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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항쟁 행방불명자 가족즐의 '피섞인 말들'

본문

광주 항쟁 행방불명자 가족즐의 '피섞인 말들'

주검도…부상도…확인도 없이 입봉한 채 보낸 8년 세월



"……"

아버님 전 뼈를 빌고 어머님 전 살을 빌어 이승에 태어나 인생 공덕 빌었건만

북망산 들어갈 제 돌아보니 통분하다.

……

이 늙은 어미 너를 찾아 산기슭 외진 응달

후미진 골골 마다

봄이 오면 너를 찾아

온 몸뚱이 산등성이 되도록 뒤적였다.

내 새끼야 어디 있냐

내 새끼야 어디 있냐

하소연도 소용없고

애걸복걸도 덧없단다

내 죽어 죽은 송장 아무도 돌려주지 않더구나

-하종오 시전 '어미와 참꽃' 중에서

이 세상 원통하고 절통해서 어찌 살까, 원통해서 어찌 눈감고 죽을까 며 울부짖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지난5년 동안 온몸이 눈이 되고 귀가되어 '내 핏줄'을 기다리던 5·18 광주 의거 희생자 가족들은 해마다 5월이 되면 그 악몽에 더 시달려 왔다. 천년이나 군림할 것처럼 짓밟고 얼리던 그 엄동도 봄이 되면 물러가게 마련이었다.

정부가 5월 18일부터 6월 18일까지 한 달간 제2차 광주 항쟁 행방 불명자 및 부상자 추가 신고를 받자 실시 이틀 만인 5월 20일 현재 사상자 51명이 새로 신고했다.

이는 정부가 지난 85년 6월 사망자는 1백91명뿐이 라고 단언했던 수치와 비교해 볼 때 벌써부터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같은 추가 신고자는 갈수록 증가할 추세다.

왜 찔렀지 ? 왜 쏘았지 ?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

지난달 10일 광주 YWCA에서 창립된 행불자(행방 불명자) 센터에 찾아 든 신고자가 일 주일 만에 약40명에 이르고 하루 2-3건씩 매일 접수되고 있다는 센터 측의 발표가 그 가능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물론 민간단체와 관청에 이중 신고할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절대적 수치가 높아 가는 것만은 확실하다.

행 불자 센터는 오청동(五靑同·5·18 광주 의거 청년 동지 회의 약칭·회장 박경순·26)의 노력으로 탄생된 것. 86년 4월 5일 발족한 오청동은 이 회의 회지 '무등산 깃발' 발행시 부터 행 불자와 부상자 및 암장 장소를 찾고 있다는 광고를 냈다. 지난해 6·29 전 벌써 행 불자 5명의 신고를 받은 데 이어 그 이후 27건에 이르렀다.

이 같은 오청동의 주선 하에 그간 소극적이었던 행 불자 가족이 연락을 갖기 시작, 창립 전 4월 하순과 5월초 두 차례의 회동을 갖고, 매달 10일을 정기 모임 일로 정하였다. 이에 앞서 지난 2월 14일에는 신고해 온 부상자 1백50여 명이 5·18광주 민중혁명 부상 동지 회를 창립했다.

행 불자 센터 창립 회에는 전계량 유족 회장, 정동년 국민운동본부 상임 공동 의장, 안성례 민가 협회장과 많은 민주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태영 진상 특위 장의 사회로 진행되면서 회장에 임준배 씨, 총무에 허청씨 등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그간의 서로의 증언을 들고 그들의 멍든 가슴은 어떤 것으로도 치유할 수 없으나 학살의 진상 규명과 어딘가에 암장돼 있을 시신을 거두고 학살자를 처단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것이라는 인식을 나눠 가졌다.

이날 행불자 20명과 유족 회원, 오청동 회원등 40명은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청까지 행진, "내 아들을 살려내라" "내 아들을 찾아 달라"고 시위했다.

"시기적으로 잘 만들어 졌습니다. 지금까지는 마음으로만 앓았지만 이젠 그들의 권리 옹호 단체가 되겠지요"

유족이기도 한 정 진상 특위 장의 행 불자 센터 창립 의의 설명이다.

