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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암매장당한 내아들을 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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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매장당한 내아들을 돌려다오



소주 부어 쓰다듬을 무덤 하나 없어

광주를 에두르고 있는 이름 모를 야산굽이 너머로 달덩이가 지면 사람들은 어느새 옷깃을 여미며 옹근 십여 일 간의 그 숨가쁜 항전의 기억 속으로 젖어 들기 시작한다. 그날의 함성이 가신 지도 벌써 십 년 세월. 그 항쟁의 불길 속에서 자라난 아이가 어느덧 어엿한 청년으로 장성하였으니 길다면 기나긴 세월이리라.

그 짧지만은 않은 세월 동안 소주 부어 쓰다듬어 줄 망자의 무덤 하나 없어 통곡과 울분으로 몸서리치며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자식들의 시신을 찾지 못해 가슴에다 묻은 후 피눈물 섞어 디도여 온 그들의 10년, 그것은 필설로 헤아리기 어려운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 날의 광주처럼 추적추적 비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어느 낯선 땅에 버려져 썩고 있을 아들이 못 잊혀 비 내리는 하늘을 보며 그 비만큼의 눈물을 쏟아 내는 한 어머니가 있다.

현재 광주직할시 주월동 에서 큰아들 내의와 한께 사는 전광옥씨(60).

80년 5월이 없었더라면 전광옥씨 역시 주위의 평범한 가정주부와 별반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매일처럼 꼭두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지으면서도 행여 엇서지 않을까, 자식 걱정에 시름 잊을 날 없더니 자식들 다 키웠다 싶으면 어느덧 머리칼에 희끗희끗 서리꽃이 내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우리의 어머니들 그러나 80년 5월은 그녀의 인생 행로를 바꿔 버렸다.

나중에 꼭 효자 노룻 할께요

80년 당시 전광옥씨가 남편 김봉호씨(현 64세)와 3남1녀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곳은 방림동 시내버스 종점 부근이었다. 지금은 아파트촌이 들어서서 예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지만 당시만 해도 주위에 많은 논밭을 거느린 변두리였다.

그 곳에 붙박혀 사는 동안 3남1녀는 별 탈없이 자랐다. 그러나 가세는 점점 기울어만 갔다. 남편의 사업이 잇따라 실패하는가 싶더니 금남로 부근에 개업한 식당마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 때가 바로 막내 남석 이가 광주 제일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였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 버린 가정 형편 탓에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남석이가 부천에 있는 노동부 산하 중앙 직업 훈련원에 입학한 것이 80년 4월 1일.

물 설고 낯 설은 경기도 부천 땅에 19살의 어린 막내를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결코 편할 수만은 없었다. 더구나 막내의 일기장을 우연히 넘겨보았다가 그 곳에 적힌

"어머니 조금만 고생하세요 제가 나중에 꼭 효자 노릇 할 께요"

라는 남석이가 집을 떠나면서 적어 놓은 깨알같은 글씨의 문구를 접했을 때 어머니는 급기야 한옹큼의 눈물을 쏟아 내고야 말았다. 자식을 그 흔한 대학 하나 보내 주지 못한 못난 부모로서의 가책과 너무도 일찍 철이 들어 버린 막내가 대견해서 그처럼 뜨겁게 눈두덩을 덥혔던 것이다.

전광옥씨가 다시 아들을 대하게 된 것은 5월 18일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잠에 빠져든 어머니가 형의 이름을 불러 대는 막내의 목소리를 잠결에 들었던 것이다. 부천에 올라가 있을 동안 광주 집이 근처로 이사를 했다는 말만 전해들은 남석은 형의 이 름을 불러 대 며

집을 찾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시국에 느닷없이 찾아온 아들을 맞은 어머니의 놀라움은 자못 컸다. 댓바람에 달려나가 아들을 불러들인 어머니가 막내에게 전해들은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남석이 직업 훈련원에 입학한 이후 서울의 봄을 맞이한 전국의 학원가는 전면적인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며 밤낮없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는 급기야 부천의 직업 훈련원에까지 파급되었다. 용접과 대표를 맡은 남석은 4년제 기술 대학으로 승격시켜 달라는 요구 조건을 내걸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한다. 그러나 5월 18일 실권을 장악한 신 군부 세력에 의한 비상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휴교령이 발동되자 남석은 광주행 막차에 몸을 실었으며 광주 고속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가 넘은 시각.

