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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전민련 출범. 지역 운동 통합 요구 등 변신 재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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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련 출범. 지역 운동 통합 요구 등 변신 재촉

국민 운동 전남

'지역 운동 이끌기 2년'을



"지금부터 '광주 학살 . 5공 비리. 민중 탄압 책임자 노태우. 부시 규탄 국민 투쟁기간' 선포에 따른 기자 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2월 중순 민주 쟁취 국민 운동 전남 본부 사무실에서는 광주. 전남 민족 민주 운동 대표자 회의가 주관하는 기자 회견이 열렸다. 대표자 회의 구성 단체인 민주 쟁취 국민 운동 전남 본부 상임 공동 의장 지선 스님이 대표로 성명서를 낭독했다. 성명서는 '노태우 대통령 취임 1주년인 2월 25일과 부시 미 대통령 방한 일인 2월 27일을 전후로 반미 반 독재 투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이다.

이 자리에 배석한 10여명 남짓한 광주 지역 각 운동 단체 대표자들은 기자 회견이 끝나자 '여의도 농민 집회 사건으로 구속된 농민 운동 지도자들을 즉각 석방하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 전남 도경으로 총총히 떠났다.

국민 운동 전남 본부 사무실은 운동권의 입장을 표명하는 기자 회견 장과 각 민주 단체의 농성 장으로 자주 쓰여 잘 알려진 곳이다. 전남 도청앞 분수대에서 광주 천 쪽으로 뚫린 4차선 도로를 따라 1백 m쯤 가다 보면 오른편 4층 건물 옥상 난간에 '민주 쟁취 국민 운동 전남 본부'라는 검정 바탕에 노랑 글씨로 쓴 큼지막한 간판이 눈에 띈다. 가로로 걸린 그 간판에 붙어 '행방 불명자 은폐는 제 2의 광주 학살이다'라고 노란 천에 검정 글씨로 적힌 플래카드가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다. 행불자 가족이 농성 중임을 알 수 있다.

비좁은 계단을 걸어 4층에 다다르자 통로 좌우 벽면에 여기저기 나붙은 각종 대중 집회와 시민 자주 학교 일정을 알리는 홍보용 포스터 , 성명서 등이 한눈에 가득 찬다. 오른쪽으로 난 옅은 회색 철문 위에 붓글씨로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맞은편 화장실 출입문에는 '농성○○일째'를 알리는 '5.18광주 민중 항쟁 행방 불명자 가족 회'의 농성 속보 쪽지가 붙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파트와 비슷한 구조로 생긴 사무실. 한쪽 벽에 1980년 광주 항쟁 이후에 민주화 운동을 위해 싸우다 산화 해간 사람들의 사진틀이 10개 나란히 걸려 있다. 박관현 열사(80년 당시 전남대 총 학생회장)를 비롯 이한열 (연세대생. 최루탄사망), 홍기일 (노동자. 분신)등등 익히 알려진 이름들이다.

너댓평 되어 보이는 출입구 쪽의 사무실에는 구석에 허름한 책상 2개가 놓여 있고 행불자 가족 10여명이 머리띠를 두른 채 의자에 앉아 농성 중이다.

안쪽으로 연결된 사무실에도 책상 한 두개가 놓여 있다. 그곳 역시 농성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하나 방도 농성 자들의 식당으로 쓰이고 있는 듯 각종 식사 도구가 긴 탁자를 가운데로 한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우측 문을 열고 또 다른 방에 들어선다. 다른 사무실과 달리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국민 신문' 편집실이다. 사방 벽면에 각종 자료들이 여기저기 나붙어 있다.

광주 . 전남에선 아직 막강한 힘

전국적인 민족 민주 운동의 흐름에서 국민운동본부의 독자적인 역할과 위상이 끝났다는 일반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 기능이 많이 약화된 가운데 유독 민주 쟁취 국민 운동 전남 본부(이하 전남 국본)가 아직까지도 이 지역 운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왜 광주 시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전남 국본이 앞장서야 정치적인 대중 집회가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미 그 깃발을 내리고 조직을 해산 해 버린 전국의 많은 다른 지역과 달리 무엇 때문에 광주 지역에서는 아직도 국민 운동본부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까?

"국민운동본부요? 우리 노점상들은 '운동 본부'가 광주에서는 정부라고 생각 허요. 노태우 정부는 학살 정권이지 국민의 정부는 아닝께. 그렁께 우리는 억울한 일이 있으먼 '운동 본부'를 찾아가서 하소연 허요." 대인 시장에서 함지박에다 생선을 담아 팔고 있는 노점상 이점수 아주머니(48)의 말이다. 아주머니의 말속에서는 '전남 국본'이 '운동 본부'라고 표현되고 있었다. 광주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부른다. 이것은 전남 국본이 광주 시민들 사이에서는 모든 민주 운동의 '본부'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통념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요즘도 전남 국본에는 하루 평균 30-50명씩의 시민들이 찾아 든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정치 문제와 관련된 대중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집회 내용을 묻는 수많은 전화가 쇄도한다. 지난번 국회에서 '광주 청문회'가 열리고 있을 때 가해자 측 증인들이 위증을 하자 전남 국본에는 많은 전화가 걸려 왔다.' 왜 운동 본부에서는 위증을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결의 대회를 개최하지 않느냐'는 시민들의 항의 섞인 불만이 쏟아진 것이다. 전남 국본이 시민들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전남 국본은 주한 외국 기관에 대해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미국 정부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실무 담당자를 광주에 파견했을 때 광주 미문화원에서는 전남 국본측에 참가를 요청한다. 만약 전남 국본측이 불참하거나 참가를 거부했을 경우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다. 지난해 8월 통상 압력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이 고조되자 미상무상 한국과장이 전남 국본을 직접 방문했다. 또한 그 시기를 전후해서 주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도 전남 국본을 찾았다. 이에 대해 전남 국본 사무 처장 이강씨(43)는 '한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미국이 전남 국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광주 시민들의 단결된 힘'때문이라고 말한다.

