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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10월 12일로 6주기 맞는 박관현, '나팔꽃 씨가 그를 죽였는가?' 의문을 추적한다

본문

10월 12일로 6주기 맞는

박관현, '나팔꽃 씨가 그를 죽였는가?' 의문을 추적한다



분수대의 명언 설

1980년 5월 16일 -. 그날 밤 광주는 '횃불의 바다'를 이루었다. 3만여명의 대학생들이 횃불 시위를 마친 뒤 전남 도청 앞 광장에 다시 모인 것은 밤 9시 30분께.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분수대가 있었다. 금남로 지하도 공사로 하마터면 헐릴 뻔했던 분수대는 그대로 훌륭한 연단이 되었다. 어둠을 밝히려는 횃불 같은 다짐을 시위대의 가슴에 뭉클뭉클 만들어 내며 연설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동안 수업을 팽개치고 행했던 학내 외의 집회와, 특히 연 3일 동안 진행된 시가지 시위와 도청 앞 집회에서 우리는 충분히 우리들의 뜻이 전달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가 금명간 받아 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들의 성스런 요구를 묵살할 때는 또 다시 수업을 중단하고 투쟁할 것입니다. 휴교령이 발동되면 즉시 투쟁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시 박수와 함성이 분수대의 물줄기로 치솟았다.

그의 목소리도 꽃불이 된다.

"학생. 시민 여러분! 민주화를 성취하기까지는 아직도 머나먼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출발 선상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동안 함께 수고한 학생 여러분, 그리고 존경하는 교수님, 또 시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분수대의 그'는 박관현군(당시 27세. 전남대 법대 행정학과 3년)이었다. 이걸로 '마지막 연설'이 되고 말았던 그날 밤 그는 이틀 후의 엄청난 '일'을 상상이 나 했을까.

당시 전남대 총 학생회장으로 '민주 학원의 새벽 기관차' 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도청 앞 광장에서 연 3일(5월 14일-16일)동안 전남대. 조선 대등 광주 지역 10개 대학 연합으로 열렸던 '민족. 민주화 대성 회'를 주도, 많은 광주 사람들의 가슴에 '분수대의 영웅'으로 , '광주의 넋'으로 살아 있다. 청중을 사로잡은 명연설과 명 지휘-, 이는 영원히 기억될 만 하다.

그는 5.18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5.17조치로 몸을 피했던 것이다. 약 2년간의 은신 끝에 1982년 4월 5일 검거되었다.

82년 9월 28일자 전국 각 일간신문들은 일제히 그의 죄상(?)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광주 지법 형사 합의 2부 (재판장. 강현중 부장판사)는 27일 오후, 광주 사태 주동자 박관현 피고인(당시 29세. 전 전남대 총 학생회장)에 대한 선고 공판을 열고 국가 내란 중요 임무 종사 및 계엄법 위반 죄등을 적용,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박 피고인은 80년 4월초부터 광주 사태 직전인 5월 16일까지 교 내외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동, 광주 사태를 유발케 한 혐의로 지난 4월 구속 기소돼 징역 10년을 구형 받았다.'

옥사…"나는 죽어도 좋아요"

박관현은 광주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5공의 날'이 한창 시퍼렇던 82년 10월 12일 새벽 2시 10분께 "전체 재소자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다면, 어머니!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1-2단 짜리 죽음'으로 처리했지만, 광주 시민들은 "큰 인물 하나 잃었다"는 등 귀엣말을 주고받으며 애석해 했다.

전남대생들은 "박관현 열사의 죽음은 광주의 죽음이다"고 외치며 1주일 남짓 '사인 규명' 교내 시위를 벌였는데, 이는 5.18이후 최초 . 최대 규모의 것이었다.

'열사'가 되어 망월동 5.18묘역에 이 땅의 '역사'로 잠들어 있는 박관현 - 그의 '사인'에 대한 강한 의문점과 함께 그에게 걸려 있는 '몇 가지 풍설'을 이제 와서야 풀어 본다는 것은 좀 쑥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10월 12일 그의 6주기를 맞아 되돌아보는 것도 '역사 속의 박관현'을 옳은 시각에서 보려는 작업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나팔 꽃씨가 그를 죽였는가?

