라고 이름 붙여진 폭로자의 윤리와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양심선언이라면 상당히 도덕적이고 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라고 할 수 있는 성스러운 것인데,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행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요. 그래서는 안됩니다. 양심선언이란 사실 규명에서 멈춰야지, 사실을 규명한다는 미명 아래 상대방에게 보복을 가하는 것이 과연 양심선언인가 말입니다. 우리 사회가 대단히 굴절됐다는 걸 말합니다. 일그러진 사회구조 속의 표현방식이 이른바 양심선언이란 말로 위장하고 설치는 셈이지요. 양심선언이란 사실의 규명에서 멈춰야 합니다』

이씨를 잘 아는 신경정신과 의사의 소견

서울로 올라와 기사를 정리하는 도중 이성우씨의 전화를 받았다. 서로 안부를 묻던 중 그는 자주 가는 병원에 약을 타러 간다고 했다. 아무도 그가 병원에 제대로 다닌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상했다. 그는 십년도 넘게 다니던 병원이라 했다. 그와 함께 그의 단골 병원인 청주 시내 모 신경정신과 의원을 찾아갔다.
의사 신모씨는 이성우씨 형의 고교 동창생으로 인간관계상 이성우씨를 대하고 있었다. 신씨는 환자의 동의 없이는 병력을 말해 줄 수 없다며 거절하다가 이성우씨의 동의를 얻어내자 지금까지 제대로 관찰할 기회가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
10년도 넘게 다녔다는 것은 일년에 한두 번씩, 때로는 2~3년에 한번씩 들르는 정도로 밝혀졌다. 정신과 의사로서 소견을 묻자, 신씨는 그는 『정신병에는 원인이란 것이 없고, 촉발인자라는 것만 있다. 그러나 광주 사태가 그에게 촉발인자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가 환자인 것은 사실이냐고 질문하자 『우울증으로 보이지만 14일간 집중적으로 관찰해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은 어렵다. 다만, 환자인 것만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신씨는 이성우씨와 같은 경우 성격이 모질지 못해 광주사태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스스로 소화해 내지 못한 경우로 설명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본인이 직접 죄를 지은 것과 항상 일치합니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책감은 건강한 죄책감이 아니라 잘못된 합리화가 죄책감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도 이런 방어기제가 사용될 수도 있습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이성우씨는 겉으로 보기엔 죄책감에 시달리는 양심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합리화나 승화를 못시켜 일어난 증상이라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 겁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요. 그런데 사회라는 단위 중에서 가장 작은 단위는 가정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에 속하려면 사회를 위해서는 못 살아도 최소한 가정을 위해서는 살아야 합니다. 환자는 이걸 못하고 있어요』
  -이성우씨의 경우 사실과 다른 부분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상황을 일시적으로 모면하려 거짓말을 하다 보면 그것이 굳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본인에겐 불안감만 많아지지요』
  -언론에서 현재처럼 이성우씨를 계속 양심선언자로 취급해 사회적인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면 환자에겐 좋은 겁니까.
『한두 번은 카타르시스로서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계속한다면 본인의 병은 강화되어서 낫기 힘들 겁니다』
  -이성우씨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치료받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요양원에서도 그랬고 청주 의료원에서도 그랬고 저도 마찬가지로 입원실이 없어 치료해 줄 수가 없어요. 그는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이성우씨의 가족과 이혼한 부인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지만, 유독 언론들은 그를 양심선언의 도구로 만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의와 역사 같은 거창한 단어에 깔려 한 인간이 쓰러져가고 있다는 느낌은 지나친 감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