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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부상자, 고통의 세월 8년-부상자 동지 회를 중심으로

본문

광주 부상자, 고통의 세월 8년

-부상자 동지 회를 중심으로



전용호 광주 출판사 편집 주간

민주의 십자가 '광주' 부상자



아아 ,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하나님도 새떼들도

떠나 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불사조여 불사조여

-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중에서

88년 5월의 광주는 성큼 다가선 초여름의 햇살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5월초부터 당시 격전지였던 금남로의 5.18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학생. 시민 성지순례 단의 발길이 끊이지 않더니, 5월18일 추모 제에는 수만의 시민이 운집하여 밤늦게 까지 규탄 대회를 치열하게 전개함으로써 88년'5월 싸움'은 그 포문을 열었다. 이후 5월27일 합동 위령제까지 하루도 쉬임 없이 '5월투쟁'은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이로 인해 88년 5월의 광주 시가지 는 온통 최루탄과 돌멩이로 뒤덮였다.

8년만에 해금된 '광주'는 내 외신 기자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면서 80년 그날 못다 이룬 민주화를 기어이 이루고야 말겠다는 듯 깃발을 드높이 휘날렸다. 특히 피해 보상과 진상 규명을 요구하던 광주 시민의 외침은 조성민군의 할복. 투신을 계기로 학살 책임자 처단, 미국의 배우 조종 여부의 집중 추궁 및 통일 문제로까지 비약 발전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

88년 5월의 광주는 통안의 눈물을 안으로 삭이며 견디어 온 지난 8년 세월을 뛰어넘어 용트림하며 뜨겁게 타올랐다.

이렇듯 최루탄 난무하는 광주의 거리 투쟁의 현장 곳곳에서는 휠체어를 탄 사람, 목발에 몸을 의지한 사람, 한쪽 눈이 없는 사람 등이 불편한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육신이 성한 사람보다 더 목청껏 구호를 외쳐 대는 모습이 곧잘 목격된다. 얼핏보면 평범한 신체장애자로 보이지만 울분을 참지 못하는 듯 포효하며 남은 육신 기꺼이 바치겠다는 비장감으로 시위를 주도하는 모습에서 여느 단순 시위가 담자(?)와는 다른 면모가 엿보인다.

휠체어와 목발에 몸을 의지해야만 하면서도 최루탄과 연행을 두려워 않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이야말로 80년 5월 조용한 전원의 도시에 진주하여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를 수행한 계엄군에 의해 육신을 난자 당한 바로 그 5.18 부상자들이다. 그들은 총알이 빗발치던 5월 그날의 죽음을 넘고 8년에 걸친 시대의 어둠을 넘어서 시퍼렇게 살아남아 지금 온몸으로 그날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불구의 몸을 이끌며 남은 목숨을 민주화의 제단에 기꺼이 불사르는 민주의 파수꾼이 된다는 각오로 살아가고 있다.

빛고을은 공포의 도가니로

1980년 5월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10.26이후 각 부문에서 추진되어 온 민주화 일정은 전면 중단되고 정국은 살얼음판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숨통을 바짝 조이는 탄압 속에서도 광주는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전10시경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철폐, 휴고 령 철페를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시위를 예상이나 한 듯 진압을 위해 파견된 공수 부대는 이제까지 시위대를 저지하면서도 평화적인 시위는 그다지 심하게 다루지 않던 경찰과는 너무도 판이했다. 계엄군은 잡힌 학생들에게 닥치는 대로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찍었다. 펑펑 머리가 터지면서 아스팔트에는 붉은 피가 흥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점점 잔인성을 더해 가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살상은 광주를 암혹의 도시,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다. 빛고을은 공포의 도가니였다.

이리하여 광주의 십자가인5.18부상자는 5월18일부터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10일간 자행된 엄청난 학살의 오픈게임처럼 시작된 것이 곤봉 세례였다. 곤봉은 주로 학생들의 머리에 작열 됐는데, 이로 인해 머리가 터지거나 무자비한 구타로 골병만 들었을 뿐 신체의 불구를 면한 경우는 감히(?)부상자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 그 수는 엄청났다.

두려움으로 몸을 피하거나 반항하여 몸이 움직거리면 곤봉은 어깨나 등, 다리에 가해졌고, 그럴 때마다 그 부위의 뼈는 으스러졌다. 이것이 5.18부상자의 출발이었다.

이 대표적 케이스가 바로 신경진씨(당시28세, 학생)이다. 신경진씨는 대학생들의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곤봉 세례를 받았는데 곤봉 맞은 부위마다 팔뼈와 다리뼈가 으르러 졌다.

처음에는 시위에 가담한 대학생들이 그들의 목표물이었지만, 점차 많은 시민이 동조하자 젋은이 들은 모두 계엄군의 표적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딸 또래의 젊은이들이 젊다는 이유 하나로 수난을 당하자 주변에서는 야유가 빗발쳤다. 그러다 폭력을 만류하는 아저씨. 아줌마 심지어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계엄군의 만행이 심해질수록 시위 대열의 저항도 거세어졌다. 그리고 시민의 저항이 높아질수록 그들의 살상은 잔인해져 갔다. 공수부대의 곤봉 파티(?)는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의 서곡에 불과했다. 곧이어 M16에 부착된 대검에 의한 살상이 시작된 것이다.

