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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엄마 나 구경하고 올게"

본문

"엄마 나 구경하고 올게"

집나 간 소년 9년째 감감

"누가 알 것이요, 이 기막힌 사연을…"

-광주 항쟁 행 불자 가족들의 피맺힌 세월-

"내 아들"부르다가 숨져 간 아버지

"내 자식 뼈라도 내놔라."

지난 1월11일 광주시 동구 월남동 주남마을'암매장 발굴'현장에는 5.18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의 '내 부모 형제 유골이라도 찾아내라'는 울분에 찬 목소리가 높았다. 겨울비가 축적 추적 내린 이날. 시체 발굴 작업을 지켜보던 5.18행 불자(5.18광주 민중 항쟁 행방 불 명자) 가족 손금순씨(56)는 "사체 검사한다고 뼈 다구가 비닐 봉지에 넣어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합디다. 그저 하느님께서 보고 계시니까 우리 아들 찾아 주것지. 산 놈 못 찾으면 죽은 넋이라도…"라며 한숨을 내쉰다. 손금순씨는 80년 5월 이후 아들과 남편을 한꺼번에 잃은 희생자이다.

손금순씨의 둘째 아들 고재덕씨(당시 15세. 광주시 쌍촌동)는 80년 5월20일게 아침을 먹고 나서 '엄마 나 구경 좀 하고 올께'하고 집을 나가 9년이 지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어디 있다 나타나겠지'하며 이틀이나 좀 조마 기다리던 가족들은 허둥지둥 찾아 나섰다. 아는 사람이나 이웃을 찾아다니며 "재덕이 못 봤소 엊그제 나가서 안 들어 온당께"사방을 훑어도 재덕이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재덕이의 아버지 고광신씨(당시57세)는 눈이 뒤집혔다. 얼마 후 앓아 눕고만 것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얼마나 징 한 꼴을 봤는가, 재덕이 나간 뒤로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못 먹었어요, 속이 붓고 먹는 대로 토하더니마,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부인 손씨는 눈물을 삼키며 자꾸 눈 쪽을 쓸어 내더니 마침내 말을 잇지 못한다. 남편은 대문을 열고 서 있는 것이 하루 일과이더니 눈을 감을 때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내 아들'만 되풀이했다며, 손씨는 남편의 죽음이 행방 불명된 재덕이 때문이었다고 하소연한다. 평소에 건강하던 고씨는 재덕이를 잃은 석달 후 80년9월에 눈을 감았다.

손씨는 80년, 병원이나 도청 앞 상무관 등에서 줄줄이 늘어놓은 시체를 하나하나 들썩이며 아들을 찾아보았으나 재덕이는 없었다. '어디 엔가 살아 있는게 아닌가' 손씨는 점도 많이 쳐보고 사진을 들고 서울의 복지원, 고아원등을 뒤졌으나 소용없었다. 아들과 남편을 잃은 손금순씨는 그후 식당에서 일을 하여 월수입 10만원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던 83년, 광주시 계림동 사무소에서 재덕이의 '민방위 훈련 나오라는 통지'가 나왔다. 재덕이의 행방을 모른다 하자 동사무소 측에서 '훈련을 받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해 가출 신고를 하게 되었다.

세상 무서워 신고도 못하고…

"그때 글도 모르고 겁도 나서 신고를 못했어요. 행여 자식이 돌아올지도 모르고요."

굵은 손마디의 농부 송원모씨(70.곡성군)는 자신의 무지를 한탄하여 자식 생각에 눈이 붉어진다.

정부측에서 80년 5.18피해자 신고 창구를 마련했으나 피해자들은 거개 신고를 하지 않았다. 85년의 추가 신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지난해 5월, 5.18피해자 추가 신고 때에야 대개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부터 광주 항쟁의 진실이 조금이나마 밝혀지기 시작한 세상 분위기 때문이라고 정영원씨(49)는 말한다.

현재 광주 시청 지원과에 5.18 행 불자로 접수된 인원만도 무려 1백2명 가운데 17명만을 인정하고 27명은 재심, 58명은 인정할 수 없다고 지난해 12월31일 발표하였다.

