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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특집 광주 민중 항쟁, 그후 15년 - 손녀의 엄마가 되어 지낸 눈물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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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광주 민중 항쟁, 그후 15년

손녀의 엄마가 되어 지낸 눈물의 세월

임근단

다시는 기억해 내고 싶지 않은 그날의 아픈 상처를 끄집어낸 다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글을 써내려 가지 못하고 멈추길 수없이 반복했다. 할머니인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손녀 혜정이는 며칠 동안 잠 못 이루는 나를 보고 못 쓰겠다고 말

하라며 걱정한다. 그래도 글을 써 보겠노라고 약속을 했기에 다시 펜을 든다. 그러나 어찌 자식을 비명에 보내 놓고 악몽에 시달리며 살았던 15년간을 이 짧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대문을 활짝 열고 "어머니"라고 소리치며 달려올 것만 같은 경철이를 그리며 이 글을 쓴다.

'80년 5월 18일 전까지 우리 경철이는 힘겨운 삶을 굳건히 견디며 생활했었다. 네 살 때 고열로 시달리며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경철이는 그때부터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청각 장애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장애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경철이는 제화 기술을 배워 광주에서 양화점까지 차렸다. 죽기 1년 6개월 전까지만 해도 같은 처지인 마음 착한 아내를 맞아 결혼했고, 백 일 된 딸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경철 이였다. 경철이는 그 행복을 남에게 나눠줄 줄도 알았다. 청각 장애자 복지회 전남, 광주 지부 감찰 부장을 맡으면서 어린 청각 장애자들을 집에 데려다가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렇게 착하게 살았던 경철이가 곤봉 세례를 받고 ‥‥

1980년 5월 18일, 경철이는 서울에서 내려온 처남을 전송하고 같은 처지인 친구 두 명과 함께 금남로를 지나던 중이었다. 전남대에서부터 진압군에 의해 말리던 시위대에 휩쓸렸던 경철이는 청각 장애자 신분증을 보이며 자신은 시위대가 아니라고 악을 썼었다. 그것이 반항으로 여겨져 공수부대원의 무수한 곤봉질과 발길질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광주 민중 항쟁의 최초 희생자가 된 내 아들 경철이 스물 여덟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 혜정, 그리고 극진한 효심으로 섬겼던 나를 두고 그렇게 눈을 감다니.

경철이가 참혹한 시신으로 변하던 그날 나는 웬지 모르게 불안하기만 했다. 비상계엄 확대로 저녁 7시에 통행금지가 내려졌고. 그때까지 경철이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나를 엄습해 왔다. 설마 하는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낸 나는 날이 새자마자 상무대로, 적십자 병원으로 아들을 찾아 헤맸다. 결국 국군통합병원에 가서야 가슴을 옥죄는 듯한 초조와 불안 속에 네 시간 정도를 기다려 냉동관에 누워 있는 아들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그 시신을 보는 순간 며느리는 졸도해 들것에 실려 응급실로 옮겨 졌고,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심한 충격으로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차디찬 냉동실 바닥에 앉아 폐부를 찢는 듯한 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수의라도 지어 입혀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미 죽음의 도시가 되어버린 시내로 내달렸다. 아들이 너무 추울 것 같아서였다. 아니 생전에 그리도 말쑥하던 아들에게 깨끗한 수의라도 입혀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출입을 제지하는 군인 앞에서 온몸으로 그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아들의 시신에 수의를 입히면서 그 참혹한 모습에 나는 또 한번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쪽 팔과 왼쪽 어깨가 부숴 졌으며 목뼈가 부러지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어져 있는 경철이.그는 내 가슴에 지을 수 없는 아픔이 되어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그것이 아들 경철이와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그리고 경철이는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묘지 번호 66번.

삶은 모질기만 했다. 아들의 참혹한 주검을 본 나는 늘 상 죽고만 싶었다. 더 이상 삶의 의욕이 없었다. 나는 거의 정신병자가 되어 몇 개월을 방황했다. 경철이가 보고 싶으면 그 험한 망월동을 울며 갔다가 울면서 돌아왔다. 거기서 "경철아, 경철아" 하고 외치고 나면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다. 밤이던 경철이의 참혹한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방황도 오래가지 못했다. 경철이의 유일한 피붙이 손녀 혜정이가 내 품안을 맴돌고 있었다. 며느리는 경철이가 죽은 지 1년만에 친정으로 떠난 것이다. 그를 떠나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안해 본 것은 아니었다. 때가 되면 젊은 그가 안 간다 해도 보내리라 마

음 먹었는데. 젖내도 가시지 않은 아이를 두고 떠나다니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어린 혜정이가 나중에 어머니를 찾았을 때, "너의 엄마는 순박했고, 너무나 너를 사랑했기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 해줄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있어 주길 애원 했다. 그러나 며느리는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이제껏 살아온 중에 그때만큼 뜨거운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으리라. 나는 또 한번 자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죽은 경철이를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험난한 삶의 고비를 넘어왔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엄마"라고 불러온 혜정이를 부등켜안고 말이다. 혜정이가 중학생이 되던 해 나는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를 혜정이에게 들려주었다. 언제까지 할머니를 어머니로 여기며 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혜정이는 나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할머니를 어머니로 부르는 손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 경철이를 생각한다. "경철아, 그곳은 춥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