뜨거운 햇살 아래 날이 시퍼렇게 반짝이는 대검은 시위대의 복부와 대퇴부에 날아들었다. 이렇게 하여 18일과 19일은 곤봉과 대검에 의한 부상자가 처음 생겨나고 무수히 양산된 날이었다. 신행균씨(당시 50대, 막노동)는 머리를 8차례나 대검으로 찔렸다. 신행균씨의 두부는 마치 무 토막처럼 썰어졌다고 당시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부상자들은 입을 모은다. 신씨는 이 후유증 탓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뒸다.

5월20일에는 특기할 만한 사태가 발생했다. 곤봉 난타와 무차별 구타보다는 대검에 의한 사상자가 늘어나더니, 이날 밤 마침내 총상에 의한 부상자가 생겨난 것이다. 이날의 총상은 계엄군의 정조준에 의한 관통상은 아니었다. 사상자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몰려드는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공포로 쏘아 대는 사격이었다. 그러나 파편으로 튀겼고, 그 파편이 몸 속에 박힌 것이었다. 이어 산발적인 총격이 있었다.

고도 성장 정책에서 늘상 소외되던 척박한 땅 전라도와 도청 소재지이면서도 소비 도시를 면치 못하던 광주의 시민들은 지역을 초월해 모든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염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화를 달성함으로써 비로서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계엄 철폐, 구속 인사 석방, 민주주의 실현을 그토록 열렬히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응답은 곤봉과 대검, 그리고 M16일 뿐이었다.

국민의 방위세와 방위 성금으로 무장한 군대가 동족의 가슴에 칼을 꽂고 총부리를 들이대는 믿어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광주 시민이 취할 수 있는 대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스스로가 자신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초보적인 무장을 시작했다.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었고 차량을 구입하여 시가지를 누볐다. 그러는 사이 광주 시민은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한 핏줄의 공동체가 되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격

5월21일 마침내 최악의 사태가 전개되었다. 설마 했던 공식 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수십만의 시민이 운집한 금남로에 시위대가 탑승한 장갑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장갑차 위에는 고등학생 한 명이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장갑차와 학생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공수부대와 대치 중인 도청으로 달렸다. 도청에서 앰프를 통해 애국가가 퍼져 나왔다. 애국가가 나오자 시민들은 경건하게 따라 불렀고 그 사이 분위기는 숙연하고 한껏 고조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식 발포 명령일 뿐이었다. 이어 즉각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알은 그 학생의 목을 정통으로 관통했다. 비명과 함께 쓰러진 그 학생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즉사였다.

한번 불을 뿜은 M16은 발사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너무도 믿기지 않아 피하지 조차 않았던 광주 시민들은 하나씩 둘씩 피를 흘리며 어이없이 쓰러져 갔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때 시위 트럭에 탑승하였다가 척추를 관통 당한 사람의 하나가 바로 이세영씨(당시 21세, 노동자, 현재 국민 운동 전남 본부 홍보 국장)이다. 그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도청으로 진입하다가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목발을 짚고 다녀야만 한다.

시위대는 마침내 예비군과 경찰의 무기로 무장했다. M1과 카빈이 주종을 이루었다. 일방적인 발사가 이제는 격렬한 쌍방간의 총격전으로 변화하였다. 광주는 타오르는 전쟁터 바로 그것이었다.

계엄군의 손에 들린 M16의 방아쇠는 주로 시위대와 무장한 시민 군에 집중됐지만 지나는 행인이건 죽음의 도시를 탈출하려는 사람이건 더위로 하천에서 미역감는 어린애이건 결코 가리지 않았다. 남녀노소를 묻는 법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쏘고 또 쏘았다.

얼마 전 민화위에 출석해 증언한 바 있는 김모씨(트럭 운전)는 학살의 현장을 피해 일가족과 함께 고향인 지도로 향했다. 담양 검문소 20-30m전방에서 군인들이 정지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김씨는 차를 세웠고 계엄군 4-5명이 달려들어 검문을 시작했다. 아무런 특별한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장교는 허리춤의 권총을 빼들 더니 장전을 하면서 명령했다. "돌아서 !""차에 타!"김씨는 다시 광주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찢기는 듯 총성이 울리더니 5살 난 딸 , 아내와 함께 김씨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김씨는 파편이 등에 박혔고 부인은 총탄이 뇌를 스쳤으며 딸은 척추에 정통으로 총알을 맞았다. 결국 부인은 정신 이상 증세를 나타내다 85년 한 많은 일생을 마쳤고 딸은 지금도 대소변을 갈 수 없어 기저귀를 차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만 한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헌혈하던 여고생까지 공수부대의 과녁이 되었다. 이모씨(승려)는 적십자 완장을 두르고 부상자를 안전하게 운반하려다 도리어 자신이 부상자가 되었다. 척추에 날아든 총알은 그를 하반신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불구자로 만들었다.