손금순씨는 "그 동안 생 머리가 아파 약으로 연연해 오다 신고할 때 속이 뒤집어지고, 암매장 발굴할 때 또 속이 상합디다." 라며 "80년 5월에 나간 자식을 행 불자가 기네 아니네 해싸믄 기가 막히제"라고 덧붙인다.

손씨는 가출 신고가 83년에 되어 있고 80년 당시 고재덕씨가 집을 가간 것을 가족 외에 본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광주 시청 측의 불인정 통고를 받았다.

가족도 모르는 새 직권 말소되기도

행 불자. 즉 행방 불 명자는 사전적으로 '간 곳이 일정치 않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법률적으로는 '실종'을 말하며 실종은 '사람의 소재 및 생사가 불명한 것을 뜻한다. 대개 '보통 실종'과 '특별 실종'으로 구분한다. 실종 기간이 5년이 지나면 이해 관계 인이나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실종신고를 하게 되고, 실종신고를 받은 자(실종자)는 사망한 것으로 한다. 이때 집을 나가게 된 이유가 전쟁이나 선박 침몰 기타 사망의 원인이 될 급난을 당한 경우는 '특별 실종'이 돼 3년이 지나면 실종을 선고 할 수 있다.

경찰에서는 집을 나간 사람에 대한 가출 신고를 받게 되면 본적. 주소. 성명. 생년월일과 사진을 첨부한 가출 인 표를 작성, 관할지. 파출소에 연락하고 컴퓨터에 이 사실을 입력 전국에 수배한다.

이때 가출 사유가 범죄 또는 사고와 관련돼 있다고 판단될 경우 수배와 함께 수사를 의뢰하며, 가출 신고 접수 후 1개월이 지나도 연락이 없을 경우 변사자 처리 등을 맡은 감식 계에 통보하게 된다.

경찰서에서는 내무부 예규에 따라 집을 나간 지 1년이 지난 사람에 대한 신고는 받지 않고 있다. 이는 가출 후 1년이 지났을 경우 경찰 수배 망에 포착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찰의 가출인 신고 업무에 관해 지극히 형식적이라는 비난도 없지 않다. 가출인 신고를 해도 신고 접수, 수배등 행정절차에 따른 사무 처리에 그치고 있을 뿐 적극적인 조사 활동에 나설 수 없으며, 임검 이나 검문 등을 통해 발견될 경우를 제외하면 범죄 수사와 병행한 가출인 조상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87년 광주. 전남도 내에서는 1천6백4명이 집을 나가 3백 70명이 집을 찾게 되었으며 1천 2백 34명은 아직도 수배 중이다.

5.18행 불자도 대부분 가출 신고나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형편이다. 행 불자 가족들 스스로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행정관청의 설득 또는 가족들도 모른 사이에 직권 말소되어 있는 경우다.

"화류계에 빠진 것 아니냐?"

"내 딸이 뻔히 희생 된지 알면서도 정부에서 광주 시민은 폭도라고 뒤집어씌운께 예전엔 신고 할 엄두조차 못했어요. 부상자나 사망자처럼 눈에 보이는 '물증'도 없은께. 자식 잃고 남 부끄럽고 세상도 무서워 그 동안 버젓이 제사도 못 지내고, 지 생일이5월19일이라 그날 밥이라도 떠놓고 내 마음속으로 기도만 했어요."

큰딸 남혜연씨(당시24세)가 80년 5월 이후 간 곳을 모른다는 이옥순씨(55.순천시)는 딸 이야기만 하려 해도 눈이 침침해진다며 눈물이 앞선다.

행 불자 본인 남혜연씨는 평소에 하나뿐이 이모 집을 수시로 왕래하였으며 80년 5월10일게 부터는 이모의 사회적인 활동이 잦아지자 이모의 가사 일을 돕겠다고 이모 집(광주시 지산동)에 갔다. 어머니 이옥순씨가 딸의 목소리를 마지막들은 것은 80년 5월15일 밤 9시께의 전화 통화, 순천으로 2-3일 후에 내려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집에서는 수차에 걸쳐 컴퓨터 조회와 여기저기 탐문을 해 보았으나 여전히 본인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본인의 행방이 불투명해지자 당국은 누차 '남혜연의 주민등록을 말소하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 그래도 이씨는 행여나 하고 딸자식을 기다리며 막연한 나날을 보내 왔다.

