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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학살 책임자를 어떤 방법으로 처벌할 것인가

본문

광주 학살 책임자를 어떤 방법으로 처벌할 것인가



민간 정부가 들어서면 맨 먼저 국회. 민간 합동 진상 조사 위원회가 구성돼야

광주 항쟁의 진상은 규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이 시대의 당위성으로 부각되었다. 민주화의 분수령인 광주 항쟁이 당위성으로 부각되었다. 민주화의 분수령인 광주 항쟁이 제대로 규명되어야 한다는 대 명제에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국민들이 '광주'의 진상을 폭로하는 각종 자료에 염원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러나 울분과 통한이 응어리진 진상 규명의 목소리가 아직은 구체적인 심판의 움직임으로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여러 민주 운동 단체에서 공개한 자료도 진상 전체를 담아 냈다고 보기에는 아직 미흡하지만 전반적인 윤곽은 충분히 제시되었다 할 수 있겠다.

광주 학살과 직결된 현정권 또는 군인 출신 정치가의 집권 하에서 광주 항쟁이 제대로 규명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즉 군부 독재를 종식시킬 진정한 민주 정부가 출범해야 광주 항쟁의 진상이 규명될 여건이 충족된다 하겠다. 그럴 경우 진상 규명은 어떻게 되어야 하며 그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은 어떠한 근거에 의해 처리될 수 있을 것인가를 냉철하게 검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필리핀과 아르헨티나 등 외국의 사례를 알아보고 우리 나라의 경우 해방 후 반민 특위 법과 4.19후 반 민주 행위자 처벌법에 대해 살펴본 다음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에 대한 방법을 논하기로 한다.

필리핀의 아키노 암살 사건 처리

아키노 암살 사건을 조사해 온 5인 진상 조사 위원회는 84년 10월말 약 4백30일간의 조사 결과를 발표 이 사건이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85년 1월 민원 특별 수사 국은 베르 육군참모총장 등 25명의 군인과 민간인 1명을 아키노 살해 음모와 위증 등의 혐의로 특별법원에 기소했으나 특별법원은 동년 12월 2일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86년 2월 집권한 아키노 대통령은 집권 직후 아키노 재판 재심 청구를 위한 증거 수집을 위해 3인 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그후 최근까지 공청회 개최 등 증거 수집 활동을 진행 중인 3인 조사위원회는 아키노 암살에 마르코스 부부가 관련됐다는 확증을 잡아가고 있으며 대법원에 재심을 요청 하는 등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 반군 등의 국내외 현안 문제가 급박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쿠데타 음모가 빈번한 정세로 말미암아 진상 규명이 지연되고 있는 형편이다.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자 처벌

1983년 10월 총선거에서 승리한 급진당의 라울 알폰신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민주제도의 정착을 위해 군부의 정치 개입 봉쇄를 위한 장치 등을 마련했고, 군부를 대수술해 47명의 장성을 퇴역시키는 등 군부 숙청을 단행했다.

알폰신 대통령은 또 8년여의 군정 기간중 극좌 탄압의 미명하에 수행된 '더러운 전쟁'의 부작용인 정치 테러와 인권 탄압과 관련, 무고한 시민들의 불법 연행. 감금. 고문 르도 비뇨네 장군을 전격 구속하고 9명의 전군 사평 의회 위원 등의 장성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84년 8월에는 비델라 전 대통령이 군사 법정에서 체포되었다. 85년 12월 민간법원은 70년대말 좌익용의자 실종 사건과 관련, 호르헤 비델라 전대통령과 마세라 전 해군 사령관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고 나머지 3명의 전 군정 지도자에게 인권침해 혐의도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아르헨티나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즉 최고 군사 재판소가 재판을 하면서 "당시의 군 최고 지도자는 행방 불명자 문제에 대해 '간접적인 책임' 만이 있을 뿐 "이라고 이들을 옹호, 교모 하게 재판을 지연시키자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되고 결국 연방 고등 재판소가 이를 인계 받아 처리하였다.

