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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5.18」관련 단체들의 활동

본문

「광주 5.18」관련 단체들의 활동

금남로의 함성, 망월동의 한



「광주 사태」매듭 검토와 그 반응

지난 7월2일 「광주의 5.18 」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치적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틀 후인 4일 「그날」의 직접 피해자 단체인 「5.18광주 의거 유족 회 」「5.18광주 의거 유족 회」「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5.18광주 의거 청년 동지 회」등을 비롯, 광주. 전남 지역 29개 민주. 민중 운동권 단체들은 공동성명을 발표, 그 입장을 분명히 해 두고 있다.

『그래 정부 여당과 각 언론이 「광주 사태의 정치적 해결」운운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착잡한 심정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5.18광주 민중 항쟁의 명백한 규명과 정당한 역사적 평가 없이는 진정한 민주화가 있을 수 없다. 더 이상의 혼란과 왜곡을 저지하고자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첫째, 5.18광주 민중 항쟁의 진상은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 광주 항쟁의 진상 규명에 있어야 한다. 광주 항쟁의 진상 규명에 있어서 정부 여당의 진실성 여부는 바로 현정권의 민주화 의지의 척도이다. 진상이 밝혀진 뒤에 그 진상을 바탕으로 제반 후속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진상 규명 없이는 희생자를 포함한 보상 대상의 파악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새로 제정될 민주 헌법의 전문에「4.19혁명 정신」과 더불어「5.18광주 민중 항쟁의 정신」을 반드시 명문화해야 한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이러한 이념이 정신적 지주로 남을 때, 비로소 이 땅의 민주화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기념 사업, 보상 문제 등은 그 헌법 전문의 정신에 따라 조치되어야 한다.

셋째, 위령탑 건립을 포함한 기념 사업은 세계적 규모로 활동하고 있는 기설의 「5.18광주 민중 혁명 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 사업 추진 위원회」에서 주관하고 당국 및 여타의 사회단체는 협조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5.18광주 민중 항쟁은 정치적으로 해결할 과제나 청산해야 할 찌꺼기가 아니라, 이 땅의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므로, 정치적 이용물로 전락시키거나 광주 시민 상호간의 불신감 조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은폐 조작된 당국의 발표나 일반인의 즉흥적 반응을 비롯하여 언론 매체의 진실을 호도 하는 보도와 논평으로 광주 시민을 이간시키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더구나 사회의 공기인 언론 매체에서 「광주 사태」라는 모호한 개념 규정을 내리는 반 역사적 작태는 즉각 중지하여야 한다.

이상의 우리의 입장과 주장에 대한 모든 민주 인사와 민주 단체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바란다.』

진상 규명의 적격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이 공동 성명서는 전계량 유족 회 회장이 낭독했으며, 바로 다음날 있은 유족 회 정기총회에서도 공동성명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광주 사태」의 매듭 방안 검토에 대한 이 같은 반응을 미리 말해 두는 것은, 「5월의 아픔」과 80년 5월 이후에 나타난 광주. 전남 지역 민주. 민중 운동 단체들의 연대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86년 11월1일 자로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돼 전남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운동권 단체들은 여전히 「전남」이라는 단체 명을 고수,「힘」의 분산을 막고 있는 것도 미리 참고 삼아 얘기해 둔다.

「5.18」3년 뒤의「전청협」창립

「광주 사태」라는 통한 사를 거치면서 사망 부상 구속 수배 등으로 만신창이가 되 버린 전남 운동권은 이후「냉각 시국」속에서 지하로 잠적한다. 3년 남짓의 암중 모색 기에 이어 83년 말 유화 국면을 맞아▲80년 5월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오늘 우리 앞에 던져진 자율화, 화해로 이름 붙여진 모순에서 찬 「유화 국면」은 도대체 무엇인가▲80년 이후 광주, 아니 전남 운동권의 그간 4년간은 어떠했는가 등에 대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 논의를 거듭해 오던 끝에, 84년 11월18일「전남 민주 청년 협의회」(약칭. 전청협)창립된다.