당시 임신 중이던 이추자씨(당시 25세, 주부, 현 부상자 동지 회 부회장)는 콩볶듯 쉴새없이 쏘아 대는 총을 피해 임신 3개월의 몸으로 방에 있다가 벽을 뚫고 들어온 탄환에 부상을 당했다. 총알은 귀를 스쳐 지나갔다. 또 이모양(당시 22세, 무직 )은 학교 다니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취하다가 집 앞에서 자궁에 총상을 입어 여성의 기능을 손상 당했다.

박모양(화순 거주, 당시 미용 업)은 배에 총상을 입어 창자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수술 중에 나팔관을 잃어, 5.18부상자란 딱지와 함께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몇 년후 애가 딸린 남자와 결혼을 해야만 했다. 이모양(당시 22세, 미혼)은 거주하는 화정동의 아파트 응접실에서 총알을 받았다. 총알은 한쪽 가슴을 관통하였고 이로 인해 자궁까지 파열되었다.

올해 고희를 맞은 최복덕 할머니(당시 62세, 안면 총상)는 턱에 총을 맞아 온 얼굴이 뒤틀려졌고 지금도 치료 중이다. 광주 외곽인 외촌 부락에 사는 김천례할머니(당시 70세, 농업)는 손녀 뻘 되는 5세 소녀와 함께 밭을 매다가 발목을 관통 당했고, 5세 소녀도 같이 부상을 당했다.

문명호씨(당시 28세, 양복 공)는 우측 옆구리에서 다리까지 10여 발의 총탄이 박혔다. 병원에 함께 입원했던 동료들은 다리에서 가슴까지 몸의 거의 절반을 기브스하고 고통스러워하던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는 아직까지 보행이 자유롭지 못하다.

임성욱씨(당시 26세, 조선대 법대생)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소아마비 장애자였다. 그는 시위 중에 성한 한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의 기동은 더욱 불편해졌다. 그는 조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는데 이때 인연을 맺은 조대 병원의 수간호원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다.

전성준씨(당시21세)는 차량 시위를 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우측 대퇴부 골반 뼈가 완전히 깨졌다. 신묘섭씨(당시 16세, 고등학교 1년)는 개머리판으로 이마를 구타당했는데 이마가 완전히 함몰되어 정신이상이 되었다.

박병준씨(당시 20세, 양복 공)는 5월27일 최후의 순간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양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의 좌측 다리는 절단이 불가피하여 의족을 하고 있다. 현재 제주도에 거주하는 오용태씨(당시 27세, 전대 생)도 우측 무릎에 총상을 입어 우측 다리를 절단하고 고무다리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광주를 피비린내로 뒤덮은 공수부대의 만행은 5세 소녀에서 70세 노파에 이르기까지 아랑곳하지 않고 자행되었다.

납탄과 화염 방사기까지 사용

살상 무기 또한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몸에 한번 박히면 납중독을 일으키는 납탄은 전시에도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동족에게 납탄이 발사되었다.

물론 당시 사용된 탄환의 전부가 납탄은 아니다. 그러나 월남전에서조차 사용이 금지된 납탄을 발사한 것은 광주 시민이 월남의 베트공 보다 더 악랄한 적이었던가 하는 의문을 제기시킨다. 이토록 악명 높은 무기의 사용은 그날의 참혹 상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닐까 ?

납탄은 몸 속에 박히면 근육에 분산됨으로써 제거 수술이 불가능하다. 그날 납탄에 맞은 부상자는 유탄 보유와 납중독이라는 이중의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뿐만 아니다. 전쟁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화염 방사기가 최강식씨의 복부와 다리를 검게 태웠다. 그는 5월21일 중흥동 소재 시청 부근의 건축 현장에서 동료 인부들이 공수부대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자 이에 항의하여 시위를 주동하다 그같은 변을 당했다. 그는 몸이 까맣게 그을린 상태에서 연행되어 통합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하였으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급기야 작년 여름 고통스런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장례는 민주 시민 장으로 거행되어 5월 항쟁 동지들이 묻혀 있는 5.18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5.18광장이라 불리 우는 도청 분수대 앞에서 최초의 노제를 지냄으로써 남다른 의미를 지닌바 있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진입하기까지 열흘간 계속된 광주의 비극을 온몸의 상처로 남긴 부상자들, 그들의 부상 상태는 어느 정도일까?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머리를 다쳐 정신이상이 된 부상자들이다. 이들은 머리를 집중 구타 당하거나 공식 발포 이후 탄환을 머리에 맞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상후 적십자 대원등 시민들에 의해 후송되거나 군인에 의해 통합 병원에 연행되어 치료를 받다가 김용수씨 부인처럼 사망한 경우도 있지만 ,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문영씨(현재 40대 , 5.18당시 상 공장 경영), 김계수 씨(당시22세), 정방남(당시 무등 고시 학원 수강생)등 10여명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실정이다.

또 다른 중상자는 척추 환자라 하겠다. 척추가 인체의 기둥인 만큼 척추를 관통 당한 부상자는 신경이 마비되어 반 신 불구 상태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팔이나 다리 . 눈 등 신체의 일부분에 총을 맞은 부상자도 많다. 그들은 팔. 다리 등을 절단하여 신체 기관 한 부분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은 부상자가 단순 관통상을 입은 사람들이다.