결국 남혜연은1984년 2월21일자로 직권 말소되어 버렸다. 당시 이옥자씨(남혜연의 이모)의 큰방 주인 최영순씨(48.광주시 지산 동)는80년5월18일 남혜연씨를 이모 집에서 보았고 순천 집에 내려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인우 보증을 섰다.

이옥순씨는 "순천시 동사무소 직원이 다른 인우 인을 불러 협박과 공갈을 한 뒤, 나에게도 '딸의 얼굴이 예뻤다는데 화류계로 빠진 것 아니냐' '혹시 일본으로 건너 간게 아니냐'고 인격적인 모독까지 서슴치 않았다."며 사건 처리 당국에 불만을 나타냈다.

이씨는 "길을 가다가도 딸과 비슷한 뒷모습만 모아도 핑 쫓아가 확인해 보았지만 다 아니었어…"하며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겠다고 일어섰다.

'인우 보증인 협박 일쑤' 주장

광주 시청 측은 심사 위원 10명을 선정, 5.18행 불자의 1차 서류 심사를 마쳤다. 심사 위원은 우 제인 심사 위원장을 포함해 이사 2명, 변호사 2명, 교수2명, 유족 회 대표2명, 부상자 회2명으로 구성되었다. 88년 12월31일 광주 시청에서 신고자 1백2명중 인정 17명, 재심 27명, 불인정 58명으로 발표된 결과에 대해 행 불자 가족 회 측은 반발, 시청 측의 심사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지난 1월 4일부터 민주 쟁취 국민 운동 전남 본부 사무실(광주시 충장로)에서 5.18행 불자의 정확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 시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심사의 기초 자료는 신고인이 제출한 신고서와 인우 보증인이 작성한 인우 보증서, 그리고 이 신고서와 보증서 경찰과 행정기관의 조사 서를 토대로 시청 지원 과에서 만든 '종합 의견서'가 중요한 판단 자료로 사용되었다.

"이번 행 불자 심사는 기다림이 죽음이라는 슬픔으로 바뀌어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기다림의 고통을 당해야 할지 기로에 서 있습니다."라고 행방불명 가족들의 모임인 5.18행방 불 명자회 회장 허청씨(51.광주시 황금동)는 안타까워한다. 허 회장은 "심사 위원들이 가장 중요한 심사 자료로 삼은 경찰 조사서나 시청의 종합 의견 보고서는 5.18행 불자가 아니라는 것만을 먼저 강조하여 논리성도 없고 말도 잘 못하는 행 불자 가족들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현지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신고인이나 인우 보증인에게 행한 폭언이나 협박, 유도 심문으로 작성한 경찰 조사서가 공정한 자료로 이용된다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라고 주장한다.

허 회장은 2차 심사 때는 서류 심사가 아닌 관련 당사자, 인우 인등에게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심사하는 청문 심사를 해야 한다면 1차 심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행방불명된 것이 8년 전의 일이라는 것과, 광주 항쟁이 10여 일에 거쳐 일어났던 것 때문에 가족들이나 인우 인의 다소 착각이나 혼돈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행정적으로 직권 말소나 사망신고가 되어 불인정 사유가 되는 경우도, 행 불자가 과거에 오랜 객지 생활이나 떠돌아 막노동 등의 생활을 해 왔다는 이유로 관청에서 직권으로 행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허 회장은 거듭 주장한다.

9년 전 일'6하 원칙 고수'는 곤란

우제인(우제인 정형외과 원장)심사 위원장은 "아직 심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워요. 되도록 이면 많은 사람을 인정 해주고 싶지만 한 사람이라도 5.18행 불자가 아닌 사람이 들어갈 경우는 무제가 더욱 큽니다."라고 심사의 어려움을 말한다. 또 "가족 회측에서 청문 심사를 원하는데 청문 심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경찰에서 윽박지르고 협박 하는등의 분위기에서는 말을 못하니까 심사 위원 앞에서 조근 조근 이야기하고 싶다는 게 행 불자 가족들의 요구지요."라고 한다.