전국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제일 먼저 생겨난「전북 민주 운동 협의회」에 비해「전청협」이 3개월쯤 늦게 태어났지만, 지역 운동의 기수라는 점에서 이 단체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전청협」은 창립 보고문에서 이렇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전남 운동권의 80년 이후 4년은 대중 운동으로서의 운동의 질적 전환이라는 상황적 요구를 지역적으로 실천 형성하기 위한 자기 모색의 과정이었다. 우리는 이제 전 국토에 넘치는 민주화 운동의 거센 파도가 들 끊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각 지방 운동의 연대와 전국 화를 제안하는 바이다. 지방은 서울과 달리 판도가 작고 한눈에 들어오는 한계가 있는 반면에, 다분히 가족적인 분위기이며, 결속은 오히려 견고하다. 포괄적인 정세 판단이 뒤늦을지언정 현장 특유의 순수한 지속성이 있으며, 대중의 연계를 쉽게 이루어 낼 수가 있다. 중앙이 지방에 대하여 가진 우월감이나, 지방이 지역적 폐쇄성에 빠지는 일은 양편에서 지양되어야 하며, 지방 운동은 자체 지역의 민중의 생존권 운동과 견고히 결합되면서 지방끼리의 연대를 통하여 「새로운 운동 영역」을 구축해 내야 한다』

이는 그간의 운동에 대한 운동권 내부의 치열한 반성의 산물이며, 특히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운동의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함께 기층 민중의 일상적 요구를 지역 대중 획득이라는 작업으로 연결 지으려는 노력 또한「전청협」의 성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광주 사태는 지역 운동의 출발점

「전청협」은 또 이론지 「광주」창간호 「85년 1월 20일」에서 지역 운동을 다음 과 같이 정의 하고 있다

「지역 운동이라는 것은 쉽게 개념지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전체적 기본 모순의 반영인 지역 내부의 특수한 모순을 지역 주민 스스로의 단결과 정치 경제적 각성을 통해 전체적 기본 모순의 해결로 지향해 나가는 지속적인 움직임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지역 운동의 배경이 되고 있는가 그 배경으로 여러 가지가 얘기 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큰 것은 「광주 사태 」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 같다 물론「부마사태」도 지역 운동의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다

전용호씨(30)는『지역 운동의 배경은 70년대 운동의 직접 결과인YH사건과 부마항쟁, 사북 항쟁의 봉우리를 넘어서 5.17상황과 광주 민중 항쟁의 결과를 철저히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의 산물이며, 실천적 방향 모색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한정남씨(29.부산 거주.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는 도서 출판 「광주」가 간행한「민족 현실과 지역 운동」의「85전후 상황과 지역 문화 운동」이란 특집에서『지역 론의 출발은 광주이며, 또 그 결말은 「새로운 광주」』라고 주장하고『광주의 총체적인 되살림의 작업이 바로 지역 운동이며, 「광주 사태」로 드러난 싸움의 주체.대상.방법.단계.이유.속도.계기.한계등을 살펴보는 가운데 지역 운동의 주체.대상.방법.단계.이유.속도.계기 한계 등이 바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전청협」창립 이후, 인천 경북 충남 충북 부산 등지에서 협의체 성격의 대규모 운동 단체가 잇달아 창립, 민주. 민중 운동의 지방 시대가 개막되기에 이른다.

이보다 앞선 84년 12월8일「전남 사회 운동 협의회」(약칭. 전사협)가 발족된다.「전사협」은 학생운동.노동운동.농민운동.청년운동.문화운동.기타 사회 운동 등 부분 운동권과 재야 정치 세력을 포괄하는 단체로서, 「민주헌법쟁취 국민 운동 전남 본부」(약칭. 민헌 운전 남본부)가 87년 5월18일 창립될 때까지 광주. 전남 지역의 민주. 민중 운동을 이끌어 나간다. 「전사협」에의 가맹 단체는 5.18관련 단체를 비롯, 13개 단체.

결론적으로 80년 5월「광주의 비극」이후 광주. 전남 지역에 있어 민주화 운동의「큰 봉우리」는「전청협」을 시발로, 「전사협」「민헌운전남 본부」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대감 강한 단체들

「광주 사태」이후의 이 지역 민주화 운동을 논의함에 있어 5.18관련 단체들의 「투쟁사」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7년의 세월은 한마디로 형극의 길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이 단체들이 운동권의 반성이라는 논의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는 「전청협」의 창립 보고문에 뼈아픔으로 새겨 있다.「5.18부상자, 유족들의 극한적인 싸움은 그 사회적 반응을 분산적으로 드러냈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것이 그것.

