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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권정달 "나는 신군부 주식회사 심부름꾼이었다"

본문

권정달 "나는 신군부 주식회사 심부름꾼이었다"



진술자:권정달

진술일자:1996.1.4. 1996.1.13. 1996. 2.26.

담당검사:서울지검 송찬엽



● 80년 5월 이전 전두환이

시국수습방안 마련 지시

●시국수습방안 시행 과정에서

정진찬탈 의도 있었다.

● 80년 6월 하순경 신당창당

지시받았다.

●허화평 방에서 신당 조직책

선전했다.

●나는 하나회 아니어서 소외당했다.

●시국수습방안, 국회해산이 목표였다.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시국수습방안 지지,

사전계획됐다.



(1996년 1월4일 진술)

검사 : 80년 4월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되었지요

권정달 : 예 , 그렇습니다

검사 : 사전에 진술인 등 보안사 참모들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도록 건의하 였나요.

권정달 : 제가 건의한 기억은 없고 다만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이나 신현확 총리 등에게 자기가 중앙정보 부장서리를 겸임하겠다고 말하고 다닐 때 저희들 참모들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중앙정보부 개편 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적은 있습니다. 전두환이 어떤 경위로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려고 마음 먹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검사 :당시 보안사의 핵심참모들인 진술인과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최예섭 기획처장 등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 취임을 며칠 앞두고 이미지 홍보를 비롯하여 중앙정보부 개편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사전준비를 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사전에 이미지 홍보를 하기로 한 기억은 없고 다만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허삼수가 자청하여 중앙정보부에 가서 개편작업을 하겠다고 한 사실이 있습니다.

검사 :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한 실질적인 아유가 무엇이었나요.

권정달:제 생각에는 당시 보안사령부는 돈이 없었는데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하면 예산문제에 융통성이 있 어서 그런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검사:전두환이 갑자기 돈이 필요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권정달 : 계엄령하에서 합수부장으로서 여러 곳에 격려금 등을 지급하다 보니 돈이 쪼들리는 것으로 알았는 데 그런 연유로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하게 된 이유가 아닌가 추측됩니다.

검사 : 집권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데 돈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요.

권정달 : 당시는 전두환 사령관이 실권자로 부상하자 군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여러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집 권을 권유하던 때였는데 그러다 보니 전두환 사령관도 사람을 접촉하는 것 자체가 과거와는 달라졌 습니다. 하여간 당시는 여러사람을 만나고 있었는데 자연히 돈도 필요했겠지요.

검사 : 당시 실권자로 부상한 전두환 입장에서는 사실은 계엄사령관 직책을 맡아서 명실상부하게 국정을 통 제· 감독할 생각이었으나 아무리 실권자라고 하더라도 군 서열상 막바로 계엄사령관을 맡기가 어려 워 차선책으로 부층리급인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함으로써 각종 각료급 대책회의에 참석할 생각으 로 증정부장서리를 겸임한 것이 아닌가요.

권정달 :그러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사 : 진술인은 전회까지의 검찰 진술시 80년 5월 초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소위 「시국수 습방안」을 수립하여, 5월12일 보고하였다고 하였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 예, 사실입니다.



전두환, 시국수습방안 수립 지시

검사 : 위 「시국수습방안」의 주요골자는 첫째 비상계엄 전국확대, 둘째 국회해산,셋째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였지요.

권정달 : 예 그렇습니다.

검사 : 시국수습방안을 지시받은 이후 그 구체적 내용을 성안하게 된 경위를 진술하시오.

권정달 : 전두환 사령관의 위와 같은 지시를 받은 이후부터 2∼3일 동안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정도영과 저 는 시국수습방안에 관한 집중적인 논의를 하였는데, 주로 허화평 비서실장실 옆에 있는 조그만 회 의실에서 만나 논의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를 주요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의 초안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검사 : 시국수습방안을 위와 같은 3가지·방안으로 결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권정달 :당시는 지역계엄이 선포된 상황이기는 하였지만 국민 대다수가 계엄해제를 요구하고, 군부실세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등 시위가 끊이지 않아 지역계엄은 「물 계엄」 또는 「종이호랑이」로 비하되는 듯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저와 보안사 핵심참모들은 지역계 엄만으로는 군이 전면에 나서서 정국을 장악하여 주도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따 라 계엄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와 저항을 강력히 제압하고 군부가 전면에 나서서 정국을 장악하기 위하여는 그 선행조치로서 지역계엄보다 한층 강화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최규하 정부는 일종의 과도정부적 성격을 띠고 있어 내각이 소극적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신군부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배제한 채 계엄사 령관을 통하여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는 상황하에서 내각을 조종, 통제하고 강력히 독려할 수 있 는 제도적 장치로서 국가보위비상기구의 설치방안이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제기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가보위비상기구를 통하여,내각을 조종, 통제하는 기능을.군부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헌법상 계엄해제 요구권을 가지고 있는 국회가 계엄해제를 요구할 우려가 있었고, 특히 당시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마저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계엄해제를 찬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그러한 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를 미 연에 방지하고 신군부에 의한 지속적인 정국장악을 담보하기 위하여는 국회해산 및 주요정치인의 연 행 등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러한 다각적인 고려하에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해 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라는 시국수습방안이 만장일치로 작성되었던 것입니다.

