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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트럭에 싣고 어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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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에 싣고 어딜 갔나



5.18광주 민중 항쟁 행방 불 명자 가족 회 창립 (국민 신문, 1988.5)

5.18광주 민중 항쟁 행방 불 명자 가족 회 (이하 행불 회)가 10일 오후YWCA4층 회의실에서 창립되었다. 행 불회는 창립 선언문에서 "광주 시민의 심장을 헤 집는 총소리를 듣고 대문을 나선 초등학생이 아직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고 8년이 지난 오늘에야 처절하게 죽은 자식의 사진이 실린 책을 보고 확인했으나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유가족, 생매장 당하면서 살려 달라고 절규했던 피 빛 학살의 상흔, 죽음을 확인 해줄 이척도 없이 묻혀야 했던 고아들의 비명은 아직도아직도 학살 자 들에 의해 은폐된 채 묻혀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행방 불명 자들의 가족들은 "지난 8년의 기다림과 슬픔, 분노와 원한을 5.18광주 민중 항쟁 행불명자 가족 회의 이름으로 합하여 정권 강탈을 위해 자행한 학살 만행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학살 자들을 응징한 후 자식들의 유골이라도 찾아 양지바른 망월동에 묻어주기 위해 가열 찬 투쟁을 전개해 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날 창립 대회에서 행불회 회장으로 임준배씨, 부회장으로 정강연씨 , 전광옥씨, 총무로 허청씨, 홍보 부장 겸 총무 간사로 최수광씨가 선출되었다. 임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자식을 찾아 곳곳을 헤맸고 행정기관에 탄원도, 호소도 해보았지만 남은 것은 더 큰 분노뿐'이라면서 '자식이 못다 이룬 민주화와 자주화를 이루기 위해 5월 제단체와 협력 열심히 싸워 자식의 원혼을 달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유족회 전계량 회장은 격려사에서 '학살자 들에겐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것 자체가 큰 타격이 될 것'이라면서 '이제 공포와 안타까움에서 벗어나 5월 문제의 해결 주체가 되어 열심히 투쟁해 나가길 '당부했다. 안성례 민가협 회장도 ' 그 동안 2천명의 사망자를 증명할 가족이 나서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전제하면서 당시 계엄사령관이나 공수 부대장을 대상으로 법정 투쟁도 벌여 나갈것'을 제안하였다. 이어 정동년 국민 운동 전남 본부 공동 의장은 '5.18은 그 주체로 볼 때 의거보다는 민중 항쟁으로 규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로 격려를 대신했다.

지난 8년 동안 행 불자 가족은 유족이나 부상자와는 또 다른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시청 등 행정 기관에 행불 신고를 냈지만 행불자가 밝혀져 타격을 입을 것을 두려워한 당국에 의해 유야 무야 되었다. 이에 진상 규명의 차원에서 조직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행불회가 창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5.18광주 의거 청년 동지 회가 지난해 7월 행불자 신고 센터를 개설, 행불 신고를 받아 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난 5월3일 행불자 가족 15세대가 첫모임을 가져 창립 준비 위원회를 구성해 10일 창립을 보게 되었다.

5.18민중 항쟁 당시 행방 불명자 사례

행방 불명자 문제는 5.18당시 사망자 숫자, 암매장 등 진상 규명에 직접 관련되는 문제이다. 행방 불명자 신고는 81년이래 관청을 통해 꾸준히 접수되었으나 당시에 행방불명되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전부 무시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방 불명자 가족들은 피해 의식 때문에 신고할 엄두조차 내지 못해 왔다.

◇김경순씨(여, 당시27세)

그녀의 어머니에 따르면 김경순씨는 결혼 준비 때문에 광주 (동명2동)에 체류 중이었다. 5월21일 ,오후 5시경에 대인 시장에 장보러 나갔었다. 옆집 아주머니가 시장에서 김경순씨를 알아보고 '빨리 집에 들어가라' 걱정하며 보냈다고 하는데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찾을 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헛수고 였고 남은 가족들이 다칠까봐 신고도 못하고 지내 왔다고 한다.

◇이창명(남, 당시 8세 초등학교 1년)

아버지의 이귀복씨에 따르면 양동에서 살았는데 이창영군이 27일 새벽 총소리를 듣고 나갔다가 이후 소식이 없다고 한다. 이귀복씨는 아들이 양동 다리께에서 총에 맞은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임옥환(남, 당시 18세 조대 부고 2년)

아버지 임준배씨(행불자 가족회 회장, 고흥군 도양읍)에 따르면 임옥환군은 22일 시골집에 가기 위해 친구와 함께 지산동 뒷산을 넘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임군과 동행했다 살아남은 친구에 따르면 산을 넘던 도중 뒤쪽에서 총소리가 나서 임 군의 친구는 손을 들고 나가고 임 군은 그대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그때 총에 맞은 것 같다고 한다. 그후 시체를 찾으려고 경찰의 입산 허가를 받아 온산을 뒤졌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전남 도청과 시청에 신고했으나 지금은 이들 행정기관에 신고를 접수한 근거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김기웅(남, 당시 18세 송원고 2년)

어머니 이정애씨에 따르면 5월18일 데모 구경 갔다가 연행 당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빠져 나왔다. 겁에 질려 집에 돌아와 할머니더러 시골에 내려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19일 방림동 삼촌 집에서 일을 도와주다 집에 간다고 나갔는데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김용범(난, 당시 24세)

형인 김용남씨에 따르면 김용범씨는 당시 갱생원 원생이었는데 5월18일이 할머니 제삿날이어서 제사에 참석한다고 전화 연락이 온 후 행방 불명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