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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12.12, 5.18 재수사 검찰 수사 기록--

본문

12.12, 5.18 재수사 검찰 수사 기록



신혁확 찾아가 중앙정보부장직 요구했다. 전두환

예하 공수특전단과 20사, 광주파병 허락했다. 노태우

전두환은 최규하의 약점 잡고 협박했을 것 신현확

나는 신군부주식회사의 심부름꾼이었다. 권정달

안필준 보안사령관 친위쿠데타 지시했다. 한용원



「안개정국」80년 짧았던 「서을의 봄」을 사람들은 달리 이렇게 부른다.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에도불구하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두환보안사령관의 집권으로 국민들은 12 12 이후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세력이 자신들의 「집권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가 단독 입수한 검찰의 12 · 12 및 5 · 18재수사기록에 의하면 신군부의 이같은 「내란음모」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증언을 해준 사람은 뜻밖에도. 신군부 핵심인사였던 권정달씨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신동이가」이번에 공개하는 검찰수사기록은 전두환 노태우씨 피의자신문조서 및 신현확,권정달,한용원씨 등의 참고인 진술조서. 이들의 검찰 수사기록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강제 연행과 이에 대한 최규하대통령의 힐책과 사후 재가 내막,5 · 17 비상계엄 확대를 둘러싸고 벌어진 신군부측과 청와대측의 갈등,2 12 총선 직후 전두환대통령의 방미기간 중 친위쿠데타 기도 등 생생한 역사 현장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동안 전두환씨 등은 집권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고 주장해왔다. 전씨는 자신이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었으나 10 · 26 이후 국가적 혼란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새 시대 지도자로 부상하게 됐다고 자신의 집권을 변명해 왔던 것. 전씨는 검찰이 지난해 5월 5 · 18사건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릴 때도집권 시나리오의 존재를 인정치 않았다. 그러나 이번 재수사에서 권정달씨는 신군부측이 시국수습방안을 기획 추진했다고 증언, 신 군부측의 집권 시나리오가 존재했음을 뒷받침했다. 권씨는 또 검찰에서 전두환씨의 지시에 따라 정보처 요원들을 동원, 비상계엄 확대와 국보위 설치,국회 봉쇄 및 해산, 정치인 체포 연금 등 구체적인 방안을 80년 5월10일에 확정했다고 진술했다

전두환씨 등 피의자들은 권씨의 이같은 증언에 대해 상당히 섭섭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권씨는 신군부 핵심으로 활동하다 80년 10월 준장 예편과 동시에 민정당 창당 작업에 주도했다. 그는 13대 총선에서 공천 탈락돼 정계를 떠나 있다가 이번 4 · 11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신군부측의 친위쿠데타 계획은 85년 당시 보안사 감찰실장이었던 한용원씨의 검찰 진술에서 드러 났다. 한씨는 지난 2월5일 검찰조사에서 『2 12 총선 직후인 지난 85년 2월13일 안필준 당시 보안사령관이 「전두환 대통령이 85년 3월경 미국 레이건 대통령을 친선방문할 계획이니.방미기간 중 친위쿠데타 계획을수립하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한씨는그러나심사숙고 끝에 헌법에 총선 1년후면 국회를 해산할 수 있도록 명문화돼 있어 굳이 쿠테타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50매 정도의 보고서를 직접 작성, 안보안사령관에게 보고했다고 밝혔다.

검찰의 이번 재수사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신군부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하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최주사」 「얼굴마담」 등 지금까지 알려진 최대통령과는 다른 모습이다. 권씨의 증언에 의하면 80년 5월17일 오후 4시경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김모 변호사를 대동하고 청와대에 가 최대통령에게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끝났는데 군은 현재 국가적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통령의 비상조치를 원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했으나 최 대통령은 이를 모두 들어준 게 아니었다는 것.

전씨가 당시 최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긴급조치에 의한 국회해산,5 · 16직후의 국가재건 최고회의와 유사한 국정자문협의체 설치, 각급 학교 휴교조치 등 네 가지. 그러나 이에 대해 최대통령은 『그같은 상황은 5 · 16 하나로 족하고 군의 명예를 위해서도 다시는 헌정중단 사태가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며 비상계엄 확따를 제외한 나머지 조치들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최대통령은 80년 5월25일 전두환씨의 권유에 따라 광주를 방문, 재진입작전시 수백명의 사상자가 예상된다는 보고를 듣고 이를 명백히 반대한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최대통령은 또 '광주사태'이후 약 1주일 가까이 두문불출하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신군부측을 당황케 한 것으로 밝혀졌다.

신현확씨 등의 진술에 따르면 전씨는 79년 12월 초 서을 삼청동 총리공관을 방문, 최대통령을 조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씨는 검찰에서 『지난 80년 3월경 전두환씨가 총리실로 찾아와 '제가 10.26 사건과 관련 최규하대통령도 조사한 사실이 있습니다」라며 자랑스럽게 털어놓은 적이 있디』고 진술했다. 신씨는 이에 대해 『당시 하도 기가 막혀 「당신이 대통령을 조사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대통령은 당신의 임명권자인데 무슨 권한으로 대통령을 함부로 조사하느냐」꼬 화를 냈다』는 것.

최대통령은 전씨의 중앙정보부장겸직은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검찰조사에서 밝혀졌다.최대통령은 신현확 총리에게 『중앙정보부장하는 민간인을 임명해 정보계통을 군과 양립시켜야 한다』면서 이같은 의견을 피력했다는 것. 전씨가 최대통령의 이같은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중정부장 자리를 고집한 것은 중정의 막대한.예산 때문이었다는사실이 드러났다.

전두환씨 지시로 80년 2월24일 권정달씨와 이학봉씨가 김대중씨를 만난 사실도 밝혀졌다. 권씨는 전두환씨가 김다중씨와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는데 바빠서 갈 수 없으니 이학봉과 함께 가서 김씨를 만나라고 지시해 만난 적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권씨는 이 자리에서 이학봉씨가 김씨에게 시국안정에 협조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달라고 요청했으나 김씨는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면서 거절했다 는것,

이제는 검찰이 전직 대통령 두사람을 동시에 법정에 세우면서 「바로 세운」 역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들여다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