"호헌 철폐!""독재 타도!"

금남로, 중앙로 , 충장로 등 광주 시내 중심가는 수십 만명에 달하는 시위대의 함성과 최루가스에 자욱이 파묻혔다. 1987년 6월 1주일 이상 지속되는 시위가 오전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 4시쯤까지 매일 반복되는 데도 시위 군중의 숫자는 눈덩이처럼 자꾸 불어만 갔다.

시위는 광주만이 아니라 서울 . 부산 . 대구등 대도시는 물론이고 전남의 나주 . 함평. 무안, 경남의 거창. 함양등 시골까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다양했다. 대학생은 물론이고 중. 고등학생, 회사원 , 가정주부 등 …. 1960년대의 4.19이래 최대 인파였다. 시위에 참가하느라 며칠씩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사람들의 충혈 된 눈동자에는 4.13조치에 담겨 있는 장기 집권 의도를 분쇄하겠다는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4.13조치는 집권 말기에 임박한 5공화국 전두환 정권이 야당을 비롯한 국민적 요구인 '직선제 개헌'을 정면 거부하는 것으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렇지 않아도 전두환 정권은 연초부터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으로 인해 (1987.1.16발표)광주 학살에 뒤이어 도덕성에 있어서 폭력 고문 정권이라는 심대한 위기를 맞고 있던 때였다. 3월 6일에는 표정두씨(신안군 암태도 . 63년생. 대동고. 호남대 중퇴, 무등 야학 교사. 노동운동)가 슐츠 (미 국무 장관)의 방한에 맞춰 미 대사관 앞에서 '내각책임제 결사 반대'를 외치며 분신 자살 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전국 곳곳에서 박종철국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항의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도 보다 강력해지고 있었다. 더 이상 군사 정권의 장기 집권을 허용할 수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폭 넓게 확산돼 갔다.

바로 이 시기에 '4.13호헌 조치'를 선언한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 담화는 마치 기름에 불을 당겨 놓은 듯 했다. 4.13조치가 국민들의 눈에 '장기 집권을 위한 음모'로 비쳐진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87년 지역 운동 통합 기운 싹터

4.13호헌 조치는 거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7년 단임으로 정권을 이양하겠다던 전두환 정권이 공약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자 국민들의 분노는 거리로 터져 나갔다.

연초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는 4.13조치로 찬물을 끼얹듯 한순간 잠잠해 지는 듯했다. 팽팽이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한동안 감돌았다.

태풍 전야의 정적을 깨뜨리는 몸짓은 4월21일 천주교 광주 대교구 사제단 19명이 가톨릭 센터(광주시 금남로 3가 소재)6층에서 '4.13 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 농성'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이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숨가쁘게 돌아간다. 교수단의 시국 성명, 한국 노총의 4.13조치 지지 성명과 자유 금융 노련의 반박 성명, 각계각층의 양심 선언, 집단 농성 등 정국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했다.

5월로 접어들면서 투쟁의 범위와 깊이가 확대 심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이 전국적으로 고립 분산된 채 산만하게 진행되자 전열을 정비할 필요가 시급히 요청되었다. 그러한 투쟁 양상의 질적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 발빠른 대응책을 들고 나온 것은 광주 . 전남 운동권이었다.

80년 5월 광주 항쟁 이후 '5.18광주 의거 유족 회' '5.18광주 민중 혁명 부상자 동지 회'를 비롯한 '5월 운동 ' 단체들의 지속적인 투쟁은 광주. 전남 지역의 운동력을 회복 강화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를 밑거름으로 하면서 이 지역 운동 역량은 동일한 '역사 체험을 한 ' 시민들의 정서적 공감대를 끌어 모으는데 성공했다. 학생들의 참여 없이도 대중 집회를 독자적으로 개최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 운동 역량이 뒷받침됐다. 1987년 초부터 광주 . 전남 지역 운동을 통일적인 구심체로 묶어 세울 필요가 여기저기서 제기돼 오고 있던 터였다. 마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규탄 대회 등을 계기로 운동권의 통일 단결을 향한 움직임이 서서히 구체화되고 있던 때였다. 4.13호헌 조치에 대한 국민적 분노의 폭발은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빠르게 했다.

1987년 5월18일 . 광주 항쟁 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망월동 묘역에 모인 광주 . 전남 지역 민주화 운동 단체 대표들과 민주 인사들은 '4.13호헌 조치 반대 및 민주헌법 쟁취 범도민 운동본부' (약칭 범도민 운동 본부)를 결성했다. 전남 사회 운동 협의회, 5월 운동 단체, 불교. 기독교. 가톨릭의 종교 운동권 , 전남대, 목포대 총 학생 회등 21개 단체가 참가함으로써 광주. 전남 지역 운동권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고문에는 조아라씨(YWCA명예 회장)를 비롯한 원로 3명, 공동 의장은 지선 스님을 비롯한 각계 대표 11명으로 구성됐다.