5.18관련 단체로는 「5.18광주 의거 유족 회」「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5.18광주 의거 청년 동지회」등이 있는데, 물론 이런 단체들은 다른 지역에는 있을 수 없는, 이 지역 「고유의 단체들」이다.「광주 사태」직후 강경 탄압 국면을 뚫고 발족한 유족 회와 부상자 회는, 그간 각기 얼마간의 갈등이 있었음은 숨길 수 없다. 이 갈등은 피해에 대한 수용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됐고 , 7년의 세월을 통과한 지금, 정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광주. 전남 지역 운동 단체들의 사무실은 거의 한 곳에 몰려 있다. 광주시 유동 107의 5, 광주 YMCA6층이 보금자리로, 모두 17개 단체가「민주. 민중 운동의 살림살이」를 하고 있다. 방 하나에 보통 2-5개 단체가 들어 있는데, 예를 들면 601호에는 「민헌운 전남 본부」를 비롯,「전사협」「광주 노동자 위원회」「민중 문화 연구회」「5.18광주 의거 유족 회」등 무려 5개 단체가 들어 있다. 얼른 보아 601호는 「큰방」인 듯 싶었다.

이 같은 외형상 특징은 서울의 경우(종로 5가 기독 회관에 몰려 있음)를 제외하고 다른 시.도 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이「뭉쳐 있음」은「연대감」「시간 벌기」「일사 불란」등으로 작용, 운동 효과의 극대화를 기하는 데 일조 한다.

다음으로 서울 다음으로 운동량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남 운동권의 자금이기도 한다.「민헌운 전남 본부」의 경우, 7월 15이라로 발족된 지 두 달도 못됐지만,「6.10규탄 대회」「6.25대 행진」「고 이한열 민주 국민장 및 범도 민 추도식」등의 대규모 행사를 잇달아 치러 냈는가 하면, 그간 성명서만 해도 9장을 만들어 내는 왕성함을 보이고 있다.

특히 농민운동은 전국 으뜸이라는 평가다. 「가톨릭 농민 회 전남 연합회」와「전남 기독교 농민 회」가 선두 주자들. 84년 9월 함평 장터에서 있었던 「함평. 무안 농민 투쟁」은 도시권 학생운동의 가두 투쟁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됐으며, 이 움직임은 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목표한 것으로서 70년대까지 진행해 왔던「농민 대회」식의 옥내 집회와는 기본적으로 구별된다.

이「함. 무 농민 투쟁」은 85년 여름 내내 전국 각 지역 단위로 치열하게 이어지면서「소몰이 투쟁」으로 진전됐던 것이다. 이「소몰이 투쟁」은 「함. 무 농민 투쟁」의 막을 이은, 농민운동의 지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도서 출판「광주」간행「민족 현실과 지역 운동」21-23쪽 참조).

지난7월11일에도 「가톨릭 농민 회 전남 연합회 함평군 협의회」의 리드로 「마늘. 양파값 보상 대회 」를 가진 바 있다.

연대감도 수준 급이라는 운동권 관계자들의 말이다.

『「일」이 있을 때마다 의견이 하나로 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일사불란한 연대성의 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고, 각 부문 운동 단체들과 재야 민주 인사들간에 견해차가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상호간의「입장」이 거의 통일되어 있어「통일된 전망」을 꾸려 낼 수가 있다』고 최평지씨(35.「전사협」중앙 상임 위원장.「민헌운 전남 본부」사무차장 겸 총무 부장)는 말한다.

또 각 단체의 조직이 비교적 잘 정비돼 있고, 운동의 지역 대중성 획득과 대중 정치 의식의 고양을 위해 유인물과 회보, 책자를 만들어 내 열심히 뿌리고 있는 것도 이 지역의「작은 특징」이라 생각된다.

광주 통한 사의 증인으로서

전남 최초의 공개 운동 단체로 등장한 「전청협」은 70년대의 사회 명망가 중심의 민주화 운동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전청협」84년11월18일 오후 4시 광주 YMCA백제 실에서 지도 위원을 비롯, 3백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가졌다. 창립 준비 위원장은 정용화 씨였으며, 이날 선출된 임원 진은 다음과 같다.

◇상임위원회

▲의장=정상용 ▲부의장-정용화. 김종백 ▲총무 부장=송재형▲사업 부장=장갑수▲여성 부장=이춘희 ▲홍보 부장=신영일

◇지도 위원

▲김성룡(신부) ▲문병란(시인) ▲박석무(교사) ▲명노근(전남대 교수) ▲배종열 ▲서경원 ▲정동년 ▲황석영 ▲나병식 ▲문국주 ▲김태홍 ▲임채정등 모두 34명의 지도 위원을 선임했으며, 노동. 농민. 종교. 5.18분과 등의 대표를 선출했다.

