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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그때 트럭에 실린 시체는 어디로 갔을까?"

본문

송하동에서 학살된 수십구의 시신들은 어딘가에 암매장 됐다



"그때 트럭에 실린 시체는 어디로 갔을까?"

박테리아의 끊임없는 분해 활동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낸 유골은 과연 80년 5월의 역사일까? 사람들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면서도 가슴 한 면이 답답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날의 상처를 몸소 겪었던 이들은 9년만에 드러내는 뼈다귀를 보고 단정을 내리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광주에서 나주로 빠지는 길목에 사는 김복동 노인(당시60세 , 광주시 서구 송하동 105)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22일 새벽 일성 부락 앞 버스 4대 몰살당해

벌써 9년 해가 바뀌어 칠십을 앞두고 있지만 김노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송하동 마을에서 일어난 무고한 학살 극 세상에 알려지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은 가시기는 했으나 그 조금나 진실이 알려진 후에 더 큰 응어리가 훨씬 무겁게 엄습 해 왔다며 그날의 참상을 얘기했다.

『새벽 4-5시쯤 됐을 께요. 갑자기 터져 나오는 총소리에 무서워 온 식구가 떨며 이불을 둘러쓴 채 뜬눈으로 지샜지요 . 날이 샐 무렵 4명의 젊은 사람이 허겁지겁 피묻은 채로 뛰어들어와 집안 식구인 것처럼 꾸며 구했는데, 그 사람들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아침에 조심스럽게 대문밖에 나가 보니 집 뒤의 숲은 물론 금당산 기슭은 온통 군인들로 시커멓게 깔려있습니다.』

학살 현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기에 누구보다 비극의 참상에 몸서리치는 기억을 토해 내듯 하면서도 정확한 날자 까지는 기억 해내지 못한 것이 기자를 안타깝게 했다.『경황이 없었 지라우, 지금은 화단이 된 저곳이 당시엔 물논 이었고 논 가장자리로 난 구도로 자리에 벌통이 70여개 있었어요. 그 중에 내가 키우는 벌은 열 두어 통에 불과했지만 벌을 핑계 대고 군인들에게 허락을 맡아 논에 갔더니 핏물이 낭자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도로에 있는 1대의 버스 안에도 4사람이 죽어 있습디다.

또 벌통 못 미친 어덕 에도 두 사람이 죽어 있었는데 커브길 근처에 기울어진 3대의 버스는 무서 위서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곳에도 당연히 시체가 있었을 것이라 봐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당시의 참상을 애기하는 김 노인은 군인들이 왜 같은 동족인 그들을 죽였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또 그 시체를 어디에 암매장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점심때쯤 됐을 까… 지에무시(GMC)군 트럭 한 대가 담요를 덮은 채 나오는데 펄럭이는 담요 밑으로 시체들이 실려 있습디다. 남평 쪽으로 가는 것을 봤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 지요』

김노인의 예기를 듣고 헤아려 보니 송하동 일성 부락 앞에서 시민군 버스 4대가 몰사 당한 사건이 일어난 시각은 대략 80년 5월22일 새벽 4시쯤. 대검과 총으로 광주 시민을 학살하던 공수부대와 계엄군의 잔학상에 맞선 시민들의 전투력도 자연스럽게 무장 투쟁으로 발전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처절할 이만큼 피의 댓가에 대한 당연한 것이었고 갑오 농민 전쟁으로부터 이어온 역사의 숨결 이어받은 것이었다.

11공수 여단 전 교사 충돌로 수많은 군인 사상

피로 물들인 석가탄신일 80년 5월21일. 공수 부대의 잔학 스런 학살 난동에 시민들은 죽음을 뒤돌아보지 않고 무장으로써 응징할 것을 다짐했다. 시민들을 가득 실은 시위 차량은 광주를 벗어나 나주, 목포, 화순, 강진, 해남 등 전남 각지역으로 질풍처럼 내달아 공수부대의 학살 만행을 전파하는 한편 현지 경찰서 등을 습격 자체 무장을 하여 도청 앞으로 집결했다. 비무장의 시민들의 쩔쩔매던 공수부대는 총 의로 무장한 시민 군에게 허물어져 마침내 21일 오후5시30분 도청에서 총퇴각 결정을 했다.

도청에서 도주한 계엄군은 21일 오후 늦게 부터 광주에서 시외로 빠지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며 광주를 시외로 빠지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며 광주를 고립시키기 시작하여 이를 뚫고 나가려는 시민 군과의 잦은 접전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각 지역으로 나갔던 시민 군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광주로 진입하다가 매복한 계엄군들에게 처절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22일 새벽 4시쯤 송하동 에서 금당산 기슭에 매복 해 있던 전투 교육 사령부 교도대에 의해 몰사 당한 4대의 차량도 그 일례이다. 당시 사망자 수에 대해서 송하동의 한주민은 새벽에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송하동의 한 주민은 새벽에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시체를 어둠을 이용해 처리했을 가능성이 짙다며 버스 한 대에 40여명이 탔다고 해도 최소 150-200여명은 죽었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망자 수에 대해 김노인은 시위 버스가 많이 오갔 으나 가득 타지는 않았고 십 여명씩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며 적어도 30여명은 죽었을 거라고 조심스레 얘기한다(김노인이 확인한 시체는 9구). 이에 대한 부근의 주민들의 얘기도 공통되게 나타났으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헬기에 싣고 간 시체 어디로 빼돌렸나?

잔잔하게 얘기하던 김노인이 미간이 어느새 더욱 긴장되어 있었다『세상에 그 며칠 사이에 그런 난리가 없었오, 꼭 이틀 후 엔가 또 총소리가 콩 볶는 소리처럼 들리더니 공수부대들이 어지럽게 설치고 다니데요. 다름이 아니라 금당 산에 진치고 있던 군인들하고 다른데서 나타난 군인하고 싸움이 벌어졌는데 '쾅'하고 포 소리가 나고 살려 달라는 아우성 소리가 나고 헬리 곱터 소리가 들리고 정신이 없었지요』

이 사건은 21일 도청 퇴각 후 주남마을에서 주둔했던 11공수 여단이 퇴각하던 중 금당산 기슭에 주둔하고 있던 전투 교육 사령부를 시민 군으로 잘못 알고 군인끼리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었다. (김노인이 들었던 포 소리는 3.5인치 로케트 포 및 크레모아 폭발 소리였음이 판명됨), 그 사건으로 길 건너 마을의 권근립(당시 26세 포항 모회사 근무)임병철(당시26, 남선 연탄 공장 운전기사) 김승후 (당시19, 가구점 공원)등 3명이 사살되고 다수의 군인들이 사살 당했다.『군인들이 어찌나 많이 죽고 다쳤는지 5-6대의 헬리 곱터가 서너 시간 동안이나 시체와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금당산 기슭에 뜨고 내렸지요. 난리도난리도 많이 겪었지만 5.18과 같은 난리는 없었다』며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이 땅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진실을 파헤치고 쌓인 응어리를 풀어야 할 것이라며 김 노인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얘기를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