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특별 기획 「12·12, 5·18단죄」 역사와 정의

본문

특별 기획 「12·12, 5·18단죄」 역사와 정의

완전 공개 검찰 작성 5·18사망자 165명 부검 자료

계엄군「시민사냥」결정적 증거 찾았다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광주 지방검찰청이 작성한 정부 공식 문서가 공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이 문서는 80년5월26일부터 6월19일까지 사망한 1백93명의 사망자 가운데 군인 등을 제외한 시민 1백65명에 대해 당시 광주 지검 검사 등 관계자 10여명이 전문가의 소견을 들어 작성한 것이다.

「신동아」에서는 지난 12월 7일 광주시 5·18자료실이 이 자료를 공개하기 전에 사체검안서 및 사체 사진을 미리 입수해. 이를 고려대 황 적준 교수(법의학)에게 맡겨 정밀 감정을 의뢰하고 있었다. 황 교수는 지난 87년 당시 민주화 운동의 불을 당긴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에서 부검 의로서 고문 사실을 용기 있게 증언한 사람이기도 하다.

검찰이 작성한 이 자료에 의하면 사망자 1백65명의 사인은 총상이 전체 79.4%인 1백31명(M16 96명, 카빈 소총 26명, 기타 총상9명)으로 가장 많고, 개머리판. 곤봉등에 의한 타박사가 18명, 차량사 12명, 대검 등에 의한 자상이 4명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

1백 65구의 사체 사진은 차마 공개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상태였다. 학생인 김부열군(당시 17살)의 사체는 머리와 가슴 윗 부분이 없어진 상태였다. 사체 검사에서도 두부 및 상흉부가 절단돼 없고, 심한 부패로 인해 사인을 규명하기 불가능하다고 밝힐 정도였다.

황 박사는 사체 검안서를 검토하면서 몇 가지 문제점과 확인 해볼 사항을 지적했다.

검찰이 사체별로 분류한 것이 실제로 전문의들이 체크한 내용과 일치하지 않은 점이 발견되며, 그 중에는 당시 소문으로만 나돌던 계엄군의 화염 방사기 사용 가능성을 의심케 하는 사체도 있었다는 것.

또 황 박사는 검시 내용을 기록하면서 용어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즉 사망자 검시 내용에 기재된「자상」은 법의학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라는 것. 이자료에서는 대검 같은 에 의한 사망을 일반적으로 자상으로 표기했는데 정확한 용어는「 자창 」 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총탄에 의한 사망을 「총상」이라고 기록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법의학에서는 「총상」이 아닌「총창」으로 기재한다.

황 박사는 이 같은 원인은 당시 검시에서 법의학을 전공한 전문의가 아닌 일반 의사들도 참여함으로써 용어의 혼란이 발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것은 다른 말로 검시의 정확성에 대해서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대목이기도 하다.

3도 화상 입고 발견된 사체

먼저 자상 즉 자창에 의한 사망자들을 살펴보자. 검찰 자료에는 자창에 의한 사망자가 4명이다. 「순수하게 」대검으로 인해 사망한 경우는 공무원이던 송정교씨(당시 50살)가 광주에 있던 자녀를 나주 집으로 데려가려다가 피습, 국군통합병원에 입원중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고 영업용 택시 기사 민병열씨(당시 31살)는 뒷머리에 대검으로 추정되는 흉기를 맞아 머리가 부서진 채 광주 교도소 앞에서 발견됐다.

이발소 종업원이던 허봉씨(당시 23살)는 왼쪽 머리에 망치, 곤봉 등 둔기에 의한 타박 열창을 입었고 다시 오른쪽 옆머리 쪽을 대검에 찔려 숨진 것으로 기록됐다. 당시 계엄군의 무차별한 살상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아주 특이한 경우는 당시 29살로 80년 5월27일 전남 도청에서 사망한 윤개원 씨다. 사인은 오른쪽 하복부에 선단이 예리한 흉기를 맞자 사망한 것으로 돼 있으나 당시 부검에 참여한 의사는 먼저 전신의 30%에 해당하는 오른쪽 가슴 부위. 복부, 얼굴에 3도 화상을 입은 다음 자창을 입은 것 같다고 기록했다. 기록 대로라면 이미 화상을 입고 실신 상태 혹은 죽은 사람을 계엄군이 다시 칼로 찔렸다는 뜻이 된다.