박관현의 사인은 ▲자연사냐 ▲'나팔 꽃씨 죽음'이냐▲교도소 측의 폭력이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이냐로 요약된다. 당시 그의 죽음과 관련. ▲40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고문을 당해 죽었다.▲성욕 감퇴를 가져오는 나팔 꽃씨를 일부러 먹였다▲교도 소장이 구속되었다▲교도 소장이 죽었다▲5.18로 구속된 신영일과 최운용이 반죽음 상태에 있다는 등의 얘기들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가자, 국회는 10월 20일 밤 법 시위를 열고 배명인 법무장관을 불러 '사인'을 집궁 추궁했으나 답변은 "고문이나 단식 때문에 죽지 않았고 , 심근경색증에 의한 순환장애가 사인"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연사'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후 검찰에서도 부검 결과 '자연사'임이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외신들은 정부측 설명과 다른 내용으로 보도했다. AP통신은 '처우 개선과 도서 열람을 요구하다 폭행 당한 것이 사망의 간접 원인이 되었다'고 타전했고 , 로이터통신은 '40일간 단식하다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외신의 판단과 임낙평(31. '광주의 넋 박관현'의 저자)의 증언은 막연하나마 일치하는 점이 있음을 본다.

"7월중의 1차 단식 기간은 14일이었습니다. 이 투쟁의 덕택으로 도서 열독 금지규정이 다소 완화되기도 하고 ,밥 속에 들어 있는 나팔꽃 씨를 제거하는 한편 부식도 개선하겠다는 약속도 받아 냈었지요. 재소자 처우 개선, 정치범 차별 대우 금지, 기정도 사인 규명 등의 요구 사항을 내걸고 9월 2일부터 시작한 2차 단식투쟁으로 관현 형은 건강이 크게 악화됐는데, 교도소 측은 단 한번도 검진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요구 사항에 대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요."

임씨는 당시 5.18과 관련, 광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정상용씨(38. 평민당. 국회의원)의 증언을 토대로 다음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2차 단식투쟁이 시작된 날로부터 34일이 지난 10월 4일 관현 형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이른바 '특수 징벌 방'으로 끌려가 가족 접견. 운동. 목욕. 구매. 도서 열독 등을 할 수 없게 됐지요. '2개월 금치 정벌'을 당한 거지요"

'특수 징벌 방'은 '구조적인 고문 방'

'특수 징벌 방'이란 도대체 어떤 곳일까. 0.7평의 독방으로 광주교도소엔 3개가 있다. 벽이 탄력을 지닌 하얀 색의 특수 자재로 되어 있어 수감자가 머리를 부딪쳐도 상처가 나지 않으며, 시찰 구도 특수 유리를 사용 바깥과 내부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또 조그만 통을 통해 환기가 이루어지며 방 바깥에서 이를 조절할 수 있다. 수감자가 이 방에 들어가면 새하얀 벽면에 반사되는 불빛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다는 것인데, 이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구조적인 고문 방'인 셈이다.

광주 교도소 측은 80년 초 이 '특수 징벌 방'을 만든 뒤 소장 지휘 아래 실험 가동을 한 결과 정상인을 집어넣어도 혈압이 오르고 맥박 상태가 고르지 않다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박관현은 진공관과도 같은 이방에서도 단식을 결코 중지하지 않았다.

임낙평씨는 그의 저서 '광주의 넋…'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때 이미 그의 건강은 극도로 위험한 지경에 있었다. 그는 가끔식 엄습해 오는 현기증과 배의 통증을 느꼈으며, 의식이 혼미해지기도 했다. 의식이 혼미 해질 때는 환각이 일어나기도 해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할아버지의 다정한 음성, 누님과 동생들의 음성들이 번갈아 들려 왔고, 먼저 간 동지 윤상원. 박상준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임씨는 위와 같은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자연사'가 아니라고 결론을 맺는다.

"교도소 측의 이 같은 살인적인 폭력이 결국 관현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 아닙니까? 제도적 폭력이 관현 형을 죽인 거예요."

10월 10일, 교도소측은 박관현의 징벌을 해제했다.

이날 아침 그는 '특수 징벌방'을 나와 독방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건강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한다.

그가 전남대 부속 병원으로 이송된 것은 그날 저녁 7시께였다.

그날, 의사로서 박관 현과 맨 먼저 마주친 사람은 응급실 당직이었던 정창오씨(33)였다. 의사의 눈에 그의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저한 테로와 '나 박관현이요. 나 모르겠소'하고 묻더군요 . 고등학교 2년 선배여서 관현 형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살이 쪽 빠져 버리고 두부처럼 하얗게 변해 버린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니까 가슴 쪽이 답답하다고 하더군요."

당시 박관현을 치료했던 모 교수는 '심근경색증'에 대해 이런 설명을 해준다.

"심근경색증이란 관상동맥이 좁아지면서 혈액 공급이 잘 안돼 심장 근육이 죽어 가는 것을 말하는데, 고된 일을 하거나 심한 기합을 받게 되면 동맥경화가 유발되기도 합니다."

박관현의 장기 단식투쟁 및, 특수 징벌방 감금이 '고된 일'이나 '기합'에 해당된다면, 교도소 측의 잘못을 개선시키기 위해 단식투쟁을 했으므로 '심근경색증'의 유발책임은 원천적으로 교도소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 교수는 "박관현군의 사인에 대해 병원 측이 감춰 두고 있는 것은 없다"고 밝혔다.