이들 중 탄환을 제거할 수 있으며 그래도 다행인 경우에 속한다. 탄환을 제거하지 못하고 평생을 몸에 지니고 살아야 될 유탄 보유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심장 . 폐. 간 등 중요 부위 근처에 총알이 박혀 제거할 경우 생명이 위험한 것이다. 심인식씨(당시 32세, 현재 부상자 동지회 부회장)가 바로 그렇다. 그는 심장 바로 옆에 탄두가 박혀 오늘도 탄환을 지니고 위태로운 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흔치 않지만 미세한 파편이 근육에 퍼진 경우도 있다.

다음으로는 경성자 이다. 탄환이 몸을 스치고 지나간 경우나, 구타로 치아가 박살난 경우, 대검이 내리꽂힌 자상 환자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비교적 완치된 편이다.

시민들은 자신의 옆에서 쓰러지는 사람들을 죽음을 무릅쓰고서 병원으로 후송하였다.

전대 병원. 적십자병원. 기독 병원 같은 종합병원은 물론이고 시내의 모든 개인 병원에도 처참하게 상처를 입은 부상자로 가득 찼다. 치료 중 사망하는 사람도 많아 영안실 또한 초만원이었다. 병실은 과포화 상태로 복도까지 가마니를 깔고 환자를 치료해도 부상자의 전원 수용은 불가능했다. 그에 따라 의약품 및 혈액은 말할 것도 없이 크게 부족하였고, 평상시 같으면 살아날 수 있는 경우 혹은 완치될 수 있는 정도의 환자들도 희생하지 못하거나 중상의 상태로 진행되어 갔다.

5.18부상자에게 있어서 건강한 육신의 일부를 잃은 것은 아픔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부족한 치료 시설과 치료비, 강압적인 수사와 군 기관의 협박, 죽음보다 고통스런 후유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80년 광주의 의료 수준은 갑자기 양산된 엄청난 수의 부상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더욱이 평상시에 볼 수 없는 총상 환자가 대부분임에랴! 의약품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도청 보건과 의약계에서 책정한 치료비는 너무도 빈약했다. 경상자는 입원할 병실이 없어 응급 처치 후 통원 치료를 하거나 자가 치료를 해야 했다. 입원한 중상자들도 탄환 제거 등 외곽적 수술과 진통제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참을 만했다. 모두가 한결같이 어려운 시기에 조금 참고 양보하면 되니까. 더욱이 시민들은 앞을 다투어 헌혈하고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자 위로금을 모아 왔다.

부상자에 조기 퇴원 강요

그런데 사태를 진압한 후 광주에 들어온 군인들은 수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병원에 나타남으로써 거동조차 불가능한 부상자와 가족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계엄군은 국방색만 보아도 몸서리를 치는 부상자들이 누워 있는 병실을 총을 멘 채로 들어와 수색을 한답시고 발칵 뒤집어 놓곤 했다.

합동 수사단은 병원 내의 원장 실을 접수하여 환자들을 1인씩 호출하여 수사를 전개했다. 침대를 밀고서 부상자가 들어오면 강압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대답하는 대로 조서를 작성했다. 입원한 부상자는 거동은 물론이고 장시간 말하기조차 힘든 환자들이었건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반항적이거나 고분고분 대답하지 않으면 총부리를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임신 중에 안면을 손상 당한 이추자씨는 통합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계엄군들은 그녀가 학생이라고 일방적으로 판단하여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였다. 특히 그녀가 신혼 주부이고 임신 3개월이라고 애원하자 결혼도 안한 것이 분명하다며 오히려 복부를 무차별 구타했다.

그녀의 고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항생제도 쓸 수 없었고 저혈압에 입덧조차 심했다. 그녀는 진통제도 없이 수술을 했다. 그녀는 그후 80년 11월에 다행히도 딸을 순산하였고 세월을 흘러 그 딸이 지금 초등 학교 2학년이 되었다.

합동 수사 반은 조서 내용에 따라 부상자를 폭도와 비 폭도로 구분했다. 그리고 폭도=무급, 비 폭도=유급으로 분류하여 유급 즉 비 폭 도만을 부상자로 인정했다. 당시 유급 부상자는 모두 1백22명에 불과 했다. 이들을 부상 경중에 따라 다시 3등급으로 나눴다. 산재 등급에 따라 분류된 부상자는 산재의 10단위를 1단위로 환산하였다. 1등급은 19명으로 3백 만원의 위로금이 지급되었고 , 2급 42명에게는 2백50만원 , 나머지 3급 부상자에게는 2백 만원의 위로금이 각각 전달되었다. 이 의연금은 전국 각지에서 온 국민이 정성으로 모금한 것이었다.

폭도들 즉 무급 부상자 또한 A ∼ F까지 6등급으로 분류되었다. A · B 급은 총을 든 부상자, C·D 급은 시위 적극 가담자 , E·F 급은 시위 단순 가담자 였다. A· B 급은 통합 병원으로 연행되었으며 C · D급은 강제 조기 퇴원시키거나 불가피한 경우 입원 시켜 감시의 눈을 번뜩였다. E·F급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형편이었다.

