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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7당시의 군부 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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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당시의 군부 인맥



5월 16일의 비상 회의

5월16일 국방부 회의실에서는 비상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날의 회의를 위하여 정호용 특전 사령관, 최성택 합참본부 제 2국장(정보국)은 전날 밤을 세웠다. 안건도 밝히지 않고 급히 소집된 이 회의가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을 태동시키는 서곡이라는 것을 누가 예측하였겠는가.

이날 회의는 주영복 국방 장관의 주재 하에 개최되었다. 참석자들은 합참의장, 육. 해. 공군 참모 총장, 노태우 수도 경비 사령관, 정호용 특전 사령관, 윤성민 제 1군사령관, 차규헌 제 2군사령관, 유학성 제 3군사령관 등 군단장급 지휘관들, 최성택 합참본부 제 2국장 , 그리고 육. 해. 공군 사관학교 교장 등이었다. 이 중요한 회의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치밀한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이날 회의는 개최 시간 30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았다. 국방부 장관실에서 주영복 장관과 유병헌 합참의장 사이에 심각한 의견 대립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영복 장복은 "오늘날과 같이 비상시국에는 군부가 주도하는 비상 기구가 설치되어야 한다"며 그전 단계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국회의 해산 및 각급 학교의 휴교 조치 등을 실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유병현 합참의장은 "국회 해산 문제까지 군부가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 "이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최성택 합참본부 제 2국장이 장관실로 찾아왔다. "회의가 늦어지고 있다. 빨리 회의를 개최하자"고 재촉했다. 주영복 장관이 "전두환 보안 사령관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전두환 보안 사령관에게는 사후에 그뜻을 전달할 수 있다고 최성택 합참 제 2국장은 주장했다. 최성택은 육사 11기로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과 함께 동기생들 가운데 가장 먼저 별을 달았던 선두 그룹에 속했던 인물.

회의가 시작되자 최성택 합참 제 2국장은 '현재의 국가적 위기 상황과 북괴의 동향을 비롯한 제반 국제 정세' 에 대해 브리핑했다. 브리핑을 마치면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사전에 철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어 정호용 특전 사령관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 전국적으로 확대할 것▲각급 학교에 휴교 조치를 내릴 것▲대통령의 자문 보좌 기구로서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를 설치할 것 등이 중요한 내용이었다. 참석자들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제출할 보고서에 각각 서명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예정을 하루 앞당겨 중동으로부터 5월 16일 밤 10시 5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밤 11시부터 청와대에서 전두환 보안 사령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 사령관, 김종환 내무장관,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모여 심야 대책 회의를 했다.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

5월 17일 상오 9시부터 각 군별로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사회 혼란이 더 이상 악화되기 전에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가 결의하였다. 이에 상오 11시부터 주영복 국방 장관 주재로 재차 전국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는 극도의 사회적 혼란이 조성되는 것을 막고 북괴의 오판을 막기 위해서는 조기에 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지역 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전환시킬 것을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회의가 끝나자 주영복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군의 결의를 보고했고, 신현확 총리는 국방 장관과 계엄사령관을 대동, 청와대로 올라갔다.

최규하 대통령은 전국 비상 계엄 안을 국무회의에 회부토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하오 9시 30분 중앙청 회의실에서 개최된 비상 국무 회의는 이를 의결하였고, 이날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확대를 선포했다.

그러나 , 전날 합의된 국회 해산 권과 국보위 설치 건은 5.17조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5,6공화국의 모태가 된 국보위는 5월 광주 항쟁이 유혈 무력으로 진압된 후인 5월 2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그 대신 계엄 포고 제 10호에 의해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파업 행위 금지 등이 튀어 나왔다.

수 백 명의 학생 운동가와 노동 운동가들이 체포 연행되었다. 또한 계엄 사령부는 김대중씨. 문익환 목사 등을 사회 혼란 조성 및 학생. 노조 소요 관련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 연행 하였다. 학생과 노동 운동가, 김대중씨 . 문익환 목사 등 체포 . 연행에 반발하는 정항의 예봉을 무디게 하고, 군의 단호한 실력을 보여줌으로써 저항의 기운을 꺽는 다는 계획된 시나리오에 의해 당시 실력자인 김종필, 이후락 등을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 연행하였다.

심야 기습 한파가 서울 일대를 뒤덮었다. 물론 이 기습은 10.26을 거치면서 군부 내부에서 치밀하게 계획된 시나리오에 의한 것으로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5월 17일 서울은 학생운동 지도부가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고 , 사태를 관망한다는 방침을 세워 놓고 있어서 지극히 평온한 상태에 놓여져 있었다. 이제 저항의 불꽃은 비상 계엄 확대 조치와 김대중씨 체포에 항의하는 광주로 넘어갔다. 광주 시민들의 항쟁과 군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정국은 급속히 냉각되어 갔다.

'대통령에로의 길'

10.26 이 발발한 직후 군 내부에서는 계엄 사령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사건 관련 설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이러한 군 내부의 '반 정승화' 기운이 주류를 이룬다고 판단한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장성들은 정승화 파 장군들 제거, '대통령에로의 길 '시나리오를 치밀하게 작성했다.

