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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이달의 인물 5월의 어머니 - 김순희 여사

본문

이달의 인물 5월의 어머니

김순희 여사

이재영(본지 기자)

다시는 볼수없는 아들

광주 민중 항쟁은 이 땅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사건으로 기록 될 것이다. 특히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은 5월 항쟁의 뿌리에 닿아 있다. 아들 전영진군(사망 당시 대동고 3학년)을 잃은 어머니 김순희(52)여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80년 5월 21일 아침,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에 큰아들 영진은 교복을 입은 채 집을 나갔다. 어제부터 낌새가 이상했지만 설마 착한 아들이 부모의 말을 거역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 딸이 "오빠가 나가려고 양말을 신는다 "고 알려 왔을 때 아버지 (전계량, 현 5 · 18광주 민중 항쟁 유족 회장)가 불러 타일렀는데, 그때는 나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급히 책상 서랍을 뒤져보니 이미 친구들과 시내에서 모든 것을 약속한 듯한 메모지가 발견됐다. 어 머니 김순희여사의 귓전엔 어제 아들이 '어머니, 조국이 우리를 부릅니다'라고 한 말이 윙윙거렸다.

결국 그날 이후 아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날의 악몽 같은 일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훗날 아들이 도청 앞에선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는 말을 듣고, 또 그날 밤 군인들이 아들의 시체를 관도 없이 망월동에 매장했다는 사실을 안 후, 어머니 김순희 여사는 찬물도 목에 넘어가지 않는 세월을 살아왔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자식을 잃지 않은 부모입니다.

멀리 외국 천리에 아들을 둔 부모는. 또 이산 가족은 언젠가는 한번 만날 수 있겠지만 나는 우리 영진이를 죽기 전엔 볼 수 없습니다 "

생전에 아들의 성격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어머니는 그저 보고 싶다는 말만 되뇌었다. 아버지가 "큰 애는 엄마만 좋아한다"고 말할 만큼 유달리 큰아들 영진은 , 그렇게 불효 자식이 되어 어머니 곁을 떠나갔다.

어머니의 투쟁

80년대 초반, 정부는 유족들이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것조차 금지했다. 85년까지는 5· 18위령제는 매년 최루탄 연기 속에서 치러졌다. 늘 경찰의 감시가 따라붙었고, 신문과 방송에서는 광주 항쟁의 회생자들을 '폭도' 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처음엔 몇몇 유가족끼리 남몰래 숨어 지내던 위령제는 점차 거리로, 망월동으로 대열을 이루기 시작했다.

"어린 자식이 죽은 것만 해도 억울한데 폭도라니 말이 됩니까.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라도 정신없이 싸웠습니다. 내가 죽어서 아들 곁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싸우다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

87년에는 구속됐다가 기소 유예로 풀려나기도 한 김순희 여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디서 그런 힘들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어머니들이 용감하게 싸웠다고 말한다.

이어 6·29선언이 나오고, 잠시 민주화가 온 듯했다. 망월동에는 전국에서 찾아 든 참배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또 '고마운' MBC기자들이 취재 해간 것들이「어머니의 노래 」하는 제목으로 텔레비전에 방영돼서,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은 아들을 폭도라고 부르지 않게 됐다.

유족들도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망월동 성역화를 우선적으로 실시할 것, 그리고 광주 특별법 제정 이후 보상 문제를 거론할 것 등의 요구 사항을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들어 선지 2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해결된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다. '광주 처벌법'은커녕 단 한 명의 책임자도 가려지지 않고 있다. 총에 맞은 사람은 있는데 총을 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현 정부는 지난 2월 근경 유가족을 동원, 국회의사당 앞에서 관제 데모를 하게 만들었다.

"자식이 죽을 때 부모가 보상금이나 받아 호의호식하라고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광주 학살의 주범은 뻔합니다. 당시 실세를 가지고 있던 자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저지른 것 입니다. "

돈으로 주검을 흥정하려는 노태우 정부가 더욱 교활하다는 말끝에, 김순희 여사는 이제 더 이상 정부가 광주 문제를 해결 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네 영혼이 늘 나와 같이 있자'

광주 민중 항쟁 10주기가 되는 올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망월동 묘역을 다녀갈 것이다. 그들은 헌화하고 또 묵념할 것이다. 어머니는 이 모든 사람들이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그 동안 남몰래 도와주던 성당의 신부님과 성도들, 그리고 마음을 같이해 준 광주시민들이 가족에겐 참으로 큰 힘이 되었다며, 김순회 여사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광주 문제의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국민이 광주 항쟁의 희생자이고 감옥살이를 한 젊은이들은 아들과 다름없습니다.

더이상 죽고 고문당하고 끌려가는 사람이 없어지는 날, 그날이 바로 아들이 바라던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에게는 또 지난 82년부터 지금까지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족 회장 일을 맡아 온 남편 전계량씨가 큰 힘이 됐다. 80년 군에서 정년 퇴직한 남편의 연금으로 버텨 오던 생활은, 그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쌀마저 떨어질 정도로 어려웠다. 그러나 영진이 아버지는 차비라도 아껴 가면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 의 마음에 늘 걸리는 것은 큰아들로 인해 나머지 자식들이 받았을 상처다. 예쁜 딸 서연(26)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동 중학교로 발형이 났었지만,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작년에 해직되고 말았다. 막내아들 경진(23)은 지금 가톨릭 신학 대학 3학년이다.

막내도 원했고 어머니도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세월도 흐르고 눈물도 메말랐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진이만 생각하면 가슴에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같이 아파 옵니다. "

잊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어리석은 질문은 어머니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5월의 영령들에게 빛진 채 부끄러워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금남로의 '꽃잎 같은 피'를 노래한다. 그러나 그들은 광주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느끼지는 못한다.

지금 어머니는 당신의 가슴에 흙이 덮일 때나 만날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죄 없이 죽어 간 아들을 '의로운 나자로'처럼 무덤에서 걸어 나올 날을 기다리는 지도 모른다.

매달 셋째주 목요일마다 망월동을 찾는 어머니는 아들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기도한다고 했다.

"영진아, 네 영혼이 늘 나와 같이 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