유족 회장을 지도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고, 단 5.18분과를 일부러 만든 것은「5월의 통한」을 조직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전청협」은 창립 보고문에서 『우리는 이 절박한 민족사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저 모든 탄압과 폭력을 몸으로 겪고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한 시대의 증인이자, 이름 없이 죽어 간 영령들의 절규를 짊어진 생존자로서의 우리가 바로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서야 한다』고 밝히고,『우리는 이러한 의지의 실천적 대응으로서「전남 민주 청년 운동 협의회」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고 외치고 있다. 또『진정한 운동 역량은 정세 판단이나 빈 이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에서 쌓여지는 것이며, 성숙한 때를 기다리기에는 출발은 언제나 늦기 마련이다. 움직이기 시작한 때가 바로 그때이며, 그 시점에서부터 힘이 자라는 것이다. 「5월」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상황이 우리를 끌고 나가기 전에 우리가 그것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점이 아니던가』하면서「5월의 교훈」을 새긴다.

특히『오늘「전남 민주 청년 운동 협의회」의 발족이 한반도 전체 의 민중. 민주. 통일 운동의 발전적 계기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면서, 이의 대중적 확산과 결집 력의 확보를 위해 모든 청년 동지들의 애정 어린 비판과 책임 있는 개입을 기대한다』고 강조한다.

「전청협」의 그간의 주요 활동 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창립 기념으로 「광주 사태」를 그린 판화 1천여매를 인쇄 중 경찰에 전량 압수 당함(84년 12월20일).

김남주 시집「진혼가」출판 기념회 개최(84년 12월22일). 당국의 저지로 술집 「꼬두메」로 옮겨 강행.

▲「5.18광주 의거 기념 사업 및 위령탑 건립 추진 위」 구성을 위한 준비 위원회 발기(85년 3월18일).「5.18 광주 의거 부상자 회」등 과 공동으로 발기

▲「하남 전자 노조 탄압 사건」항의 시위(85년 3월29일

▲제 1차 「만민공동회」개최(85년 4월 14일).「만민공동회」란 지역 내 관심사에 대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청취하는 장으로, 1차「만민공동회」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진행됐는데, 시민 학생 노동자 농민 5.18유가족 및 부상자 야당 의원 등 10여명의 토론자와 시민 학생 등 1천 여명의 토론자와 시민 학생 등 1천 여명이 참석. 주제는 5.18문제와 신민당의 정치 공약 이행 문제였다.

그 후 2차(주제 5.18, 그 진상과 우리의 각오), 3차(주제. 상. 하수도 세 문제)에 걸쳐「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나 당국의 봉쇄로 참석자가 적었다. 3차 이후 개최하지 못하고 있음.

▲「5.18의거」자료 전시관 개관(85년 5월17일). 광주 YMCA6층「전청협」사무실 옆에 80년 5.18당시의 생생한 자료를 전시했으나 경찰에 자료를 대부분 압수 당함

「전청협」도 다른 운동 단체와 마찬가지로 회보를 발간해 오고 있다. 운동 론의 심화 및 대중적 확산을 위해 공개 토론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이론지「광주」를 5호까지 발간해 오다가,「광주의 소리」라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으로 통합됐다.

「광주의 소리」는 현재 52호를 넘어 섰다. 이 회보에서 「전청협」은 ▲전남 택시 기사들의 사납 금 철폐▲노동자의 최저생계 보장▲노동조합 탄압 중지와 부당해고 철회 등 기층 민증권의 생존권적 투쟁에 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또 「전청협」여성부 에서는 지난 6월15일부터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여성의 소리」를 펴내고 있다고 이 춘문(27)사무차장은 밝혔다.

「전민협」의 기층 민중 권에 대한 이 같은 눈 돌림은 다른 한편 전남 지역 민중 생활 실태 조사 연구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현재 조사 연구 자료집이 6집까지 나왔다.

