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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특집 광주 계속되고 있는가 - 새출발…다시 외로운 작업을 천주교「광주 정평위」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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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광주 계속되고 있는가

새출발…다시 외로운 작업을 천주교「광주 정평위」12년



「감추어진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지난달 2월10일 천주교 광주 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이후 정평위로 약칭)는 민화 위에서 5.18광주 문제에 대한 치유 방안을 놓고 한창 논란을 벌이고 있을 때 앞서의 누가 복음8장 17절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정평위 신부들은 성명서에서 「민화 위에서 5.18광주 의거를 공식적으로 거론으로부터 위임받은 기구가 아니어서 광주 문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진상과 책임 규명에는 미흡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광주에서 일어났던 미증유의 사건에 대한 원천적인 접근보다는 지역적인 문제에만 국한하고 있어 자칫 상처만 키워 놓을 것이라는 우려를 갖게 한다」면서▲광주 사태의 발단은 계획된 것이었다. ▲광주 시민의 명예는 회복되어야 한다. ▲광주 문제의 해결에 관한 우리의 대안 등 3가지 견해를 표명했다.

5.18과 졍평위.

이 땅의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큰 민족적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5.18정평위는 5.18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쏟아 오고 있다.정평위의 관심은 기도나 신자들의 복음 화를 위한 단순한 교회 차원적 노력 말고도 한국의 「민주화」, 짓밟힌 인권의 회복 같은 보다 큰 목적에서 기인한다.

민주화. 인권 회복에 큰 관심

민화 위에 관한 성명서가 발표되기 전날인 9일 정평위 위원들에 대한 임원 개편이 있었다.

정기 총회 뒤 개편을 한 임원 진에는 본인이 9대 정평위 신부로 선임됐고 간사에 송홍철 신부 (광주 대교구 교육 국장), 감사에 전임 지도신부인 신부(남동 지도 신부)가 중책을 맡게 됐다.

5.18기념 행사나 이에 관련된 역사적 굴절이 발생할 때마다 정평위는 미사나 자료집 발간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광주와 아픔을 같이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들을 해 왔다.

정평위는 매스컴에 자주 등장을 해 오면서도 목적이나 활동 상황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질문이나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정평위란 무엇을 하는 곳이나 , 또 정평위는 어떻게 구성됐는가?

사실상 정평위는 5.18과 함께 국민들의 머리 속에서 기억되고 관심을 끄는 단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천주교 광주 대교구 정의 평화위원회는 70년 8월 24일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창립된 6년 후인 76년 5월11일 발족됐다.

회원 수는 모두 12명.

현재 농민 회. 학생회 지도 신부를 비롯 목포 .여수 지역 대표 신부를 포함 12명의 사제로 구성 됐으며 이 가운데 1명이 위원장을 맡고 위원회를 대표, 대외적 활동을 책임지고 있다.

정평위는「복음을 토대로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하나님 백성에게 시대적 사명감을 자각시키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발전에 기여, 인간의 존엄과 정의 평화가 구현되 도록 교회 할동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정평위 활동은 각 나라 교구의 사정과 상황에 따라 활동을 달리한다.

광주 대교구의 정평위 . 이곳의 정평위 활동은▲5.18광주 의거 희생자들을 위한 장학금. 의료. 생활 지원, ▲양심수들을 위한 법률구조, ▲사회 정의와 인권 회복을 위한 대중 강연과 소그룹 교육 활동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정평 위 신부들은 대부분이 40-50대 그룹으로 활동력이 왕성하고 재야나 기타 단체들과 인적 교류가 활발한 신부들이 참여한다.

역대 지도 신부 들을 살펴보더라도 1대 장지 신부(여수 서교 동주임), 2대 신부(나주 주임), 3.7대 장

12명 신부로 구성…희생자 구원

천주교의 사회 운동,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의 대외 활동에 대해 「천주교 사제들이나 신자들이 자신이 처한 모순된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과 더불어 그 사회적 현실 변혁시켜 이 땅의 하느님 나라를 건설코자」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광주 교 대구 정평 위원 5.18참여는 사회 활동 이라기보다는 「80년의 민주화 봄」이 무참히 짓밟히고 5.18이라는 전대미문의 참상이 왜곡. 은폐된 것에 대한 진실을 밝혀 내려는 데서 출발했다.「서울의 봄」을 겨울로 뒤바뀌게 한 79년 5.17정변과 광주 사태의 유혈 진압은 한국 전쟁 이후 최대의 유혈 사건으로 특히 천주교회에 깊은 충격과 좌절감, 울분을 동시에 안겨 줬다.