검사 : 위와 같은 세가지 방안을 내용으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은 그 내용이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대통령이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나요.

권정달 :물론 최초의 입안단계에 있어서는 그 당시 전두환 등 신군부가 정국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는 상황 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재가를 득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 나 질의하신 바와 같이 시국수습방안의 내용 자체가 혁명적이었던 것은 사실 이었기 때문에 대통령 의 재가가 나지 않 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전두환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은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집약된 의사임을 내세우면서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사실상의 압력을 행사하 면서까지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재가를 기도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검사 : 시국수습방안 입안단계에서부터 신군부 핵심세력들의 긴밀한 협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 요.

권정달 :예, 그렇습니다. 저를 비롯한 보안사 핵심참모 5명이 시국수습방안의 초안을 마련한 후로부터 80년 5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그 확정안을 보고 할 때까지 보안사 핵심참모 5명과 신군부핵심세 력들이 수시로 모여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하여 긴밀히 협의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군의 시국수습책 지지, 사전 계획됐다

검사 : 보안사 핵심참모 5명과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위와 같은 협의를 위하여 처음으로 모인 것은 언제인가 요.

권정달 : 정확한 일자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80년 5월4일 경이라고 생각됩니다.

검사 : 위 모임에 참석한 신군부 핵심세력은 누구누구였나요.

권정달 : 12 · 12사태의 주역들로서 그 당시 「12 · 12사태로 설립된 신군부주식회사의 주주들」로 행세 하면서 군부내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던 유학성 3 군사령관, 황영시 참모차장, 차규헌 육사교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은 확실히 모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에 대하여 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검자 : 처음으로 모인 장소는 어디인가요.

권정달 : 처음 모임은 보안사령관실 옆에 있는 대기실 용도의 작은 방에서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검사 : 그러한 모임을 갖기 위한 연락은 누가 담당하였나요.

권정탈 : 신군부 장성들에 대한 연락은 허화평 비서실장이 전담하였습니다.

검사 :첫번째 모임에서는 무엇이 논의 되었나요,

권정달 : 제가 우선 허화평 등 보안사 핵심참모 4명과 함께 작성한 시국수습방안 초안내용 즉, 비상계엄 전 국확대, 국회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방안 및 그 필요성 등에 관한 내용을 차트에 기재하여 보고하였으며 , 그후 참석자들 전원은 당시의 시국을 수습하기 위하여는 군부가 전면에 나서서 정 국을 장악하고 주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하여 전적으로 공감하였고, 그 방안의 일환으로 보고된 위와 같은 시국수습방안을 조속히 실행에 옮길 것을 또한 촉구하였으며, 이에 따라 시국수 습방안은 저희들이 마련한 초안대 로 확정되었습니다.

검사 :그후부터 80년 5월16일까지 사이에 황영시 등 신군부측 장성들과 시국 수습방안에 관하여 더 이상 논 의한 사실은 없나요.

권정달 : 위와 같은 모임은 한 번뿐이었으나, 그뒤에도 황명시 유학성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측 핵심장성들은 수시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혼자 또는 몇몇이 함께 찾아와 만나서 그에 관한 협의 를 하였습니다

검사 : 최종적으로 확정된 시국수습방안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된 것은 언제인가요.

권정달 : 80년 5월12일경으로 기억합니다.

검사 : 진술인이 흔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하였나요.

권정달 :시국수습방안 수립 당시 저와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정도영은 함께 보안사령관실을 수시로 드나들 었기 때문에 제가 흔자 보고하였는지 아니면 위 참모들과 함께 보고하였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 하겠습니다.

검사 :최종적으로 확정된 시국수습방안을 보고받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무어라고 하던가요.

권정달 : 시국수습방안 수립과정에서 수시로 저와 핵심참모들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하여 보안사령 관도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드린 시국수습방안 보고서를 검토하고서도 아무런 이 의제기가 없었습니다.

검사 :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위와 같은 경위로 확정된 시국수습방안을 언제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나요.

권정달 :그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에서의 재판진행 상황에 대하여 대단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에서의 재판이 끝난 후(80년 5월20일 이후)에 시국 수습방안을 실행에 옮기려고 생각하였으며 저희 핵심참모들의 생각도 동일하였습니다.

검사 :검찰조사결과에 의하면, 진술인 등은 시국수습방안을 80년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의결토록 한 다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려고 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와 같이 시국수습방안의 시행을 앞당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권정달 : 80년 5월15일 저녁무렴 전두환 보안사령관, 저를 비롯한 보안사 핵심참모 5명이 신군부측 황영시 차규헌 유학성 노태우 정호용 등과 협의하여 5월20일 이후 시행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갑자기 변경하 여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다음날인 5월 17일 24:00시를 기하여 즉각 시행하 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시행일자를 앞당긴 이유는 첫째 5월15일∼5월16일경 이화여대에 모 여 있던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들이 5월22일 이후 다시 전국규모의 대규모 시위를 재개하려 한다는 정 보가 있었고 둘째, 여야간 합의로 국회를 소집하여 계엄해제를 결의할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러한 움 직임이 있기 이전에 시국수습방안을 시행하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검사 : 당시 위와 같이 시국수습방안 시행일을 앞당긴 것은 누구의 제의에 의한 것인지 기억하나요.