「하남공단 신가리 주택단지」「광양만 김양식 피해 어민」등을 현장 조사, 보고서를 발행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전민협」은 『민중과 함께 숨쉬는 운동권』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현장 중심의 노동. 농민 운동권」이라는 성격 규정도 그래서 나왔다. 이는 「전민협」의 성과이자, 80년대 운동권의 질적 전환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광주의 기록」을 위해서…

「전청협」처럼 수난을 많이 당한 단체도 드물 것이다.「3.30개헌 현판식」과 관련, 김전승.김태찬씨가 구속된 데 이어「5.3인천 시위」와 관련, 정상용. 정동년씨가 구속됐는가 하면 ,「3.30」「5.3」과 관련 신영일. 정순철씨가 1년 동안 당국의 수배를 받기도 했다. 또 86년 5.18시위 때는 송직형 장갑수씨가 구속됐으며, 이 밖에도 많은 회원들이 경찰에 연행돼 구류 또 훈방 처분을 받았다.

장갑수 부의장과 정동년 지도 위원은 지금껏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전청협」은 이처럼 주요 간부진이 구속되거나 수배 중에 있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도, 86년 11월18일「목포 지역 위원회」를 지난 3월에는 「여수지역위원회」를 설립, 운동공간을 확대해 나갔다.「목포 지역 위원회」는「진청협」이 「목포 사회 운동 청년 연합회」를 흡수한 것인데 이때 명칭을 「전남 민주주의 청년 연합」(약칭. 전청연)으로 개칭했다.

협의 제 단체로 현재 11개 부문 단체가 가명 돼 있다. 84년 12월8일 광주 YMCA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5.18유족 회」「5.18부상자 회」「카톨릭 농민 회 전남 연합 회」「전남 기독교 농민 회」「기독 노동자 전남 지역 연맹」「가톨릭 노동 청년회 전남 연합회」「전청연」「민중 문화 연구회」「기독 청년 협의회」「기독교장로회 청년 회 전남 연합회」「예수교 장로회 청년 회 전남 연합회」등 이 지역에 사회 운동 단체 대표자 13명이 모여, 각 부문 운동의 질적 발전과 진정한 상호 연대의 강화를 통하여 올바른 지역 운동론을 정립하고 통일 적인 운동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결성됐다.

「전사협」과의 협력 단체로는 「5.18청년 동지 회」「전남 민주화 가족 실천 협의회」「송백 회 」「전남대 총 학생회」등이 있다.

발족 당시 공동 의장은 전계량. 최성호 씨였고, 현재는 문병란. 정광훈씨가 맡고 있다.

주요 사업으로「80년 5월」의 기록「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발간 도중 압수당해 판금 됐지만 지난 5월에는 그 제 2집으로「5월」의 사진 자료집을 발간 역사는 결코 망각되어 질 수 없는 것임을 확인시키고 있다.

최평지씨는 『「전사협」은 그간 이 지역 운동 단체 각 부문간의 입장과 견해의 차이를 조정 . 통일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면서『현제 이 지역 운동권의 구심체인 「민주헌법쟁취 국민 운동 전남 본부」의 모체가 바로「전사협」이다』고 설명했다.

5.18유족들에게 「5월」은 한 과 원으로 박혀 있다. 「그날」의 죽음 그들에겐 피눈물이 있을 뿐이다.

5.18유족 회는 80년 5월30일 창립됐다. 창립 당시의 관계 서류는「숨바꼭질 모임」을 갖다 보니, 행방이 묘연하다. 초대 회장은 박찬봉씨

유족들, 높은 사람 광주 오면 격리돼

81년「그날」1주기 추모식 때는 어찌된 영문인지 날짜가 무기 연기돼 버렸다. 그때 당국에선 방안 제사를 지내도록 권유했지만, 동생을 잃은 정수만씨(40.광주 양지 인쇄소 대표)는 대학생들과 함께 망월동 5.18묘지에서 제사를 지내었다. 유족은 정씨 혼자뿐이었다. 시내로 나온 정씨는 시위대에 휩쓸렸다. 그날 28명이 연행됐는데 , 정씨는 주모자로 붙잡혔다..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2심까지 가는 바람에 결국 10개월을 교도소에서 지냈다. 유화 국면이 이후, 좀 풀렸다고는 하지만,「그날 」묘지에 간 사람은 여전히「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때 유족 회 회장을 여자가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남자일 경우 당국에서 삐끗하면 잡아가니까 여자를 앉혔다는 것이다.

83년 4월부터 추진된 망월동 묘지「이장 유혹」은 유가족들에게 아직도 분노로 남아 있다. 5.18직후 발족을 본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로 하여금 망월동 묘지에서 이장하는 유족에게만 생계 보조비 명목으로 1천 만원씩을 지급하도록 한 것으로, 모두 1백 26기 가운데 26기가 결국 이장을 하고 말았다고 유족들은 밝히고 있다.