다음은 '나팔꽃 씨'에 얽힌 의문을 한 겹씩 벗겨 보기로 하자

"나팔꽃 씨 먹으면 무력해진다" 제거 요구

나팔꽃 씨에 대한 의혹은 맨 처음 신영일씨(당시22세 전남대 졸업. 1988년 5월 사망)가 제기했다. 광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박관현과 함께 단식투쟁을 했던 그는, 일제하 독립 운동사인 '분노의 계절'이란 책을 읽던 중 일제가 복역 중인 독립 투사들에게 생체 실험을 하기 위해 나팔꽃 씨를 먹였던 대목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것이다. 나팔꽃 씨의 복용 횟수가 늘고 다량으로 복용하면 신체가 무력해지고 시들시들해진다는 것이었다.

밥 속에 드문드문 섞여 있는 '이물질'의 정체를 그는 이렇게 확인한 것이다.

그 당시 진주 교도소의 밥을 먹고 있었던 임낙평씨도 '이질물'에 대해 이런 기억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도 밥 속에 나팔꽃 씨가 듬성듬성 들어 있었어요. 미국에서 수입한 콩 속에 섞인 것이어서 전국적으로 그랬을 겁니다. 분노의 계절'에 적힌 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치떨리는 일입니까?"

이쯤에서 당시 법무장관의 해명을 다시 들어보자.

"광주 교도소에서 나팔꽃 씨가 주식에 섞인 것은, 농수산부가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콩 60kg들이 한 가마에 나팔꽃 씨가 5-8g(60알)정도 섞여 있었기 때문인데, 밥을 지을 때 전부 가려냈으나 1-2알이 섞이게 됐었다. 그러나 지난 6월20일 이후부터 교도소에서 체를 만들어 꽃씨를 완전히 제거한 후 급식하고 있다.

광주 교도소에서 소비하는 콩은 1일 7가마 반이고 끼니 당 2가마 반이어서 식사에 먹게 될 확률은 거의 없다. 나팔꽃 씨의 약리 작용은 한방에서 부증 제거, 이뇨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인체에는 무해하다."

그의 해명은 우선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밥을 지을 때 전부 가려냈으나 1-2알 섞이게 됐었다"는 대목과 "식사에 섞여 먹게 될 확률은 거의 없다"는 대목이 상충하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박관현이 밥 속에 섞였다는 나팔꽃 씨를 먹었건 안 먹었건 간에, 나팔꽃 씨는 '침묵의 살인자'일 것인가. 광주 원화당 한의원 김복해 씨에게 도움말을 들어본다.

그에 따르면 , 나팔꽃 씨를 약명으로는 견우자라고 하는데, 독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약용으로는 1회 0.4-1.5g정도의 소량 투여로 대소변을 원활하게 하여 수종(水腫). 각기(脚氣). 부종(浮腫)등의 치료에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량을 복용하거나 비위가 약한 사람, 피가 부족하고 대변이 무른 사람이 복용하게 되면 심한 탈수 현상과 함께 탈기가 되어 건강을 크게 해친다는 설명이다. 또 임산부가 복용하게 되면 유산(流産)이 되는 수도 있다 한다.

여기서 우리는 "나팔꽃 씨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법무장관의 해명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지만, 나팔꽃 씨로 인해 박관현이 죽음에까지 이르렀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박관현의 사인에 관해 결어 삼아, 설사 그가 심근경색증으로 숨졌다. 할지라도 이 증세를 유발한 것은, 그의 무리한 단식투쟁과 그에 따른 교도소 측의 '특수 징벌 방' 감금동 폭력이었다고 풀이하는 것이 어느 만큼은 타당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와 함께 "심근경색증이 급성일 경우 24시간에서 48시간 사이에 사망하는 것이 통례이고 , 박관현의 경우는 39시간만에 사망했다"는 법무장관의 해명도 위의 '결어'와 연관지어 파악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이제, 박관현에게 붙어 다니는 몇 가지 풍설 쪽으로 말머리를 돌려본다.

김대중씨의 자금 제공설은 사실인가

그는 정말 5.18직전 김대중씨로부터 자금을 받아 교내 외 시위를 주도했는가.

'80년의 봄' 시절, 전남대의 '운동권 라인'은 복적생 협의회 대표 정동년씨(당시 38세)→ 복적생 김상윤씨(당시 30세. 국문학과 3년)→ 총 학생 회장 박관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5.17조치와 함께 18일 자정 0시 20분께 광주시 산수동 광주 지법 원장 공관 윗집 셋방에서 4명의 수사관에 의해 연행된 정동년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연행되던 날 밤 보안 부대 지하실에 끌려가자 마자 상견례랍시고 무조건 얻어맞았습니다."