광주의 온 시가지에 고였던 핏물도 점차 씻겨 갔다. 5월 항쟁에 온몸으로 뛰어 들어 부상한 환자가 병원에서는 외신 기자의 플래쉬 가 곧잘 터졌고 뜻 있는 시민 , 종교계 인사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부상자들에게 총을 겨눴던 사람들은 이렇게 부상자를 찾는 발길이 잦아지자 이번에는 부상자의 숫자를 줄이고자 안간힘을 썼다. 부상자들이 불구가 되어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합동 수사 반은 그들의 분류한 죄질이 무거운( ? ) 폭로들의 경우 부상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강제 퇴원을 시켰다. 조금 더 치료하면 호전될 수 있는 부상자들도 조기 퇴원을 강요하였다. 두 번 부상을 입히는 격이었다.

퇴원 시 주치의가 계속 치료를 해야만 한다는 소견서가 첨부된 부상자에게만 의료 보호 수첩을 발급했다. 물론 5.18부상에 관한 치료에만 한정된 혜택이었다. 의료 보호 수첩에는 '특수 이재민'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상자는 6월에서 8월 사이에 퇴원 당했다. 그리고 자가 치료를 해야만 했다. 치료는 한방이나 물리적인 처치가 전부였다.

1백 54명 대 2천 5백 명

비록 탄환이 박힌 신체의 일부분을 제거해도 후유증은 남는다. 5.18부상자들은 모두 부상 부위의 통증을 견디기 위해 상습적으로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다. 그러나 진통제를 아무리 먹어도 그때뿐이다.

이들의 통증이 얼마나 심한가는 신경을 아예 차단한 부상자를 보면 알 수 있다. 파편이 근육 곳곳에 박힌 유탄 보유자는 아픔보다 차라리 마비를 택하는 것이다. 도저히 파편을 제거할 수는 없고, 그러자니 고통이 너무 심해서 차라리 신체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다.

부상자에게 괴로운 날은 비가 오는 날 이다. 신경통 환자들이 흔히 그렇듯 저기압에 의해 극도의 통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상자들은 반쯤 마약중독자가 되어 가고 있다. 갈수록 많은 양의 진통제를 복용하면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5.18부상자들은 신체 기능의 상실과 치료되었다 해도 계속되는 통증 때문에 생업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형편인데 가족 한 명이 실업자로 치료비를 탕진하니 부상자의 가정은 생계가 막막하기만 하다.

거기에 후유증으로 계속되는 통증과 5.18부상자=폭도라는 꼬리표는 부상자에게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 준다. 그래서 누구나 한번쯤은 자살을 시도해 본다. 물론 자포자기 상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부상자도 상당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살아남아 오늘의 광주를 지키고 있다.

그러면 과연 광주의 부상자는 몇 명인가. 이 문제에 관해 그 동안 있었던 수 차례의 지상 토론도 시원한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아직도 정부측과 부상자의 주장은 커다란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80년 당시 정부에서는 부상자가 1백22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 수는 합동 수사 본부의 3-4차례에 걸친 수사에 의한 폭도. 비 폭도 구분에서 비 폭도에 해당된 숫자일 뿐이다.

그러나 조서를 받은 부상자를 포함하면 부상자의 숫자는 모두 8백58명(민간인 8백 52명, 공무원 6명)에 으른다. 이 숫자는 전남 도청 보건과에 등록된 수이기도 하다. 이들 중 무급 부상자는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치료비를 줄이고자 관계 기관에 이의를 제기하며 유급 책정을 건의하였다. 유급으로 책정되어야 위로금 지급 대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84년 말에 2.12총선을 의식한 탓인지 당국에서는 32명을 추가로 유급 책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정부가 공식 발표한 부상자는 85년 6월7일 당시 국방 장관이던 윤성명씨가 국회에서 발표하였듯이 모두 1백54명인 셈이다.

그러나 부상자들의 주장은 이와는 판이하다. 당시 도청 보건 파에 등록된 숫자만도 8백58명이며 전남 일원의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치료비 계산 청구서에 의하면 1천 3백50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제외된 자가 치료(한방)부상자까지 합하면 2천 5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제외된 자가 치료(한방)부상자까지 합하면 2천5백 여명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이 부상자들의 주장이다.

부상자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동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생활이 고달플수록 보고픈 얼굴들이었다. 그들의 공통 관심사는 치료와 생활 문제가 우선 순위 였다. 그렇게 몇 명씩 모이고 모인 사람끼리 교류를 시작했다. 그들의 결론은 부상자들의 모임을 만들자는 데 도달했다.

그래서 81년 겨울 모임 결성을 준비해 갔다. 이미 1년이 지난 후이라 모이기도 어려웠지만 연락이 닿는 대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부상자 회 결성은 실패했다. 사전에 누설되어 정보기관의 저지를 받은 때문이었다.