천주교 광주대 교구는 광주 항쟁이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짓 밝히고 살상이 계속될 때 방관이 아닌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개입을 시도했다.

많은 사제들이 시민 수습 대책 위원회에 들어가 상황 반전을 위한 노력을 하는 한편 서울로 신부들을 보내 광주의 참담한 소식을 전국에 알리려고 했다.

지난 80년 5월18일부터 9일간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태로 천주교회에서는 당시 계림 본당 김성용 주임 신부를 비롯 조비오 장 신부 등 모두 8명이 연행됐다.

이 가운데 김 신부와 조 신부는 실형까지 언도 받고 영어의 몸으로 1년이 넘게 감옥살이를 하다 풀려난 일이 있다.

5.18이라는 엄청난 비극이 안겨 준 상흔은 당사자인 유족이나 부상자 외에 특히 천주교 신부들에게 한국의 정치 현실을 새롭게 인식 시켜 주는 계기가 됐다.

몇 백 명이 숨지고 다치고 수 천명이 연행 당해 투옥과 부당한 구금, 옥살이를 한 것을 제외하고도 교회는 5.18을 통해 민정 문제를 새 시각에서 보게 됐다.

전대미문의 사태를 유발시키고 그 책임을 무고한 광주 시민에게 돌리려는 위정자들의 비열함과 거짓 앞에 천주교 정평위 신부들은 감춰진 비밀을 들춰내기 위해 열과 성을 다 바쳐 왔다. 희생양을 자처했다.

감춰진 아픔, 호도된 역사, 아직까지 정확한 진상 규명이 회피된 채 「수박 겉 핥기」식의 원론적인 해결 방식만 거론되고 있을 때 천주교는 과감히 해부를 요구하고 나섰다.

김성용 신부가 진상 세계에 알려

80년 피해자 가운데 한사람인 김성용 신부는 5.18발단에서 광주 사태를 몸소 겪은 뒤 탈출해 서울의 명동(明洞)성당에 도착, 성직자들에게 진실을 알리게 되기까지 체험한 과정을 기록한 「분노보다는 슬픔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는 진실을 진실이라고 증언해야 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지닌 신부로서 양심에 따라 민족적 비극이요, 역사에 유례가 없는 비극을 한국 천주교회의 최고 지도자이신 추기경에게' 전한 다면서 5.18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9번이나 검문을 받으며 구사 일생으로 서울에 도착한 김 신부, 김 신부는 체험담을 글로 적어 로마 교황청에 보낸 것을 비롯 세계 각국에 광주의 비참함을 알렸다.

김 신부의 희생적 노력으로 세계는 진상을 알게 됐고 이 땅에서는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외국서 더욱 상세히 알려지게 됐다.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에서는 광주 문제를 들추며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광주 사태 가족 돕기 성금 보낼 곳」까지 지정, 성금을 모금하기로 하는 등 어느 지역보다도 광주를 돕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5.18을 경험하면서 이 땅에는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는 보도 관제가 극에 달했다.

5.18의 진상 규명은 제쳐 두고라도 이에 관련된 유인물 발간이나 집회 개최마저도 철저히 통제됐다.

암울하고 어두운 긴 터널이 계속되는 동안 천주교 광주교구는 광주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80년 5.18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6월2주 째 , 서상채 신부(현 림동 주임)가 주임신부로 있던 목포 북교동 성당에서는 5.18에 관련된 미사를 개최하려다 당국의 저지로 중단됐다.

계엄령이 선포돼 있어 행동마저 제약을 받고 있던 당시로서는 크나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미사는 무산되고 말았다.

당국의 강경책 앞에 달리 방도 없었다.