권정달 : 그와 같은 중요한 일은 전두환 사령관이 직접 결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검사 : 시국수습방안을 시행하기 위하여는 국무회의 의결, 대통령 재가 등의 절차를 경유하여야 했을 텐데 어떻게 이러한 절차를 밟으려고 하였나요.

권정달 : 제가 알기로는 시국수습방안이 확정되자 전두환 사령관은 노태우 황영시 정호용 등과 상의하여 최 규하 대통정의 귀국 다음날인 80년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 지지 결의를 한 다음, 주영복 국방장관이 대통령에게 전군주요지휘관들의 결집된 의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시국수 습방안을 건의하여 재가토록 하고 그 다음에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 등 절차를 거쳐 시행하자로 결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사 : 전두환 사령관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언제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하였나요.

권정달 : 5월17일 10:00경 전두환 사령관이 청와대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검사 : 그 당시 주영복 국방부장관이 신현확 국무총리, 전두환 보안사령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배석한 상 태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국회해산 등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하였으나, 최규하 대통령은 그 같은 상황은 5 · 16일 하나로 족하고 특히 군의 명예를 위해서 도 다시는 헌정중단사태가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외의 나머지 두가 지 방안은 수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 예,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검사 : 진술인의 위와 같은 진술내용에 의하면 80년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시국수습방안 에 대한 지지 결의를 하도록 한 것도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는 말인가요.

권정달 : 예, 그렇습니다. 전두환 사령관이 사전에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토록 요 청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사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권정달 : 아시다시피 80년 5월17일 09:30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제가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찾 아가서 시국수습방안 세가지를 그날 10:00 개최예정이던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안건으로 상정하여 결의토록 요청하면서 이를 토대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달라는 것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라 고 말하였는데,사전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전두환보안사령관이 주영복 국방부장관과 사전교감 이 없었다면, 대령인 제가 국방부장관에게 가서 그러한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 문입니다

검사.:유병현 합참의장의 진술에 의하면, 주영복 국방부장관이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시작전 자신의 방을 들 런 유병현에게 『외부의 요청을 받고 회의를 개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운병현이 『외부가 어디 냐』고 묻자 엄지손가락으로 보안사령부쪽을 가리켰다고 하는데, 유병현의 이러한 진술내용과 진술인 의 위와 같은 진술 내용을 종합하면 80년 5월16일 전두환이 주영복 국방부장관에게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전군주요지휘관들의 지지 결의를 위하여 지휘관회의 소집을 요청한 것이 사실이지요.

진정달 : 예, 그렇습니다.

검사 :주영복 국방부장관의 진술에 의하면 진술인이 80년 5월17일 09:30경 자신을 찾아와 전두환 보안사령 관의 지시라고 하면서 시국수습방안 세가지 즉,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방안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의제로 상정하여 지지결의토록 한 후 대통령에게 시국수습방안을 건의하 여 재가를 받아달라고 요청하였다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 예, 사실입니다.

검사:그 시국수습방안이 확정되기 전인 5월 초순경부터 이미 이학봉대공처장은 소요배후세력으로 지목한 이 른바 국기문란사범 명단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은 누구 지시로 한 것인가요.

권정달 : 자세한 것은 저의 소관사항이 아니라 잘 알지 못하나 시국수습방안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이학봉이 자기가 하여야 할 일을 찾아서 사령관에게 보고하여 조치지시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사 : 이른바 부정축재자는 진술인이 맡고 있던 정보처에서 선별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그것이 아니고 당시 저희 정보처에서 존안하고 있던 각종 비위자료를 모두 대공처의 이학봉에게 건 네주어 이학봉 수사국장이 처리대상자를 선별하였습니다.

검사 :최종적으로 계엄확대, 비상기구설치,정치활동 규제 등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가요.

권정달 :당시 정보처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던 윤두열이 정리하였습니다.

검사 : 그 보고서는 현재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가요.

권정달 :글쎄요, 지금에 와서는 알 수없습니다만 저는 소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검사 : 위와 같이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계엄사령관과는 사전에 협의가 없었나요.

권정달 : 제가 알기로는 계엄사령관하고는 사전에 논의가 안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사:계엄확대와 동시에 발포된 포고령 10호에 의하여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김종필 · 김대중 · 김영 삼 등 이른바 3김이 체포 ·구속 연금되어 정치활동이 봉쇄되고, 국회도 계엄군이 점령하여 국회의원 의 등원이 저지되어 임시국회가 열리지 못하는 등 국회기능이 마비되었는데 이러한 조치들이 위 시국 수습방안에 포함되어 있었나요.

권정달 : 시국수습방안 수립단계에서는 국회해산이 주 내용이었으며 나머지 부분은 그 뒤에 일어난 일입니 다.

검사 : 전군준요지휘관회의 에 참석한 전군지휘관들 가운데 안종훈 당시 군수사령관이 이의를 제기하자 정 호용, 노태우, 박준병 등이 나서서 군이 강력하게 개입하여 시국을 수습하여야 한다고 발언하였다고 하는데 알고 있나요.

