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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황영시 5.18 계엄사령관 '탱크로 폭도 진압하라'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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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시 5.18 계엄사령관 '탱크로 폭도 진압하라'명령했다.

손광주(동아일보 뉴스 플러스부  기자)


80 년 5월21일 광주.
사흘간에 걸친 시위대와 계엄군의 격렬했던 공방이 이 날부터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시민군은 광주 시가지를 장악,광주 외곽에서 계엄군과 대치중이었다. 당시 외신에도 일부 보도됐듯이 경찰과 군이 치안권을 완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치안유지는 놀라울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이튿날인 5월22일 당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직무대리 정석환씨(61)는 광주에 주둔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예하 육군기갑학교의 모 장교로부터 충격적인 첩보를 입수, 중정 현홍주 기획정책정보국장에게 전화로 긴급 전언통신보고문을 보냈다. 다음은 전통문 내용이다.

  「수신: 부장. 참조; 기정국장
    제목: 황영시 육군참모차장,기갑학교 교장에게 전차동원 진압지시 .
  1,육군참모차장 겸 계엄사부사령관인 황영시 육군중장은 1980년 5월21일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교장인 이구호 장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광주사태는 선량한 시민들이 아닌 불순 폭도들이므로 기갑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전차를 전부 동원, 유혈사태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강력 진압할 것을 지시해왔슴.
  황영시 장군의 이와 같은 지시를 받은 이구호 기장학교교장은 시민들이 극도로 흥분하여 전차도 무서워하지 않고 대드는데, 그때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그땐 쏘고 빠지면 되지 안느냐고 강력 지시한 바 있으나 광주시민이 적군도 아닌데 어떻게 시민을 향해 발포하란 말이냐고 동지시를 정면거부했다고 함』

『유혈사태 나더라도 진압하라』
  요약하면 『황영시 당시 계엄사 부사령관이 전차를 동원해서 「광주폭도」들을 유혈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그러니 이 보고는 지난 16년간 묻혀져 있었다. 이 보고내용이 알려진 것은 지난해 말. 정씨가 5 · 18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에 소환되면서 였다.
  검찰은 이같은 내용을 근간으로 이구호(64 예비역준장) 당시 육군기갑학교 교장을 지난해 12월26일과 올 1월5일 두 차례에 걸쳐 조사한 뒤 황영시 당시 계엄사부 사령관과 대질심문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5 · 18 당시 ·황영시 계엄사부 사령관 겸 육군참모차장이 군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전차(탱크)를 동원하여 「광주폭도」들을 유혈진압하라』고 지시한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밝혀지는 것이다.
  지난 1월13일 기자와 만난 이구호씨는 『80년 5월21일 오후 4시경 황영시 계엄사 부사령관이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광주가 폭도들에 의해 점령당했으니 기갑학교에 있는 전차를 동원, 광주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또 당시 황부사령관이 『4 . 19때처럼 (데모대에) 전차를 빼앗기면 안되니까 모든 전차에 철조망을 감고, 화염병 투척에 대비하여 전차문을 모두 닫은 뒤 공격하라』는 세밀한 작전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이씨는 이 지시에 대해 『정식지휘계통을 통해 지시해달라』 , 『시민군들이 광주에 전차가 들어오면 모두 길바닥에 드러눕는다는 정보가 있고, 북괴군도 아닌 광주 사람들을 향해 엄청난 화력을 가진 포를 쏠수는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하자,황부사령관은 『(포를) 쏘고 밀고 들어가면 될 거 아니냐』며 화를 냈다고 증언했다.
  이씨의 증언은 광주진압 초기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전차를 동원한 진압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밝히는 것이어서 매우 주목되고 있다. 아울러 광주진압과정에 황영시 부사령관의 「역할」이 처음으로 드러났다는 점에서도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는. 또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지휘체계가 지난 1월13일 검찰이 중간발표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정호용특전사령관→ 공수여단장」 라인이 아니라 「전두환보안사령관  황영시계엄사부사령관→정호용 특전사령관 →공수여단장」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새로운 의문이 던져지고 있다.
  황영시 부사령관은 12 · 12당시 「경복궁 모임」에 참여했으며 유학성 국방부군수차관보, 차규헌 수도군단장 등과 함께 당시 중장급 쿠테타 핵심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황부사령관은 1군단장으로 있다가 12 · 12후 윤성민 계엄사부사령관이 1군사령관으로 나간 후 육군참모차장에 기용, 계엄사부사령관을 맡았다. 이는 신군부가 쿠데타 핵심을 계엄사부사령관에 기용함으로써 군권장악에 박차를 가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시민에게 포를 쏠 수는 없다』