지난 18일 오후 광주시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는 광주 의거 8주년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서 임 회장은 "우리 행 불자 가족들은 온종일 대문을 열어 놓고 우리 자식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왔다" 며 많은 군중 앞에서 행 불자 센터의 존재 이유와 그 활동 상황을 알린 것이다.

그러나 이 센터는 이제 막 결성된 상태라 독자적 활동이 미흡, 오청동 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오래전 부터 신뢰성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일을 추진해 왔기에 그 활동만은 좋은 성과를 거둘 것으로 오청동 임원들은 믿고 있다.

"우리에게 확인된 명단은 더 있지만 우선 25명만 행 불자 센터에 넘겨주었습니다. "

정 특위장은 그런 확실한 자료 위에 모든 일을 추진하고 있기에 이번에는 '특별' 이란 단서를 붙였다며 행 불자 가족들이 관청보다는 센터를 찾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지난날의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는 것.

85년 언론에 잠깐 신고 접수를 알리고서, 당시 윤성민 국방 장관이 희생과는 더 이상 없다고 말했던 정부의 처사가 또다시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바로 그것.

당시 신고를 받는다고는 했으나 여론이 비등하니 해본 것이지 진정한 실태 파악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 뭇 사람의 주장이다. 행 불자 가족의 한 사람인 김형태 비는 "망월동 묘지의

묘 수효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부렸던 정부가 아니었느냐"고 반문한다.

행불자 센터를 찾은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관의 위협이 두려워 신고는커녕 겉으로 드러내기도 꺼릴 정도였다고 한다.

80년의 비극에 유족 회, 행 불자회, 부상자 회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들 모두는 가을에 못을 박고 그 아픔을 않고 있을 뿐이다. 유족들은 시신을 찾아 망월동 표지에 안장, 억울한 영혼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인을 뿐이며, 행 불자 가족은 그러지도 못한 채 한 많은 세련을 기다림 속에 지새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부상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날의 상혼을 현실에도 간직하고 있다. 그러기에 "광주 비극은 써도써도 끝이없다"고 한 주부 이 소남(34)씨는 오열하며, "정부는 우리가 본 그대로의 진상을 밝히며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썩은 시체라 해도

내 자식 못 알아보겠소 ?

조카 임옥환(당시 18, 조대부고)을 잃었다는 임동준 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는 임준배 행불자 가족 회장의 동생으로 몸소 조카의 행방을 찾으며 그간의 형님집 생활을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카는 전남 녹동 중학을 장학생으로 졸업했습니다. 우리 집안의 끔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여수서 살고 있었어요. 5월 18일 형님이 오전 광주에 올라가, 외식한 것이 부자간의 마지막 상봉이었답니다. 형님은 '네 친구들이 아무리 끌어들여도 데모에 가담하지 말라'고 당부까지 하셨대요

그런데 23일 여수에 있는 저에게 전화가 왔어요 22일 집에 오겠다고 전화가 왔는데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불길한 예감이 스쳤습니다.

조카는 당시 조대부고 뒤에 있는 불광사의 암자에서 서울대 합격을 목표로 공부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때는 벌써 시내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여서 고향 녹동을 가려던 화순까지 몰래 빠져나가야 했습니다. 버스가 화순까지밖에 오지 않았어요 계엄군의은 가택 수석을 하며 '학생이 나오면 죽여 버린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학생들은 농 안에 숨기도 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조카는 전남 기계 공고 학생, 조대 생 둘 4명이 고향으로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답니다.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겠다는 심정이었답니다. 당시 함께 갔던 학생들의 말에 따르던 그들이 지원동 뒷산으로 숨어 가던 중 공수 부대가 '서라' 소리를 지르며 총 두 발을 쐈대요 대학생은 대학생끼리 고등학생은 따로 뛰었습니다. 조카는 집에서 공부한다고 책가방까지 챙겨 들고 있었답니다. 이 책가방은 나중에 찾았습니다.