내부 문제 극복 전 운동권 통합

1980년 광주 항쟁으로 초토화되다시피 한 이 지역 운동권은 1984년 12대 국회의원 총선을 기점으로 85, 86년을 거치면서 매우 빠르게 세포 분열을 거듭한 결과 수많은 조직이 탄생하게 됐고, 바야흐로 분화된 기능과 통일된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통합 조직이 만들어지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가열되는 시위 상황은 결국 전국적인 차원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1987. 5.27)의 결성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남 지역도 기왕에 결성된 '4.13조치 반대 및 민주헌법쟁취 범도민 운동 본부'를 '민주헌법 쟁취 국민 운동 전남 본부'로 이름을 바꿨다.

전국적인 조직으로 전열을 정비한 운동권은 즉각 '6월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고립 분산적이던 투쟁이 전국적으로 통일되면서 상황은 역동적으로 변했다. 시시각각 변화되는 정국을 국민운동본부는 효과적으로 지도해 나갔다.

그러나 광주 지역은 전국 최초로 내부 조직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시위의 열기는 한참 후에야 높아진다. 서울에서의 명동성당 농성 시위, 부산에서의 6월 15일과 20일 사이에 이르는 격렬한 시위에 비해 광주는 6월19일에야 불붙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의 대응이 늦은 탓도 있었지만 당시 지도 조직인 전남 국본의 실질적인 대응 태세가 늦었던데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전남 국본 사무 처장 이강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전남 국본은 5월18일 망월동 묘역에서 결성됐지만 내적으로 발목을 묶어 놓고 있는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전남 국본의 역할과 위상을 둘러싸고 5.18기념 사업 추진 위원회(당사 회장 홍남순 변호사)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내부적인 합의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내부적 합의'가 이뤄진 것은 '남동 성당의 재편성'을 통해서 였다.

6월 투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6월25일 남동 성당(광주시 남도 소재)의 재편성을 통해 그때까지 불참했던 일부 단체가 참여하게 되자 전남 국본은 결성 당시에 비해 상징성과 대중 동원 능력에서 큰 개선이 이루어졌다. 최초 결성 당시 본부의 주요 인사로는 고문에 조아라, 윤기석(목사), 조비오(신부)였었는데, 재 개편을 통해 홍남순 변호사(전민협 회장)가 새로이 참여하였다. 공동 의장단도 11명에서 23명으로 대폭 확대하는 한편 공동 의장단 가운데 강신석 (목사)남재희(신부), 배종렬(사회 운동), 지선 (불교계), 전동년(청년), 김영진 (전민협. 현재 강진 지구 국회의원), 이기홍(재야 및 구속자협의회)을 상임 공동 대표로 추대하였다. 이와같이 신부, 목사, 변호사, 사회 운동 대표들로 중심을 이룬 고문, 공동 대표의 보강과 아울러 사무 국장 윤강옥등 실무진의 배치도 뒤따랐다.

공정 선거 감시 단 활동 어느 지역 보다 활발

전남 국본은 활동 내용에 따라 몇 단계의 시기로 구분 해 볼 수 있다.

제1단계로는 1987년 5월 최초 결성부터 6.29까지 이시기는 자체 조직 정비와 6월 투쟁을 상징적으로 지도하던 때로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유일한 연합 전선 적인 지도 조직으로서 국민운동본부의 성격과 역할이 대중 속에 심어졌다.

제 2단계는 7월초부터 12월 16일 대통령 선거까지 이때는 7.8월 노동자 대 파업을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국민운동본부가 별다른 역할을 못하게 되자 6월 항쟁에서 얻어진 지도력이 정체 내지는 와해되었다. 뒤이어 대통령 선거를 맞아 상층부의 이해 관계가 엇갈려 지도부가 분열되면서 국민운동본부의 위력도 눈에 띄게 약화되어 갔다. 이때 전국적 상황과는 달리 전남 국복은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선거를 둘러싼 상층부의 분열은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 대 파업 기간을 거치면서 다시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일부 단체가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광주. 전남 지역 '대중'들은 대통령 선거를 맞아 오히려 전남 국본의 주위로 더욱 강하게 모여들었다.

민주헌법쟁취 전남 노동자 공동 위원회(7월 8일)를 필두로 농민 공동 위원회(8월15일), 청년 공동위원회(10월 29일)가 속속 만들어져 부문 조직간의 내실 있는 연대를 꾀했다. 또한 담양군 지부의 결성(8.12)을 시작으로 해서 함평군 지부(8.17), 화순 군 지부 (8.28), 무안군 지부 (9.4)등 총22개 시 . 군 지부가 연이어 결성돼 12월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전남 지역 전역에 걸쳐 시군 지부 조직이 모두 완료됐다. 이때쯤 국민투표를 거쳐 '직선제개헌'이 이뤄지자 '민주헌법쟁취'라고 성격 지워진 것을 '민주 쟁취 국민 운동 본부'라는 포괄적인 목표로 개칭했다.

전남 국본은 전국 본부의 '선거 혁명론'을 반대하고 '선거 투쟁론'을 주장했다. 선거를 통해 군사 독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 특정인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채 공정 선거 감시에 활동의 초점을 맞췄다. 이 지역에서 공정 선거 감시단 활동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활발했다. 전남 국본은 지금까지 운동권에서 조직 대상으로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던 주민들을 상대로 조직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광산군 농민 회'와 '남 광주 민주 청년 회'등이 생겨나는데 산파 역할을 했다.