권정달 : 나중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검사 : 주영복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진술인이 제시한 회의의제는 「비상계엄전국 확대, 국가보위비상협의 기구 설치, 국회해산」등 세가지였으나 유병현 등의 반대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비상계엄확대 문제만을 상정하고, 의제로 상정되지 아니한 나머지 두가지 안건에 대하여는 자신이 잊어버리지 않 도록 하기 위하여 메모지에 국가보위비상협의기구를 뜻하는 「협」자와 국회해산을 뜻하는 「국」이 라고 기재한 후 신현확총리 및 최규하 대통령에게 그러한 안건 세가지를 모두 건의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관하여 알고 있나요.

권정달 : 제가 주영복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그 이후의 상황에 관하여는 들은 적이 없지만 그 말이 맞을 것입 니다.

검사 :주영복 장관이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치면서 참석자들로부터 백지서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누구의 요 청에 따른 것인가요.

진정달 :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무슨 의도로 하였는지는 주영복 장관만이 알고 있겠지요. 다만 주영복 국방부장관이 전두환 보안시령관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 채 시국수습방안중 오직 비상계엄 전국 확대안건만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 상정 · 의결토록 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심적인 부담을 느낀 나머지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는 연서명 문서를 제시하면서 마치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세가지 안건 모두에 대하여 전군주요지휘관들의 지지결의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에 관한 재가를 받아내려 고 하였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 있다?

검사 : 진술인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의 핵심참모들 및 신군부측 핵심세력인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과 긴밀히 협의하여 수립한 시국수습방안의 내용을 살펴보면,첫째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는 내각의 기능을 배제하고 신군부가 전면에 등장하여 정국을 장악하기 위한 교두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신군부의 정권장악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국민들의 민주화요구 시 위를 초동단계에서부터 강력히 제압하기 위한 공수부대 등 진압병력의 투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 이었으며, 실제로 5.5월18일∼5월27일 사이의 광주사태 진압과정에서 공수부대에 의한 무자비한 진압 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제압하였다는 점 , 둘째 국회해산은 비록 국무 총리와 대통령의 명백한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지만 그 자체가 헌정중단을 초래할 수 있는 중대한 정치적 사안이며 실제로도 5월18일 국회봉쇄 5월20일 국회등원저지, 5월17일∼5월29일 사이의 주요정치인 연행, 구금, 연금 등의 일련의 조치로 사실상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 능하게 하였다는 점 , 셋째,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는 비록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서의 외관을 갖 추고는 있었지만 그 운용과정에서 사실상 내각을 조종 통제하고 나아가 대통령의 고유권한마저도 침 해하는 등 내각과 대통령의 권한을 사실상 형해화시킴으로써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사실상 초 헌법적인 권력기구로서 운용되었던 점 등을 감안할 때, 결국 진술인 등이 수립 시행하였던 시국수습 방안은 12 · 12사건이후 군권을 장악하였던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세력들이 헌법기관인 국회 내각, 대통령의 권한 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집권

시나리오로서의 기 능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요.

권정달 : 원래 시국수습방안은 그 수립단계에 있어서 부터 전두환 등 신군부가 전면에 나서서 혼란한 시국 을 수습하고 정국장악을 기도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과 보안사의 핵 심참모들 및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의 핵심세력들이 긴밀히 협의하여 이를 수립하고 그시행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제가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의 핵심측근이 아니면서도 정보처장이라는 저의 직책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와 같은 시국수습방안 수립 단계에서 주무실무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시국수습방안은 전두환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정국을 장악하고 나아가 정권을 장악하여 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던 것은 사실이며 또한 그 시행과정을 고려하면 사실상 헌정질서를 중단하거나 헌법기관인 국회나 내각 등의 권한행 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면도 없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시국수습방안 수립 당시에는 전두환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 이 그와 같이 정권찬탈의 의도까지 있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그 시행과정에서 전두환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은 국헌을 문란하게 하고서라도 자신들이 집권하기 위하여 시국수습방안을 수 립 시행하였다는 것을 비로소 감지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검사 : 5월17일 밤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심의하기 위한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그때 중앙청 현관에서 회의장 까지 양쪽에 약 Im 간격으로 경계총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고 외부와 연결된 통신선까지 절단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였다고 하는데 그러한 조치는 누가 지시한 것인가요.

권정달:나중에 알고보니 노태우 사령관이 지시하여 그랬다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도 참으로 어리석 은 짓을 하였습니다.

검사:그런 정황을 보면 국무위원들이 비상계엄 전국확대안에 찬성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힘 이 두려워 부득이 그 안건에 찬성한 것이 아닌가요.

권정달 : 그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검사 : 80년 5월18일 00:00를 기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와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제10호가 발령되었는데 포고령상의 모든 정치활동 금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도한 것 이 었나요.

권정달 : 저는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계엄사에서 모든 정치활동 금지로 확 대하여 포고령 문안을 만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는 국회의원, 정당인, 일반 국민들에 의한 일체의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검사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포고령 10호가 보안사로부터 지침을 받아서 입안되었다고 하는데 진술인이 그 지침을 작성하여 건네준 것이 아닌가요.