위협 사격에 겁을 먹은 한 학생은 손을 들고 나갔으나 내 조카는 그대로 뛰었는데 연이어 총소리 두 발이 들렸답니다. 아마도 그 총격에 사살된 것 같아요

6월 2일 광주에 올라와 도청 앞 시체가 안치됐던 상무관에 갔지요 이미 치운 상태였습니다. 모든 병원을 다 찾았습니다. 형님과 형수도 '아무리 부패해 버린들 내 자식 못 알아보겠느냐'며 모든 시체를 다 거들쳐 보았어요 당시 누구나 마찬가지로 형님·형수는 자기 정신이 아니었어요

형님은 시골서 버스를 대절해서 시체에 입힐 옷까지 준비 해 왔어요. 시내 안치소에서 못 찾고 산에서 찾아보려 했으나 계엄군이 입산 허가를 안 해줬습니다. 형님은 지산동 파출소로가, 사정한 끝에 허가를 받았 습니다. 그때는 경찰관도 희생자를 두둔할 정도였어요.

지원동 뒷산 채석장의 뱀 사당 주인을 이틀간 고용해서 주위를 샅샅이 뒤졌는가 하면 고사리 따는 아낙네의 말을 듣고 찾기도 했어요 .군 생활을 강원도 치악산 험준한 곳에서 해봤지 지원동 뒷산은 그보다 더 험했습니다.

한곳에서 계엄군이 버리고 간 소줏병, 찐빵, 면수건, 방망이, 방패를보았어요 내 조카가 여기서 희생 됐는가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아마 부패한 시체를 쐈던 듯 싶은 시체 크기의 비닐을 3개나 발견도 했어요.

혹시 가매장이나 됐나 싶어 땅을 짚어 보기도 하구요 어둠이 깔릴 때까지 찾았으나 허탕이었습니다.

당시 같이 있었던 학생을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그 현장을 다시 보는 것이 두렵다고 가기를 꺼렸습니다.

형님은 그런 일이 있기 전 몸이 뚱뚱한 체격이었습니다. 그 후 대쪽처럼 말랐어요 요즘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통곡의 세월이었습니다.

이렇게 잃은 자식을 어느 순간 돌아올까 기다리는 부모에게 사망 신고 하라는 통보가 나와 속을 뒤집어 놓곤 했어요 어느 부모가 행방 불명 이다 고 사망 신고를 할 수 있을까요 당국은 지금까지 해 오라는 증거 서류는 다 해다 주어도 유족으로 인정을 해 주었던가요 ?

징집 문제도 있습니다. 한창 나이에 없어졌으니 서류상으로 기피자이지요 자꾸 나옵니다. 조카의 경우 형님이 면사무소 친구가 많아 적당히 해결이 된 듯 하나 시골 무식한 가정의 경우, 통보해도 묵묵부답이니 공무원들이 임의로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독촉에 쫓겨 사망 신고를 하려 하면 신고 늑장이라고 과태료 2만 원을 내란 다나요?

뼈라도 찾아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고 싶은 마음뿐, 무슨 보상을 받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원혼을 달래느라 매년 5월 23일이면 제사는 지내고 있지만 제사 때마다 이만저만 가슴이 아파야지요 그간 여러 가지 사정으로 행방 불망자 신고를 못 했다가 이번에 했습니다.

내가 못 간수해 죽었다

죄책감으로 죽은 할머니

지난달 19일 광주 YWCA 6층 행불자 센터에서 만난 김형태씨도 조카 기운(당시 18세. 송원고)의 죽음에 치를 떨고 있었다. 그는 형님 김형옥 씨(55)가 고홍에 살고 있어 거리 관계로 자신이 대신 이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조카 기운이는 할머니와 자취하며 살았어요 21일 어머니로부터 '기운이가 현장에 갔다 와서 또 나간다고 하더라, 느그 들이 와서 잡아 앉혀 놔라'라는 연락이 왔어요 저는 그 때

농사철이라 올라오지 못했지만 설마 했지요

22일 또 연락이 왔어요 당시 상황이 험악해서 집에 들어오기가 어려 올 것으로 짐작하고 기다리면서 아무런 소식이 없어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20일 조카가 집에 들어왔을 때 할머님께 '앗따 ! 선배님들이 고생합디다. 우리는 어리지만 내일 가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말씀을 듣고 일은 터졌다고 믿었지요

내 동생과 함께 오토바이 타고 올라왔어요 형수님을 모시고 올려고 했으나 심장이 약하신 분이라서 충격을 받을 까 봐 우리들이 찾기로 했지요. 트럭에다 실어 암매장했다는 별