'5.18부상자 회'의 창립

그렇지만 부상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강신석 목사(무진 교회 당 회장)의 도움을 받으면서 조심스레 그리고 치밀하게 부상자 회 결성을 준비해 나갔던 것이다. 82년 8월 1일을 부상자들은 잊지 못한다. 이날 전대 병원 환자 이지현, 기독 병원에 입원한 이광영씨를 중심으로 무진 교회에서 '5.18부상자 회'(약칭 부상자 회) 창립총회를 불과했지만 그들은 벅찬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초대 회장으로 박석연씨(전업사 경영)를 선출하고 창립 취지를 명백히 했다. 그 내용은 첫째 적극적이고 항구적인 치료 대책 마련, 둘째 생활고의 해소, 셋째 5.18피해자 보상을 위한 정치적 해결 촉구, 넷째 회원 상호 간의 친교로 요약된다. 그들의 당면 과제가 치료와 생활고 해결에 있었던 때문이다.

이렇게 결성된 부상자 회는 의료 보호 수첩의 발급을 요구하는 것으로 활동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들의 주장은 언제 어떻게 후유증이 발생할지 모르므로 주치의 소견 없이도 모든 부상자에게 무조건 수첩을 내달 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고 관계 당국에 항의하고 요구했다. 그리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5.17 3주기가 가까워 졌다. 그들은 모두 총탄이 빗발치던 학살의 현장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다가 독재의 총칼에 육신을 찢기 운 사람들이다. 영령들이 못다 이룬 뜻을 이뤄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83년 5월18일 유족 회 주최의 3주기 추모 제가 거행되고 각 종교단체에서도 추모 미사와 추모 예배를 진행하였다. 부상자 회는 카톨릭 센터 7층 강당에서 3주기 기념식을 가졌다. 가신 추모하며 나아가서는 영령들의 뜻을 길이 기념하며 계승해야 한다는 인식이 민간단체로서는 최초의 기념식을 개최케 한 것이다.

이 기념식을 계기로 부상자 회 회원들의 의식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부상을 한탄하는 것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었다. 치료의 보장과 생활고의 해결도 궁극적 과제일 수 없었다. 다시는 자신들과 같은 비극의 희생자가 생겨나지 않을 세상, 누구나 자유롭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은 목숨을 불살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의식의 각성은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84년 겨울 전남 지역 민중. 민주화 운동 단체의 협의체인 전남 사회 운동 협의회의 회원 단체로 가입하면서 부상자 회는 광주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 단체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이듬해인 85년 5주기 5.18추모 제를 계기로 이들의 활동은 부쩍 활발해졌다. 유족 회와의 관계는 특히 청년 활동가 및 재야 인사간에 긴밀한 연대를 가지면서 각종 시위와 대회를 같이 치뤄 냈다. 지금도 민주화 운동으로 부상자들은 새로 태어났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곤 한다.

부상자 회의 고난과 투쟁

5.18로 정권을 획득한 세력은 5.18을 축소. 은폐하는 데 급급했다. 80년 5월의 피해자들인 부상자가 슬픔을 긍지로 승화시키며 5.18의 진상 규명과 독재 정권의 퇴진을 정면으로 요구하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5.18을 극소수 폭도들에 의한 난동이라고 규정한 정권은 고위 인사들의 내광 때마다 부상자들을 가택 연금 하기 일쑤였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강제 납치하기도 하였다. 부상자들은 고위 인사가 올 때마다 낯선 땅 여관방에서 담담 형사들과 같이 밤을 지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탄압 중지와 5.18진상 규명을 요구하면 또다시 최루탄과 구타로 대응하였다. 시위 중에 연행되어 즉심을 받고 구류를 받은 경우도 많았다. 그럴수록 부상자의 응어리진 한도 깊어만 갔다.

86년 2월15일 이었다. 당시 부상자 회 회장인 이지현씨(현 39세, 현 부상자 동지 회 회장, 한쪽 눈 실명) 집에 담당 경찰 2명이 들어왔다. 화순 경찰서 정보과 형사와 청풍면 지서장이었다. 대통령의 초도순시가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방안에 진을 쳤다. 문 밖에는 전경들이 지키고 있었다. 숨통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이지현 회장은 자녀들 교육상 좋지 않으니 지키더라도 밖으로 나가서 있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집처럼 당당했다. 나이 어린 아들이 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이지현 회장은 한달 에도 몇 차례씩이나 가택 연금을 하는 엄청난 인권유린과 사생활 침해에 분노했다.

그러기를 몇 시간, 이지현씨는 마침내 칼을 휘두르고 말았다. 경찰의 부상은 별로 심하지 않았지만 이지현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고 지난해 여름 만기 출소하였다.

부상자 동지 회 이순노 사무국장은 연금과 구류. 구속으로 점철된 고난을 겪고 있다. 전두환 대통령의 내광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자 승용차에 뛰어들어 구류 20일을 산 것을 비롯해 수 차례 경찰에 연행되었고 작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광주 방문 시에는 최루탄을 투척하여 구속되었다. 이때에는 집행유예로 출소하였으나 그 뒤 연행된 부상자 동지 회 회원의 면회를 요구하다 경찰과 실랑이가 붙어 또 다시 공무 집행 방해와 폭력 혐의로 구속되어 두 번째 옥살이를 하고 있다.