황박사는 이에 대해 몸 전체에서 30%를 차지하는 3도 화상을 입을 경우 현장에서 즉사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대단한 화력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광주에는 계엄군이 화염 방사기까지 동원, 시민들을 살상한다는 소문이 나돈 바 있다. 이 자료는 그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88년 광주 청문회 과정에서 당시 계엄군 지휘관들은 화염 방사기를 진압에 사용한 사실은 시인했으나, 물감을 넣어 사용했을 뿐 사살용 화염 방사기 사용은 없었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방위병 신분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화염 방사기 공격을 받았다고 하는 최병옥씨(당시 21세)는 간신히 화염을 피하긴 했지만 고열로 얼굴이 익는 피해는 입었다고 증언했다.

『차를 타고 가던 중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고 인근 주택 화장실로 피신했다. 이미 3명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까지 쫓아온 공수부대가 갑자기 화장실 창문에 화염 방사기를 대고 불을 뿜어냈다. 순간 숨이 턱 막혀 뛰쳐나가 그 집 안방 장롱속에 숨었으나 이내 붙잡히고 말았다. 끌려간 다음날부터 얼굴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19살 소녀 젖가슴 대검에 찔려

한편 대검에 의한 자창에 함께M16총알 세례를 맞고 숨진 사례도 있다. 이는 5.18당시 계엄군이 젊은 여자의 젖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소문의 진상을 밝혀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황박사는 이 사진의 사체는 너무 부패돼 있어 육안으로는 확인해 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당시 검찰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성명: 손옥례(19살. 여)

사망일시 장소:1980.5.22 장소 불상

사인별:M16총상 및 자상

부위 및 사인:1. 좌 유방부 자창 2.우측 흉부, 하악골, 좌측 골반부, 대퇴부 관통 총상. 직 접 사인은 우흉부 관통 총상

풀어 말하면 당시 19살이던 손양은 M16총알 세례중 한 발이 왼쪽 엉덩이쪽에서 앞으로 뚫고 지나갔으며, 또 한 발은 오른쪽 등을 뚫고 오른쪽 앞가슴으로 나갔다는 뜻이다. 이와 함께 손양의 왼쪽 젖가슴은 대검에 의한 열창 등으로 심하게 훼손됐다.

계엄군이 먼저 손양의 등뒤에서 총을 쏘고 다시 왼쪽 유방을 대검으로 찔렸는지. 아니면 유방을 먼저 칼로 찌르고 총을 쏘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9살의 젊은 여성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계엄군은 나이와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하게 살상했다. 광주 항쟁에서 계엄군에 의한 최초의 사망자는 어처구니없게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였다. 5월 19일 당시 24살의 김경철씨는 공용 터미널에서 처남을 전송하고 돌아오다 계엄군의 진압 봉으로 온몸을 구타당해 사망했던 것이다. 검찰 자료를 검토한 황 박사도 머리, 얼굴, 팔, 다리 할 것 없이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보았다. 아마도 그는 시위와 무관한 자신의 입장을 온몸으로 설명하려다 더욱 두들겨 맞았던 것 같다. 그는 이후 실신해 국군 통합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공수부대의 항쟁 초기 진압이 과잉 진압이었음을 설명하는 사례이다.

20일 새벽 6시경에는 전남 양조장 공터에서 처참히 일그러진 1구의 시체를 시민들이 발견했다. 신원은 김안부씨(35세. 서구 월산동)로 직업은 막노동꾼. 그 역시 머리가 찢어지고 가슴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채였다.(검찰 검시 자료). 이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삽시간에 시내로 퍼져 시민 항쟁을 더욱 불붙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는 첫날 숨진 김경철 씨와 달리 시민들이 직접 사체를 처리해 그만큼 전파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공수부대의 대검과 곤봉, M16은 위협용이 아니라 이제 살인도구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시민들의 대응 양상도 이때부터 달라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계엄군의 잔학성도 갈수록 강도가 높아졌다. 이후 이름이 확인되지 않고 부모도 누군지 모르는 4살 가량 어린아이가 왼쪽 목덜미 뒷부분에 총알이 박힌 채 효덕동 뒷산에서 발견됐는가 하면. 환갑도 훨씬 지난 노인이 곤봉에 맞아서 사망하기까지 했다.