의별 소문이 나돌아 화순 너릿재란 곳을 두 형제가 가서 이틀간 찾았으나 허사였어요

할 수 없이 형수님을 오시라고 했어요 첫날 상무관에 가니까 저녁에 오라고 해서 다시 가니 벌써 문을 닫았어요. 썩은 냄새가 너무 역해 아마 유해 안치실을 빨리 닫았는 것 같았

습니다. 형수님이 시골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했더니 다음날 9시까지 오라는 것이었어요 다시 가봤 더니 밤새 시체가 거의 빠져 나갔 더래요

일 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어요 당시는 까닥하면 폭도로 몰고 해서 아무런 하소연도 못 하고 85년 부분적인 신고 접수에 따라 도청에 신고했습니다. 학교장, 같은 반 친구, 담임 선생님, 자취방 주인 등 증인의 증언을 토대로 다른 8명과 함께 도청에 신고했습니다.

여론이 비등하니 형식적으로 받은 것 같아요 그로부터 3년 후 어머니는 손자를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홧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형수님은 후유증으로 병이나 지금도 병원 출입을 합니다.

시체를 확인, 찾은 사람은 묘를 쓰고 술잔도 붓고, 슬플 때면 찾아가 통곡도 합니다. 부상자들은 살아서나 있습니다. 구속자들은 면회라도 갑니다. 그러나 우리 행불자들은 어디다 대고 통곡할까요?

시청이나 다른 기관의 관계자들은 매장 장소를 안다고 합니다. 전임자들이 분명히 인수 인계를 했을 테니 까요 그런데도 밝히지 않아요 그래 30여명 이 시청에 쫓아가 '불량배 '

인가 '김양배' ( 전 광주시장)인가를 면담하려 했더니 그는 도망가고 대신 기획 실장과 만났어요 그가 나중에 시장 면담을 알선하겠다고 해서 점잖게 돌아왔어요 김 시장이 국무총리

를 만나 모든 것을 보고했다고 하니 두고봐야지요.

현재 암매장에 관한 많은 제보가 있어요 이번 27일 광주 행사가 모두 끝나면 발굴을 서두를 것입니다. 내 뼈 누구 뼈 가릴 것 없이 누구의 뼈라도 나오면 망월동 묘지에 묻자고 결

의했어요

형님 댁을 보면, 저 놈들 씹어 먹어도 분이 안 풀릴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정당 방위로 살인해도 감옥형 아니면 사형인데, 정국 안정을 한다고 그 많은 사람들을 죽여 놓고 권좌에 않아 변변하게 웃고 있는 놈들과 그것들이 사랑이라고‥‥ 비록 우리는 없이 살아도 비열한 짓은 못해요 죄 값은 언제나 받을 것입니다.

실제로 행 불자가 계속 터져 나오는 것이 그렇잖아요 그간 가난해서 각서 받고 돈 때문에 입을 봉한 사람도 많아요

모든 진상은 국회에서 규명되겠지만 국회는 국회고 만일의 경우 광주 시민·전남 도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민주 시민들은 그대로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독신 누나를 잃은 허청 행불자 센터 총무는 지금도 누나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 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누나의 거주지는 주민등록부에는 서울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광주시 우산동에서 살았습니다. 혼자서 교회와 식당을 전전하며 살았어요 5월 19일이 마지막 본 날입니다. 아침 식사 후 나가 무소식 입니다.

모든 병원을 돌아다니며 시체를 뒤졌습니다. 친척집에가 있나 싶어 연락도 해보았습니다. 허사였어요.

저와 함께 병원을 다닌 사람도 있습니다.

적십자 병원의 창고, 철책 선반은 2층으로 돼 있었고 태극기로 덮여 있었지요 머리가 없는 시체, 몸의 반이 없어진 시체들을 보며 처음에는 무서움 증이 들어 좀 망설였어요 그렇지만 꼭 찾아야 한다는 마음을 다져먹고 안에서부터 뒤적이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동족끼리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싶어 가슴이 마구 떨렸습니다. 한 남자는 시체를 찾다가 사시나무 떨듯 손을 떨며 발을 못 떼고 서 있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나의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어머님에게도 쉬쉬했습니다. 최근 그 사실을 아신 어머님(90세)은 병석에 누워 계십니다. 정부는 하루 빨리 시신이 라도 찾게 해주어 영혼이라도 달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해는 비도 많이 왔는데