광주는 그 날의 시위로 인해 온통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이미 각 대학은 착검한 공수부대에 의해 완전 접수되었으며 시내에선 시민이 가세한 학생들과 공수부대 쌍방간의 피어린 유혈 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방송이 완전 통제된 상태인지라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어둠에 싸인 광주에 도착한 남석은 통금 실시로 인해 오지도 않을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가방을 맨 남석을 대학생 인줄로 알았던지 몇 명의 노인들이 "지금 뭐 하려고 거기 서 있느냐 ? "고 물어 왔으며 남석은 "서울서 내려왔는데 집에 가려고 그런다"고 대답했다 한다. 그러자 노인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더니 "오늘도 학생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는데 지금 택시가 다 뭐냐. 골목길 로만 해서 빨리 집으로 가라"며 호통을 치더 란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남석은 택시 잡기를 포기한 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골목길이 라고 해서 안전할 수만은 없었다. 금남로 부근으로 들어선 남석이 급기야 얼룩무늬의 공수부대와 맞닥 들이고야 만 것이다

이 때가 남석이 경험한 마지막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젊다 싶은 청년들을 불문곡직 구타한 후 어디론가 연행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남석은 "이 개새끼 빨리 못 뛰어" 라는 험악한 욕설만 얻어들은 채 그 자리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포에 질린 남석은 방림동 부근의 논둑 밭둑을 타넘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막내가 집에 돌아온 후에도 전광옥씨는 긴장과 초조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집집마다 가택수색을 실사하여 젊은 청년들을 무조건 끌어간다는 소문이 파다했을뿐만 아니라 얼굴이 잔뜩 굳은 채 매일처럼 옥상에 올라가 분노에 치를 떠는 아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전광옥씨는 무서운 얼굴로 단 도리를 해야만 했다. 5월 20일 저녁 무렵에도 어머니는, 그 동안 계엄사가 지시한 보도 내용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던 KBS · MBC가 세무서와 함께 불에 타 버림으로 하여 대낮처럼 밝은 광주의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남석을 걱정 어린 시선 지켜보아야 했다.

번져가는 시위대의 물결

피 비린내 나는 항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덧 4월 초파일(양력 5월21일)이 다가왔다. 더구나 그날은 남석의 생일날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전광옥씨 가족은 전날 미리 구입한 초와향을 들고 평소 자주 다녔던 송정리 가막골의 법주사로 치성을 드리러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모든 교통이 완전 두절된 광주 시내에 차가 있을 리가 없었다. 시위대를 가득 태운 버스며 트럭들이 우렁찬 노랫소리를 꼬리 에 매단 채 도로를 할뿐이었다.

결국 치성 드리러 가는 것을 포기한 전광옥 씨는 막내 단속을 부탁한 후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쌀을 구입하러 나섰다. 집에 쌀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이러한 불투명한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지 마음을 졸이 고 있던 참에 방림동의 어느 쌀가게에서 각 가정에 한 말씩의 쌀을 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것이다.

그 즈음엔 평소 자주 거래하던 단골 가게뿐만 아니라 근처의 모든 쌀가게가 완전 철시한 상태였다. 쌀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생필품의 보급이 중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광옥씨 가족의 비극은 그 때 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단골 거래처가 아니었기에 함께 돌아올 요량으로 전광옥씨는 어렵게 구입한 쌀을 가게 주인의 자전거에 옮겨 싣고 있었다. 광주 천변의 양켠 도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잔뜩 뒤엉켜 온통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박수가 터지는가 하면 무언가를 끊임없이 실어 주기도 했다. "엄마" 하고 부르는 막내의 음성이 들려온 것도 그 때였다.

"이놈 자식아 뭐 하러 나왔어. 언능(빨리) 들어가지 못해."

집에 있을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느닷없이 나타난 통에 깜짝 놀란 전광옥씨가 성마른 호통을 쳤다.