광주 시청 지원 협의 담당관 문영식씨(58)는 "규정상 필요할 경우와 가족 회측에서 요구하면 청문 심사를 할 예정입니다. 5월 관련 행 불자가 한 사람이라도 빠져서는 안되고 해당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포함되어서도 안됩니다."라며 광주 시청측의 입장을 밝힌다. 또한 "최선을 다 하겠지만 마지막 절차까지 거쳤어도 억울하게 탈락된 사람은 사법 절차로 처리할 수도 있으니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5.18행 불자 심사 위원 전계량씨(5.18유족 회 회장)는 "돈 없고 힘없는 행 불자 가족 회 사람들이 사법 절차를 밟아 인정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심사위원 10명중 한 사람이라도 인정하는 위원이 나오면 재심을 해서 심사 결과에 대해 행 불자 가족들이 납득 할 때까지 심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사 위원으로서 최선을 다해야지 사법 절차로 넘긴 다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지요."라고 사법 절차의 비현실성을 주장한다.

전 심사 위원은 "5.18피해자를 심사 한다기 보다 5월을 심사한다"는 자세로 심사에 임해야 한다며"우리 심사 위원들 스스로가 신성한 5.18피해자를 심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행 불자 장본인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없는 것이 당연하고, 9년 동안 진실된 조사 한번 않다가 이제 와서 가족들로부터 6하 원칙에 의한 뚜렷한 입증 자료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행 불자 문제 처리의 핵심을 말한다.

일가족 4명이 함께 행방불명

행 불자 가족들은 행여나 내 부모 형제가 살아서 돌아올까 하여 애태우며 보낸 지가 벌써 8년. 김금희씨(36.무안군)의 경우 어머니, 동생2, 큰아들 등 일가족 4명이 모두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김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죽었으리라는 생각과 싸우며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행 불자는 금희씨의 어머니 임소례(당시 57세), 둘째 동생 김병균(당시 23세), 넷째 동생 김병대 (당시 14세),그리고 김금희씨의 장남 박광진 (당시 5세)이다.

이 가정의 비극은, 생계가 어려워 금희씨의 여동생 김금숙씨 (당시 23세), 넷째 동생 김병대 (당시 14세), 그리고 김금희씨의 장남 박광진 (당시5세)이다.

이 가정의 비극은 , 생계가 어려워 금희씨의 여동생 김금숙씨(당시19세)가 비닐 공장에 다니다 병에 걸리면서 시작되었다. 김금숙은 목이 붓고 음식물을 전혀 먹을 수 없는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7개월 동안 앓아 누워 있었다. 불치의 병으로 진단을 받아 죽기만을 기다리던 금숙이는 마지막으로 치료 한 번이라도 더 받아 보기를 소원하였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에서 살던 이들 가족은 고향 무안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80년 5월 10일 임소례, 김병균, 김병옥씨와 함께 내려오던 중, 금숙씨가 택시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가족들은 친지들과 함께 김금숙의 시신을 당일 오후 4시께 선산에 안장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객지에 돈벌러 나간 금숙이는 오고 싶어하던 고향 땅에 죽어서 오게 된 셈이다.

그후 80년 5월 20일게 벽제로 돌아가기 위해 임소례, 김병균, 김병대씨는 조카 박광진이를 데리고 무안역(당시 사창역)에서 10시30분 여수행 완행열차를 타고 광주로 출발하였다. 통상 무안에서 경기도 벽제를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이용 광주 역에서 내려 고속 버스 편으로 서울로 가곤 했었다. 김금희씨는 무안에서 광주까지 약 1시간 30분의 시간이 걸리니 일가족들이 12시부터 13시 사이에 광주 역에 도착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른 아이들은 다 유치원에 가는데"

당시 무안에서는 광주의 참혹한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단지 가끔 차를 타고 지나치는 데모 군중들을 보며 '광주가 시끄러운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다는 금희씨는 가족들을 무안 역까지 배응 했다. 마을 사람들도 이를 목격, 김대선씨(남.30), 김광연씨(45)등이 인우보증에 나서기도 하였다.