어느 풀섶에서 비를 맞고‥‥

둘째형을 잃었다는 정 특위원장은 자신이 아마 전국에서 가장 멀리 연행된 기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박4일 동안 제주도에까지 연행 돼 당하던 고초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시 광주시에 투입된 군은 진압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고 죽이려고 왔던 놈들입니다. 아니 짐승들입니다. 둘째형이 사망하면서 가정은 파탄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정부 발표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저희들도 당시부터 자료를 수집했으므로 단계적으로 발표할 결심입니다. 암매장의 경우 단 한 구가 발굴돼도 숫자적 개념을 초월한 큰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한때 직장에서 쫓겨났던 그는 행불자 가족들에게 불편하시더라도 ①주민 등본, 호적 등본(각2통), ②인우보증(2), 주민등록(2),③ 실증 신고 용지,④ 법원 제출 서류 등을 준비해 나오도록 요망했다.

자식에게 큰 죄를 지고 있다는 한 어머니가 있다. 당시 23세의 3남 1녀중 막내아들 남석이를 잃은 전광옥씨(58)가 바로 그 사람 다른 사람들은 시체를 찾아 묘를 썼는데 어느 골에 버려져 뒹굴고나 있지 않나 언제나 떠오르기 때문이란다.

"5월 22일 새벽 5시경 총을 들고 집에 들렀다가 나간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현시국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집을 나갔어요

80년 광주 일고를 졸업한 후 같은해 3월 인천 노동부 국립 중앙 직업 훈련원 용접과에 입학했답니다. 사태 당시 학생 대표로 시위를 하다가 5월17일 휴교령이 발표되어 그 날 저녁

광주 집에 돌아왔어요 광주에서 시위에 가담하던 중 5월 21일 오전 11시경 집을 나갔습니다. 그 애가 군용 지프차를 타고 가는 것도 목격됐어요

그 날 밤엔 불도동 다리에서 총을 메고 경비 중인 그애 모습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이튿날 오후 3시경 그애의 형 친구들이 금남로에서 그애가 총을 메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부모님 걱정하시니 집에 가도록 타일렀 답니다. 그 이후 소식이 없어 전 가족이 나서 찾았으나 헛일이었습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당시 도청 앞에서 어떤 아가씨 둘 이가 펄쩍펄쩍 뛰며 울더 래요. 그 날 밤 아버지 제사인데 갈 수가 없어서 였다고 했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을 포함한 학생들이 자신들이 데려다 주겠다며 지프차를 타고 가다 기습을 당해 몰사했다는 것입니다. 아가씨들도 다른 두 친구도 시체가 확인됐으나 우리 애는 없었어요

이런 모든 정황으로 봐서 우리 애가 광주 시내서 활동 중에 실종된 것이 분명하지만 도경 감식과는 광주 항쟁과 관련이 없다고 85년 11월 통지를 보내 왔습니다. 85년 8월 부재자 신고(신고 번호 211호)에 따른 조치 였습니다.

그 애 생일이 음력 4월 초파일입니다. 우린 원래 불교 신자로서 그 때도 고향인 송정리에 있는 절에 가려다 친구가 불려서 나간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지금은 7월 백중과 동짓날이면 절을 찾아 고혼을 달랩니다. 물론 우리가 행불자 로서는 최초로 유족회에 참가, 망월동에 가묘를 정하고 있지만 시체를 못 찾았다고 유족으로 인정하지 않은 당국의 처사가 괘씸합니다. 망월동에 우리와 함께 가묘를 가지고 있는 초광수 겨와 함께 민화위에 참석한 것도 바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체는 못 찾아도 역사에 남게 위령탑을 올려주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원치 않아요

아들을 잃고 3년 동안은 정말이지 미쳐서 돌아다녔습니다. 그해같이 비도 많이 왔을라구요 어느 나무 밑에 배만 남아 썩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울음)‥‥ 그 마음을 엇따 대고 호소하겠습니까? 정말 말 그대로 갈기갈기 찢긴 마음이었습니다.