"형이랑 형수랑 같이 왔는디 으짠다요."

어머니의 놀란 표정에도 아랑곳 없이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아들의 말이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새에 큰아들 내외도 와 있음을 알고 적이 안도했다. 그곳엔 그들만이 아니라 큰아들의 친구라는 사람 내외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금방 들어오니라."

넌지시 다짐을 주고 난 전광옥씨는 자전거의 뒤를 따라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당시에만 해도 설마 어쩌랴 싶었다. 그런데 집이 가까워 올수록 점점 불안감이 치솟는 것이었다. 자식을 물가에 내보낸 심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쌀을 부리고 난 전광옥씨는 버스 종점을 향해 부리나케 잰걸음을 쳤다. 그런데 그 곳엔 정작 있어야 할 막내는 보이지 않고 큰아들만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고 한다.

불안한 예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어머니가 아들을 채근하여 알게 된 전후 사정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수많은 시계들이 금남로에

어머니가 먼저 집으로 향한 후 차량 시위대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막내가 큰형더러 "형님 그만 들어갑시다. 남들은 저렇게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창피하게 구경하고 있겠어요"하고 자못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몸을 돌려 돌아오려고 하는 찰나 시위대를 태운 지프차에서 누군가(당시에는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으나 이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남석의 일고 동창인 백대환 군이었다)가 "남석아"하고 불렀으며 형이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남석은 쏜살같이 지프차로 내달아 함께 떠나 버렸다는 것 이었다.

전광옥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동생을 찾겠다는 큰아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그녀는 떠나 버린 아들을 찾아 시내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아들은 없었다. 수십만 명의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금남로에서 아들을 찾아낸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변두리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을 폭로하는 차량 시위대와 함께 떠난 아들이 금남로에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 날 1시경 비 내리는 도청 앞에서는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다.

빽빽이 늘어선 수십만의 시위군 중 속으로 퍼부어진 총탄으로 인해 수많은 시신들이 금남로 포도 위에 나 뒹굴었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심 지 어 부상자를 옳기려는 시민들을 향해 저격수들의 조준 사격이 가해지기도 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극으로 치달았다. 군수납품 업체였던 아세아 자동차에서 장갑차를 끌어오는가 하면 나주·화순·담양 방면으로 나뉜 차량 시위대는 각지의 지서를 접수하여 무기를 구해 오기도 했다. 본격적인 무장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시내를 자욱이 덮은 매캐한 최루탄 내음과 어디에서 날아들지 모를 총탄에 대한 불안감에도 아랑곳없이 전광옥씨는 오직 아들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시내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이미 눈자위는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러나 끝내 아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 날 저녁 어머니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온 가족 모두가 걱정과 불안에 휩싸인 채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혹시 막내가 친척집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수화기를 들고 통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신호음조차 끊긴 지 오래였다.

어머니는 어느새 부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단 채였다. 그러다가도 불현듯 몸을 일으켜 세워 집으로 나 있는 고샅길을 되짚어 걸어나간 것도 수 차례였다.

새벽녘의 어스름 속으로

밤새 소총의 단발음 사이사이를 뚫고 자동 화기의 둔탁한 속사음이 광주의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먼데서 희뿌연 새벽빛이 창가에 얼비 쳐들기 시작했다. 날이 새려는 모양이었다.

그때 느닷없이 "엄마"하고 부르는 막내의 숨가쁜 음성이 들려 왔다. 두 촌을 모아쥔 채 기도를 드리고 있던 어머니가 후다닥 몸을 일으켜 세운 것도 그와 거의 동시였다. 온 가족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니나다를까 그 곳엔 친구인 듯한 소년과 함께 아들 남석이 서 있었다.

전광옥씨는 아들의 손이며 뺨을 부며 보는가 하면 가슴속에 꼭 품어 보기도 했다. 혹시 꿈은 아닌가 해서였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흠칫 놀랐다. 아들이 어깨에 메고있는 M1 소총을 보았던 것이다.

"아아, 이것이 무슨 총 이다냐 어디서 난 게냐."