부상자 동지 회는 85년 이후 자신들의 부상에 대한 피해 보상과 현실적인 해결을 요구하기 보다는 자신이 대한민국 군대의 총칼에 부상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현실의 근본적인 변혁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탄압을 무릅쓰고서 그 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해 왔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널리 알리고자 기관지『혈우』를 발행하고 있다.

분열 공작과 두 개의 부상자 회

제 5공화국 정권에게 있어 가장 풀기 어렵고 또한 가장 두려운 사람들은사람들은 아마 5.18유족과 부상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으로서도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할 수만은 없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오히려 적당히 구슬리고 적당히 회유하여 체제 내로 편입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82년 5.18 부상자 회가 창립되자 조급해진 당국은 부상자 회의 임원들을 집중적으로 회유하기 시작했다. 취직 알선, 생계 유지를 위한 사업 보장과 복지의 증진 등 부상자들에게는 참으로 달콤한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정보기관의 분류로 온건하다고 판단되는 부상자에게는 갖가지 생활상의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강경하다고 판단한 경우는 정반대로 대했다. 평상시에도 전화를 도청하였고 미행을 하였다. 5월 항쟁 기간이 되면 연금 하기가 일쑤인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들 강경파 부상자들에 대한 탄압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으며 생업에까지 타격을 입혔다. 서비스업의 경우가 특히 심한 편인데 , 다방이나 이발소를 운영하는 부상자들에게는 유독 위생 단속이 심했고, 무허가 업소인 경우 구속까지 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정보기관과 정부의 양면 작전은 비교적 실효를 거둔 셈이었다. 이 같은 공작으로 부상자 회 안에는 소위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85년 8월 1일 3차 정기총회에서는 분열 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은 86년 8월 1일 3차 정기총회에서는 분열 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은 86년 8월1일 4차 정기총회에서 양측이 합의하고 단결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시 해소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해 9월 20일 박옥재 부상자 회 회장이 아시안게임 동안 대학생 시위 자제를 지면에 주장함으로써 갈등은 또다시 첨예화하였다. 이듬해인 87년 7월17일 부상자 최강경씨의 장례식 절차 문제에 있어서도 양파는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는 박옥재 회장 측과 이에 반대하는 측으로 균열된 것이다.

그러던 중 박옥재 부상자 회 회장이 관제 유족회 회장이라 불리 우는 박찬봉 씨와 함께 민화위 국민 화합 분과 위원으로 들어가자 갈등은 폭발하고 말았다. 민족의 대 화합을 명분으로 구성된 민화위가 부상자들을 양분시킨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침내 박 회장을 반대하는 부상자들은 1988년 2월 14일 가톨릭 센터 7층 강당에서 '5.18광주 민중 혁명 부상자 동지 회'(약칭 부상자 동지 회)란 명칭으로 창립총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한 손엔 지팡이, 한 손엔 목발을 짚고 등장한 창립 준비 위원장 유형근씨(현 27세, 척추 관통상, 당시 전남대 1년)는 "비록 몸은 불구가 됐으나 우리는 강인한 의지로 혁명정신을 계승하여 군부 독재와 외세를 몰아내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완주하자"고 호소하여 박수를 받았다. 이날 총회에서는 1년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이지현씨를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창립 대회를 마치고 회원들은 '군부 독재 타도 없이 광주 문제 해결 없다'라고 쓴 플랜 카드를 앞세우고 '학살 원흉 처단하자' '미국 놈을 몰아내자' '5.18을 보상하라' '치료 대책 강구하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여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부상자 동지 회는 이어 5월 7일 서울 지부를 결성하고 잠시 발행되지 않았던 기관인『혈우』를 복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5월부터 부상자 신고를 접수하고 있다.

이로써 부상자 조직은 둘이 되었다. 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와 5.18광주 민중 혁명 부상자 동지 회로. 그러나 부상자들은 "이 같은 분열은 결코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며 8년 전 우리에게 총칼을 겨눈 자들의 이간 책동에 의한 것이며 부상자 회의 분열을 가장 기뻐할 사람들도 바로 그들 "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새롭게 드러나는 그날의 참상

어찌됐건 민화위에서 5.18광주 문제를 집중 논의한 것을 비롯해 최근 들어 광주 문제 해결책이 각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폭도들의 난동이라는 정부의 통념 또한 아직 애매하긴 하지만 민주화를 향한 광주 시민의 노력이었다고 시인하는 등으로 크게 바뀌고 있다. 국회에서도 5.18진상 특위를 구성하자는 데 야권 3당이 합의하고, 몇 대학생이 학살 원흉 처단을 요구하며 분신하는 등 가히 광주 문제는 태풍의 눈이 되었다.