'자식 3명이 중합니까 잃은 하나가 중합니까'라는 한 스님의 말씀을 듣고 요즘은 파탈 하고 있지만 꼭 돌아올 것만 같아 기다려지는 마음 어쩔 수 없답니다'

나는 죽더라도 그놈들

꼭 잡아먹고 죽겠소

1남5녀의 독자를 잃고 몸져누운 이점순 씨. 당시 21세난 용석군은 이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어머니 의 마음에 못을 박고 있다.

"그애는 고등 학교 시험에 떨어진 후 직장도 없는 채 79년 방위 소집 영장이 나왔어요 아버지는 가야 된다고 타일렀으나 그애는 나이가 한 살 더 높게 돼 있다며, 기피했습니다.

저는 양동 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었습니다.

그애는 가금 어미에게 와서 용돈을 타 가고 했는데 15일쯤 아마 마지막으로 4천 원을 얻어 갖습니다. 그 이후 소식이 없습니다.

그간 우리들은 못 배워 무식해서 신고하는 것도 모르고 또 자식이 기피자 차서 법이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놈의 징집 영장도 85년도까지 나오면서 아이를 어디다 감췄느냐고 남편이 많이 불려 다녔지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한 처지라서 자꾸 사망 신고 하라는 말을 듣지만 아직 안 했어요 찾을 만큼 찾았지만 헛일이었고 이번에는 옆에 사는 사람들이 신고하라고 해서 했답니다

이제 몸이 아파 장사마저도 할 수 없는 두 노인은 광주시 서구 농성동의 허름한 집에서 기자를 맞으며 가슴 아파했다.

그런가 하면 목숨을 부지했지만 마치 전형이나 받은 듯 병마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슬픈 사람들이 있다.

종암면에 살고 있는 김영묵 씨(당시 58세 )는 오른팔을 잃었다. 데모나 총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순진한 농부였다. 그는 그 후 정신이 온전치 못해 이야기의 맥락을 잡지 못한다며 아내 엄금지 씨가 당시의 상황을 대신 풀어 나갔다.

"우리는 그 때 집에 오리를 50마리쯤 키웠어요 내가 논에 피를 뽑으러 나가면서 아저씨한테는 오리를 잘 보라고 했지요 그런데 옆집의 아저씨가 자기 논에 피를 뽑아 주라고 해 서 남자 셋이서 일을 하다 논두렁에 나와 쉬고 있던 참이었더랍니다.

총소리가 나서 도로 끝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려고 달리다가 기어갔대요 그런 사람들에게 총을 쏴, 우리집 아저씨는 오른쪽 팔이 댕강 부러져 살가죽만 한 겹 남아 덜렁거렸어요 또 무릎도 관통했지요 함께 기던 최철진 비(당시 40대)는 엉덩이로부터 총알이 들어가 가슴을 거쳐 목구멍으로 나왔어요.

그 후 그는 완전히 성 불구자가 되고 말았지요.

우리집 아저씨 모습을 보고 나는 놀라 쓰러져 버렸어요 팔과 다리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어요 군인들이 헝겊으로 싸매고 있더니 나더러 리어커를 가져오라고 하대요. 동네서 끌어다 주니 거기다 싣고 대기 중인 헬리콥터로 옮겨갔어요 실어 가면서

"아주 곽 죽여 버리지 않고 데리고 가느냐고" 말하더랍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자식들이 피를 준다고 병원으로 찾아가기도 했어요

나도 그 날 다른 논에서 피를 뽑다, 총 소리에 놀라 도망해 남의 방안에서 그 집 딸애들과 이불을 둘러쓰고 있었어요 공수 부대가 구두 신은 채 박차고 들어와 총 끝의 칼을 가슴에 들이대며 폭도를 내놓으라고 하대요 오지 않았다고 했더니 방에 있는 애기를 업고 방을 1백 번 돌라고 합디다.

그 때 정신이 없어 몇 번을 돌았는지 모르겠지만 칼을 또 들이대며, 전남 인심 나쁜 것들 칼로 찔러 죽여 버리겠다고 합디다. 죄도 없는 우리에게 왜 그러냐고 하니까 '요년 봐라'하고 총을 쏘겠다고 해서,' 당신들은 부모도 없소 라며 죽을 것을 각오하고 대들었어요 갈아 마셨으면 좋을 놈의 새끼들 ! 나는 하도 억장이 무너져 술 한 병을 마시고 온 장을 미친 듯이 떠돌아다녔어요 언제 잡아먹어도 그놈들 잡아먹고 죽겠어요 이젠 무서울 것은 없소 어떤 놈이 무엇이라 하면 이젠 씹어먹고 싶어요 나는 아직도 방에 있는 총 자국을 아직도 바르지 않고 두고두고 보고 있소 우리 아저씨는 그 뒤 지역 개발 금에서 1천만 원의 보상비를 받았소.