65살 김명철 노인은 머리에 집중적으로 구타를 당해 머리가 깨지고 결국 뇌좌상으로 사망한 것이다.

당시 16살 춘태 여고 3년생 박금희양도 계엄군의 총탄에 숨졌다. 5월21일 오후 2시 수미다실 앞에서 사망한 박양은 오른쪽등 가슴 부위에 총알을 맞았으며, 왼쪽과 오른쪽 허리부분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박양 역시 허리를 개머리판 혹은 곤봉으로 심하게 얻어맞은 후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사망했는지, 그 거꾸로 인지는 분명치 않다.

헌혈하고 귀가하던 여고생도 쓰러져

박금희양은 당시 기독 병원에서 부상자를 위해 헌혈을 하고 귀가하던 중에 계엄군의 총에 맞은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헌혈등 부상자 구호 활동을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던 이광영씨는 5월21일 오후 6시경 양림동에서 헌혈을 하고 싶다는 여학생을 만나 기독 병원으로 안내했다고 한다.

『어떤 여학생이 헌혈을 하겠다고 졸라 기독 병원으로 데려다 준 뒤 또다시 부상자 수송 작업에 나섰다. 잠시 뒤 기독 병원에 와 보니 많은 사람들이 웅성대며 울부짖고 있었다. 어느 여학생이 총탄을 맞아 즉사했다는 것이다. 시체를 확인 해보니 조금 전에 내가 실어다 준 그 여학생이었다. 헌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공수부대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내가 병원으로 실어다 주지 않았다면 그 여학생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지금도 괴롭다.

당시 기독 병원 간호 감독을 맡고 있던 안성례씨도 박금희양을 기억했다.

『병실에서 환자를 돌보는데 밖에서 통곡 소리가 들려 왔다. 이곳에서 방금 헌혈을 하고 돌아갔던 금희가 가마니에 덮인 시체로 돌아왔다. 피투성이가 된 금희의 시체를 보며 울기보다는 「전두환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박금희양보다 나이가 더 어린 당시 14살의 박기현군 (동신 중학교 3년생)은 타박사로 숨졌다. 검찰 기록에 의하면 박군은 5월20일 동구 대의 동의 시민 회관 부근에서 사망했는데 머리와 가슴, 복부를 집중적으로 맞았고 뇌죄상 (멍든 현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또 다시 19살의 김경환군은 곤봉 등 구타에 의한 타박상, 칼에 의한 자창, 총알에 의한 총창 등 「다양한」흉기로 숨졌다. 검찰 기록에 의하면 점포를 운영하는 삼촌 밑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김군은 5월20일 오후 8시경 점포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전남대 병원 부근 로터리에서 사망했다. 김군의 사인은 머리를 얻어맞아 뇌가 멍든 것 (뇌좌상)이 직접 사인이었고, 이외에도 왼쪽 어깨 부분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 복부에 는 깊이가 2cm되는 자창이 세 군데나 발견됐다.

머리를 때리고, 칼로 찌르고, 결국에는 총알로 확인 사살까지 한 공수부대들의 잔인성은 검찰 기록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오른쪽 표는 검찰 검시 자료를 바탕으로 19살 이하의 희생자들만 따로 모아 분류한 것이다.

<표>에서 보듯이 전체 사망자 1백65명중 27%에 해당하는 45명이 19살 이하이다. 이는 당시 계엄군이 데모 진압 차원을 넘어서 무자비한 살상을 가했음을 보여준다. 또 광주 항쟁 당시 부상한 정창만군(당시 18살. 진흥고 3년)은 계엄군의 고문 후유증으로 86년 10월 사망했다.