서독등 세계 각국서 돕기 나서

목포 성당의 용기 있는 행동은 곧 광주대 교구 산하 각 성당으로 번져 갔다.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사 , 플래카드 부착 마저 당국의 검열을 받아야 했던 시절

성당에서는 미사를 통해 일반 신자들에게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거나 정의 있는 민주 정치 실현을 강조하는 뼈 있는 미사가 마침내 계엄 당국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6월30일 밤 8시에 남동 성당에서 개최키로 했던 미사는 전남 .북계엄분소장의 경고를 받았다.

계엄분 소장인 장군 (당시 소장)의 명의로 된 「경고 장」이 한국 천주교 광주 대교 구청 대 주교 앞으로 보내졌다.

이날 경고 장에는 「귀교 구청 남동 성당에서 80년 6월30일 20시에 개최코자 하는 미사 행사는 불법 집회로 규정, 집회 개최를 금지토록 경고한다」면서 「만약 경고를 위반하고 동 집회를 개최할 때는 포고령 10호 2항을 위반하는 명확한 범법 행위이므로 엄중 의법 처리하겠음을 재차 경고한다」고 위협을 가했다.

계엄 분소는 미사를 개최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의례적인 종교 행사로 볼 수 없고, ▲지난 23일 계림 성당에서 개최한 동일한 미사 때 정치적인 발언이 많아 순수한 종교 행사와 거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계엄 분소는 또 정치 발언으로 ▲하루빨리 계엄령이 해제되도록 위정자들을 깨우치게 하라, ▲민주 회복을 부르짖다가 쓰러져 간 죄 없는 사람들…운운 ▲이 나라에 하루빨리 정의와 민주정치가 실현되게 하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미사 내용까지 명시했다.

덩달아 전남 도 경찰 국장도 「종교 집회를 강행 할 시는 의법 실력 저지하겠음을 경고한다」면서「지역의 평온을 위해서 적극적인 협조를 바란다」는 내용의 공문을 윤 대주교 앞으로 보냈다.

이날 남동 에서 개최키로 했던 미사는 2시간 전인 오후 6시부터 수 백 명의 경찰을 투입 저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경찰들은 일반 시민들의 통행뿐 아니라 신자들의 성당구 내 출입까지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매주 개최되는 미사마저 열리지 못하게 했고 신부들은 장소를 옮겨 철야 기도를 드렸다.

윤대주교는 다음날「경찰에 의한 종교 행사 방해에 대하여」라는 광주 대교구 입장을 밝힌 공문을 이 계엄 사령관 앞으로 보냈다.

윤 대주교는 「정치 공동 제가 법으로써 인간의 선악을 증진시키는데 노력한다면 종교는 윤리 도덕의 앙양을 통해 같은 사명에 봉사하는 것이라」면서「인간의 기본권이 요구할 경우에는 정치 질서에 대해서도 교회가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다 」고 주장했다.

무기를 든 권력 앞에 교회는 무력해져 갔다. 억누르면 눌리고 짓밟으면 무참히 깨졌다. 「당하지 않으면 일어서지 않는다」는 교회의 속성을 보는 듯했다.

울분을 안으로만 삭이던 신부들에게 불씨를 제공해 준 사건이 마침내 이해 겨울에 터지고 말았다.

광주 미문화원 방화가 기폭제

80년 지루하고도 춥던 겨울 , 가톨릭 농민회 전남 연합 회 회원들이 광주 미문화원에 방화를 하다 붙잡혀 감옥으로 향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교회와 정부의 전면적 마찰을 불러일으켰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82년 3월18일에 일어났다.

앞서 두 사건은 광주 문제에 대한 진상과 의미를 세상에 공개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과 관련 원주 교구 신부가 구속되자 천주교회는 자각과 자성의 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한국 천주교 주 교회의 상임위원회(회장 추기경)는 최 신부의 구속에 대해 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에 서 위원회는 「광주 사태는 그 진상과 원인 또는 책임의 소재가 공정하게 밝혀진바 없으므로 사제들은 자신의 사제 적인 양심에 따라 보호를 요청해 온 혐의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최 신부의 태도를 옹호했다.

5.18이 왜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천주교회.

이때부터 교회는 다시 정부에 대해 정확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광주 문제가 미국의 방조에도 간접적 책임이 있다는 반미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침묵하던 교회 , 억압받던 신부들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특히 광주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광주대 교구는 동료 사제의 연행에 대해 전국의 주교단에게 광주 문제의 기본 입장을 밝혀 달라는 건의문까지 보냈다.