권정달:보안사측의 다른 사람이 전했는지는 모르나 제가 계엄사측에 그러한 지침을 건넨 기억이 나지를 않 습니다.

검사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 등 당시 대권경쟁을 하던 정치지도자들을 체포 ·구속 연금하고, 계엄포고 령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은 이른바 집권계획의 일환인 구정치인의 제거조치라고 할수 있 는 것 아닌가요.

권정달 :결국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검사 : 80년 5월27일 국무회의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안이 의결되었지요.

권정달 : 예, 그렇습니다.



「국보위」 성격 두고 신경전

검사 : 비상기구의 명칭을 국가보위비비상대책위원회로 정한 경위는 어떤가요.

권정달 : 5월17일 당시만 해도 명칭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비상기구라고만 하였는데 그 뒤 광주 사태가 발생한 직후인 5월20일경 전두환 사령관이 명칭은 국가보위라는 말을 넣자고 하면서 논의 된 것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는데 그것이 그대로 결정된 것입니다.

검사 : 국보위 설치 계획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처음 보고한 때가 언제였고, 보고는 누가 어떤 경로로 하였 는가요.

권정달 :제 기억으로는 5월20일경 전두환 사령관이 그 명칭을 국보위로 정하고 5월22일 아니면 5월23일경 제가 당시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으로 있던 이원흥에게 국보위 설치령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여 만든 국보위설치령 (안)을 가지고 제가 5월26일 국방부장관을 수행하여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에게 보고하였고, 그뒤에 대통령에게 보고가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누가 보고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습 니다. 아마 김용휴 총무처장판이 보고하지 않았나 생각됩 니다.

검사: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나요.

권정달 :대통령의 결재를 받는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검사: 최광수 비서실장이나 이원흥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의 진술에 의하면 보안사측에서 처음에는 비상기구 를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을 발동하는 형식으로 설치하려다가 최규하 대통령이 『얼마전에 긴급조치 9호 를 해제하였는데 또 다시 다른 긴급조치권을 발동할 수 없다 이런 일은 5 16 한번으로 족하다』고 하 면서 거절하고 최광수를 비롯한 청와대 수석비서관들도 호응하지 아니하여 할 수 없이 형식은 대통령 령에 의한 자문기구로 하고 실질은 혁명평의회 성격의 국보일를 만든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시국수습방안 수립을 지시받고 그 입안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허삼수. 허화평, 이학봉, 정도영 등 보안사의 핵심참모들 및 황영시, 유학성,.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장성들과 협의한 결과 국가보위비상기구의 설치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에 기하여 하기 로 하였으며, 그 성격은 비상권력기구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저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 시에 따라 5월19일경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을 찾아가 『군의 주요지휘관들의 한결 같은 의견이 계 엄확대에 따른 시국에 대처하기 위해 대통령 긴급조치권을 발동하여 비상기구를 설치하는 것이 바 람직하다』고 말하면서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에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 긴급조치권이라고 하는 것은 초비상사태 하에 국가 안보, 경제 등에 대해 발동되는 것으 로서 불분명한 상황에서는 발동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거절하여 저는 그대로 돌아와 전두환 보안 사령관에게 그와같은 사실을 보고드린 바 있습니다.

검사:국보위의 법적 성격을 변경하게된 경위를 자세히 말하시오.

권정달 :최규하 대통령이 긴급조치권 발동을 통한 비상권력기구로서의 국보위설치에 대하여 완고히 반대하 자, 보안사 핵심참모들과 노태우 등 신군부 핵심장성들 사이에 국보위의 법적 성격을 어떻게 할 것 인가에 관하여 긴급조치권을 발동하여 비상권력기구적 성격으로 설치하자는 주장과 대통령령을 제 정하여 대통령 자문 보좌기관적 성격으로 설치하자는 주장이 대립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육사 11기 출신으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보안사에 자주 출입하여 신 군부측의 법률자문에 응하고 있던 김영균변호사, 이원흥 청와대 민원수석 등과 논의한 결과 여러가지 여건상 대통령 긴급조치권으로 하기는 어려우니 대통령령 형식으로 하자고 결론을 내려 결국 대통령령에 의한 자문 보좌기구로 국 보위를 설치하게 된 것입니다.

검사:그렇다면 5월26일 주영복 국방부장관과 함께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를 찾아가 국보위 설치 계획을 보고 할 때도 이미 대통령령에 의하여 설치하기로 결정된 이후라는 말인가요.

권정달 : 그렇습니다.

검사 :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의 반응은 어떠하던가요.

권정달 : 박충훈 총리는 『꼭 이런식으로 만들어야 하느냐』고 하면서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며 , 특 히 설치령 (안) 제4조에서 상임위원회가 조정 및 통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아무 래도 적절치 못하니 삭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하였으며, 이에 제가 그래도 비상계엄하에서 그런 표현은 넣는 것이 적절하고 또 그러한 표현이 있다고 하여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무 말씀없이 결재하여 주었습니다

검사 :국보위 설치령을 보면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국보위의 위임을 받아 실제로 조정· 통제 업무를 담당하는 상임위원회, 그리고 각 부처에 대응한 분과위원회 등 3단계의 내부기구 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처음부터 그렇게 구분하여 설치하기로 되어 있었나요.