5.18의 진상 규명을 위해 시행되고 있는 5.18사망자, 행 불자, 부상자 신고 또한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5.18피해자 신고 창구는 시청. 도청에 공식적으로 개설된 것을 비롯하여 평민 당사, 언론 기관, 5월 유관 단체(5.18광주 의거 청년 동지 회, 5.18광주 민중 혁명 부상자 동지 회 등)에서 신고를 받고 있다. 5월 18일 이후 접수됨으로써 다시 한번 드러나는 그날의 참상은 우리를 또 다시 경악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공식 창구인 시청 도청에만도 하루 평균 15-20여건의 신고가 연일 끊이지 않고 있는데, 6월8일 현재 구비 서류가 완비된 경우는 행 불자 41명, 사망자 3명, 부상자 1백 20명, 후유증이 4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당국의 신고 접수는 권위주의적 이어서 다른 창구보다 적은 편이다. 신고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입을 빌자면 "신고 절차가 너무 까다롭고 조금만 미심쩍어도 반려시키고 태도가 위압적이며 너무 불친절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상대적으로 친절한 민간단체 집계로 보면(아직 공식 집계가 끝나지 않았다며 밝히기를 꺼려하고 있으며 조만간 집계를 모아 백서를 발간할 계획이라 한다. ), 부상자 동지 회에 신고된 부상자만도 3백 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 중 90여명은 서류가 완비되었고 나머지는 아직 서류가 미비하다는 것이다. 또한 지난 5월10일 창립된 행 불자 가족들의 모임인 '5.18광주 민중 항쟁 행방 불명 자 가족 회'(회장 임준배)의 회원만도 54명이나 되는 실정이다. 신고자들은 일부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아 실제 피해자 수는 당국의 집계보다 훨씬 많을 것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경악시키는 것은 이러한 피해자 숫자가 아니라 어떻게 당했는가 하는 피해 내용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이시정양(당시 6세)의 경우이다. 이시정양은 김을 매는 가족들과 함께 밭에 있었는데 총탄이 가슴을 뚫었다. 현재 송원 여중 1년에 재학중인 이양은 한쪽 가슴이 없는 소녀로 살아가고 있다. 이양의 슬픔과 고통이 과연 어떻게 보상될 수 있는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안 몽탄 다산 282번지에 거주하는 김금희씨는 일가족 4명의 행방불명을 신고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녀는 어머니인 임소례씨(당시 57세)와 동생인 김병곤씨(당시 23세), 또 다른 동생 김병래군(당시 14세), 아들 박광진군(당시 5세)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문용윤씨(당시 28세, 택시기사)는 21일 차량 시위때 5번째 택시를 운전하며 도청으로 돌진하다 공수부대에 의해 M16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병원 치료도 받지 못하고 한방약과 주사 등으로 치료받아 왔다.

이밖에도 만삭인 아내가 병원을 갈 수 없어 난산하다가 마침내 아내와 자식을 함께 잃어버린 경우도 있어 5.18의 간접 피해자도 상당히 많음을 시사 해주고 있다.

부상자 동지 회는 총상, 구타, 자상, 화상, 교통사고, 구속 후 고문으로 분류하여 부상자 접수를 받고 있는데 개략적인 통계를 보면 구타가 가장 많아 50% 정도, 그다음이 총상 약20%, 기타가 30%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충격적인 사실은 시외 각 지역 여성들의 전화 신고와 제보이다. 그 내용은 '외각에 포진하던 계엄군이 그녀들을 강간했다'는 내용이다. 물론 신고자와 제보자들은 지금은 결혼해서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신고 절차를 물을 뿐 얼굴과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한다.

더욱 충격적인 제보는 "강간이나 윤간을 한 후 여성을 생매장했다"는 내용이다. 부상자 동지 회 회원들은 "사실을 입증할 증인을 직접 내세울 수는 없으나, 5세 소녀에게까지 총을 겨눈 자들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지금까지의 5.18피해자 신고 접수는 80년 5월 자행되었던 광주에서의 학살이 종래의 통념보다 훨씬 대규모적이고 상상을 초월한 만큼 잔인한 것이었음을 증명 해주고 있다. 시민들은 "6.25때보다도 잔인하였다. "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책임자 처단 선행돼야

"광주의 살아 있는 십자가로서 그날의 정신의 계승하여 모두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민주주의 의 실현과 모두가 잘 살수 있는 세상, 분단된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을 위해 남은 목숨 기꺼이 불사르겠다"는 부상자 동지 회 회원들은 광주 문제의 해결은 먼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단이 선행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다. 명예회복과 피해 보상은 오히려 뒷전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

진상 규명은 국회 내에 5.18진상 특위를 구성하여 국정조사권이 발동되어야 하고 5.18에 관련된 자료는 성역이 없이 모두 공개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행정 권력은 절대 개입하지 않아야 된다고 보고 있다.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피해 당사자인 유족. 부상자. 구속 자와 학계. 법조계. 종교계. 의약계. 언론계. 재야 등 각계 각층이 망라된 진상 규명 위원회를 발족시켜 국회의 조사 활동과 병행하여 민간 차원의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상 규명에 따라 5.18책임자로 판명되는 자는 법에 의해 준엄한 심판이 가해 져야 한다는 것도 그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여기에도 역시 성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기념 사업과 보상 문제 등이 다각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군부 독재 정권의 퇴진, 수입 개방 압력과 부당한 간섭을 일삼는 외세의 축출이 곧 5월 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며 그 길만이 민족의 살 길이 라는 데 모아지고 있다. 그 과제를 수행하는 것으로 그들의 남은 삶은 채워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