최평욱 국군 보안 사령부 총무 처장 허화평 국군 보안 사령부 비서실장(육사 17기, 현재 현대 사회 연구소 연구 소장)허삼수 국군 보안사령부 총무처 인사 과장(육사 17기, 4월 24일 현재 민정당 부산 동구 국회의원 후보) 3인이 비밀리에 시내의 롯데호텔 3층에 있는 사우나에 모여, 전두환 . 노태우 등 육사 11기를 중추로 한 군사 쿠데타를 결의하였다.

그후 이 계획에 가담한 사람 중 군인이 아닌 검사가 있었다. 박철언씨가 바로 그다. 국가안전기획부 부장 특별 보좌관을 거쳐, 4월 24일 현재는 대통령 정책 보좌관으로 민정당 전국 구 후보 17번이다. 1942년 생으로 경북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검찰청에 들어간 박씨는 당시 알려지지 않은 중핵 '개혁 주체 세력'의 한 사람이었다. 박씨는 79년 '남민전' 사건을 담당한 사람이기도 하다.

국군 보안 사령부의 전두환 중장을 정점으로 육사 11기 노태우 .백운택 등 소위 '식스 멤버'가 포진하여 12.12군사 쿠데타를 성공시킨 정치 군인들은 '대통령에로의 길' 시나리오를 본격적으로 짜기 시작한다. 이 시나리오를 작성한 사람은 보안사의 핵심 참모들과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나리오는 이희성 계엄사령관 , 유학성 중장, 차규헌 중장, 황영시 중장 등선임 그룹이 받쳐 주었고 노태우 수경 사령관, 정호용 특전 사령관 등 동기 그룹이 양해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허문도씨는 허삼수 대령의 강력한 천거로 주일 한국 대사관 수석 공보관에서 중앙 정보 부장(당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겸임)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인물로 두 사람은 부산고 동기 동창, 허삼수 대령의 급거 귀국 요청을 받은 허문도씨는 4월 16일 하오 2시 전두환 사령관과 마주 앉아 "전 사령관의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 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과 같이 권력의 구심점이 없는 난세에는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요법을 써야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전 사령관은 즉석에서 허씨를 중정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대통령에로의 길' 시나리오가 작성된 후 80년 초 국부는 국회해산, 정당 해산의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주한 미 대사관과 접촉한 사실이 있음이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이 시나리오는 5월 16일 비상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비상 계엄 전국 확대, 국보위 설치 결의로 표면에 드러났다.

당시의 군부 인맥과 그들의 현주소

12.12군사 쿠데타로 정승화 일파를 제거한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장군들은 , 12월 13일자로 단행된 군 인사 개편에서 군 요직을 장악했다. 전두환 국군 보안 사령관은 4월 14일 중앙 정보 부장 서리에 취임하여 권력의 핵심을 모두 장악,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도표는 5.17당시 군부 인맥을 나타낸다.

허삼수. 허화평. 이학봉(보안사 대공 처장, 현 안기부 제2차장, 육사 18기, 4월 24일 현재 , 민정당 김해 국회의원 후보), 최평욱 총무 처장, 권정달(보안사 정보 처장, 육사 15기)등 보안사 핵심 참모들은 5월 16일 국보위 설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계획에 깊속히 관여했다. 특히 국보위 설치 령 성안, 조직 구성, 국보위 위원과 상임 위원 및 분과위 위원의 인선은 권 대령의 책임 하에 5월 16일 완료된 상태였다. 작업은 안가에서 진행되었다. 이 작업장에 수도 경비 사령관 노태우, 특전 사령관 정호용, 제 20사단장 박준병 장군이 가끔씩 들렀다. 당시 수도 경비 사령부 제 33경비 단장을 맡고 있던 김진영 대령은 12.12군사 쿠데타에 가담하였으며 그후 제 3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현재는 수도 방위 사령부 사령관이 되어 있다.

광주 항쟁 당시 광주에 투입되어 무참히 학살을 자행한 부대는 특전사 소속 병력과 제 3군 소속 병력 및 2군사령부 지시 하의 전투 병과 교육 사령부,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는 전남 북 지역 계엄 분소 였다. 정호용 특전 사령관 예하의 최세창 제 3공수 특전 여단장, 신우식 제 7공수 특전 여단장, 신우식 제 7공수 특전 여단장, 최웅 제 11공수 특전 여단장 등은 18일 0시를 기해 주요 관공서와 학교 등에 투입되었다.

정호용 특전 사령관은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식스 멤버' 중 한 사람이며, 12.12 군사 쿠데타 이후 특전 사령관으로 발령 났다. 광주 항쟁 이후 육군참모총장 등 군요직을 거치면서 85년 12월 16일 박회도 대장에게 직을 인계하고 예편하였다.