  육군기갑학교는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CAC) 예하부대로 80년 5 · 18 당시 광주에 있던 육군보병학교 및 포병학교와 함께 외곽경비를 담당했다. 이구호씨가 전화를 통해 황영시 부사령관의 「전차동원 진압지시」를 받은 시점은 80년 5월21일이다. 따라서 이구호 기갑학교 교장은 당시 윤흥정 전교사시정관 겸 전남북계엄분소장의 지시를 받게 돼 있었다.
  이구호 전 기갑학교교장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황영시 계엄사부사령관과의 통화내용을 놀라울 정도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씨의 증언은 당시 정석환씨가 보고한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다. 이는 정씨가 이구호 교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기갑학교의 모장교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요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구호 교장이 증언한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다. 그대로 옮겨본다 (이구호 교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이 전화를 받았다).
  이구호-(부관으로부터 수화기를 건네받으며) 『교장입니다』
  황영시-「참모차장이다. 광주가 폭도들에게 점령당했는데, 전차를 동원해야겠다.그러나 4· 19 때처럼 (데모대에게) 전차를 빼앗기면 안되니까 전차 주위를 전부 철조망으로 감고, 화염병이 날아오면 화재로(전차)소실이 우려되니 전부 (전차)문을 닫고 광주를 공격하라』 (「4 · 19 때처럼 전차를 빼앗기면 ...」 부분은 황부사령관이 4· 19 당시 시위대가 접수한 「장갑차」를「전차」로 잘못 알고 있는 듯하다)
  이구호-『누가 그런 소리를 합디까? 전쟁터에서도 (전차에는) 철조망을 감지 않습니다. 전차궤도가 철조망에 걸리면 전차가 갈 수 없습니다. 교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또 시위대가 전차에 올라올 수도 없습니다. 만약에 올라온다 해도 전차는 1분간3백60도로 네번 회전하기 때문에 떨어져 나갑니다. 현재 월산동 고개에서 (시민군이) 계엄군과 대치중인데, 전주(전봇대)를 길에 눕혀놓고 「만약에 전차가 들어오면 우리는 모두 드러눕는다」고 합니다』
  황영시-「(전차) 포를 쏘고 밀고 들어가면 될 거 아니야」
  이구호-「저도 일국의 장군입니다. 장군은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우면 자진 행동합니다. 그러나 전방 155마일을 두고 북괴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광주에서의 일(시위)을 가지고, 우리가 국민에게 포를 쏘고 들어갈 수야 있습니까. (지시는) 지휘계통(전교사 사령관)을 통해 주십시오』
  황영시-「이 자식이 ...」
전화는 여기에서 일방적으로 끊겼다. 80년 5월21일은 전남북 계엄분소장겸 전교사사령관이 윤흥정 중장에서 소준렬 중장으로 교체되기 하루전이다. 이구호씨의 증언에 따르면 5월22일 윤중장과 소중장이 업무를 인수인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영시부사령관의 지시는 윤사령관을 통해야 마땅한 것이다. 당시 전교사 사령관이었던 윤흥정 예비역중장은 지난 1월14일 『80년 5월22일 오전10시 소중장과 업무를 인수인계했다』고 확인했다. 윤 전사령관은  「계엄사본부로부터 전차를 동원하라는 지시를 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한편 황영시 부사령관의 「전차동원 지시는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도 보고 되지 않았던 사항으로 확인되었다. 1월13일 이희성 당시 사령관은 『전차 동원계획에 대해 어떠한 보고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말해 당시 신군부의 정치인 연행, 국회봉쇄 등의 조치와 마찬가지로 「전차동원 유혈진압계획」 역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배제한 황영시 부사령관 등 신군부 실세들에 의한 계획이었던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전차포격계획」이 당시 황부사령관 개인이 수립한 것인지, 전두환보안사령관과 정호용특전사령관 등 광주진압 관련자들과 사전협의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황영시 부사령관은 지난 1월5일 검찰에서 『모르겠다』 「기억이 안난다』『녹음한 것이 있으면 증거를 대라』며 이같은 사실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청 5분이면 완파


  당시 육군기갑학교가 보유한 전차는 90mm M47및 M48A1 2개 대대, 1개 대대  32대씩 도합 64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차 1대당 30mm 기관포,50mm 대공포, 90mm 전차포를 구비, 화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군사평론가 지만원씨에 따르면 M47과 M48은 곡사포가 아니라 직사포이기 때문에 건물파괴에 놀라운 성능을 발휘한다』면서 『이 전차 두 대로 서울시청을 때릴 경우 5분이면 완파된다』고 말했다.
  이 두 전차의 유효사거리는 2km, 1분에 90mm 전차포 4발을 쏠 수 있고, 직격탄 이어서 명중률은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씨는 『전차 1대가 25층 고층아파트를 완전파괴하는 데는 2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만약 황부사령관의 「작전」대로 기갑학교의 전차 64대를 동원,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던 전남도청과 가톨릭 병원 등 주요 건물을 포격했을 경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이구호 전 교장은 『만약 전차를 밀고 들어가 포격했다면 광주시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을 것』이라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