제 3단계는 12월17일부터 12월말까지 대통령 선거 직후 광주 .전남 지역에서 폭넓게 전개된 부정 선거 무효화 투쟁기간이다. 공정 선거 감시 단 활동의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부정선거 무효 화 투쟁으로 연결돼 약 1주일간에 걸쳐 서울 구로 구청 사건과 함께 6월 투쟁을 능가한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전남과 서울을 제외한 전국 다른 지역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선거 무효화 투쟁은 좌절되고 말았다. 다만 전남 국본은 이 투쟁기간을 통해 지역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여 대중 속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제 4단계는 1988년 1월부터 4월 총선 까지. 전국 본부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서울 지역은 주민 조직 활동을 중심으로 한 '구지부 체제 '로 전환되고 다른 지역은 실정에 따라 조직 활동이 중지된다든지 명맥만 유지하는 형편에 놓이게 됐다. 전남 국본도 이시기에 들어서면 운동 단체들의 연합체인 전선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잃게 된다. 대통령 선거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잘 열리던 공동 의장단 회의도 이 시기에 접어들면 거의 활동이 멈춰 버린다.

조직 상층부의 와해와는 달리 6월 투쟁과 공정 선거 감시단의 효과적인 활동, 부정 선거 무효화 투쟁 과정에서 지역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함으로써 얻어진 전남 국본에 대한 대중적 뒷받침은 전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서는 '국민운동본부'의 깃발을 쉽게 내려 버릴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새로이 변화된 조건에 맞춰 대중 투쟁의 결과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는 입장 속에서 대통령 선거 직후의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대중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88년 1월 4일 전남 국본의 내부 조직 개편이 이뤄진다. 지금까지의 전선 체적 성격에 연연하지 않고 단일한 투쟁 단위 조직으로서의 모습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사무국'을 '사무처'로 확대 개편하면서 실무자 중심의 조직 체계로 전환했다. 그때이래 현재까지 사무 처장직을 맡고 있는 이강씨가 실질적인 조직의 실무 책임자로 등장했다. 이때부터 전남 국본은 지금까지의 투쟁 노선의 에매 모호함을 털어 버리고 '민족해방 자주 노선'에 입각해 '자주. 민주. 통일 '이라는 강령을 내걸었다.

88년 4월에 실시된 13대 총선 에서 전남 국본은 '민정 당전원 낙선' 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맹렬히 뛰었다. 그 결과 총선 에서 민정이 참패를 당하자 그 입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제 5단계는 총선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기간 전남 국본은 총선 직후 공동 의장단에 대한 조직 개편을 단행한다. 박석무, 김영지, 김층조 등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들이 빠지고 대신 교사 대표 윤영규, 재야 정태성, 노동 임재복(신설)등이 공동 의장으로 들어왔다.

이기간 동안 전남 국본의 주요 활동은 5월 계승 투쟁을 주도적으로 끌어가면서 5월 정신의 산물인 '반미 의식'을 일반 시민들의 생활 속에까지 확산시키는데 주력했다. 특히 6월로 접어들면서 남북 학생 회담을 둘러싸고 통일 문제가 제기되자 각종 대중 집회와 '국민 신문'을 통해 민족 문제의 핵심인 통일과 반미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 했다.

지역 주민 조직 발판 된 '민족 자주 학교'

7월에는 지역 내 다른 운동 단체와 학생까지 함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학생 . 시민 민족 자주 학교'를 개설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까지 대중 집회 때에만 한정되었던 대중과의 만남을 '학교'를 열고 강좌를 폄으로써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대중 조직화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실제로 민족 자주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 혹은 구별로 모여 지역 주민 조직을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총동창회를 구성해 제 2기 민족 자주 학교를 이끌기도 했다.

이기간에 전남 국본은 '국민 신문'을 발간해 대중 선적력을 확보하고 또한 '상담실 '을 개설해 노동문제를 비롯한 민중 생존권과 관련된 시민들의 민원 문제 해결에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모든 조직은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다. 조직의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을 중심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남 국본의 경우 사무 처장 이강씨가 바로 그런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씨는 전남 국본이 전선 조직적 성격을 상실할 무렵인 1988년 1월4일 조직 개편을 시도할 때 현재의 직책을 맡게 된다. 그렇지만 사실은 87년 5월 광주 전남 운동권의 통일을 이룬 '범 도민 운동권의 무게 중심이 전남 사회 운동 협의회(이하 전사협)를 중심으로 편재돼 있는 상황에서 이씨는 개인적으로 전사협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아래로부터 이지역 운동권의 통일에 대한 기운이 무르익자 광주 . 전남 운동권의 상층부로 대표되는 홍남순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전남 민주 회복 국민 협의회 (이하 전민협)측과의 통합은 필수적이었다. 이때 홍 변호사뿐만 아니라 민중 운동권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던 이씨의 역할은 컸다. 두 세력 상호간에 약간의 미묘함이 있던 상황에서 그는 양쪽을 서로 이해시키면서 연결시키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해냈다.