80년 그해의 농사는 거의 폐 농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금희씨 남편 박병식씨(44)가 아들 광진이를 잃은 후 농사를 전페 하고 술만 마시며 폐인이 되다시피 하였기 때문이다. 심할때는 정신 질환까지 일으킨 적도 있었다고 김병옥씨(31)는 매형을 말한다. 그러던 80년 7월게 금희씨가 사는 동네에 몽탄 북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이 생겼다. 광진이도 유치원에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던 터, 옆방에 사는 광진이와 동갑 나기가 유치원에 입학하자 박병식씨는 광진이생각이 더욱 치밀었다. 아버지는 평소 광진 이에게 잘해 주지 못함을 마음 한 켠에 두고 늘 괴로워했다. 유치원이 생긴 후 광진이 아버지는 광진이 사망신고를 하라고 성화였다. 어려운 살림에 맛있는 과자 한번 못 사주고 사랑을 쏟지도 못했던 부정의 깊은 고랑 때문이었을 거라고 금희씨는 남편의 심정을 말한다. 광진이를 잊고자 사망신고를 빨리 하라는 남편의 독촉에, 사유를 무엇이라 하느 냐니까 "계란 먹고 죽었다 해 뿌러"라고 광진이 아버지는 말했다. 금희씨는 평소 광진이를 벽제에 보낼 때 늘 계란을 쩌 주었단다. 한번은 고속버스에서 광진이가 계란을 먹다가 급체 하여 혼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말한 것이다. 그후 동네 사람들이 물으면 5.18관련자에 대한 정부측의 학대 때문에 그냥 '계란 먹고 죽었어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80년 9월 김금희씨는 광진이 사망신고를 마쳤다.

그뿐 아니라 혹 초상집에 가게 되면 '우리 엄마 상여라도 띠며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금희를 더욱 슬프게 한다. 금희씨는 '빈 무덤이라도 있어 우리 부모 형제 성묘라도 가고 싶다'고 소박한 소원을 고백한다. "난 절대 안 울어, 동네 사람들이 나더러 독하단 소리도 해…" 하며 금희씨는 검은 테 안경 밑 불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

80년 5월이 지난 6개월 후부터 금희씨네 가족들은 마음 둘 곳이 없어 이모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신앙생활에서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85년에 신고하려 하자 안 받아 줘

그러던 85년 5.18민중 항쟁 피해자 신고를 한다는 소리를 동네 사람들과 큰아버지로부터 들은 금희씨는 몽탄 지서에 찾아갔으나 '여기서 물으면 저리 가라, 저리 가서 물으면 또 저리 가라'며 서류도 받아 주지 않았다. 어찌 할 바를 모른 금희씨는 사법 서사에 문의, 법원에 가보라는 말을 듣고 법원을 찾았으나 법원도 지서와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네 사람이나 보상금을 타면 한 사람은 평생 놀고먹겠구만"하고 빈정거려 가슴을 난도질당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금희씨는 관료들의 처사를 원망하며 '더 이상 신고 안 할란다'고 포기를 하였다. 그일이 있은 3년이 지난 88년 5월 금희씨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도움으로 전남 도청 지원과에 신고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사청측의 심사에 의해 박광진은 '계란 먹고 죽었다'는 것과, 임소례. 김병균. 김병대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김병옥씨(31.무직)가 증언했다는 사유로 불인정 되었다. 그러나 김병옥씨는 자신은 임소례. 김병균. 김병대씨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증언을 한적도 없고 3명씩이나 교통사고가 났다면 서류나 증거가 있을 터인데, 시청에 올라간 서류에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병옥씨가 말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조카 병진이의 죽음도 88년5월 실종자 수색 신청서를 냈을 때 이를 조사하러 온 경찰이 동네 사람한테 들었다며 '광진이가 계란먹고 죽었다는데 묘는 어디에 있느냐''거짓이 있으면 법적 조치하겠다'며 위험했다고 말한다.

"살아 있다면 왜 여태 안 돌아 오것소. 그것도 4명씩이나." 하면서도 아직도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고 김병옥씨는 털어놓는다.