당시 39세였던 한선홍 씨는 소 네 마리를 잃고 정신이 돌아 버렸다. 소 한 마리 값이 약 3백40만 원 하던 때 1마리나 졸지에 잃어, 눈이 뒤집혀 낫을 들고 소죽인 놈들을 죽인다고 다녔던 것이다. 온 여름 동안 소 썩는 냄새가 온 동네에 꽉 찼다고 한다.

그는 금년에 세상을 떴는데, 행불자 센터에 소 4마리 보상 신고가 들어와 그 사연을 알고 있는 여러 사람의 심중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기자가 접근할 수 있었던 부상자중 정방남 씨의 경우는 광주 항쟁의 응어리가 얼마나 오래오래 갈 수 있는가를 시사하고 있었다. 그의 형수 이소남 씨가 8년간 시동생을 수발하는 그 사랑과 그것도 아랑곳없이 꺼져 가는 그의 생명은 정말 아무런 인연이 없는가? 그야말로 터만 남아 언어 기능까지 잃어 가는 그의 말소리는 마치 전원이 끊어진 레코드 플레이어의 소리처럼 느려졌다. 그렇지만 그의 말엔 조리가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저는 당시 고등 학교를 마친 뒤 대학교는 가정 형편상 못 가고 광주시 대유동 구 YWCA 4층의 고등 고시 학원에서 수강생으로 1980년 5월18일 오후 4시 30분경 그런 참변을 당했습니다만 차차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씨의 어머니가 그 때 아들의 말을 듣고 있다 '내 가슴에 뗏장이나 덮으면 잊을까 못 잊겄소'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기자는 힘들어하는 정씨에게 말을 더하도록 하는 것이 무안해서 누으 라고 말했으나 그는 계속 자세를 바로 하고 않았다. 그 때 그의 형수 이씨가 당시의 상황을 삼촌이 더 자상히 아니, 말을 계속하라고 요청, 그는 말을 이었다. 이씨는 우유 1통을 준비해 말하는 사이사이 정씨의 따른 입을 축여 주었다.)

스물 여덟 살 먹은. 이놈의

꼴 이게 무업니까 ? 차라리…

"그러니까 4층에서 수강생으로 공무원이 되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했습니다. 4층에서 국사 강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군인들이 방망이로 두들겨 패며, '너 이놈 새끼들 빨리 안 나가면 죽인다'는 식으로 엄포를 놓대요 무법 천지를 저는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책상, 가방, 도시락, 책 다 엎어지고 저는 맨 앞에서 공부하는 도중 혼자 제일 늦게 내려갔어요 저는 군대를 안 가 봐 잘 모르겠습니다만 총 개머리판과 함께 구둣발로 차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4층에서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몇 계단인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굴러서 3층으로 떨어졌는데 3층에서 자기들 장난감이나 되듯 곤봉으로 얻어맞았지요 '대한민국 군민이 이럴 수 가 있냐'고 대항하며 제발로 내려 갈 테니 그냥 두시오 했더니 '이 새끼 말이 많아'하며 빨리 내려가라고 했어요 3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면서 계속 맞아서 내려가기가 정말 싫었고 어디로 숨었으면 좋겠는데‥‥ 군인 자식들이 뻔히 보며 또 때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2층 1층 사무실 안의 강사 모두가 피신해 버렸고 학원의 유리창은 총구로 박살났으며 밖으로 나가라고 했고, 반항하면 한 대 맞고, 맞으면 공짜입니다. (이 부분에서 딸이 좀 조리를 잃었다.) 나가니까 거기가 참극입니다. 헬멧 쓰고 총 들어메고 박달나무 방망이로 마구 때리고 빨리 나가라고 조지니까 나갔지요.