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 운동 전국 본부는 '선거 혁명 론' 입장을 취했다. 이때 전남 국본의 대표로 공동의 장인 강신석(목사) 배종열씨(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공동의장)와 함께 정동년씨(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공동 의장)와 함께 정동년씨 (청년 대표 공동 의장. 당시 인천 사태로 구속 중)의 권한대행 자격으로 전국 본부 회의에 참석한 이강씨는 대표 발언을 통해 전남 지역 입장을 정리하면서 전국 본부의 입장인 '선거 혁명론'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폭로했다. "전국 본부는 지금 '선거 혁명론'이라는 오류에 빠져 있다. 본질적으로 미국의 식민지인 한반도에서 선거를 통해 군사 정권이 민간 정권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선거 시에 우리의 노선은 '선거 투쟁론'이어야 한다. 박정희 군사 독재의 연속선상에 있는 전두환 정권의 파쇼적 본질을 폭로하고 그 잔재 청산을 제일의 임무로 설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바람직한 차기 정권의 모습을 국민 앞에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운동권은 야권의 대통령 후보인 양 김씨를 리드하는 정책 대안을 적극 제시해야 한다. 지금 이시기에 특정인을 선택하여 지지하는 것은 운동권이 보수 야당의 정략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선거 혁명 론의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선거 투쟁론의 요지이다. 그러나 전남 국본을 제외한 서울 본부 측의 분위기는 이미 '후보 단일화'입장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강씨는 전남 국본의 경우 '선거 투쟁론을 고수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의 패배감에 빠지지 않고 곧 바로 광범한 부정선거 규탄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또한 "선거를 통해 우리측이 패배한 것이라고 일방적인 측면만 주장하면 곤란하지요. 선거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하나의 계기에 불과합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민주화 의식은 획기적으로 고양됐습니다. 우리는 선거 투쟁 과정에서 높아진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조직적 틀로 묶어 냄으로써 운동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진전 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운 시기에 전남 국본의 사무 처장 직을 맡게 됐다. 이씨가 사무 처장 직을 수락하게 된데는 개인적인 동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에 4월 총선을 앞두고 이씨는 이 지역에서 국회 의원 후보로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었는데 그 문제에 대한 주위로부터 오해를 불식시키고 싶었던 것 전남 국본에서 중책을 맡음으로써 제도 정치권과 선을 긋고 운동가로서의 모습을 분명히 하겠다는 개인적 결단과 관련된 결정이었다.

의외로 호응 큰 '국민 신문'

사무 처장직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사무처 후배 실무자들로부터 '전남 국본을 앞으로 이끌어 갈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운동 노선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민족해방 자주 노선을 지향한다. 그러나 전남 국본의 노선은 나 개인의 입장과는 별도로 앞으로 활동가와 이 지역 대중들이 함께 실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질 것이다."라고 답했다.

전남 국본은 보다 활기를 띠었다. 그는 이 지역 대중을 대상으로 한 '민중 신문'을 제안했다. 그가 처음 이것을 제안했을 때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 저었다. 그는 판매 수익금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로서는 무엇보다도 전남 국본의 재정과 신문 판매망을 통한 조직 구축이 주요한 관심사였다. 신문은 4월초 나왔다. 운동 단체의 기관지로서가 아니라 시사 대중 정론지 적인 성격으로 편집되었다. 제호는 '주간 국민 신문'. 아니나 다를까 초기에는 매우 고전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선거 철이 임박하자 '민정당 낙선'이라는 입장을 표방하고 있던 국민 신문은 야당 후보자들로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야당 후보자들이 너도나도 다투어 국민 신문을 대량 주문하여 선거 홍보 내용으로 뿌리기 시작하면서 발행 부수가 몇 만부를 넘어서고 국민 신문 자체도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강씨는 남민 전사건의 옥중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남주 시인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이다. 그들 둘은 감옥에서 강제적으로 격리되어 있을때를 제외하곤 중학 생활 이래 거의 서로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다.

이강씨(1947. 7.23생, 전남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 31)는 아버지 이훈씨(65)와 어머니 최영순씨(64)사이에서 6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9년 전남대 법대 1년 재학중 그는 '삼선 개헌 반대' 데모 주동 혐의로 군에 강제 징집된다. 군제 대후 1973년 다시 학교에 복학한 그는 유신 헌법 반대를 주장하는 '함성지'라는 유인물을 친구 김남주, 후배 김정길과 함께 대량 복사하여 배포한다. 이것이 들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언도 받는다. 출감 후 1974년 4월 또다시 '민청학련사건'으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의 징역에 처해진다. 1975년 2월 1년만에 형집 행정지로 풀려난 그는 다음해 8월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두 번째 징역을 살고 나와 농사를 짓고 있던 도중에 현재의 부인 이소라씨(44. 현 광주 . 전남 여성회 회장)와 1976년 1월 결혼한다. 이때부터 가톨릭농민 회 활동에 몸담게 된 그는 1977년 당시에 유일한 광주 지역 재야 운동 단체인 전남 민주 회복 구속자 협의회 3대 회장직을 맡게 된다. 이후 그는 1978년 4월 유명한 '함평 고구마 사건'에 중심적 인물로 참여한다. 이후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3번째 구속되기 전까지 농민 조직 활동을 벌였다. 그가 농민운동만으로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남민전은 '새로운 빛을 던져 주는 듯했다 '고 말한다. 1983년 2월 남민전 사건으로 국가 보안 법 위반으로 징역 3년간을 살고 만기 출소했다. 84년 9월부터 현재까지 (주)수산 무역 광주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현직에 근무하면서 전남 국본 사무 처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 신문'은 1988년 4월초 창간호를 낸 후 89년 2월말 현재 지령 제 31호에 이르렀다. 운동권에서 만드는 신문으로는 장수하는 편이다. 재정 사업부 윤영진씨(25)는 평균 발행 부수가 2만5천부 가량이라고 일러준다. 원래 주간 단위로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가끔씩 발행 기일을 맞추지 못해 독자들에게 미안하다는 것이 편집 기자들의 말이다. 편집부장 선대원씨(31)는 "인쇄 시설을 갖추고 있지 못한 점과 종이 값을 마련하지 못해 인쇄할 수 없을 때 매우 안타깝습니다."라고 말한다.