87년 1월 20일 그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여파로 개각이 단행되면서 내무장관으로 입각하였다가 은폐. 조작이 문제되어 입각 3개월만에 물러났다. 6.29선언 이후 국방 장관으로 재 입각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었으며, 88년 2월 19일 제 6공화국의 새 내각이 조작되면서 국방 장관직을 물러나고 조각되면서 국방 장관직을 물러나고 4월 18일 현재 대구 서구 갑구에 민정당 국회의원 후보로 등록되어 있다.

최세창 제 3공수 특전 여단장은 육사 13기로 12.12당시에는 여단 병력을 이끌고 정병주 특전 사령관을 체포하여 12.12군사 쿠데타를 성공시킨 주요한 역할을 했다. 5월 광주 항쟁을 무력으로 진입한 뒤 최세창은 제 3군사령관을 거쳐, 현재는 합동참모본부 의장이다. 그는 미국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경역 학 석사 학위 소유자이기도 하다.

유학성 제 3군사령관 예하의 제 20사단은 21일 광주에 투입되어 유혈 진압에 앞장섰다. 박준병 제 20사단 사단장은 육사 12기로 광주 항쟁 이후 육군 본부 인사 참보 부장을 거쳐 81년 7월부터 3년간 국군 보안 사령관 직을 맡았다. 84년 7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여 민정당 국책 조정 위원장으로 예편하여 84년 7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여 민정당 국책 조정 위원장에 올랐으며, 현재는 충북 보은. 옥천 지역구의 민정당 국회의원 후보로 등록되어 있다.

제 20사단을 거느리는 제 3군사령관 유학성은 육사 8기로 12.12군사 쿠데타 때에는 황영시 . 차규헌 중장과 함께 최규하 대통령 및 육군본부측 지휘관을 설득하는 역할을 했으며, 12.12직후 국방부 군수 차관보에서 제 3군사령관으로 발령이 났다. 80년 7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여 전두환 정보 부장 서리의 후임(81년 1월 1일부터 국가 안전기획부로 개칭)으로 82년 6월까지 있다가 민정당 후보로 85년 2월12일 총선 때 등원하였다. 경북 예천에 민정당 후보로 등록했다.

2군사령관 차규헌은 19일 윤흥정 전투 병과 교육 사령관에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차규헌은 육사 8기로 12.12 군사 쿠데타 때에는 유학성. 황영시 중장과 함께 정병우 특전 사령관과 장태원 수도 경비 사령관 등에게 설득 전화를 하는 등 육본 지휘관들의 출동 저지에 노력하였다. 12. 12 직후 2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가 83년 1월 육군 대장으로 전역한 후 86년 8월 교통 부 장관으로 입각 하였다.

5.17 광주 항쟁 당시 육군 본부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육군참모총장을 겸임하고 있어 소준열 전남 북 지역 계엄 분소 장에게 광주 항쟁 진압 명령을 하달하고 있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 항쟁 이후 81년 12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여 방직 협회 회장을 거쳐 82년 5월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다가, 83년 10월 손수익 씨에게 장관을 인계하고 84년 이후 주택 공사 이사장으로 있다. 육사 8기 출신.

황영시 육군 참모 차장은 12.12 당시 전두환 보안 사령관과 함께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육사 10기 출신으로 81년 12월 제 24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83년 예편 후 84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감사원장을 맡고 있다.

제 20사단과 직접 연락을 취한 이종구 작전 처장은 육사 14기로 현재는 대구에 본부를 둔 제 2군사령관 직에 있다. 현 육군참모총장 박희도 장군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노태우 정권과 광주

10.26이후 12.12군사 쿠데타, 5월 16일 비상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 그리고 5월 광주 항쟁 유혈 무력 진압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시나리오는 국군 보안 사령부에서 입안되고 육사 11기 동기생들의 참여와 유학성. 이희성. 황영시 등 선배 그룹이 뒷받침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제 6공화국이 들어선 지금 광주 학살의 직. 간접적인 당사자들이 군 요직, 의회. 행정 요로를 장악하고 있다.

노태우 수도 경비 사령관은 5월 광주 항쟁 직후 80년 8월 권력의 창 출구 국군 보안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사임한 최규하 대통령 후임으로 8월 27일 통일 주체 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전보안 사령관의 후임으로 발령 난 것이었다.

군 내부 질서 체계는 이와 같이 항상 전임자의 심복이 권력 승계 절차를 밟는다. 81년 2월 25일 전두환 11대 대통령은 제 5공화국 헌법에 의해 7년 대통령은 제 5공화국 헌법에 의해 7년 단임의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7월 노태우 국군 보안 사령관은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고 정무 제 2장관(외교. 안보 담당)으로 취임하였다.

이제 노태우 정무 제 2장관은 체육부 장관 내무장관 등 권력의 탄탄대로를 걷는다. 85년 2.12 총선에서 민정당의 전국구 3번으로 등원하면서 당 대표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87년 6월 10일 개헌을 요구하는 전국민적인 저항이 전국을 뒤덮는 가운데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6공화국은 광주 학살의 직. 간접적인 당사자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