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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8년 세월을 학살 원흉들과 줄기차게 싸워 온 5.18광주 의거 유족 회를 찾아

본문

8년 세월을 학살 원흉들과 줄기차게 싸워 온 5.18광주 의거 유족 회를 찾아

(국민 운동 전남 본부 신문, 1988.4)



5.18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자 5.18광주 사태 장본인이 정권을 인수받고 부터는 그들의 목에 가시인 “광주 문제”가 그럴듯한 표제와 더불어 연일 제도 언론의 보도가 요란하다. 그 이름도 거창한 ‘민주 화합 추진 위원회’라는 기구에서 “광주 사태 해결 치유 방안 책”을 건의하는가 하면 정부에서는 이 건의를 전폭 수용한 “사과의 뜻과 유감 의 뜻이 ”간곡히 표현된 정부 발표가 곳 있을 예정이란다. 이럴 즈음 본지는 이 시대 “광주의 한”의 응결체인 「5.18광주 의거 유가족 」 전계량 회장을 찾아 요즘 유가족 회의의 동정을 들어보았다.

5.18 광주 의거 유가족 회는 언제 발족 되었습니끼?

-그 태동은 1980년 5. 24일경입니다. 당시 상무관에는 많은 시신들을 옮겨왔었는데 처음엔 청천 병력 같은 현실에 유가족은 그저 넋을 잃고 슬픔과 분노에 떨고 있었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분향이 시작되고 부터는 7. 8 명의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26일부터 분양 소를 지키기로 하고 한편으로는 도청에 있는 수습 대책위와 첩촉 하며 장례식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일단은 27일 도민 장으로 치르기로 합의를 했지요. 그러나 27일 새벽 저들의 가공할 진압 작전이 시작되면서 27일 망월동에 무더기로 안장되고 말았지요. 그후 삼우제인 3.1일 망월동 묘지에 90여명의 유가족이 다시 모여 그 자리에서 "광주 사태 유가족 회" 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지요

(초대 회장 박찬동, 당시 전 회장은 총무)

초기의 활동과 현 유가족 회의 탄생 배경은 무엇입니까

-초창기의 활동은 아주 미미했고 당시는 5.18희생자와 관련자들이 폭도로 규정됐던 험악한 시기였기 때문에 어려웠습니다. 대충 유족 보상 문제, 장례비 , 유족들이 골고루 보상받을 수 있도록 힘쓰는 정도였지요. 81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5.18유족 회와 일부 시민들이 5.18 1주기 추모식을 갖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회장인 박찬봉은 관에서 압력이 들어오자 무기 연기를 결정해 버렸지요. 여기에 분노한 유가족들은 유연창 목사와 정수만을 중심으로 약식 위령제를 준비하여 치렀으며 그 행사가 끝난 후 정수만은 곧바로 연행됐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족 회는 반 독재 투쟁으로 그 성격을 전환했으며 관에 밀착하여 유족 하에서 결정한 일은 뒤로 미루거나 처리하지 않은 박찬봉 회장을 불신하기 시작했습니다.(이에 전 임원들은 박 회장을 불신임하고 전원 사퇴하게 이른다.)

*유가족 회가 반 독재 민주화 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81년 그해에 5.18관련자들과 함께 유가족은 송영도외 여섯 사람이 피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피정을 통해 참석자들은 5.18을 재인식하게 되고 새로운 결의를 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울분만 삭이고 있을 수 없다. 5.18영령들의 뜻을 받들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서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때부터 유족 회의 광주 사태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문제 그에 따른 보상 문제 드을 각 기관(도청)에 항의하게 되고 대 시민 홍보에 나섰습니다. 심지어는 86, 6월로 올라가 기독 회관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는 등 그 동안의 크고 작은 활동들이 이어 져 왔죠.

*흔히 관제 유족 회로 불리 우는 단체는 언제부터 생겨난 것입니까?

-82년 송 회장이 관의 알선으로 취업됨에 따라 유가족들의 분노가 컸습니다. 이때 이미 기관에 밀착되어 있던 박찬봉을 중심으로 일부의 유가족들이 다른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82년 5.8일 전격적으로'전남 지역 개발 위원회'라는 단체가 관의 구성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단체의 회장인 신태호는 그때 5.182주기 추모 예배가 YMCA에서 있었는데 "지금 YMCA에서 용공 분자들이 집회를 갖고 불순한 일을 책동하고 있다"는 망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전남 지역 개발 위원회는 그 동안 어떤 활동을 해 왔었습니까?

-83년 3월 '광주 사태 관련 부상자. 유가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한다는 기관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때 관제 유족, 전남 지역 개발 위원회 등 4개 단체에서 위로금을 가장 어려운 사람부터 지급한다는 명목 아래 호별 방문을 통한 실태 조사가 있었고 3인 에게 첫 지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초 약속과는 전혀 무관했으며 이상하게도 지급 받은 3인은 곧 묘지를 이장했습니다. 그후 한 달에 3인씩 지급되면서 묘지 이장은 계속되었습니다.(모두 26구 묘지 이장됨). 이때 유족들은 저들의 농간을 알아채고"묘지 이장 즉각 중지하라"고 항의 곧 묘지 이장은 중지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위 단체는 관제 유족과 더불어 공공연한 테러와 협박 회유를 자행했으며 이간질을 했었습니다. 이에 유족 회는 그들의 회유와 협박이 굴하지 않고 오늘 여기에 있게 된 것입니다.

*민화 위가 갖는 의미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민화 위는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광주 사태를 오도하고 희석시키려는데 그 뜻이 있고 그 어용 성과 호구 성에 대해서는 이미 민화 위 참고인 증인 거부를 분명히 했으며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광주 사태는 그 진상 조사와 관련자 처벌 없이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정권은 관제 유족과 민화 위를 내세워 광주 사태를 어물 쩡 해결하려고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정권에게 촉구하고 싶은 말은?

-지금의 노태우 정권은 실질적인 전두환의 "수령 첨정"인 상황입니다. 따라서 민족적 살인 행위와 반민주적 작태를 보여 왔던 전 정권의 연장인 현정권은 당연히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

현 유족회의 구성은 회장 전계량을 중심으로 부회장 백옥희 이천균 총무 안병순,

재무: 손장순 감사: 황길현, 김영배로 이루어져 있다.

연락처: 중흥 3동 광신 아파트 1동 3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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