우리들이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습니다. 어디로 도망을 갔으면 했는데 여기도 열 명, 저기도 열 명이 섰고. 닭장 버스에 실려 버렸지요 닭장 버스 안에서 의식을 잃어 버렸구요 결국 어디로어디로 끌려 다녔는지 모릅니다. 저녁때 서부 경찰서 좀 못 미쳐 가면 청명 약국 이라고, 그 약국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청명 약국 앞에다 한일자로 딱 내려 주대요

그것도 얼마나 사정사정해서 그랬던것 같습니다.

다시 그의 형수가 그 다음을 설명했다. 그는 그 때 외상은 없었다, 계속 사람이 이상해졌다, 그 때 맞았다고 병원 가는 것이 워낙 무서워, 신고보다는 도리어 빠지려는 사람이 많았다, 혹시나 무슨 제재가 올까 싶어 셔었단다. '한 운전 기사는 부상자 명단에서 빠지기 위해 돈도 많이 썼대요' 그란 소리를 듣고 집안의 누가 맞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81년말 병원을 다니며 대뇌가 아닌 소뇌를 다친 사실을 알게 됐다.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그는 악몽 속에서 정차 정상을 잃기 시작했다. 우연히 학원 강사를 만나, 그들이 보증을 서 주었다.

보상을 받으면 무엇 하랴만 청춘이 너무 분하고 원통해서였다. 전국의 병원을 찾아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그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걷다가 갑자기 쓰러지기 시작했다. 늙은 어머님은 그를 부축할 수 없어 언제나 정수가 그의 손과 발이 됐다. 다시 그가 말을 한 마디 하겠다고 했다.

"제가 현재 누구나 보다시피 아무런 능력이 없어 형수 씨와 형님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약으로 사는 식물인간이 돼 버린 안타까운 심정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의지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6공화국 책임자인 노태우씨가 어떤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나의 기백을 보상하겠습니까. 누가 이렇게 생긴 나에게 딸을 주겠습니까.

언젠가 다치기 전의 애인과 만났으나 애인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화장실만 빼고는 모든 것을 형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제 상태는 현재 수족 마비로 손도 못 쓰고, 어머니는 편모. 3척 동자도 퍼먹을 수 있는 밥도 형수가 떠 먹여 줍니다 언어 장애, 행동 장애, 의식 장애도 있습니다. 한번 비꺼덕 하다 뚝 떨어져 버려요

어제도 망월동 묘지에 좀 늦게 갔어요 택시를 탔는데 사람이 많아 들어갈 수 없어 2kn 정도를 형수가 업고 걷기 시작했어요. 나는 형수님 제발 나를 내려 주세요, 28살이나 먹은 놈이 이게 무슨 꼴입니까(그는 울기 시작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형수님이 업고 가니까 어떤 남자가 '아주머니 제가 업을께요'라며 저를 업었습니다. 형수가 또 업고 해서 망월동 부상자 곁으로 갔습니다만 시력 장애가 있어 누구를 1분 이상 쳐다볼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28살의 정년의 기백은 어디로 가고 뼈만 남은 실정인 가운데 편모님에게 저는 정말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말은 정말로 숨이 차서 그만하겠습니다

그가 어머니를 안심시키려고 애를 쓴다고 어머니는 안타까와했다.

형수 이씨는 이제는 요한 병원에서 대신 약을 받아 온다.

"젊은 사람이 어딘들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어제의 경우 그런 생각이 들어 삼촌을 모시고 갔어요?"

어떤 때는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자신의 동생이 있지 않은가 하며 금방 마음을 돌린단다. 시어머니는 "어디서 저런 마음씨 고운 며느리가 왔는지, 아들보다 더 잘한다"며 말을 못 이었다.

형수 이씨는 시동생을 데리고 다니며 버스에서 운전 기사 분들한테서 받았던 눈총 때문에 꼭 하루빨리 자가용을 마련했으면 했다.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며 정말 그는 시동생의 손발이 되고 있다.

이씨는 19일 도청 앞에서 열릴 예정인 조성만 씨의 장례식에 참석키 위해 나왔다. 도청 앞이 온통 시위 현장으로 변했지만 참고 기다려 새벽 1시 반경 열렸던 식에 참석하고 망월

동 묘지까지 따라갔다. 이씨가 집에 돌아왔을 때 새벽 3시였다.

"삼촌이 너무 불쌍해 나라도 그 한을 달래 주려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