5.18희생자들은 대다수가 M16총탄에 희생됐다. 그 중에서도 최미애씨 (당시 23살)의 사망은 광주 시민들을 분노케 했다. 최미애씨의 검시 내용에는 5월21일 광주시 북구 중흥2동 앞길(전남대 앞)에서 M16총알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당시 임신 8개월이었음도 명시하고 있다. 최미애씨의 어머니 김현녀씨(58)씨의 증언.

8개월 임신부도 가리지 않은 공수부대

『전남고 영어 교사와 중매 결혼한 딸은 내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 신방을 차렸다. 얼마 있지 않아 아들을 얻고 곧바로 또 임신을 해 80년 5월에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사위는 시간관념이 정확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마음먹은 일이면 항상 정확한 시간에 처리했다. 21일 아침에도 학교에 볼일이 있으니 나간다며 12시에는 들어오겠다고 말했다. 바깥은 소란스럽고 들리는 소문이 흉흉하니 미애가 남편을 마중나간 모양이었다. 미애는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는 아이였다. 미애는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아이였다. 18일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 무섭다고 느끼면서도 공수부대가 설마 배부른 자신에게까지 어떻게 하겠느냐 싶어 밖으로 나갔던 것 같다. 바로 그때 나는 시위대를 위해 며칠째 주먹밥을 만들어 제공하다 피곤해 잠깐 잠이 들어 있었다.

갑자기 이웃 연탄 집 아저씨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뭔가 일이 생겼구나 싶어 맨발로 뛰어나갔다. 나중에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 애기를 들어보니 미애가 평화 시장으로 들어오는 골목 맨홀 뚜껑 위에 서서 남편을 찾고 있는데, 인근 전붓대 뒤에 서 있던 공수 부대원 한 사람이 미애에게 총을 겨누고 이어 총소리가 났다고 했다. 미애는 임신복을 입고 있어서 누구의 눈에도 잘 뛸 수밖에 없었다. 총소리와 함께 미애가 쓰러지자 사람들은 미애가 기절한 줄 알았단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 가보니 남색에 붉은 색 무늬의 임신복이 먼저눈에 들어왔다. 일으켜 세우려고 보니 머리 뒷부분이 없었다. 땅바닥에는 보리밥 같은 덩어리가 흩어져 있었다.(황적준박사는 M16 자동소총은 화력이 세 정통으로 머리를 맞을 경우 그 뒷부분을 절단 시킬수 있다고 말했다)

학생 하나가 잘못하면 시체마저도 뺏길지 모르니 어서 집으로 데려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어떤 사람은 팔을 붙잡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붙잡고 거실에 데려와 미애를 뉘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애의 배가 불쑥불쑥 깊은숨을 쉬듯이 튀어나왔다. 뱃속에 있던 아기가 뛰고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살려야 한다고 발버둥을 치며 여러 군데 병원에 연락했지만 소용없었다. 사위는 1시20분경에 집에 돌아왔다.

「자네 마누라가 죽었네 」그 소리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23일에 장례를 치렀다』

최미애씨의 검시는 23일의 장례가 있은 훨씬 후인 6월 7일 조선대 부속병원에서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최씨의 어머니인 김현녀씨는 장례를 치른 지 18일만에 검시를 해야 한다면서 시체를 다시 파라는 연락이 왔는데, 이에 불응할 경우 유언비어 유포 죄로 집어넣겠다고 협박을 당했다고 밝혔다. 당시 임신부가 죽었다고 소문나 있는데 진짜 죽었는지, 죽었으면 누구의 총에 죽었는지를 알아 유언비어를 차단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해서 최미애씨는 검시를 마친 뒤 망월동에 묻힌 것이다. 그후 김씨는 89년 국회 청문회가 열리면서 증인으로 선정돼 당시의 상황을 증언 한 바 있다.