'국민 신문'은 대학노트 크기로 약 40여 페이지 가량의 분량. 편집 내용은 사설, 소식, 탐방, 심층 취재, 경제 해설, 쟁점, 칼럼, 시론, 공해, 건강, 만화, 꽁트, 고십등 민중 생활과 관련지어 다양하게 꾸며진다.

이훈규씨(35. 전사업 국장)는 "국민 신문을 팔러 돌아다니다 보면 박카스 따위 마실 것을 사주면서 애쓴다고 격려해 주는 아저씨, 손목을 꼭 붙잡고 열변을 토하는 할아버지 , 마냥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는 노점상 아주머니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분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라고 덧붙인다.

전남 국본에는 민원 사항도 많이 들어온다. 민원 사항이 하도 많이 밀리자 88년도 하반기에는 아예 '상담실' (실장 임재복 공동 의장 겸임)을 만들었다. '부당한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없는가? ' '사기를 당했는데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가?' '산재를 당했는데 어떻게 하면 보상받을 수 있는가?' '경찰 백차에 치여 죽은 사람을 경찰이 책임전가를 시키는데 도와 달라'. 심지어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는데 전남 국본이 중재 알선해 달라'는 근로자와 사용자 양측의 요구,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 '체불된 임금을 받아 달라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요구가 쏟아져 들어온다. 전남 국본은 대개의 경우 성실하게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같이 노력한다. 특히 국민 신문에 관련 기사가 실리면 행정관서와 관련된 사건일 경우 즉각 시정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전남 국본 사무실은 여러 운동 단체들로부터 농성 장소로 자주 점검(?)당한다. 5.18행방불명자 가족 회 만해도 2월말 현재 50일 이상 장기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경찰관이 한 여인을 강제 추행한데 대해 광주 . 전남 여성회, 전남 총여학생회 등 여성 단체들이 항의 농성 장으로 이곳을 택했었다. 특히 전남 민주 화 실천 가족 운동 협의회 (회장 안성례)는 농성 단골손님이다. 구속자 가족이 회원인 이 단체는 정세가 변화될 때마다 구속된 형제. 자식들의 석방을 위해 벌이는 농성 장소로 이곳 전남 국본을 활용한다.

한때 사학 재단 비리 문제로 이 지역의 많은 중 고등 학교가 말썽이 되고 있을 때 학부모, 교사 , 학생들이 전남 국본을 찾아와 농성을 한 적이 있었다. '교육 민주화를 위한 각종 교사 단체들도 많은데 왜 굳이 이곳으로 찾아오느냐'는 물음에 학부모 한사람은 '운동본부를 당국에서 더 무서워하니까' 찾아온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더라는 것. 전남 국본 측은 이들 점거 농성 자(?)들을 위해 국민 신문 편집실을 제외하곤 아예 모든 사무실을 개방 해 버렸다. 각종 집회나 시위대 사용하기 위해 마련한 방송 시설도 농성 자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했다. 가끔 전남 국본 사무실에서 흘러나온 출력 높은 스피커 방송은 농성 자들이 직접 주장을 담고 있다.

사무실 스피커 통해 한때 '정규'방송

한동안 전남 국본 사무실이 광주시 황금 동에 있었을 때 점심시간과 오후 퇴근 시간에 맞춰 고성능 스피커로 정규적인 방송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각종 소식과 주장을 실어 보내는 방송이었다. 그러나 너무 큰소리 때문에 주위 주민들의 생활에 피해를 줄까 봐 정규 방송을 중지했다.

전남 국본은 창립 이후 4번이나 옮겼다. 옮길 때마다 시내 중심부 도청 가까운 곳에 자리를 물색했다. 5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도청 앞 분수대에 더욱 가까운 곳, 시민들이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 한다.

전남 국본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시민 학생 민족 자주 학교'(학교장 지선 스님)는 2회 째 실시해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다. 지난해 7월 17일부터 7월30일까지 약 보름간에 걸쳐 '미국 문화를 몰아내고 자주 문화를 꽃피은다' 는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고등학생, 대학생, 시민들을 대상으로 6회에 걸친 강좌를 실시했다. 전남 국본이 중심이 되어 각 대학 총학생회와 다른 운동 단체들이 공동 준비한 자주 학교에는 7백 여명이 참가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교육에 참가한 사람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된 분반 토론 과정을 통해 서로 알게 됐다. 이들은 교육 기간을 마친 뒤 각 지역으로 흩어져 주민 조직 건설의 밑거름이 됐다. 자주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주민 조직으로는 '서 광주 민주 시민 청년 연합' '북 광주 청년회' '동 광주 민주 시민회' 등으로 그 지역 주민들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벌여 나가고 있다.

이들은 제 1기 자주 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총동창회'를 결성, 제 2기 자주 학교 (89. 19-2.14)를 전남 국본과 함께 스스로 꾸려 나간다.