해방 후 반 민족 행위자 처벌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은 전민족적 과업으로 제시됐다. 따라서 그 시급함을 모두가 인식, 초기에는 그에 대한 노력이 활발히 전개된 셈이다. 1946년 12월에 개원된 남조선과도 입법 의원은 1947년 4월 '부일 협력자 처단 법 수정안'을 상정하였으며, 정부 수립 후에는 제일 먼저 국회에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1948년 9월 통과 시켜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정식으로 발족되어 동년 2월부터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비호 하에 친일 분자들 대부분이 경찰과 군 그리고 행정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민특위의 조사는 많은 방해를 받고 결국엔 서울시 경찰국이 반민특위를 포위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동년 7월에 반민 특위 조사 위원이 총사직함으로써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범 민족과 과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4.19혁명 후 반민주 행위자 처벌

4월 혁명 이후 3.15 부정 선거 관련자에 대한 처벌 및 부정 축재자에 대한 처벌을 위하여 소급 입법이 제정되었다. 1960년 10월 서울 지방 법원이 부정선거. 부정 축재 관련자 등을 재판(소위 6대 사건 판결)하면서 당시 현행법의 불 비로 1명만 사형을 선고하고 나머지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4.19부상 학생들이 흥분, 민원 의사당 단상을 점거하고 반민주 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는 입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국회는 곧바로 '민주 반역 자 처리 법안'을 통과시켰고 , 동년 11월 소급 혁명 입법을 가능케 하는 4차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동년 12월 31일에 는 '부정 선거 처리법'. '공민권 제한법'이 공포되었다.

1961년 2월 7년간의 공민권 박탈 대상자 609명을 공고하고 2월 28일 특검 활동을 종결시켰다. 4월엔 공민권 제한 심사 위는 자체 심사를 종결하고 법에 따라 처리하는 과정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그 이후 소급 입법에 의해 기소된 31명 가운데 제대로 처벌받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당시 고위 공직자 대부분도 곧바로 풀려났다.

지금까지 살펴본 4가지 사례에서 나타난 공통점은 과거를 청산하는데 있어서 필수적 법적 장치로 소급 입법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법치국가에서는 죄형 법정 주의가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죄형 법정 주의와 소급 입법은 상호 모순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법 해석이다. 그러나 법 자체의 근본이념이 인간다운 삶과 인권 보장에 있다고 보면 법의 이념에 모순되지 않는 소급 입법은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가치와 기준 설정에 신중을 기해야 함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 방법

필리핀의 경우 발생 한지 4년여가 지난 아키노 암살 사건 규명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정치적 사건의 진상 규명이 상당히 어려움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의 와해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조사 착수 당시의 집권 세력의 진상 규명 의지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자에 대한 처벌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민간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4월 혁명 후의 반민주 행위자 처벌도 군사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좀 더 확실하게 과거를 청산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역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광주 학살 책임자를 처단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은 현행법상으로 어려움이 많다. 살인죄를 적용하여 처벌함에도 구성 요건과 최고 책임자의 관련 여부에 대한 명백한 증거의 불충분 등 공소 유지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따라서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 광주 항쟁 진상 규명을 위해 맨 먼저 '국회. 민간 합동 진상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이어 광주 학살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입법 제정을 하여야 한다. 물론 이 경우 소급 입법이 되겠으나 국민적 합의에 의한 시대적 소명을 띤 입법으로서 그 타당성이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급 입법은 반민주 행위자 처벌법 근거를 규정한 1960년 제 4차 헌법개정과 같이 개헌에 의하여 그 근거가 헌법에 규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는 재판 관할권을 일반 법원에 주어야 한다. 아르헨티나도 처음엔 군부 독재자 처벌 문제이니까 군사 재판소에 재판을 맡겼으나 군부의 반동적인 움직임이 재판의 과정에서 명백히 들어 나자 곧 민간 법원으로 사건을 이송시켰다. 우리는 처음부터 입법 재정 시 관할권을 일반 법원에 부여하는 것으로 명분화 시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민주화의 길목에서 광주 사태의 해결이 분명하지 않을 때 엄청난 민주화의 역기능이 작용할 수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감정에 치우친 광주 원흉 처단의 목소리는 법적인 처리를 무조건 백안시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민주화. 질서. 평화 등이 적법한 절차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진상 규명 심판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광주의 해결 열쇠를 쥐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후안 무처의 노태우 민정당 총재의 태도에서 우리는 광주의 해결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를 인식하여야 한다. 광주 학살의 실질적 책임자로 의법 처단되어야 할 자가 쥐고 있는 해결의 열쇠란 광주 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 박정희가 4월 혁명을 희석, 왜곡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수수 방관한다면 그 결과가 비극적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20세기 후반의 역사가 분단과 독재의 질곡에 얽매인 비상식적 시대상을 거부한다면 광주 학 살 책임자의 심판 문제에 대하여 냉철한 준비 작업이 지금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