유족회 총무 일을 맡고 있는 정수만씨는 『당시 지역 개발 회장 집에 몰려가 대문짝을 때려 부쉬며 이장 계획을 중단하라고 야단법석을 피우기도 했다』면서 『결국 회장이 「나는 각본대로 움직였을 뿐이다」고 실토하더라』고 말했다.

주로 시골사람들이 「이장 유혹」에 걸려들었다. 군수 친척 동네 유지들을 동물 유혹하는데 안 넘어갈 장사는 없었다. 이 같은 「이장 유혹」은 5.18상징인 망월동 묘지를 없애기 위한 술책이라며 떠들고 버텨 84년 11월 마침내 중단 됐다.

회원은 1백명. 망월동 묘지 1백기중 주인 없는 10기를 제외한 90기의 유가족 90명과 「비(非) 망월동 묘지 유가족」10명을 합쳐 1백명이 된다. 유족회 측은 회원이 더 늘어나리라는 확신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듯했다.『신규 회원을 발굴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면 금방 당국에 체크돼 주저앉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해마다「5월」이 되면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도심지로 뛰쳐나왔다가, 연행 구속 복역의 신고(辛苦)를 겪어야 했던 유가족들이 한둘이 아니다.

대학 2년생 아들을 잃은 이천균씨(56.광주)는 지난 5월 7주기 때 미리 준비한 「분풀이용 물건」을 경찰에 빼앗기고 화를 이기지 못해, 죄 없는 광주 시청자를 불태운 혐의로 구속돼 22일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갖은 고초를 당했다.

「높은 사람」이 광주에 올 때는 대부분 2-3일전부터 격리되곤 한다며 유족들은 분해한다. 가장 약한 격리 수단은 가택 연금.「높은 사람」은 주로 한겨울에 온다. 추우니까 경찰들이 봉고 차 시동을 걸어 히터를 틀어 놓고 지키는 바람에 잠 설치는 동네 사람들 미안해 낯을 못 든다는 것이다.

집밖으로 나오면 봉고 차에 태워 「내다 버리고」어떤 때는 집안으로 몰려와 떠 메 가기도 한다.

이천균씨의 부인은 지난 연초「높은 사람」 때문에 형사들에게 납치되다시피 순천까지 끌려가 격리되기도 했다.

격리 장소는 순천 여수 진도 완도 정읍은 가까운 편이고, 제주 대구 부곡까지도 끌려간다 한다.

탄압 항의 등 단체행동을 할 때는 곧 잘 타관 땅에 버려진다. 86년엔 탄압 항의를 하다 곡성-남원간 비포장간 2-3Km간격으로 1-2명씩 모두 20명이 버려졌으며, 지난 5월에도 연행자 석방 요구를 하다 3명이 또 그런 꼴을 당했다.

또 얻어맞아 입원 경력이 붙은 유족도 적지 않다. 김길자 김순희 박순례 김춘수 양찬모씨등이 그런 유족들.

최근 정부 여당에서 「광주 사태」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유족들은『급하게 서두르지 말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는 듯하다. 유족 회 임원들은 『우리가 원하는 민정 정부가 수립되어야만 정확한 진상 규명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보상 문제도 그 때 가서 거론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위령탑 건립에 관해서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위령탑을 세워 주겠다니, 우스운 일이다』고 대답한다.

후유증으로 정신병자 되고

「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는 82년 6월「무등산 친목회」로 출발했고, 현재 회원은 2백 80여명. 부상자 회 측은 부상자가 2천 여명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전남 도청에 비치된 개인별 카드만 해도 8백58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개인별 카드가 비치돼 있는 것은 병원에 입원 국고에서 치료비를 정식으로 지출했기 때문이다.

부상자 회 측은 이 카드를 입수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이 「비장의 카드 」인 탓으로 실패했다.

회원 수가 실 부상 자수와 차이가 많이 나는 이유는▲공직자 자녀가 아니더라도 주목을 받을까 봐 꺼리는 경우와▲부유층의 자녀가 상당수 있기 때문일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또 보상 대책이 없는 것도 기피 이유의 하나가 될 것이다.「6.29선언」이후에 나타나는 부상자가 더러 있는 것이 앞의 분석을 사실로 밀어 주고 있는 셈이다.