전광옥씨가 의아해 하며 물은 말이었다.

"엄마, 그보다도 인사 받으세요 얘는 광주 일고 동창인 백대환이에요. 그동안 같이 있었거든요."

대답 대신 남석은 함께 온 친구를 어머니에게 소개를 시켰다고 한다. 그 역시 어깨에 총을 메고 있었다. 어머니는 잘게 한숨을 내 쉬었다. 어린 녀석들이 제 키만큼의 총을 메고 서 있는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해서였다.

"엊저녁엔 어디 있었냐."

전날 몸이 달 정도로 아들을 찾아다녔던 어머니가 넌지시 물었다.

"친구랑 불로동 다리에서 경비를 섰어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의 말투였다.

불로동 다리라면 도청 앞에서 불과 이백여 미터도 채 못 미치는 곳에 위치한, 광주 천을 횡으로 잇는 다리이다.

그곳에서 남석은 일고 동창들과 함께 근처 한일 여관에서 숙식하면서 교대로 야간 경계 근무를 섰다는 것이었다. "밥은 어떻게 했느냐" 걱정스레 물어 보는 어머니에게 남석은 "아줌마들이 김밥과 음료수를 잔뜩 줘서 배는 하나도 안 고파요"라며 자못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사실 항쟁이 격화되면서 각 동네의 아주머니들이 조를 짜서 길거리에 큼지막한 솥을 걸어 놓고 밥을 짓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목격되었다. 특히 시장 아주머니들의 헌신적인 애정은 시위대를 크게 고무시킬 만큼 눈물겨운 모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 땜에 이 에미 애간장이 다 녹겠다. 이놈아. 자 어여 들어가자."

돌아온 아들이 그저 고맙고 기쁘기만 한 어머니가 아들의 괄목을 당겼다.

"죄송해요 엄마. 요 근처 삼일 아파트에 본부가 있응께 총만 갖다 주고 올 께요."

남석이 몸을 버팅기며 말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닷 찾은 듯한 아들을 쉽사리 내보낼 리 만무한 어머니가 "총은 내가 가져다주고 오겠다"며 만류했다. 그러자 정색을 한 남석이는 "안돼요. 총은 생명과도 같은 것인데 이것은 당연히 제가 반납해야 해요"라며 극구 우겼다고 한다.

결국 아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심한 어머니가 아들 배웅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그때 어머니의 뒤를 따르던 남석이 마당에 선 형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형도 같이 갑시다"며 함께 갈 것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기겁한 어머니가 "총이나 빨리 갖다 주고 오라"며 무섭게 나무랐다.

시내버스 종점 부근까지 아들을 배웅한 어머니는 새벽 어스름 속으로 묻혀 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끝내 못 찾은 아들의 시신

그러나 그것이 아들의 마지막 모습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떠난 아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 무등산을 타고 내 진 산굽이 어름에 노을이 파르스름하게 열리는가 싶더니 금새 붉은 햇 덩이가 불끈 솟구쳐 올랐다. 밤새 어둠에 묻혀 숨죽이던 광주도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이제나저제나 아들 돌아올까 ,기다리던 어머니의 얼굴은 흡사 그물이 드리워진 듯 어둡게 얼룩져 갔다. 혹시 무슨 험한 사단을 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질정 없이 가슴속을 헤집고 들어서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어머니는 세차게 도리 머리를 흔들곤 한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아들은 종무소식이었다. 급기야 그날부터 온 가족이 남석을 찾아 나섰다.

본부가 있다는 삼일 아파트를 거쳐 아들이 밤 근무를 했다는 불로동 다리 근처를 탐문해 보았으나 어디에도 아들의 행적은 없었다.

몸이 단 어머니는 내 아들이 그럴리는 없다고 속다짐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도청 앞 상무관의 시체 안치소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곳에 안치된 수십 구의 시신들은 이미 심한 부기와 함께 부패하기 시작해서 누가 누구인지 조차 분간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한다 물론 곳곳에 안치된 시신을 어머니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내가 시신을 봤으면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한탄 하시는 사연엔 나름의 곡절이 있었다.