김씨는 "인간의 탈을 쓰고 잔인 무도하게 광주 시민을 죽이고 집권한 전씨가 대 국민 사과 발표문을 보고치를 떨었어요. 그후 노정권의 발표도 전씨와 다를바 없습디다. 광주 항쟁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5.18광주 항쟁의 사망자, 부상자, 행 불자들의 명예회복과 국민 앞에 사과하는 길만이 광주의 아픔을 치유할 것입니다. 광주 문제의 책임을 느낀다면 전씨를 포함한 현정권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해요."라고 힘주어 말한다.

광주시는 지난해 5월18일부터 6월30일까지 5.18피해자 추가 신고를 접수, 7백4명(사망10, 부상자 5백81, 행 불자 1백2, 기타11명)이 추가 신고되었다. 추가 신고된 부상자 5백 81명중 5백12명이 정신 피해자로 인정되고 64명은 불인정, 5명은 결정이 유보되었다.

현재 5.18 광주 민중 항쟁 부상자들은 '5.18부상자 회를 만들어 활동 중이며, 5.18사망자 가족들도 '5.18유가족 회'로 활동 중이다.

'행 불자 문제는 광주 문제의 핵심'

심사 결과에 항의 농성 중인 행 불자 가족들은 정부측에서 행 불자 수를 의도적으로 줄이려 한다고 주장한다. 즉 '행방 불 명자 축소 조작은 제 2의 광주 학살'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혹은 암매장 발굴 현장에서 총상 흔적이 있는 유골이 나오고, 그곳이 또한 공수부대의 주둔지였다는 유골이 나오고, 그곳이 또한 공수부대의 주둔지였다는 점등이 밝혀지면서 더욱 짙어졌다. 그 동안 정부측의 '암매장 한 적 없다'는 주장은 80년 5.18당시 7공수33대대 요원으로 광주 지역 계엄군으로 투입됐던 최영신씨(당시 26세. 중사)가 지난 1월 16일 양심 선언을 함으로써 더욱 불신을 샀다. 최씨는 양심 선언문에서 당시 광주시 월남동 주남마을에서 2명의 부상자 학살에 대한 목격담을 발표했다. 결국 이런 목격담과 시민들의 제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산야 어디 엔가도 암매장 현장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17명이라는 행 불자의 숫자는 그것도 현재 망월동 공원 묘지에 묻혀 있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열사의 묘 11구를 제외하면 고작 6명이 5.18당시 행방불명됐다는 것이 된다. 시청에 공식적으로 접수된 1백 2명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난다.

민주 쟁취 국민 운동 본부 국민 신문 편집장 선대원씨(30)는 " 그 동안 8년이나 지났고, 광주 전지역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정확한 기억을 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측에서 8년이 지나도록 정확한 조사 한번 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행 불자를 선별한다는 점이 무제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망자들이 대부분 저소득계층과 주거가 일정치 않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5월18일부터 5월27일 내에 행방 불명 된 자로만 결정하는데도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광주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보상금으로 얼렁뚱땅 광주 문제를 넘기려는 정부측의 태도가 이제는 행 불자 숫자를 줄이려 하는 것이죠."하며 5.18행 불자 문제는 '광주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문픙지만 들썩여도 놀라는 가슴

문픙지만 들썩여도 놀라 깨 가슴을 헤며 8년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 모두들 '아직 기다리노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그것 또한 한 가닥 애절한 소망일 뿐이라는 걸. 그들의 적신 눈자위가 먼저 말한다.

행 불자로 인정되니 불인정 되니를 따지기 앞서 행불자 가족들이 겪는 아픔은 광주 민중 항쟁에서 비롯됐다는 사실.

5.18행 불자 문제를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줌으로써 또는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 불인정'으로 매듭지어질 수 잇는 일인가, 손금순씨(56)의 외침이 뭉클 가슴에 와 닿는다.

"돈이고 뭐고 다 소용 없은께, 5.18 때문에 행방불명된 우리 자식 정부에서는 찾아 주고, 산사람 못 찾으믄 암매장 장소라도 밝혀야 되지 않것소. 날도 추운디 어느 땅에 묻혔는가 모르것소. 전씨는 맺힌 우리 맘 풀어 주고 처벌받아 마땅해요. 지금이라도 우리 자식이 돌아만 온다믄 좋것소. 돈과 자식을 누가 바꾼 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