권정달:예, 그렇습니다. 시국수습방안 수립단계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저에게 국가보위비상기구내에 상 임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그 위원장으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되도록 하라는 지침을 주었기 때문에 적어도 상임위원회의 설치 및 그 위원장을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이미 방침이 정해져 있었습니 다. 다만 나머지 세부적인 조직체계에 대하여는 5월23일경 실제로 설치령 성안작업을 담당하였던 이 원흥 민원수석, 김유후 비서관 등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결정하였습니다

검사 :국보위원, 상임위원, 분과위원,전문위원은 누가 어떤 방법으로 선정하였는가요.

권정달 : 국보위원중 당연직을 제외한 임명직 10명은 총무처장관이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협의하여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민간인에 대하여는 김용휴 총무처장관이 보안사측과 협의하여 관료와 대학교 수를 중심으로 선정하였고, 군인들에 대하여는 보안사 보안처에서 존안하고 있던 자료를 중심으로 보안사 참모 5명이 선별한 후에 국보위에 통보하였습니다.

검사 : 국보위가 공식 발족한 것은 5월 31일이었지만 5월17일 직후 인민 국보위분과위원들이 결정되어 있었 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그때는 우선 운영위원장으로 이기백, 운영위 간사로 최평욱만 임명되었으며, 그 두 사람이 그후 총 무처와 보안사에서 결정하여 보내온 명단을 받아서 국보위에서 절차를 밟아 구성한 것입니다.

검사 :운영위원장으로 이기백, 운영위간사로 최평욱을 임명한 경위는 어떠한가요.

권청달 :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임명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회 회원들인 것만 알지 자세한 경위는 모릅니다



박철언 · 우병규 개헌 작업

검사:진술인이 헌법 개정 작업을 실무적으로 총괄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권정달:저는법사위 활동에 관여한 것은 아니고 80년 7월 경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법사위원인 우병규, 박 철언을 지명하며 그 두 사람을 보안사로 데려다가 사무실을 내주라고 하여 사무실을 내주고 그 두 사람의 헌법관련 업무를 제가 총괄하였습니다

검사 :우병규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전두환의 지시로 진술인의 통제하에 우병규, 박철언이 보안사에 별도로 사무실을 내고 당시 국보위 법사위에서 작업한 것을 가져와 진술인에게 보고하면 진술인은 그에 따른 지침을 주어서 처리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 그렇습니다.

검사 : 결국 개헌작업과 관련하여 진술인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측의 의사를 우병규, 박철언 등을 통하여 정부 개헌안에 반영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 그렇습니다.

검사 : 헌법 개정 작업과 관련하여 전두환 장군으로부터 특별히 지시받은 내용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관철시켰는가요.

권정달 :헌법은 전문적인 일이어서 제가 전두환 사령관에게 갈 때는 대부분 우병규, 박철언하고 같이 가서 지시를 받았고 그 지시를 들은 그 두 사람이 알아서 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 다.

검사:국보위 법사위에서 헌법 개정안의 골격이 마련된 뒤인 80.7.15.경 전두환 장군이 정도영 보안처장, 허 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사령관 비서실장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이종찬 총무국장, 허 문도 중정부장 비서실장을 사령관실에 소집한 다음 노태우 장군을 모셔오라고 하여 진술인으로 하여금 개헌안의 골격을 설명하도록 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 예, 사실입니다. 당시 보안사에 와 있던 우병규, 박철언 등이 만들어 준 개헌안의 골격을 제가 설 명한 기억이 납니다.

검사 :대통령의 임기와 관련하여 당초 신군부내의 합의는 6년이었는데 전두환 장군의 주장으로 7년으로 연 장되었다고 하는데 그 경위에 관하여 진술하시오.

진정달 :그 무렵 신문에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한다는 내용이 크게 보도되자 전두환 사령관이 저하고 우병 규, 박철언 등을 부르더니 처음 1년은 취임준비를 해야하고 마지막 1년은 퇴임준비로 사실상 일하기 어려운데 실제로 일할 기간은 적어도 5년은 되어야 한다며 임기를 7년으로 하라고 지시하여 우병규, 박철언 등이 정부측과 혐의하석 7년으로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사 : 최대통령이 6월12일 특별담화에서 밝힌 10월중 개헌-81년 봄 선거실시 - 81년 6월 정권이양 등의 정 치일정은 곤란하고 일정을 앞당기기로 결론이 모아졌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 : 기억에 없습니다.

검사 :정치일정을 앞당기기로 함에 따라 최대통령을 하야시키는 문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선거 준비 및 신당창당 문제에 관해서도 논의가 되었다고 하는데 결론이 어떻게 났는가요.