수사관들은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다"며 김대중씨와의 관계를 쏟아 내라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80년 5월 12일 동교동 김대중씨 집을 방문 광주 강연을 요청하는 총학생회의 입장을 전달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방객 접견에 바쁜 김씨와는 대면을 못하고 방명록에 서명만 남긴 채 돌아왔다는 것이다.

수사관들은 이 방명록을 내놓고 모의 내용과 자금 지원 요청 경위를 대라고 다그쳤다. 모의 사실을 부인하자 모진 고문을 가했다고 정씨는 밝혔다. 계속된 심문 끝에 그는 "예"하고 시인을 할 수밖에 도리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서에는 그가 김대중씨와 5월 5일 . 8일. 12일 세 차례 만났고, 김상현씨를 통해 8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5백 만원을 받아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적히고 말았다.

"5월 12일 동교동에 갔을 때 학생으로서는 나 혼자 갔습니다. 박관현이는 안 갔어요. 그 전날인 11일 나와 박관현등 몇 사람이 정읍 동학 제에 참석, 김대중 선생을 먼발치서 본적은 있습니다."

법정 기록에는 박관현의 죄상(?)대목이 이렇게 나와 있다. 물론 이것은 정동년 씨의 공소 사실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정동년은 …(중략)…전국적인 대규모 민중 봉기를 일으켜 현정부를 전북 시키고 김대중을 추대하여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자는 제의와 함께, 동목적 달성을 위한 자금 5백 만원을 요구. 김대중으로부터 3백 만원을 교부 받은 뒤, 전남대 학생 회의실에서 박관현에게 3백 만원 중 2백 80만원을 제공하면서 김대중 선생이 학생 투쟁을 위해 보내는 자금이니 보안을 유지하면서 잘 쓰도록 하라.'

이렇듯 박관현은 김대중. 정동년. 김상윤씨등 과 '한 묶음'이 되어 있다. 중심 고리가 풀리면 다 풀리게 망정인 한국 특유의 반역죄 ―. '광주특위'에 한 가닥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인가.

박관현 연행 설… 누가 퍼뜨린 것인가

5.18첫날인 18일 오전 9시 20분께 전남대 정문앞 거리. 학생들은 캠퍼스에 진주한 계엄군 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어떤 학생이 흥분한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전남대 근처에 사는데, 오늘 새벽 산책을 하다 박관현이가 연행되는 것을 봤어요. 검은 승용차에 실려 정문을 통해 후문 쪽으로 갔는데, ××사단 연병장에 감금돼 있는 모양 이예요."

"그래요? 총 학생회장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학생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어떤 학생'의 이 목격담은 사실과 다르다. 연행된 것이 아니라 이리 저리 검거망을 피해 그날 저녁 여수 돌산 도에 도착,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풍문이 '어떤 학생'에 의해 발설되었을까. 이전 5.18을 '사전 음모 설' 쪽으로 몰고 가려는 시각에서 보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학생들의 감정을 자극시키기 위해 '음모 집단'쪽이 만들어 내 퍼뜨린 고도의 전술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취재에 임했을 때 그 '어떤 학생' 의 이름자를 물어 보지 않은 것이 지금도 후회 스럽다. 그것은 '중대한 단서'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악몽의 10일'이 태풍으로 지나간 뒤 광주 사람들은 박관현의 행방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필시 죽었을 것이다.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했을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등등 추측도 가지각색이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 망명 설'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육하원칙을 갖추고 떠돌았다.

박관현은 5.18직후 돌산 섬을 떠나 대처인 서울로 갔다. 서울 피신 생활은 눈물나는 것이었다. 막노동. 리어카 장사로 연명했으며, 삼양동 산동네 시절의 그의 거처는 다락방이었다. 훗날 그는 요꼬 공장 생활도 했다.

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수배 중인 시국 사범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이 펼쳐졌다. 이 때 요꼬 공장 노동자들이 경찰에 신고, 그는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피신 시절 그의 가명은 '박건욱'이었다.

텁텁한 용모에 붙임성이 좋았던 박관현-. 그는 사귄 여자가 없었을까. 그를 잘 안다는 사람들에게 이 물음을 던지면 "눈에 뛸 만큼 친하게 지낸 여자는 없었다" 는 대답이 약속이나 한 듯 나온다. 말하자면 '열사' 박관현 에게 '사랑 이야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를 아내로 맞아들여야겠다는 얘기는 곧잘 했다고 한다.

29세- 박관현이 이 세상을 떠나간 나이다. 그 짧은 나이테로 한 시대의 마음을 그리 흔들어 놓은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