그 당시에 불교 신자인 전광옥씨는 매일 밤 머리맡에 깨끗한 정화수를 떠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시신을 목격한 사람이 이를 행하게 되면 동티가 난다 하여 금기시 하는 통례가 있어 왔다.

따라서 아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 확신한 어머니가 시신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던 데에는 정화수를 떠놓고 빌면,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은 애달픈 기원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27일 새벽, 광주는 곧이어 밝아 올 아침을 맞이해 보지도 못한 채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숨막히도록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어느새 말을 잃은 채 서로의 마음을 눈빛으로만 주고받았다.

전광옥씨가 아들의 행적에 대해 듣게 된 것은 광주 항쟁이 끝난 한참 후였다.

23일경 일신 방직에 근무하는 2명의 아가씨가 도청을 찾아와 아버지 제삿날인데 화순에 못 가게 되었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자 이를 본 9명의 광주 일고 생들(주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신 일고 생들은 그룹을 짜서 같이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이 화순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차를 타고 떠났으며 그 차가 지원동을 벗어나자마자 근처 야산에 주둔 중이던 계엄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속엔 남석의 친구 백대환군도 끼어 있었으며 그의 시신은 뒷산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망월동 묘역에 안장된 그의 묘비엔 23일자의 사망 일자가 기록되어 있다.

나의 아들아! 나의 아들아!

항쟁은 끝이 나고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으나 어머니는 아들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새 5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가에도 표나게 주름살이 늘어갔다.

85년 광주 문제가 국회에서 거론되면서 행 불자 신고를 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해 8월 28일 어머니는 광주시 개발 위원회에 아들의 행적을 담은 경위서를 제출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 아들을 행 불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도지사 명의의 통지서를 받았을 뿐이었다.

기관에서의 유언 무언의 압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어머니가 유족회 활동을 시작한 것은 85년, 아들 막내가 어디엔 가살아 있을 것이라는 그간의 기대를 포기한 뒤였다.

유족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매달마다 망월동 참배를 가게 되는데 그때마다 유족회 어머니들은 아들. 딸들의 무덤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한참 동안을 통곡하다 돌아오시곤 했다. 그러나 전광옥씨에겐 뼈라도 묻어 놓고 쓰다듬어 줄 무덤이 없었다. 이한열 열사의 운구가 광주에 도착하여 망월동에 묻힐 때에도 어머니는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고 한다. 내 새끼는 어디서 썩고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민주화 요구로 전국을 휩쓸던 87년 6월 항쟁이 승리로 끝난 그해 겨울, 어머니는 망월 묘원의 얼어붙은 땅에 생년 월시를 적은 천을 넣어 아들의 가묘를 쓰게 된다. 시신은 어느 이름 모를 산천에 버려져 풍상에 스러지고 말았을 망정 그의 넋은 친구이자 전사였던 백대환군의 묘지 옆에 117번의 묘지 번호를 달고 함께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제 광주 항쟁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머니는 더 이상 슬픔과 비탄에만 젖어 있지는 않다. 당시의 한이 세월의 더깨에 묻혀서가 아니다. 죽어 간 남석의 뒤를 이어 조국을 건사할 수많은 아들. 딸들의 부활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국회에선 광주 희생자 보상법에 관한 시비가 한창이다.

"우리가 보상금 타묵 자고 여태꺼정 싸워 온 것은 아니제 마는 세상에 보상이 다 뭐다요. 우리애기가 교통사고 나서 죽었 간디 보상 이다요, 택도 없는 소리 제라."

광주 항쟁을 보상금 몇 푼으로 입막음하려는 기도에 대해 어머니는 분통을 터뜨리신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없는 어떠한 해결책에도 반대한다는 어머니의 단호한 얼굴엔 모진 세월과 함께 변화해 온 삶의 역정이 에누리없이 드러나 있다.

오늘도 어머니는 그날의 항쟁을 담은 책자를 들고 망월동을 향하신다. 그곳엔 겨울의 쓰라린 한기를 이겨낸 풀싹들이 연초록 새순을 돋우고 있으리라. 전광옥씨를 비롯한 수많은 이 땅의 어머니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