권정달 :최대통령이 하야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 없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선거 부 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최규하 대통령이 8 월16일 하야하자 당시 박충훈 국무총리서리 가 미처 서리도 면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당시 보안사에 자주 드나들던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정호용 노태우 박준병 등이 우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그 뒤에 개헌을 하여 다시 대통령선거를 치르자고 결정 을 한 모양입니다. 그 무렵 박영수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이 어떤 경위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보안사령부에 와서 사령관을 뵙고 제 방에 와서는 저에게 자기가 직책상 선거관리를 한다고 소개 하여 처음 봤습니다.

검사 : 그래서 진술인은 무어라고 했나요

권정달 : 그때는 전두환 사령관이 단독으로 입후보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관리만 잘하면 당선에 어려 움은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박영수에게 알아서 잘 하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검사 : 그렇다면 박영수가 실제로 어떻게 관리하여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는지는 모르는가요.

권정달 :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사무처에서 버스를 동원하여 대의원들을 투표장소인 장충체육관으로 동 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전부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취해진 조치이고 원래 단일후보로 입후보하였기 때문에 투표에 참가하면 대부분 대의원들의 성향을 볼때 찬성할 것은 당연히 예상되었습니다.

검사 : 그 무련 유학성이 김종환 내무장관에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이 압도적 찬성으로 당선되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요청하였다는데 알고 있나요.

권정달 : 전혀 모르는 사실입니다



(1996년 1월13일 진술)

검사 : 1980.5.17. 비상국무회의장에 수경사 병력을 배치하고, 5월18일 국회의사당을 101연대 병력이 점경 한 후 5월20일 황낙주 등 국회의원들의 등원을 저지토록 하는데도 보안사 참모들이 관여하였나요.

권정달 : 제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만, 거기에도 허화평 비서실장이 사전에 깊숙히 관여하였다고 생 각합니다.

검사 .:그렇게 볼 만한 이유가 있나요.

권정달 : 국무회의장에 무장병력을 배치한 것은 노태우 당시 수경사령관이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노태 우는 자기 임의로 그러한 중대한 사안을 결정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히 허화평 비서실장과 사전에 상의하였을 것입니다. 국회봉쇄조치 역시 누가 지시했는지는 모르나 사전에 허화평 비서실 장과 상의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중대한 사항에 대하여는 그 당시 반드시 보안사와 사전 상의후 집행하였으며 보안사에서 신군부 장성 등 외부와 협의하고 조정하는 일은 모두 허화평이 전 담하였기 때문입니다

검사 : 5월17일부터 단행된 이른바 소요배후조종세력 및 부정축재자 체포 및 구금조치는 누가 주도하였는가 요.

권정달 : 소요배후조종세력에 대하여는 이학봉 대공처장이 알아서 했고, 부정축재자에 대하여도 저희 정보 처가 보관하고 있는 비위자료를 대공처에 넘겨주어 이학봉이 집행했는데, 그 대상자 선정은 이학봉 이 허화평과 사전에 협의하여 결정하였고 그 과정에 허삼수도 의견을 개진하였습니다

검사 :5월18일 발생한 이른바 광주사태 당시 보안사에서는 어떻게 관여하였는가요.

권정달 :그때 광주에서의 모든 작전상황 파악은 정도영 보안처장이 전담하였는데 정도영 보안처장이 어떻게 관여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말씀드릴 것은 그때 당시 정호용, 황영시, 노태우 등이 수시로 보안사령부에 드나들었고, 특히 정호용은 광주에 갔다 오던 즉시 보안사령부에 와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나고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사 : 신당 창당 경위에 대하여 진술하시오.

권정달 : 80년 6월 하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저하고 이종찬, 윤석순 이상연,이상재 등을 보안사령관실로 불러 저를 중심으로 신당창당작업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 시점부터 보안사 존안실 빌딩 2 층에 사무실을 별도로 마련하고 신당에 참여할 인사들을 물색하다가 80년 9월부터 각자 분담을 하여 신당에 참여할 인사들을 접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검사 :진술인이 신당창당작업의 책임을 맡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권정달 :그것은 허화평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김진영 당시 33경비단장이 자신의 육사 동 기생으로서 평소 친밀할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허화평 비서실장과 사전에 협의하여 전두환 사령관 에게 저로 하여금 신당창당 책임을 맡겨 주도록 건의하여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진영이 허화평과 사전에 협의한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저를 추천한 이유는, 첫째 군인들 중에는 그래 도 제가 비교적 유연하게 행동하여 정치인으로 변신하기에는 적합하다고 판단하였고, 둘째 그때 보 안사 핵심참모를 포함하여 누구도 군복을 벗을 생각이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저로 하여금 군복을 벗 게하여 내보낼 생각으로 그런 것이라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검사 : 신당창당작업에 참여한 사람들 중 이종찬은 안기부 기조실장, 윤석순은 안기부 총무국장이었는데 보 안사에서 추진한 신당창당작업에 참여한 경위를 알고 있나요.

권정달: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면서 허삼수가 중앙정보부에 파견되어 국장급 이 상 간부들을 숙청하였는데 그때 이종찬은 허삼수에게 어떻게 잘 보였는지 살아남았고, 그뒤에 안기 부 총무국장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어쨌든 허삼수가 허화평을 통하여 전두환 보안사령관 에게 이종찬을 신 당창당작업에 합류시키도록 건의한 것이며, 을석순 역시 허삼수하고 부산고등학교 동기로 허삼수가 허화평을 통하여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추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사:최기홍(정보학교장 소장)이 신당창당작업에 관여한 경위는 어떠한가요.