또 광주 사태 관련자 상고심 선고 공판을 앞두고「다시 한번 정당한 판결을 기대하며」라는 강론이 남 동 성당에서 있었으며 81년 5월 10일 명동 대성당에서 있은 광주 대교구 사제단 합동 미사 강론에서는 서울에 거주하는 3천여 신자들에게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습니다 」강론으로 광주 문제를 알리기 의해 끊임없는 활동을 계속했다.

광주에서 정평위 신부들은 매년 미사를 개최하면서 강론을 계속했고 광주 대교구는 교구대로 광주 의거 주기 때마다 성명서를 발표했다.

광주 문제는 이 지역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85년 5월 18일 5주년 추도 미사. 광주 남 동 성당에서 광주 대교구 사제단 공동 집전 으 로 거행된 추도 미사는 정세 신부가 직접 강론을 했다.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성당 안팎을 꽉 메운 2천여 신도들은 정 신부의 강론을 들었다.

‘ 광주는 끝난 것이 아니다 ’

정 신부는 강론에서「오늘 우리는 이 자리, 이미 사중에서 광주 민중 항쟁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위령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고 서두를 꺼낸 다음 「이 미사는 단순한 의미의 기념이 아니고 그분들의 정신과 넋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 시켜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신 부는「광주 그리고 이 나라 온 구석에 우리 겨레 모두의 마음속에 그분들은 새롭게 불타오르고 있다」면서「광주는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에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참석자들에게 광주 문제를 재인식 시켜 줬다.

87년 2.12총선 이라는 선거 혁명이 일어나면서 광주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 ,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본격적으로 거론된다.

학생들의 끊임없는 반정부 활동 속에 성역으로만 간주되던 5.18은 점차 베일을 벗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광주 시민의 말없는 분노가 행동하고 5.18유관 단체들을 비롯 재야 운동권들의 조직적인 반정부 활동이 적극성을 나타냈다.

때마침 찬물을 끼얹는 4.13호헌 조치가 발표되면서 광주는 또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4월21일 ,봄기운이 완연하던 이날 광주시 금남로 3가 광주 가톨릭 센타 6층에 성목요일 행사를 끝낸 광주대 교구 신부들이 두툼한 옷과 침구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당시 정평위 원장이던 신부를 비롯 12명의 신부들이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를 드리며」라는 성명서를 옥외 방송을 통해 발표하고 이 건물 6층 소 성당과 부속실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전격적으로 행해진 신부들의 단식은 개헌 논의에 기름을 붓은 격이 됐고 전국 천주교회로 급속히 번졌다.

19명으로 늘어났던 신부들은 29일 오후 6시 단식 신부 전원이 미사를 드리기 위해 남동 성당으로 떠나면서 단식기도는 끝났다.

정평위 신부들의 단식기도는 기도로만 끝난 게 아니었다. 이들은 5.18 7주기 행사를 앞두고 더 큰 일들을 착착 진행해 나갔다. 유언비어로만 떠돌던 5.18광주 문제의 실상을 폭로 하기 위한 엄청난 음모(?)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5월에 접어들면서 천주교 광주대 교구는 또 하나의 모험을 감행했다.

그 동안 5.18과 관련, 발표된 유인물을 책으로 발간한 「5.18광주 의거 자료집」을 내놓는 한편「5월 그날 이 다시 오면 」이라는 사진첩을 만들어 판매했다. 가톨릭 센타 3층에서 사진전을 개최했다. 자신들이 모은 자료들과 시민들이 간직해 두고 있던 사진들을 수집 전시회를 연 것이다.

시민들의 반응은 과히 폭발적이었다. 5월을 겪었던 사람들은 그날을 회상하며, 말로만 들었던 사람들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장사진을 쳤다.

5.18 7주기 행사 또한 잔치 분위기 였다. 정국의 상황이 어수선하던 탓도 있지만 경찰의 원천 봉쇄마저도 미사 행사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윤 대주교 집전 으로 열린 미사에는 여느 행사보다 많은 3천여 인파가 몰렸다.