재정수입 60%가 시민 성금

전남 국본의 조직은 실무 조직은 사무처 중심으로 돼 있다. 27명의 공동 의장단이 각 계 대표로 구성돼 있고 그 가운데 6-7명의 상임 공동 의장이 있다. 그 위에 독립 운동가 이기홍옹을 비롯한 원로들로 구성된 고문단이 있다. 공동 의장단 아래 각 단체 실무 책임자 급으로 구성된 중앙 집행 위원회가 있으나 사실상 기능이 중지된 상태여서 전남 국본이 전선 조직으로 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원인이 되고 있다.

조직의 상층부보다는 집행 기구인 사무처 내부는 탄탄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강 사무 처장 아래 조봉훈(37), 위성삼(36)등 2명의 사무 부 처장 아래 조봉훈(37), 위성삼(36)등 2명의 사무 부 처장, 총무국(국장 위성삼) 산하 총무부, 재정 사업부, 조직국 (국장 염정호) 산하에 광주 지역을 관장하는 조직 1부 , 시군 지부를 관장하는 조직 2부, 대외 협력부가 있고 , 교육홍보국(국장 조영웅)에는 민족 자주 학교 사업등을 추진하는 교육부와 홍보부가 있다. 각 부서에는 1-3명 가량의 실무자가 배치되어 있다.

국민 신문을 편집하는 편집실 (실장 지선스님. 부장선대원), 민원을 위한 상담실(실장 임재복), 그리고 정책실이 따로 있다.

현재 사무처 상근 직원만 해서 약 30여명, 단위 운동 조직으로는 상당히 많은 숫자다.

전남 국본은 사무처 조직이 규모가 큰 만큼 많은 재정이 요구된다. 김광열 재정 부장은 '재정수입의 60%가량을 시민들의 성금으로 조달하고 나머지 40%는 국민 신문 판매, 5.18관련 비디오 따위의 자료 판매, 일일 찻집등으로 꾸려 나간다'고 밝힌다. 성금은 주로 가두 집회나 투쟁 시에 모금함을 이용한다. 투쟁이 장기화되거나 대규모화될수록 성금은 더 많이 걷힌다. 많이 걷힐 때는 1회에 2백 만원 가량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지게꾼 아저씨가 꼬깃꼬깃한 돈 2천 원을 모금함에 집어 넣을 때는 눈물이 핑 돌더라'고 김씨는 말한다. 성금은 온라인을 통해 익명으로 보내져 오는 경우도 많다. 또한 지역 주민들을 위해 사무처에서 직접 방문하여 5.18비디오를 상영한다거나 좌담회 등을 개최할 때도 즉석 해서 10만 -30만원씩 모금이 이뤄진다.

성금이나 사업으로 만들어진 재정 자금은 각종 연대 투쟁 사업에 35%, 타 운동 단체 지원 20%, 사무실 운영 및 일반 경비 15%, 자주 학교등 교육 사업 10%정도의 비율로 각각 쓰여진다.

전남 국본은 투쟁 사업을 보다 잘하기 위해 88년 5월 투쟁을 앞두고 중고 봉고 차량 1대를 구입했다. 연한 청록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구호를 옆면에다 써넣었다. 안에는 방송을 하기 위해 앰프용 받침대를 만들어 놓았다. 대중 집회 때 가두 선전 방송을 위해서다. 처음에는 경찰들이 가두방송을 못하도록 여러 가지 제재를 가했으나 막무가내로 나가니까 나중에는 그냥 못 본체 해 버리고 지금은 거의 제재를 하지 않는다.

시위 때마다 단골 손님처럼 등장하던 이 차량도 지난 2월 3일 열린 '광주 학살자 처단 요구 시민대회'를 끝으로 그 수명이 다했는지 전남 국본 사무실 앞에 유리창이 깨어진 상태로 놓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방향 모색 위한 몸부림 한창

전남 국본은 이 지역 대중의 요구와 더불어 항상 가장 앞에 서서 투쟁 해 왔다는 점 때문에 아직은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지만 반면에 여러 가지 문제점도 안고 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88년 초반이래 운동권 내부에서는 전남 국본이 여러 단체의 실질적 결합을 의미하는 전선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중 투쟁에 있어서는 전선으로서의 역할을 지속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곧 지역 내부의 운동 세력이 전남 국본 이라는 틀 속에서 모두 함께 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대중들은 전남 국본이 모든 운동 단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 문제는 전국적 수준에서 국민운동본부의 위상 변화와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다.

87년 6항쟁을 이끌었던 국민운동본부가 6.29이후 광범한 국민 연합 전선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임무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채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민족 민주 운동 세력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상황에서 야당과 함께 만든 국민 연합 전선은 야당의 상당한 영향력(월 재정의 90%정도 부담)과 민족 민주 세력의 재정, 조직 측면에서의 취약점이 대통령 선거 기간을 거치면서 결국 전선의 분열을 가져왔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6월 항쟁 이후 7,8월 노동자 대 투쟁을 거치면서 민중 세력의 역량이 성장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판단에 기초해서 발전되어 가는 운동 상황을 잘 끌어 갈 수 있기 위해서는 광범한 새로운 전선 조직이 요구되어졌다.

이리하여 88년 한 해 동안 부단한 암중모색을 해 오다가 89년 1월21일 드디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약칭 전민련)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전민련의 출범은 전국 운동 세력의 통합이라는 명제 속에서 지역 운동 세력의 통합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역 운동 세력을 실질적으로 통합할 수 없었던 속사정과 달리 투쟁 사업에 있어서 준 전선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강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전남국본의 위상이 근본적으로 문제되기 시작했다.