권정달:.최기흥은 당시 일선부대에서 중령진급예정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80 년 6월 하순경 허화평이 보안 사로 갑자기 데리고 와 저에게 『창당하는데 도움이 될테니 쓰십시오』라며 창당작업 팀의 간사로 쓰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허화평이 저를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회 회원으로서 평소 친분관계를 유지하여 오던 최기흥을 창당작업팀에 파견하여, 허화평이 그를 통하여 창당과정을 직접 파악하려 고 한 것입니다.

검사 : 신당 참여인사 인선과정에 누가,어떻게 관여하였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진술하시오.

권정달: 80년 7월부터 각 시 ·도 조직책을 물색하는 등 본격적으로 창당준비작업에 착수하여 8월 초순경 전남 정래혁 전북 황인성, 충남 정석모, 충북 이해원 강원 이범준, 경기 김영선, 경북 김용태 등 각 시 · 도 조직책을 결정하였는데 그 때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기 위하 여서는 허화평 비서실장과의 사전협의를 거쳐야 하기에 허화평과 몇차례 긴밀한 협의를 한 적이 있습 니다. 그 당시 허화평은 여러명을 직접 추천하였는데 지금 기억나는 것은 김용태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이상재의 건의에 따라 허화평이 저에게 경북 조직책으로 추천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검사:지역구 조직책을 최종적으로 정하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허화평과 협의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진술 하시오.

권정달 : 80년 10월경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전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있던 허화평의 방에서 허화평 보좌관의 주재하에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 이학봉 민정수석비서관 등이 참석한 가 운데 지역구조직책(안)에 관하여 여러차례 협의를 거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경찰, 보안사, 안기부 관계자들이 자료를 제시하면 허삼수, 이학봉 등이 의견을 제시하고 최종적으로 허화평이 결론을 내려서 지역구 조직책을 선정한 것입니다.

검사 : 그때 허화평이 추천한 지역구 조직책 중 기억이 나는 사람이 있나요.

권정달:자기 고향인 포항출신 박경석 동아일보 정치부장, 이진우 변호사 등을 천거하였습니다.

검사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김경원인데 왜 비서실장실에서 그와 같이 중요한 작업을 하지 않고 보좌관인 허화평의 방에서 그러한 작업을 하였는가요.

권정달 :허화평은 직책이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이었지만 실제로는 비서실장 역할을 한 것입니다. 김경원 비서실장은 명목상 위치에 있었을 뿐입니다.



(1996년 2월26일 진술)

검사 ;한용원의 진술에 의하면 80년 5월 초순 진술인이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처리하여 민심을 바로 잡아야 겠다면서 김종필, 이세호, 이후락, 박종규, 김진만, 길재호 등 10여명의 명단을 한용왼에게 주면서 그들에 대한 비위자료를 수집하라고 지시하였다는데 사실인가요.

권정달:예, 사실입니다. 그때 제가 명단을 한용원에게 주면서 그들에 대한 비위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대 공처장 이학봉에게 주라고 지시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검사:진술인이 한용원에게 넘겨준 명단은 누가 선정하였는가요.

권정달:그 당시 권력층에 있으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정보처에서 10여명 선정하 여 비위자료와 함께 대공처에 넘겼으며, 실제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할 대상은 저희들이 넘겨 준 자료를 기초로 대공처에서 결정하였습니다.

검사:이학봉 대공처장의 진술에 의하면, 5월13일 20:00 보안사령관실에서 전두환 사령관, 진술인, 이학봉 등이 있는 자리에서 연행 · 체포대상자를 선정하였다는데 아니란 말인가요.

진정달:정확히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연행하는 문제는 저도 관련이 있 고 그 중요성에 비추어 제 의견을 들었을 것으로 짐작되어 이학봉의 진술이 사실일 것입니다.

검사: 80년 7월 경 한용원에게 현홍주 안기부 국장과 박배근 치안본부 정보3과장과 함께 정치활동규제자 선 정작업을 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는가요.

진정달 : 제가 지시한 사실은 없습니다.다만 정치활동규제자 신청은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80년 9월 이후에 이루어진 일로써 제가 알기로는 청와대가 유학성 안기부장에게 지시하여 현흥주 국장의 주 관하에 보안사에서는 한용원이, 경찰에서는 박배근이 동원되어 작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검사 : 한용원의 진술에 의하면,80년 7월 진술인이 한용원에게 유학성 안기부장, 유흥수 치안본부장과 상의 가 되었으니 현흥주, 박배근과 함께 정치활동규제자 선정작업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였다는데 아닌가 요.

권정달 :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일부 정치인에 대해 정치활동을 규제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오고갔으며, 구 체적으로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안기부의 현흥주 국장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며 저는 그 러한 분위기만 알고 있었을 뿐 간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겸사 : 더 할 말 있나요.

권정달 :지난 번에 드린 말씀외에 추가로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며칠전 에 허화평으로부터 인편으로 연락이 왔는데,혹시 제가 자신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게 되면 자신 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여 달라고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