때맞춰 광주 대교구 사제단도 「광주 의거 7주기를 맞이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과거 어느때 보다 강경하고 노골적인 반정부 메시지가 발표됐다.

「우리는 광주 의거 7주기를 맞이하는 오늘 , 마침내 한 시대의 종말을 가름할 결단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로 시작된 성명서는 「7년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정권에게 광주 민중 학살의 진상과 그 책임 소재를 규명할 것과 집권 시와 집권 이후에 자행한 모든 죄과를 속죄한 뜻으로 명예롭게 퇴진할 것을 거듭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명서는▲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 손으로 ▲직선제 개헌 실천 등 7가지 민주화를 요구했다.

전국적으로 끊일 새 없이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 속에 천주교 광주 대교구 정평위 신부들의 활동은 어느때보다도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가운데 또 하나의 세인의 관심을 끄는 행사가 조심스럽게 진행됐다.

바로 5.18비디오 테이프 상영, 말로만 들어오던 비디오테이프가 일반에게 공개된 것이다. 신부들과 정평위 실무자들은 어렵게 인수한 테이프를 가톨릭 센타에서 재편집에 들어갔다.

서독과 일본에서 들여온 테이프는 한국에서 제작된 것과 기술상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각 성당에서 60여대의 TV를 가져와 밤잠을 자지 않고 재편성 작업을 했다.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가 어려웠지만 비밀은 새 나가지 않았다.

테이프 공개는 대 환영이었다. 가톨릭 센타 남동, 임동, 학운동 성당에서 있었던 테이프 상영은 연인원 20여 만 명이 관람을 했다. 물론 당국도 방관자 적 태도를 취하긴 했지만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각 성당서 비디오 테이프 상영

당시 행사를 주도했던 정평위 위원장 는 "민주화의 분수령 속에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시대적 부름이 있었기 때문 "이라고 말하고 "5.18의 진실은 어느 땐가는 밝혀질 것으로 믿고 열심히 기도한 보람이 현실화 한 것"이라고 겸손해 했다.

87년 격변의 세월 속에 6.29선언이 터져 나오고 민주화의 바람이 세상을 뒤덮었다.

하지만 광주 문제의 해결은 요원했다. 정권의 도덕성과 정통성이 광주 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슈가 된 것은 물론이었다.

이즈음 광주 문제를 다룬 각종 책자들이 발간됐고 피해 당사자인 유족이나 부상자들 또한 목소리를 높였다.

5.18은 이제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우리들 문제로 눈앞에 나타났다.

새 정권이 들어 서기전 민화 위가 구성됐고 광주 문제도 정식 거론됐다.

당시 작전을 수행했던 인물들이 증언대에 불려 나왔다. 피해자들도 왜곡된 광주 문제를 상세히 털어 났다.

「민화위」는 토론을 끝내면서 「광주 사태 치유 방안 건의서」를 작성 국민에게 공개했다.

▲진상 조사 ▲책임자 처벌 ▲보상 책 등이 발표됐다.

한편 정평위는 「민화위」의 광주 문제 토론에 대해 「광주 문제 해결에 관한 우리의 대안」이라는 성명서에서 「광주 학살로 희생된 사람들과 가족에게는 합당한 보상과 예우가 행해져야 하면 광주 의거와 관련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의 신분은 이전의 상태로 환원하라」고 요구했다. 또 「5.18은 진상 규명과 책임 소재가 확실히 밝혀질 때 민주화를 위해 죽어 간 광주의 고 혼을 달랠 수 있으며 광주 의거의 역사적 교훈이 민족사를 비추는 찬란한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광주 문제는 새 출발점에서 서 있다.

이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피해 당사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책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광주 시민의 한 , 광주의 응어리는 호도 책만 가지고 쉽사리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정평위는 광주 문제의 새로운 평가를 위해 외로운 작업에 착수했다.

민주화를 위한 함성이었던 광주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루는 설문 조사를 전남대 교수 팀과 마련하고 있다.

5.18이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한국의 현대사에 광주 문제는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광주 문제는 정확한 진상 규명과 관련자들의 책임 소재가 명확히 가려지지 않는 한 영원한 숙제인 것이다.

정평 위는 숙제를 풀기 위한 외롭고 고단한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