전남 국본은 변화된 정세를 맞아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위상이 재조정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전남 국본은 향후 활동 방향과 조직적 개편, 위상 정립이라는 포괄적인 문제를 풀어 나가기 위해 최근 '조직 문제 연구소 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직 문제 연구소 위원회는 주위로부터 많은 의견을 듣고 얻어진 결론에 따라 전남 국본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

조직 소위원회 에서는 최근 몇 가지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여기서 지적된 전남 국본의 문제점으로는 그 동안 전남 국본이 대통령 선거 이후 사무처 직원 중심으로 파행적으로 운영되면서 전선의 질을 담보할 수 있는 공동의장단을 비롯한 중앙 집행 위원회가 사실상 와해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전국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지역 내 운동 세력간에도 입장 차이가 있어 왔고 전남 국본도 그 동안의 운동 과정에서 몇 가지 오류를 범해 왔었 다고 한다.

조직 소위원회 위원 중의 한 사람인 최향동씨(27)는 전남 국본이 잘못 했던것의 하나로 13대 총선을 며칠 앞두고 88년 4월5일 김대중씨를 초청해 광주 역 광장에서 가진 대규모 대중 집회를 든다.

"당시 전남 국본의 총 선에 대한 입장은 '민정당 낙선' 이었습니다. 민정 당을 낙선시키기 위해서는 민정당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총 단결하자는 것이었고, 이러한 논리의 연속선상에서 평민당 김대중 총재까지도 초청했던 것이죠, 그때 학생들을 비롯한 몇몇 운동 단체 에서는 '아무리 민정당 낙선을 위한 총 단결이라 할지라도 무원칙한 연합은 안 된다'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전남 국본 지도부에서는 당시 대중적 요구로 보아 김대중씨를 참가시켜야 대규모적인 집회가 가능하고, 집회가 이뤄져야 운동권이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해 민정당 낙선 운동도 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집회를 강행했던 것이죠. 결국 일부에서 우려했던 대로 운동의 순수성을 의심받기조차 했습니다."

'대안 없이 조직 해체할 수 없다'

그러나 전남 국본이 몇 가지 점에서 비판 받아야할 점이 있다고는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조직을 무조건적으로 해체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이다. 여러 가지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남 국본은 아직도 이 지역 대중들로부터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 그 동안의 운동이 활동가 중심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면 전남 국본이야말로 대중이 주체가 되어 만들었고 대중이 필요해서 키워나간 조직체입니다." 전남 국본 사무 부 처장 조봉훈씨의 이야기다.

그러기 때문에 전남 국본은 전민련의 출범과 지역 운동의 통합 요구라는 변화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기 위해 뼈를 깍는 아픔으로 자기 혁신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 운동의 통일을 위해 전남 국본의 애매한 위상과 역할을 보다 분명히 하면서 높아진 대중 의식 수준에 부합되는 내용과 형식을 갖추어 변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병윤씨(33. 전남 민주 쟁취 노동자 공동 위원회 사무차장)는 그 동안 전남 국본이 이 지역에서 해 온 역할을 과소 평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전남 국본이 몇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으나 아무런 대안 없이 '조직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틀린 생각입니다. 전남 국본이 나아갈 길은 그 동안 지역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해오면서 굳건히 대중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 그러기 때문에 활동가들 몇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경솔하게 전남 국본 방향 문제를 잘못 다룬다거나 해서는 안되리라고 봅니다. 그동안 전남국본이 걸어왔던 역사성 속에서 옳은 점은 계승 발전시키고, 잘못된 점은 고쳐 나가야지요."

조직 문제 연구소 위원회에서는 전남 국본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조직적 위상에 대해서 대략 세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지난날의 활동을 계승과 혁신의 차원에서 지금까지 애매 모호했던 노선을 보다 분명히 하자는 관점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광주. 전남 지역 대중은 '반독재 민주화' 수준을 넘어서 '민족 자주화'라는 차원에서 인식이 심화되고 있으므로 그에 부응하는 조직과 투쟁 노선을 내걸고 대중의 사회 정치적 요구에 맞게 투쟁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지역 내의 통일을 위해서는 전남 국본이 전선 조직으로서의 위상을 포기하고 대중의 정치적 요구를 담아 내는 단일한 투쟁 조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게 될 때 비로서 지역 내의 통일이라는 당면 과제를 힘있게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둘째, 전남 국본은 지역 내에서 비 계급적 대중운동을 담아 내는 그릇, 즉 전선 조직이기 때문에 앞으로 만들어 질 통일전선을 예비하는 조직으로 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를 위해 노동. 농민등 계급 운동을 제외한 모든 사회 운동 단체를 포괄해 연합 조직으로 자기 모습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셋째, 서울에서처럼 전남 국본도 ' 구 지부' '동 지부'와 같은 형식으로 조직 체계를 바꿔 주민 운동 차원으로 전환하자는 논리이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입장 속에서 항후 전남 국본의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87년 6월 항쟁을 지도했던 국민운동본부가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와해된 후 꼬박 1년이 지난 89년 1월 전국 운동의 통일이라는 기치 아래 '전민련'이 출범했다. 이 지역 운동권도 전국 운동의 통일이라는 커다란 대의 명분에 부응해야될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주어져 있다. 그 동안 이 지역 대중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던 전남국본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예외일 수 없다. 앞으로 거듭나는 전남 국본의 모습 속에서 당면해 있는 많은 운동적 과제들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인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