『얼마나 떨리던지 죄를 짓지 않은 내가 떨리는데 죄짓고 나온 사람들은 얼마나 떨릴까 내심 생각하고 그들의 표정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떨리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하긴 그렇게 뻔뻔스러우니 그런 만행을 저질렀겠지 생각했다. 증언을 마치고 집에 와 보니 당시 광주 시내 중학교 서무 과에 근무하던 미애 아빠가 한숨을 쉬며 얘기를 했다. 누군가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왜 청문회에 나가 그런 얘기를 했느냐며 나중에 두고보자고 협박을 하더라는 것이다. 대죄를 지었다며 참회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협박이라니…

계엄군의 보복 살인 현장

이 검찰 자료는 한편 계엄군의 보복 살인 현장도 증언하고 있다. 80년 5월24일 오후 1시20분경 11공수 여단이 광주시 송암동 일대에 이르러 무고한 시민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해 발생한 사건이 이른바 「 송암 동양민 학살」 사건이다.

지난 88년 광주 청문회에서는 이 양민 학살 원인을 규명한 결과 송암도 일대에 매복중이던 전교사 보병 학교 교도대 병력이 광주 비행장으로 이동해가는 11공수여잔을 폭도로 오인. 1시간에 걸쳐 부대간 오인 사격이 있었고 교전 후 보복의 성격이 짙은 사건으로 밝혀졌다.

이날도 무고한 사람들이 사망했다. 원제 마을 앞 저수지에서 목욕하고 귀가하던 전남중학교 1학년 방광범군(당시 12살)은 M16에 의해 왼쪽 머리가 떨어져 나갔고(검찰 검시 자료) 마을 동산에서 친구 2명과 함께 놀던 효덕 초등 4학년 전재수군(당시11살)은 이동 중이던 계엄군에게 손을 흔들어 주다 불과 3m앞에서 쏜 계엄군의 총알 사례를 받고 사망했다.(88년 광주 청문회 증언) 검찰의 전군에 대한 검시 내용도 5월24일 1시10분 경 같은 마을 어린이 2명과 놀다가 피격 당했으며, 가슴과 오른쪽 다리 대퇴부에 총 창을 입고 사망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날의 참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같은 날 박연옥씨(당시49살)는 광주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진흥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을 찾아 나섰다가 계엄군에 의해 숨졌다. 광주 청문회 기록에 의하면 이날 박씨는 계엄군의 총소리에 놀라 인근 하수구 안으로 피신했으나 군인의「조준 사격」을 받고 결국 하수구 안에서 숨져 갔다. 박씨의 손에는 아들에게 줄 반찬거리가 꼭 쥐여 있었다. 검찰 검시에서 박씨의 사인은 복부에 총알이 박혀 있었고, 회음 부를 총알이 관통한 상태 였다.

집안에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끌려 나와「즉결처분」당한 송화동 마을 주민들도 있었다. 김승후(당시 18살.공원), 권근립(당시 24살. 공원). 임병철씨(당시 24살. 운전사)는 한꺼번에 떼 죽임을 당했다. 검찰 검시 내용에서도 이 세 사람은 「5월 24일3시30분경 송하동 58의 2 자기 집 앞 노상에서 M16총상을 입고 사망」했다고 공통적으로 기록했다.

사망 원인과 관련된 그간의 정부 발표는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1980년 7월30일 국방부가 발행한 보고서 「광주 사태 실상」에는 총상 사망자 1백28명중M16총상 사망자는 96명으로 기록돼 있어 당시 국방부가 조작, 은폐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광주 항쟁으로 인한 사망자들이 대부분 시민이 소지했던 카빈 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조작하려던 의도였음이 밝혀졌다.

M16인가 카빈 소총인가

한편 검찰 검시 내용에서 M16소총과 카빈 소총에 의한 사인 분류도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 발견된다. 카빈 소총으로 사망했다는 고규석씨(당시 37살. 새마을 지도자)와 임은택씨(당시35살. 상업)가 그 경우이다. 5월21일 담양에 거주하고 있던 이 두 사람은 박만천. 이승을 씨와 함께 광주에 와서 경운기 부속품과 벽지를 구입한 후 픽업을 타고 돌아가다가 광주 교도소 부근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을 받았다. 여기서 앞의 두 사람은 사망했고 이승을씨와 의하면 일행4명은 당시 비무장이었으며 시위에 가담한 사실도 없다고 밝혔다.

즉 이 두 희생자가 계엄군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시 보고서 사인 란에는 모두 카빈 총상으로 명시돼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사례에서도 발견되는 의혹이다.