부상자 회에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5.18기록을 보고 86년 8월 이후 이름만 나와 있는 부상자들을 추적, 20여명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처참한 지경에 놓여 있는 부상자는 아직도 상당수가 있다. 최강식씨(34.광주시 방림 2동 439)는 화염 방사기로 회상을 입었다. 자가 치료 중병이 깊어지자 86년 8월에야 전남대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합병증이 생겨 1주일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이문영씨(48.송정시 신흥동 1115)는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뇌수술을 세 번이나 했지만 결국 정신 이상이 되고 말았다. 한 달에 2만원씩 하는 월세 방에서 살고 있다. 큰딸은 미국으로 입양 보냈고, 14세 짜리 둘째딸은 서울로 식모 살이를 보냈다. 85년 5월 부인마저 교통사고를 당해 목발 신세를 지고 있다. 부인이 빈 병 주워 모은 돈(하루에 8백-1천원)으로 구차스럽게 생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요한씨(28.송정시)는 총상 척추 환자.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가린다. 휠체어가 그의 다리다. 김씨 부부는 어느 교회의 합창단에 속해 있다. 부인은 주위에서 「성녀」라는 얘기를 듣고 있으며, 광주 무진 교회 강신석 목사는 김씨 부부에게 만화가게를 차려 주고 생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박상철군(20)은 중학교 1학년 때 부상을 입었다. 총상 척추 환자. 박 군의 양쪽 엉덩이를 보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다. 밤낮 누워 있어 엉덩이가 소름이 끼칠 만큼 문드러져 있기 때문이다. 박 군은 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그만두었다.

부상자들도 서울시「높은 사람」이 온다 하면 가택 연금 또는 외지에 버려지기 일쑤였다. 특히 임원들이나 중환자에겐 이런 수난이 자주 되풀이됐다.

부상자 회는 그간 꽤 많은 사업을 벌여 왔다. 무급 자 처리, 의료 보호 카드 발급 개인 택시 면허 학자금 지원 치료비 및 약품 지원 생활 보호 대상자 지원, 취업 등이 주요 사업들

이렇듯「복지」쪽을 신경 쓰다 보니, 임원 진들이 더러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삶」이라는 것 때문에 「투쟁」쪽에만 치우칠 수 없는 양면성을 갖고 있는 점이 유족 회의 특이성이 될 것이다.

그간 유족 회에선 두 차례나 청화 대에 부상자들의 참상을 아렸으나 종내 무소식

박옥재 회장의 말을 들어보자

『「6.29 선언」은 5.18로부터 7년 1개월 11일 만에 열린 5.18의 열매다. 현 정권이 민중 항쟁에 굴복한 한 개의 항복 문서다. 그러나 그 항복 문서는 미 조리 함상의 무조건적인 항복 문서가 아니고 술수와 변수가 충분히 내재될 수 있는 문서다. 그래서 그날의 당사자였던 우리 회원들은 앞으로의 민주 일정을 촉각을 곤두세워 지켜볼 수밖에 없다. 위령탑 건립이나 보상 문제도 「그날」의 당사자들과 완전 무결한 합의하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박 총무도 『5.18정신 계승과 함께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면서『국가 손해 배상 법에 따라 보상을 하고, 국가 보훈의 차원에서 부상자 및 유가족을 다뤄야 할 것 』이라고 주장한다.

운동 본부의 「망월동 묘지 선언」

5.18 광주 의거 청년 동지 회는 「5.18유족 회」청년 부와 「5.18부상자 회」청년 위원회 그리고 청년 구속 자가 한데 모여, 86년 4월 무지 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정태영씨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세영씨는 현 회장. 청년 동지회는 5.18정신 계승과 진상 규명을 목적으로 창립됐다. 회원은 40여명

운동권에서 「민헌운전남본부」의 성격을 「운동 전선 조직체」라고 규정짓는다. 이는 이 단체가 「협의체」수준을 넘는 다는 이유에서다.