이를테면 카빈 총상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기록된 박종길씨(당시 24살.공원)는 총창과 함께 왼쪽 가슴과 얼굴 아래쪽에 칼에 찔린 자상이 인정되고 있다. 말하자면 시민군이 가지고 있던 카빈총을 맞고 다시 대검에 찔린 것으로 정황

전개가 되는데. 이는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무언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M16에 의해 희생됐다고 기록된 왕태경씨(당시26살. 운수업)는 의사들의 사체 검안서에 의하면 총 창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단지 머리 윗 부분에 함몰된 골절상을 입고 있으며, 오른팔에 타박상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사체 검안서만 보면 이는 총 창에 의한 사망이 아닌 타박사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검시에 참여한 바 있는 부검 전문의 전호종교수(조선대 의대. 병리학)는 사체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려면 부검까지 해야 하는데 당시로서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사체가 썩어 가는 중이었고, 게다가 부검을 하려면 검찰의 수색 영장과 가족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데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

따라서 검시에 참여한 의사들은 단지 사체의 외형만 보고 검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 부분이 결국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M16은 계엄군의 총격을 의미하는 것이고, 카빈은 광주 시민의 총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교수는 당시 검시를 주관한 검찰이 시민 군들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도 있다는 소문이 있으므로, 총 창의 분류를 명확하게 해 달라고 의사들에게 주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검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은 힘 듣 상황이었다.

특히 총 창은 온 모을 뚫고 나가는 관통 총창과 총알이 몸에 박히는 맹관총창으로 나뉜다. 여기서 맹관총창의 경우 부검에서 바로 총알을 찾아낼 수 있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검시에 참여한 의사들은 총알이 몸 속에 들어간 사 입구와 몸을 뚫고 나온 사 출구의 외형적 상태만 기록하기로 합의했다. 보통 M16은 사 입구보다 사 출구의 크기가 더 크며, 카빈 소총은 사 입구와 사 출구의 크기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했다는 것. 또 후에 전문 법 의학자가 판정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탄화 흔적이 있는 것도 기록해 두었다고 했다.

한편 황 박사는 이 경우에도 사 출구가 없는 맹관총창의 경우 비교가 어렵다는 점이 있고, 더구나 근접사(근거리 사격)냐 원접사 (원거리 사격)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가려내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고 말했다.

어쨌든 M16과 카빈 소총. 그리고 기타 총상으로 분류된 기록은 당시 의사들이 아닌 검찰이 작성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황 박사는 차량 사로 분류된 사망자들에게도 납득하기 어려운 사례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61살로 사망한 김흥기씨의 경우 차량 사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의사들이 작성한 사체검안 서에는 왼쪽 목 부위에 3×2cm의 크기의 총창 이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둔기 같은 것으로 생기는 것이지 교통사고에서는 이러한 흔적이 생기지 힘들다는 것 . 또 머리 부분에 타박상이 있는 걸로 보아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세홍씨(당시 38살. 경찰관)도 5월20일 데모 진압 중 데모 대원이 운전한 차량에 받혀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의사들의 검안서에는 머리에 열창과 특히 함몰 골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차량사로 분류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황박사는 이 자료는 분명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당시 상황을 감안해 기록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피해 상황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근거가 된다는 것.

6.25 전쟁 후 최대의 유혈극이 벌어진 광주 항쟁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음을 보여준다. 계엄군은 데모를 진압하는 차원을 넘어서, 광주 시민들을 없애야 할 「적」으로 규정해 진압봉, 대검, 총등을 마구잡이로 사용했다.

그리고 양측의 희생자들은 지금 땅속에 묻혀 있다. 광주측 사람들은 망월동 묘지에 묻혔고 최근까지도 그 가족들은 쉬쉬하며 묘지를 찾았다. 반면 계엄 군 측 희생자들은 나라에 공헌을 세운 사람들만이 가는 국립 묘지에 묻혀 있으며, 또 계엄군으로 하여금 살상을 명령케 한 당시 지휘부들은 훈장을 받았다. 그들은 광주 진압이 지금도 애국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