이 단체는 지난 5월18일 5.18 7주기를 맞아 망월동 묘지에서 발족됐다. 고문에 윤기석 목사 등 3명, 공동 의장에 남재희 신부 11명,「전사협」등 21개 가명 단체로 구성된 이 단체는 발족 선언문에서 소위 「4.13조치」로 표출된 호헌을 반대하고 진정하게 국민을 위해 움직이는 민주 정부를 세워 나가기 위해 오늘 「광주 민중 항쟁」7주년을 맞아 「4.13호헌 조치 반대 및 민주 헌법쟁취 범도 민 운동 본부」를 발족하기로 했다고 역설하고 「범도민 운동 본부」는 첫째 군부 독재의 소위「4.13조치」를 물리치고 민주 헌법을 쟁취할 때까지 존속 투쟁할 것과 둘째, 모든 반 독재 민주화 세력과 공동 보조를 취해 나갈 것과 셋째 국민의 여론과 도민의 요구에 충실하면서 ,모든 시민 도민과 함께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망월동 묘지 선언」은 전국 최초인 데다 초 강경 탄압 국면을 뚫고 결성됐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 즈음 운동권에 유리한 국면이 전개된다.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은폐 조작 사건이 그것이다. 「박군 사건」이 터지면서 현정부가 수세적 입장에 몰리게 되고 지난 5월27일 서울에서「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가 발족되자, 전남에서도 이틀 후인 29일 명칭을「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가 발족되자, 전남에서도 이틀 후인 29일 명칭을「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전남 본부」로 개칭하기에 이른다. 이때 재야 민주 인사들까지 참여, 지역 내의 모든 민주 세력을 통합 조직을 확대 개편하고 전남 운동권의 최고 사령탑으로 등장하게 된다.

▲고문=윤기석(광주 한빛교회 목사)조비오(카톨릭 신대 교수)조아라(광주 YWCA명예 회장)홍남순(변호사)

▲상임 공동 의장=강신석(광주 무진 교회 목사)김영진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사무국장)남재희(카톨릭 광주대교구정의평회위원회 위원장)

▲배종열(전 기독교 농민 회 전국 회장)이기홍(변호사) 정동년(민통련통일분과 위원장)지선(문빈정사 스님)

▲공동 의장=김경식(구속자 협의회 사무국장)김병균(전남 목회자 정의평화협의회장) 김재영(카톨릭 광주대교구사목국장) 김층조(전민연여수지부장)명노근(전남대교수)문병란(전사협 공동 의장)문정식 박석무(교사)법성(스님)변남주(광주서현교회 담임 목사)김달원(광주 삼광 교회 담임 목사)신기하(국회의원) 안성례(전남 민주화 실천가족운동협의회장)안철 전계량(5.18유족 회장)최성호(전 가톨릭 농민 회장)

「민헌운전남본부」는 「6.29선언」이후 에도「최후의 승리를 향해 우리의 힘을 더욱 더 결집 해 나가자」고 외치고 있다. 이는 이 단체가 주도한 일련의 큼직한 대중 집회가 「성공적이었다」는 자체 평가를 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오병윤씨(홍보 부장 대행)는 『민주화를 한다고 했으니까 그걸 우리 국민들이 찾아 먹어야 한다』면서 『결국 민주화는 우리 스스로 찾는 것이다』고 말했다.

투옥 인사 부인들의 모임도 활발

전남권 운동 단체 중 송백 회는 이색적인 단체다. 구성원이 모두 여성인 점이 그것. 78년 유신 시절에 창립을 본 이 단체는 투옥 민주 인사들의 부인들로 구성됐다.

5.18직후 사무실과 영치 품을 압수 당하고, 남편들도 모두 구속되는 과정에 서 자연 해체됐다. 그후 85년 재 창립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전남 지역 양심수들의 옥바라지를 하는 단체다. 1일 찻집, 바자회 각종 세일 등으로 돈을 모아 주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양심수들을 선별, 영치 품을 넣어 주고 영치금도 전달하고 있다.

겨울철에는 스웨터, 양말 등을 뜨개질하여 양심수들에게 보내 주기도 한다. 이와 함께 각 운동 단체와 긴밀한 연대감을 갖고 활발히 운동권에 참여하고 있다.

이소라 회장은 『현재 회원은 40명이다』면서 『유신 이후 좌경, 용공으로 몰려 현재까지 갖은 질병과 수난 속에 서 옥고를 치르고 있는 양심수를 전원 석방 사면 복권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6.29선언」이후 전남 운동권은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7개월 중 새로 생겨난 부문 단체 및 연합 단체만 해도 3개나 된다. 「전남 최루탄 부상자 회」「전남 해고 노동자 복직 운동 협의 회」가 바로 새 식구들이다.

지금까지 협의 제 성격의 단체와 5.18관련 단체들을 중심으로 태동 배경 및 이념 활동 실세를 살펴보았는데, 소개하지 못한 단체들에 대해선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